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백마소서풍

1. 사막의 추격자들

오늘의 쉼터 2014. 6. 19. 12:47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

 

<사막의 추격자들>  저 자 : 김 용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회강(回疆)의 광활한사막에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두필의 말이 급히달려오고있었다.

선두에서 달리는 우뚝한 다리와 긴 몸통의 백마위에는 칠팔 세 가량의 어린소녀를

품에 안은 젊은 부인이 타고있었다.

그뒤를 따르는 홍색말에는 후리후리한 키에 수척한 몸을 한 남자가 엎드려 있었다.

그사내의 등에는 긴 화살이 꽂혀 있는데,

그의 등에서 말등으로, 다시 땅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선혈은 모래위에

붉은 한 줄기의 선을 긋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화살을 뽑아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화살을 뽑아내면 그나마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즉사하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누군들 죽지 않으랴? 죽음 앞에선 당해낼 장사가 옵는 법.

그러나 누가 앞에 가고 있는 아내와 아직도 어린 딸아이를 돌봐 줄 것인가?

뒤에는 흉악하고 잔인무도한 적들이 바짝 쫓아오고 있는데......

그를 태운 홍마는 이미 수십리를 달려온터라 몹시 지친데다가

목숨을 걸고 휘둘러대는 주인의 채찍질에 헐떡대기조차 힘들었다.

게거품을 한가득물고 달리다가 갑자기 앞다리의 맥이 탁 풀리며 땅으로 거꾸러졌다.

사내가 있는 힘을 다해 채찍을 들어 몇대를 내리치자

말은 애처롭게 울며 몸을 축 늘어뜨리더니

죽고만다.

앞서가던 젊은 부인이 말울음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말이 거꾸러져 죽어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외쳤다.

 

"어, 어찌된 일이에요?"

 

사내는 대답을 하지않고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그들 뒤 불과 몇리 밖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쫓아오고 있는 무리들을 보았다.

부인은 참지 못하고 말을 돌려 남편 곁으로 달려왓다.

그리고는 문득 그의 등에 꽂힌 화살과 등을 흥건히적시고 있는 낭자한 선혈을 발견했다.

그녀는 대경실색하여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어 했다.

이를본 어린딸도 놀란 나머지 소리친다.

 

"아, 아버지, 등에 화살이 꽂혀 있어요."

"괜찮다! 걱정하지 말아라!"

 

사내는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날려 사뿐히 아내 뒤에 올라탔다.

비록 중상은 입었으나 몸은 여전히 민첩하고 능숙했다.

그의 젊은 아내는 그를 바라보는데,

얼굴 가득히 걱정과 애통해 하는 마음이 역력했다.

그년의 목소리는 쩔리고 있었다.

 

"여보,여......"

 

사내는 아내의 애타는 마음에는 아랑곳 않는다는 듯이

양 다리로 말을 박차며 고삐를 힘껏 잡아당겼다.

백마는 이들셋을 태운체 나는 듯이 앞으로 질주한다.

이 백마가 비록 명마라고는 하나 쉴 새 없이 긴거리를 달린데 다가 이번에는

사내까지 태우고 달리니 결국 얼마 안 가 지치고 말았다.

백마는 자신에게 주인의 생사가 걸린것을 아는듯,

채찍 없이도 힘껏 달려오긴 했으나,

수십 리를 더 달려가자 마침내 그 속도가 점차로 누려지기 시작했다.

뒤에 쫓아오는 적은 한 보 한 보 바짝 다가 오고 있었는대,

는말이 조금이라도 지치면 바로 다른말로 바꿔 타려는 계산이었다.

이들은 기필코 그들을 잡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사내가 고개를 돌리니 끝없이 이어진 황사 가운데 적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니는 듯하더니만,

잠시 후엔 얼굴의 윤곽까지도 뚜렷이 알수 있을 정도로 가까와지고 있었다.

이를 본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홍매, 당시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소?"

 

젊은 부인은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다.

 

"평생 제가 당신의 말에 거역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요?"

"좋소. 그렇다면 당신은 수아를 데리고 이자리를 피해

우리 부부의 단 한점인 혈육과 고창미궁(高昌迷宮)의 지도를 보전해 주시오"

 

명령을 내리듯 사내의 목소리는 매우 강경하였다.

남편의 이말을 들은 아내는 몹시놀라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여보, 제발 그지도를 그들에게 넘겨 주고 패배를 시인해요.

당신...... 당신 몸이 우리에겐 훨씬 소중해요"

 

고개를 숙여 아내의 볼에 입맞춤한 사내는 어조를 바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우리 두 사람은 무수한 위기를 겪어 왔소.

이번에도 혹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오.

허나 여량삼걸(呂梁三傑)은 지도만 원하는게 아니오.

그들은, 그들은 당신도 노리고 있단 말이오.알아 듣겠소?"

"그들, 그들이 혹시 동문의 정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을지 몰라요.

제가 그들에게 간청해 볼께요."

 

사내의 음성이 격해진다.

