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백마소서풍

3. 사부를 만나다.

오늘의 쉼터 2014. 6. 19. 12:52

<사부를 만나다.>

 

 

이 백마는 이미 나이가 들어 힘도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평범한 말은 따를수 없었다.

동이 틀 무렵에는 마침내 다섯명의 강도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뿐더러

말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문수는 사막에 발자국이 남아 그들이 당장은 쫓아오지 못한다 해도

결국은 발자국을 추적해 따라 올것이 분명하니 잠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십여리를 더 달리니 이미 해는 중천에 떴다.

모래 언덕을 몇번넘자 돌연 서북방 쪽으로 초목이 무성한 구릉이 보였다.

사막 한가운데서 이렇듯 초목을 보게 되니 마치 무릉도원에 이른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사막의 모래언덕은 기복이 심해 커다란 모래언덕이 이 구릉을 막아버려

멀리에서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문수는 몹시 놀라,

 

(귀신이 사는 산 일 리는 없을텐데, 사막 한가운데 이렇듯 산이 많단 말인가?

이런곳이 있다는 얘긴 들어 본 적도 없는데.)

 

하다가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귀신이 있는 곳이라면 더욱 잘됐지, 뭐.

이 다섯 명의 흉한들을 이리로 유인 해야지.)

 

백마는 걸음이 매우빠른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산기슭에 다다라 계곡으로 들어섰다.

산 사이로 작은 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그를 본 백마는 냇가로 마구 달렸다.

이문수도 말에서 내려 맑은 물을 손으로 떠 모래와 먼지로 더럽혀진 얼굴을 씻고는

몇 모금 마셔 보니

그 물맛은 감미로울뿐만 아니라 시원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통수에 뭔가 딱딱한 물체가 닿는가 하더니

쉰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도데체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이문수는 크게놀라 몸을 돌리려 하는데 다시 그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난 네 뒤통수에 지팡이를 겨누고 있으니

만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즉시 죽을줄 알아라."

 

이문수는 이 딱딱한 물체가 좀더 그에게 다가오는걸 느끼고는

이 아득하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자가 말할줄 아는걸 보니 귀신은 아닌가 보다.

나보고 여기서 뭘 하느냐고 물은걸로 미루어 이곳에 살던 사람인가 보다.

그렇다면 강도는 아니겠구나.)

 

다시 그 목소리가 들린다.

 

"내 물음에 왜 대답을 않는거냐?"

"나쁜 사람들이 나를 쫓아와서 이곳으로 도망쳐 온거예요."

"나쁜 사람들이라니?"

"강도떼예요."

"강도? 이름이 뭔데?"

"저는몰라요.

예전엔 표국에 있던 자들인데 회강에 와서는 강도짓을 하고 있어요."

"넌 누구냐? 부친은 누구고, 사부는 또 누구지?"

"전이문수라고 하고요,

제 아버지는 백마이삼이고 어머니는 금은소검 삼낭자예요. 사부는 없어요."

 

뒤에서 '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은소검 삼낭자가 백마이삼에게 시집갔다고 하더니,

그들이 네 부모란 말이냐?"

"두분다 저강도들에게 죽음을 당하셨어요.

그런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뭔가 생각하는듯 다시 '음' 했다.

 

"일어나라!"

 

이문수가 몸을 일으켰다.

 

"돌아서라."

 

이문수는 조금씩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 노인은 목장(목장)의 날카로운 끝을 이문수의 뒤통수에서 떼내는데

단숨에 떼지 않고 슬쩍슬쩍 위협하더니만 이번엔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그러나 목숨을 노리고 있는게 아니라 단지 겨누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문수가 그를 슬쩍 훔쳐보니 거칠고 냉혹한 목소리만 듣고는 틀림없이

흉폭한 사람일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 딱버티고 서 있는 사람은

이미 노쇠하여 바싹 마른데다 수심에 가득찬 눈과 고생을 많이격은 듯한

굴을 한 한인 복장의 노인이었다.

의관은 이미 낡을대로 낡아 있어 어쩐지 속은 듯 한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곱슬머리인지라 그리 한인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는지요. 그리고 여기가 어디쯤인지요?

 

이문수의 용모가 빼어나게 예쁜것을 본 노인 또한 뜻밖인지라

황했으나 여전히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나도 모른다."

 

이렇게 두사람이 대화를 시작했는데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이문수는깜짝 놀랐다.

 

"강도가 오고있어요. 할아버지, 빨리 숨어야돼요."

"숨어? 뭣하러?"

"저 강도들은 매우 난폭한 자들이에요.

할아버지도 죽일지도 몰라요."

"너는 전혀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째서 내가 죽고 사는 문제에 왈가왈부하는 게냐?"

 

노인이 이렇듯 이문수의 다급한 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하고 있는동안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와 지고 있었다.

이문수는 자기 목을 겨누고 있는 노인의 날카로운 지팡이도 두려워 하지않고

그의 팔을 잡으며 애원했다.

 

"할아버지 함께 도망쳐요. 이제 더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어요."

 

노인은 이문수의 손을 밀쳐내려 했으나 그의 미약한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문수가 기이하게 여기며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제가 부축해 드릴테니 말에 오르세요."

 

두손으로 그의 허리를 받쳐 안장에 올려놓았다.

노인의 몸은 몹시 여위어서 비록 남자라고는 하나 팽팽한 젊음을 가진

이문수보다는 무겁지 않았고 안장 위에서 휘청대는 모습이 언제라도

떨어질듯 하였다.

이문수도 잽싸게 말에 올라 노인뒷편에 앉아서는 산 깊숙이 말을 몰았다.

두사람이 잠시 우물쭈물거리는 사이에 다섯마리의 말은 산계곡까

이미 달려왔으므로 다섯강도들의 호흡소리마저 희미하게 들려올 지경이다.

노인이 돌연 고개를 돌리며 고함을 질렀다.

 

"넌 저들과 한통속이지. 너희들이 간계를 써서 나를 속이려고."

 

이문수는 병색이 완연하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사납게 일그러지며

매서운 눈빛으로 자기를 쏘아보자 두려운 한편 몹시 당황하여 답변했다.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나는 할아버지를 오늘 처음으로 보았는

뭣하러 속이려 들겠어요?"

"너 나를 속여 너를 고창미궁으로......"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던 노인은 채말을 끝맺지도 않고 입을 다물었다.

'고창미궁' 이란 네 글자, 이문수가 어릴때 부모와 함께 회강으로 도망할때

소근대며 하는 말중에 몇번이나 튀어나왔던 것을 들은적이 있으나

당시엔 그뜻을 몰랐을 뿐더러 결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헌데 지금 십년이 지나 이 노인의 입에서 또 그말을 들으니 잠깐 갈피를 못잡고

언젠가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들은적이 있었던 것 같아 뭐가 뭔지 종잡을 수 없어 물었다.

 

"고창미궁? 그게뭔데요?"

"너 정말 고창미궁이 무엇인지 모른단 말이냐?"

 

이문수는 고개를 좌우로 설래설래 흔들었다.

 

"몰라요. 아! 그래 그건......"

 

노인이 급히 다그쳐 묻는다.

 

"그래 뭐냐?"

"제가 어렸을 적에 엄마 아빠와 회강 으로 도망치면서 그들이

'고창미궁' 이라고 하는걸 들은 적이 있어요.

