19. 추격
한편 추혼천녀는 차녀분양대법을 이용해 위중평의 병을 치료하는 데만 온 정신을 쏟아
자신의 안위에는 조금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녀와 위중평에겐 온 천하가 모두 그들의 적인 상황하에서 아무런 보호도 없이
치료를 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만약 고인이 어디에선가 그들을 엄호해 줌이 없었더라면 두 사람은 벌써 황천길로 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행공을 한 지 이틀이 지나자 위중평은 차츰 깨어나기 시작했다.
아직 흐린 의식 속에서도 가끔 청량한 기운이 전신의 각 혈맥을 통해 체내로 들어옴을
느끼는 동시에 한 줄기의 힘이 자기 체내의 건천화독을 빨아내는 것 같았다.
또 고열의 체온이 차츰 정상으로 회복되고 기운이 살아나면서 정신이 들자
그는 눈을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자기의 눈을 의심하였다.
너무나도 놀란 그는 갑자기 두 손을 짚고 일어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추혼천녀는 저만큼 내동댕이쳐져 입 가에서 선혈을 흘리며 기절을 하고 말았다.
전신의 공력을 다해 그를 치료한 후라 어찌 이런 거칠은 밀침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순간 추혼천녀는 경맥이 막히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통에 죽은 사람과 흡사하였다.
위중평은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어리둥절하여 벌떡 일어나 추혼천녀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뇌리를 스치는 하나의 영감이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구나! 내가 북고봉에서 삼흉과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는데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
그렇다면 이 여자가 나를 구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순간 그는 몹시 당황하여 급히 몸을 구부려 그녀를 살펴보았지만 추혼천녀는
한 가닥의 엷은 숨소리를 낼 뿐 사지는 벌써 싸늘하였으며 안색도 백짓장처럼 하얗고
입 가에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위중평은 격동하여 끌어안고 소리를 질렀다.
"이 죽일 놈 같으니라고. 정말 내가 죽일 놈이야. 추혼낭자! 내가 죽일 놈이야…"
바로 그 때 동굴 밖에서 홍영이 아른거리더니
안미옥이 얼굴 가득히 당황한 빛을 띠고 달려왔다.
두 사람이 완전히 나체인 채 위중평이 그녀를 끌어안고 울부짖고 있는 것을 보자
안미옥의 뇌리에 어떤 예감이 스쳐 얼굴을 붉히며 침을 뱉았다.
"퉤! 위중평!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난 정말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다. 정말… 정…"
말을 끝맺을 때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먹이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정말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위중평은 이런 오해를 멍청히 한참이나 있다가 소리를 쳤다.
"미옥! 미옥이! 다시 들아와 봐요."
추혼천녀를 내려 놓고 금방 쫓아가려고 하였으나 그 때에야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더니 옷을 입고는 달려 나갔으나 벌써 안미옥은 그림자도 찾을 길이 없었다.
"미옥이!"
하고 부르며 달려가려다가 문득 동굴 안의 추혼천녀가 생각에 미치자
그는 그녀를 그대로 두고 절대 갈 수 없음을 깨달아 깊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나로 인해 죽었다면 어차피 나도 따라갈 수밖에…'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마치 추혼천녀가 정말로 죽은 것 같은 착각에 그는
눈물을 흘리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추혼낭자, 편히 잠드시오.
나도 아버님의 원수를 갚는 날에는 꼭 당신의 무덤 앞에서 나의 잘못으로
당신을 죽게 한 죄를 치루겠소…"
소위 담에도 홈이 있고, 벽에도 귀가 있다고나 할까.
혼자서 지껄이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말을 듣고는,
"휴우… 정말… 가엾은…"
그러나 위중평은 마음이 착잡하고 심란해서 다른 곳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또 그녀는 틀림없이 자기의 생명을 건져준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참된 성품을 모르고 있었다.
위중평은 그녀에게 용호구환단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는 동굴 안을 배회하며
그녀를 구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동굴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발자국 소리를 들으니 틀림없이 동굴 쪽으로 걸어오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와 추혼천녀의 적들은 가는 곳마다 득실거리는데 이런 때 갑자기 수 명의 강적이 나타난다면
자신은 별로 겁나지 않지만 반항력도 없는 추혼천녀를 보살필 일이 걱정스러워 자옥선을
손에 쥐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이 무리들은 만불사의 승인과 적발교의 고수,
그리고 추적하던 천남(天南) 각파의 장문인들로 동굴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위중평이 별안간 동굴 안에서 뛰쳐 나오자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장백파의 위중평이 열염흉승의 삼양마화장에 다쳐 구호를 받아
사천곡 산중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벌써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뜻밖에도 위중평이
아주 건장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오히려 추혼천녀는 보이지 않음을 이상스럽게 여기는
까닭이었다.