 

"설마 우리 부부가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애원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이 말로는 도저히 우리 세 사람이 이 넓은 사막을 빠져나갈 수 없소. 빨리가시오"

 

이렇게 크게 소리지르며 사내는 몸을 솟구쳐 말에서 뛰어내리고 만다.

부인은 말을 진정시키며 손을 내밀어 남편을 잡으려 하나,

편의 성난 얼굴이 보일뿐이요,

잇달아 남편이 격한 음성으로 외치는 것만이 들릴뿐이다.

 

"빨리 가시오."

 

지금껏 남편에게 순종할 줄만 알았던 그녀로서는 거역할 방법이 없었다.

어쩔수 없이 말을 박차고 앞을 향해 달려가나 마음은 차가운 얼음과 같았다.

아니, 마음뿐 아니라 전신의 피가 꽁꽁 얼어붇는 듯했다.

뒤를 추격하던 무리는 사내가 말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는 일제히 큰소리로 환호하기 시작했다.

 

"백마 이삼(白馬李三)이 거꾸러졌다. 백마이삼이 거꾸러졌다!"

 

십여 인이 말에서 뛰어내려 사내를 포위하고 나머지 사십여 명은 계속 백마를 쫓는다.

그들은 사내가 쓰러져 있는곳에 이르렀다.

그는 몸을 오그려뜨이고 땅에 엎어져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으로 보아 이미 죽은 듯했다.

무리 중 한명이 코웃음을 치며 긴창을 똑바로 하여 그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창을 몸에서 빼내자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지만 백마 이삼은 여전히 꿈쩍도 않는다.

두목인듯한, 수염이 꼬불꼬불한 사내가 말한다.

 

"이미 죽었는데 뭘 두려워하고 있는게냐? 어서 그의 몸을 뒤져라."

 

두목의 명령에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

이 두 사람이 그의 몸을 뒤집는 찰라,

흰빛을 번득이며 이삼의 장도가 공중을 가르는가 싶더니 이미 두사람의 몸은 땅에 쓰러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줄 알았던 이삼이 뜻밖의 반격을 해오자 이들은 흠칫놀라 뒤로 물러난다.

 

"이삼, 너는 정말 강한 사내로구나!"

 

꼬불꼬불한 수염의 사내는 안영도(雁영刀)를 이삼의 정수리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이삼이 칼을 들어 그를 막긴 했으나 양 어께에 중상을 입은데다 팔꿈치에도 힘이 빠져

뒤로 성큼 삼보 물러나며 웩! 하고는 선혈을 뿜어냈다.

이를 본 무리들은 말을 탄채 그를 에워아고는 창칼을 겨누고 동시에 그를 향해 달려들어

찔러 죽이고 말았다.

백마이삼, 일대의 영웅은 죽음에 직면해서 까지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을 뿐더러 마침내는

최후의 일각까지도 두 명의 강적을 쓰러뜨렸던 것이다

 

그의 젊은 아내는 멀리서 남편의 노호하는 소리가 들리자

실로 칼로 베이듯 마음이 아팠다.

 

(그가 이미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 남아 무엇하리!)

 

그녀는 품에서 양모로 짠 손수건을 꺼내 딸의 옷속에 집어넣어 주며 말햇다.

 

"수아야, 이제부턴 네가 모든일을 알아서 해야 한다."

 

채찍을 휘둘러 말 엉덩이를 후려치는데 몸은 이미 안장에서 뛰어내려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안장이 가벼워진 백마가 딸을 태운채 바람처럼 달려가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백마의 다리 힘은 천하에 둘도 없는데다 수아의 몸 또한 가벼위,

이번에는 그들도 더 이상은 쫓지 못하리라!)

 

딸이 엄마를 부르는 애절한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뒤로부터

발굽 소리는 점차 가까와 지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신령이시여. 원컨대 수아를 보살피사 좋은 남편을 만나게 해 주시옵고,

비록 살면서 좌절되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

 

그녀가 복장을 가지런히 하고 머리를 매만지는 동안 순식간에 수십 필의 말이

앞뒤를 다투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 선이는 여랑삼걸 중 둘째인 사중준(史仲俊)이었다.

여랑삼걸은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청째는 신도진관서(神刀震關西)곽원룡(藿元龍)으로

백마이삼을 죽인 꼬불꼬불한 수염을 한 사내요,

둘째인 매화창(梅花槍) 사중준은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사내이다.

그리고 세째인 청강검(菁강劍) 진달해(陳達海)는 체구는 작지만 용감하고 민첩한 사내로,

원래는 요동의 마적 출신인데 후에 산서에 머물다가 곽, 사 두 사람과 의기가 상통해

산서성의 태곡현(太谷懸)에서 진위표국(晋威표局)을 개설했던 것이다.

사중준과 백마 이삼의 처 상관홍(上官虹)은 원래 동문 사형제로 두 사람은 어려서 부터

함께 무예를 배웠던 사이였다.

