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백마소서풍

4. 원수를 만나다.

오늘의 쉼터 2014. 6. 19. 12:57

 

<원수를 만나다.> 

 

 

 

문득 밖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을 향해 오는 듯했다.

초원에는 이미 눈이 많이 쌓였으므로 말이 발을 빼는데 힘이 드는 듯 매우 느릿느릿 오고 있었다.

말 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니 계노인도 그소릴 듣고는 혼자 중얼 거렸다.

 

"또 눈보라를 피해 오는 사람이로구나!"

 

그러나 소보와 아만은 아직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듣고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는 건지

서로의 손을 꼭 쥔 채 바짝 붙어서 얘기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그 말이 문앞에 닿더니 탕탕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계노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문을 열었다.

문앞에 서 있는 자는 양피옷을 입은 당당한 체구의 사내로 구불구불한 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었고 허리에는 장검을 차고 있었다.

 

"밖에 눈보라가 대단해 도저히 말이 꼼짝도 할수 없소!"

 

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서투른 카자흐어였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내부의 사람들을 눈여겨 살폈다.

 

"들어오시지요. 우선 술을 좀 드시지요."

 

하고 계노인이 말하며 술 한잔을 그에게 건네준다.

그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불가로 다가앉아 옷을 풀어 헤치는데

허리 양쪽에 날카로운 빛을 내며 반짝이는 단검이 꽂혀 있었다.

그 두개의 단검은 하나는 금자루요, 하나는 은자루였다.

이문수는 이 한쌍의 소검을 보자

온몸이 떨려와 목구멍에 뭐가 막힌 듯하고 눈앞이 아찔해 왔다.

 

(분명 엄마의 쌍검이야.)

 

금은소검 삼낭자가 세상을 떠날때 이문수의 나이 비록 어렸으나

이 한쌍의 소검은 너무나 눈에 익은 물건이었으므로 결코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슬쩍 이 사내를 훑어 보니 더욱 인상이 분명했다.

그때 무리들을 이끌고 그녀의 부모를 살해한 세명의 수령중의 하나인 것이다.

십 이년이 흘러 그녀 자신은 완전히 몰라보게 변했으나 삼십여 세의 사내는

십 이년이 지났는데도 거의 그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혹 그가 자기를 알아볼까봐 감히 더 이상은 그를 살피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이 눈보라가 없었다면 소보를 만날리도 없었고 이 원수 또한 볼 수가 없을 뻔 했구나.)

 

계노인이 물었다.

 

"손님께선 어디서 오셨는지요? 먼곳으로 가시는 중이었나요?"

 

그러나 그 사내는 흠, 흠! 히며 스스로 술 한잔을 따라 마실 뿐이었다.

이때 불가에는 다섯사람리 둘러앉아 있었다.

소보는 더이상 아만과 속삭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계노인을 잠시 뚫어지게 응시 하더니만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저 여쭙고 싶은 사람이 있읍니다."

"누군데?"

"제가 어렸을 적에 함께 놀던 친구인데, 한인소녀......"

 

소보가 여기까지 말하자 이문수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두근거렸다.

그녀는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소보는 이러한 그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수아라고 하는데 팔구년 동안 한번도 그녀를 본적이 없어요.

녀는 한인 노인과 함꼐 살았었는데 바로 할아버지 시죠?"

 

계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흠, 흠! 하고는 뭐라 딱 대답을 못한다.

소보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의 노래소리는 정말 듣기 좋았는데.

사람들은 그녀가 천영조보다도 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말했었죠.

그러나 이 몇 년간 단 한번도 그녀의 노래를 들은적이 없읍니다.

그녀는 아직도 이곳에서 살고 있나요?"

 

계노인은 참으로 뭐라고 대답 하기가 난처하였다.

 

"아니, 아냐. 그녀는...... 그녀는 이제 없어......"

 

이문수가 옆에서 끼어 들었다.

 

"댁이 말한 한인 아가씨는 나도 알고 있는데 죽은지 이미 여러해됐읍니다."

 

소보는 몹시 놀랐다.

 

"그녀가 죽다니? 어쩌다 죽게 되었소?"

 

계노인은 이문를 힐끔 보며 말했다.

 

"병으로......병으로......"

 

소보의 눈가가 촉촉히 젖었다.

 

"내가 어렸을 적엔 언제나 그녀와 양을 치러 다녔는데 그녀는 내게 많은 노래를 들려줬고,

얘기도 들려줬었소. 벌써 여러해 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는데,

설마......설마 그녀가 죽었으리라고는......"

 

계노인도 따라 탄식한다.

 

"아, 가엾은 것!"

 

소보는 다시 불길을 쳐다보는데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부모님이 악당들에게 죽임을 당해 가엾게도 홀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

 

아만이 끼어들었다.

 

"그 아가씨는 예뻤었나요?"

"그때는 너무 어려서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걸.

단지 그녀의 고운 노래 소리와 고사를 즐겨 들었다는 것만 떠오를 뿐이야."

 

곁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사내가 불쑥 말했다.

 

"지금 한인 아이라 했나? 부모는 죽고 혼자 이곳엘 왔다고?"

"맞아요. 당신도 그녀를 아시나요?"

 

사내는 그에는 대답도 않고 계속 물었다.

 

"그 아이는 백마를 타고 다녔겠지, 그렇지?"

"그래요. 당신도 그녀를 본적이 있나보군요."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계노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아이가 여기서 죽었다구?"

 

계노인은 어물어물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이의 물건은? 전부 보관하고 있소?"

 

계노인은 그를 의아해 하며 쳐다 봤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몹시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계집이 훔쳐 달아났소.

