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4. 당주행세

오늘의 쉼터 2014. 6. 20. 15:45

4. 당주행세

 

 

정녕 끔찍하고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일류 고수들이 어떻게 하여 이렇게 떼죽음을 당했단 말인가.

위중평은 의아함을 금치 못하고 즉시 물었다.

"이런 흑백 양도의 인물들이 무슨 이유로 동시에 피살을 당했을까요?

이것 역시 장진도를 빼앗으려다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구주풍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아무 소리도 없이 사라진 무림인들의 숫자는 부지기수다.

각파에서 그 여마두를 포위공격하기 위해 다시 사람을 내보낸것이

다시 이런 참사를 빚게 했구나. 그 여마두는 정말 무림의 살성이다."

 

위중평으 영준한 얼굴에 일순 짙은 먹구름이 덮였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주풍인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 이유가 분명치 않아.

그 여마두는 그저 윽도건 백도건 간에 무모하게 닥치는대로 죽이는 것이 취미인 것 같아."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나 위중평은 한편으로 그 여마두를 은근히 동정했다.

비단 자기의 아버지와 사귀었다는 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인 혼자의 힘으로 장진도를 지키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후배는 그 여인이 깊은 충격과 자극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군요.

저도 그런 경우를 당해 봐서 알지만 그런 사람은 동정이 갑니다."

 

"동정이 간다고? 으하하하…"

 

구주풍인은 광소를 터뜨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들 나를 미친 놈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나는 너를 미친 자라고 하겠다.

만약 너희 두 사람이 한 패라면 무림에는 평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

 

하고는 돌연 정색을 하더니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잘 들어라. 최근 사도(師徒) 두 명의 여인이 갑자기 강호에 나타났다.

늙은 것은 옥탑단장인(玉塔斷腸人)이라 자칭하는데 얼굴은 흑건으로 복면을 했다.

그리고 무공은 불가사의해 일종의 소혼마장(消魂魔掌)을 사용하는데

그 마장에 맞으면 아무 상처도 없이 곧 죽어 버린다는 것이다."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무림의 고수를 만났다 하면 그 사람이 정파건 사파건 가리지 않고

일 장으로 살해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제자는 홍의소녀로써

추혼천녀(追魂天女)라는 호를 지니고 있었다.

이 홍의소녀 역시 그 사부의 영향을 받아 악랄하기 그지없었고

그녀들은 삼각형의 홍기(紅旗)를 자기들의 표시로 삼는다고 했다.

위중평은 대뜸 길에서 만났던 두 명의 홍의낭자가 떠올랐다.

 

'누구일까?'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위중평은 넌지시 물었다.

 

"그녀들이 그렇게 악랄한데 왜 무림에서는 그녀들을 가만히 놔둡니까?

그녀들을 상대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말입니까?"

 

구주풍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계집들은 무공이 워낙 높은 걸 어찌하나?

이 시체들도 바로 그 계집년의 손에 당한 것이라네."

 

위중평은 갑자기 호승심이 생겨 검자루를 툭툭 치며 낭랑하게 말했다.

 

"기회가 있으면 후배가 그녀들에게 상세한 것을 물어 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구주풍인은 대뜸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닥치게! 그런 일에 자네는 참견할 필요가 없어. 자네는 자네의 복수를 해야지."

 

위중평은 암암리에 반발심을 느꼈으나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소생 명심하겠습니다."

 

그러자 구주풍인은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허… 그래야지. 암! 그래야 하구 말구."

 

말을 마친 그는 비틀비틀 팔자걸음을 걸으며 사라져 버렸다.

위중평은 잠시 구주풍인의 뒷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확실히 신비한 인물이었다.

위중평은 홍의여인을 놓친 대신 구주풍인처럼 부친의 사인(死因)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을 퍽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한 가닥 밤바람이 얼굴을 스쳐갔다.

 

돌연-.

그는 그 바람에 실려오는 미묘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싸우며 격돌하는 소리였다.

 

'틀림없이 어디선가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한 그는 급히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위중평의 신법은 이미 절정에 달하여 어느 누구도 감히 따라 갈 수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대나무가 우거진 곳에 당도했다.

현장을 살펴본 그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그곳에는 많은 무림인들이 가냘픈 몸매를 지닌 한 여인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위중평의 두 눈에서 불이 번쩍 퉁겨지는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이 포위 공격을 당한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광경에 문득 살기가 치밀어오른 것이었다.

