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6. 설원추종

오늘의 쉼터 2014. 6. 20. 15:46

6. 설원추종

 

 

오늘 밤 이곳에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가 추혼천녀를 상대하려고 나타난 고수들이니만큼

그들 전부는 강호에 쟁쟁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인물들이었는데 뜻밖에도 추혼천녀가

손을 쓰기도 전에 중간에서 위중평이란 도깨비 같은 존재가 나타나 상대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두 명의 두타는 분노와 수치로 인해 번개같이 됨을 날려 위중평을 향해 맹공격을 퍼부었으나

위중평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섰다.

두 사람의 공격이 막 몸에 닿는 순간 위중평은 번개같은 일 초 이식으로 가벼운 반격을 가했다.

 

순간-.

 

"으악!"

 

두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다시 어둠 속에 잠적한 공기를 찢더니 적발교의 남삼 두 존자의 몸은

마치 실이 끊긴 연처럼 허공으로 저멀리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위중평이 단숨에 번개같은 솜씨로 삼흉좌하의 세 명 존자를 가볍게 처치해 버리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그만 크게 놀라 사람들은 입만 쩍 벌린 채 일시간 말을 토해 내지 못했다.

이 때 홍삼을 입고 시체같이 깡마르고 볼품없는 노인이 맹렬하게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달려나오더니 고함을 내질렀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놈이 악랄하기 그지없구나! 오냐,

오늘 밤 나 독수광중(毒手狂中)이 네게 뜨거운 맛을 톡톡히 보여 주겠다!"

 

말을 끝내고 황색 노인은 마치 닭다리처럼 생긴 귀도(鬼刀)로 흉악하고 위맹스럽기 그지없는

공격을 감행해 들었는데 이 독수장중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감형성(甘形城)에서도

이름난 마두 중의 한 명이였다.

그는 사람됨이 흉칙하고 악랄무비하여 사람의 피라고는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을 만큼

인정이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악랄하고 무시무시한 타혈수법(打穴手法)

이었다.

독수장중은 경험이 풍부한까닭에 출수 또한 교활하고 음독하였고 위중평은

그의 위맹한 일 장을 받고 어이없이 뒤로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위중평의 무공이 독수장중만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대전 경험이 워낙 없었던 까닭에

그만 선기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위중평은 내심 매우 초조했다.

독수장중의 악랄한 공격을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끝에 즉시 전력을 다해

거센 두 줄기의 장풍을 뻗어내었다.

 

"휘익!"

 

해일이 육지를 삼키는 듯 회오리 같은 광풍이 휘몰아치자

독수장중은 감히 그것을 맞받지 못하고 황망히 몸을 틀어 피해 내었다.

이 순간을 이용해 위중평은 소리를 질렀다.

 

"이얍!"

 

하는 맑은 기합 소리를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맹호처럼 반격을 가해들었다.

여유만만하게 공격을 시도하던 독수장중은 즉시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장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편-.

군중들 틈에 끼어 있던 진중이독(秦中二毒)과 태행일살(太行一煞)이 형세가 불리한 것을 보자

즉시 달려나와 구원의 손길을 뻗으려 했다.

 

"이놈, 멈추어라!"

 

고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어둠을 째는 처절한 외마디 비명이 허공 저멀리까지 퍼져 나갔고

그 순간 독수장중의 몸뚱아리는 마치 바람개비처럼 수 장 밖으로 힘없이 날아갔다.

그것을 본 진중이독과 태행일살은 두 눈에 불을 켜고 이를 갈아붙였다.

 

"네이놈, 오늘 우리가 네 놈을 살려두나 보아라!"

 

그리고 나서 장내에 있던 군웅들을 향해 외혔다.

 

"여러분, 이놈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전부 포위 공격을 하시오!"

 

"와아아…"

 

"죽여라! 죽여…"

 

갖가지 음성이 요란하게 터져 나오며 마도들도 마치 벌집을 쑤셔 튀어나온 벌떼처럼

위중평을 향해 무서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으나 위중평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사면팔방에서 포위 공격을 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침착하게 처치했다.

마치 생사의 투쟁과 같은 이 싸움을 보며 위중평은 혼자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그 당시 아버님께서는 이렇듯 미처 날뛰는 악도들의 공격에 돌아가셨겠구나…'

 

순간 위중평의 온몸에는 복수의 분노와 용기의 뜨거운 피가 들끓어 올랐다.

