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1. 고난의 세월

오늘의 쉼터 2014. 6. 20. 15:40

무흔검(無痕劍) -와룡생생

 

 

1. 고난의 세월

 

- 복수 -

 

복수의 열화같은 분노는 체내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의 충혈된 두 눈에서는 증오의 불꽃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조그만 주먹을 야무지게 쥐고 흔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복수다! 복수… 죽인단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추악한 놈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그는 비통에 찬 절규를 토해냈다.

 

"아버지, 저를 보살펴 주세요. 제가 하루속히 무공을 배우게 기원해 주세요.

그래야 아버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지 않겠어요? 아버지…"

 

이렇게 비통하게 부르짖고 있는 장본인은 뜻밖에도 조그마한 어린아이였다.

 

체격이 매우 단단해 보이는 꼬마-.

그의 붉게 상기된 얼굴에서는 강한 의지와 굴하지 않는 투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이곳은 여량산(呂梁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신가보(辛家堡).

제법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보(堡)이다.

소년은 이 신가보의 화원(花園)에 외롭게 서서 그의 처참한 신세를 한탄하며

원(怨)과 한(恨)을 씹고 있는 것이었다.

신가보주는 금년에 육십 세가 되는 신천오(辛天吾)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강호에서 철장건곤(鐵掌乾坤)이라는 칭호를 지니고 있으며 무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슬하에 신혜연(辛慧娟)이란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었는데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머리가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더구나 항상 금빛 옷을 입고 다녀 보 내에서는 아예 금루선연(金縷嬋娟)이란 칭호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화원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내아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평아(平兒).

평아라고 불리우는 이 소년은 정원을 가꾸는 귀머거리에다 꼽추인 노인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였다.

그리고 이 평아의 신세에 대해서는 그 꼽추영감 이외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평아 자신도 자기의 신세 내력을 전혀 모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정원사인 꼽추영감은 양아들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혈해(血海)와 같이 깊고 큰 원수가 있으니 너는 부지런히 무공을 배워라."

 

이런 얘기 외에는 자기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지도 듣지도 못한 평아였다.

언제부터인가.

이 소년에게 수염을 길게 기른 도사가 야심한 밤이면 가끔 찾아와 내공구결(內攻口訣)을

가르쳐 주곤 했다.

꼽추영감은 항상 그분이 평아의 사부가 될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덧붙여 이런 사실은 절대 비밀로 하라고 수십 번씩 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는 도사도 일 년에 기껏 서너 번 찾아올 뿐이었다.

평아의 나이 열두 살.

어느날 꼽추영감은 중병에 걸려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평아는 꼽추영감과 십 년이 되도록 다 낡은 집에서 살아오며 인간의 따사로움을 느꼈다.

꼽추영감은 어린 평아를 친자식보다 더 소중하게 보살피며 사랑해 주었다.

그런 노인이 중병에 걸린 것이다.

평아는 노인의 병이 점점 위독해지자 밤잠을 자지 않고 붙어 앉아 정성껏 간호했다.

그러면서 그는 눈물을 뿌리며 하늘에 기도를 드렸다.

 

"부처님, 제발 우리 할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주세요.

할아버지께서 무척 고통스러워 하세요.

제발… 제발… 제 손으로 원수를 갚는 것을 할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평아의 간절한 소망도 아무 소용이 없었는지 기어코 노인은 세상과 하직을 고했다.

노인은 마지막 숨을 헐떡이면서도 평아의 작은 주먹을 쥐고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얘야,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젠 너 혼자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야만 한다.

제발 아무데서나 성질을 부려서는 안 된다…"

 

이것을 마지막 유언으로 꼽추노인은 덧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갔다.

나이 어린 평아에게 이것은 마치 청천벼락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평아는 이제 돌봐 주는 사람도 없이 망망대해에 뜬 외로운 조각배처럼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꼽추영감이 죽자 그는 고된 작업을 해야만 했다.

신가보의 사람들은 누구 한 사람 그를 따뜻하게 돌봐 주지 않았다.

수난과 멸시, 그리고 힘에 넘치는 작업만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닐 뿐이었다.