도처로 그 아이를 찾아 헤매도 찾을수 없어 죽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소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허튼 소리 마라. 수아가 어째서 네 물건을 훔친단 말이냐?"

"네가 뭘 안다구?"

"수아와 어려서부터 함께 지냈소.

그녀는 정말 좋은 아가씨로 결코 남의 물건에 손 댈 사람이 아니오."

 

사내가 입을 삐쭉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내 물건을 훔쳐 달아 났어."

 

소보가 손을 뻗어 허리에 찬 칼에 손을 얹으며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이름이 무엇이지? 카자흐족 같지 않은데. 그 한인 강도일지도 모르겠구나."

 

사내가 문 쪽으로 달려가 대문을 열고 밖을 살피려 하는데 문을열자마자

눈을 동반한 바람이 마구 들이 닥친다.

들판은 눈보라가 천지를 뒤덮고 있어 사람과 말은 이미 다닐수가 없었다.

사내는 혼자 궁리 했다.

 

(밖에서 누국가 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이 집안에는 여자와노인,

그리고 호리호리해 보이는 소년 한명이 있을 뿐이니 다 일격에 쓰러뜨릴수 있는 이들이다.

오직 이 건장한 체격의 소년만 좀 애를 먹이겠구나.)

 

"한인이 어떻다구? 나는 진달해라 하는데 강호에서는 청망검이라 부른다.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소보는 한인들의 강호 규칙을 알리가 없었으므로 고개를 흔들었다.

 

"들어 본 적이 없소. 당신은 한인 강도가 아닌가요?"

"그 반대요. 강도를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니 어떻게 강도일수 있겠소?"

 

소보는 그가 강도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는 표정을 좀 누구러뜨렸다.

 

"한인 강도가 아니라니, 그럼됐소! 일찌기 한인 중에도 좋은 사람이 많다고 들었소.

내 아버지는 절대 믿지 않지만.

그러니 이후로는 수아가 당신 물건을 가져갔다고는 말하지 마시오."

 

진달해가 냉소를 띠며 말했다.

 

"그 아이는 이미 죽은지 오래인데 여지껏 그녀를 기억해서 뭘 하는가?"

"그녀가 살아 있을때내 친구였듯이 쥰어서도 내 친구임에 변함이없소.

그러니 다른 사람이 그녀를 헐뜯는걸 용서할수 없소. 알겠소?"

 

진달해는 더 이상 그와 왈가왈부 다툴 마음이 없었으므로 고개를 돌려 다시 계노인에게 물었다.

 

"그 아이의 물건들은 어쨌소?"

 

이문수는 소보가 자기를 위해 저토록 애써 변호하는 걸 보고는 감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나를 잊지 않고 있었어! 게다가 나를 이렇게 위해 주다니.)

 

그러나 진달해가 자기의 위품에 대해 다시 한번 캐묻자 궁금해 견달 수가 없었다.

 

(어찌 된 일일까. 나는 그의 물건을 훔친 적이 없는데 도데체 뭘 찾는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데 계노인이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께서는 뭘 잃어버리셨나요?

그 아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이 늙은이가 보장할 수 있읍니다."

 

진달해는 뭔가 깊이 생각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한장의 그림이오.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오.

허나 그건...... 그건 내 선친께서 손수 그리신 것이라 나는 꼭 그 그림을 찾아야만 하오.

그 아이가 일찌기 여기서 살았으니 당신도 그 그림을 본적이 있겠군요?"

 

"어떤 그림 인가요? 산수화, 혹은 인물화?"

 

계노인이 이렇게 물으니 진달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산......산수화라구?"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보가 진달해를 비웃으며 사이에 끼여들었다.

 

"어떤 그림인지도 모르면서 어째서 공연히 트집을 잡고 애매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가?"

 

진달해는 벌컥 화를 내며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어 들었다.

 

"요 쥐새끼 같은 놈이 살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지?"

 

소보도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들며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라도 카자흐인을 죽이기가 그리 쉽지 않을껄."

 

아만이 옆에서 소보를 말렸다.

 

"소보, 제발 참아!"

 

소보는 아만의 만류로 뽑았던 칼을 천천히 칼집에 도로 넣었다.

진달해는 고창미궁의 지도를 찾기위해 십년을 머물며 사방 수천리의 사막과 초원

구석구석 안다닌 곳이 없었다.

이 모든 일이 이문수를 찾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그가 그토록 찾아 헤메던 것이

앞에 보일듯 말듯 하는 상황이니 작은 것을 참지 못하다가 큰일을 그르친타고

스스로를 타이렀다.

소보를 향해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는 계노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그림은 지도라고 볼수도 있소.

대사막 중의 산수지형을 그려놓은 것이오."

 

계노인은 자기도 모르는 새 몸을 부르르떨며 말했다.

 

"당신 어떻게...... 도대체 지도가 어찌 그 아이의 수중에 있다고 생각하시오?"

"틀림없는 일이오. 만일 그지도를 찾아낸다면 많은 보수를 주겠오."

 

하고 말하며 진달해는 품에서 은화 두 냥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계노인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본적이 없소."

"내가 직접 그 아이의 유물을 찾아봐야 겠소."

"아니, 이......이 놈이......"

 

진달해는 노기등등해 하며 금은 소검을 뽑아 팍! 탁자위에 꽂았다.

 

"뭐라구, 이 놈이고 저 놈이고 간에 내가 직접 내 눈으로 확인 해야 겠소."

 

하며 양초에 불을 붙여 들고 문을 걷어차며 방으로 들어갔다.

가 처음 들어간 곳은 계노인의 침실이었다.