위중평은 발끝으로 땅을 살짝 찍으며 쏜살같이 싸움권 한가운데로 들어서며 폭갈을 내질렀다.

 

"멈추어라!"

 

돌연한 고함 소리로 인해 일순 싸움이 중단되고 고수들이 몇 걸음씩 물러섰다.

위중평은 협공을 하는 편을 향해 맹렬히 일 장을 격출하며 재차 냉랭하게 소리쳤다.

 

"어찌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약한 아녀자 한 명을 공격하시오?"

 

이 때였다.

무리들 중에서 머리카락이 누렇고 용모가 흉악한 사람이 나서며

돌연 일 장을 밀어내는 것과 동시에 폭갈을 질렀다.

"대담한녀석! 네놈이 감히 고원삼흉과 시비를 붙으려 하느냐?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이로구나!"

 

말이 막 끝났을 때였다.

 

돌연-.

 

"으아악!"

 

하는 처절한 비명 소리가 허공을 찢으며 터져 나왔다.

이와 동시에 방금 나서서 외쳤던 머리카락이 누런 대한이 일 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 대한은 한 차례 몸을 꿈틀하더니 즉시 칠공으로 선혈을 뿌리며 사지를 쭉 뻗고 말았다.

삼흉을 운운한 것은 바로 그가 죽고 싶어서 내지른 소리였다.

위중평은 일 장으로 황모(黃毛)의 대한을 저승으로 보내고는 즉시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하하핫!"

 

이것은 위중평이 그동안 품어 왔던 울분을 발산시키는 그런 웃음이었다.

사실 황모대한은 고원삼흉 휘하의 오존자 중 하나인 황발존자였는데

그 자는 장력이 심후하기로 이름이 난 자였다.

그런 황발존자가 상대방의 단 일 장에 얻어맞아 황천으로 간 것이다.

이쯤 되면 상대의 무공에 대해 짐작이 갈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포위 공격을 하던 무리들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 자신들도 모르게 한 걸음씩 주춤주춤 물러났다.

한동안 광소를 터뜨리던 위중평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고 중인들을 날카롭게 노려 보았다.

 

"당신들은 고원삼흉과 어떤 관계가 있소? 속히… 이름을 밝히시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가 무림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자들이었으니

어찌 나이 어린 위중평의 호통을 듣고 가만히 있으랴.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두 줄기의 장풍이 위중평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왔다.

 

"획! 획!"

 

거센 장풍이 위중평의 전신을 으깨어 버릴 것처럼 휘몰아쳐 왔다.

 

"흥!"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위중평은 번개같이 신형을 틀어 두 줄기의 장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변초를 하기도 전에 혈도를 정확하게 찔러 버렸다.

이 뜻밖의 광경을 본 삼흉의 도당들은 소름이 쭉 끼쳐 자신들도 모르게 일제히 장검을 뽑아들었다.

무시무시한 새파란 검광들이 푸른 대나무 줄기들처럼 쭉쭉 뻗어 나갔다.

 

"보아하니 너희들은 고원삼흉의 수하들인 것 같구나.

고원삼흉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아무도 대답을 하는 자가 없이 일제히 위중평을 향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언의 승인과도 같은 것이다.

 

"이놈들!"

 

위중평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무흔검을 뽑아들었다.

이어 무시무시한 검기가 허공을 난무하는 가운데 고원삼흉의 수하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기이한 인연을 만나 헤아릴 수 없이 공력이 강해진 위중평이 아닌가.

한 차례 무흔검이 휘돌려질 때마다 군마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를 동반했고

이들을 처치하는 데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일순간에 주위는 죽은 듯한 적막을 되찾았다.

그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황청길로 달려간 것이다.

이무련 흥의소녀는 기가 질려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낮에 있었던 일로 약간 거북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자기를 살려준 사람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홍의소녀는 맵씨 있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위중평 앞에 다가서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소매는 안미옥(顔美王)이라 합니다.

귀하께서 생명을 구해준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요?"

 

이 때 위중평은 소녀가 관도에서 만났던 홍의소녀라는 것을 알아보고

내심 불쾌하기 짝이없었지만 상대가 이렇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데

받아 주지 않을 도리가 없어 같이 공수의 예를 취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오."

 

안미옥이라 자칭한 홍의소녀는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며 옥같이 곱고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이며 상냥하게 웃었다.

