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18. 동굴 안의 남녀

오늘의 쉼터 2014. 6. 20. 16:12

18. 동굴 안의 남녀

 

 

위중평이 열염흉승의 삼양마화장(三陽魔火掌)을 얻어맞고 기절하여 목숨이 위급할 때

돌연 누군가가 그를 겨드랑이에 끼고 한 시진 여를 달려 아주 조용한 산곡에 도착하자

위중평을 동굴로 인도하여 내려 놓았다.

이 때 위중평은 화삼과(化參菓)를 복용하고 검은색 거북이도 먹어서 본신은 단기(丹氣)로

융합이 되었지만 설연(雪蓮)을 복용치 못했기 때문에 체내의 양기만 더욱 왕성하여

전신이 붉은 새우등처럼 벌겋게 달아 올랐고, 살갗은 만지기도 어려울 정도로 뜨거웠다.

상처도 일종 삼양사화(三陽邪火)라 몸 안팎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어서 내부의 열이

더욱 심하였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근기(根基)가 하도 심후하기 때문에 이토록 높은 열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환자를 구해준 사람은 독자들도 낯설지 않은 위중평을 일편단심으로 간호했던

추혼천려인 것이다.

그 마녀가 그날 밤 묘지에서 그와 만난 후 온갖 사랑의 시달림을 참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겠다.

예전에 추혼천녀는 남자들을 몹시 미워할 뿐만 아니라

무림 인물들을 모두 적대시해 왔기 때문에 그녀를 만난 무림인은 무사히

그 자리를 뜬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추혼천녀는 악랄하고 냉혹하였으며 인정이 메마른 여자여서 이 세상에 그의 친구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으나 위중평은 그녀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진지하게 했고

그녀에 얼어붙은 감정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깊은 인상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추혼천녀는 연약한 여자로 전혀 무감각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피치 못할 개인적인 환경의 결과였다.

그날 밤 위중평은 그녀의 선량한 천성을 일깨워 주었고 또 처음으로 이 세상은

적과 미움만이 아닌 달큼하고도 짜릿한 우정과 애정이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 주었다.

 생애 처음으로 자기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청년을 잊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날 밤 그 청년의 처지와 신세를 듣고 위중평의 신변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는 일이

없었으며 어느샌가 그녀의 의식 속에는 위중평의 안위가 자신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동시에 그녀는 아주 영특한 여자였기에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 청년의 의지와

고매한 성격을 파악하고는 될 수 있는 한 그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으려고

여간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 위중평이 삼흉에게 도전을 할 때도 혼자서만 가슴을 조렸을 뿐 나서서

도와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위중평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자 신속무비하게 그를 데리고 동굴로 돌아왔던 것이다.

생전 걱정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자라온 이 마녀도 위중평이 목숨이 위태하다는 사실을 알자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힘써 옥탑의 각층 무공에서 그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에 동분서주하였는데

머리를 숙인 채 한참이나 궁리하다 생각한 방법은 옥녀신경(玉女神經) 중의

차녀분양공(叉女分陽功)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녀는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차녀분양공은 양측이 살갗을 맞대고 꼭 끼어 안아야만 자신의 순음지기가 상대방의

체내로 들어가 타오르는 건천화독을 중화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아직 순박하고 티없는

처녀의 몸으로 어찌 그런 망측한 일을 할 수 있는가?

몇 번인가 주저하다가 이를 악물고 결과야 어떻든 실행하기로 작정하였는데

이 때 그녀는 두 갈래의 길을 생각하였다.

첫째 만약 위중평이 은혜를 갚는다 하여 부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더 이상 마다할

하등의 이유가 없고, 또 위중평이 그녀에게 무심하게 한다면 할 수 없이

두 번째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 길이란 아주 무서운 방법이었다.

그것은 위중평이 다시 죽는다 해도 구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주 빠른 동작으로 자기의 옷을 전부 벗고 다음엔 위중평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감각을 가장하려고 했지만 가슴이 고동치고 파리한 두 손은 쉬지 않고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남자의 피부에 닿자 본능적인 여심은

그녀의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굶주린 욕심을 채우기라도 하듯 그의 어깨와 양 팔을 매만지자

자신도 모르게 억제할 수 없는 흥분에 빠지기 시작했으나 다행히도 한 차례의

차가운 바람이 스치자 전기에 통했던 사람처럼 몸서리를 치며 제정신을 가다듬고

위중평의 혈맥을 누르더니 아주 재치있는 솜씨로 그의 옷을 모두 벗겼다.

