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3. 강호입문(江湖入門)

오늘의 쉼터 2014. 6. 20. 15:44

3. 강호입문(江湖入門)

 

 

평아는 방으로 돌아와 우선 검보를 펼쳐 보았다.

검보에 적혀 있는 초식은 불과 십이 초와 서른여섯 식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변화가 다양하고 심오하기 그지없음을 알 수 있었다.

평아가 비록 완벽한 기초가 있고 해득력이 강해도 그것을 익히는 데는

한 달이 족히 걸릴 것 같았다.

그는 다시 거미 등에서 외운 비급을 한 자도 빠짐없이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는 거기에 이름을 붙였다.

 

"현구보록(玄龜寶錄)."

 

그 후부터 평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된 수련을 거듭하여

반 년이라는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말았는데

그동안 평아의 무공은 놀라우리만큼 진전되어 명실공히

일류 고수의 대열에 끼일 수 있을 정도였다.

스스로 모든 것이 숙달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하산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어느 날, 평아는 드디어 마음을 정하고 영소도장에게 작별을 고했다.

 

"사백님, 이제는 산을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영소도장은 자리에 앉은 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백은 금후부터 십 년 동안 상승무공을 참수하기 위하여 폐관을 하러 들어간다…"

 

여기까지 말한 영소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이 길로 하산을 하도록 해라."

 

그리고는 재차 당부하기를-.

 

"부디 몸조심하고 모든 일을 침착하게 처리해야 하느니라."

 

평아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이토록 큰 은혜가 어디에 있으랴.

평아는 비록 하산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막상 깊은 정이 든 사백과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자

눈물부터 쏟아졌고 이것을 본 영소도장는 대견스러운 듯이 평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강호로 나가는 것이니 서운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이렇게 말하는 영소의 노안에도 뽀얀 안개가 서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영소도장은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너는 당당한 장백파의 장문인이다.

그러니 평아라는 어린 이름은 그만 써라.

이 사백이 너에게 지어 놓은 이름이 있다.

위중평(衛中平)이란 이름이다.

평아, 이제부터는 위중평이 된 것이다."

 

위중평은 재삼 감사의 예를 올렸다.

 

"사백님의 이 은혜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중평-.

그는 환경의 영향을 받아 성격이 괴팍했다.

하지만 그의 원래 성격은 순후하고 부드럽기 짝이없었다.

그는 자기가 소상하게 적은 현구보록을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중평은 사백님의 깊으신 은혜를 받아 조그만 하지만 보답할 것이 있습니다."

 

하고는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현구보록을 받은 영소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더니 나직이 도호를 외우며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네가 이렇듯 은원을 분명하게 하니 이 사백도 거절하지는 않겠다."

 

하고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명월(明月)이 게 있느냐?"

 

즉시 밖에서 시중을 드는 명월이가 들어왔다.

 

"너는 속히 장문사백을 이리 모셔오너라."

 

"예."

 

시중드는 어린 도사는 곧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화산파의 현입 장문인은 청허(淸虛)도장이라 하고

또 영소도장의 사질뻘이 되는 사람이었다.

 

사백의 부름을 받은 청허장문인은

즉시 두 명의 동자를 데리고 문수별원에 도착하였다.

 

"사백님, 불러계시옵니까?

 

"그렇네. 어서 들어오게."

 

이윽고 청허가 들어오자

영소도장은 위중평을 가리키며 소개를 하였다.

 

"이 사람은 신주검성의 아들 위중평이라 하며 당금 장백파의 장문인이네.

차후 부디 서로 친밀하게 지내기를 바라네."

 

위중평은 크게 절을 올리며 공손히 입을 열었다.

 

"중평이 사형께 인사올립니다."

 

청허장문은 화산파의 장문이이며 오십이 넘어 반백이 되어 있었다.

이런 그는 나이 어린 사람과 사형제라 하기가 약간 민망스러웠다.

그러나 엄연히 사백이 키운 위중평이니 그렇게 칭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는 슬쩍 모르는 척하고 사제라는 칭호를 삭제시켰다.

 

"소협, 인사를 받아 반갑소."