 

"소협의 신공과 검술은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러나 이건 좀 지나친 것 같지 않아요?"

 

위중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낭자께서 모르시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적발교와 고원삼흉은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깊은 원한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도당 몇 명쯤 죽였다고 결코 한이 풀리지는 않습니다."

 

안미옥-.

그녀는 장산팔도(掌山八島) 도주의 딸이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똑똑하였다.

안미옥은 첫눈에 위중평의 성격이 좋다는 것을 깨닫고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장산도의 안미옥이라 하는데 소협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시는지요?"

 

"장산도?"

 

위중평은 영소도장에게서 장산도가 무림에서 차지하는 세력과 규모가 퍽 큰 방파라는

말을 들었었다.

아울러 그 도주의 위인됨이 광명정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 기에 그 이름을 들은 위중평은

즉시 관도에서 있었던 오해를 풀고 빙그레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

 

"소생은 위중평이라 하며 장백파에 속해 있습니다."

 

이렇게 인사가 끝나자 그는 곧 어찌하여 포위 공격을 당했는지

경위를 물었고 안미옥은 미간을 곱게 찡그리며 자세하게 설명했다.

 

"저는 아직은 잘 모르지만 그러나 이제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요.

저는 누구의 누명을 쓰고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안미옥은 산동(山東)에서 북평까지 오는 동안 영문도 모르고

수많은 인물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그녀는 어찌 된 영문인가를 파악하려 하였으나

그 결과 그녀는 자기와 차림이 똑같고 나이도 비슷한 여인 때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을 하였다.

 

"이제 좀 알 것 같군요.

그들이 추적하는 것은 낭자보다 약간 야윈 여자입니다.

그 홍의여인은 바로 무림에서 살겁을 일으키고 있는 마녀 추혼천녀입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해서 금방 사귈 수 있었다.

안미옥의 금년 나이는 십육 세 위중평보다 한 살이 위인지라

의남매를 맺게 되어 누님이 되었다.

안미옥은 쾌활하며 지극히 아름다웠고 위중평은 이 태도가 대범하여

명랑한 안미옥을 통해 금루선연이 생각났다.

그는 아직도 신가보주의 금지옥엽인 금루선연의 그 교태롭고

자상한 환상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미옥은 그가 자기의 신세 때문에 감회가 어린 표정을 보자 부드럽게 위로했다.

 

"동생,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복수란 천천히 시도해야지 너무 서두르다가는 큰 화를 당하게 되어요.

그러니 동생은 우선 장백산으로 돌아가 옛날의 사람들을 모아 열심히 가르친 뒤 섬으로 오세요.

그럼 나는 아버님과 상의를 하여 동생을 돕겠어요."

 

위중평은 나이 차이가 불과 한 살밖에 되지 않는지라 비록 의남매를 맺기는 했지만

선뜻 누님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위중평은 낭자라는 칭호를 붙였다.

 

"낭자, 복수는 나 혼자 힘으로 할 것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안미옥은 진지한 음성으로 타일렀다.

 

"하지만 동생, 세상의 모든 일이 무공만으로 되는 건 아니예요.

지략과 계획이 필요해요.

그러니 절대 생각나는대로 해서는 안 돼요."

 

위중평은 안미옥의 세심한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켰다.

 

"그럼 나는 이제 장산도로 돌아가야겠어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재삼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동생이 이미 삼흉일효에게 복수를 한다고 했으니 모든 일에 조심을 해야 해요."

 

말을 마친 그녀는 헤어지기가 서운한 듯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사라져 갔다.

위중평도 손에 쥐었던 보물을 놓쳐 버린 것처럼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방긋이 웃으면 그 얼굴 자체가 꿀물이 흐르는 듯 달콤하게 보이는 매력적인

여인이었기에 더욱이 자기에게 각별한 신경을 쓰자 크게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며칠 동안 겪은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살이가 모두 신가보에 있을 때처럼 냉혹하지는 않나보군…"

 

비록 남의 힘을 빌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방대한 힘을 지닌 방파의

도움을 무의식중에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객잔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새벽같이 길을 떠났다.

우선 비록 폐허가 다 된 자기집과 망부(亡父)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식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원래 관외는 장백파에서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범위였다.

그러나 신주검성이 죽은 후 이곳은 적발교의 세력이 일부분 침투해 들어와 있었다.

지금 이곳은 고원삼흉의 독무대가 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어떤 무림인이라 해도 그들의 경계에 들어서면 삼흉의 수하들에게

치밀한 감시를 받았다.

