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소녀>
이문수는 노인의 집에서 양을 치고 밥을 짖는 것을 도우며
마치 친할아버지와 찬손녀 처럼 오손도손 살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도 지나 이문수는 카자흐 말과 초원에서의
여러가지 일을 배우며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계노인은 향기로우면서도 독한 술을 담글 줄 알았는데
카자흐 족의 남자들은 그 독한 미주를 가장 즐겨 마셨다.
계노인은 또 소와 양, 말의 질병을 고칠줄 알았는데 카자흐인이 고치지 못한
가축도 왕왕 그가 낫게 해주었다.
소와 양, 말은 카자흐인에게 있어서는 생명처럼 귀중한 것이어서,
한인을 싫어하는 그들이지만 그가 담근 미주와 가축을 바꾸기도 하고,
그를 청해 가축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도 했다.
어느날 밤, 이문수가 또 천영조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
점차 그 노래소리는 희미해지며 바람소리 속에 파묻혀 전혀 들리지 않게되었다.
이문수는 노인이 깰까봐 조용히 옷을 입고는 살금 살금 집 밖으로 나가
백마를 멀리 끌어내어 말에 올라타 노래소리를 쫓아갔다.
초원의 밤하늘은 아득히 높은 쪽빛을 띠고 있었다.
별들은 반짝이고 풀과 꽃들은 제각기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천영조의 노래소리는 매우 맑고도 부드러우면서 우아 하였다.
이문수의 마음 또한 즐거운 나머지 말에서 내려,
백마는 제마음대로 풀을 뜯게 하고는 풀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에 푹 젓어 있었다.
날개를 퍼득이는 소리가 들려 이문수는 넙죽 엎드려 그곳을 보니
담황색의 아주 작은 새 한마리가 바닥에서 뭔가 열심히 쪼아 먹고 있다.
새는 몇번 바닥을 쪼더니 먹을걸 찾아 다시 날개를 퍼득이며 앞으로 날아간다.
천영조가 신나게 쪼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빛을 띤 물체가 천영조를 덮쳐버린다.
풀밭사이에서 한 카자흐 소년이 의기양양해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야, 잡았다. 잡았어!"
그는 겉옷속에 천영조를 감싸고 있었다.
놀라서 우짖는 새소리가 겉옷 밖으로 구슬프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문수는 한편 놀랍고 한편 분한 마음에 어쩔줄 몰라 했다.
"너 도데체 뭐하고 있는 거니?"
"천영조 잡았다. 왜? 너도 잡으려고?"
"잡는다고? 그새가 마음껏 즐겁게 노래하도록 두는게 좋잖아?"
여전히 소냔은 기분이 좋아 웃고 있다.
"잡아서 놀 거야."
오른손을 빼 손을 내미는데 그속에 담황색의 새를 움켜쥐고 있었다.
"놓아줘, 가엾지도 않니?"
"내가 보리를 뿌려놓고 이새를 이리로 유인 했던 거야.
누가 이 새더러 내 보리를 먹으라고 했나? 하하하?"
'함정'이라는것이 무엇인지 세상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이문수는 몸이 떨려왔다.
사람들은 새가 보리를 먹을줄 미리 알고 보리를 뿌려놓고 죽음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는것으로 죽는다.'
라는 수천년 내려온 속담을 알진 못하지만 이문수는 책략의 무서움과 유혹을
이겨내기 힘들다는 것을 어렴픗이 감지 할수 있었다.
소년이 천영조를 가지고 장난하자 새는 아픔을 못이겨 울었다.
이문수는 도져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새 내게 줄래?"
"그럼, 넌 내게 뭘줄건데?"
이문수는 품안에 손을 넣어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자 난처해 하며 이리저리 궁리했다.
"나중에 몸에 달고 다닐 수 있는 아주 예쁜 염낭 주머니를 만들어 줄께."
"지금이 아니면 안돼. 나중에 네가 약속을 안지키면 어떻게 해."
이문수는 흥분하여 얼굴이 붉어진다.
"네게 준다고 했으면 틀림없이 줄거야. 난 꼭 약속을 지켜."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어"
문득 달빛에 이문수의 왼쪽 팔목에 옥팔찌가 투명한 빛을 내며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걸 줘."
올팔찌는 지금남아있는 유일한 엄마의 유품인지라 차마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가엾은 천영조를 보니 견딜 수 없어 마침내 옥팔찌를 떼어 주고 말았다.
"자, 가져!"
소년은 설마 옥팔찌를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다가 옥팔찌를받아 저윽이 놀라며
소녀에게 다짐 시킨다.
"너 이다음에 달라고 그럼 안돼!"
"절대 안그럴 거야!"
그제서야 소년은 천영조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이문수가 두손으로 새를 잡으니 손안에 새의 연약하고도 부드러운 몸뚱이와 빠르고도
약하게 뛰는 심장의 고동을 느낄수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새의 목덜미를 가볍게 어루만지더니 양손을 활짝 폈다.
"훨훨 날아라! 다음에는 조심해서 부디 다시는 사람에게 잡히지 말아라!"
천영조는 날개를 활짝펴고는 마음껏 날개짓하며 풀숲으로 날아가 버렸다.
소년이 이문수의 하는양을 보고는 이상해 하며 물었다.
"어째서 새를 놔줬지? 옥팔찌로 바꿨으면서?"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소녀가 다시 돌려 달랄까봐 두려워 팔찌를 꼭 움켜쥔다.