이주 좋은 곳인가 보죠?"

 

노인이 대경 실색한다.

 

"네 부모가 또 뭐라고 말했었지? 날 속일 생각일랑 말고."

"저도 아빠 엄마가 하신말씀을 하나라도 더 기억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들은 거라곤 좋다는말 한마디 뿐이에요.

다시는 두분의 목소리를 들을수조차 없답니다.

할아버지, 저는 아빠 엄마가 다시 살아나서 딱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한답니다.

아! 아빠 엄마가 살아만 계신다면 날마다 날 욕하고 때려도 좋으련만.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날 때릴 수가 없게 되었는걸요. 영원히!"

 

처량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던 이문수는 돌연 소로극이 소보를 무섭게 때리던

채찍 소리와 분노의 질책소리가 귀에 들리는듯 했다.

노인이 안색을 약간 부드럽게 풀며 '음'하더니 돌연 큰소리로 물었다.

 

"넌 시집 갔느냐?"

 

이문수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 몇년간 누구와 함께 살았느냐?"

"계노인과 함께 살았어요."

"계노인이라고? 그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 생김새는?"

 

이문수는 백마에게 속삭였다.

 

"착하지, 강도가 쫓아오니 빨리 달려라."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어쩌자구 왜 이런 쓸대없는 일을 묻고있담?"

 

그러나 노인의 얼굴에 의심하는 빛이 역력했으므로 결국 대답하고 말았다.

 

"계노인은 팔십세 가량 되셨는데 백발에다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 이시지만

저를 잘 돌봐 주셨어요."

"회강에서 또 어떤 한인을 알았지? 계노인의 집에 또 누구 없었나?"

"계노인의 집에 다른사람은 없었어요.

카자흐인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한인이라니요. 당치 않아요."

 

백마는 두사람이나 태우고 달리다 보니 자연 그걸음이 빠를 수 없

뒤의 강도 들은 점점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핑! 핑! 하며 화살이 연이어 몸 바로 곁으로 스쳐 날아갔다.

강도들은 그녀를 산채로 잡을 작정이니 결코 그녀를 죽이려고 쏘는게 아니라

단지 위협을 줘 말을 멈추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저악독한 다섯명의 도적과 죽을 결심을 했으니

이 할아버지라도 살아 도망하도록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말에서 펄쩍 뛰어내리며 말의 엉덩이를 힘껏 때렸다.

 

"백마, 백마! 할아버지를 태우고 빨리 달려라!"

 

이문수의 외치는 소리를 들은 노인은 그녀의 마음이 이처럼 착할

생각도 못하다가 자기 혼자 피신시키려는 걸 보고 놀라 잠시 주저하다

낮은 소리로 말했다.

 

"찔리지 않게 조심하고 내 손의 침을 받아라."

 

이문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오른손의 두손가락 사이에 있는 가느다란 침을

손을 내밀어 집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이 침의 끝에는 극독이 묻혀있으니 강도들이 너를 붙잡으려 할때

살짝 그의 몸에 찌르면 즉사 할것이다."

 

이문수는 방금 전에도 그의 수중에 침이 끼워 있는것을 봤으나

때는 전혀 주의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독침은 자기의 손에 놓여져 있지 않은가.

이렇게 이문수가 놀라 어찌할바 몰라하는 새에 노인은 말을 재촉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적들이 다가와 이문수를 가운데 놓고 첩첩 에워쌌다.

다섯 명의 강도는 이처럼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는 누구도 늙은이를 쫓아갈 생각을

버린것 같았다.

강도들이 다투어 말에서 내리는데 얼굴에는 모두 징그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문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할길 없었으나 분주히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할아버지가 이독침 이면 능히 사람의 목숨을 끊어놓을수 있다 했으나

이처럼 작은침 하나로 눈앞의 흉악하고 난폭한 사내들을 어찌 당해내랴 싶었다.

또 한사람은 죽일수 있다 해도 여전히 넷이 남았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면 이 일침이 스스로를 찌른다면 저 강도들에게 당할 능욕은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예쁜 계집아이구나!"

 

뒤이어 두 사내가 그녀를 덮치려 달려들었다.

왼편에 있던 사내가 일격을 가하자 다른남자는 땅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나와 다툴 셈이냐?"

 

성난 소리로 말하며 이문수의 허리를 껴안으려 들었다.

이문수는 당황한 중에도 그의 오른팔에 침을 찌르며 큰소리로 외쳤다.

 

"악독한 강도야, 물러서라!"

 

그사내는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처다보더니만 꼼짝도 않는다.

에 엎어져 있던 사내가 양손을 뻗어 이문수의 다리를 껴않고

있는 힘껏 잡아당겨 그녀를 땅바닥에 쓰러뜨리려 했다.

이문수는 왼손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땅을 지탱하고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그의 가슴에 침을 찔렀다.

사내는 하하하 크게 소리내어 웃더니만 갑자기 웃음소리가 멈추며 크게 입을 벌리며

온몸이 굳어지며 꿈쩍도 않았다.

이문수는 몸을 벌떡일으켜 잽싸게 말에올라타고는 산둥으로 도망쳤다.

나머지 세명의 강도는 두사람이 돌연 몸이 굳어진 것을 보고는 이문수에게

혈도를 맞은것으로 여기고는 이 소녀의 무공이 뛰어난 것으로 짐작하여

감히 쫓으려 들지 않았다.

세사람중 어느누구도 혈도를 풀줄 아는 이는 없었다.

의원에게 두 동료를 데려가려고 어께에 매려다 그들은 흠찝 놀랐다.

그들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몸은 차디 차기만 했다.

나머지 세사람은 너무나 급작스레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한참을 하니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중 성이 송(宋)이라 하는 이가 비교적 침착하여 두사람의 의복을 헤쳐보았다.

한 사람의 팔뚝에 커다란 검은 점이 있는데 그점을 유심히 보니

매우 작은 바늘자국이 나있었다.

다른한사람에게도 가슴에 큰점이 있었다.

그는 금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계집이 독침으로 찔렀구나!)

 

성이 전(全)인 사내도 짐작할 수 있었다.

 

"떨것 없다.

우리가 멀리서 거리를 두고 공격해 저 계집의 접근을 피하면 돼."

 

성이 운(雲)인 사내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계집의 수작을 알았는데 뭘 망설이는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그들 삼인은 서둘러 추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편으론 이리저리 의논을 하면서 한편으론 동료의 죽음을 생각하며 계곡으로 들어간다.

이문수는 침이 이토록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데에 놀라

기쁨을 억제할수 없었으나 나머지 삼인이 이 모든걸 알고 미리 자기가

독침을 못 쓰도록 계책을 세우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말을 급히 몰며 도망치고 있는데 홀연 왼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이쪽이야!"

 

그 노인의 음성이었다.

이문수가 급히 말에서 내려서 주위를 살펴보니

그 목소리는 동굴에서 들리는 듯했다.

소리나는 방향으로 달려가자 노인이 동굴입구에 서있었다.

 

"어찌 됐나?"

"제......제가 두사람......두명의 강도를 찌르고는 도망왔어요."

"잘했다. 들어가자."

 

노인을 따라 동굴로 들어가니 동굴은 매우 깊은듯했다.

이문수는 노인의 뒤를 바짝 쫓아 갔는데 들어갈수록 동굴은 좁아졌다.