사중준이 심중에 줄곧 이 아리땁고 마음씨고운 사매를 사랑했고 사부 또한 묵인하던 터라,

동문의 사형제들은 진작부터 그들 두사람을 아직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인 부부로 여겼다.

허나 어찌 알았으랴! 상관홍이 우연히 백마이삼을 만나 정이 싹터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엔 그와 함께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사중준은 상심한 나머지 큰 병을 얻었고 성격 또한 변해 버렸으나,

사매에 대한 그의 정만은 여전하여 지금껏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홀로 지내왔던 것이다.

헤어진 지 십 년만에 뜻밖에도 여랑삼걸과 이삼 부부가 마침내 감양(감양)에서 부딪혀

한 장의 지도를 쟁탈하기 위해 다투기시 작했다.

그들 육십여 인은 이삼 부부를 포위해 공격하며 감양에서 회강까지 쫓아왔는데,

그중 사중준은 질투와 원한이 겹친데다 성격마저 잔인한지라,

몰래 이삼의 등에 화살을 쏘았던것도 바로 그였다.

이삼이 마침내 광활한사막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었고,

말을타고 달려오던 사중준은 상관홍이 대사막에 홀로 외롭게 서있는 것을 보고는

문득 양심에 가책을 받아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그녀의 남편을 죽였으니 이후로는 내가 그녀에게 극진히 대해 줘야지.)

 

광활한 사막에 세풍이 불어와 그녀의 옷자락이 나부끼는 모습은 사부의 연무장에서

그녀를 보았던 십 년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상관홍의 무기는 한쌍의 비수로, 한자루는 금으로, 한 자루는 은으로 되어있어,

강호에서는 '금은소검 삼낭자(金銀小劍三娘子)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지금 그녀는 수중에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듯하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숭준의 심중은 돌연 기대에 부풀어올라 명치가 후끈하며 창백한 얼굴에 홍조를 띠기 시작 한다.

그는 얼른 말에서 내리며 부른다.

 

"사매 !"

"이삼은 죽었어요?"

 

상관홍의 말에 사준중은 고개를 끄덕인다.

 

"사매, 우리가 헤어진지 어언 십년, 나는 언제나 그대만을 생각했었지."

"정말이에요? 당신은 또 나를 속이고 있는건 아니겠지요?"

 

하며 말하는 상관홍의 미소에 사준중의 가슴은 걷잡을수 없이 두근대기 시작한다.

저 웃음 띤 얼굴, 저처럼 뽀로퉁해 있는 모습은 십년전의 그 모습과 꼭같은 것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는 그의 음성은 부드럽기만 했다.

 

"사매, 이후로 나는 늘 그대와 함께 하며 영원히 편히 살게 해 주겠소"

 

상관홍의 눈에서 홀연 광채가 나며 외친다.

 

"사가, 당신은 참으로 내게 잘해 주는군요."

 

그와 동시에 양팔을 벌리며 그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사준중은 몹시 기뻐 어쩔줄 몰라 하며 손을 내밀어 그녀를 덥석안았다.

곽원룡과 진달해는 서로 마주보며 웃을 뿐이었다.

 

(둘째가 십 년을 상사병으로 앓더니, 오늘에야 마침내 그 뜻을 이루는 구나!)

 

사준중은 상관홍의 몸에서 풍기는 그윽한 향기를 맡으면서 갈피를 잡을수 없었는데,

상관홍의 양팔이 더욱 자기를 죄어오는 것을 느끼니 꿈인가 생시인가 더욱 믿기지 않앙싶다.

그런데 문득 복부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무엇인가 예리한 물체가 몸에 꽂히는 것 같았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상관홍을 밀어내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그녀의 두팔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꽉 껴안고 놓지 않았다.

마친내 두사람은 함께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워낙 급작스레 일어난 일이어서 곽원룡과 진달해는 몹시 놀랄뿐이었다.

급히 말에서 내려 그를 구하러 달려가 상관홍의 몸을 뒤집었다.

그녀의 가습엔 선혈이 낭자한데 금자루 비수가 꽂혀 있고

다른 은자루 비수가 사중준의 복부에 꽂혀 있었다.

처음부터 금은 소검삼낭자는 남편을 따라 죽기로 결심하고는 옷 속에 쌍검을 몰

래 감춰놓고 하나는 밖으로, 다른 하나는 자신을 향하게 해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준중이 그녀를 안자 두사람이 동시에 검에 찔렸던 것이다.

상관홍은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지만, 사중준은 단번에 죽지 못한 채,

사매의 손에 죽게 됨을 생각하니 비통하기 그지 없었다.

게다가 몸의 상처가 더욱 견딜 수 없었다.

 

"세째는 빨리 나를 죽여다오. 제발 더 고통을 받지 않도록......"

 

진달해는 그의 상처가 극심해 치유할 수 없는걸 알고는 큰형을 처다보았다.

곽원룡은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달해는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 사준중의 심장을 겨누고 힘껏 찔렀다.

곽원룡이 그를 보며 탄식한다.