"천영조가 다시 자유롭게 날며 노래부를 수 있으면 되잖아?"
소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묻는다.
"넌 누구니?"
"난 이문수야. 넌?"
"난 소보(蘇普)라고 해."
소보는 이문수보다 두살 가량 나이가 들어 보였고 키가 훨씬 컸으며 늠름한 체구의 소년이었다.
"넌 힘이 쎄구나, 그렇지?"
이문수의 말에 소보는 몹시 기분이 좋아 어깨를 으시댔다.
그는 허리에서 단검을 끄내 보였다.
"지난 달에 내가 이칼로 이리 한마리를 베어 거의 죽일 뻔했는데 아깝게도 도망쳐 버렸어."
"너, 대단하구나!"
이문수가 몹시 놀라워 했더니 소보는 더욱 의기양양해진다.
"두 마리의 이리가 한밤중에 우리집 양을 훔치러 왔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내가 칼을 뽑나들고 쫓아 갔지.
큰놈이 횟불을 보고는 도망치자 내가 단칼에 다른놈을 베어 버렸지."
"그럼 네가 벤것은 작은 놈이었겠구나?"
하는 이문수의 물음에 소보는 약간 기가 꺾여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하지만 그 큰놈이 도망가지만 않았다면 내손에 죽었을 꺼야."
그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문수는 전혀 의심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
"연약한 양을 죽이는 못된 이리는 죽어 마땅해.
이다음에 이리를 죽이거든 내게도 좀 보여 줄래?"
"좋아! 내가 이리를 죽이거든 가죽을 벗겨 네게 줄께."
"고마워. 그럼 할아버지께 이리가죽으로 된 깔개를 만들어 드려야지.
할아버지 걸 내게 주셨으니까."
"안돼! 내가 네게 준것은 너만 써야 돼. 넌 할아버지것을 도로 돌려주면 되잖아."
"그래도 좋지, 뭐."
하며 이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이 지난뒤 이문수는 조그만 염낭을 만들어 맥당을 가득 채워서는 소보에게 주었다.
이 선물은 소년으로서는 매우 뜻밖의 것이 었는데 새를 옥팔찌와 바꾼것으로
이미 실속을 차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카자흐인은 천성이 정직하여 그는 받은 이상 응당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룻밤을 꼬박세워 초원에서 두마리 천영조를 잡아 다음날 이문수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나 소년의 이런 선심을 쓴 행동은 엉뚱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이문수는 입이 아프도록 자기가 기뻐하는 바는 천영조가 자유롭게 지내는 것이지
그것을 잡아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누누이 설명 하였다.
그제서야 소년은 이문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마음 한편에서는
소녀의 착한 마음이 조금은 어리 석고 가소롭다고 느껴졌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문수는 부모님의 꿈을 점점 덜꾸게 되고
그녀의 베갯머리의 눈물 자국도 점차 희미해져갔다.
그리하여 그녀의 얼굴은 웃음을 띄고 있을때가 많아지고
입에서는 노래소리가 흘러나오곤 했다.
그녀가 소보와 함께 양을 치고 있을때면 초원에서는 연가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는데
이문수는 이런 끈끈한 정취가 담긴 노래를 자주 귀기울여 들으니
나중엔 저절로 흥얼 거리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노래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한 남자가 한 아가씨로 인해 이처럼 흔들릴까?
왜 아가씨는 남자의 마음에 들려 하는 걸까?
왜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까?
왜 아리따운 몸매는 남자로 하여근 온밤을 잠 못들게 하는 걸까?
단지 그녀는 열심히 귀기울였다가 따라 부를 따름이었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저소녀의 노래소리는 정말 곱구나! 초원의 천영조와 어찌 저리같을까!"
추운 겨울이 되어 천영조가 남쪽의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 버리자
초원에는 이문수의 노래 소리만이 들리게 되었다.
아, 사랑하는 양치기 소년이여,
묻건대 몇 살이신지요?
당신이 한밤중에 사막을 홀로 걸을 때
나와 벗함이 어떠하신지요.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 누군들 너와 벗하고 싶은 마음이 안들까?)
노랫소리는 계속 들린다.
아, 사랑하는 그대여 화내지 마세요.
누가 좋고 나쁨은 단번에 알기 어려우니
고비 사막이 와원으로 변해서야
좋은 사람과 함께 있을수 있는것을.
이 노래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아무리 냉혹하고 메마른 가슴이라도 한 송이 꽃이 피듯
환해지고 따뜻해 졌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다면 고비 사막도 자연 화원이 될터이니 누군들 네게 화를 내리오?)
늙은이는 젊음을 되찾고 젊은이의 가슴에는 기쁨이 넘쳤다.
그러나 이러한 연가를 부르는 당사자 이문수는 오히려 노래속에 담긴 뜻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노래를 가장 많이 듣는 사람은 소보 였는데 그역시 이런 초원에 떠도는 연가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두사람은 눈쌓인 언덕에서 무서운 이리와 맞부딪히고 말았다.
이러한 이리의 출연은 매우 급작스러운 것이었는데 그때 소보와 이문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낮은 언덕에 앉아 초원에 흩어져 풀을 뜯고 있는 양떼를 지켜보고 있었다.
늘 그랬던것처럼 이문수는 그에게 고사(古事)를 얘기 해주고 있었는데 이러한 고사는 대부분
예전에 엄마에게 들었던 곳이거나 어떤 것은 계노인 에게서 들은 것이고,
또 그녀 자신이 직접 꾸며낸 이야기도 있었다.