수십장을 가자 갑자기 탁 트인곳이 나타났는데 일이 백명은 능히 수용할 만했다.

노인이 이문수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가 좁은 입구쪽을 막고 있으면 저 강도들도 감히 들어설 생

각을 못할 게다.

이곳은 한사람이 막으면 만사람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야."

 

이문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도 빠져 나갈수 없게 되잖아요.

이 동굴 안에 다른 통로가 있나요?"

"통로가 있긴 하나 산밖으로 나갈 수 없단다."

 

이문수는 문득 방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할아버지, 강도 둘이 저한테 찔리더니만 꼼짝도 못하던데 정말 죽은 걸까요?"

 

노인은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했다.

 

"내 독침을 당해낼 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이문수는 자기손에 있던 독침을 노인에게 건네주려 했다.

노인은 손을 내밀어 받으려고 하더니만 돌연 손을 움추렸다.

 

"땅에 내려놓아라."

 

이문수는 노인의 말대로 독침을 땅에 내려놓았다.

 

"뒤로 삼보 물러나라."

 

이문수는 영문을 모르는채 뒤로 물러났다.

노인이 그제서야 몸을 구부려 독침을 집어 들더니만 침통 속에 넣었다.

이문수는 그제서야 노인이 원래 의심이 많고 신중한 성격으로,

자기가 독침으로 그를 해칠까봐 방비 했다는것을 알았다.

노인이 물었다.

 

"넌 지금껏 나를 만난적이 없을텐데, 어째서 내게 말을 내줘 혼자 도망치게 했지?"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보기에 편찮으신 것 같은데 강도들이 해칠까봐 두려웠나봐요."

 

노인이 몸을 가리며 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내 몸에, 내 몸에......"

 

여기까지 말하더니 갑자기 얼굴 근육이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는데

몹시 고통스러운 듯했다.

이마에 콩알만한 땀이 흘러내리다가 이윽고 큰소리로 신음하며 땅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이문수가 두려워 어찌할바를 몰라하는데

그는 몸이 활처럼 휘며 수족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문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등이 아프세요?"

 

하며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더니만 그의 팔 다리 등의 관절을 주무르기도 하고 두들겼다.

노인의 고통이 점점 덜한듯 싶더니

개를 끄떡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얼마 안있어 고통이 완전이 사라진 듯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몰라요."

"나는 한인으로 성은 화(華)에 이름은 휘(輝)라 한다. 강남인이

'일지진강남(一指震江南)이라 일컫는 이가 바로 나다."

"아, 화 할아버지군요."

"넌 내 이름자를 들어 본적이 없단 말이냐?"

 

하는데 미혹스럼기도 하고 실망한 눈치였다.

스스로 일지진강남화휘의 명성이 강 남북에 자자하여

무림중에 모르는이가 없다고 여겼는데 지금 이문수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빠와 엄마는 틀림없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제가 회강에 왔을때 제 나이 겨우 여덟이었으니 뭔들 알겠어요?"

 

노인의 안색이 조금 밝아진다.

 

"맞아. 그랬을거야. 너......"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누군가 동굴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여기 숨어 있을거야. 계집의 독침을 조심해라."

 

하며 삼인이 한보한보 걸음을 옮기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화휘가 급히 독침을 꺼내 나무 지팡이 끝에 꽂고는 그녀에게 건네 주더니

입구쪽을 가리키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의 등을 찔러라. 절대로 성

급하게 앞가슴을 찔러서는 안된다."

 

이문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입구가 이렇게 좁으니 그들이 들어올때를 노려 그의 앞가슴을 찌

르면 훨씬 쉬울텐데.)

 

화휘는 그녀가 주저하며 미심쩍어 하는걸 보고는 말했다.

 

"생사 존망이 이 일각에 달렸는데 어째서 내 말을 듣지 않는 게냐?"

 

말하는 은성은 나지막 했으나 말투는 몹시 엄했다.

바로 이때 입구 쪽에서 번쩍이는 장도를 뽑아들고 쉴새없이 휘두르며

강도들이 오는데 상대의 기습으로부터 얼굴과 가슴 전면을 방어하기위한

짓 이었다.

곧이어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기어들어오고 있는 데 운씨 성을 가진 강도 였다.

이문수는 화휘의 말대로 한쪽구석에 바짝붙어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화휘가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 수중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느냐?"

 

하고 아무것도 없는 손을 펴보인다.

강도는 재빨리 몸을 피하면서 칼을 들었다.

언제 쓸지 모르는 암기에 대항하기 위해 온신경을 집중해 그를 노려 봤다.

 화휘가 외쳤다.

 

"찔러라!"

 

이문수가 지팡이를 번쩍 치켜올려 그 끝을 그의 등을 향해 내려치

독침은 이미 그의 근육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운가는 단지 벌에 쏘인 것처럼 등에 미미한 통증을 느꼈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이미 몸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 뒤를 바짝 따라오던 강도들은 동료가 독침을 맞고 죽는것을 보더니만

화휘의 손에서 발사된 것인 줄 알고 혼비 백산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 없이 도망갔다.

화휘가 탄식하며 말했다.

 

"만일 무공을 잃어버리지만 않았다면 저런 좀도둑 다섯쯤이야 식은죽 먹기 일텐데!"

 

이문수는 속으로 그의 별명 '일지진강남'이 무공이 뛰어나기에 붙여진 것일 텐데,

좀도둑 다섯을 보고도 무공을 전혀 펼쳐보이지 않은게 의아했다.

 

"할아버지, 몸이 불편하셔서 무공을 쓰지 않으신거죠, 그렇죠?"

"그렇지 않다. 그런게 아냐. 나는 굳게 맹세했다. 생사가 달린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함부로 무공을 펼쳐보이지 않겠다고."

 

이문수는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 노인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방금은 분명히 '이미 무공을 잃었다.'고 말하더니

다시 얼버무리려 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다시말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 않으려고 하니 애써 물어볼 수도 없는 것이다.

화휘도 자기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걸 알아채고는 말꼬리를 돌렸다.

 

"내가 네게 그의 뒤를 찌르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겠느냐?

그가 동굴로 쳐들어오면서 잔뜩 긴장을 하고 막으려는 것은

앞의 적인 것이다.

너는 전혀 무공을 익힌바 없는데 그의 정면을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그의 온신경을 나를 막는데 기울이도록 한 다음,

네가 그의 등을 찌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느니라."

 

이문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계책은 정말 훌륭했어요."

 

강호에서는 화휘의 화려한 경력을 안다면 이 같은 좀도둑 하나 처치하는 것쯤은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라는 것은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얼마후 화휘는 품에서 음식을 꺼내 이문수에게 건네 줬다.

 

"먹어둬라. 두명의 좀도적이 두번다시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할게다.

허나 우리 또한 이곳을 나갈수 없으니 계책을 생각해 보자꾸나.

반드시 일거에 두명을 죽여야 한다.

만일 한사람만 죽인다면 나머지 한사람이 반드시 도망가 보고를 해서

대부대를 이끌고 올테니, 그땐 정말 속수 무책이다."

 

이문수는 그의 생각의 주도 면밀함과 지모의 풍부함을 보니

자신은 결코 그와 같은 고명한 방법을 생각해 낼것 같지가 않았다.

식 을 배불리먹고 벽에 기대어 쉴 따름이었다.