위중평은 동굴 밖에 나와 그곳의 고수들을 쭉 훑어보고는 그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만불사와 적발교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만불사와 적발교의 고인들이 날 찾아온 것은 뻔한 일이고 다른 고현들께서
이곳에 온 이유는 모르겠군요."
말이 떨어지자 몸집이 적고 머리가 굉장히 큰 괴인이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노부는 괴수이인(怪首異人)이라 하며 천남무림을 대표하여 너에게 전할 말이 있다.
추혼마녀가 만약 동굴 안에 있다면 순순히 내놓아라.
그렇게 한다면 너는 손끝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흐… 흐… 노부가 어린 너를 괴롭힌다고 원망하지는 말아라."
위중평은 괴수이인이란 이름을 듣자 가슴이 섬뜩했다.
이 사람은 천남 일대에서 이름있는 무림의 맹주로서 무공은 묘강의 어느 이인에게 전수받아
잔혹하고 냉정하며 교만하기 짝이없는 인물이었다.
그러자 위중평은 한 판 피비린내나는 혈전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또 추혼천녀가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만큼 설사 피를 흘리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의 안전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사람 됨됨이 솔직담백하여 강호인들의 검은 속셈은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추혼천녀가 동굴에 있는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지금 몸에 중상을 입어 당신들과 싸울 수가 없으니
그녀가 완전히 회복한 후에 와서 결투하는 것이 좋겠소."
이 말은 장내의 모든 고수들에게 청심환을 한 알씩 먹이는 것과 똑같았다.
비록 위중평은 강호에 제법 이름있는 고수이긴 하지만 추혼천녀의 무공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었는데 그녀가 부상을 당하여 행동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자
그들은 이 기회에 아주 추혼천녀를 없애 버릴 마음이 용솟음치기 시작하였다.
괴수이인은 이상하게 생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노부에게 그럴 시간이 없다. 시원하게 말해서 속히 그녀를 내놓아라."
어조가 거칠을 뿐만 아니라 순전히 명령조였다.
위중평도 쌍눈썹을 치켜 세우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말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천남맹주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만한 인내심도 없는 사람과는 추혼천녀까지 나와 싸울 필요가 없다.
내가 몇 초 받아 주겠다."
괴수이인은 가소롭다는 듯 껄껄 웃으며 앞으로 나가서며 말했다.
"내가 너를 죽여 줄 테다. 날 원망하지는 말아라."
라고 외치고는 막 독문공부(獨問功夫)의 오독도화장(五毒桃花掌)을 펴려고 하였다.
별안간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적발교의 복수당주(福壽堂主) 혁연강(赫連剛)이
어느새 동굴쪽으로 뛰어나오며 침착하게 말했다.
"이인형! 잠깐만 멈추시오. 이런 대수롭지 않은 놈에게 어디 형님이 나서겠소.
본교와 저놈 사이에 아직 청산하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괴수이인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더니
코웃음만 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런 반응은 혁연강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화가 치밀은 그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위중평을 향해 말했다.
"듣기에 네놈이 말끝마다 우리에게 복수를 한다고 장담하였는데
오늘 밤 당주는 도대체 네가 얼마나 큰 실력이 있어 큰소리를 치는가 알아봐야겠다."
위중평은 적발교의 사람만 보면 더욱 치미는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지만
그가 큰소리를 지르며 일 장을 내놓자 무공이 홍모음효 보다 뒤떨어지지 않는
적발교의 복수당주는 위중평의 맹렬한 장력에 놀라 몸을 떨면서 잽싸게
일 장을 격출하여 결국 쌍방은 약속이나 한 듯 뒤로 삼 보 가량을 물러나갔다.
위중평은 많은 기력을 소비할 것을 꺼려 속전속결을 노리고 자옥선을 펴들며
구름같은 자색 연기를 내뿜어 혁연강에게 삼 초를 공격했다.
이 자선마군의 부채를 이용하는 무공은 정말 귀신마저 감탄할 정도의 위맹함을 지니고 있었다.
원수절간(猿愁絶間), 만인천봉(萬人千峰), 금성옥진(金聲玉振)의 삼 식이 혁연강을 어지럽게
만들자 그는 놀라 소리치며 급히 일 장 밖으로 물러났으나 옷소매가 한 자 정도나 찢어져 버렸다.