 

이 때 영소는 위중평이 절벽 밑에서 있었던 기우를 설명하고 난 뒤

현구보록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현구보록은 위중평이 본파의 영원한 보물로 증정하기로 했네."

 

화산파의 무공에 대해 장문인이 그 내막을 모를 리 없다.

이미 화산파에서 실전된 지 오래인 조화신공과 초음신법은

신비하기가 짝이없을 뿐만 아니라 절묘하기도 세상에 그 짝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청허장문은 가볍게 목례를 했다.

 

"빈도가 본파를 대표하여 사제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네."

 

위중평은 급히 답례를 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러나 피차간에 이것은 단지 인사치레일 뿐이었다.

영소는 눈치가 빨라 이들 사이에 오해가 생길까봐 급히 입을 열었다.

 

"자, 모두 정전으로 가서 얘기하세.

이제부터 화산과 장백은 서로 협조를 해야 되니까."

 

이 때 청허도장은 이미 조금 전의 오만했던 태도를 버리고

다정하게 위중평의 손을 잡고 정전으로 나갔다.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을 소집하였다.

청허는 분향재배를 하고 현구보록을 신안 위에다 올려 놓고 선포를 했다.

 

"본파의 개산조사이신 진박조사님께서 신구(神龜)의 껍질에다 새겼던

무공을 위사제께서 얻으시어 본파에 돌려 주셨다.

이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사실 위중평이 청허장문인에게 사제란 칭호를 듣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너희들은 위사숙께서 당금 장백파의 장문인으로 장백파의 진전을

이어 받으셨고 또 현구보록의 무공도 터득하신 분이다."

 

청허장문의 소개가 끝났다.

일시에 정전 안의 도사들은 위중평에게 부끄러움과 함께 경 이의 시선을 보냈다.

어찌 저렇게 젊은 나이에 벌써 일파의 장문인이 되고 두 파의 진전을 터득할 수 있었을까,

부러운 생각이 도사들의 가슴 속에 물결쳤다.

 

그날 밤-.

문수별원에는 휘황찬란한 불빛이 대낮처럼 밝혀져 있었다.

강호로 떠나는 위중평을 위해 송별연을 베푼 것이다.

술좌석에서 청허장문은 정성껏 위중평을 대접하고

또 흑백쌍도와 중요한 인물의 개성, 무공수위,

그리고 강호의 최근 상황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는 여러 제자들에게 분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훗날 너희들이 강호에서 행도할 때 위사숙의 힘을 빌릴 때가 많으니

오늘 밤 모두 잘 보여야 한다."

 

농담섞인 이 말이 나오자 젊은 도사들은 다투어 앞으로 나와 인사를 올렸다.

또 어떤 도사들은 위중평에게 몇 가지 선공을 보여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위중평은 어렸을 때부터 갖은 냉대와 멸시를 받고 자랐다.

이런 그가 난생 처음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정다운 분위기를 갖자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허도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사제, 일양래복장(一陽來復掌)을 한 번 구경시켜 주게.

이 사형도 본파의 결전인 장법을 한 번 구경하고 싶군."

 

위중평은 쓴웃을 지었다.

 

"글쎄… 아직 최상의 경지에 다다르지 않아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윽고 도사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두 사람을 빙 둘러쌌다.

그들은 모두가 사문에서 실전된 절학이 얼마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없는 모양이었다.

위중평은 도사들에게 넓은 자리를 만들고 낙엽을 잔뜩 쓸어 모으라고 했다.

이윽고 낙엽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위중평은 천천히 진기를 조절하여 팔을 앞으로 내뻗는 것과 동시에

한 가닥 경풍을 내뻗었다.

즉시 한 줄기의 일맹한 장력이 밀려나갔다.

 

"펑-!"

 

귓청이 터질 듯한 폭음이 터지는 가운데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낙엽이

한 잎도 남기지 않고 허공으로 치솟아 하늘을 덮고 날아다녔다.