겨우 한시름 놓고 있던 이문수는 문득 뭔가 태우는 듯한 냄새를 맡았다.

이어 기침이 나왔다.

 

"저런 못된 좀도둑이 연기를 피우는구나! 빨리 동굴 입구를 막아야 겠다."

 

이문수는 땅에서 모래와 돌맹이를 집어 입구를 틀어 막았는데 다

행히도 입구가 좁았으므로 한번막자 동굴안으로 스며드는 연기가

현격히 줄어 들었다.

게다가 동굴내부가 넓었으므로 안으로 들어온

연기도 동굴 뒤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처럼 서로 한참을 대치하는 동안 동굴안으로 비쳐드는

햇빛이 점점 많아지며 내부가 환해지는걸보니 정오인 듯싶었다.

이때 화휘가 아! 하며 땅에 꺼꾸러 졌다.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 한것이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욱 고통이 심한듯 손발이 미친듯이

비틀려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이문수는 황망히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후 화휘는 통증이 많이 가신듯이 탄식했다.

 

"소저,소...... 이번에는 다시는 못 일어날까 두렵소."

 

이문수는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절대 그런 생각마세요.

오늘 강적을 만나 신경을 너무써서 그런 것이니 좀 쉬시면 나아지실 거예요."

 

화휘는 이문수의 말에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냐.아냐! 난 죽을꺼야. 내가 사실대로 말해주마. 난 혈도에......독침을 맞았단다."

"아 독침을 맞았군요. 언제일이죠? 오늘 맞았나요?"

"아냐, 맞은지 십이년 째야."

"이렇게 무서운 독침이었나요?"

"똑같은 거지. 단지 내가 운공으로 막아내고 있기 때문에

독성이 비교적 천천히 발작해서 후에 해독약을 복용하고 십 이년을 살 수 있었던 게야.

허나 더이상 지탱할수가 없게 되었구나.

독침을 몸에 꽂고 살아온 십이년, 매일 세 차례의 큰고통을 겪어야만 했단다.

그런데 오늘 해약을 먹지 않았으니 지난 십이년간 겪은 아픔을 다합한것보다

더욱 견딜수가 없구나!"

 

이문수는 돌로 가슴을 얻어맞은듯이 마음이 아팠다.

십년전 자기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악당들의 손에 잃었건만 이후 점차

그 아픔은 줄어 갔던 것이다.

이 십년간 언제나 괴로웠다고 할수 있는가? 아니다. 즐겁게 보낸 적도 있지 않은가.

십 칠팔세의 꽃다운 아가씨가 아무리 적막하고 마음이 아팠다 한들

기뻐서 웃고 즐거웠던 때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다.

노인은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전신의 고통을 참고 있었다.

 

"할아버지, 독침을 뽑아내면 좋아질지도 몰라요."

 

노인은 이문수에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쓸데없는 소리! 누가 모른다던? 이 산중에 나홀로 있는데 누가

있어 침을 뽑아 준단 말이냐?

산에 들어왔던 사람치고 좋은 마음씨를 가진자는 하나도 없었어. 흥, 흥......"

 

이문수는 문득 의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이노인은 어째서 밖으로 나가 치료를 받지 않는 걸까?

산중에서 혼자 이십이년을 지내다니, 무슨 사연이 있는걸까?)

 

노인은 여전히 자기에 대해 의심하고 경계하는 빛을 보이고 있었다.

허나 그가 괴로워하는 걸 보니 참으로 안됐다.

 

"할아버지, 제가 한번 해볼께요. 안심하세요. 절대 해치지 않을 테니."

 

화휘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는데 심중에 온갖 생각이 왔다 갔다 해서

어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듯했다.

이문수가 지팡이 끝의 독침을 뽑아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제가 할아버지 등의 상처를 살펴 보게 해주세요.

만일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를 느끼신다면

이 독침으로 저를 찌르시면 될 것 아니에요!"

"좋아!"

 

노인은 옷을 풀어 헤치고 등을 드러냈다.

이문수는 노인의 등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등에는 검게 얼룩진 수천 수백개의 흉터가 있었다.

 

"그 동안 온갖 수단을 다해 독침을 파내려 했지만 실패했단다."

"그 독침은 어디에 꽂혀 있지요?"

"모두 세개 인데 하나는 백호혈(魄戶穴)에,

하나는 지실혈(志室穴)에, 하나는 지양혈(至陽穴)이란다."

 

노인은 이문수에게 위치를 말해 주면서 손으로 독침이 꽂힌 자리를 가리켰다.

허나 워낙 시일이 오래 지난데다 온등에 흉터 투성인지라

바늘 구멍 자국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문수는 놀라서 물었다.

 

"모두 세개 라구요? 아까는 한개라고 하셨잖아요?"

"아까는 네가 내 독침을 뽑아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구태여 진실을 말할 필요가 있느냐?"

 

이문수는 노인의 성격이 워낙 의심이 많은것을 알고는,

독침을 맞은후 무공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혹시 자신을 해치지나 않을까 꺼려하여

독침 수조차도 줄여 말했음이 틀림없다고 짐작했다.

그녀는 사실 남을 속이고 의심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람을 일단 구해놓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이해하기 힘든 점이 하나 둘이 아니지만 어찌 해야

그의 살속 깊숙이 꽂혀 있는 독침을 빼낼수 있을까 하는 궁리에만 몰두 하였다.

화휘가 물었다.

 

"찾았느냐?"

"바늘끝을 찾아내진 못했어요. 어떻게 빼내야 하는지 말씀해 주세요."

"날카로운 도구로 살을 도려내야 찾을 수 있을 게야.

독침이 속으로 몇치나 파고 들어 갔으니 찾기가 퍽 힘들 게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음성은 이미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어떻하죠 단검이 없는데요."

"나도 없는데."

 

하며 문득 땅에 떨어져 있는 장도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걸 쓰면 되겠군!"

 

그 장도는 푸른 빛으로 빛나고 끝이 매우 예리해 보였는데

운씨성을 가진 강도 옆에 놓여 있었다.

사람은 이미 죽었으되 칼은 여전히 남아 있는걸 보니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문수는 장도로 그의 등을 도려내다가 머뭇머뭇 주저했다.

노인은 제멋대로 이문수의 속을 헤아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소저, 만일 독침을 빼내 주기만 한다면 많은 금은보화를 주겠소.

절대 속이는게 아니오. 진짜 막대한 금은 보화를 주겠소."

"저는 금은보화도, 고맙다는 말도 다 필요 없어요.

오직 할아버지의 고통을 없앨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좋아 그렇다면 빨리 시작하지."

 

이문수는 장도를 들고 강도의 의복을 찢어다가 몇개의 조각을 만들어서

지혈을 시키고 상처를 싸맬 준비를 했다.

 

"할아버지, 제가 할수 있는데 까지 할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이를 악물고 노인이 가리킨 백호혈에 칼을 대고 자르기 시작했다.

칼이 살속으로 들어가 선혈이 뿜어 나왔지만 화휘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찾았느냐?"

 

십 이년간 아픔을 참는데 습관이 되어서 예리한 칼이 살을 베어도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문수가 머리에서 비녀를 빼 상처를

더듬으니 마침내 매우 가는 독침 하나를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엄지와 검지를상처속에 집어 넣어 독침 끝을 잡으려 하는데 애써 잡아당겨도

손끝이 미끄러워 독침을 뽑아낼 수가 없었다.