소보가 가장 가장 듣기 좋아 하는것은 계노인의 아슬아슬한 모험 이야기 였다.
이문수가 지어낸 유치한 여성고사를 가장 지루해 했는데 이제는 아슬아슬한 고사도 반복해
여러번 듣다 보니 긴장감이 없어 그는 인내심을 갖고 듣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어느날 별안간 이문수가 아! 하며 뒤로 벌렁 넘어지는데
회색 털의 큰이리 한놈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녀의 목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리가 뒤에서 전혀 소리없이 달려들었으므로 두 아이는 아무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문수는 예전에 엄마에게서 무공을
배웠던 덕택으로 무의식중에 허리를 비껴 흉악한 이리가 그녀의 목을 깨물려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소보는 이리의 덩치가 엄청난데 놀란 나머지 다리에 힘이빠지며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즉시,
(그녀를 구해야만 한다.)
라고 생각하며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이리의 등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허나 이리의 뼈가 워낙 딱딱해 단도는 잔등을 미끄러져 껍질만이 약간 벗겨졌을 뿐이다.
이리는 위험을 느끼고 이문수를 놓아주고 입을 짝 벌리며 몸을 솟구쳐 양다리로
소보의 어깨 위에 올라타 그의 얼굴을 물어 뜯으려 했다.
소보가 몹시놀라 뒤로 넘어지니 이리는 잽싸게 양 다리로 소보를 꼼짝 못하게 누르고는
흉악한 이빨을 번쩍이며 소보의 빰에 들이댔다.
이문수는 너무나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어 이리의 꼬리를 있는 힘껏 마구 뒤로 잡아당겼다.
회색 털의 이리는 그녀가 잡아당기자
뒤로 한걸음 끌려갔으나 위낙 배가 고팠으므로 두 발을 땅에 딱 버티고는 이문수가
아무리 잡아끌어도 꼼짝도 하지 안고 소보를 꽉 물었다.
소보가 크게 외치는데 이 흉악한 이리는 이미 그의 왼쪽 어깨를 물고 있었다.
이문수는 놀라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젖먹던 힘까지 내어 잡아 끌었다.
이리가 아픔을 참지 못해 비명을 자르며 소보의 어깨를 물던 이빨을 빼냈다.
소보가 얼결에 칼을 뽑아 이리의 복부 가장 약한 곳을 찌르자
이리는 미친듯이 펄쩍 뛰어오르면서 눈위를 대굴대굴 그르더니 머리를 쳐들고 죽고 말았다.
소보는 결사적으로 싸우다 몸을 일으켜보니 거대한 이리가 눈 위에 죽어 있었다.
소보는 너무나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비로써 기뻐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이 커다란 이리를 죽였다. 내가 없앴어!"
손을 내밀어 이문수를 부축하는 소보의 얼굴은 놀람과 자부심으로 반짝거렸다.
의기양양하게 들뜬 목소리로 소보는 그녀에게 말했다.
"수야, 봐, 봐, 내가 이놈을 죽였어!"
너무 기쁜나머지 어깨에 선혈이 낭자했지만 전혀 통증을 느끼질 못했다.
이문수가 그의 양가죽옷의 옷고름에 피가 잔득 묻어 있는것을 보고는 급히 옷을 벗기고
그녀의 손수건으로 그의 상처를 압박해 피를 멈추게 하려 했으나 피는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아파요?"
만약 소보가 혼자였다면 진작부터 아픔을 못이겨 대성 통곡했겠지만
지금 그는 영웅심에 불타 열심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괜찮아!"
문득 그들 뒤편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보, 너 뭘하고 있는게냐?"
둘이 뒤를 돌아보니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말을 탄채로 보고 있었다.
"아빠, 보세요. 제가 이 큰이리를 잡았어요."
소보의 말을 들은 사내는 몹시 기쁜 표정으로 말에서 내렸다.
문득 아이의 얼굴이 피로 물들어 있는것을 보고는
다시 이문수의 얼굴을 훑어보며 물었다.
"이리에게 물렸느냐?"
"제가 여기서 수아가 들려주는 고사를 듣고 있는데
별안간 이놈이 수아를 물려고 덤벼......"
돌연 사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돌려 차가운 시선으로 이문수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너는 바로 천벌을 받아 마땅한 한인 계집아이가 아니냐?"
이문수는 그녀가 바로 그녀를 걷어찼던 소로극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계노인이 들려줬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아내와 큰아들이 하룻밤 사이에 한인 강도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한인을 증오하는 거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에 젖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 아빠와 엄마도 그 강도가 해친걸요.)
이문수가 채 말을 내뱉기도 전에 돌연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소보의 얼굴에
한줄기 붉은 흔적이 보였다.
그의 아버지가 채찍을 휘두른 것이다.
소로극은 몹시 화를 내며 외친다.
"내가 자자손손 한인을 증오해야 한다고 그토록 일렀건만 도리어
한인계집과 어울려 놀며 그 계집을 위해 목숨을 걸다니!"
쉭! 하며 거듭 아들을 내리쳤다.
소보는 아버지의 채찍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채 멍하니
그의 곁에서 있는 이문수를 바라봤다.
"저 아이가 천벌을 받아 마땅할 한인이란 말인가요?"
"그럼 아니란 말이냐? 대답을 해라!"
으르렁 대며 소로극은 채찍을 돌려 이문수의 얼굴을 후려 갈겼다.