그는 여기서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악물고 허리춤에서 오색이 번쩍이는
문창필(文昌筆)을 한 자루 꺼냈다.
혁연강의 일 초가 실패하자 만불사의 흉승은 두 패로 갈리어 일제히 달려왔다.
한 패인 네 사람은 위중평을 공격하고 다른 한 패의 두 놈은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위중평은 이런 강적들과 대치된 상태에서도 눈으로 사방을 살피고 귀로는 팔방을 들으며
초음신법을 전개하여 마치 하늘을 나는 말같이 공격을 시도했고 사흉의 공격을 피하여
자옥선을 전광석화처럼 놀리며 동굴로 향하는 두 흉수를 향해 달렸다.
두 마디의 비명과 함깨 동굴 앞에는 두 구의 시체가 뒹굴었을 때 네 사람의 장력이 등 뒤에서
무서운 힘으로 밀려왔다.
그도 이것만은 피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피한다면 장풍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추혼천녀가 치명상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초조함 속에서도 급히 조화신공을 운공하여 왼팔을 뒤로 휘두르자 위력이 대단한
장풍이 달려드는 네 사람을 쓸어 버렸다.
꽈르릉, 하는 폭응이 터지면서 네 명의 고수들은 절망적인 비명을 지르며 입 가에
붉은 선혈을 토하고 내동댕이쳐졌다.
이런 무서운 장력을 본 장내의 고수들은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공력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가운데 홍포노인은 바로 점창삼노(點蒼三老) 중의 한 사람으로
홍포천관(紅袍天官) 사도단(司道丹)이었다.
이 위인은 그래도 정의파이긴 하지만 자부심이 몹시 강한 사람이었다.
위중평은 냉랭히 웃으며 말했다.
"난 당신들이 육파이든 팔파든 관계치 않소.
내가 여기에 살아 있는 한 추혼낭자는 털끝 하나 건드릴 생각은 마시오.
그리고 아무 저항력이 없는 사람을 납치한다는 것은 정도가 아니지 않소?"
홍포천관은 이 말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바로 그 때 큰 웃음 소리가 울려 나더니 혁연강이 무리를 이끌고 달려들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을 본 홍포천관은 몹시 못마땅해 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적발교의 공세가 다시 시작되어도 위중평은 계속 동굴 앞을 떠나지 않았다.
싸우다 힘에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추혼천녀의 안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최후의 결심을 하고 있었다. 팔대 일의 결투는 대결이 아니라 일대 교전이라고 해야 옳았다.
적발교도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 청년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찌르고 후려치고 때리는
자세가 마치 용의 꿈틀거림과 같았고, 매초마다 위중평의 급소를 향해 나갔다.
위중평이 적발교도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는 순간 한 인영이 번쩍하더니 번개처럼
동굴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만일 그 사람이 동굴 안으로 들어만 간다면 추혼천녀의 생명은 영영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이 때 장내에는 갑자기 용의 울부짖음 같은 한 여운이 들리더니 한 가닥의 은망(銀芒)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그 사람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벌써 시체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는데 알고 보니 위중평이 급한 김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휘과퇴일(揮戈退日)이란 신법으로 그 사람을 내리쳤던 것이다.
이제 왼손에는 부채를, 오른손에는 칼을 잡은 채 더욱 살기가 등등하여 미친 듯이
포위망 안에서 난무하자 일시에 은망이 폭사하고 혈화가 나르더니 두 항주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의 일 초가 크게 성공하자 신바람이 난 위중평은 장검을 쉴새없이 휘둘러 종횡비합,
일출강천(日出江天), 신오고랑(神五鼓浪) 삼 초를 내놓자 그 위력이야말로 정말 무섭기
그지없었다.
장내에 또다시 비명 소리가 나자 일곱 명의 향주는 이제 세 명밖에 남지 않았다.
간담이 서늘해진 그들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혁연강은 난생 처음 이런 신기한 검법을 보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삼 초를 사용했지만
이미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는 벌써 신분이나 지위를 망각한채 문창필을 이 초나 공격하고서는 날아가듯이
산 밑으로 도망갔다.
적발교도들이 모두 물러나자 위중평은 그제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무흔검(無痕劍)을
칼집에 넣고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때는 이미 해가 서산에 걸쳐 있었고 산봉우리를 황혼이 감싸고 있었고 밤바람으로
산 속의 나무들이 삐끄덕거리는 소리를 울려내며 소슬바람은 가을의 정감을 한층 더해 주었다.
