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2. 기연(奇緣)

오늘의 쉼터 2014. 6. 20. 15:43

2. 기연(奇緣)

 

 

평아는 땀에 젖은 얼굴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이런 그의 얼굴에는 민망스러움이 가득차 있었다.

 

"사백, 사백께서는 어찌하여 제게 장백파(長白派)의 검법만을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영소는 빙긋이 웃으며 자상하게 대답했다.

 

"이 일은 너의 신상과 큰 관련이 있는 것이다."

 

평아는 재차 물었다.

 

"그리고 왜 분명히 저를 가르쳐 주시는 사부님이신데 왜 사백이라 부르라 하십니까?"

 

영소도장은 웃음을 거두더니 탄식을 하며 조용히 말했다.

 

"모든 것은 훗날 알려 줄 테니 지금은 묻지 말고 검법 연습이나 부지런히 하여라."

 

평아가 이렇게 물은 것은 수십 번이나 되었다.

그러나 영소 사백의 대답은 한결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평아는 그저 묵묵히 검술을 연마하고 완전히 터득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평아와 영소도장과는 어떤 사이일까?

평아를 열심히 가리키고 있는 영소는 강호의 시비에서 손을 뗀 지 오래였으나

절친한 친구를 비명에 잃자 그의 자식에게 온 신념을 쏟고 있는 것이었다.

유수와 같은 것이 세월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평아가 영소를 따라 문수별원에 온 지도 어언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는 본문의 검법과 장법, 그리고 경공술에 숙달한 달인(達人)이 되었다.

단지 흠이 있다면 그 내공의 정도가 약간 부족할 뿐이었다.

영소는 장백파의 무공 외에도 화산파의 절기 몇 가지까지 전수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아는 자기가 배운 경공술도 연습할 겸 서쪽에 있는 높은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그는 그가 배운 경공술을 있는 그대로 전부 시전해 보았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도 그는 마치 새가 날으는 것처럼 마음대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만만하던 그는 그만 이끼가 잔뜩 낀 바위를 잘못 딛어 걷잡을 수 없이 미끄러져 버리고 말았다.

 

"앗!"

 

평아는 순간적으로 외침을 터뜨렸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하 에서 깊이가 백장(百丈)이 넘는

절벽 밑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계곡 밑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조물주의 도움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의 공력 덕분인지 놀랍게도 한 군데도 다치지 않았다.

얼음같이 차가운 강물에 정신을 번쩍 차린 그는 급히 물가로 헤엄쳐 나와 바위 위에

몸을 얹을 수 있었다.

평아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깎은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였고 좁고 긴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양쪽 절벽 중간에는 비록 깊기는 하지만 밑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강물 양쪽으로는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었는데 하나같이 흔치 않은 것들이었다.

만약 그가 이곳으로 떨어지지 않은 상태라면 반드시 절경이라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는 어떻게든지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한참 두리번거리던 그는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깎은 듯한 절벽이며 까마득히 치솟아 지금 그의 경공으로써는 올라가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강물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았다.

돌연, 사사삭! 하는 소리가 들려 평아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순간 평아는 질겁을 하여 뒤로 물러섰다.

눈앞에 보이는 동굴 속에서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눈을 번득이며 밖으로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배… 뱀이다!"

 

평아의 입에서는 절로 소름이 끼치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 괴물의 머리통은 상당히 커서 그 크기는 마치 나무로 만든 물통만 했다.

만약 이것이 정말 구렁이 종류라면 사람을 한 입에 삼키고도 남을 정도였다.

평아는 바싹 긴장하여 쌍장에 진기를 주입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평아가 노려보는 가운데 그 괴상한 괴물은 천천히 구멍에서 나오더니

이윽고 몸통 전체가 드러났다.

그제서야 평아는 약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것은 구렁이가 아니라 무지무지하게 큰 거미가 아닌가.

이 거미는 워낙 거대하여 그 등판이 웬만한 책상 넓이와 맞먹을 정도였다.

비록 구렁이가 아니라 해도 이렇게 거대한 동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겁을 먹게 하기 마련이다.

거대한 거미는 다리를 길게 빼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왔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평아는 대뜸 공력을 주입시킨 쌍장을 떨쳐 냈다.

 

"펑! 펑!"

 

요란한 음향과 함께 거대하기 짝이없는 거미는 여지없이 장벽에 격중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거센 일 장을 맞은 거미는 웬 솜뭉치가 날아왔느냐는 식으로 평아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적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긴장되었던 평아는 시간이 지나자 차츰 정상을 회복했고 동심이 크게 일어난 평아는

거미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네가 이곳의 주인이냐?"