이문수는 놀라 뒤로 물러나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소보는 이리에게 물린 부상이 워낙 중한 데다 채찍마저 맞으니
더 지탱하지 못하고 휘청 하더니 땅에 거꾸러지고 말았다.
소로극은 아들이 쓰러지는것을 보고는 놀라
급히 말에서 내려 아들을 안아 말등에 걸쳐놓고 새끼줄을 동그랗게 만들어
이리의 목에 매달고는 말을 박차더니 달려간다.
소로극은 십여장을 단숨에 달리고 나서 고개를 돌려 악독한 표정으로
이문수를 바라보는데, 그눈빛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 했다.
"다음에 내 손에 잡히는 날엔 가만 두지 않을테다."
이문수는 그의 무서운 눈빛은 두렵지가 않았으나 소보가 이제부터는
그녀와 찬구도 하지 않을 뿐더러 다시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러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했다.
삭풍이 더욱 차가와 견디기 힘든데다 채찍에 맞은 얼굴의 상처도 더욱 고통이 심해져 갔다.
그녀가 망연히 망때를 몰아 집에 돌아오니 계노인은 아이의 옷에
낭자한 선혈과 얼굴에 부어오른 채찍 자국을 보고는 크게 놀라
어쩐 일이냐고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문수는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조심하지 않아 넘어 졌어요."
물론 계노인은 이말을 믿지 않았다.
재차 다그치자 이문수는 똑같은 대답만 할뿐이었다.
틈을 주지않고 계속 물어대자 마침내 왕! 하며 울기 시작하더니 한마디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날 밤, 이문수는 열이 몹시나며 빰은 타오르는듯이 붉어지더니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회색 이리!"
"소보,소보, 빨리 날 살려줘!"
"천벌을 받을 한인."
계노인은 이러한 말을 듣고 대충 짐작은 갔으나 마음은 몹시 초조하였다,
다행이도 날이 밝아올 무렵 열이 가라 앉고 푹 잠이들었다.
이렇듯 일개월 동안 앓다가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날 즈음에는 추위는 이미 끝나 있었다.
철산을 덮고 있던 눈이 녹아 그물이 작은 시내를 이뤄 초원으로 흘러 내렸고
들판에는 새싹이 하나씩 돋아나고 있었다.
이날, 이문수는 일어나자마자 대문을 열어 젖히고 양떼를 몰아 방목하려고 하는데,
문득 문밖에 깔개를 만들 수 잇는 가죽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이리 가죽의 덜빛을 보니 그 날 그녀를 물려했던 회색빛 이리임에 분명했다.
몸을 숙여 이리가죽의 복부에 칼자국이 나있는것을 확인한 이문수의 가슴은 두근 거렸다.
소보가 결국 자기를 잊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분명 그는 한밤중에 몰래 찾아와 그녀의 문앞에 이리 가죽을 놓고 갔을 것이다.
그녀는 계노인에게도 말하지않고 이리가죽을 자기방에 갖다 놓고는 양을 몰아
늘 소보와 만나던 곳으로 가 그를 기다렸다.
허나 해가 서산에 기울때까지 기다려 봐도 소보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은 왠 청년이 소보네 양을 방목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생각 했다.
(소보는 상처가 아직 다낫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땋게 그는 내게 이리 가죽을 보냈을까?)
소보네 천막에 찾아가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소로극의 채찍이 생각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한밤중에 마침내 그녀는 용기를 내어 소보의 천막 뒤편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왜 자기가 이곳엘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리 가죽 고마웠어' 라는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그의 상처가 다 나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녀 자신도 자기의 마음을 설명할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도 몰래 천막 뒤에 살짝 숨었다.
소보네의 양지키는 개는 소보와 친한 그녀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 몸을 몇번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더니만 전혀 짖지 않은채 가번린다.
천막에서는 아직도 불빛이 새어 나오는데 소로극의 거친 목소리가 매우크게 울리고 있었다.
"네 이리 가죽을 어느 아가씨에게 주었니? 이놈아,
어리다 해도 맨 처음 잡은 짐승의 가죽은 네가 가장 아끼는 아가씨에게 준다는 건 알겠지?"
그가 한마디 한마디 소리를 지를 때마다 이문수의 가슴은 더욱 세차게 뛰었다.
그녀는 소보가 카자흐인의 풍습에 대한 고사를 얘기해줄때 어느 청년이든
자기가 첫번째로 잡은 짐승은 가장 그가 귀히 여기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애정의 표시로 주게 되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때 소로극이 큰소리로 묻는 것을 들으니
작은 빰이 점점 붉게 물들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낄수 있었다.
그들 두사람이 비록 나이가 아직 어려 진정한 애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
어느새 첫사랑의 감미로움과 괴로움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 뭐라고 하는 천한것, 천벌을 받아 마땅한 한인 계집에게 줬음이 분명하렸다.
어떠냐? 말하지 않겠다면 이 애비의 맛을 좀 봐야 겠구나."
쉭! 쉭! 하며 채찍이 몸뚱아리를 후려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카자흐인은 소로극을 포함해서 본래부터 채찍으로야 강인한 남자로 키울수 있고,
아들을 가르키는데 온건한 방법은 전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그의 조부가 채찍을 썼듯이 그의 부친 역시 그 자신을 채찍으로 다스렸고,
그자신 또한 이처럼 채찍을 들어 아들을 때리니 부자간의 애정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약해지는 모양인가 보다.