괴수이인은 홀로 야릇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이 자식아! 날도 저문데 빨리 결정을 지어라. 만약 추혼천녀를 내놓지 않는다면
정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위중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이 사람들과 계속 시간을 끌다가는 추혼천녀가 그들에게 납치당하지 않는다 해도
경맥이 막혀 있어 고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큰일이 아닌가?'
이 점을 생각하고는 급히 말했다.
"천남각파의 사람들은 들으시오.
난 지금 당신들과 입씨름할 시간이 없소.
정녕 싸우겠다면 얼마든지 몇 사람이고 상대해 줄 테니
제발 추혼천녀는 다시 들먹거리지 마시오."
괴수이인은 커다란 머리를 흔들더니
돌연 뛰어들어 위중평의 손에 든 자옥선을 훔치려 달려들었다.
그 행동이 상당히 빨랐으나 위중평은 여유있게 웃으며 팔을 뒤로 하자
마치 자옥선이 나는 것처럼 괴수이인의 곡지혈(曲地穴)을 내리쳤다.
동시에 발을 움직여 경도량안을 써서 측면에 있는 찬심(瓚心)과 기해(氣海)
두 대혈을 재차 찔러갔다.
괴수이인의 행동은 괴이하고 난폭해서 일격이 적중되지 않자
몸을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리더니
오독도화장을 써서 위중평의 공격을 피하며 좌측으로 공격하였다.
장경을 토하자 곧장 복숭아빛의 연기가 피어 올랐는데
그 연기는 구토가 심하게 일어나는 악취였으며 태풍처럼 땅에서 하늘로 피어 올랐다.
위중평은 수많은 격투 경력으로 인해 견식이 크게 늘었기에 어떤 장풍인지
알 수가 없을 때는 섣불리 공격하지 않는 것이 상수라는 생각에 재빨리 자옥선을
활짝 펴서 금성옥진(金聲玉振) 일식을 내놓아 싸늘한 바람으로 금방 광풍을 저지하였다.
두 사람은 단 일 초에 금장, 장법 그리고 병기 등을 모두 사용해 공격하는 것이
어찌나 빠른지 시작과 끝이 분명치 않을 정도였다.
이 때 괴수이인은 오독도화장을 전개해 광풍을 동반하여 공격해 왔고 위중평은
부채와 칼로 일시에 칠 초를 내놓았다.
그는 회삼과의 도움과 추혼천녀가 본신의 순음지기로 자기의 진기를 중화시켜 준
덕분으로 공력이 좀전보다 훨씬 나아졌기에 괴수이인이 비록 천남무림의
우두머리라고 하지만 그의 적수는 되지 못하자 급한 김에 그는 계속해서
큰소리만 지르고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위중평이 있는 힘을 다해 괴수이인의 심장을 향해 공격하고 있을 때 장내에
낯 모를 인영이 번쩍하더니 홍포천관 사도단과 같이 온 울장배교수
독각신서(獨角神鼠)와 짝을 지어 번개같이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위중평은 너무 급하여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버럭 큰소리를 치고는 이 장으로
괴수이인을 물리치고 자옥선으론 자염을 그리며 몸을 마치 화살처럼 튕겨 앞으로 내달았다.
그런데 이변이 생겨났다.
세 사람이 거의 같은 시각에 동굴에 도착하였을 때 사람의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야릇한
웃음을 날리며 추혼천녀가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이렇게 갑작스레 나타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위중평은 일 장을 발한 후 다시 전진하지 못하고 좀전에 소비하였던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하려 하였으나 이 무리들이 그러한 상황을 알아차리고 기회를 놓칠세라
농담조로 이야기했다.
"젊은이!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어서 추혼마녀를 순순히 내놓게."
이 때 홍포천관이나 독각신서만이 놀란 것이 아니라
위중평도 너무 의아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추혼낭자! 어찌 된 일이오!"
추혼천녀는 몸을 돌려 밝은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이 웃음은 애교가 짙은 것이었다.
"고마웠어요.
이건 제 일이니 제가 처리하겠어요.
이제 좀 쉬시지요."
위중평은 이렇게 아름답고 천진한 웃음이 평소에 살인을 하고서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추혼마녀에게도 있었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위중평은 그녀의 말대로 조금 쉬기로 하였다.
이건 완전히 그녀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추혼천녀의 무공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추혼천녀는 위중평이 자기의 말에 십분 순종하는 것 같아 마음이 기뻐 그녀의 볼에는
두 개의 보조개가 깊숙이 파였다.