번번이 실패하다 네번째에서야 독침을 뽑아내었다.

화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졸도 하고 말았다.

 

(졸도 했으니 차라리 아픔을 덜 느끼겠구나.)

 

살을 헤집어 나머지 두개의 독침도 모두 뽑아내었다.

그런후 천천히 상처를 싸매 주었다.

얼마 안 있어 노인이 서서히 깨어났다.

눈을 번쩍 뜨더니 그는 면전에 놓인 세 개의 독침을 보며 원한에 사무친듯 말했다.

 

"몹쓸 침, 망할 놈의 침! 이것들이 내 살에 박힌지

십 이년만에 오늘에야 비로소 빼내었구나!"

"이소저, 내목숨을 구해줬는데 아무것도 보답할게 없으니

이 독침 세게를 그대에게 드리겠소.

이 독침은 비록 내몸에 십이년간 박혀 있었지만 그 독성은 여전히 남아 있소."

 

이문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필요 없어요."

 

화휘는 기이해 하며 말했다.

 

"독침의 위력을 그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도 그러는가.

독침 하나만 지니고 있으면 어느 누구도 감히 그대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게요."

 

이문수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전 다른 사람이 절 두려워 하는걸 원치 않아요."

 

그러면서 속으로 혼자 중얼 거렸다.

 

(다른 사람이 날 좋아하기만 한다면 이 독침은 아무 쓸모가 없는 걸.)

 

독침을 빼낸후 화휘는 출혈이 심해 몹시 몸이 허약한 상태 였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으므로 한시간 이상을 잤다.

꿈결에 누군가 마구 저주해대는 소리를 듣고는 놀라 일어나 보니

송씨성을 가진 강도가 동굴 밖에서 온갖 욕설을 마구 해대고 있었다.

자기는 들어오진 못하고 화휘와 이문수의 화를 돋궈 나오게 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화휘는 듣자듣자하니 도저히 끓어 오르는 화를 참을수가 없어 벌떡 일어서며 말한다.

 

"내 몸을 괴롭히던 독침도 이미 제거한 마당에 독지진천남(獨指震天南)이

저런 조무래기 도적둘을 두려워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몸이 나아졌다고 해도 힘은 아직 부족해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독침이 워낙 체내에 오래 박혀 있어서 삼사개월 내에는 무공을 되찾기 힘들것 같구나."

 

그러나 밖에서 '늙어빠진 놈' 운운하는 욕설이 들리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도대체 이 모욕을 어찌 수개월 동안 참고 저것들을 없앤단 말인가?"

 

(저것들이 만일 끝내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가 자기들

근거지로 돌아 가서는 패거리를 끌고오는 날엔 큰일이 아닌가.

도데체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다 문득 마음속에 정한바가 있는 듯이 말했다.

 

"이소저, 내가 지금 그대에게 간단한 무공 한가지를 가르쳐 줄터

이니 나가서 저 두 좀도적을 수습 하시오."

"얼마나 걸려야 배울수 있나요? 시간이 없잖아요?"

 

화휘는 깊이 생각하는듯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만약 그대에게 독지점혈(獨指點穴), 도법, 검법을 가르쳐 주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반년은 걸려야 이룰수 있으니 지금으로선 어림없는 일이지.

무기 하나만 있다면 일이 초(招)로도 문제없이 해치울수 있을텐데.

이 동굴중에 어디서 무기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고개를 들더니 문득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

 

"옳지. 저기 저 조롱박 두개만 따오너라.

긴 등나무를 이어서 유성추(流星鎚)를 연습하자꾸나."

 

이문수가 칼로 조롱박 두개를 베어 갖고 왔다.

 

"좋아 칼로 조롱박에 구멍을 하나 내라.

그 안을 모래로 가득 채운 다음 그 구멍을 막도록 해라."

 

이문수는 노인이 시키는대로 움직였다.

두개의 조롱박에 모래를

가득 채우니 가가의 무게가 칠팔 근이나 나가서 유성추로 쓸만 했다.

화휘는 그걸 손에 쥐고 말했다.

 

"우선 성월쟁휘(星月爭煇) 일초를 네게 가르쳐 주겠다."

 

하며 조롱박 유성추를 들고 천천히 자세를 취한다.

이 성월쟁휘 일초는, 죄추로는 적의가슴과 복부를 나누는 상곡혈(商曲穴)을 치며,

우추는 늘어뜨렸다가 거둬 들이며 등의 영태혈(靈谷穴)을 치는것이다.

비록 단 일초라지만 그 안에 손동작과 안력, 추를 움직이는 법, 혈도를 알아내는 법 등

각종 법문을 포함하고 있었다.

좌우로 적을 피하며 방어하는 그 힘을 이용해 반격하는 것으로 이문수는 한 시간여 동안

충분히 배운후 마침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출추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겸손하게 말했다.

 

"제가 워낙 아둔해여 이토록 오래걸리게 되었습니다!"

"원 천만에. 오히려 대단히 총명한 편이다.

너는 절대로 성월쟁휘이 일초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보기엔 간단해 보일지 모르나 그면화는 가히 놀랄 만하며 그위력이 대단해

보통사람은 열흘걸려 이것을 익힌다 해도 너만큼 하지는 못할것이다.

이로써 무림의 고수와 대결하기엔 역부족이나 좀도적 두 명 쯤이야

누워 떡 먹기다. 잠깐 쉰 연후에 나가 저것들을 해치우도록 해라."

 

이문수가 화휘의 설명을 듣고 놀라 물었다.

 

"겨우 이 일초로 저들과 싸운단 말이에요?"

 

화휘는 웃으며 대답했다.

 

"비록 지금 내가 일초만 네게 가르쳤디만 너는 이미 내제자가 된 셈이다.

일지진천남의 제자가 좀도적 두명과 맞붙는데 어찌 이초를 쓸수 있겠는가?

사부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야 없지 않겠는가?"

 

이문수도 그의 말을 인정했다.

 

"그렇죠."

"어째서 사부에게 예를 올리 생각을 않는가?"

 

이문수는 느그도 사부로 섬길 생각이 없었으므로 머뭇머뭇거리며 대답을 않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한것으로 보아 몹시 상심하는 듯했다.

그녀는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사부."

 

화휘는 기쁜한편 마음이 무척 무거워서 침통해 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에 이처럼 총명하고 지혜로운 제자를

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이문수는 그의 말에 쓸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혼자 생각했다.

 

(이세상에서 계노인 말고는 단 한명의 육친도 없으니

무공을 배우건 말건 내게 달라질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그뿐이다.

그러나 사부가 있으면 누구도 해하려고 덤비진 않겠지.)

 

"날이 어두워지려 하니 유성추를 들고 떠나라.

넓은 곳으로 가서 두명의 얼간이들을 해치우도록 해라."

 

이렇게 말하던 노인은 이문수가 두려움에 떠는것을 보고는 노하여 말했다.

 

"내 무공을 믿지도 않으면서 무엇하러 내게 사부로 예를 올렸느냐?

왕년에 민북쌍웅(민북쌍웅)이 이 성월쟁휘 일초에 목숨을 잃었거

저 좀도적 둘이 민북쌍웅보다 낫단 말이냐?"