사나이와 사나이가 대할때 벗과 육친의 관계라면 주먹이나 채찍을 쓰고,
적이라면 단도나 장검을 쓰는것이다.
그러나 이문수로서는 그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심한 말조차
한마디 한적이 없었으며 단지 얼굴에 웃음이 적어지고 애무만 적어져도
그녀로서는 매우 가슴 아픈 징벌이었다.
채찍 소리가 날때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맞는 것처럼 고통 스러웠다.
(소보의 아버지는 나를 몹시 미워하기에 자기가 낳은 아들을 이렇게 지독하게 때릴수 있는거야.
이러다간 죽을지도 몰라.)
"그래! 대답을 않는구나! 끝내 대답않겠단 말이지? 분명 그 한인 계집에게 주었겠지."
채찍은 쉬지않고 그를 내려치고 있는데 소보는 처음엔 이를 악물고 참더니만 마침내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빠, 제발 때리지 마세요. 제발, 아파요! 아파요!"
"그렇다면 말을 해라. 이리 가죽을 그 계집에게 주었냐?
네 엄마와 형이 한인 강도에게 죽음을 당한걸 모른단 말이냐?
사람들은 카자흐 제일의 용사라 일컫거는 아내와 큰아들이 한인 강도에 의해 죽음을 당하다니,
도데체 너는 이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
왜 하필 그날 내가 집을 비웠을까?
왜 결국 강도 떼를 잡지 못해 네 엄마와 형의 철천지 한을 끝내 풀지 못했을까?"
이때 소로극의 채찍은 이미 아들을 훈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의 미칠듯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적을 향해 내려치듯 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놈의 강도는 나와 더불어 떳떳하게 겨루지 않지?
말해 봐! 이 카자흐 제일의 용사인 소로극이 겨우 한인 좀도둑 몇놈을 처치할수 없단 말인가......"
곽원룡과 진달해 일당에게 무참히 죽은 아들은
그가 가장 아끼던 장남이며, 치욕스럽게 죽음을 당한 아내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사랑하는 반려자였던 것이다.
이문수는 소보가 매맞는 것도 안됐지만 소로극의 이런 울음 섞인 고함소리를 들으니
그도 애처롭게 느껴졌다.
(이처럼 지독히 때리는걸보니 영원히 소보를 미워하겠구나.
그는 이제 아들을 잃은 셈이고, 소보는 또한 아버지를 잃은 셈이니,
이 모든일은 바로 천벌을 받아 마땅한 나 한인 계집으로 인한 것이다.)
문득 그녀는 자신도 불쌍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차마 소보가 이렇듯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불 밑에 감춰뒀던 이리가죽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집은 소보의 천막과 2리가량 떨어져 있었으나 그녀에게는 소보의 울음 소리와 소로극의
채찍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무리 이 이리 가죽이 귀중하다하나 자신은 그것을 받아서는안된다고 느꼈다.
(내가 이 이리 가죽을 받는다면 소보는 그의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 게 분명해.
오직 카자흐족의 여자만이 이것을 받을 수 있는거야.
카자흐족의 소녀중 누가 가장 예쁘지?
내 비록 이리가죽을 좋아 하지만, 더우기 이것은 소보가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고
나를 구하기 위해 때려잡은 이리이고 소보가 내게 준 것이지만 안돼!
그의 아버지가 그를 때려 죽일지도 몰라......)
다음날 아침 소로극이 핏발 선 눈으로 천막을 나서는데
차이고(車爾庫)가 산가(山歌)를 크게 흥얼대며 오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소로극을 쳐다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를 담고 있고 눈에는 친근감을 띠고 있었다.
차이고 또한 카자흐족의 출중한 용사이며 천리 밖의 사람들도
그의 야생마 길들이는 솜씨에 탄복하고 있었다.
달리기 역시 당해낼 자가 없어 1리 내에서는 제아무리 준마라 해도 그를 따를수 없었다.
소로극과 차이고는 지금까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소로극의 명성이 높은 것과 그의 칼쓰는 솜씨며 모든것이 천하무적이므로 차이고는
몰래 속으로 질시해 왔던 것이다.
그는 소로극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한번은 두사람이 칼로 겨뤘는데 차이고가 져서 어깨에 깊은 상처가 남았었다.
"오늘은 내가 졌지만 오년후 십년후에 두고보자!"
"이십년후에 다시 한번 붙는다면 그때엔 결코 무사하지 않으리!"
이런 말을 두 사람은 주고 받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 차이고의 웃음에는 전혀 적의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소로극의 가슴속에 노여움이 아직 남아있었으므로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차이고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소형, 아들 하나는 잘뒀소. 사람 보는 눈이 있던데!"
"소보 말인가?"
그는 손을 뻗어 칼자루에 갖다댔는데 눈이 살기 등등하다.
(내 아들이 이리 가죽을 한인에게 준걸갖고 비웃고 있구나.)
차이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소보가 아니면, 또 다른 아들이 있던가?"
여전히 미소를 띤채 말을 이었다.
"물론 소보지. 그아이의 용모, 재능 모두 출중해. 그 애는 참 좋다네."
아버지 된 입장에서 주위사이 아들 칭찬하는걸 들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았으나,
늘 그와 입씨름 하던 버릇이 있어 곱지 않게 말이 나갔다.
"아들 하나 못 낳는 주제에!"
차이고는 여전히 화내는 기색이 없다.
"내딸 아만(阿曼)도 훌륭하다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당신 아들이 내 딸에게 반할 수 있단 말인가?"