 

그러나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거대한 거미는 기적같이 그 커다란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평아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 이상하군. 거미가 사람의 말을 알아 듣다니…"

 

그러나 평아는 우연의 일치려니 생각하고 다시 목청을 돋구었다.

 

"그래 너는 나같은 손님을 환영하느냐?"

 

그러자 거미는 놀랍게도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평아는 아직 어린 마음에 호기심이 생겨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며 물었다.

 

"나는 지금 뱃속이 텅 비어 있는데 먹을 것 좀 줄 수 있겠느냐?"

 

그는 그저 장난삼아 해본 소리였다.

하지만 거미는 이상하리만큼 몸을 뒤로 돌리더니

따라오라는 듯 앞장을 서서 기어가는 것이었다.

평아는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려 거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이 거미는 자기가 나왔던 동굴로 다시 들어갔다.

동굴은 평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몹시 건조했고 또 깨끗했다.

큰 거미는 뒷쪽 절벽에 도달하자 동작을 멈추더니 그 물통만한 머리통을 뒤로 쳐드는 것이었다.

평아는 거미가 고개를 쳐든 방향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이 있었는데 붉은 색깔의 뚜렷한 산호 모양의 과일이 열려 있었다.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잎새가 다섯 개이고 그 잎새마다 크기가 구슬만한 붉은 과일이

달려 있었는데 열매에서는 기이한 향내가 풍기고 있었고 높이가 이 장 정도로 자라 있었다.

그는 신형을 날려 사부에게서 배운 경공술 가운데 호유장공(虎遊丈功)을 써서 담벼락에 붙어

순식간에 그 과일이 열린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과일 옆으로 접근하니 정신이 황홀해지도록 좋은 향기가 풍겨 왔다.

평아는 즉시 그 다섯 개의 열매와 잎을 떼어 품 속에 넣고는 날렵하게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두 개를 거미에게 던져주고 먼저 하나를 입에 집어넣었다.

이 과일은 달콤하고도 연했다.

입 속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사르르 녹아 버리는 것이었다.

하나를 먹고 난 그는 다시 하나를 입에 집어넣었다.

이어 나머지 하나도 먹으려다 그는 문득 사백의 생각이 떠올랐다.

 

'아 이름도 모르는 과일의 맛이 굉장히 좋구나.

하나는 남겼다가 사백에게 갖다 드려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는 먹으려던 생각을 버리고 품 속에 고이 간직했다.

 

돌연-.

그는과실을 먹은 후 곧 한 줄기 뜨거운 열류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란 평아는 급히 공력을 운행하여 열류를 인도하였다.

하지만 그 끓어오르는 힘이 너무 강대하여 그의 기초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죽는 모양이로구나…'

 

일순 평아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신은 불이 붙은 듯 뜨겁고 전신의 뼈마디가 제각기 터져 나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서운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는 끝내 머리가 어지럽고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상황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독과일이 아니었다.

이 산호같은 모양의 식물은 화삼과(火參菓)라는 것으로 도가(道家)에서는 자양단(紫陽丹)이라 한다.

이 과일은 화산(華山) 특유의 산물로써 그 열매를 맺는 기간 이 수십 년이나 걸리는 것인데

그 특유의 과일이 이곳 화산에 우연히 한 뿌리가 생긴 것이었다.

이 화삼과는 무림인들이 지보에 선단(仙丹)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그 화삼과와 천산(天山)에 있는 천 년 묵은 설연(雪蓮)을 동시에 복용하게 되면

곧 용호교위 일주천이 되어 일갑자라는 놀라운 공력이 증진되는 것이지만

그 용법을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먹었다가는 강맹한 기류에 순양지력(純陽之力)이 들끓어올라

전신의 혈맥이 팽창되어 나아가서는 혈관이 터져 죽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평아는 그 내막을 모르고 한꺼번에 두 알이나 먹어 버렸으니

어찌 견디어 낼 재간이 있겠는가.

죽지 않은 것만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평아는 갑자기 콧구멍이 확 뚫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청량한 공기가 폐부 깊숙히 스며들어 번쩍 정신이 들었다.

두 눈을 떠보니

그의 눈앞에 큰 거미가 쭉 찢어진 눈을 부릅뜨고 자기 앞에서

두 줄기 푸른 색이 감도는 기체를 자기의 코를 향해 내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통 사람 같으면 기절초풍하여 나가 떨어질 일이지만 평아는

원래 성격이 침착하였고 게다가 영조도장의 친전을 받은 몸이라

두려워하지 않고 거미를 주시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미는 일종의 현음단기(玄陰丹氣)로 자기 체내에 들끓고 있는 혈류를 도와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아는 즉시 운공을 하여 그 청량한 기운을 혈맥으로 인도하며 천천히 단전하고 인도했다.