위중평은 허리에 장검을 찬 채 기품 있는 태도로 말을 몰아갔다.

그러나 역시 고원삼흉의 무리들은 위중평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요동성(遼東省)의 중심 도시인 봉천(奉天)이다.

이날 위중평이 봉천에 당도하여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하여 주루를 찾았다.

그는 혼자 술과 구거 가지 요리를 시켜 놓고 마시고 있었다.

 

돌연-.

계단을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위중평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붉은 모자와 붉은 옷, 그리고 피풍까지 타는 듯이 붉은 한 명의 여자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위중평은 그녀를 보자 내심 섬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라! 저 여자가 이곳에 오다니… 무슨 일일까?'

이 여자야말로 처음 만났던 홍의여인으로 위중평에게 미혼향을 뿌리고 갔던

바로 그 여자였다.

역시 얼굴은 조각으로 깎은 듯 아름다웠지만 미간에 떠오른 살기는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이 여자가 바로 무림의 마성(魔聖) 추혼천녀인 것이다.

그녀는 냉막한 모습으로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이 무련 위중평은 마실 줄 모르는 술을 몇 잔 마신 까닭에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술이 들어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원수가 생각나 상 위를 탁 치며 혼자 부르짖었다.

 

"이놈들! 내 기어이 쓴맛을 보여 주고 말겠다!"

 

그러자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소나무를 잘라 만든 술상이 바스러져 버리고 말았다.

위중평은 그저 가슴 속의 울분을 터뜨리기 위해 상을 쳤던 것이다.

대뜸 눈을 부릅뜬 그녀는 앉았던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위중평 앞으로 와서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나에 대한 도전이냐?"

 

위중평은 어안이 벙벙하여 일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청하게 추혼천녀를 주시했다.

추혼천녀는 싸늘하게 위중평을 노려보며 재차 다그쳤다.

 

"왜 대답이 없느냐"

 

"그… 그게…"

 

위중평이 말을 더듬자 추혼천녀는 대뜸 언성을 높였다.

"좋아요. 오늘 밤 삼경에 증 밖에서 만납시다.

흥! 귀하가 오지 않아도 내가 찾을 것이니 오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위중평이 채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휭하니 주루를 나가 버렸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이 때 주루의 주인인 듯한 자가 달려와 따지듯 말했다.

 

"본인이 이 주루의 주인이오만 손님께선 무슨 뜻으로 상을 부수었는지 분명하게 말해 주시오."

 

위중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을 쳤고 그것이 공교롭게도 부서지는 바람에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위중평은 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품 속에서 은자를 꺼내 상 위에 올려 놓았다.

 

"주인장,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만하면 배상이 되겠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또 일은 공교롭게 돌아갔다.

위중평이 은자라고 생각해 올려 놓은 것은 은자가 아니라

적발교의 홍모음효가 신가보에서 준 금패가 아닌가.

 

"엇!"

 

금패를 본 주루의 주인은 금방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잠시 어쩔 줄 모르던 주인은 이어 무릎을 털썩 꿇으며 애걸복걸했다.

 

"당… 당주께서 오셨는지는… 정말… 정말 몰랐습니다."

 

위중평은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위중평은

주인의 이런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에 집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그러지 않아도 적발교주를 찾으려 하던 참이라 잘됐다 싶어

금패를 다시 품 속으로 집어 넣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모르고 한 짓이니 할 수 없지요. 어서 일어나시오."

 

주인은 마치 큰 죄를 사면이나 받은 듯 엉거주춤 일어나 공손히 옆으로 가서 섰다.

분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귀왕영패는 적발교의 총단에서 당주 이상의 신분임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더구나 곧 교주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닌 것이기도 했다.

위중평은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으나 추호도 내색을 하지 않고 의젓하게 명령했다.

 

"나를 이곳 분파로 안내하시오."

 

주인은 허리가 땅에 닿도록 굽실거렸다.

 

"예예,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고는 곧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위중평은 주루의 주인 안내로 얼마 후 거대한 장원 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 때 이 거대한 장원의 큰 대문 앞에는 경장차림을 한 십여 명의 대한들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가오자 그 중 키가 제일 큰 중년인이 앞으로 나오며 공수의 예를 취했다.