 

"금은소검 삼낭자가 필경 이렇듯 지독한 여자인 줄은 몰랐구나."

 

바로 이때,

부하 하나가 급히 말을 몰고 달려와 보고했다.

 

"백마이삼의 시체를 아무리 뒤져 봐도 지도는 없었습니다."

 

곽원룡이 상관홍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상관홍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샅샅이 뒤져 보아도 상관홍의 몸에서는

은냥 몇 푼과 몇 가지 갈아입을 의복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은 없었다.

곽원룡과 진달해는 실망스럽기도하고 이상하기도 하여 서로 마주보았다.

그들은 감양에서 회강까지 시종 이삼 부부를 지켜보며 바짝 쫓아 왔는데,

그들은 수십인의 눈을 피해 지도가 중도에서

다른 사람에게 건네진다는 것은 결코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들 부부는 지도를 지키기 위해 생명마저 버렸으니

절대 아무에게나 건네 주었을 리가 만무한 일이었다.

진달해가 다시 한번 상관홍의 보따리를 샅샅이 살피던중 계집아이의 속바지가 보였다.

그러자 문득 집히는 데가 있었다.

 

"큰형, 빨리 계집아이를 쫓아요!"

"어? 음, 서두를 것 없다.

조그만 계집아이가 이 넓은 사막에서 어디로 도망가겠나?"

 

곽원룡은 왼팔을 들어 명령했다.

 

"두 사람은 남아 둘째를 안장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르도록 하라"

 

그가 채찍을 들어 선두로 달려가자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함성 소리가 이어지며 백여 필의 말이 따라간다.

 

그 소녀는 달린 지 이미 오랜지라 이즈음에는 이십여 리 밖에 있었다.

허나 워낙 끝없이 펼쳐진 평탄한 사막에서는 십여 리가 한눈에 들어오므로

소녀가 비록 이미 멀찌감치 달아났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잡히게 될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과연 주위가 어둑어둑해지는 해질무렵이 되자 진달헤가 별안간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저기 앞에 있다!"

 

멀리 지평선을 딸라 까만 점 하나가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백마가 제아무리 신준하다 하나 아침붜 저녁까지 쉬지 않고 달린 터라 마침내는 지쳐 버린 것이다.

이에 반해 곽원룡과 진달해는 쉴새 없이 생기있는 말로 바꿔타며 바짝 쫓으니

점점 그 거리가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이문수는 몹시 지친 채 백마등에 엎어져 깊이 잠등어 있었다.

그녀는 하루종일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한데다 먹지도 못한채

사막의 강렬한 태양 아래 입술만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백마는 대단히 총명하여 뒤에 쫓아오는 적이 어린 주인에거 해롭다는 것을 알아 치가 붉게 타는

석양이 되도록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데, 돌연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앞발을들며 우는데

공포의 빛이 역력 하였다.

곽원룡과 진달해는 모두 무공이 깊이 통달한지라 장거리를 질주하면서도 느끼질 못했으나,

두사람 다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가빠지며 견딜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곽원룡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세째, 뭔가 좀 이상한 것 같다!"

 

진달해가 사방을 둘러보며 주위를 살피니 누렇고 물기 머금은 안개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누언 구름 가운데 끊임없이 보라색이 번쩍이는 것이 그 신기하고 아름다움은

실로 지금껏 보지 못했던 바이었다.

그러나 누런 구름이 급속히 커져, 채 한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하늘의 절반을 가려 버렸다.

이들 무리들 또한 비오듯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 거리자 진달해가 초초한 듯 말을 건넨다.

 

"큰형님, 아무래도 굉장한 모래바람이 불것 같습니다."

"그래, 우선 그 계집아이를 붙잡고나서 피할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

 

곽원룡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입과 코 전체 에 모래가 불어닥쳐

나머지 말을 채 마칠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사막의 사풍은 순식간에 땅 전체를 휩쓸어 버리는 것이었다.

칠팔 명이 태풍에 날려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곽원룡이 고함을 지르듯 외쳤다.

 

"다 내려서 빙 둘러싸라!"

 

이들 무리는 사풍에 맞서기 위해 백여 필의 말을 끌어다 커다란 원을 만들어서는 사람과 말이

동시에 엎드렸다.

이들이 비록 사람과 말 다 충분히 많다 하나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가운데에 하늘을 가리고 땅을 뒤덮는 엄청난 사풍 앞에서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일엽편주와 같아서

손을 볼 도리가 없었다.

사풍이 거세질수록 사람과 말 위의 황사는 더욱 두텁게 쌓여만 갔다.

곽원룡과 진달해처럼 무엇 하나 두려워 하지 않는 억센 사나이들

조차도 이 어마어마한 바람의 기세에는 전율할 따름 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공연히 고창미궁을 찾아서 이 사막까지 쫓아와서는 도리어 이곳에 묻히게 되는구나.)

 

이 엄청난 바람이 일으키는 소리는 무수한 악귀가 동시에 기세를 떨치는듯 했다.