이어 위중평은 급히 손을 거두어들이자 낙엽들은

 갑자기 모두 제자리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정작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도사들이 일제히 낙엽이 쌓인 곳으로 다가가 보니

낙엽은 이미 가루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천지를 진동시키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화산파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양태복장은 이미 실전된 지가 수백 년이 되었는데

그것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나타났으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다음 날 아침.

화산파의 전체 도사들이 모두 문 앞에 나와서 위중평을 배웅했고

청허장문은 사람을 시켜 밤새껏 만든 새옷을 위중평에게 주었다.

또 화려한 안장을 한 거대한 준마와 충분한 노자,

그리고 건량 등도 모두 갖추어 주었다.

위중평은 지난날 신가보에서 갖은 모욕과 멸시를 당하며 눈물로 자란 그가

무림 구대 문파의 하나인 화산파에서 이런 대 접을 받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으랴.

위중평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영소도장, 그리고 청허장문, 수많은 도사들과 작별을 고한 그는

즉시 말에 박차를 가하여 북쪽으로 질주해 가기 시작했 라.

드디어 강호에 그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때는 초봄-.

드넓은 원야는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짙은 흙내음이 물씬 풍겨와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원대한 뜻을 품은 위중평은 초봄의 관도 위를 나는 듯이 질주해 갔다.

이 때였다.

관도의 맞은편에서 붉은 점 하나가 나타나더니

점점 가까이 달려와 순식간에 위중평의 눈앞에 다다랐다.

그것은 뜻밖에도 전신에 타는 듯이 붉은 옷을 걸친 묘령의 아리따운 낭자였다.

이 낭자는 붉은 옷에 붉은 안장을 하고 말까지 붉은 빛이 나는 준마를 타고 있었다.

위중평은 은근히 몇 번 더 바라보았다.

이 낭자는 용모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야무지게 닫은 입술이 방긋이 열리면 하얀 치아가 봄냄새처럼

싱그러운 향기를 머금고 드러나 보일 듯 붉은 입술,

빨갛게 홍조를 띤 양 볼에는 움폭 볼우물이 파여 더한층 매력이 흐르는 낭자였다.

그러나 양 미간에 떠올려진 원한의 그늘이 살기를 불러 일으켜 보는 이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것이다.

위중평은 재빨리 그녀를 주시하다가 그녀가 가까이 왔을 때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말을 몰아 그대로 위중평 옆을 지나치는 것이었다.

일순 그의 코로 짙은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향기가 스치고 지나가더니 이어서 야릇한 괴풍(怪風)이 이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는 이 괴풍에 의해 창졸간에 전신에 한기를 느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까지도 쭈뼛해지더니

갑자기 전신의 피가 얼어 붙은 것 같아 중심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위중평은 급히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방금 지나간 홍의 계집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닐까?'

 

강호의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위중평이기에 그는 상대가

자기에게 손을 쓴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늦게나마 무엇이 어떻게 돌아갔다고 느낀 위중평은

급히 품 속에서 영소도장이 준 환약을 꺼냈다.

그것은 화삼과와 천 년 설연을 배합하여 제조한 용호구환단(龍虎九還丹)이었다.

환약을 먹은 그는 말 위에 탄 채 진기를 일주천시켰다.

그제서야 그는 비로소 정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즉시 속에서 주먹같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이 계집을 가만 두지 않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에 박차를 가해 막 뒤쫓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뒷쪽에서 다시 일진의 급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이번에도 전신에 홍의를 입은 낭자가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위중평은 즉시 경각심을 높이고 달려오는 낭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차하면 한바탕 혼찌검을 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이 낭자의 차림새도 조금 전에 지나간 그 낭자와 똑같이 아래위가 전부 붉은색이었다.

그러나 이 낭자에게서 풍기는 인상과 표정은 그녀와 정반대였다.

지금 이 낭자는 체격이 알맞게 균형이 잡히고 몸매가 지극히 충만한 데다가

몸에 착 달라붙은 옷차림이라 돌출되어 나온 젖가슴이 무척이나 탐스럽게 보이는

그녀는 가뜩이나 아름다우면서도 범할 수 없는 고상한 용모를 지닌 여자였다.

이런 여자는 세상 어떤 남자가 보아도 사랑을 느낄 것이다.