그는 언뜻보고 아닌듯 싶자 닥치는데로 상자를 엎어 버리고는 다시 이문수의 침실로 갔다.

그는 이문수의 옷을 치켜들며 말했다.

 

"하, 많이 자라고 죽었구나."

 

하며 세세히 살피는데 이문수가 어렸을 적에 입던 옷까지 모두 들춰냈다.

이 옷들은 엄마의 손길이 닿았던 것이라서 나이 들어 더 이상 입을수 없게 되었어도

고이고이 간직한 것들이었다.

진달해는 이 몇가지 옷을 보니 어렴풋이 십년 전 대사막에서

그녀를 추적하던 정경이 떠올라 소리질렀다.

 

"맞아, 맞아, 틀림없는 그 애다!"

 

그러나 아무리 침실을 샅샅이 뒤지고 안감 속까지 헤집으며 살펴봐도 지도는

그림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소보는 그가 이렇듯 이문수의 유물을 제멋대로 함부로 다루는 걸 보고는

오르는 화를 누를길 없어 몇번이고 칼에 손이 갔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만의 만류에 간신히 참고 있었다.

계노인이 힐끔힐끔 이문수를 곁눈질해 봐도 그녀는 망연히 타고 있는 불더미만

바라볼 뿐 전혀 진달해의 폭행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계노인은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심히 난감하였다.

 

"하긴 저렇게 흉폭한 칼앞에 무슨 뽀족한 수가 있단 말인가!"

 

이문수는 소보가 분개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처량하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하였다.

 

(그가 지금껏 나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게다가 지금 내 유물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불사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저 악당이 내가 훔쳤다고 말한 지도는 대체 무슨 지도란 말인가?)

 

그 날 그녀의 어머니는 죽기 직전 한폭의 지도를 그녀 옷속에 넣

어 주었으나 워낙 긴박한 사항인지라 뭐라 설명할 새도 없었다.

위표국의 일천 명의 사내들은 십 년간이나 그녀의 행방을 찾았으나

이문수 자신은 지도 자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진달해는 아무리 찾아봐도 전혀 실마리를 발견할수 없자

화가 극도로 치솟아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댔다.

 

"무덤이 어디 있소?"

 

계노인이 놀라 잠시 멈칫했다.

 

"먼 곳이오. 아주 먼곳."

 

진달해는 벽에서 가래를 집으며 말했다.

 

"날 데리고 가시오!"

 

소보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뭘 하려는 게요?"

"상관 말아라. 내가 직접 그녀의 무덤을 파 봐야 겠다.

그 지도가 무덤속에 같이 묻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소보는 칼을 뽑아 문을 가로막으며 호통쳤다.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게 할순 없다."

 

진달해가 가래를 번쩍 들어올려 소보를 향해 정면으로 내려치며 호통쳤다.

 

"비켜라!"

 

소보는 왼쪽으로 살짝 몸을 피하며 쥐고 있던 칼로 가래를 내리쳤다.

진달해가 가래를 버리고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드니 쨍그렁! 하며 칼롸 검이 부딪혔다.

두 사람이 각각 뒤로 한걸음 성큼 물러섰다가는 동시에 나아가며 한데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이 집은 워낙 넓지 않은고로 칼과 검이 맞부디치며 휘둘러대니

노인과 아만은 벽에 바싹 붙어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문수는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아만은 좀전에 진달해가 꽂아 놓은 탁자의 소검을 재빨리 집어 소보를 도우려 했으나

달라붙어 싸우고 있으므로 끼여들 틈이 없었다.

소보는 그의 부친의 무예를 전수한지 오래이므로 그 도법이 변화 무쌍하고 극히 날카오웠다,

소보의 예리한 공격에 진달해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요런 카자흐족 놈이 중원의 고수에게도 무공이 뒤지지 않을 줄은 몰랐구나!)

 

이렇게 놀라고 있는데 뭔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소검이 날아왔다.

아만이 기습한 것이었다.

진달해가 옆으로 살짝 비키며 코웃음을 치는데 소보의 단검이 그의 왼팔을 긋고 있었다.

진달해는 크게 노하여 쉭쉭쉭! 연속 세번을 찔렀는데 바로 그의 주특기인 청망검법 이었다.

소보는 눈앞에서 검이 날카롭게 번뜩이며 움직이는걸 보니 마치 이무기가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것과 같아 그 검의 끝이 어디를 찌를지를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적의 장검은 이미 그의 면전에 닿아 있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 피하려는데 목에 이미 칼이 스쳐 선혈이 흘렀다.

진달해는 피할틈을 주지 않고 다시 한번 소보의 팔목을 찌르니

그렁! 하며 단도가 땅에 떨어졌다.

잇달아 다시 칼을 날리는데 소보는 전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칫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이문수가 한 보 앞으로 내딛으며 진달해가 세번째의 검을 쓰기만하면

대금나수(대금나수)를 펼쳐 그의 팔을 낚아 채려했다.

그 때 갑자기 아만이 앞으로 몸을 날려 소보의 몸을 막으며 외쳤다.

 

"안 돼요!"

 

진달해는 아만의 용모가 꽃과 같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마음이 흔들렸다.

소보를 향하던 검을 그녀의 가슴께로 옮기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를 그토록 걱정하다니 이 놈이그대의 정랑이란 말인가?"

 

아만이 얼굴을 붉히며 끄덕인다.

 

"좋아, 그대는 내게 그의 목숨만 살려 달라고 했으니

내일 눈이 그치는 대로 나와 함께 가야 한다!"

 

소보가 크게 분개하여 으르렁대며 아만의 뒤에서 덤벼들었다.

달해의 장검은 잠시 부르르 떠는 듯하더니 이미 소보의 목구멍을 겨누고 있었다.