위중평은 하늘을 우러르면서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아버님, 저를 보십시오! 제가 오늘 아버님을 대신해 이 무흔검으로 아버님의

신주검성이라는 위명을 다시 찾아 드리겠습니다."

 

순간-.

 

"창!"

 

하고 맑은 금속성 소리가 터져 나오며 은은한 달빛을 받은 무흔검이 번쩍하고 빛났다.

원수, 분노, 살기 이것이 무흔검에 집중되어 시퍼런 검빛이 눈이 부시도록 주위에

줄기줄기 퍼져 나갔다.

번쩍 허공에서 시퍼런 빛이 번득이자,

 

"으악!"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붉은 무지개가 허공으로 아로새기며 주위에 흐트러졌다.

단 한 번의 칼놀림에 다섯 사람이 쓰러져 간 것이다.

피를 보자 위중평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으하하하하… 드디어 복수의 기회는 왔다.

죽어라! 얼른 죽어라! 이 무흔검 아래 귀신이 되어라!"

무지개 같은 검영이 군중 속을 한 번씩 휘집고 번쩍일 때마다

사람들은 마치 낙엽처럼 그 목숨을 잃어갔다.

시체는 차츰 늘어갔다.

추혼천녀를 죽이려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도 더 값없이

여기는 사람들이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무공이 악랄하고 또 그 수법이 잔인하고 악질적인

인간은 처음이었다.

위중평이 미친 호랑이처럼 날뛰는 가운데 시체는 쌓여 어느새 태반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고 피는 흘러 냇물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것이 곧 승리를

대변해 줄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살아남은 자들이기에 그만큼 무공도 높기 때문이었다.

진중이독과 태행일살을 비롯해 화합상인(和合上人) 백의금자(白衣錦者) 귀인금호(鬼人金虎)

등등 칠팔 명의 최고 수뇌급들이 남아 있었다.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처절한 혈투는 온 밤하늘을 메울 듯 계속되었으나

강호의 여살성 추혼천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까지 치며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이런 행동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추혼천녀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일이어서 표정은 허무에 가깝도록 차갑고

말이 없지만 그녀의 입술은 조금씩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따라서 그녀의 표정은

미세한 변화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의 눈앞에는 자꾸만 위중평의 준수하고 영준한 모습이 자꾸 그려지는

것이다.

추혼천녀는 갑자기 전권 안으로 뛰어 들어 위중평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 불현듯

이는 욕망에 눈을 질끈 감고 참아 버렸다.

그것은 아마 위중평에게 패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느새 주위가 희뿌옇게 밝아오면서 동녁에 불그레한 빛이 감돌았다.

날은 밝아오고 있으나 밤새껏 계속되어도 처절한 혈투는 그래도 끝날 줄은 몰랐다.

그 때였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번개같이 혈투장 앞에 내려서고 있었다.

나타난 사람은 잿빛 양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나이는 약 칠십 정도 되어 보였고

용모가 징그럽게 생겨 흉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위중평은 치열한 결투를 벌이고 있었으면서도 나타난 노인이 상당한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훔쳐 보고 있었다. 위중평 또한 피와 살로 뭉쳐진 하나의 인간이었기에

힘의 한도라는 것이 있었다.

위중평은 비오듯 땀을 흘리며 점차 숨을 가쁘게 내쉬기 시작했다.

더구나 정체불명의 노인까지 나타나자 더 이상 버티다가는 어떻게 될지 몰라

속전속결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얏!"

 

하는 맑은 기합 소리가 귓청을 울렸다.

위중평은 급급히 몸을 틀며 장홍사일(長紅射日)과 월괘속상(月掛續相)

그리고 종지비개(種地飛介) 등 월륜검법(月輪劍法)에서 제일 심후하기로 이름난 세 절초를

시전해 내었다.

이 천하 제일의 검법은 그 이름에 아깝지 않게 과연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차가운 검빛과 피보라가 눈앞에 한 번 그어졌을 때였다.

 

"윽!"

 

낮은 비명과 함께 태행일살의 오른쪽 팔이 커다란 금도와 함께 허공으로 높이 날아갔다.

다시 두 번째의 한광이 그어지는 순간 진중이독 등은 크게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살인에 눈이 뒤집힌 위 중평이 그들에게 여유를 줄 리가 없었다.

 

"죽어라!"

 

한 마디 괴성과 함께 그는 승수잔산(承水殘山)으로 귀안금호의 면문(面門)을 찍어 들었다.