한 마디로 솜사탕처럼 달콤한 인상을 풍기는 여인.

그러나 이 여인이 먼젓번 여자와 틀린 것은 등에 비스듬히 한 자루의 장검을 메었다는 점이다.

 

'이상한 일이로구나… '

 

이렇게 생각한 위중평은 말등에 멍하니 앉은 채 그녀를 주시 했다.

원래 이 낭자는 정체불명의 많은 사람들에게 추격을 받고 몹시 불쾌해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또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길을 막고 서서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친 그녀는 대뜸 긴 채찍을 휘둘러 위중평이 탄 말을 냅다 후려쳤다.

위중평은 이미 아까 혼이 난 경험이 있는지라 이번 만큼은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있었다.

그는 채찍이 휘둘러지자 즉시 두 손가락으로 날아오는 채찍을 채어갔다.

낭자는 깜짝 놀란 듯 급히 팔을 거두더니 자기 말의 엉덩이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히히힝!"

 

깜짝 놀란 말은 즉시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질풍처럼 달려가 버렸다.

위중평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으나 꾹 눌러 참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만 두자.

계집들과 싸워봤자 재미도 없을 뿐더러 대장부로써 그럴 수도 없지."

 

아예 이렇게 생각을 해버리니 속이 편하기 짝이없었다.

그는 가던 길로 말을 몰아 고도(古都) 북평(北平)에 도달했다.

위중평은 성내로 들어가 가까운 객잔을 찾아들었다.

말을 점원에게 넘겨준 그는 무의식중에 마굿간을 들여다보다가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에는 조금 전 관도에서 보았던 붉은 말이 묶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세수를 하고 나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방에 앉아 말의 임자가

첫 번째 여자인지 두 번째 여자인지를 생각해 보았지만

곧 자기와 관계가 없는 일이라 생각을 떨쳐 버렸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조화신공에 대한 연습을 하였다.

자정이 거의 될 즈음 객잔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돌연-.

"휘리릭!"

하며 지붕 위를 가볍게 날으는 옷자락 소리가 위중평의 귀에 들려 왔다.

위중평은 즉시 신각을 모아 창 밖을 주시했다.

곧 은빛 찬란한 달빛을 받으며 가냘픈 하나의 인영이 허공을 스치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위중평은 대뜸 그것이 낮에 만났던 그 흥의여인 두 명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은근히 호기심이 솟구쳐 가볍게 창문으로 몸을 솟구쳐 인영이 사라진 곳을 향해

추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금방 뒤를 따라 나왔는데도 그 인영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위중평의 초음신법은 문자 그대로 쾌속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목표를 놓친단 말인가?

등골에 식은땀이 쭉 흐른 그는 시야를 넓게 잡아 사방을 살폈다.

그는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고사(古寺) 한 채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반드시 저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급히 몸을 날려 다가가 보았다.

그곳은 다 쓰러져 가는 고찰(古利)이었다.

사방에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노송들이 담장처럼 둘러싸였고 그 규모가 지극히 웅대하였다.

산문(山門)에는 청량선사(淸良禪寺)라고 새긴 거대한 현판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현판은 햇빛과 빗물에 시달려 희미하게 보였다.

위중평은 조심스럽게 산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장원 앞까지 간 그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오싹 끼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널따란 광장에는 수없이 많은 시체들이 처참하게 널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위중평은 일순 숨이 꽉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그는 시체들을 하나하나 들춰보았다.

그러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곳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그들의 시체에 조그마한 삼각형의 붉은 깃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삼각형의 깃발은 그들의 머리인 정문혈(正門穴)에 꽂혀 있었다.

위중평은 그 홍색 깃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깃발 위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것이 대관절 무엇일까?"

강호에 처음 나온 그로서는 그것이 누구의 표기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위중평은 일단 그것을 품 속에 집어넣었다.

 

돌연-.

하나의 쉰 듯하면서도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꼬마야, 어서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죽고 싶어 환장을 한녀석이로구나?"