그가 왼발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자 소보가 퍽! 하고 거꾸러졌다.

그러나 장검은 여전히 소보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이문수는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진달해가 소보를 해하려 들기만 하면

즉시 출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의 무공으로 저 자를 상대하기란 실로 우수운 일이었다.

허나 이토록 든든한 응원부대가 곁에 있는 줄 꿈에도 모르는 아만

워낙 상황이 급한지라 애원할 따름이었다.

 

"제발 죽이진 마세요. 하라는 대로 하겠어요."

 

진달해는 속으로 몹시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여전히 칼을 거둘 생각은 않고 한번 더 다짐을 해둔다.

 

"내일 나를 따라가기로 했으니 결코 취소할순 없다. 알겠나?"

 

아만이 이를 막물며 대답했다.

 

"절대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니 검을 거두세요."

 

진달해는 하하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달아나고 싶어도 결코 그렇게는 안될껄!"

 

하며 장검을 칼집에 꽂으며 소보의 단검을 집어 움켜 쥐었다.

렇 듯 집안에서 오직 그 혼자 무기를 독차지하고 있으니

어느 누구도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

 

"지금은 아무래도 나갈수 없을테니 내일 날이 개거든 무덤을 파러 가야지."

 

아만이 소보를 옆에서 부축하려 하는데 그의 목에서 선혈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아만이 당황하여 자기의 옷고름을 찢어 그의 상처를 싸매려 하는데

소보가 품에서 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이 수건을 써요!"

 

아만은 수건을 받아들고 그의 상처를 감싸면서 강도의 수중에 떨어진 자기의 신세를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는 새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 내렸다.

소보가 겨우 소리를 내어 꾸짖었다.

 

"개 같은 놈, 좀도적 같으니!"

 

이미 그는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만일 저 강도가 정말 아만을 끌고 가려 한다면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와 일전을 벌여야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바탕 싸움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다섯 사람이 불가에 빙 둘러앉아 있는데

모두 긴장된 상황이었다.

진달해는 한손에는 칼을 잡고 한손으로는 술잔을 쥔채 아만을 쳐다보다

소보를 돌아보다 하고 있었다.

밖에선 북풍이 노호하며 눈덩이를 말아 올려 벽과 지붕에 부딪치고 있는데

안의 다섯 사람은 어느 누구도 말이 없었다.

이문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저 악당이 다시 한번 미친짓을 벌인다면 그땐 가만두지 않겠다.)

 

그 때 불더미 속의 나무가 팍! 하고 터지며 불꽃이 어두워지는듯 하더니 갑자기 더욱 밝아 졌다.

그 불빛에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문득 소보의 목을 감싼 수건을 본 이문수는 놀라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계노인은 그녀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게 반짝이며 그 수건을 몇번이고 쳐다보는 걸 보고는 물었다.

 

"소보, 이 수건은 어디서 난건가?"

 

소보가 번쩍 정신이 드는듯 목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대답 했다.

 

"이 수건 말씀인가요? 그 죽은 수아가 제게 준 것입니다.

어릴적 우리가 함께 양을 치고 있는데 커다란 회색이리 한 마리가 물려고 덤벼

제가 그 이리를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도 크게 다쳤는데 수아가 이 수건으로 제 상처를 싸매 주......"

 

이러한 소보의 말을 듣고 있던 이문수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

그렁해 모든게 가물가물 어렴풋하게 보일 뿐이었다.

계노인이 내실로 들어가 하얀 천을 꺼내오며 소보에게 건네줬다.

 

"이 천으로 상처를 싸매고 그 수건을 내게 풀어 주게나. 한번 보고 싶네."

"왜요?"

 

이때 옆에서 계노인의 말을 듣고 있더 진달해가 뭔가 감을 잡은듯

소보의 목을 감싸고 있는 수건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칼을 들며 일어섰다.

 

"내게 그걸 풀어 줘, 어서!"

 

소보는 노기를 띠고 꼼짝도 않았다.

아만은 또 진달해가 무력을 쓸까 두려워 얼른 수건을 풀어 계노인에게 건네 주며

흰천으로 소보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계노인이 피로물든 수건을 탁자위에 올려놓고는 등불에 비춰 보기도 하고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진달해가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더니만 기쁨에 어쩔 줄 몰라했다.

 

"맞다, 맞아, 바로 고창미궁의 지도다!"

 

하며 수건을 가로 챘는데 하하하! 웃으면서 기쁨에 들뜬 모습이었다.

계노인은 오른팔을 내밀어 수건을 빼앗으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때에 문득 멀리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보, 소보......"

"아만, 아만......"

 

그 소리를 듣고 소보와 아만이 동시에 펄쩍 뛰며 외쳤다.

 

"아버지가 우릴 찾으신다."

 

소보가 급히 문 쪽으로 달려나가 문을 열려 하는데 문득 목 뒤가 서늘해졌다.

장검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앉아, 꼼짝 말고!"

 

하는 진달해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문앞까지 다다랐다.

소로극의 음성이 들렸다.

 

"그 한인 놈의 집 아냐? 절대로 안 들어간다."

 

차이고의 음성이 뒤이어들렸다.

 

"안 들어가겠다구? 그렇담 어디서 이 눈보라를 피한단 말야?

벌써 코와 귀가 얼어 떨어져 버릴 것만 같은데."

 

소로극은 한기를 쫓기 위해 호리병을 손에 든채 오는 동안 내내

술을 마셔 왔기 때문에 이땐 이미 상당히 취해 있었다.

곤드레만드레 취한 목소리 였다.

 

"이대로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한인의 집엔 들어가지 않겠다."