 

"챙그랑!"

 

맑은 금속성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폭사되어 나가더니 귀안금호는 시뻘건 피를 내쏟더니

뒤로 주르르 물러났다.

위중평이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고 다시 다가들어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고 하는 순간,

 

"멈춰라!"

 

하는 음산한 폭갈성이 장내에 터져 나왔다

이 때 두 눈알이 메기처럼 툭 튀어나온 괴노인이 신형을 번득이는 순간

이미 두 사람의 가운데에 끼어 들었는데 위중평은 이 서슬에 급히 공격을 멈추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진중이독과 귀안금호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사자를 맞은 것처럼

급히 꽁무니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치열한 혈투가 이 괴노인이 나타남으로 일단 멎고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가운데

장내에는 이와 반대로 침울하고 무거운 공기가 뒤섞여 흘렀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 노인이 위중평을 향해 냉랭한 어조로 외쳤다.

"네 놈은 장백파에서 대체 무엇을 하는 놈이길래 그처럼 악랄한 살인을 자행하느냐?"

괴노인은 나타난 신법이 유연성처럼 빨라서 과연 다른 데가 있었다.

어느새 노인은 위중평의 검법에서 그가 월륜검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위중평은 내심 흠칫했으나 억지로 태연한 신색을 회복하며 말을 꺼냈다.

 

"내가 바로 장백파의 장문인이오만 귀하는 누구요?"

 

위중평은 그 대답은 실로 오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인은 그 말을 듣자 가소롭다는 듯 얼굴을 하늘로 쳐들며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너같이 어린 놈이 장백의 장문인이라고? 하하하…"

 

위중평은 불끈 화가 치밀어 싸늘하게 외쳤다.

 

"웃음을 거두고 어서 내 물음에 대답하시오. 당신은 대체 누구요?"

 

괴노인은 그제야 웃음을 거두더니 두 눈에 정망을 번득이며 말을 토해 내었다.

 

"이 강호에선 모두 나를 석룡노괴(石龍老怪)라 부른다. 알겠냐?"

 

위중평은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에 그 노인이 이렇게 설명을 해주어도

알 수가 없었기에 다만 그는 약간고 개를 끄덕여 보이며 무뚝뚝하게 말을 뱉아내었다.

 

"그래 귀하는 오늘 나와 일 장의 고하를 겨루고자 이 일에 참견한 거요?"

 

석룡노괴라 자칭한 노인은 다시 험악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나는 네놈의 초식이 워낙 악랄하기 때문에 나선 것이다!"

 

위중평은 노인이 자꾸 자기를 비웃는 것에 슬그머니 울화가 치밀었다.

 

"좋소. 그렇다면 장법의 고하를 한 번 겨루어 봅시다!"

 

석룡노괴는 기다렸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내가 응해 줄 생각이 있다!"

 

말을 끝낸 석룡노괴가 커다란 소매를 펄럭이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웅후한 장력이 소매를 통해 격출되는 것이었다.

위중평은 노인이 아까 나타나던 신법으로 미루어 보아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일 장의 반격을 쳐내었다.

 

"펑!"

 

순간 경천동지할 굉음이 크게 울려 퍼졌다.

위중평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고꾸라질 듯 신형을 비틀거렸지만

석룡노괴는 두어 걸음 물러나서야 겨우 몸의 중심을 잡는 듯했다.

 

막 몸의 중심을 잡는 순간,

 

"윽!"

석룡노괴는 갑자기 등 뒤로부터 성난 파도와 같은 경풍이 습격해 오는 것을 느끼고

나직한 신음을 토해 내었다.

석룡노괴는 고꾸라질 듯 앞으로 서너 걸음 달려오더니 시뻘건 선혈을 왈칵 뿜어내었다.

석룡노괴는 두 눈을 무겁게 내리감고 들끓는 기혈을 억누르며 한참 안정을 취한 후

냉랭하게 입을 떼었다.

 

"이놈, 네놈이 지금 사용한 것은 화산파에서 실전된 지 오래된 일양래복장이렷다!"

 

위중평은 준수한 얼굴을 들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제법 박식하구려. 그것까지 다 알아 맞추는 것을 보니까. 하하…"

 

이 일양래복장이라 함은 장력이 뻗어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목표를 격중시키는 괴이하고도

대단히 무서운 장력이었기 때문에 무림에선 가히 이것에 대적할 적수를 찾기가 어렵다.