 

위중평은 재빨리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등에는 큼지막한 호로병을 둘러맨 노인이었는데

 지저분하기 짝이없을 정도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위중평은 밑도 끝도 없이 대뜸 욕을 얻어먹자

즉시 그의 편견스러운 성격이 자극되었다.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그는 사납게 소리쳤다.

 

"흥! 죽다니요? 대체 누가 나를 그렇게 쉽사리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을 듣자 신비의 괴노인은 느닷없이 광소를 터뜨렸다.

 

"히야, 이놈 보게. 제법 배짱이 있군. 너는 어느 문파에 속해 있느냐?"

 

위중평의 대답은 당당했다.

 

"소생은 장백파의 위중평이라 하오."

 

"뭐… 뭐라고? 위… 중평이라고?"

 

이렇게 경악의 소리를 지른 노인은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돌연 위중평의 손을 덥석 잡고는 흥분한 어조로 소리쳤다.

 

"신주검성 위무종이 너와는 어떤 관계가 되는 사람이냐?"

 

위중평은 상대가 친구인지 적인지 몰라 잡힌 손을 빼며 신중하게 말했다.

 

"그분은 저의 선부이십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다시 한 번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네가 이 미친 늙은이를 아주 기쁘게 해 주는구나.

어서… 어서 이리 가까이 오너라. 이제 다시 한번 봐야겠다."

 

위중평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멍청한 표정의 위중평을 예리하게 주시하다가 즉시 입을 열었다.

 

"얘야, 어서 나를 따라오너라."

 

말을 마친 그는 기우뚱 쓰러질 듯이 앞장서서 절 안을 향해 뛰어드는 것이었다.

위중평은 이 괴노인의 이상하기 짝이없는 신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노인은 술에 만취된 것처럼 비틀거리기는 했으나 발이 땅에 닿는 횟수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그 속도는 얼핏 보면 느린 것 같아도 빠르기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같았다

위중평도 질세라 어깨를 으쓱하더니 초음신법을 이용하여 노인의 뒤를 바싹 따랐다.

두 사람은 앞뒤로 하여 대전으로 들어섰다.

위중평은 노인의 걸음이 멈추기 무섭게 따지듯 물었다.

 

"노인장, 저를 이곳에 데려온 것은 무슨 가르침이 있어서 입니까?"

 

사실 노인은 자기의 특기인 취선보(醉仙步)를 시전하여 위중평의 신법을 시험해 보려 했었다.

때문에 취선보를 전력을 다해 전개했는데 위중평은 바싹 따라붙어 청내로 들어선 것이다.

노인의 얼굴엔 기쁨과 놀라움이 범벅이 되어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노인은 등에 멘 호로를 풀어 꿀꺽거리며 몇 모금의 술을 마시더니

그것을 위중평에게 건네 주었다.

 

"자, 우선 두어 모금 마셔서 갈증을 좀 풀도록 해라."

 

위중평은 한 마디로 거절했다.

 

"저는 술을 마실 줄 모릅니다."

 

그러자 노인은 다시 한 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술과 영웅, 그리고 미인,

이 세 가지는 나눌래야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것이다…"

 

하고는 호로병을 툭툭 치며 탐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너의 아버지는 미인을 좋아했고 나는 술이 없으면 못 사는 애주가다.

이렇게 좋은 술을 안 마시다니… 그럼 나나 한 모금 더 마셔야겠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노인은 허겁지겁 호로병의 주등이로 입을 가져 가는 것이었다.

위중평은 미간을 찌푸리고 노인이 호로병에 들은 술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마시도록 기다렸다.

노인이 꿀맛처럼 다 마시고 나서 입맛을 쩝쩝 다시자 위중평이 얼른 입을 열었다.

 

"노인장, 이젠 술도 다 마셨으니 어서 말씀을 하십시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노인은 호로병을 건꾸로 들고 있다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자 호로병을 팽개치더니 탄식을 했다.

 

"아… 험악한 강호에 가는 곳마다 흉흉살살(兇兇殺殺)이니 언제까지 죽어야 끝이 날까?"

 

위중평은 노인이 딴전을 부리고 있자 급히 다그쳤다.

 

"노인장께선 저의 선부를 알고 계십니까?"