지금의 위중평은 벌써 혼미상태에 빠져 있어 인사불성이므로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옷을 다 벗긴 그녀는 마치 뱀처럼 그를 꼭 껴안았다.

마치 엿가락처럼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때를 같이하여 그녀의 앵두같은 입술이 위중평의 입술을 덮쳤다.

이런 상황을 제삼자가 본다면 이건 틀림없이 탐남탕녀가

막 정사에 돌입하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 이것은 몹시 위험한 모험이었다.

추혼천녀는 지금 차녀분양법으로 자신의 순음지기를 상대의 체내로 주입시켜

위중평의 체내에 있는 화독을 중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녀에게 약간의 실수라도 있다면 그녀는 즉시 공력을 상실하여 죽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남녀 어느 하나라도 성(性)적인 충동을 가누지 못한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과오를 저지르게 되는 것인데 추혼천녀는

위중평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결과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고 더욱 그럴 만한

이유는 위중평의 상세로 보아 이런 모험적인 방법이 아니면 결코 그를 살려낼 수 없는

심각함이었다.

추혼천녀의 행공이 가장 절정에 이르렀을 때 돌연 인영이 번쩍하더니

동굴 밖에서 한 쌍의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은색전의(銀色箭衣)를 입었으며 얼굴은 창백한 데다가

미간에 음흉한 빛이 은은했고 여자는 검은색 가벼운 차림에

등에는 비파를 메고 있었는데 행동이 음탕하고 다정함이 없었다.

두 사람은 동굴 입구에 서더니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분명히 추혼천녀가 장백파의 그놈을 업고 이리로 오는 것을 보았는데 어째 안 보이지요?"

 

남자가 쌀쌀한 웃음을 날렸다.

 

"장백파 그놈은 이미 중상을 입었으니

그 마녀가 틀림없이 어느 한적한 곳을 찾아 치료하고 있을 거요.

이 때를 틈타 그를 처치하고 자옥선을 뺏지 못한다면

우리 천독문은 이제 다시 강호에 나다니지 못할 거요."

 

말을 하면서도 음탕한 두 눈은 사방을 예리하게 살펴보았다.

돌연 그는 고개를 치켜들더니

극히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미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 하… 하, 이놈은 죽는 마당에도 마음껏 즐기고 싶은가 보구나.

사매! 저것 좀 보시오.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말이오. 하하하…"

 

여자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다가 돌연 양 볼을 빨갛게 물들이더니

그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기분이 아주 좋은가 보군요."

 

남자는 한바탕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으며 귓속말로 지껄였다.

 

"우리가 저들을 처치하고 난 후,

이 동굴을 빌려 자축하는 게 어떻겠소"

 

여자는 샐쭉해지더니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아주 기분 내키는 대로군요."

 

그녀는 손을 들어 등에 있는 비파를 내려 쥐더니

앞장서서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 한 쌍의 남녀는 모두 천독성모의 문하였는데

여자는 위중 평이 항주 도로변에서 만난 독랑자이고,

남자는 인면갈 오행(人面蝎吳行)이라고 불리우는데

두 사람은 표면상 사형매인 것 같지만

실제의 관계는 이미 정상을 벗어난 상태였다.

인면갈 오행은 독랑자가 동굴 입구로 뛰어가는 것을 보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욕에 불타 있는 두 사람을 처치하기란 누워서 떡먹기보다 더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뜻밖에 독랑자가 막 동굴 입구에 도달하자

갑자기 무엇에 부딪힌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튕겨 나왔다.

동시에 추혼천녀와 위중평의 신형도 피어 오르는 안개 속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졸지에 당한 일이라 인면갈 오행은 급히 앞으로 나아가서 독랑자를 부축했다.

 

"무엇 때문이오?"

 

독랑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정말 이상해요.

제가 막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가닥의 거센 바람이 불어와 나를 되돌려 세웠어요."

 

인면갈 오행은 크게 소리쳤다.

 

"말하지 않아도 그건 추혼천녀가 꾸민 수작일 거요. 어디 내가 한 번 가보지."

 

이어 한 손으로는 가슴을 가리고 또 한 손으론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위세는 독랑자의 그것보다 훨씬 맹렬했다.