 

이문수가 민북쌍웅의 무공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단지 그가 발끈 화를 내는 걸 보고는 동굴의 입구를 막았던 돌덩이를 치웠다.

오른손엔 조롱박 유성추를 들로 왼손으론 땅에서 독침 한개를 주워 들며

벼락 같이 소리질렀다.

 

"죽어 마땅한 악당아, 독침이 나가신다!"

 

송가와 전가 두 도적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독침이 나가신다!'라는 말에

혼비 백산하여 급히 뒷걸음질 쳤다.

송가는 문득 만일 그녀가 독침을 쏘려 했다면 결코 자기들주위를 환기 시킬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소리를 질렀으니 독침은 쓰지 않으리라 짐작 했으나,

문앞에서 세 명의 동료가 차례로 독침에 쓰러진 것을 보았으니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문수는 천천히 그 뒤를 쫓으면서도 속으로는 몹시 두려웠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벌벌 떨며 겁내면서도 마침내 십여장의 좁은 통로를 지나 왔다.

전씨가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이문수가 왼손을 날렸다.

그는 순간 당황하여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나동그라 지는걸 본 송가는 그가 독침에 맞은것으로 생각하고는

나는 듯이 달려 동굴을 빠져 나갔다.

전가도 따라 마구 달려 동굴을 벗어났다.

두 사람은 장도로 몸을 막으며 그 중 하나가 말했다.

 

"여기서 저것과 붙자!"

"안돼. 너무 빤히 드러나는걸."

 

이때 산에는 석양이 금빛으로 찬연히 빛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햇빛에 눈이 부실까봐

조금씩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돌렸다.

갑자기 동굴에서 가는 목소리가 울렸다.

 

"독침이 왔다."

 

두 사람이 놀라 잠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사이 동굴에서 두 개의 조롱박이 보이더니

곧이어 이문수가 뛰쳐 나왔다. 두 사람은 일시적으로 놀랐으나

그녀의 수중에 든 것이 두개의 말라비틀어진

조롱박인 것을 보고는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속에 여전히 공포의 빛이 있는걸 감출 수 없었다.

이문수 또한 가슴이 쿵쿵거려 진정 할수가 없었다.

오직 일초의 무공을 배웠을 뿐인데 이 일초로 과연 도적들을 당해 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비록 어릴적에 부모에게서 약간의 무예를 배운적이 있다고는 하나 깡그리 잊어버린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녀는 이 흉악해 보이는 강도와 막상 대하려니 두렵기 그지 없었다.

만일 싸우지 않고 허장 허세로 저들을 쫓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이 달아나지 않는다면 나의 사부 일지진강남이 나오실 게다!

그 분이 독침으로 사람을 죽이기란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과 마찬가지 인데

감히 그분과 대적하려 하다니 정말 간덩이가 부은 것들 이구나!"

 

이 두강도도 일지진강남의 명성을 들은적이 있는것도 같았다.

들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저 계집을 잡아다가 곽, 진두목에게 보인다면 틀림없이 엄청난 상금을 줄텐데

무슨 진강남인지 진강북인지 알게 뭐람.)

 

이문수는 몹시 놀라 당황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할땐 성월쟁휘를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화휘가 그토록 세심히 신경을 써가며 어떻게 초식을 쓰며 혈도를 때리는지 가르쳤건만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덤빌때는 어떻게 대적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문수는 크게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하며 우선 우측으로 삼 척을 뛰어올랐다.

우측에 있던 자는 전가인데 먼저 선수를 쳐 도망가려 하니 이문수는

앞뒤 가릴 경황없이 조롱박을 휘두르며 성월쟁휘 초식의 반을 겨우 펼쳤을 뿐인데,

죄추가 그의 가슴에 있는 상곡혈에 명중했다.

우추는 그의 장도에 부딪쳐 쏴! 하며 조롱박이 갈라지더니 황사가 온통 쏟아지며 날린다.

송가는 앞으로 내딛으려 하는데 뜻밖에도 조롱박속에서 많은 황사가 날라와

그 먼지가 눈에 들어가니 눈을 비비느라 정신을 못차렸다.

이문수는 남은추로 공격을 했으나 우추가 깨진고로 상대적으로

그 힘이 감소돼 그의 등을 명중시키기는 했으나 영태혈에는 이르지 못했다.

허나 칠팔 근이나 되는 추가 그의 몸을 치니 몸의 균형을 못잡고 눈도 못뜬채

앞으로 쓰러지면서 이문수의 어깨를 움켜잡는다.

이문수는 당황하여 아야! 하고 외치며 급히 왼손을 뻗어 그를 밀쳤다.

그녀는 너무나 급한 나머지 수중에 독침을 갖고 있다는것 잃어 버렸던 것이다.

그녀가 밀쳐 냄과 동시에 독침이 그의 복부 깊숙이 박히니

송가는 양 어깨를 부를 떨며 곧 죽고말았다.

강도는 죽었으나 그의 팔은 여전히 그녀를 꽉 껴안은 채 바싹 조이고 있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떼내려 했으나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화휘가 탄식하며 말했다.

 

"멍청이 같으니라구. 배울 때는 멀쩡히 잘하더니만 막상 부딪히니

죄다 엉망진창이구나!"

 

하며 발을 들어 송가의 꼬리뼈를 걷어차니

시체는 양 어깨를 풀며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만다.

이문수는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고개를 돌려 전가를 보니 반듯하게 땅에 누워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눈을 부릅뜬채 꼼짝도 않는것이 아까 모래를 가득 채운 조롱박에 혈도를 맞아

죽은 것이다.

이문수는 하룻 사이에 연이어 다섯사람을 살해한 것이니

아무리 부모의 원수를 갚고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직도 어리기만 한 여자로서 견디어 내기 힘든 일이었다.

부들부들 떨며 두구의 시체를 바라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화휘가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우는 게냐? 사부가 네게 가르쳐준 성월쟁휘 일 초가 효험이 있었느냐?"

 

이문수는 오열하며 대답했다.

 

"제......제가 또 사람을 죽이고 말았어요."

"그깟 좀도적 몇 쯤 죽인게 뭐 그리 대수냐?

내가 무공을 회복한 후에 모든걸 네게 전수해 주마.

이 대사를 이룬후 중원으로 돌아가 사도가 함께 천하를 누비면 그 누가 맞서리오?

자, 이리 오너라. 내집으로 가 쉬며 따뜻한 차나 마시자꾸나."

 

하며 이문수를 끌고 왼편 숲속으로 들어갔다.

흰 자작나무가 쭉늘어서 있는길을 지나 몇리를 가니 초가집 한 채가 나타났다.

이문수가 그를따라 집안에 들어서니 장식은 별다르게 눈에 띠진 않으나 정결하였다.

또 한분의 목판 대련이 걸려 있는데 목판 마다 일곱자가 세겨져 있었다.

상련에는 '백수상지유안검'(白首相知猶按劍)이라고 씌어 있었고,

하란에는 '주문조달소탄관'(朱門早達笑彈冠)이라 씌어 있다.

그녀는 회강에 온 이후 여지껏 대련을 본적도 없는데다 그때 이후 글을 배워 본적이 없었다.

어릴적에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 있어 다행히도 어렵지 않개 열네자를 읽을 수는 있었으나

뜻은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댔다.

 

"백수상지유안검......"