"들어가지 않겠다면 어쩌 겠단 말야. 나는 들어가야만 하겠어."

"내 아들과 자네 딸도 잦지못하고 어떻게 저 한인 놈으 집으로 피하겠단 말야?

자네는도데체 남자답지가 못하군."

"지금껏 아무도 그들 둘을 본 사람이 없는 걸보니

틀림없이 어디론가 피신했을 게야.

걱정 마, 두 아이를 찾기는커녕 두 늙은이가 먼저 얼어 죽겠구먼."

 

소보는 진달해가 칼을 빼들고 문 뒤로 숨는걸 보고는 누구라도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단칼에 찌를게 분명한 것을 눈치 챘다.

 

"들어와선 안 돼요!"

 

진달해가 눈을 부릅뜨고 소보를 향해 으르렁댔다.

 

"다시 한번 소리를 내면 그 자리에서 죽이고 말테다."

 

그러나 부친이 이토록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가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소보는 막대기 하나를 집어들고 진달해 에게 달려들었다.

진달해는 살짝 몸을 비키며 소보의 허벅지를 찔렀다.

소보가 윽!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진달해가 다시 한번 내려칠까 두려워 그는 몸을 민첩하게 움직여 바닥을 뒹굴렀다.

그러나 진달해는 더 이상 그를 쫓을 생각은 않고 칼을 들고 문뒤에서 지켜서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자네가 만일 저 한인 집에 들어간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면서 소로극은 차이고의 가슴에 일격을 가했다. 차이고 역시 발

을 걸어 넘어뜨렸다. 눈 위에서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우

기 시작했다.

소로극이 눈을 한 줌 집어서는 차이고의 입을 틀어막으니 차이고

는 왝왝 하며 눈을 뱉어냈다. 소로극이 기분 좋아하며 하하 크게

소리내어 웃고 있는데 입안의 눈을 다 토해낸 차이고가 퍽! 하며

소로극의 코에 일격을 가했다. 코피가 흘러도 소로극은 전혀 아픔

을 못 느끼고 그저 배를 잡고 웃을 따름이었다. 소로극은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차이고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았

다.

소보와 아만은 애를 태우면서 소로극이 이겨 차이고가 안으로 들

어오는걸 저지하길 바랬다. 그러나 문밖에서는 여전히 퍽! 퍽! 하

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네가 한대, 이번엔 내가 한대, 하고 웃으며

욕하는 취한음성이 그칠줄 모른다. 갑자기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에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찬바람과 눈이 안으로 마구

불어 닥쳤다. 소로극과 차이고가 서로 껴안은채 데굴데굴 굴러 안

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너무나 뜻밖에 문이 덜컥 열렸으므로 문 뒤

에 숨어 있던 진달해는 칼을 휘두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모

든 일에 아랑곳없이 소로극,차이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엉켜붙어 싸우며 놓을줄을 몰랐다.

차이고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

 

"자, 자네 어쩌다 여길 들어왔지?"

 

소로극이 몹시 분해 하며 팔로 그의 목을 누르며 고함을 질렀다.

 

"나가, 나가!"

 

두 사람이 땅바닥에서 엉겨붙어 다투고 있는데 한 사람은 상대방

능 끌고나가려 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앉

히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소로극이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

하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자네가 나를 꺾을수 없으니 나는 카자흐 제일의 용사다. 소보는

그 다음, 소보가 앞으로 낳은 아들이 세번째, ...... 자네 차이

고는 다섯째......"

 

진달해는 두 취한이 떠들어대는 걸 보고는 문뒤에 숨어 있던 자신

이 우수워졌다.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어닥쳐 불더미의 불꽃이 난

무 하는걸 보고는 억지로 문을 닫아 걸었다. 소보와 아만은 자기들

의 아버지가 불더미 쪽으로 굴러가는 것을 보고는 급히 달려가 일

으켜세우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그러나 이 두 사람 다 육중한 체구라 단번에 일으켜 세울수가 없

었다.

소보가 참을 수 없어 소리질렀다.

 

"아버지, 아버지! 한인 강도예요!"

 

소로극은 아무리 취했다 해도 십 년간 꿈에서도 잊지 못하고 있던

불구대천지 '한인 강도'라는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어디야?"

 

소보가 진달해를 가리켰다. 소로극은 허리로 손을 뻗어 칼을 뽑으

려 했다. 그러나 차이고와 정신없이 한참을 뒹구는 통에 문 밖 눈

속에 칼을 떨어 뜨리고 말았으므로 아무리 더듬어 봐도 칼은 만저

지지 않는다.

 

"칼, 칼! 저 놈을 죽여야 돼!"

 

진달해가 장검을 뽑아 그의 목을 향하며 고함쳤다.

 

"끓어앉아!"

 

소로극은 잔뜩 화가 나 그를 덤치려 했으나 술에 취한 탓에 힘이

빠져 적을 덮치기는커녕 자기가 고꾸라지고 말았다. 진달해가 그를

보고 냉소를 지으며 칼을 휘두르자 소로극의 어깨에 핏물이 베어

나온다. 소로극은 처참하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온힘을 다해 일어서

려 했으나 아무리 해도 몸을 세울수가 없었다.

그를 본 차이고도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며 진달해를 향해 몸을 날

렸다. 진달해가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편 다리를 찔렀다.

계노인은 고개를 돌려 이문수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을 뿐더러 두려운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진달해가 냉소를 띤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 카자흐 놈들, 오늘 이 몸이 하나씩 다 처치해 주마."

 

아만이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그의 몸을 가로막아 서며 진

달해에게 애원했다.

 

"이미 당신을 따라가기로 약속했니 제발 이들을 죽이진 마세요."