몸이 막 동굴 입구에 들어섰을 때 돌연 차가운 바람이 불더니

그를 큰 돌멩이로 내리치는 듯싶었다.

그는 쌍장을 밖으로 내밀어 일 장을 격출했다.

하나 그가 힘을 써서 저항을 한데다 안에서 밀려오는 압력은

점차 증가하여 가슴이 뭉클해지더니 입에서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바로 이 때 저편에서 쏜살같이 달려오는 팔구 명의 고수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적발교주의 흑삼수사가 여덟 명의 고수를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독랑자는 순간 머리칼이 쭈삣하며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급하게 달려 오는지 의심스러웠다.

 

"우소교주(牛少敎主)!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녀는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위중평이 강호에 나와 말끝마다 복수를 이야기하자 적발교(赤髮敎)와 만불사(萬佛寺)가

이미 크게 진동하였고 요동에서의 묘지에 있었던 참극은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하여

적발교와 만불사는 현재 그를 유일한 강적이라 생각하고 문하의 모든 고수들을 집합시켜

사방으로 수색을 펴고 있는 참이었다.

위중평이 가는 곳마다 눈이 많으니 삼흉(三兇)과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어느새 온 천하에 알려지고 각방의 고수들이 일제히 이곳을 향해 추적해 왔던 것이다.

흑심수사는 독랑자를 노려보며 오만스럽게 웃었다.

 

"독랑자! 어떤 사람과 여기서 다투고 있는 것이오?"

 

독랑자는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했다.

 

'그렇지. 위가 놈과 적발교가 원한이 있으니 그들 보고 한 번 해보라고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는 미소진 얼굴로 말했다.

 

"장백파의 위가 놈이 어느 알지 못한 여자와 이 동굴 안에서…"

 

그녀는 여간 교태스러운 여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추혼천녀를 들먹거렸다간 이 자들이 틀림없이 겁에 질려 달아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심수사가 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럼 틀림없이 장산도(長山島)의 그 계집일 것이다.

어서 들어가 눈요기나 좀 해야지."

 

운괴쌍괴(雲怪雙怪) 중의 제 이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잠깐만! 그놈의 무공이 만만치 않으니 조심하시오."

 

하면서 시선을 인면갈 오행과 독랑자에게 돌렸다.

그는 몹시 음흉하고 간사하여 단 한 번의 살핌으로 인면갈 오행이

내상을 입고 있음을 간파해 냈다.

인면갈 오행의 무공은 흑심수사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는데

그가 부상을 입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생각이 되어 가로막고 얘기한 것이었다.

흑심수사는 성격이 몹시 차분한 사람이라 위중평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다 안미옥이 그에게 패한 사실을 상기하곤 크게 웃었다.

 

"한당주, 무얼 그렇게 깊이 생각하시오?

위가 놈은 절대 내 손아귀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할 것이오."

 

갑자기 쌍장을 치켜 들고는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그가 막 동굴에 도착하자 안에서 또다시 차갑고 세찬 바람이 불어와 그를 밀어내자

이 바람이 수상하다고 생각하여 발을 멈추고 밀리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위를 살펴보니 한 군데의 상처도 없었으나

너무나 놀란 나머지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됐으며 얼굴 가득히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운괴쌍괴는 이미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쌍쌍이 서로 마주보며 손을 뻗치자

같이 온 여섯 당주들도 일제히 동굴 입구로 달려왔다.

동시에 손을 내밀자 여덟 명의 장풍이 하나로 뭉쳐 마치 산을 허물 듯한 거대한 광풍이

동굴 안으로 휘몰아쳐 들어갔다.

이런 비할 데 없는 장풍이 적중만 된다면 설사 동굴 안에서 피했다 해도 이 동굴은

필시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한 차례 강풍이 휘몰아치는가 싶더니 돌연 여덟 명의 고수들이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칠 척 정도나 물러났다.

이중 공력이 비교적 낮은 다섯 명은 벌써 입에서 선혈을 토하며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다시 동굴 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텅빈 동굴 안에는 여전히 추혼천녀와 위중평이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을 뿐 다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운괴쌍괴와 흑심수사는 한 곳에 모여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바로 이 때, 저멀리서 커다란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무엇인가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채어가듯 장내로 내려 왔다.

이 사람이 도착하자 인면갈 오행과 독낭자는 기쁨을 가누지 못한 채 앞으로

달려가 인사를 올렸는데 그 사람은 태도가 극히 오만불손하고 두 눈에는

시퍼런 영기가 번쩍거렸다.