석룡노괴는 한참 침묵을 지키며 위중평을 쏘아보고 있다가 처절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그래, 오늘은 노부가 졌다는 것을 순순히 시인하겠다.

그러나한 달 후 천산 만불사에서 다시 몇 초의 가르침을 받고 싶은데, 어떠냐?"

 

위중평은 남아의 기개를 십분 발휘해 호탕하게 대답했다.

 

"하하…좋소.

이 위모가 그렇지 않아도 천산 만불사에 볼일이 있었던 터인데 한 달 후에 꼭 가리다."

 

석룡노괴는 그의 대답을 듣자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듯 급히 신형을 날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위중평은 그날 밤 내내 격렬한 격투를 벌여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기에 석룡노괴가

사라지자 위중평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로소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동녘에 시뻘겋게 떠오르는 태양은 밤새 진기를 소모시킨 위중평의 창백한 얼굴 위로

그림자를 던져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위중평은 다시 시선을 거두어 이번에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처참한 시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인, 거기에는 필시 인성(人性)을 상실한 잔혹성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위중평은 자기의 손에 죽은 시체들을 하나하나 굽어보며 이름모를 회의를 느꼈다.

위중평이 길게 장탄일성을 내뿜자 왈칵하고 두 모금의 선혈이 목구멍으로 넘어왔고

이어 그는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다.

이 때 한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위중평을 부축하여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전해왔다.

 

"제가 행공(行功)을 좀 도와 드릴까요?"

 

그 사람은 바로 잔인하기로 이름난 강호의 살성 추혼천녀가 아닌가?

위중평은 그녀의 따뜻한 위로를 받자 가슴을 확 피며 의연하게 대꾸했다.

 

"고맙소, 낭자. 하지만 아직은 나 혼자 일어설 수가 있소."

 

이 말을 끝내고 위중평은 비틀거리는 신형을 억지로 가누고 객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때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사라져 가는 위중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전 느끼지 못했던

어떤 안스러움을 느꼈다.

 

"아…"

 

추혼천녀는 탄식인지 신음인지 모를 한숨을 길게 내뿜으며 찬란하게 퍼져오는

아침 햇살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시간은 어느덧 봄이라는 훈훈한 계절로 접어들고 있었다.

실상 말만 봄이지 이곳 관외(關外)는 아직까지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눈으로 인해

두 개의 산령(山嶺)과 평야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간간히 불어오는 봄바람도 이 얼음을 녹이지는 못했다.

아직은 굇부리가 시리고 코끝이 시큼한 겨울의 마지막 발악인 듯한 추위였기 때문에

온통 하얀 것이 마치 흰 천이 덮여 있는 듯한 넓은 광야에는 아무도 발길을 내딛는

사람이 없어 정적 속에 묻혀 가고 있었다.

그러나 산등성이를 넘어 한 조그마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는 위중평이었다.

위중평은 아무 생각도 없이 장발산의 하얀 눈이 덮인 산령을 따라 외롭게 길을 가고 있었다.

사방의 경물은 외롭고 몹시 쓸쓸하며 반겨 주는 것은 녹지 않은 눈뿐이었으나

지금 위중평의 마음 속에는 뜨거운 피가 들끓고 있었다.

오랫동안 떠나온 고향을 찾아 그 길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무한한 감회를 느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는 감정이기에 위중평은 눈앞에 웅후하게 펼쳐져 있는

그리운 고향산천을 바라보며 참지 못해 크게 외쳤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 내 고향인가!"

 

그 때였다.

 

"히히잉

 

갑자기 다급한 말울음 소리가 터지더니

위중평이 탄 말이 무엇에 놀란 듯 앞발을 쳐들고 요란하게 울어대었다.

 

순간-.

 

"저 피! 붉은피!"

 

하얀 눈 위에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선연하게 수를 놓은 광경이 위중평의 사야에 분명히 들어왔다.

그러나 위중평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핏방울을 쫓는 위중평의 시야에 확대됨에 따라 무수히 많은 양의

피가 마치 눈 위에만 발한 꽃처럼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이것은 너무 많은 양의 피었다.

횐눈에 떨어져 더욱 선연한 선홍색의 피는 그 범위를 상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 얼마 전 이곳에서 굉장한 혈전이 벌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핏자국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 보니 과연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처참하게 죽어 버린

시체를 발견하였다.