 

차이고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절대 안돼! 저 도적놈을 따라가선 안돼. 차라리 내가 죽는게 낫

다!"

 

진달해가 벽에서 양을 옭아맬때 쓰는 긴 끈을 집어 아만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며 징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아, 넌 나의 포로다. 넌 나의 노예야! 당장 멩세를 해라. 오늘

이후 절대로 나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그래야 저 카자흐 몇 놈을

살릴수 있을게다.!"

 

아만은 만일 자기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아버지와 소보가 다

그에게 죽임을 당할것을 생각하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맹세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알라신께 맹세합니다. 오늘부터 저는 주인의 노예입니다. 주인의

모든 명령에 따르고 분부를 쫓으며 영원히 달아나지 않겠읍니다.

만일 맹세대로 하지 않으면 사후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만겁이

되어도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진달해는 하하하! 하고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오늘밤 이미 고창

미궁의 지도를 손에 넣은데다 이 처럼 아름다운 소녀를 취했으니

마치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는 기분이었다. 회강에 산 지 오래

되었기에 카자흐인이 회교를 경건히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알라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기만 하면 죽을때까지 감히 배반하지 않

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진달해는 올가미를 씌우며 말했다.

 

"이리 와서 네 주인의 발앞에 앉아라!"

 

아만은 분하기 그지 없었으나 할 수없이 그의 발 아래로 가 않았

다. 진달해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니 아만은 마

침내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내어 통곡했다.

이것을 보고 어찌 소보가 참을수 있으리오. 몸을 솟구쳐 진달해를

향해 덮치려 했으나 진달해의 장검이 이미 그의 가슴을 겨누고 있

었다. 소보가 반척만 앞으로 내딛어도 그의 가슴은 예리한 칼끝에

찔릴게 뻔했다. 아만이 절규했다.

 

"안돼, 소보 뒤로 물러나!"

 

소보의 눈은 불을 뿜어내는 듯했고 이는 부러져라 악 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자리에 딱 버티고 서 있던 그도 마침내는 서서히 뒷걸음

질치더니 털썩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진달해는 혼자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키며 그 수건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살폈다.

계노인이 물었다.

 

"이게 고창미궁의 지도라는 걸 어떻게 아오?"

 

하는데 한어를 쓰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진달해는 속으로 생각

했다.

 

(너희들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테니 얘기한다 해도 안될것 없지.)

 

그렇지 않아도 은근히 자랑하고 싶던 참에 잘됐다 싶어 얼른 양손

으로 수건을 잡으며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찾던 고창미궁의 지도는 분명 이삼 부부가 가졌었다. 그

런데 그들 부부의 시신에서도 찾을수 없었으니 그들의 아이가 가

지고 있는 것은 정한 이치다. 이 수건은 그 아이의 것인데 산천

도로가 그려져 있으니 틀림없는 그 지도다."

 

하며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요. 이 수건은 실로 짜여진 것인데 이 산천 사막의 도형은

중앙에 금실로 짜여져 있오. 실도 황사요, 금실도 황색이니 평시

에는 알아볼 수가 어뵤는 것이오. 단 피로 물들기만 하면 금실은

보통 실보다 더 많은 피를 빨아들이므로 분리가 되는것이오. 알

겠소?"

 

이문수가 수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과연 그가 말한 데로 선혈이

묻은 곳은 도형이 선명하게 드러났지만 피가 묻지 않은 곳은 그냥

황색일 따름이었다. 소보가 이리에게 물렸던 날은 출혈이 그다지

심하지 않아 아주 조금밖에 도형이 드러나지 않았었으나 오늘밤은

칼에 입은 상처가 워낙 심해 거의 도형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이 수건에 이처럼 크나 큰 비밀이 감춰져 있는 줄 이제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소로극과 차이고의 상처는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다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술이 깨거든 저 한인 강도놈을 없얘야지!)

 

차이고가 말을 꺼냈다.

 

"노인장, 물 한 모금만 주시구려."

"그러구려!"

 

하며 계노인이 물을 가지러 일어서려 하자 진달해가 엄한 목소리

로 말했다.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어. 누구도 내 허락 없안 움직여선 안돼."

 

계노인이 흥! 하며 자리에 다시 앉는다.

진달해는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이것들이 만일 힘을 합쳐 한꺼번에 달려들면 곤란한데. 저 늙은

카자흐 놈들이 아직 정신이 들지 않았으니 먼저 죽여야겠다. 조

심하는 게 최고야.)

 

눈치채지 않게 소로극에게 가만가만 다가가서 돌연 장검을 뽑아

그의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이 일격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인

데다 진달해의 행동 또한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소보가 놀라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를 구하러 달려가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달해가 단칼에 소로극의 머리를 내리치려 하는 찰나, 후!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자기의 면전을 가로막았다. 그토록 빠른 기세로

날아가면서도 행여 사람을 상하지 않도록 왼쪽으로 비켜 핑, 퐁 하

는 소리를 내며 튀기며 날더니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그것

은 찻잔 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보니 찻잔을 날려 그를 막은

이는 다름아닌 이문수였다.

진달해는 크게 노하였다. 이 카자흐 소년은 여자처럼 허약하고 창

백해 보여, 지금껏 전혀 싱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파리

한마리가 호랑이를 건드릴 줄이야. 그는 당장 칼을 뽑아들어 그녀

글 겨누었다.

 

"이 쥐새끼 같은 카자흐놈, 네가 살고 싶질 않은가 보구나?"

 

이문수가 천천히 카자흐인의 겉옷을 풀어 해치니 안에 한인 저고

리가 나왔다.

 

"나는 카자흐인이 아니요. 한인이요."

