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20. 심산암자(深山庵子)

오늘의 쉼터 2014. 6. 20. 16:15

20. 심산암자(深山庵子)

 

 

추혼천녀는 벌써 조금 전에 그들과 싸워던 일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는 다만 땅에 쓰러져 있는

시체와 흥건한 핏자국을 보며 얼마 전의 싸움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알 뿐이었다.

그녀는 위중평이 친구를 위해 위험을 불사하는 숭고한 의리에 크게 감동하여 이제까지의

인생관이 크게 전환하였다.

그 전에 그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엔 오직 원한과 적개심이 존재할 뿐 진정한 애정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했기에 모든 사람을 적대시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현재의 그녀는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알았음에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추혼천녀는 고개를 돌려 위중평을 바라보았다.

마침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무엇에 놀란 듯 뛰어와 위중평의 품 속으로 달려 들었다.

그녀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분간키 어려운 표정으로 울먹이며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위중평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녀의 등을 흔들며 급히 물었다.

 

"추혼낭자! 왜 그러시오?"

 

그녀는 대답대신 위중평을 힘있게 껴안더니 품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었다.

남녀 사이의 일이란 이렇게 미묘한 것이어서 대영웅이라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정말 무기력할 정도로 약해지는 법이다.

그녀가 비록 일신에 놀랄 만한 무공을 가졌다 하지만 그건 외부적인 조건일 뿐

그녀는 분명한 여자였고 더욱이 의지할 데 없는 가엷은 여자이었기에

한 번 애정 속에 빠져 들면 무쇠로 만든 마음이라 할지라도 녹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혈혈단신으로 강호의 그 많은 무리들의 추격을 받을 때는 그까짓 것이 뭐냐고 하였지만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니 주체할 수 없는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위중평의 품 속에 쓰러져 한참이나 서러움을 풀어 버리자

얼마간 마음의 진정을 찾은 것 같았다.

이 때 위중평은 그녀의 고운 머리칼을 쓸어 내리며 뭔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성숙한 한 남성의 목소리에서 이제까지 숨겨졌던 감정이 술술 풀려져 나오고 있었다.

사실 추혼천녀의 슬픔도 일순간의 것이었지만 단지 그 넓다란 가슴과 힘있는 팔의 포옹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중평은 그녀가 울음을 그친 것을 보고는 살며시 밀어내며 물었다.

 

"추혼낭자! 조금 전에 흘린 눈물은 나의 거친 행동 때문이 아니었지요?

제가 일어나면서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낭자를 기절케 했는데 그 땐 정말 미칠 지경이었소.

만약 낭자께 어떤 불행이라도 닥친다면 나도 아버님의 원한을 갚고 난 후에 그만…"

 

그는 진정으로 죄송스러움을 표했고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몹시 감동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언제 상공을 원망한다고 했나요.

그저 제 처지를 생각하고 그만…"

 

얼굴이 다시 슬픈 표정으로 변했다.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한 번 감정이 복받치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법이다.

지금의 추혼천녀가 바로 가슴 속에 간직한 모든 감정을 하나도 숨김없이 털어 놓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위중평은 감정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극히 쉽게 감동하는 편이었으나

현재의 자기 처지가 너무나 참혹하여 어디다 정신을 팔 겨를이 없어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날부터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날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터이다.

그와 안미옥의 사랑도 또 추혼천녀와의 사이도 모두 이상하게 그가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을 때

생긴 일이었다.

그는 그녀들을 단지 처지가 비슷한 전우로 생각하였을 뿐 전혀 애정의 대상으론 생각지

않았기에 오늘도 추혼천녀의 이러한 언어와 거동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될 수 있는 한

자신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추혼천녀가 자기의 처지를 말하며 동정을 바라는 눈초리로 말했다.

 

"우리는 동병상린(同情相憐)인 것 같지요? 당신의 입장도 몹시 딱한 것 같군요."

 

추혼천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은 채 점차 싸늘한 표정으로 굳어 가고 있었다.

위중평이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추혼낭자! 막혔던 경맥이 대관절 어떻게 뚫리게 되었소?"

 

"아니, 당신이 뚫어 주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럼 이상하군요."

 

추혼천녀는 새까만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위중평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 말을 이었다.

 

"알았소. 틀림없이 그 고인의 덕분이오. 내가 당신을 동굴 안에서 치료하고 있을 때

동굴 밖에서 어떤 사람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소.

만약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소."

 

추혼천녀도 그의 추측에 동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누가 이렇게 신출귀몰한 무공을 가졌단 말인가?