 

대사막의 사풍이 밤새 불더니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차차 가라 앉기 시작하였다.

곽원룡과 진달해가 몸을 일으켜 사람과 말을 점검해보니

두 명의 동료와 다섯 필의 말이 죽어 있었다.

허나 사람들 모두가 이 엄청난 사풍에 날려가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버티느라 피로하고

지친데다가 더욱 곤란한 것은 백마를 탄 소녀가 도데체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큰 사풍에 사막 어느구석에 파묻혔을게 틀림없겠지만,

무공을 갖춘 억센 사내들조차도 견뎌내지 못하고 있는 판국에 하물며 가냘픈 소녀임에야.

그들은 사막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먹었다.

그리고 한참을 쉰후에야 곽원룡이 영을 내렸다.

 

"누구든지 백마와 계집아이의 종적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황금 오십 냥의 상금을 주겠다."

 

그를 따라 회강까지 온 이들은 다 진섬감량(晋陝甘凉) 일대의 강호인물들로서 천리를 마다 않고

온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인데 오십냥의 황금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망망한 사막으로 뿔뿔히 흩어져 떠났다.

 

(백마,계집아이,황금 오십냥!)

 

사람들의 심중마다 모두 이 세가지 생각만이 꽉 들어차 있었다.

어떤 이는 곧장 서쪽으로 향하고, 어떤이는 서북, 또 다른 이는 서남으로 향하는데

어두워질 무렵에 징서 육십 리에서 만나기로 약정이 되어 있었다.

 

 

양두사(兩頭蛇)정동(丁同)은 튼튼한 말을 몰아 서북방으로 달렸다.

그는 진위표국에서 이미 십 칠년간 몸 담고 있는 자로 무공은 대단하다고 볼수 없으나 수완있고

노련하여 실로 여량삼걸의 부하중 가장 두두러진 자였다.

그가 단숨에 이십여 리를 달리니 여러 동료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지라 망망한 사막 한가운데서

돌연 두려워 졌다.

사구 쪽으로 말을 몰아가는데 서북방저편에 짙은 초록색이 눈에 띄었다.

몇구루의 버드나무가 우뚝 높이 솟아 있었다.

 

(이 넓은 녹지대엔 필시 샘이 있을 터이니 다른사람들이 없다면 동지들을 불러 쉬어야지.)

 

그를 태운 말도 수초를 보더니 정동이 채찍을 재촉 하기도 전에 미친듯이 달려간다.

십여 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가니 오아시스는 끝을 찾을수 없을 만큼 넓은데다,

들은 온통 소와 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쪽에는 천막이 세워져 있는데 육칠 백 채나 될 성싶었다.

정동은 이 모든 광경이 뜻밖인지라 매우 놀랐다.

그가 회강에 온 이후 본 사람들이 기껏해야 삼사십을 넘지 않았고 이러한 대부족은 처음 이었다.

천막의 양식을 보아 하니 카자흐족이 분명하였다.

예로부터 카자흐인을 잘 표현하는말로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오고 있었다.

 

'한명의 카자흐인이 백명의 겁장이를 당할 수 있고 백명의 카자흐인 이면 회강을 누빌 수 있다.'

 

정동은 일찌기 이런말을 들은적이 있었으므로 깊이 생각했다.

 

(카자흐족의 부락에서는 조심해서 행동해야지.)

 

그때 동북쪽 산기슭 모퉁이에 따로 떨어져 있는 초라한 천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천막은 흙담에 지붕은 풀로 엮어 덮었는데

그양식이 한인 벽돌집과 흡사하나 단지 좀 누추해 보였다.

 

(우선 이 집을 좀 살펴보자.)

 

정동은 이 조그만 집으로 말을 몰아갔다.

정동은 곁눈질로 대충 살펴보니 그집 뒤편에 백마가 매어져 있었다.

튼튼한 다리에 긴 갈기가 틀림없는 백마 이삼의 말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를질렀다.

 

"백마, 백마가 여기 있다!"

 

그는 말에서 얼른 내려서는 장화통에서 끝이 예리한 단도를 꺼냈다.

단도를 왼쪽소매속에 숨기고 살금살금 그 집 뒤편으로 가 창문으로 머리를 디밀어

내부를 살피려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백마가

히이잉...... 하며 길게 울어대었다.

백마가 그의 침입을 알아 첸 듯 하였다.

 

(저런 못된 짐승 같으니라구......!)

 

정동이 노하여 속으로 꾸짖고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한번 살피려 하는데 창 안에서

또다른 얼굴이 동시에 내밀어질 줄이야!

정동의 코가 그의 코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얼굴에 주름이 많고 날카로운 눈빛을 띤 사람이었다.

정동이 몹시 놀라 뒷걸음질 치려하는데 노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뜻밖에도 한어였다.

 

"누구시오? 여기서 뭘 하고 있는게요?"

 

정동이 놀란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하고는 웃음을 띄우며 대답했다.

 

"성은 정이라 하며 이름자는 종이라 하옵는데,

이곳에 와 본의 아니게 노인장을 놀라게 했습니다.