 

왼손을 들어 소로극을 가리키며 카자흐어로 말을 잇는다.

 

"저 카자흐 분께서는 한인은 다 극악무도한 강도인 줄로만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한인이 결코 다 강도가 아닐 뿐더러 좋은

사람도 있다는것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만일 이문수가 찻잔을 던져 그를 막지 않았다

면 방금 전의 진달해의 단칼에 소로극은 이미 산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소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버지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소로극은 여전히 그에기가 꺾이지 않고 소리 높여 말했다.

 

"난 결코 한인이 내 목숨을 구해 주는 걸 원치 않는다. 차라리 저

강도가 날 죽이도록 내버려 둬라."

 

진달해가 성큼 앞으로 한보 내딛으며 이문수에게 물었다.

 

"누구냐? 한인이라면 도데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게지?"

 

이문수는 얼굴에 냉소를 띠며 웃었다.

 

"당신은 날 못 알아볼 테지만 난 당신을 똑똑하 알고 있소. 카자흐

부락을 습격해 적지 않은 카자흐인을 해친 바로 그 한인 강도요."

 

이렇게 말하는데 마은은 씁쓸하기만 하였다.

 

(만일 너희 강도놈들이 그처럼 몹쓸짓을 마구 저지르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소로극이 지금처럼 우리 한인을 증오할 리가 없을 텐데.)

 

소로극은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이 늙은이랑 무슨 관계지?"

 

문득 이문수가 아만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여자는 너의 노비이니 내가 빼앗아 내것으로 삼겠다."

 

이 한 마디에 사람들은 다 소스라치게 놀랄 뿐이었다.

진달해는 순간 몸이 떨려옴을 느꼈으나 여전히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좋다. 할수 있다면 한번 빼앗아 봐라."

 

하며 장검을 휘두르니 웅웅 하며 칼이 우는 소리를냈다.

이문수가 고개를 돌려 아만에게 다짐을 했다.

 

"네가 알라의 이름으로 그의 노비가 되겠다고 맹세했으니 내가 그

를 꺾는다면 넌 내 노예가 되는 거야. 알아듣겠지?"

 

본래 카자흐인은 타종족과 싸워 포로를 잡으면 노예로 삼는것은

회교의 코란경에도 씌어 있는 명문 규정이었다. 일단 노예가 되면

가축과 다를 바 없이 매매 되는 것이다.

아만은 그녀의 말을 듣고 혼자 곰곰히 생각했다.

 

(어짜피 노예가 된몸, 저처럼 흉악한 강도를 따라 온갖 수모를 다

당하느니 차라리 저 이를 주인으로 섬기는게 낫겠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아마..... 그를 이기진 못할 거예요. 저 강도의 무공이 저처럼

대단한 걸요."

"넌 신경쓸 것 없다. 내가 그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에게 죽게될

뿐인걸."

 

하며 두손을 부딪쳐 탁 치며 진달해 쪽을 돌아보았다.

 

"자, 덤벼 보시지!"

 

진달해는 그 모양을 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빈손으로 나와 싸울 셈인가?"

"너 같은 악당을 죽이는데 병기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

 

진달해는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이 안에 있는 자들이 다 적이니,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내겐 불리

할 뿐이다.)

 

"칼을 받아라!"

 

하고 벼락같이 소리지르며 예리한 검을 뽑아 독사출동(毒蛇出同)

일초로 이문수의 가슴을 향해 찔러 나갔는데 그 기세가 몹시 급박

했다.

계노인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빨리 뒤로 물러나라!"

 

그는 이문수가 결코 그와 맞설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이문수는 몸을 날려 재빠르게 피하며 팔꿈치를 뒤

로 쭉 펴서 그의 허리를 쳤다. 진달해도.

 

"좋아, 그렇다면 나도 가만있을순 없지!"

 

하고는 장검을 휘두르며 그녀의 팔꿈치를 노렸다. 이문수가 오른

발을 잽싸게 날려 그의 팔목을 차니 이는 곧 엽저비연(葉底飛燕)

일초였다. 이는 화휘의 절초 중 하나로서, 민첩하고 재빨라 굉장한

효과를 볼수 있는 초식이었다. 이문수가 칠팔일간을 피나게 연습하

고 나서야 숙달할수 있었던 것이다. 진달해는 급히 손을 움츠렸으

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나 그 차는 힘이 그다지 세지 않았으므

로 진달해는 가까스로 장검을 놓치지 않을수 있었다.

그는 으르렁대며 뒤로 한보 성큼 물러섰다. 지켜보던 계노인의 입

에서 아! 하고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무나 놀

라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듯했다.

진달해가 팔목을 주무르며 검을 뽑아 다시 이문수와 맞붙었다. 이

때에는 이미 얕보는 마음이 싹 가셨다. 보아하니 그의 손동작과 발

동작이 예사롭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청망검법을 펼치는데 그일

초 일초가 매우 잔악하여 이 소년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싸우는 듯했다. 이문수는 사부 화휘에게 무예를 전수받았는데 그

몸동작은 민첩하고 초식은 정교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허나 지금껏

누구와도 초식을 나누며 싸워본 경험이 없었던 탓에 조금 당황스러

웠다. 처음에는 부모를 죽인 원한을 갚기 위해 오직 이 악독한 도

적을 죽일 일념으로 싸웠으나 점차 적의 검법의 형세에 대한 감을

접가 사작하자 평정을 찾아갔다.