이렇게 하기를 무려 두 시진.

평아는 그제서야 미친 듯이 격동하던 체내의 열류를 정상으로 융화시킬 수가 있었다.

다행히 평아는 기초가 잘 잡혀 있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말 세상과 하직을 고할 뻔했다.

이 우연한 인연으로 평아는 한 계단 더 올라서게 된 것이다.

그 막강한 역류가 체내의 기혈을 이리저리 뚫고 다니는 바람에 그 충격을 기적같이 견디어낸

평아는 전신의 기경맥이 시원하게 뚫렸을 뿐만 아니라 천궁(天窮)까지 뚫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를 도와준 거미는 적어도 삼십 년 이상의 진원을 소모한 듯

평아가 완전히 몸이 회복되었을 때는 사지와 머리를 전부 안으로 모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평아는 거미의 그 처량한 모습에 등을 툭툭 치며 위로했다.

 

"고맙다. 네가 나 때문에 아주 지쳐 버렸구나."

 

거미의 등을 어루만지던 그는 그 등에 무슨 글씨가 씌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그 위를 자세히 살피던 평아는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이것은 절전의 무공비급이 아니냐?"

 

그는 조심스럽게 거미 등의 이끼를 벗겨내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맨 위에 조화현공(造化玄功)이란 네 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바로 밑에는 또, '란선천지기 탈조화지기(孕先天之氣 奪造化之奇)'라고 적혀 있었고

그 밑으로도 많은 글자와 장법, 검식, 심지어는 초음신법(超音身法)이란 경공술까지

상세하고 정밀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맨 마지막에는 송대(宋代)의 진박(陳博)이 인연이 있는 자에게 준다는 글이 있었다.

평아는 꿈이 아닌가 싶었다.

 

'어떻게 한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비급을 얻기 위해 자기를 살려 주고 지쳐 버린 거미의 등을

벗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별다른 수가 없자

그는 그 위에 새겨진 글씨를 외우기로 작정했다.

어느덧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정신없이 글을 머리에 외운 그는 사백이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거미의 등을 몇 번이나 쓰다듬은 다음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사방은 높이가 백여 장이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평아는 절망을 느끼며 사방을 살폈으나 올라갈 만한 곳은 없었다.

돌연, 그는 자기의 몸이 새털처럼 가볍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그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건 두 알의 과일을 복용했기 때문에 생긴 조화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그는 자기의 내공이 얼마나 진전되었는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진력을 끌어모은 그는 허공을 향해 획 하고 몸을 솟구쳤다.

과연 믿지 못할 기적이 일어나 있었다.

그가 허공으로 몸을 날리자마자

그의 몸 전체는 마치 하나의 가벼운 깃털처럼 등실 허공으로 십여 장이나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허공으로 떠오른 그는 자기의 몸이 떨어지기 전에 쌍 장을 밑으로 후려쳤고

그 반탄력에 의해 그의 몸은 다시 오 장 위로 솟구쳤다.

자신을 얻은 평아는 절벽 옆에 약간 튀어나온 부분에 발끝을 붙였다가 다시 절벽 위로 날아올랐다.

이렇게 하여 그는 간단하게 절벽 위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절벽 위에 당도한 그는 한동안 멍청히 넋을 잃었다.

그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단 하룻만에 나의 공력이 이토록 증진되다니…'

아무리 보아도 꿈은 아니었음을 깨달은 평아는 뛸 듯이 기뻐하며 미친 듯이

문수별원을 향해 달려갔다.

영소도장은 뒷짐을 진 채 정원에서 이리저리 오가며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사백님!"

 

한 소리 크게 외친 평아는 가볍게 몸을 날려 달려갔으나 그 속도가 무지무지하게 빨랐다.

순간, 급히 평아의 손을 낚아챈 영소도장의 초조와 불안해 하던 눈빛은 곧 경악의 빛을 나타냈다.

그는 한동안 반짝이는 평아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따라오너라."

 

평아도 말없이 도장을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영소도장은 자기의 침상 위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평아는 야단을 맞을 것을 염려하여 가슴을 두근거리며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돌연 영소도장이 납덩어리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왔느냐? 거짓없이 말해라."

 

"그건…"

 

이윽고 평아는 자기가 오늘 겪었던 일을 상세하고도 조심스럽게 아뢰고는

자기가 따가지고 온 과일 한 개와 과일의 잎사귀 다섯 개를 꺼냈다.