 

노인은 취한 듯한 얼굴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히히히… 알다 뿐인가. 노부와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치열한 악투를 했지.

그러나 무슨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당한 무공의 기량을 비교하기 위해 비무를 한 것이라네."

 

위중평이 침묵을 지키자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는 미색(美色)과 옹고집 때문에 죽은 것이야."

 

위중평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휘둥그래졌다.

 

"뭐라구요? 미색이라구요?"

 

"그렇다. 분명히 미색과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고집 때문이지."

 

위중평은 자기의 부친이 여색을 탐내는 색한이 아니기를 이 순간 간절하게 빌었다.

노인은 다시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꼬마야, 서두르지 마라.

다른 사람들은 너의 아버지를 호색한이라 칭하지만 나만은

그가 너무도 강한 고집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고 싶다."

 

노인은 마루 바닥을 가리키며 위중평을 앉으라고 하고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당시 강호에서 취도옥탑장진도(翠島玉塔蔣珍圖)와 이궁금균(離官金鈞)이라는 것을

쟁탈하기 위하여 근 십 년 동안 정신없이 어지러웠다.

그것 때문에 죽은 인물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정체 모를 신비의 노인은 드디어 왕년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 후 그 무림의 지고무상한 보물이라 여기는 물건은 뜻밖에도

강호의 여마두에게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마두는 지극히 영악하고 간교스러운 여자였다.

그녀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그것을 보존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여마두는 심사숙고하던 끝에 위중평의 아버지인 위무종에게 접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마침 위무종은 신주검성이라는 칭호를 받은 직후인지라

그 명성이 사해를 떨치고 있었다.

신주검성은 그 여인의 행실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를 믿고 보호해 달라고 찾아온 사람을 물리치기는 차마 너무 박절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역시 취도옥탑장진도가 탐이 나서인지 결국 승낙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소문은 원래가 말에 날개가 달린 듯 번져가는 법이다.

흑백쌍도의 고수들이 구름같이 위무종에게 몰려왔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몰려와 위무종에게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그 여마두를 제거하여 강호를 어지럽게 하는 불화를 없애 버릴 것,

둘째, 장진도와 금륜은 각파의 무공실력으로 그 임자를 정하기로 한다.

이런 두 가지 조건이었다.

그러나 위무증은 하나같이 모두 거절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그날 밤의 참사를 야기시키게 된 것이다."

 

신비한 노인의 말은 여기서 끝났다.

이런 경위를 위중평은 영소도장에게 대충 들은 적이 있는지라 반신반의하며 다시 물었다.

 

"도대체 그 장진도와 금륜이 무엇을 하는 물건이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빼앗으려 했단 말입니까?"

 

노인은 빙그레 웃더니 다시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어떤 곳에 은밀한 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섬에는 한 분의 기인(奇人)이 살고 있었다.

그 기인은 무공이 절륜하기 짝이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기인은 평생 오직 두 가지 취미만 갖고 있었다.

하나는 무학이며 또 하나는 진귀한 보물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기인은 자신의 절세 신공으로 수없이 많은 무림 절전의 무공과 보물을 수집한 후

비도에 이궁(離宮)이란 건물을 지어 그 속에 많은 보물들을 보관하였고

또 그 건물 안에 옥탑(玉塔)을 세워 그가 연마하여 터득한 무공을 금강지로 옥벽에

하나하나씩 정성들여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후 노인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노인은 그 비도에 관한 장진도를 소상하게 그려

이궁에 들어갈 수 있는 황금 열쇄, 즉 금륜을 갖고 중원에 들어왔다.

자질이 뛰어난 소년을 골라 그것을 넘겨 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기인은 제자를 물색하기도 전에 혹도고수들에 의해 중독이 되어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장진도와 금륜이 강호인의 수중에 들어오면서부터 끝없는 살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위중평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그쳐 물었다.

 

"그럼, 그 장진도와 금륜은 지금 누구의 수중에 들어가 있습니까?"

 

신비의 노인은 한 차례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노부도 그것만은 모르겠단 말이야."

 

하고는 눈빛을 번쩍 빛내며 흥미로운 듯이 위중평의 안색을 살폈다.