계노인의 집은 본래 협소한데다 불까지 피웠으니 진, 이 두 사람

이 몸을 솟구치고 날며 맞붙어 싸우는데 그 검과 주먹의 거리가 일

촌이 채 되지 않을때가 많았다. 진달해의 매 일검은 다 이문수의

목숨을 노리며 휘두르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피하거나 그 공격을

끊어 놓을 따름이었다. 소로극 등 몇 사람은 멍하니 입을 크게 벌

린채 싸움을 지켜볼 따름이었으나 계노인은 점점 두려워져 몸을 벌

벌 떨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절정에 이르러 진달해가 영사토신(靈蛇吐信)일

검으로 이문수의 목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갔다. 아문수가 고개를

숙여 검을 피하고는 그를 덮쳤다. 왼팔로 적의 오른팔에 일격을 가

하며 그가 주춤하는 새 진달해의 허리에 꽂힌 금은소검 두자루를

움켜줘었다. 검을 뽑는 동시에 퍽! 하며 그의 좌우 겨드랑이에 꽂

았다.

진달해가 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장검을 떨어뜨렸다. 비틀거리

며 뒤로 물러서서는 벽에 등을 기댄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

다. 그 양검이 자루까지 푹 빠지게 겨드랑이에 꽂힌것은 아니지만

그 끝이 등을 뚫고 나온 것을 보니 이미 근맥이 끊어져 양팔에 전

혀 힘을 쓸수가 없었다. 오른팔을 뻗어 왼쪽어께의 소검을 빼내려

하나 오른쪽 어깨를 들어 올릴 수가 없으니 어찌하리오?

이 결투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환호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

려 퍼졌다.

 

"강도를 눌렀다. 저 악독한 강도를 이겼다!"

 

소로극조차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소보와 아만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 했다. 허나 계노인은 여전히 온몸을 부들부

들 떨며 이를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이문수는 그가 자기를 걱정한 나머지 그토록 두려워 하고 있는줄

알았다. 그에게로 가 그의 거칠고도 큼직한 손을 잡으며 그에 귀

에다 바짝 입을 대고 속삭였다.

 

"할아버지, 걱정마세요. 저 강도는 결코 저를 이길 수 없어요."

 

허나 여전히 그의 손은 차디 찼으며 몸은 떨고 있었다.

이문수가 고개를 돌리니 소보와 아만이 바짝 껴안고 있는게 보였

다. 순간 가슴속에 충만했던 승리의 희열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걸 본 그녀는 자기 자신 또한 떨기 시작했는데

계노인을 잡고 있던 자기의 손 또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노인의 손을 놓으며 아만의 목에 걸려 있던 끈을 잡아

끌었다. 아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기만 하였다.

 

"너는 나의 노예이니 나를 따라 가야만 한다."

 

소보와 아만의 마음도 동시에 얼어 붙은듯했다. 둘은 서로를 부둥

켜안고 있던 네 개의 손을 살며시 풀었다.

그들은 카자흐족에게 자자손손 전해 내려오는 이 규칙을 결코 어

길수 없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

졌다.

이문수는 한숨을 내쉬며 아만의 목을 옭아매었던 끈을 벗기며 말

했다.

 

"소보가 그대를 아끼는데, 내...... 내가 그를 상심에 빠뜨릴 순

없지. 그대는 소보의 사람이다!"

 

하며 가볍게 아만을 밀어 소보의 품에 안겨 주었다.

소보와 아만은 자기들의 귀를 의심하는듯 동시에 물었다.

 

"정말 입니까?"

 

이문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소보와 아만은 그녀의 손을 부여잡으며 연신 흔들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들은 기쁨에 어쩔줄 몰라 이문수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그

들의 손등을 적시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소로극이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 큰손으로 이문수의 어깨를 두드

렸다.

 

"한인 중에도 과연 좋은 사람이 있구나. 허나...... 아마도 그대

하나뿐일 것이오."

 

차이고도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좋아, 내가 한턱 내지. 사람들을 불러 악독한 강도를 잡은걸 축

하 해야지. 어! 강도가......?"

 

차이고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보니 진달해는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이문수와 아만을 주시하고 있는

동안 그 강도는 기회를 틈타 뒷문으로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소로극은 끓어오르느 화를 참을 길 없었다.

 

"빨리 쫓자!"

 

하며 문을 열러 젖히니 엄청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소로극은 바

람에 밀려 맥을 못 추고 땅으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한풍과 눈의 기세가 워낙 세차 사람들은 숨조차 못 쉴 지경이었다.

아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같은 뉼보라에 그가 도망가 봤자 멀리 못 갈 터이고, 억지로

쫓아가다 공연히 눈속에서 죽기 쉽상입니다. 내일 날이 밝아 바

람이 좀 가라앉거든 그 악당의 시신이나 찾으면 될 거예요."

 

소보가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문을 닫아 걸었다.

소로극은 눈을 부릅뜨며 한참 동안 이문수를 쳐다봤다.

 

"형제여, 그대는 카자흐인이지 않은가?"

 

이문수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전 한인 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만일 한인이라면 어째서 한인강도를 때려눕히고

우리 카자흐인을 구해 주었는가?"

"한인 중에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저......

저는 결코 나쁜사람이 아닙니다."

 

소로극은 혼자 중얼거렸다.

 

"한인 중에도 좋은 자가 있다고?"

 

평생 한인을 증오해 왔는데 지금 그 신념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

다. 그는 자신에 대해 부글부글 화가 치미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

다. 하필이면 어젯밤 곤드레가 되어 저 한인 강도와 한바탕 결투를

벌여 보지 못했단 말인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위급하고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그처럼 한심한

꼴을 보이다니! 다행히도 저 소년이 구해 줬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

았다면 그 강도의 장검이 이미 자기의 정수리에 꽂혀 있을 것은 명

약관화한 사실이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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