이런 현상은 그녀가 강호에 나온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몇몇 남아 있던 천남무림의 패주들도 멍청히 그들 사이에 오가는 사랑의 교류를 구경할 뿐
누구 하나 손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추혼천녀의 여성 특유의 음성이 장내의 적막을 깨뜨렸다.
"당신네들! 청남육파가 나를 찾아 싸우러 왔다면서요?
그럼 시원하게 모두 함께 덤벼보세요. 나는 시간을 오래 끌지 않겠어요."
위중평의 기억으론 추혼천녀가 벌써 이궁옥탄의 절기를 터득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실제 싸우는 것을 본 적은 없었는데 이렇듯 그녀가 막 나오자마자
여섯 파의 고수들에게 도전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여섯 사람 중의 세 사람의 무공은 그도 이미 보았으나 그 정도가 상당하였다.
자기의 입장으론 두 사람 이상을 상대한다면 이길 자신이 없는데 추혼천녀가
여섯을 한꺼번에 상대하다 만약 실수라도 한다면 어쩌나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추혼천녀가 이렇게 나오자 육파의 고수들은 성질이 치솟아 대뜸 쌍장을 휘두르며
그녀를 포위할 자세를 취했다.
추혼천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당신네 천남무림인은 물에 빠진 개에게만 매질을 할 줄 아는 것 같군요.
사람이 거동도 못할 때 침입해 왔다가 지금에 와서는 두려워 나서지를 못하고 있으니
무슨 영웅들인가요? 하하하… 차라리 당신들을 강아지라고 하는 것이 낫겠군."
과연 이 한 마디의 말은 효과가 대단했다.
괴수이인의 헝클어진 머리가 일제히 곤두서더니 커다란 머리를 흔들면서 오독도화장을 내놓았다.
이 오독도화장은 묘강에 있는 특유한 것으로 그 위력은 무섭기 그지없는 것으로 한 번 격출했다
하면 그날 안으로 온몸이 모두 녹아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괴수이인이 발동을 걸자 폭갈이 연신 터지더니 홍포천관과 독각신서 등 다섯 사람도 일제히
출수했다.
순간 각기 다른 여섯 개의 장풍이 사방에서 공격해 왔다.
위중평은 손에 자옥선을 쥐고 서서 그녀 때문에 몸에 진땀을 빼고 있었다.
바로 여섯 사람의 장풍이 장내를 진동할 때 홀연 홍영이 번득하더니
추혼천녀는 벌써 위기일발의 포위망을 헤치고 뛰어나왔다.
꽈르릉, 하는 폭음 소리와 함께 발 밑의 모래와 작은 돌멩이가 날고
땅에는 여섯 개의 커다란 웅덩이가 파졌다.
여섯 명은 장력이 적중되지 않고 보법마저 틀리자 다시 공격을 해왔다.
추혼천녀는 위중평과 나눈 시선으로 기분이 좋아 약간 성질을 늦추었으나
몇 초의 공격을 당하고 나자 차차 잠재해 있던 냉혹함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해
돌연 차갑기 비할 데 없는 웃음 소리가 장내를 휩쓸었다.
이 웃음 소리에 따라 장내에는 음풍이 돌더니 추혼천녀는 무학 중의 삼제유광을 사용하였다.
괴수이인과 홍포천관 그리고 독각신서 세 사람의 무공과 견식은 모두 한 수가 높아서
돌연 음풍이 나오자 급히 몸을 날려 후퇴하였지만 나머지 삼파의 장문은
그런 것도 모르고 덤볐다가 갑자기 음랭한 기운이 몸을 타고 올라오자
처음엔 아주 시원한 기분이었으나 그들이 시원하다고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몸이 식어지더니 피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풀썩!
세 사람은 동시에 넘어지더니 몸에 경련을 일으키다가 잠시 후엔 싸늘한 시체로 변하였다.
괴수이인과 홍포천관 등은 비록 무림에 발을 들여 놓은 지가 사십 년이 넘는 노강호인이라
하지만 이런 방법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너무나 놀란 나머지 홀연 몸을 돌려 산 밑을
향해 도망해 버렸다.
괴수이인 등이 도망하는 것을 본 위중평은 재빨리 세 사람의 시체 앞으로 나가서
그들을 살펴보았는데 놀랍게도 청량선에서 보았던 여덟 명의 시체와 아주 흡사하였다.
순간 그는 궁금했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살며시 한숨을 내뿜으며 말했다.
"이렇게 유공의 공력이 불가사의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가 몸을 일으켜 추혼천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멍하니 하늘을 나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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