노인장의 함자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소생은 계라 하오."

 

정동은 여전히 웃음을 띤 채 말을 잇는다.

 

"계노인장,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서 동향인을 만나니 실로 육친을 대한듯 합니다.

소생 감히 차 한 잔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몇이 함께 왔소?"

 

"저 혼자 뿐입니다."

 

계노인이 흥! 하는게 믿을수 없다는 눈치다.

노인의 냉랭한 안광이 정동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자 정동은 안절부절 못한 채

단지로 억지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한사람은 차가운 시선으로 흙어보고 있고, 한 사람은 웃고는있으나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이한 장면이었다.

계노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차를 들고 싶다면 창문으로 기웃거리지 말고 대문으로 정정당당 들어오시오!"

 

"네, 네!"

 

정동이 예의 그 웃음을 띠며 문앞으로 돌아 들어 왔다.

정동이 의자에 앉아 사방을 살피는데 차를 받쳐든 한 소녀가 후당에서 들어왔다,

두사람의 눈이 부딪치자 소녀가 몹시 놀라 헉! 하며 차잔을 땅에 떨어뜨렸다.

찻잔은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뒹굴었다.

정동은 기분이 몹시 유쾨해졌다.

이 아이가 바로 곽원룡이 많은 상금을 걸고 찾으려는 소녀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백마를 발견한 후, 그소녀가 이집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은 했으나

돌연 눈앞에 나타나자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어젯밤 늦게 거대한 사풍에 말 위에서 정신을 잃고 인사불성이 된 이문수는

수초의 냄새를 따라 사풍을 무릅쓰고 초원으로 달려온 백마에 실려 있었다.

한인복장을 한 소녀가 말 등에 엎어져 있는 것을 본 계노인은 급히 소녀를 집으로 안고 들어왔다.

이문수가 깨어나더니 부모를 찾으며 통곡했다.

계노인은 아이가 순진하고 사랑 스러워 가여운마음을 금할수 없어,

어떻게 이 사막에 오게 되었으며,

부모는 누구인지를 물어 보았다.

이문수는 아버지는 백마이삼이며 어머니는 이름은 잘모르고 얼핏 그들을 쫓아오던

쁜 사람들이 멀리서 삼낭자라 부르는 것을 들었다고 대답하며,

강에 와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계노인이 낮은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백마이삼,백마이삼, 그는 강남에서 횡행하던 협객인데 어쩌다 회강에까지 오게 되었단 말인가?"

 

그는 이문수에게 죽 한 접시를 배불리 먹이고는 재웠다.

허나 노인의 심중에는 십년이 훨씬지난 여러가지 옛일이 떠올라

엎치락 뒤치락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에야 깨어난 이문수는 일어나자마자 할아버지에게 자기를 데리고 아빠, 엄마를

찾으러 가자고 졸랐다.

바로 그때에 양두사 정동이 창밖에서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엿보려 하다가 계노인에게 들켰던 것이다.

이문수가 들고 있던 찾잔을 떨어뜨리는 것을 본 계노인이 소녀에게 달려가자

그녀는 얼른 그의 품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할아버지,저......저 사람이 바로 우릴 쫓던 나쁜 사람이에요."

 

게노인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다독 거렸다.

 

"떨지 말아라. 아가, 무서워할것 없어요.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란다."

 

"아니에요. 맞아요. 바로 그들이에요.

그들 수십 명이 우릴 쫓아와 엄마, 아빠를 잡아 갔는걸요."

 

이렇게 울먹이는 이문수를 보며 계노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백마이삼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고, 도데체 누구와 어쩌다

원한이 맺혔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개입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정동이 슬쩍 계노인을 가늠질해 보니

머리가 온통 백발에다 허리와 등이 고양이처럼 굽어 매우 노쇄한 듯하나 체구는 당당했다.

 

(저 늙어빠진 영감이 구십은 족히 되었을 터이니 만일 집안에 아무도 없다면

그를 일격에 때려눕힌 다음 저계집아이와 백마를 끌고 가버려야 겠다.)

 

정동은 느닷없이 오른쪽 귀에 대고 뭔가 열심히 귀기울이는 척한다.

 

"누가 왔다."

 

그러더니 소리를 지르며 잽싸게 창문쪽으로 달려갔다.

계노인은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나 정동의 말을 듣고는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고는 말했다.

 

"도데체 누가 왔단 말인가?"

 

홀연 정동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바람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계노인이 비록 늙어 뼈만 앙상하나 몸놀림이 민첩해 정동의 손바닥과 그의 머리 꼭대기의

간격이 몇치에 지나지 않음에도 그의 장풍을 피해 몸을 살짝 날렸다.

그리고는 정동의 오른팔목을 움켜쥐고 꼼짝못하게 했다.

결사적으로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던 정동은 왼소을 소매 속에 넣에 감춰두었던 비수를 꺼냈다.

흰 빛이 번쩍이며 쉬!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수는 계노인의 등에 꽂히고 말았다.