두 사람은 한참이나 생각을 해보았으나 정확한 해답을 구하지 못하였다.

위중평은 옥탑단장인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옥탑단장인이었다면 자기를 찾아와 시비를 건 사람들을 절대 살려서

돌려 보내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혼천녀는 생각하였다.

바로 이 때 어디선가 마치 유령처럼 한 사람이 달려온다 했더니

벌써 십여 장을 사이에 둔 채 종적을 감추었는데 추혼천녀와 위중평같이

그런 예민한 눈으로 찾을 수가 없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의 무공 또한 대단함이 틀림없었다.

위중평은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 자신이 이틀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추혼천녀에게 말했다.

 

"우리 빨리 이곳을 떠납시다.

쉴 수 있고, 요기라도 할 수 있는 장소로 옮깁시다.

더 이상 허기가 지면 견딜 수가 없겠군요."

 

추혼천녀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오늘은 내가 처음으로 타인과 동행을 하게 되는군요."

 

그건 정말이었다.

그녀가 여지껏 살아오면서 이번처럼 남에게 친절을 베푼 것도 처음 있는 일이고,

처음으로 동행한다고 하는 것도 거짓이 아니었다.

위중평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공중으로 사오 장을 솟구치더니

두 팔로 휘저어 몸이 마치 활에서 튕겨난 화살처렁 절벽 아래로 달려갔다.

이러한 초음신법으로 그는 벌써 이십여 장이나 나가 있었다.

추혼천녀도 오늘은 다른 날과 완전히 달라 웃음을 가득 띤 채 홍영이 어른거리는 순간

벌써 위중평을 따라잡고 나란히 달려가고 있었을 때 길가 숲 속에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위중평이 먼저 발길을 멈추고 말했다.

 

"추혼낭자! 우리 여기서 하룻저녁 쉬어 가기로 합시다."

 

추혼천녀가 웃음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발길을 늦추어 천천히 숲 속으로 들어섰다.

어스름한 달빛에 시야가 익숙해져 숲 속을 살피니 그것은 인가(人家)가 아니라

청색 기와에 붉은색 담장으로 정리된 아주 깨끗한 적은 암자였다.

대문 위에는 커다란 글씨로 수월암(水月庵)이라고 씌어 있었다.

두 사람은 강호인들과 어울리는 일이 적어서 수월암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위중평은 비구니의 암자라는 것을 알고 이러한 곳에서 남자를 용납할까

의심스러웠지만 추혼천녀는 벌써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대문이 삐걱 하고 열리더니 나이가 삼십이나 되어보이는 비구니가 나왔다.

그녀의 거동은 몹시 정숙하고도 범속하였다.

커다랗고 새카만 눈을 깜박거리며 두 사람을 쓸어 보더니

살며시 웃음을 머금고 무엇인가 물어 보려는 표정이었다.

대인관계가 없었던 관계로 멋도 모르게 발을 들여 놓은 추혼천녀 앞에

돌연 한 줄기의 장풍이 일더니 그녀의 앞으로 내달아 신형을 가로막았다.

추혼천녀는 어렸을 때부터 옥탑단장인에게 무공을 익혀 이미 무학의 심오한 경지를 터득하여

장풍이 몸에와 닿자 이것은 일종의 불문 무상신공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코웃음을 치며

삼제유공을 내놓았다.

두 사람의 장풍이 서로 맞닿는 순간 젊은 비구니 얼굴엔 미소가 사라지고 몸이 마치 솜털처럼

풀이 죽어 뒤로 사오 보나 후퇴하였고 추혼천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것으로 보아 방금의 대결에서 그 젊은 여승이 당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위중평은 일을 더욱 확대시키고 싶지 않아 급히 앞으로 나아가서 비구니를 향해

심심한 예를 취하였다.

 

"소생은 장백파의 위중평이고, 이분은 추혼낭자입니다.

오늘 밤 이 암자에서 하룻밤 쉬어 갈까 하는데 허락하여 주시겠습니까?"

비구니는 위중평과 추혼낭자라는 소리를 듣자 금방 얼굴빛이 확 변하더니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와 합장을 하며 답례를 취했다.

 

"아미타불… 수월암은 불문의 성지이라 피비린내나는 강호인을 거둘 수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싸늘한 시선을 추혼천녀에게 돌렸다.

위중평도 그가 하는 태도를 보자

내심 몹시 기분이 상했으나 일이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상대가 비구니인 만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집을 나선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게 원칙이온데 어찌…"

 

바로 이 때 추혼낭자가 재빨리 비구니의 팔을 나꿔챘다.