평아는 이 모든 일을 참고 견디며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찾아 복수를 하기 위하여 그는 사부가 올 때까지 참고 견디어야만 했다.

그러나 원래 성격이 고고한 그는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아 지극히 냉막한 성품의 소유자가 되어

갔다.

신가보에서 그나마도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어렸을 적부터 같이 자라나

매우 친숙한 편인 신가보주의 딸 금루선연뿐이었다.

평아가 제아무리 황소같은 고집을 부리고 성질을 괴팍하게 부려도 금루선연은 그를 경멸하거나

박정하게 대하지 않았다.

금루선연 신혜연은 보주의 무남독녀이고 금지옥엽이라 보 내에서는 권세가 대단했다.

특히 그녀의 장문(掌門) 사형인 철적왕손(鐵笛王孫) 모조음(毛組陰)은 더욱 그녀 앞에서

오금을 펴지 못했다.

하지만 신혜연이 그를 대하는 감정과 평아에게 대하는 감정은 차이가 있었다.

이 날은 신천오가 강호에서 친한 친구들을 불러 한바탕 통쾌하게 먹고 마시는 날이었다.

많은 무림인들이 신천오의 초대에 참가하고 있었고 신가보의 장정들과 하루종일 접대하느라

전신이 풀솜처럼 되어 버린 평아는 남들의 행복에 젖은 광경에 더욱더 고독함과 처량함을

맛보며 남몰래 화원으로 숨어 들어가 독백을 씹고 있었다.

 

바로 이 때-.

화원 밖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들려 왔다.

 

"혜매(慧妹), 혜매…"

 

그 소리와 함께 서생차림을 하고 허리에는 철적을 찬 소년이 총총히 화원으로 들어섰다.

그는 사방을 살펴보다가 평아가 서 있는 것을 보자 대뜸 호통을 쳤다.

 

"평아, 지금 밖은 한창 바빠 야단인데 너는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느냐?"

 

평아는 금방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풀이 죽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래, 나가 볼게."

 

이 서생차림의 철적을 찬 소년이 바로 신혜연의 장문사형인 철적왕손 모조음이었다.

그는 싸늘한 눈초리로 평아를 쏘아보다가 다시 대청 안으로 들어가며 소리쳐 불렀다.

 

"혜연, 혜연!"

 

평아는 더 이상 꾸물거리고 있다가는 어떤 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어금니를 악물며 대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돌연-.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꾀꼬리 같은 소녀의 음성이 들려 왔다.

 

"평오빠, 그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요. 그리고 우리 여기서 좀 더 놀다 가요."

 

이어 평아의 눈앞이 환해졌다.

활짝 핀 모란처럼 아름답고 명량한 소녀가 꽃밭에서 뛰어나온 것이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

거기다가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바로 보주의 외동딸 금루선연 신혜연이었다.

그녀는 전신에 반짝이는 금의를 입고 있어 어슴프레한 달빛을 받자 더욱 윤이 나고 돋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평아는 전혀 흥미가 없다는 듯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안 돼, 나같은 하인이 상관의 분부를 거역할 수는 없어."

 

평아의 괴상하면서도 냉랭한 성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녀는

그런 얘기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평아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평오빠, 그런 얘긴 하지 마. 난 생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러나 평아는 이런 얘기가 더욱 불쾌한 듯 그녀의 고운 손을 뿌리쳤다.

 

"놔! 이러다가 네 사형에게 발각되면 나는 뺨을 맞아.

넌 그런 것을 뻔히 알잖니? 내일 다시 놀면 되잖아?"

 

말을 마친 그는 횡하니 대청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외롭게 한을 씹고 있는 평아를 위로해 주려고 음식까지 갖고 온 그녀이기에

마음이 아팠는지 사라진 평아 쪽을 노려보며 입을 삐쭉였다.

 

"바보, 멍청이, 얼간이, 평오빠는 정말 얼간이야.

나도 이제 다시는 오빠를 상대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녀 역시 몸을 날려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대청 안에서는 초대되어 온 손님들의 주흥이 도도해 있었다.

평아는 슬그머니 들어가 청내를 살폈다.