소로극은 체! 하며 말했다.
"말 같지 않은소리, 도데체 누가 내아들이 자네딸을 좋아 한다고 해?"
차이고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좋아, 나와 함께 가세. 내가 보여 줄게 하니 있으니."
소로극은 갈피를 잡지 못한채 차이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갔다.
"소보가 전에 커다란 이리를 잡았다던데, 어린 아이가 대단해.
장래 아버지처럼 되겠는 걸. 아버지가 영웅이니까."
소로극은 아무 소리 없이 속으로 그가 필시 무슨 함정을 꾸며 놓고
그를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조심 해야지.)
삼리 가량 떨어진 곳에 차이고의 천막이 있었다.
소로극은 멀리서 커다란 이리 가죽이 천막 밖에 걸려있는 것이 보여
급히 몇걸음 다가가 보니 아뿔사,
소보가 때려잡은 그 회색이리가 아닌가.
이는 아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잡은 야수임에 분명했다.
그는 마음속이 혼란 해져 기쁘기도 하고 알 수 없기도 했다.
(어떻게 된 노릇인가.
어젯밤 그토록 때렸는데 이리가죽을 아만에게 줬지,
한인 계집에게 주지 않았다고 왜 말하지 않았을까.
낯 간지러워 차마 말못했나 보군.
죽일놈, 만일 제 어미가 살아 있다면 내게 충고했을 텐데.
아들도 엄마에겐 말을했을지도 몰라......)
차이고가 억센 손으로 그의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술이나 한잔 함세."
차이고의 천막은 매우 정결했고 사방에는 울긋불긋한 양모 담요가 걸려 있었다.
날씬한 몸매의 한소녀가 술과 음료를 받쳐들고 나왔다.
차이고가 빙그래 웃는다.
"아만, 소보의 부친이시다. 무섭지 않느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이분은 몹시 거친분인데!"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만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는데 그 또한 아름다웠다.
눈을 반짝이며 웃는 모습이 마치 전혀 무섭지 않다고 말 하는 듯했다.
소로극이 갑자기 하하하! 하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차형, 일찌기 사람들이 댁의 따님이 초원에 핀 한떨기 꽃 같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실감할수 있겠는걸. 정말 아름답군!"
십여년을 으르렁대던 두사내가 갑자기 친밀해져 권커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소로극은 마침내 몹시 취해정신없이 말등에 업혀 집에 돌아왔다.
며칠이 흐른뒤, 차이고가 두 장의 정교한 양모 담요를 소로극에게 가져왔다.
"아만이 짠 것인데, 한장은 아버지 것이요. 한장은 아이것 이랍니다."
한장의 담요에는 한 장부가 긴칼로 표범을 베고 있었고 멀리 표범 한마리는 꼬리를 감추며
도망가는 모습이었고, 다른 한장의 담요에는 소년이 커다란 이리를 찔러 죽이는 광경이었다.
그 두사람이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되 모두 위풍당당하며 늠름 하였다.
소로극이 이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칭찬을 멈추지 않는다.
"정말 훌륭한 솜씨야. 훌륭해!"
원래 회강에는 표범이 거의 없었는데 어느 해인가 두마리가 나타나 사람과 가축을 해치려 들었다. 소로극이 용맹스럽게도 설산(雪山)으로 들어가 큰놈을 베어 죽였고,
다른 한놈은 부상을 입은 채 멀리 숨어 버렸다.
지금 아만이 짠담요에 그가 평생을 두고 가장 자랑하는 영웅적 행적이 그려져 있으니
기분이 좋을수밖에.
이번에 대취하여 말등에 엎혀 집에 돌아간 이는 차이고 였다.
소로극은 아들에게 그를 모시고 가게 했는데 차이고의 천막 안에 자기의 이리 가죽이 있는것을
본 소보는 몹시 놀랐다.
아만이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 고마와하는 것을 보고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소보는 낮은 소리로 저 혼자 몇마디 중얼거리면서도
왜 자기의 가죽을 아만이 갖게 됐는데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다음날 그는 일어나자마자 이문수를 만나 어찌된 경위인가를 물으려고
이리를 죽였던 그언덕으로 달려갔지만 이문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틀을 기다려 봤지만 헛수고 였다.
사흘째 되던날,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계노인 집에 갔다.
이문수가 문을 열어 주다 그를 보더니만 탁! 문을 닫아 버렸다.
"이젠 널 보고 싶지 않아."
소보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여 집으로 돌아 왔지만 마음은 몹시 서운하였다.
(아, 한인 아가씨의 마음엔 뭐가 들었는지 도대체 모르겠구나!)
그는 물론 알리가 없는 것이다.
이문수가 문뒤에 숨어 얼굴을 가리고 얼마나 오래도록 흐느꼈는지를.
그녀는 얼마나 다시 소보와 함께 놀며, 고사를 들려주고 싶었는지 몰랐다.
허나 그의 아버지에게 발각되는 날엔 그 무서운 채찍으로 그가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루하루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 아이는 몰라볼만큼 부쩍 자랐다.
초원의 한 떨기 꽃은 더욱 예뻐졌으며 이리를 죽였던 소년은 영준한 청년으로 변모했다.
그 초원의 천영조도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했으나 그녀는
이따금밖에 노래부르지 않게 되었으며 그것도 한밤중에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때에
소보가 이리를 처치하던 언덕 위에서 혼자 부를 따름이었다.