 

그것을 들은 화휘가 놀라 물었다.

 

"이 시를 읽은 적이 있느냐?"

"아니요. 이 열네 자는 무엇을 뜻하나요?"

 

화휘는 풀어서 설명해 줬다.

 

"이는 왕유(王維)의 시귀절 이란다.

상련은, 만일 네게 지기(지기)가 있어 두 사람의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평생을 사귀었다고 해도 결코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

그가 언제 어디서 너를 해할지 모르는 일이니

그가 네게 올때면 칼을 차고 있는 편이 좋다 라는 뜻인데,

이 두귀절의 시 중 앞의 귀절은 인정이란 파도처럼 뒤집히게 마련이란 것을 말해주지.

뒷귀절은 만일 너의 오랜벗이 뜻을 이뤄 입신출세를 해

혹 그가 널 끌어올려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면 그의 비웃음을 살 뿐이라는것을 알려주지."

 

이문수는 노인이 언제 어디서나 그녀를 의심하고 경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의 몸에 독침을 뺨내주고 나서야

그녀가 결코 자기를 해치려 들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대련을 대하니 그가 주위 사람은 물론이요

친한 벗조차 꺼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생 얼마나 상처를 입었으며 분노하고 좌절했는지를 미뤄 짐작할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차를 끓이러 갔다.

두 사람 각자 뜨거운 차를 마시고 나니 정신이 반짝 들며 개운 해 졌다.

이문수가말을 꺼낸다.

 

"사부님, 저는 돌아가야 겠어요."

 

화휘가 놀라며 얼굴에는 실망의 빛을 역력히 드러냈다.

 

"가겠다구? 내게 무예를 배우지 않겠단 말이냐?"

"그게 아니에요! 어젯밤 내내 돌아가지 않았으니

할아버지께선 틀림없이 몹시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할아버지께 말씀드린 연후에 돌아와 무예를 배우겠어요."

 

화휘가 발끈 화를 내더니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한다.

 

"네가 만일 오늘 일을 그에게 말한다면 앞으로 다시는 날 못 볼 줄 알아라."

 

이문수는 놀라 펄쩍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수 없다구요?

할......할아버지께선 나 때문에 몹시 마음 아파 하고 계실텐데요."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된다.

당장 맹세를 해라. 오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아니면 넌 이 산을 나갈수 없을줄 알아라."

 

그는 방끈화를 내더니 등의 상처가 갑자기 쑤시는듯 윽! 하며 기절하고 말았다.

이문수는 얼른 그를 부축하며 이마 위에 차가운 물 몇방울을 떨어뜨렸다.

얼마 후 회휘가 서서히 깨어나더니 이문수가 눈앞에 있는 걸 보고는 놀라 말했다.

 

"아니, 아직도 가지 않았단 말이냐?"

 

이문수는 도리어 반문했다.

 

" 등이 많이 아프세요?"

"좋아졌어. 그런데 가겠다고 하더니 어째서 아직 떠나지 않았지?"

 

이문수는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사부가 이렇듯 중상을 입었는

내가 보살피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사부께서 이렇듯 편찮으신데 제가 며칠간 이곳에 머물며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화휘는 몹시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초가집에서 쉬며 하룻밤을 묵었다.

이문수는 마른풀로 침상을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하룻밤을 푹 쉰 탓인지 화휘는 원기를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아침 식사후 화휘는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공의 기본부터 가르치며 그는 말했다.

 

"이미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으니 무공을 연마하기엔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허나 우선 제자의 자질이 총명하며, 훌륭한 스승이 명석한 제자를 거두었는데

무얼 두려워 하리오? 오년 후엔 가히 적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칠팔 일을 연마하니 이문수의 무예 기량이 급속히 향상되었고 화휘의 상처

또한 어느정도 회복되어 이문수는 사부에게 예를올리고 백마를 타고 집으로 행했다.

화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맹새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노인에게 돌아가서는 화휘와 그밖의 모든 일들을 하나도 얘기 하지 않았다.

단지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헤매다 가까스로 상인들을 만나 목말라

죽지 않을수 있었다고 설명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보름하고 열흘이 흘렀다.

이문수는 화휘의 처소로 길을 떠날때면 도중에 강도를 만날까

두려워 언제나 카자흐족의 남장을 하고 다녔다.

화휘의 집에서 며칠 머무르는 동안 화휘는 전력을 다해 무공을 가르쳤다.

이문수 또한 의지할 곳이 하나 없었으므로 온 정성을 다해 무예를 익혔다.

명석한 제자에 훌륭한 스승을 만난것이니 과연 그 진도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바였다.

이렇듯 반 년을 보냈는데 화휘는 늘 이문수를 칭찬했다.

 

"지금의 네 실력으로도 이미 강호의 일류고수라 할수 있다.

만일 중원으로 돌아간다면 한번의 출수로 곧 천하에 그명성을 날릴 것이다."

 

그러나 이문수는 조금도 중원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강호에 명성을 날리는 일보다는 부모님의 원수인 강도와 대결해

그들을 꺽기 위해서는 보다 열심히 무예를 연마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 깊숙한 곳에는 또다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공을 잘 닦은 후면 소보를 얻을 수 있을꺼야.)

 

그러나 이 생각은 여러번 되풀이 할수가 없었다.

그 일을 떠올릴 때 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으니까.

비록 자주 생각할순 없었지만 그녀의 가슴속 깊이 묻어 둔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계노인의 집에 머무는 날은 날이 갈수록 적어지고

사부의 집에서 머무는 알은 점차 늘어만 갔다.

계노인은 처음 한두 번 그녀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묻다가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려는 걸 보고는 어릴적부터 고집이 세다는걸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느날 이문수가 백마를 타고 계노인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하늘을 보니

붉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북풍이 점점 거세지는데 저쪽을 바라보니 큰눈을 동반한 바람인 듯싶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말을 몰아갔다.

유목민들도 양때를 몰아 급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하늘을 보니

까마귀도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거의 집에 닿아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데문득 다그닥 다그닥! 하며

한마리의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문수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코앞에 큰눈보라가 일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이가 집을 나선담?)

 

먼 거리였지만 나긋나긋한 몸매, 아름다운 얼굴이 분명 아만이었다.

이문수는 그녀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려 나지막한 언덕의 남쪽으로 가

나무 뒤에 말을 세웠다.

그런데 아만도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언덕 기슭에 닿자마자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아만은 급히 말에서 내렸는데 한남자가 그녀를 향해 달려와 두 사람은 서로를 포옹하며

희희낙락 한다.

남자가 말을 꺼냈다.

 

"큰 눈보라가 있을 터인데 어쩌자구 왔어?"

 

하는 소리는 소보의 음성이 틀림 없었다.

아만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바보, 눈보라가 치는 줄 뻔히 알면서 어쩌자구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는거지?"

 

소보도 따라 웃었다.

 

"우리 두 사람이 매일 이곳에서 만나는 일은 세끼 밥 먹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야. 알겠니?"

 

이들 두사람은 어께를 나란히 하고 언덕 위에 앉아 소근소근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들 두사람이 하는 말이 어떤때는 매우 분명하게 드리리다가도

아주 낮은 소리로 변하면 한 마디도 알아들을수 없었다.

별안간 그들 두사람이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했는지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허나 이문수는 그들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한 소년과 한 소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는 듯이 보였다.