푸짐한 산해진미와 기름진 음식들은 아직 태반이 남아 있었고 대청 가운데서는

오늘의 주인인 신천오가 강호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과 같이 마주앉아 있었다.

그 중에 사강지수(四强之首)인 적발교주(赤髮敎主)가 상좌에 앉아 있고

그 밑으로는 천독성모(千毒聖母) 장산도주(長山島主), 석룡노괴(石龍老怪),

화합상인(和合上人), 독비악걸(獨臂惡乞), 담운광(談雲光) 등이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들의 옆 좌석에는 흑심수사(黑心首士), 천금시(千金時), 인면갈오행(人小面蝎吳行),

그리고 온랑자(溫娘娘) 등 비교적 명성이 적은 귀빈들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철적왕손 모조음이 손님을 접대하고 있을 때 신혜연은 그 옆에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고령의 강호 고참들은 지난날 강호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또 그의 후배들은 호기가 충천하여 자기의 무공을 과시하려 하였다.

대청을 꽉 메운 향긋한 술냄새와 즐겁게 담소하는 그들의 모습.

이 모든 것들이 비운의 소년에게는 역겨운 것들이었다.

아니 오히려 한 마리의 독충이 자기의 가슴을 물어뜯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하여

일종의 비굴함이 강하게 그의 전신을 엄습하는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부처님, 너무도 불공평하십니다.

저의 부모님을 데려가시고도 고아가 된 나를 이렇게 남겨 무서운 굴욕을 당하게 하시다니…"

 

그는 외롭고 고독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대청의 한구석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멍청히 서 있었다.

 

이 때-.

평아와는 모든 것이 앙숙인 모조음이 그를 향해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평아가 얼른 다가가자 모조음은 나직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뭘 멍청하게 그렇게 서 있느냐? 어서 이리로 와서 손님들의 잔에 술을 따라 드려라."

 

평아는 그의 의식적인 모욕에 한 줄기 분노가 치밀어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터지는 울분을 참으며 묵묵히 손님들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가 신혜연의 술잔에 술을 채울 때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자리에서 발딱 일어서더니

방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평오빠, 고마워요."

 

지고한 신분을 지닌 보주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잔심부름을 하는 하인에게 이런 칭호를 쓰다니…

이런 행동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만면에 미소를 띠며 대범하게 자리에 앉았다.

평아는 금방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평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물러가려 하였다.

 

"잠깐, 보주님이 계신 곳의 술잔에도 술을 따라라."

 

철적왕손 모조음의 음성이었다.

그가 서슬이 시퍼런 눈초리로 분부를 하는 것이 분명 조금 전 신혜연의 거동에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낀 모양이었다.

이 때 갑자기 신혜연이 안색이 싹 변하여 퉁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을 이었다.

 

"평오빠, 이젠 그만하고 가서 쉬세요."

 

하고는 슬쩍 모조음을 흘겨보고는 나직하게 쏘아붙였다.

 

"흥! 자기의 신분을 망각해도 유분수지. 그러는 자기는 얼마나 잘났다고…"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멋대로 자라났기 때문에 자기가 역겹게 여기는 것이라면

상대가 감당할 수 있건 없건 쏘아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한바탕 쏘아붙인 신혜연은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대청 뒤로 사라져 버렸다.

이 바람에 철적왕손은 얼굴이 붉그락푸르락했으며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 속에는 한 가닥 엄청난 살기가 일었다.

귀빈들의 취흥이 도도하여 이쪽에 주의를 별로 기울이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평아는 신혜연의 말은 듣지 않고 아무 표정도 없이 보주 등

강호에서 쟁쟁한 인물들이 앉아 있는 상으로 다가갔다.

원래 생강은 오래된 것일수록 맵다는 말이 있듯이 강호의 고참들은 평아가

채 한 잔의 술을 따르기도 전에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평아를 본 적발교주 은대웅(殷大雄)이 제일 먼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허어, 이 꼬마는 대단한 골격을 지녔군.

잘만 가르치면 무림의 큰 재목이 될 수 있겠소이다."

 

이렇게 말한 은대웅은 즉시 철장진건곤 신천오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꼬마는 신형의 문하입니까?"