 

"바로 이 과일입니다.

이것이 체내에 들어가면 발해지는 힘이 무섭습니다."

 

영소도장은 그것을 받아쥐고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보더니 안색이 지극히 심각했다.

한참 살펴보던 영소도장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하하하…"

 

그는 흥분한 나머지 웃음을 그치지 못하며 소리쳤다.

 

"정말 기이한 인연이구나. 정말 기연이야.

과연 신주검성(神州劍聖)이 구천지하에서 기뻐하겠구나."

 

"…"

 

평아는 일순간 무슨 영문인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영소도장이 기뻐하자

자기도 덩달아 기쁜 표정을 지으며 자기가 외었던 거미 등 위의 글귀를 줄줄 외었다.

영소도장은 자상한 눈길로 평아를 바라보며 기쁨에 찬 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없다. 시간이 나는대로 너는 그것을 종이에 적어라.

그러면 내가 천천히 일러주마."

 

그리고는 손에 든 과일을 가리키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것은 화삼과라는 것으로 한 나무에 다섯 개 밖에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천 년에 걸쳐 겨우 한 번 열매를 맺는 아주 희귀하기 짝이없는 과일이다."

 

이어 영소는 그 과일의 내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화산파의 사조인 진박이 그가 집에서 기르던 영물인 거미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언 천 년이 지난 일이라니 평아는 거의 믿을 수가 없었다.

 

"네가 그 기연을 얻은 것은 정말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러자 평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사백님, 그렇게 진귀한 것을 제가 먹었는데 어찌하여 저는 죽을 뻔했던 것입니까?

만약 그 거미가 단기(丹氣)로 저를 도와주지 않았던들 저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영소도장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의 모든 진품(珍品)이 다 그렇겠지만 본문의 이 화삼과는

그 사용방법을 모르면 해를 당하는 것이다.

이것을 천 년 설연과 같이 복용하면 진귀한 효과가 발생한다."

 

여기까지 말한 영소도장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 내 방에 두 알의 설연이 있으니 내가 이 화삼과와 그 것을 조제하여

용호구환단(龍虎九還丹)을 만들겠다.

장차 하산을 하여 강호를 다닐 때 사람을 구하는 일에 요령껏 사용하도록 해라."

 

영소도장은 공력뿐만 아니라 구십 세의 노령답게 그 심기도 깊었다.

그는 화산파의 장로로써 혼자만 생존해 있는 처지였다.

평아가 모르는 자기의 내력,

그것을 영소도장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신주검성 위무종(衛無終)과

그의 사이가 막역한 친구였기 때문이었고 그리하여 영소의 평아에 대한 사랑은 지극한 것이었다.

그는 평아의 앞날에 대한 가능성을 치밀하게 세워놓고 있었다.

영소는 잠시 평아를 주시하다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자! 이젠 우선 가서 푹 쉬도록 해라."

 

그러나 평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지금 조금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영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야무지게 말을 이었다.

 

"사백님께는 늘 저에게 저의 내공이 증진되는 날 월륜검법(月輪劍法)을

가르쳐 준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들은 영소도장은 갑자기 폭갈을 내질렀다.

 

"맹랑한녀석!"

 

그러더니 대뜸 평아를 향해 일 장을 후려쳤다.

평아는 자기의 사백이 이토록 갑작스럽게 출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획!"

 

강대한 힘을 지닌 무형의 힘이 그의 몸에 천만 근이나 되는 중압감을 갖고 거세게 몰려들었다.

 

"엇!"

 

깜짝 놀란 평아는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는 황급히 전신의 공력을 운행시켜 있는 힘을 다해 항거했다.

평아의 전신에서는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결코 의식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만약 엇그제의 평아라면 이 강력한 검기에 숨이 막혀 금방 거꾸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화삼과를 먹은 기연으로 인하여 그 모진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얼마나 되었을까?

평아는 드디어 자기의 주위에서 그 경기가 서서히 밀려나는 것을 깨달았다.

 

"좋다!"

 

비로소 영소도장은 만면에 활짝 밝은 미소를 짓더니

곧 벽쪽으로 가서 두 개의 물건을 꺼냈다.

하나는 고색이 창연한 장검이었고 하나는 양가죽으로 된 두루마리였다.

 

"이것이 바로 장백파가 강호에 대명을 떨치게 했던 백산검보(白山劍譜)와 무흔검(無痕劍)이다.

무흔검은 장백의 진산지보다. 나는 오늘 밤으로 이 두 가지 물건을 너에게 넘겨주마."

 

"사백…"

 

평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며 무릎을 꿇었다.