 

"빌려 주지 않으려면 그만이지 어찌 시비는 시비냐?"

 

그녀의 동작은 하도 민첩하여 상대가 비구니가 아니라

신법이 날쌘 강호인이라 하여도 감히 빠져 나갈 틈이 없을 정도였다.

이 비구니는 바로 수월암의 유일한 전인(傳人)인 경화(鏡花)였다.

무공은 이미 암주로부터 받아 육칠 성을 넘고 있었다.

추혼낭자의 가느다란 옥수가 공격하자 돌연 회영이 어른거리더니

경화는 냉소를 치며 비스듬히 몸을 피하더니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혼마녀! 내가 너에게 경고하겠는데 다른 사람은 너의 무공을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이 수월암에서는 결코 소란을 피우는 것을 용납치 못한다.

너희들이 온 목적이 무엇인지 어서 털어 놓아라."

 

추혼천녀의 일 초가 허공을 치자 그녀의 얼굴엔 살기가 더욱 역력했다.

별안간 싸늘한 웃음을 날리며 삼제유공을 쌍장에 모아 공격만 할 뿐

경화의 말엔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위중평은 경화의 이런 신법을 보고 속으로 감동하고 있었다.

그는 추혼천녀의 악랄한 정도의 솜씨를 알고 있었기에 급히 나아가서

두 사람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조금 전에 얘기했습니다.

허락의 가부만 말씀해 주신다면 절대로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추혼천녀를 억지로 떠밀어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였다.

막 암자의 문을 나서려 할 때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 분 속히 돌아오십시오. 빈니 두 분께 할 말이 있습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뚜렷하고 온화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포근한 감회를 가지게 하였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렸다.

회색 승의를 입은 중년의 비구니가 손에 염주를 들고 후청에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빨간 색의 팔괘도포(八卦道袍)를 입고 교만이 얼굴에 가득한 늙은 도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천독문 중의 제일 고수인 질세산인이었다.

추혼천녀는 어느새 그 비구니 앞에 가서 극히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바로 여기의 주지요?

우리가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가겠다고 청했을 때 허락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지

무슨 시비는 시비요?"

 

말투가 극히 시비조였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살며시 웃었다.

 

"그렇소. 빈니가 바로 수월암의 주지요.

여기는 얘기할 곳이 못 되니 뒤로 가서 앉아 얘기합시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옛말과 같이 그쪽에서 그렇게 웃는 얼굴을 한 이상

추혼천녀의 노여움도 사라져 버렸다.

추혼천녀의 시선이 위중평에게 향해졌을 때

그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걸어와 암주에게 정중한 태도로 예의를 취했다.

 

"뜻하지 않은 일로 암주의 잠을 깨게 하여 저희들은 송구스럽게 생각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수월암주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손을 들어 저편을 가리켰다.

위중평은 더 이상 사양치 않고 추혼천녀와 나란히 앞으로 걸어가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아주 고상하게 꾸며진 깨끗한 선방으로 안내되었다.

이곳은 암주의 휴식처라 보통 사람은 절대로 출입이 금지된 곳이기도 하였다.

수윌암주는 그들을 자리에 앉힌 뒤 질세산인을 보며 말했다.

 

"서로 모르시겠군요.

이분이 바로 천독문 중의 제일 고수인 질세산인입니다."

 

위중평은 질세산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고 있었기에 암주의 소개를 받자

즉시 일어나 예를 갖추고 인사를 하였다.

뜻밖에도 질세산인은 아주 거만하게 일어서지도 않은 채 냉랭히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위중평은 어렸을 때부터 눈치만 보고 살아온 사람이라

이렇게 사람을 얕보는 사람을 제일 미워하였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획 돌아서서

자리에 앉으려 하자 돌연 질세산인이 하늘이 울릴 정도의 소리로 말했다.

 

"게 섯거라! 네가 바로 자선마군의 전인이란 말이냐?"

 

위중평도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갑자기 몸을 돌려 냉랭한 웃음을 날리며 큰소리로 대꾸했다.

 

"안 맞으면 어떻고, 맞으면 어찌하겠소."

 

질세산인은 평소에 이렇게 자기 앞에서 무례한 짓을 하는 자를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꼬마가 방자하게 나오는 것을 보자 화가 치밀어 그곳이 암자인 것도 망각하고

앞으로 달려와 장력을 계속 뻗어 위중평의 몸 일곱 군데의 대혈에 공격을 가했다.

그 수법이 아주 악랄하고 음흉했다.