 

"봉천 분타의 타주 금주호(錦州虎) 왕맹(王猛)이 당주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소식은 어느 틈에 이곳까지 전달되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주루의 주인은

이곳 분타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위중평은 대담하게 왕맹의 인사를 받으며 손을 흔들었다.

"수고하오. 자, 들어갑시다."

위중평이 십여 명 장한의 지극한 안내를 받으며 대청 안으로 들어서니

거기에는 이미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자! 당주께선 어서 자리에 앉으십시오."

 

위중평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상석에 가서 앉으며 호기롭게 물었다.

 

"이곳에는 모두 몇 개의 분타가 있소?"

 

금주호 왕맹은 공손히 아뢰었다.

 

"예, 모두 세 개의 분타가 있으며 제자들의 수는 이백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삼흉의 세력권입니다."

 

위중평은 술을 한 잔 쭉 들이키며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긍 총단은 어디에 설치되어 있소"

 

이 질문은 금주호 왕맹의 뇌리에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그는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총단에서 온 사람이 총단의 소재를 모르다니…'

 

이렇게 생각한 그는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당주께서는 지금 총단 내에서 어떤 당주의 직책을 맡고 계시는지."

 

위중평은 다시 술 한 잔을 단숨에 비우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는 지금 아무 직책도 맡지 않고 있소.

나는 이제 막 하산을 하여 총단을 찾아가는 길이오."

 

위중평은 아예 털어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왕맹은 즉시 그가 홍모음효의 제자라고 단정하여 조금 전에 품었던 의심을 싹 지워 버리고 말았다.

 

"오! 그러시군요. 하지만 저는 총단의 소재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위중평은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 삼흉의 세력이 그렇게 크단 말이오?"

 

왕맹은 미안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현재 그들은 무서운 세력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저희들도 착실히 실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위중평은 배를 두둑히 채우고 적발교의 소식도 대충 알았으므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급한 약속이 있어 먼저 나가야 되겠소."

 

그러자 왕맹은 황송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며칠 푹 쉬시다 가시지 않고 이렇게 오시자마자 떠나십니까?"

 

위중평은 방긋이 웃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여러분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거니와 방금 말한대로 중요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오."

 

귀왕령패를 지닌 사람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잘 보이게 되면 승진을 하기란 누워서 떡먹기가 아닌가.

 

바로 이 때-.

소두목 한 명이 황급히 들어와 신주호 왕맹에게 보고를 올린다.

 

"타주, 총단에서 많은 고수들이 오셨습니다. 타주께선 속히 영접을 하도록 하십시오."

 

"그래?"

 

왕맹은 가슴이 철렁 떨어지는지 안색이 질려 위중평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황망히 밖으로 나갔다.

위중평이 이 때 가 버렸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온 사람들이 대관절 어떤 인물들인지 보고 싶어 그 자리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적발교에서는 무슨 일로 갑자기 많은 고수들을 파견했을까?'

 

위중평은 궁금하기 짝이없었다.

사실상 적발교의 고수들은 추혼천녀의 뒤를 쫓기 위하여 파견된 것이었다.

 

잠시 후-.

용모가 하나같이 험상궂은 중년인들이 우쭐우쭐 청내로 들어섰다.

그 중 맨 앞장을 선 자는 강호에서 유명한 흉신(兇神), 독비악걸, 담운광이라는 자였다.

그 자는 적발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형당당주였다.

담운광 옆에는 키가 작고 큰 두 명의 괴인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운개쌍괴(雲開變怪)라는 자들이었다.

그들 일행 칠팔 명이 대청 안으로 들어섰는데 위중평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음식을 먹고 있었다.

독비악걸은 적발교에서 지위가 상당하여 설사 교주 자신이라도 그에게는

정중한 태도를 취하는 처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일개 분타에 와서 이렇게 건방진 소년을 보자

대뜸 안색이 변하여 광소를 터뜨렸다.

위중평은 일부러 그 자의 약을 올리기 위해 웃음 소리가 끝나자마자

상을 딱 치며 호통을 질렀다.

 

"이놈들! 어디서 굴러먹던 자들이 들어와 이 공자님의 주흥을 깨뜨리는 거냐?"

 

"뭐라고 이… 이놈이…"

 

거지차림에다 한 쪽 팔밖에 없는 독비악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에다 맹렬히 잠력을 주입시켜 일 장을 쳐냈다.

 

"획!"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는 가운데 와장창! 하며 주안상이 뒤집혀 버렸고

그 바람에 대청에 있는 불들이 일시에 꺼져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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