 

평아는 원래 무공을 연마한 기재(奇才)였다.

어렸을 때부터 무공의 기초를 완벽하게 터득한 그의 두 눈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정광이 번득이고 있었던 것이다

신천오는 은대웅의 얘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평아의 몸매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과연 비록 어리기는 하나 무공을 배우기에 꼭 알맞는 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천오는 그제서야 자기의 보 안에 그렇듯 재목이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던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 아이는 본보 하인의 아들입니다. 은형께서는 마음에 드십니까?"

 

은대웅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만약 신형께서 양보하신다면 내 저애를 한 번 가르쳐 볼 용의가 있습니다."

 

적발교주는 평아가 신천오의 문하제자인 줄 알았다가 하인의 아들이라는 말에

군침이 넘어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 누구인들 인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랴.

신천오도 대뜸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굴뚝처럼 생겼으나 이미 쏟아진 물…

신천오는 적발교주와의 관계를 생각하여 곧 호기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은형이 저 애를 키워 주시겠다는 것은 저 애의 크나큰 복이오이다.

제가 어찌 마다할 리가 있겠습니까?"

 

은대웅은 신천오가 대뜸 승락하자 크게 기뻐하며 공수의 예를 취했다.

 

"이렇게 좋은 술에다 기재까지 주시다니 신형의 은혜가 하해와 같소이다."

 

하고는 평아를 향해 웃으면서 물었다.

 

"어떠냐 네 생각은?"

 

그러나 평아는 의외로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어 거절의 빛을 보였다.

그는 적발교주의 날카롭고도 음험하게 생긴 인상에 잔뜩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적발교주 은대웅-.

그는 사강(四强)의 우두머리로 그 무공이 절세적이어서 좀처럼 적수를 만나기 어려운

최상급의 고수이다.

이쯤 되면 보통 사람이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해도 안 되는 일이지만 하인의 아들인 평아는

스스로 거절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행동은 적발교주뿐만 아니라 장내의 모든 고수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돌연 천독성모가 의아한 듯이 입을 열었다.

 

"가만히 보니 이 애는 그 누구를 연상케 하는군요."

 

"예? 누구란 말입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오자 대청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평아에게로 쏠렸고

결국 보는 사람마다 천독성모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만약 애초에 신천오가 하인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면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뻔했다.

신천오는 평아가 귀빈의 요구를 거절하자 대뜸 두 눈을 부라렸다.

 

"이놈! 싫은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속히 말해 봐라."

 

은대웅은 심기가 깊고 음흉한지라 속마음이야 씁쓸하기 짝이없었지만 겉으로는

추호도 내색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웃었다.

 

"허허허… 사람에게는 다 제각기 뜻이 있는 법이지요.

신형, 그를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확실히 적발신군은 평아라는 이 이름도 없는 소년이 탐이 나

즉시 풍속에서 금빛이 찬란한 적발귀왕이 새겨진 화살 모양의 금패(金牌)를 꺼내

평아에게 건네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너를 무척 잘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한 번 만난 것도 인연일 수 있으니 이것을 너에게 기념으로 주겠다."

 

"만약 훗날 적발교가 필요할 때에는 이 금패로 내게 할 말을 전하면 된다. 알겠느냐?"

 

평아는 그것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보주가 또 격노할까 두려워 공손히 받았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실상 그 조그마한 적발금패가 적발교의 신부(信符)라는 것을 평아는 확실히 모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적발교를 막론하고 강호에서 무상의 권위를 지닌 것이었다.

적발금패를 받은 그는 품 속에 간직하며 어색하게 물러섰다.

이윽고 밤이 깊어 귀빈들은 하나같이 대취하여 제각기 돌아 갔다.

보문이 닫히자 보의 사람들은 하루종일 시달림에 크게 피곤하여 제각기 돌아가

깊은 단잠에 빠졌고 떠들썩하던 신가 보는 조용한 침묵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으나

오직 화원 옆에 붙은 단칸짜리 초가집에서만 흐릿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평아가 무공에 대한 기초지식을 익히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외롭고 고생스러운 하루하루였지만 특히 오늘 있었던 일이

그를 더욱 노력하도록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꼽추영감이 입버릇처럼 하던 이야기를 되새기는 것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삼경(三更)을 알리는 경소리가 들릴 무렵-.