 

"왜? 너도 그 물건에 생각이 끌리느냐?"

 

위중평은 단호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제가 그 물건을 탐낸다기 보다는 만약 제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결코 놓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선 저에게 있어 지상의 목표는 제 아버님의 원수를 갚는 일입니다."

 

위중평은 얘기를 하면 할수록 흥분이 되었는지

끝에 가서는 목소리가 차라리 절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비장하게 들렸다.

 

"홍모음효(紅毛陰梟)와 고원삼흉(高原三兇)은 기필코 내 손에 죽고 말 것입니다!"

 

노인은 위중평의 두 눈에 맺힌 파란 광채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것이야말로 복수의 화신처럼 보이는 저주의 광채였기 때문이다.

노인은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대단한 집념을 가진 녀석이로구나, 또 한 명의 소살성(少煞星)이 하강을 하였구나…"

 

노인은 일그러진 미소를 띠고 나서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아! 이 무림에 평온할 날이 언제나 찾아온단 말인가?"

 

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녀석아, 네 원수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들의 무서운 점도 알아야지.

저 혼자의 힘으로는 지금보다 더 강하다 해도 그들의 상대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절대 너무 서둘러서는 안 돼."

 

위중평은 즉시 들끓는 마음의 격동을 가라앉히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노선배님의 충고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놈들을 내 손으로 직접 죽이기 전에는,

결코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위중평은 허리에 차고 있는 무흔검(無痕劍)을 어루만졌다.

문자 그대로 사람을 베어도 핏자국 하나 묻지 않는다는 보검이다.

그는 자기의 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한이 있어도 그 검으로 부친의 원수를 갚으리라고

맹세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온갖 고생, 참을 수 없는 멸시와 모욕을 당한 그였다.

만약 원수들이 자기의 부친을 해치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서러운 어린 시절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꼽추 할아버지의 애처로운 죽음-.

고난과 과중한 일에 뼈가 부서질 듯하던 얼마 전의 추억이 그의 뇌리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신비의 노인은 다시 한바탕 광소를 터뜨리고 나서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

 

"호기가 대단한녀석이로군. 과연 신주검성의 후예답군."

 

하고는 술이 게슴츠레 오른 듯한 눈으로 위중평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너에게 한 마디 충고를 해줄 수밖에 없구나.

옛말에 과강(過剛)이면 역절(逆折)이라 하였으니 그 말을 명심해라."

 

말을 마친 노인은 광소를 남겨둔 채 대전 밖으로 달려나갔다.

과강이면 역절이라 함은 강한 쇠는 휘어지지 않고 그대로 부러져 버린다는 뜻이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때로 사람은 아예 부러져 버리기보다 한 번쯤 휘어지는 아량도 있어야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있지 않겠는가.

위중평은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쏜살같이 노인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노선배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노인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무슨 일이냐?"

 

"노선배님의 존성대명이 어찌 되시는지요?"

 

신비의 노인은 술에 취한 듯 몸을 흔들흔들하며 여유있게 대답했다.

 

"노부는 이름을 잊은 지 오래다.

그러나 강호에서는 나를 구주풍인(九州 人)이라고 하지."

 

"구주풍인…"

 

위중평은 다시 한 번 되뇌이고 나서 과연 그 별호가 이 노인에게 꼭 알맞은 것이라

생각하여 실소를 금치 못했다.

즉 천하를 유랑하는 미치광이란 뜻이 아닌가.

위중평은 다시 주위를 휘둘러보며 신중하게 물었다.

 

"그런데 이 시체들은 대체 누구의 손에 당한 것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정색을 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자들은 하나같이 강호의 일류급 고수들이다.

소림의 혜각대사를 위시하여 무당파의 처하도장,

그리고 곤륜파의 숙멸(寂減)도장, 종남파의 만리고행객(萬理孤行客),

그리고 점참삼노 중의 둘째, 삼흉(三兇) 수하의 오존자(五尊者) 가운데 남(藍) 백(白) 명의 존자,

그리고 적발교의 내당당주 철익영관(鐵翼靈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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