계노인의 몸에 칼이 꽂히는 것을 본 이문수는 할아버지를 크게 부르며 부모에게서

이 년간 배운 무공으로 몸을 위로 솟구쳐 작은 두 주먹으로 정동의 허리를 내려쳤다.

이때 계노인이 왼쪽팔꿈치로 정동의 가슴을 내려치니 그힘이 워낙 강한지라

정동은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땅에 쓰러진 정동은 입에서 피를 뿜어내더니 곧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문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할......할아버지 등에......"

 

계노인은 아이의 두눈에 눈물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는 생각했다.

 

(마음이 착한 아이로구나.)

 

"할아버지, 상처가......제가 칼을 빼드릴까요?"

 

하고 이문수가 말하며 손을 뻗어 칼을 쥐려 하는데,

계노인이 얼굴빛이 어두워 지며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관하지 말아라."

 

그는 탁자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고는 부들부들 떨며 실내쪽으로 향하더니 탁 하며 문을 닫았다.

이문수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화를 내자 놀란데다 땅에 쓰러져있는 정동의 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고는 그가 다시 일어나 자기를 해치려 들것만같아 빨리 밖으로 도망 치고싶었다.

그러나 계노인이 중상을 입은데다 돌봐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것을 생각하니

차마 그냥 내버려 둘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곰곰히 생각하다 방문 앞에 가 몇 번을 두드렸지만 방안에서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많이 편찮으세요?"

"썩 가거라, 썩 가! 시끄럽게 굴지 말고!"

 

계노인의 거친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문수는 겁에 질려 감히 다시 외치지도 못하고 떨며 바닥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슬프게 울기 시작 했다.

그러자 갑자기 삐꺽 하며 문이 열리더니 게노인이

양손으로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 듬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자, 뚝 그쳐야지. 이 할아버지의 상처는 대단하진 않단다. 울지 말아라."

 

이문구가 고개를 들어 노인의 미소를 보고는 기쁜나머지 울다가 웃는다.

그모습을 보고 계노인도 따라 빙그레 웃었다.

 

"울다가 웃다니, 부끄럽지도 않니?"

 

이문수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노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이는 노인의 몸에서 부모의 훈훈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계노인은 미간을 찡그리더니 정동의 시신을 살피며 생각한다.

 

(그는 나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째서 느닷없이 내게 잔인한 짓을 했단 말인가?)

 

"할아버지, 등의 상처는 좀 나아졌어요?"

 

계노인이 이미 긴 두루마리로 갈아입고 있어 상처는 보이지 않지

이문수는 여전히 걱정 스러웠다.

노인은 이문수가 다시 이일을 들추자,

칼에 찔린 것이 치욕적인 것처럼 또 화나는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 역시 거칠었다.

 

"왜 이리 귀찮게 구는 게냐?"

 

이때 백마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길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노인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만 나뭇간에 가서 노란색 염료가든 통을 들고 왔다.

이는 방목하는 사람들이 각집의 소와 양이 뒤섞이지 않도록 가축의 몸에 표시하는데

쓰는것으로 웬만큼 세월이 흐를때까지는 탈색이 되지 않았다,

그는 백마를 끌고와서는 솔로 머리부터 꼬리까지 전부 노란색으로 문지르고는

카자흐인의 천막에가서 카자흐족의 사내아이 옷을 얻어와 이문수에게 갈아 입혔다.

총명한 이문수가 물었다.

 

"할아버지, 나쁜사람들이 저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거지요?"

 

계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할아버지는 늙었구나. 아, 방금도 칼에 찔리고 말았으니......"

 

계노인은 정동의 시체를 묻고 그가 타고온 말또한 죽였다.

실 한 올 남김없이 흔적을 없애 버린후에야 대문앞에 앉아 한자루의 장검을 맷돌에다 가는데

손으로 잡을 수 없을 만큼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곽원룡과 진달해가 거느린 강도들은 아무런 수확도 없이 헛되이 시간만 보내게 되자

이날 저녁 쯤 오아시스를 발견하고는 닥치는 데로 약탈을 했다.

카자흐인이 용감하고 무예가 뛰어나 싸움에 능하다 하나 부족중에 건장한 남자 들은 다

이리때를 사냥하러 막북쪽으로 떠나 천막에 남은 자들은 다노인과 어린이,

부녀자들로 막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일대에는 여태 도적이라곤 없었으므로 이들 중원에서 온 강도들의 공격에

전혀 손 쓸방법이 없었다.

결국 일곱명의 카자흐 남자가 피살되고 다섯명의 부녀가 잡혀가고 말았다.

이 무리들은 계노인의 집에도 침입했으나 이들중 어느누구도 노인과 카자흐 소년에 대해

의심을 갖는자는 없었다.

이문수의 눈에서 번쩍이는 원한의 빛을 눈여겨 보는자는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늘 차고 다니던 검이 과원룡의 허리에 걸려 있는것을 ,

어머니의 금은 소검이 진달해의 허리띠에 꽂혀 있는것을 똑똑하게 보았다.