돌연 안으로부터 시커먼 인영 하나가 가만히 달려나와 화원 옆의 초가집을 향해 달려갔다.

한참 운기조식을 하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야행인이 허공을 가르는 옷자락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요!"

 

평아가 소리를 지르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방문이 조용히 열리고 검은 그림자가 불쑥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타난 사람은 의외에도 철적왕손 모조음이었다.

그는 만면에 살기를 띠고 음랭하게 입을 열었다.

 

"너같은 보잘것 없는 놈은 살려 주려 했는데 워낙 걸리적거리는 것이 많으니

아예 황천으로 보내 주마!"

 

평아는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는 것을 직감했으나 조금도 두려움을 모르는 듯

침상에 정좌를 하고 앉아 있다가 튕겨지듯 내려오며 저주스럽게 소리쳤다.

 

"모조음, 내가 너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까지 하느냐?"

 

철적왕손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나의 비위를 건드려 봐야 죽음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걸 몰랐느냐?"

 

평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치를 떨었다.

 

"나쁜 놈! 내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그리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평아의 이런 행위는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려는 것처럼

무모한 얘기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냉막하고 도도한 성품이

그로 하여금 가만히 있게 하지는 않았다.

모조음은 뜻밖이라는 듯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놈 봐라? 그래 나에게 덤비겠다는 말이냐? 후후후… 정말 가소롭구나."

 

말이 막 끝났을 때-.

갑자기 창문 쪽에서 하나의 창노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상대를 못해 줄 것도 없지 않느냐?"

 

모조음은 대경실색했다.

 

"누구냐!"

 

한 소리 크게 외친 모조음은 비호처럼 몸을 날려 호신을 하며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앞 십여 장 밖에 장삼을 바람에 펄럭이는 거대한 인영 하나가 담장 밖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무림 사강(四强) 중의 하나인 신가보에 타인이 침입을 한대서야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게 섯거라!"

 

벼락같은 소리를 친 그는 철적을 뽑아들고는 흑영이 사라진 곳을 향해 화살같이 날아갔다.

평아는 분명 몹시 귀에 익은 음성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금방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누구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문 밖까지 달려나갔다.

 

순간-.

평아는 몸이 가쁜해지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어떤 사람에 의해 옆구리에 끼어졌다.

뒤이어 귓가에 나직하면서도 자상한 음성이 들려 왔다.

"소리치지 마라. 사부가 너를 데려가는 것이니까."

아! 그토록 눈이 빠지게 기다렸던 사부가 드디어 위급한 순간에 나타나 자기를 데려가게 된 것이다.

평아의 두 눈에서는 감격과 흥분으로 인하여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제 그토록 고생스러웠던 하인의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눈부신 태양이 떠올랐다.

짙은 먹구름 같은 암흑이 서서히 걷히고 눈부시게 찬란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온갖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은 서로 화합하여

마치 경쾌한 음악 소리처럼 들렸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은 대자연의 웅장함과

부드러움이 합쳐져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이곳은 화산(華山)의 문수원(文殊阮) 뒷뜰이었다.

그곳엔 위엄이 있으면서도 인자하게 생긴 도인 한 분이 평아가 검술연마를 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얼굴에 흡족한 미소를 잔뜩 띠고 있었다.

이 수염을 하얗게 기른 도장은 바로 당금 화산파에서 은퇴한 장로로써 도호는 영소(靈所)라 하였다. 평아는 피땀을 흘리며 열심히 배웠다.

그는 일식의 검법에 대한 수련을 마치고 나서 도장 앞으로 다가서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사백(師伯)…"

 

그러자 도장 영소는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대견한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감개가 무량한 듯 천천히 말을 꺼냈다.

 

"허허허… 너의 진전이 이렇게 빠를 줄은 정말 몰랐다.

만약 내공과 수련이 경험만 부족하지 않는다면 곧 월륜검법(月輪劍法)을 연마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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