그는 한참이나 적발교의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독낭자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여기서 무얼 하는 사람인가?"

 

독낭자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추혼천녀와 부상을 당한 위중평이 이 암중에 숨어서 장력을 쓰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야릇한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쓸데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어째서 그들을 잡지 못하는 거냐?

꼭 이 질세산인이 나서야겠느냐?"

 

독낭자는 고개를 숙인 채 당황한 듯 말했다.

 

"제자들이 무능하여 그를 잡을 수가…"

 

질세산인은 코웃음을 치며 널따란 옷소매를 털더니 벌써 동굴을 향해 날아갔다.

사람이 아직 나가기도 전에 한 가닥의 맹렬무비한 장력이 폭풍같은 기세로 휘몰아쳤다.

이 질세상인은 천독성모의 사형으로써 천독문 중에서 제일가는 고수로 꼽혔다.

지금은 나이가 이미 일흔을 넘었지만 사람됨이 정말 오만하면서도 폭이 넓고

그 무공 또한 조예가 깊었다.

그의 일 장은 상대가 죽지 않는다 해도 큰 부상은 입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뜻밖에도 그렇게도 강한 바람이 동굴 안에 이르자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어 질세산인의 몸뚱이가 마치 고무풍선처럼 역풍에 밀려 나왔다.

그는 난생 처음 이런 참패를 당하자 노기충천하여 또 일 장을 격출했다.

이 일 장이야말로 그가 필생의 공력을 다해 내놓는 것이라 좀전의 것보다

더욱 맹렬하고 빨랐다.

장풍의 위력에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심한 진동을 하였다.

질세산인은 별안간 독사를 본 것처럼 뒤로 물러나더니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이어 두 손에서 시퍼런 빛을 내면서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별안간 한 차례의 껄껄거리는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생김새가 아주 능청스럽게 생긴 노화상이 유령처럼 질세산인의 옆으로 내려왔다.

노화상은 원래 황교(黃敎) 중의 한 라마(喇麻)인데 후에 이상한 기회를 얻어

괴이한 공력을 연마하여 서장에 가서 고원 일파를 설립하고 고원삼흉(高原三兇)을 제자로 삼았다.

이 노화상은 이름이 화상이지 실제로는 몹시 잔악하여 건드리기가 무서웠다.

삼십여 년 전에 강호인들이 골치를 썩였던 몽장일괴(蒙葬一怪)일파가 바로 이 무리들인 것이다.

십여 년 전에 누군가가 화상이 죽었다고 소문을 퍼뜨렸는데 지금 이 시각에 나타나니

질세산인은 일생을 안하무인격으로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가슴이 섬뜩함을 금치 못하였다.

 

"대화상 불가(佛家)께서 여기에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몽장일괴는 삼각눈이 뒤집히더니 또 한 차례 껄껄 웃었다.

 

"듣기에 장백파의 위가라는 놈이 날뛴다기에 한 번 만나보러 왔소."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쥐만한 놈이 무엇이 대단하다고 대화상께서 나서십니까?

지금 걱정되는 것은 옥탑단장인(玉塔斷腸人)과 추혼천녀의 사도 둘입니다.

이 두 사람은 벌써 옥탑의 무공을 터득하여 강호에는 무림인과 적대시하고

이미 장백파의 그 위가라는 놈도 장담을 하고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무공으론 옥탑단장인이나 추혼천녀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맘껏 노화상을 추켜 세우고 선동까지 하였다.

질세산인의 말이 떨어지자 독낭자는 코먹은 소리로 지껄였다.

 

"위중평 그놈의 무공은 이미 자선마군의 진전을 받아 상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최근에 그 혼자서 만불사의 세 분 책임자와 격투를 하여 그도 중상을 입었지만

세 분의 상처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몽장일괴는 마치 흐르는 유성처럼

그의 팔목을 잡고 무섭도록 다그쳐 물었다.

 

"너의 말이 모두 사실이냐?"

 

독낭자는 흥이 나서 재미있게 얘기하고 있는데 몽장노괴가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팔목에 마치 쇠고랑을 찬 듯 고통스러움에 실성을 하며 소리쳤다.

 

"아… 앗!"

 

몽장일괴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 거칠었다고 생각했는지 음흉하게 웃으며 손을 놓았다.

독낭자는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제가 한 말은 전부가 다 사실입니다.