이것들은 그녀의 부모가 결코 몸에서 떼어 놓지않던 무기이므로 비록 그녀의 나이가 적다하나

부모의 신변에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것을 추측 할수 있었다.

나흘째 되던 날 카자흐족의 남자들이 북방에서 한짐가득 이리 시체를 끌고 돌아오자마자

대오를 지어 한인 강도를 찾아나섰다.

러나 망망한 사막중에 그들의 자취는 찾을길 없고 오직 끌려갔던 다섯명의 부녀자만

찾아냈을 뿐이었다.

허나 이들은 다섯구의 시신으로 전신이 발가 벗겨진 채 참혹하게 사막 한복판에 버려져 있었다.

그들은 또한 백마 이삼과 금은 소검 삼낭자의 시신도 찾아내 함께 갖고 돌아왔다.

이문수가 부모의 시신으로 달려들며 슬프게 통곡하자 한 카자흐인이

그녀의 다리를 세게 차며 거친 소리로 욕했다.

 

"천벌받아 마땅한 한인 강도들!"

 

그러나 계노인은 그 카자흐인과 다투지 않고 잠자코 이문수를 안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이문수의 어린 가슴속에도 여러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나쁜사람이 많은것일까? 어째서 모든 사람이 날 욕하는 걸까?)

 

한밤중에 이문수가 꿈속에서 울다 깨어 눈을 뜨니 침대옆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놀라 소리 지르며 일어나자 노인이 애정이 넘치는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겁내지 말아라. 나다, 할아버지야."

 

이문수는 꿰어 놓은 진주가 풀어진듯 눈물을 흘리며 노인의 품에 엎드려

그의 앞자락 전체를 져셔 버렸다.

 

"아가, 이제 네게 아빠, 엄마가 계시지 않으니 내가 너의 친할아버지가 돼주마.

나와 함께 살자꾸나. 이 할아버지가 너를 잘 돌봐 줄 수 있을 게야"

 

이문수가 울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빠, 엄마를 죽인 나쁜사람과 또 그녀를 걷어찼던

나쁜 카자흐 남자가 생각났다.

아까 발로 채인 것이 하도 심해 허리가 많이 부어 있었다.

 

"할아버지, 왜 모두나를 욕할까요? 나는 아무런 나쁜일도 하지 않았는데?"

 

계노인은 한숨 지으며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자는 언제나 나쁜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지."

 

그는 항아리 에서 양젖을 떠다 주고는 이불을 잘덮어 주며 계속 말을 잇는다.

 

"수아, 아까 너를 찬 사람은 바로 소로극(蘇魯克)이란 사람인데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란다."

 

이문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참으로 의아해 하더니 물었다.

 

"그......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니요?"

 

계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란다.

그도 너와 똑같이 하룻밤사이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사람을 잃었단다.

하나는 그의 부인이요,

또하나는 큰아들이지.

모두 저 극악무도한 강도들에게 죽음을 당했지.

그래서 그는 한인은 모두 악인이라고 여기고 카자흐 말로 너를 욕했던 거란다.

천벌을 받을 한인강도라고, 그를 원망하지 말아라.

그의 가슴속의 비통함은 너와 똑같단다.

아니지. 그사나이는 나이가 들었으니

가슴속의 비통함은 너보다 더욱 많고 더욱 깊을 게야."

 

그녀는 본래 덥수룩한 수염을 한 그 카자흐인을 원망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험상궂은 모습이 무서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 아저씨의 두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으면서도 가까스로 참고 있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녀는 왜 어른의 슬픔이 아이의 슬픔보다 더깊고 큰것인지,

계노인이 말한것을 이해할순 없었으나 그수염이 많이난 아저씨가 불쌍해 견딜수가 없었다.

이때 창밖에서 기묘하고 아름다운 새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나는 소리이나 매우 분명하고 또렸이 들리는 것이

소녀의 노래처럼 감미로우면서도 처량하고 맑고도 부드러웠다.

울음 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마침내는 희미해지며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픈 가슴에 위안을 얻었는지 넋을 잃고 황홀해 했다.

 

"할아버지, 저 새의 노래 정말 듣기 좋죠?"

 

"그래, 정말 좋구나. 바로 천영죠(天鈴鳥)인데, 하늘나라의 은방울 소리 같구나.

저새는 밤에만 노래 부를뿐 낮에는 잠만 잔단다.

어떤이는 저새가 하늘의 별이 떨어져 변한것이라하고 또 어느 카자흐 인은 말하기를,

초원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노래를잘 부르는 소녀가 죽은 후에 변한 거라고 한단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를 사랑해 주지 않자 상심한 나머지 죽은 것이라고."

 

"제일 예쁘고 노래 또한 가장 잘 부르는데 왜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이문수는 갸우뚱거린다.

계노인 또한 넋나간 표정으로 길게 탄식했다.

 

"세상에는 너같은 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단다."

 

다시 멀리 초원에서 천영조의 노래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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