영소도장의 안색은 엄숙하게 변했다.

 

"이 두 가지 보물은 장백파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장문인만이

대대로 보관해 내려 오는 물건이다.

오늘 내가 친구를 대신하여 이것을 너에게 넘겨주마.

오늘부터 너는 장백파의 장문인이 되는 것이다."

 

영소도장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인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너는 이 검으로 정의를 위해 악을 물리치는 데 힘이 되어야 하며 또 부모의 설욕을 한 후

다시 당년의 장백족 위명을 되찾는 데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알겠느냐?"

 

하고는 검과 검보를 평아에게 넘겨 주었다.

평아는 숙연한 자세로 두 가지 물건을 받아들고 이렇게 물었다.

 

"사백님, 오늘 저의 신세와 모든 것을 전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영소도장은 노안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곳에 편히 앉아라.

그렇잖아도 내 오늘 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얘기해 주마."

 

평아는 바싹 긴장하여 시키는대로 정좌를 하고 앉았다.

영소도장의 목소리가 천천히 들리기 시작했다.

 

"너의 부친은 바로 십 년 전 천대(天臺)에서 백대 문파가 모여 논검을 할 때

신주검성이란 칭호를 얻으신 위무종(衛無終)이라 하신다."

 

"아버님의 이름이 위무종…"

 

평아는 꿈 속 같이 되뇌어 보았다.

영소도장의 말은 계속되었다.

 

신주검성이 된 어느 날 밤

수없이 많은 흑백쌍도의 고수들이 장백파로 몰려와 다짜고짜 쳐부수기 시작하였다.

장백파의 제자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적에 대항하여 용전분투 했으나 중과부적이라

당해 낼 도리가 없음은 명백하다.

당시 신주검성 위무종은 홍모음효(紅毛音梟)란 자의 열무장(裂膚掌)에 중상을 당하고 말았다.

어쨌든 이 일진의 전무후무한 격투를 벌인 결과 장백파는 전멸을 하였고

당시 장백파를 포위 공격했던 무리도 겨우 네 명 만이 목숨을 부지했다.

그 자들의 이름은 삼흉(三兇) 일효(一梟)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흑백쌍도의 고수들이 무엇 때문에 위무종의 장백파를 공격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또 평아의 어머니는 평아를 낳자마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게다가 위무종은 아직도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여인에 비호되어 사지를 벗어났다.

하지만 그 여인은 그 후로 한 번도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소도장이 소식을 듣고 장백에 당도했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후라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 때 영소도장은 숨이 붙어 있는 한 노인에게서 평아의 소식을 들었다.

즉 꼽추영감의 등에 엎혀 신가보로 피신을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영소는 곧바로 평아를 화산으로 데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공연히 그들의 눈에 띠였다가는 그들이 씨를 말리려고 덤빌 것이 염려되어

그냥 놔두었고 또 영소는 그 당시 잃어버린 검과 검보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

평아를 신가보에 그냥 놔두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되어 지금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제서야 평아의 내력이 밝혀졌다.

이야기를 다 들은 평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디 그뿐이랴.

두 눈에서는 복수의뜨거운 불길이 이글거렸고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으나 참지 못하고 끝내 통곡을 하고 말았다.

세상이 이토록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으랴.

장백파의 위엄을 산산히 깨뜨려 버린 원수, 원수…

영소도장은 평아가 실짓 울도록 놔두었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자, 이제 너에게는 열심히 하는 노력만이 남았다."

 

평아는 눈물을 씻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사백님, 그 삼흉 일효란 도대체 어떤 인물들입니까?"

 

영소도장은 침착하게 설명해 주었다.

 

"삼흉이란 막북일흉(漠北一兇), 육지두타(六指頭陀),

그리고 열염신군을 가리켜 하는 말이었고,

또 일효란 바로 사강지수인 적발교주 홍모음효였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흑도에서 명성을 떨치는 거두들이였다.

 

"그들은 모두가 풍채와 기풍이 당당하며 머리를 잘 쓰는 효웅들이다.

그러니 너는 우선 조화현공과 일륜검법을 터득해야 한다…"

 

평아는 먼저 그것들을 연마하여 완전히 터득한 후 장백산으로 돌아가

그 당시 목격했던 인물들을 모색하여 천천히 복수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영소도장이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내가 너의 공력을 시험해 보았더니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더구나.

그러니 너는 내일부터 당장 검법을 연마하거라."

 

평아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영소도장이 자기의 부친과 절친한 친구사이였다는 점에서

그는 또다른 친근감과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젠 네 방으로 돌아가 우선 검보부터 읽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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