위가놈이 부상을 입고 있을 때 추혼천녀가 구해 주어

지금 저 동굴 안에서 운공을 하고 있습니다."

 

몽장일괴의 시선은 어찌나 예리한지 멀찌감치서도 내상을 입고 땅에 앉아 있는

적발교의 몇몇 사람이 보일 정도였으며 질세산인이 내상을 억지로 참으며

그와 얘기하는 것도 그의 괴안은 속이지 못하였다.

그는 이 동굴 안에 아주 무서운 인물이 있다고 짐작하였다.

또 그는 위중평이 벌써 자선마군의 공력을 터득했다는 얘기를 듣고 더욱 간담이 서늘하였다.

당시 강호에 이름을 떨칠 때 자선마군은 역시 같은 세대의 인물이었다.

비록 겨뤄보지는 않았지만 속으론 자신이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전인이 나타나 강호에 다니니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도 세상에 건재한단 말이었고

그렇다면 그도 위중평에게 크나큰 고려가 없어서는 아니되었다.

그는 원래 강호엔 돌아다니지 않았는데 삼흉이 제 삼 제자를 시켜 보고하기를

만불사가 요 근래에 와서 세 방면으로 장백파의 공격을 받는다고 했다.

그 중에는 위중평과 추혼천녀, 그리고 자선마군이라는 것이다.

앞의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단 이 자선마군은 그를 깜짝 놀라게 하여

즉시 만불사로 달려가 노화상의 얘기를 들어 보니

이미 삼흉이 남쪽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내려왔는데

오늘날 삼흉이 상처를 입었다는 소리를 듣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냉큼 동굴 앞으로 다가가서 크게 소리쳤다.

 

"안에 어느 놈이 있길래 이렇게 비열하게 구느냐? 어서 나오지 못할까?"

 

그러나 동굴 안은 그저 조용할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쌍의 남녀가 여전히 부등켜 안은 채 있는 것을 보자

그는 화가 치밀어 커다란 소매를 펄럭거리며 한 가닥 장력을 발출했다.

몽장일괴의 공력은 질세산인의 그것보다 수가 높았기 때문에

장력은 자그만치 이천 근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장력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큰 돌이 바닷 속으로 빠져들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노괴는 섬뜩함을 느끼고 별안간 쌍장을 일제히 내밀었다.

차갑고 무거운 두 장풍이 마치 성난 파도처럼 귀를 울리며

곧장 동굴 안으로 휩쓸어 갔다.

몽장일괴의 이러한 음양장력은 흑심수사와 독낭자가 놀라는 것은

그만 두고라도 공력이 상당한 질세산인도 못내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제 아무리 한 쌍의 남녀가 날개가 달려 날아간다고 하여도

하늘 끝까지는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 때 동굴 안으로부터 가물가물한 자주빛 안개같은 것이 나오더니

공격해 오는 장풍과 맞부딪쳤다.

 

"펑! 펑!"

 

하고 연방 폭음이 나더니 몽장일괴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귀 신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내고 졸지에 허공으로 날더니 두 번씩이나 빙글빙글 돌고는 어느 사이인지

종적마저 찾을 길이 없게 사라졌다. 정말 주고받음이 신출귀몰하기만 하여 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틀림없이 비참하게 당하고 도망쳤음이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큰소리 치던 사람이 그렇게 비참하게 도주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몽장일괴가 사라진 후 질세산인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후배들을 앞에 두고 도망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는 형편이기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동굴을 바라보며 멍청히 서 있었다.

독낭자는 눈치가 빨라서 사백(師伯)의 이런 광경을 보고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앞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사백님! 우리는 돌아갑시다. 오늘은 잠시 이놈들을 그대로 두고 다음에 꼭 처치하기로 합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고 바라던 것이었으나 질세산인은 체면을 생각한 듯

잠시 생각해 보는 척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좋아! 너희들 생각에 따르기로 하지."

 

이어 커다란 옷소매를 펄럭거리며 독낭자와 인면 갈오행을 데리고 마치 날아갈 듯

왔던 길을 재촉했고 적발교도들도 더 이상 있어 봤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것 같아 운괴쌍괴가 흑심수사에게 힘없이 말했다.

 

"저들이 갔으니 우리도 갑시다."

 

흑심수사도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상당한 사람들을 부축하여 현장을 떠났다.

 

 

 

이어서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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