위중평은 그 자리에 선 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수롭게 생각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바로 질세산인이 위중평에게 덮쳐 가는 순간 돌연 한 줄기의 잠력이 치솟아

두 사람을 갈라 놓고는 이어 불호령이 떨어졌다.

수월암주는 만면에 엄숙한 표정을 띠고 천천히 말했다.

 

"수월암은 불문의 정통이라 피를 흘리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멈추지 못하겠느냐?"

 

어조도 무겁고 엄숙했지만 정말 저항키 어려운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질세산인은 당장이라도 위중평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즉시 손을 거두고 물러서면서 위중평을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대로 넘어가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기억해 두어라.

천독문은 언제이고 꼭 너의 목숨을 빼앗고 말겠다."

 

위중평은 찬 웃음을 날렸다.

 

"다른 사람들은 천독문을 무서워할지 모르겠다만 나는 당신들 정도야

안중에 두지도 않으니 어디 잘해 보시오."

 

질세산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급히 수월암주에게 인사를 하고는 암자의 담을 넘어 사라졌다.

수월암주는 괴로운 듯 탄식을 연발했다.

 

"강산은 자주 변한다 해도 고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야.

저 녀석이 아직도 본성을 못 고치니…"

 

이 수월암주는 보기에 한 사십 중년으로 보이나 사실은 이미 백 살이 넘었다.

그녀가 수월암 남산 일파를 창립한 지도 어언 육십 년이 넘었다.

불자의 무공은 이미 심오한 곳까지 터득하여 불문의 시가무 상선공까지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수월암과 천독문은 원래 하나는 정파이고 하나는 사파였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물과 기름처럼 뜻이 맞지 않았으나 수월암주는 무슨 일로 질세산인을

데려온 것일까?

그것은 당시 암주가 강호에 나갔을 때 천독성모의 사부인 남령선고와 사이가 좋았기에

남령선고를 봐서라도 질세산인을 감화시켜 보겠다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애를 썼으나

오늘날까지 헛수고만 했던 것이다.

질세산인이 사라진 후에도 위중평은 계속 노기가 풀리지 않았다.

그가 어찌 얕볼 수 있는 상대인가?

단지 수월암주의 만류로 그를 쫓아 나가지 않았을 뿐이다.

수월암주는 그들의 사연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질세산인이 사라진 후에도

계속 아미타불을 염송했다.

 

"아미타불! 무림 중의 숙원은 언제나 다 끝날 날이 올지…"

 

다시 위중평을 향해 정이 담뿍 담긴 어조로 말했다.

 

"소시주! 거기 앉으시오. 빈니가 할 말이 있으니…"

 

위중평은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수월암주는 염주를 손에 들고서 서서히 입을 열었다.

"강호에 소문이 나돌기는 소시주가 장백과 화산 두 파의 진전을 받았으며

장백 일파의 장문이라고 들었는데 어찌 또 자선마군의 전인이 되었단 말이오?

소시주께서 그런 이유를 나에게 말해 줄 수 있겠소?"

 

위중평은 냉큼 대답했다.

 

"말씀드릴 수 없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강호의 소문은 사실 그대로입니다.

저는 이미 장백파를 이어 받고 화산파 영도자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제가 자선마군의 전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오해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옥선과 은고루(銀枯樓)를 얻은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수월암주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라, 그렇게 되었군.

그러나 소시주께서 자선마군이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이 말을 들은 위중평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의식중에 이 부채를 얻었는데 이렇게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다니…

그러나 이러한 위경이 절대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이 일의 흑백이 가려질 날이 올 것인가…

그리고 단 본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일이 복잡하게 될 것은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는 서로 상대를 알지 못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전수를 받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선마군이 만약 정파의 인물이라면 또 별개의 문제이나 하필이면 모두가 다 골치를 썩이는

흉마이기 때문에 그의 성명에는 크나큰 오점이 남겨지는 것이다.

수월암주는 그가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위중평의 괴로움을 알고 웃음을 멈추고는 위로를 해주었다.

 

"소시주! 너무 걱끌하지 마시오.

자신의 행동만 바르고 정당하다면 언젠가는 물이 마르고 돌이 나올 날이 있겠지.

절대 그것으로 당신의 성명에 흠은 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천독문의 오해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오."

 

위중평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와 천독문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째서 누차 그런 태도로 대하십니까?"

 

수월암주는 가벼운 탄식과 함께 조용히 말했다.

 

"자선마군이 그 당시 남령선고와 대단한 원수였소.