소년은 소보이며 소녀는 물론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들이 옛날 이야기를 할적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이미 잊은지 오래이나

십 년전의 정경이 마치 눈앞에 펼쳐진 듯 선명하기만 했다.

닭털 같은 눈송이가 펄펄 내려 세 필의 말과 세 사람의 몸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보와 아만 두 사람은 이야기에 빠져 들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고,

이문수 역시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

눈이 그들의 머리위에 쌓여 세 사람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별안간 가지 위에서 와르르 소리가 나 소보와 아만이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우박이 떨어진다! 빨리 돌아가자!"

 

하며 두 사람은 급히 말에 올랐다.

이문수는 두사람의 외침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가락만한 우박이 머리, 얼굴,손을 가릴것 없이 떨어지는데

너무나 아파 말안장의 담요를 머리위에 뒤집어 쓰고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집 앞에 당도하니 기둥에 두 필의 말이 묶여 있는데

그 중 한필은 아만의 것이었다.

이문수는 몹시 놀라 생각햇다.

 

(그들이 어째서 우리 집엘 왔담?)

 

우박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백마를 끌고 후문으로 들어가는데 소보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우박이 이처럼 퍼부으니 잠깐만 머물까 합니다."

 

계노인이 말했다.

 

"평소 그토록 청해도 오지 않더니 오늘에야 왔구려.

내 따뜻한 차 한 잔 대접 하리다."

 

진위표국의 일천 호걸이 이일대의 초원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며

지나간 후부터 카자흐인의 한인에 대한 증오는 대단한 것이었다.

계노인은 이곳에서 머문지 오래고 카자흐인은 본래 손님에게 잘 대해 주는

성품을 지녔기에 추방당하지 않을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그들이 그를 대할 때는 그 간격이 현격히 소원해져 있었다.

소보와 아만의 집이 멀리 이사했기에 눈보라를 피해 이곳을 찾아 온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십 년이 지나도 결코 계노인의 집을 올리가 만무한 것이다.

계노인이 화덕 쪽으로 가다

이문수가 얼굴을 온통 빨갛게 물들인 채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아......너 돌아 왔......"

 

하는데 이문수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고는 그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제가 여기 있다는걸 그들이 모르게 하세요."

 

계노인은 뭔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준다.

잠시후에 계노인은 양에서짠 우유와 죽, 홍차를 손님에게 대접 했다.

이문수는 불가에 앉아 소보와 아만이 웃으며 떠드는 소리를 조용히 귀 기울이며 듣고 있었다.

그러나 더이상 자신의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내 그를 만나 몇 마디의 말이라도 건네 봐야겠다.)

 

그러나 소보의 아버지가 꾸짖던 음성과 채찍소리가 떠올랐다.

여년간 그녀의 가슴속에 채찍소리가 울리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계노인은 화덕가로 돌아와 우유를 섞은 홍차를 이문수에게 건네주는데

그 눈에는 자애로운 사랑의 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산지 십년, 이들은 친 할아버지와 친손녀처럼

서로 걱정해 주고 보듬으며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가슴 깊은 곳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비록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혈육의 끈근한 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문수가 돌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옷은 갈아 입지 않겠어요.

카자흐족 남자로 가장해서 빙설을 피해 여기로 온 것처럼 할테니 절대로 아는체 마세요."

 

하더니 계노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후문으로 곧장 나가 백마를 끌고는

온 천지를 가득 덮으며 내리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초연히 사라진다.

그녀는 곧장 수 리를 걷고 나서야 말에 올라타고는 빙그르 말머리를 돌려 앞을 향해 질주했다.

하늘을 보니 검은 구름이 머리를 짓누를 것만 같았다.

그녀는 회강에서 십여년을 사는 동안 이같이 야릇한 하늘을 본적이 없었으므로

두려워 견딜수가 없었다.

문앞에 도착해 그녀는 문을 두드리며 카자흐어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여보세요!"

 

계노인이 문을 열어주며 역시 카자흐어로 소리내어 묻는다.

 

"형제여 무슨 일이십니까?"

"눈보라가 지독합니다. 노인장, 잠시만 댁에서 피할수 있겠는지요."

"물론 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오! 길 떠나는 사람이 짐을 짊어지고 다닐수는 없는 일이지요.

이미 두 분의 형제가 피해 이곳에 머물고 있답니다. 어서 들어 오시지요!"

 

하고 말하면서 이문수를 맞아 들였다.

 

"형제는 어딜 가시는 길이었읍니까?"

"흑석위자(黑石圍子)에 가려고 합니다.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하며 이문수는 속으로 생각한다.

 

(할아버지 연기가 정말 훌륭한데, 진짜 같잖아, 조금도 어색해 하는 구석이 없구나.)

 

계노인은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저런, 흑석위자에 가시려구요? 날씨가 이토록 험악한데,

오늘은 아무래도 가기 힘들겠는데요.

제 집에서 하룻밤 머물고 내일 떠나도록 하시죠.

만일 길을 잃게되면 큰일입니다."

"폐를 끼치게 돼 송구스럽습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몸에 잔뜩 쌓인 눈을 털어냈다.

소보와 아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불가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소보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형제여, 저희도 눈보라를 피해 이곳으로 왔답니다.

이리로 오셔서 함께 몸을 녹이시죠!"

"네, 고맙습니다."

 

하며 그의 곁으로 가 앉았다.

아만도 웃음을 띤채 인사를 했다.

소보와 그녀가 팔구 년을 못본 새 이문수는 꼬마아이에서

소녀로 변한데다 남장까지 했으니 소보가 어찌 알아 볼수 있으리오.

계노인이 음식을 내오니 이문수는 그 음식을 들면서 그들의 성명을 물었다.

자기는 아사탁(阿斯托)이며, 여기사 이백여리 떨어진 카자흐 부락인이라 꾸며댔다.

소보는 창문으로 가 하늘을 살펴보진 않았으나 벽을 흔들어대는

바람소리만 들어봐도 밖이 어떠하다는 걸 미뤄 짐작 할수 있었다.

아만이 조심스레 말했다.

 

"예전에 바람레 집이 날라갈 수도 있다고 말한적이 있었지?"

"그게 아니라 눈이 워낙 많이 내리니 지붕이 견뎌내지 못할까 걱정이야.

아무래도 내가 지붕에 올라가 눈을 좀 쓸어내야 겠어"

"그러나 바람에 날아갈지도몰라."

 

소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눈속에 푹 빨질 지경인걸. 땅에 떨어져도 죽진 않아."

 

이문수의 찻잔을 든 손이 거의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속은 복잡 하기 그지 없었다. 도데체 어찌해야 좋은가.

어릴적 동무가 바로 자기 옆에 앉아 있는데 정말로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있는지 도대체 알길이 없었다.

그가 이미 자기를 깡그리 잊어버렸는지,

그렇지 않다면 심중에는 결코 잊지 않고 있으나 아만이 알게 될까봐 그러는건지.

밖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이문수가 자리에 앉은 지도 오래된듯 했다.

소보와 아만은 손을 꼭 잡은 채 소근 거리고 있었다.

옆의 사람이 듣건 말건 전혀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라

오짇 연인끼리 감미로운 정담에 빠져 있는데 불빛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며

두 사람의 얼굴을 비쳐 주고 있었다.

이문수는 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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