그녀는 단 하루도 어릴적 동무를 잊어 본적이 없었다.
늘 그가 아만과 나란히 말을 타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그들 두사람이
서로 정감 어린 노래를 부르는걸 듣고 있었다.
이러한 노래의 숨겨진 뜻을 어릴 적엔 전혀 이해할수 없었으나 지금 이문수는
이미 모든것을 알아들을수 있었다.
만일 그녀가 여전히 모르고 있다면 어찌 상심에 휩싸여 괴로워하겠으며,
많은 불면의 밤들로 뒤척일수 있겠는가?
알수 없었던 일들을 이젠 분명히 알게 되었지만 어릴적의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 그시절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봄이 한창인 어느날밤,
이문수는 백마를 타고 홀로 그 옛의 언덕으로 갔다.
그녀는 언덕 위에 우뚝 서서 멀리 카차흐인 천막가운데 피워놓은 커다란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노래와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크게,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원래 이 날은 카자흐인의 명절로서 청년 남녀가 모닥불가에 모여서 춤도추고 노래도 부르며
즐기는 날이었다.
(그와 그녀는 오늘 틀림없이 몹시 즐거울꺼야. 이처럼 떠들썩하고 이렇듯 좋아 하는데.)
그러나 이러한 이문수의 추측은 빗나가 있었다.
이때 소보와 아만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다.
도리어 무척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모닥불 옆에서 소보는 조금은 여워었지만 후리후리한 키의 청년과 씨름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이는 축제중 가장 중요한 행사로서 씨름의 우승자 에게는 세가지 상품이 주어지게 된다.
준마 한필, 살찐 소한마리, 곱게짠 담요 한장. 소보는 이미 네명을 차례로 누르고 있었는데
이 호리호리한 청년은 상사아(桑斯兒)라고 했다.
그는 소보의 친한 벗이지만 씨름에서는 승패를 갈라야 했다.
그 또한 마음속으로 줄곧 아만을 사랑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 나긋나긋한 몸매, 훌륭히 수놓는 솜씨, 누군들 사랑하지 않으랴?
상사아는 소보와 아만이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왔다는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 또한 굳세고 도도한 청년이었다.
그는 줄곧 속으로 생각해 왔다.
(만일 내가 공개시합에서 소보를 누른다면 아만이 나를 좋아 하게 될꺼야.)
그래서 삼년 동안 열심히 씨름과 칼쓰는 법을 익혔던 것이다.
그의 사부는 바로 아만의 부친 차이고였다.
소보의 무공은 그의 아버지가 지도해준것이다.
두청년이 한데 엉켜 싸웠다.
돌연 상사아가 어깨에 한대 얻어맞고는 비틀비틀거리며 넘어지려다 오른발을 걸자
소보도 함께 넘어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몸을 좌우로 빙빙 돌며
상대방의 빈틈을 찾는데 누구도 먼저 공격하질 못했다.
소로극은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손에 땀을 쥐고 소리만 질러댔다.
차이고의 심정은 한층 복잡 미묘햇다.
그는 상사아가 이긴다 해도 딸은 여전히 소보를 좋아 할뿐더러
이후 훨씬 그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허나 상사아는 그의 제자로 이 씨름은 그 자신과 카자흐 제일의 용사인 소로극의
시합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는 멀리 수천리 까지 알려질것이다.
물론 암나은 오랬동안 슬픔에 잠기겟지.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만은 생각말자.
그는 여전히 자기의 제자가 이겨주길 바라고 있었다.
비록 소보가 훌륭한 소년이고 그를 매우 좋아하고는 있었지만.
모닥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두청년에게 힘내라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이는 매우 팽팽한 대결이었는데, 건장한 체격에 힘쎈 소보와 민첩한 상사아중
누가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상사아는 동에서 번쩍 하는가 하면 서로 획 피해 소보가 수차 손을 뻗어
그를 꺾으려 했으나 번번이 놓치고 만다.
청년 남녀가 한꺼번에 질러대는 응원의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소보, 빨리 빨리!"
"상사아, 공격해. 피하지만 말고."
함성은 멀리멀리 퍼져나가 이문수도 사람들이
'소보, 소보' 라고 질러대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왜 사람들이 소보를 왜칠까?)
마침내 백마를 타고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아름드리 나무뒤에 숨어서 소보가 상사아와 격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과 지켜보던 사람들이 몹시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문득 그녀는 불가에 앉아 있는 아만을 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은 걱정과 흥분으로 번쩍이고 있었고 눈물이 반짝 거리는데 풀이 죽었다
기뻐했다 하고 있었다.
이문수는 이처럼 가까이 그녀를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소보를 이토록 좋아 하고 있구나.)
갑자기 사람들이 와! 하며 소리를 질렀다.
소보와 상사아가 동시에 쓰러졌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에워싸고 보는 바람에
이문수는 땅에서 뒹굴며 싸우는 두사람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길이 없었다.
단지 사람들의 고함소리로 보아 소보가 위에서 누르고 있다가
다시 상사아 밑에 깔린 것을 알수 있었다.
두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이문수는 한층 초초해져 손바닥이 모두 땀으로 축축해졌다.
별안간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뚝그치며 힘을겨루던 두 사람의 거친 호흡소리만 들리는데
한사람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소보, 소보!"
아만이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가 소보의 손을 잡았다.
이문수는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고 다른 한편 처량했다.