본인은 벌써 고인이 되었지만 이 원한이 그 다음 장문인과 천독성모에게 넘겨져

대신 청산하게 되었소.

그들은 소협이 바로 자선마군의 전인으로 알고 있는데

소협을 찾지 않고 누구를 찾는단 말이오?"

 

위중평도 원래가 성질이 사나운지라 돌연 성질을 내며 말했다.

 

"그들이 이렇게 흑백을 가리지 않고 꼭 나와 어렵게 지내고 싶다면 그냥 내버려 두시오."

 

옆에서 계속 침묵을 지키던 추혼천녀가 입을 열었다.

 

"소위 천독문 제일 고수의 무공이 그 정도인데 무엇이 대단하다고 두려워하겠어요.

오려면 오라고 하지요. 그 때는 저도 한 몫 끼겠어요."

 

수월암주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두 젊은이는 모두가 무림에서 보기드문 인걸들인데 각자 일신의 절학을 지니고도

어찌 성질이 이렇게 삐뚤어졌단 말인가?'

 

그녀는 불법을 통달하여서 이 두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려는 생각에 추혼천녀를

바라보며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네가 바로 옥탑단장인의 제자이냐?"

 

추혼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암주께서도 그분을 아시나요?"

 

수월암주가 다시 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몇 번 만나보았지만 그가 옥탑단장인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추혼천녀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암주께서 전부터 저의 사부님과 아시는 사이라 나의 신상에 관해서도 잘 알고 계시겠군요."

 

이 때 한 가닥의 생각이 수윌암주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이 마녀를 감화시킬 최선의 방법은 그의 신상문제부터 시작한 것이다.'

 

암주는 안다고도 하지 않고 모른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건 훗날 너의 사부가 이야기할 것이다. 만약 너의 사부가 이야기해 주지 않거든

다시 나를 찾아 오너라."

 

이 때 경화가 조용히 들어와서 음식을 준비하였다고 아뢰었다.

수월암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말을 했다.

 

"산중에 있는 암자라 차린 것은 없으나 마음껏 들게나."

 

위중평은 벌써부터 허기가 돌아서 사양도 않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를 받아 편전으로 들어갔다.

상에는 모락모락 나는 두 그릇의 국수에 새하얀 만두가 커다란 접시에 가득하였으며

또 여기저기 맛있는 음식이 즐비하였다.

경화도 미소를 잃지 않고 두 사람을 극진히 대접했기에 위중평은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식사가 끝나자 벌써 아침 햇살이 밝아졌다.

두 사람은 암주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선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암주도 조과를 마치고 침상에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여 빈니가 몇 마디 두 분께 충고의 말이 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시 이었다.

 

"두 분은 마치 선로명주(仙露明珠)처럼 앞길이 무한하나 기억해둘 것은 인간은

목숨을 아끼는 미덕이 있으니 죽이지 않아도 될 일은 되도록 살생은 금했으면…"

 

위중평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으나 추혼천녀는

어느 집 개가 짓느냐 하는 식으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암자의 문을 나설 때 위중평은 적발교와의 삼월지약이 생각나

그 길로 즉시 관산현에 있는 적발교의 총당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추혼천녀는 그와 동행할 뜻이 있었으나 사부님의 다른 심부름이 있어 하는 수 없이

그와 애석한 작별을 해야 했다.

이런 생이별을 처음으로 경험한 그녀는 그 차가운 얼굴에 더한층 수심이 덮였고,

두 줄기의 눈물을 흘리며 위중평의 손을 잡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잘 들어요. 이번 약속은 보통 강호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아버님의 피맺힌 원한을 갚는 것이니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적에게 양보하는 것은 자살하는 거나 다름이 없어요."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고 눈물을 닦고는 다시 말했다.

 

"홍모음효의 다른 무공은 별 것이 아니나 단 그의 열부장(裂腐掌)만은 매섭기 짝이없으니

처음 시작할 때부터 신공으로 온몸을 감싸야 합니다.

그래야 당하지 않을 거예요.

만약 내가 시간을 낼 수 있다면 꼭 달려가겠어요."

 

위중평은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헌데 그녀의 이렇게 후한 마음씨에 감동되어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옷소매를 잡았다.

 

"염려마시오. 틀림없이 이길 것이오. 곽산의 일이 끝나면 당장 찾아가겠소."

 

역시 사내라서 마음이 강한 탓인지 이 몇 마디를 남기고 손을 흔들며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추혼천녀는 멍하니 길에 서서 위중평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한숨을 한 차례 날리더니 몸을 돌려 달렸다.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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