위중평이 앞으로 다가가 그 시체에 손을 대보니 아직 채 죽지는 않았다.

이것으로 미루어 격투가 벌어진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위중평은 어지럽게 찍혀 있는 발자국을 따라 말을 몰았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위중평은 은은히 기합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듣자

즉시 말머리를 돌려 때마침 불어오는 차가운 북풍을 휩싸안고 앞으로 달려갔다.

바람은 바닥에 싸인 눈가루를 날려 시야를 흐리는 것이 다시 겨울이 되돌아 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 위중평은 흐릿한 시야로 한 패의 인물이 늙은이와 젊은이를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중평은 제일 먼저 그 젊은이에게 눈이 갔다.

아직 청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위용을 갖추고 있는 소년의 나이는 위중평과 비슷했고

손에 청동검(靑銅劍)을 쥐고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왼쪽 팔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 있어

아마 상당한 부상을 입은 듯했다.

이 때 위중평은 그 소년이 쓰는 검법이 장백파의 검법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크게 흥분하며 소리쳤다.

 

"모두들 손을 멈추시오!"

 

고함과 동시 위중평은 언덕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향해 몸을 날려

즉시 싸움판에 들어섰다.

이 때 포위 공격을 하고 있는 자들은 한결같이 노련한 자들이었는데 나타난 자의 공력이

매우 심후한 것을 보자 분분히 뒤로 물러섰으나 막상 현장에 나타난 인물이 계집애처럼

곱상하게 생긴 소년인 것을 보자 즉시 긴장감을 풀며 욕설을 퍼부었다.

 

"원, 별게 사람을 다 놀라게 하지 않나?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위중평은 우선 품 속에서 용호구양단 한 알을 꺼내 부상을 당한 소년에게 넘겨 주었다.

 

"자, 이것을 절반으로 갈라 반은 복용하고 반은 가루로 만들어 상처에 바르시오.

그러면 속히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요."

 

소년은 힘겹게 싸움을 벌이고 있던 차에 갑자기 벌어진 이 변화에 반신반의 하면서도

약을 받아 들었다.

노인과 소년을 공격하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몹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위중평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귀두도가 일으키는 바람을 가볍게 피해 내며 위중평은 신형을 틀어 좌우로 공격해

들어오는 귀두도를 빼앗아 가볍게 부러뜨렸다.

위중평은 그것을 땅바닥에다 팽개치며 크게 소리쳤다.

 

"이따위 장난감으로 누구를 겁주려 하느냐?"

 

눈 깜박할 사이에 귀두도를 빼앗는 경이할 공력을 본 한 패의 무리들의 안색이 싹 질리더니

즉시 슬슬 꽁무니를 빼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무리들이 전부 도망을 가 버리자

그제야 노인이 다가서며 공손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우리 조손(祖孫)의 생명을 구해 주신 은인의 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위중평은 손을 내저으며 가법게 웃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크게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그런데 노인장께선 장백파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요?"

 

노인은 그 말에 크게 놀라는 표정이더니 오히려 조용히 되물었다.

 

"아너, 상공께선 무슨 이유로 그것을 묻는 것입니까?"

 

위중평은 계속 웃음을 잃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르신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제가 책임지고 장백파를 옹호해 드릴 테니까요."

 

노인은 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눈만 희둥그렇게 뜰 뿐이었다.

 

"상공,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위중평은 정색을 하며 말을 꺼냈다.

 

"소생은 위중평이라고 하며 바로 신주검성의 아들입니다.

이번에 아버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백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아… 공자께서 드디어 오셨군요…"

 

노인은 갑자기 무릎을 털썩 꿇더니 위중평을 덥석 끌어안았다.

 

"아… 하늘도 결코 무심하지 않으셨군요. 감사합니다"

 

노인은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인의 안면 근육은 흥분인지 반가움인지 모를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위중평은 이 노인의 신분을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그 격동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정도 짐작이 들어 즉시 무릎을 꿇어 노인을 부축했다.

 

"어르신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노인은 그대로 흐느끼며 남은 눈물을 몇 방울 더 떨어뜨리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으리께서 변을 당하신 후 노부는 그 복수를 하기 위해 몹시 애를 썼지만 결국 능력이 모자라

중간에서 좌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노인의 말을 여기까지 듣자 그제서야 그가 자기 부친이 살아계실 때의 노복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위중평은 노인을 조용히 위로하며 말을 꺼냈다.

 

"어르신네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제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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