그녀는 말을 돌려 천천히 그자리를 떠나가는데 사람들은 모두 소보를 에워싸고
누구 하나 그녀를 눈여겨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고삐도 쥐지 않은채 백마가 가는데로 사막을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그녀는 문득 백마가 초원의끝까지 온것을 알았다.
여기서 더 가면 고비 사막이었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어쩌라구 여기까지 날 끌고 왔니?"
바로 이때,사막에 네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두대가 나타나더니
그 뒤를 이어 또 두대가 보였다. 달빛아래 어렴풋이 보니
승객은 한인 복장을 하고 있었고, 손에는 장도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문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인 강도 일리는 없을 텐데?)
이렇게 의아해 하고 있는데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백마, 백마!"
라고 소리치며 말을 몰아 달려왔다.
"서라! 그 자리에 서!"
"빨리 달려라!"
이문수는 말을 몰아 급히 돌아가려 하는데 말발굽 소리를 요란스레 내며
몇마리의 말이 앞을 가로막았다.
동남북 삼면이 다 적이니 생각해볼 여유도없이 그녀는 서쪽으로 말을 마구 몰았다.
그러나 서쪽엔 영원히 끝이 보이지 않는 고비사막이 아닌가.
그녀는 어릴적에 소보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고비 사막엔 귀신이 있어 사막에 들어 가기만 하면 아무도 살아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귀신으로 변해도 나올수가 없다.
고비 사막을 들어 서기만 하면 계속 그자리를 뱅글뱅글 돌게 되는데 끊임없이 걷다보면
별안간 사막 중에 발자취를 발견하고는 이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사막을 빠져 나갈줄 알고 미친듯이 기뻐하지만 이 발자취는
자기가 남긴 것이며 걷고 또 걸어도 사막 안에 있는 것이었다.
이문수는 언젠가 계노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대사막이 이처럼 무서운지,
일단 들어가면 다시는 못 빠져 나오는가를.
이문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계노인은 갑자기 얼굴 근육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극도의 공포의 빛을 나타내며 창밖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마치 귀신을 눈앞에서 본 듯했다.
이문수는 지금껏 계노인이 이토록 두려워 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다시 물어볼 엄두도 못 내고 속으로 정말 이었구나 하며 계노인도
이런 귀신들을 보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녀는 백마를 탄채 미친듯 달렸지만 앞에 펼쳐진 것은 황사뿐으로 영원히 헤매는 귀신이
문득 생각이 나 점점 더 두려워지는데 뒤에서는 여전히 강도들이 그녀를 바짝 쫓아오고 잇었다.
그녀는 아빠, 엄마를 상기하고 소보의 엄마와 형을 생각하니
만일 저 강도들에게 붙잡히면 틀림없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것이며 죽어도
몹시 참혹하게 죽을 것이라는것을 알았다.
그러나 사막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안식을 얻을수 없는 귀신이 될 것이 뻔했다.
그녀는 백마를 멈춰 더이상 도망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카자흐인의 천막과 푸른 초원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두명의 강도는 뒤로쳐져 잇었지만 여전히 다섯명의 강도는 고함을 지르며 바짝 쫓아 오고 있었다.
이문수는 거칠지만 희열과 흥분에 차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백마다, 틀림없는 백마야! 잡아라! 잡아!"
순간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원한이돌연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아빠와 엄마는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어. 이제 내가 그들을 이 고비 사막으로 유인해
그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죽는다면 이는 한 생명을 다섯명의 강도와 바꾸는 셈이다.
반대로......반대로......살아서 무슨 낙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백마를 재촉해 서쪽으로 질주해 갔다.
이들은 곽원룡과 진달해의 표국의 졸개들인데 백마이삼 부부를 쫓아 회강까지와
이삼 부부를 죽였지만 그 소녀의 행방을 지금껏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은 이삼이 고창미궁의 지도를 얻었으이라 확신했는데 이삼부부의 몸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지도를 찾지 못하자
분명 그 소녀가 가졌으리라고 생각했다.
고창미궁에 감춰진 엄청난
보물을 진위 표국에 관계된 사람들은 누구도 결코 채념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 일대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이유도 그 소녀를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에서 였던 것이다.
십년간 이들은 이곳에서 무술로 초원의 유목민들을 못살게 굴며
살인, 방화, 강간, 강탈...... 등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동안 이들은 끝까지 소녀를 찾으리라 작심하고 초원 주위를 안 뒤진 곳이없었다.
단지 이소녀가 이미 오래 전에 죽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것은 아닐까 우려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초원에서 강도짓이나 하며 떠도는 생활이 훨씬 그들의 생리에 맞았으므로 구태여
중원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그들은 여럿이 모여 고창미궁의 진보에 대해 얘기하다 얘기 끝에 백마 이삼의 딸을
들먹인 적이 있었다.
이 소녀가 죽지 않았다면 성장해서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백마는 그대로 일 것이므로,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수 있을것이다.
허나 말의 수명은 사람보다 훨씬 짧은 법인데.
만약 백마가 죽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아무도 기대를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백마가 눈앞에 보이는데,
틀림 없는 바로 그 백마가 아닌가!
- 계 속 -
'무협지 > 백마소서풍 '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밝혀지는 진상들 (종결) (0) | 2014.06.19 |
---|---|
5. 고창미궁(高昌迷宮)을 찾아서 (0) | 2014.06.19 |
4. 원수를 만나다. (0) | 2014.06.19 |
3. 사부를 만나다. (0) | 2014.06.19 |
1. 사막의 추격자들 (0) | 2014.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