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실명대협

제16장 魔의 그림자

오늘의 쉼터 2014. 6. 19. 09:54

제16장 魔의 그림자

 

 

 

 

그녀는 음모(陰毛)와 함께 투실투실한 젖가슴이 드러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를 보면 옷을 벗어라. 너는 개다!' 능설비는 과거 그렇게 명했었다.

 

 

일호는 그것을 잊지 않고 능설비를 보는 순간 옷을 벗어버린 것이었다. 

 

일호의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열여덟은 그녀를 포함해서 구마령주 능설비를 호위하기 위한

 

십구위비였다. 

 

"아직도 나를 따른단 말이냐? 감히 나의 명을 어긴 네놈들이?" 

 

능설비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십구위비를 향해 이를 갈자, 

 

"명을 어기다니요? 저희들은 태상마종께서 명하신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제일비위인 일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들었다.

 

 

그녀는 설산의 고금대마총을 출관할 때보다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풋풋하고 싱그러움을 자아내던 몸매가 이제는 완연하게 무르익은 농염한 여인의 자태를 하고 있었다. 

 

"나의 명을 받았다고?" 

 

능설비가 눈꼬리를 치켜뜨자 일호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혈루대호법께서 그 명을 대신 전하셨습니다." 

 

"혈루대호법이 ?" 

 

"이것을 보십시오. 저희들은 일을 마친 다음 만리대표행으로 가서 영주를 기다렸다가

 

이것을 전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일호는 벗어던진 옷 안에서 봉서 하나를 꺼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본시 소림사마저 유린한 다음 영주를 뵈올 예정이었는데

 

하여간 무당의 태청백우자를 암살하는 것은 성공했습니다." 

 

" !" 

 

능설비는 일호가 내민 봉서를 섭물진기를 일으켜 자신의 수중에 움켜쥐었다.

 

그가 봉서를 펴 보자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설산(雪山)에 다녀와 태상마종께 이 글을 적소.

 

설산에 즐비한 시신들은 모두 다 태상마종께서 죽였음을 알고 나의 장래를 알게 되었소.

 

태상마종은 속하마저 때려 죽일 분임을 아오. 죽음이 두렵지는 않으나,

 

태상마종의 손에 죽기 싫어 자결하며 몇 마디 적으려 하오

 

태상마종께서는 마도의 법과는 다르게 일을 처리하고 있소.

 

태상마종은 전마도의 희망이시오.

 

그런데 어이해 모습을 감추려 하시오?

 

이제 속하는 죽음으로 한 가지 일을 단행키로 했소.

 

그것은 구마령주의 신분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오.

 

그리하여 모든 백도가 겁을 집어먹고 마도를 추종하는 모든 무리들이 환호하도록 할 것이오.

 

태상마종이 속하의 전인이었다면 속하는 태상마종이 모든 고수를 이끌고 천하를 피로 씻게 했을 것이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듯하기에 이 한 목숨 기꺼이 버리며 십구비위로 하여금

 

영주를 위대한 분으로 소문내라 한 것이오.'> 

 

 

실로 기가막힌내용이었다. 

 

혈루대호법 혈수광마웅은 능설비를 기다리다 지쳐 설산의 구마루로 갔다가 거기에

 

쌓인 시신들을 보고 기겁한 나머지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과연 혈수광마웅은 자신이 남긴 서신대로 죽음의 그림자 밑으로 영영 사라져버린 것일까?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대단한 자로군. 그러나 너는 나를 잘못 보았다.

 

나는 너희들이 나의 친부모를 죽이고 나를 구마루의 사람으로 만든 이유만으로

 

호법들을 죽인 것은 아니다.

 

단지 죽이고 싶어 죽였을 뿐이다.' 

 

능설비의 두 눈에서 몸서리쳐질 정도의 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는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혈루대호법의 서신을 삼매진화를 일으켜 그의 수중에서 태워버렸다. 

 

" !" 

 

십구비위들은 얼어 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의 형세이었기에 구마령주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능설비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쌍뇌천기자가 죽은 후라는 것이다.

 

또한 너희들이 열아홉만으로 무당파를 반 넘게 무너뜨릴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십구위비는 능설비의 그 말에 다소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앞으로 선뜻 나서며 그의 말을 거들 엄두는 내지 못했다. 

 

능설비는 강렬한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성급했다. 이번 일은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다." 

 

"속하들을 벌하여 주십시오." 

 

십구비위는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능설비는 그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저질러진 일이다. 너희들이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 또한 너희들이 해야 한다." 

 

"명만 내려 주십시오." 

 

"지금 이곳은 오백여 명의 대천강검진(大天?劍陣)에 의해 소리없이 포위되고 있다.

 

그 자들을 일각 안으로 깨뜨려라.

 

그 다음 만리총관이 있는 곳으로 가서 나의 명을 기다려라." 

 

능설비는 냉막히 말한 다음 신형을 뽑아 올렸다.

 

 

십구비위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십구비위들이 자리에서 일어설 때, 

 

"장문인을 암살하고 문하제자들을 도륙한 잔인한 놈들이 저기에 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증오에 찬 외침이 터지며 도처에서 도복 차림의 무사들이 십구비위를 포위해 들었다. 

 

"호홋, 모두 쳐죽이랍시는 영주의 명대로 하자." 

 

제일비위인 일호가 먼저 날아올랐고 그 뒤를 십팔비위가 뒤따랐다.

 

 

그들은 적의 수가 많다는데 오히려 쾌감을 느끼고 있는 피에 굶주릴 대로 굶주린 자들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들!" 

 

"오너라, 모두 죽여주마!"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십구비위는 일제히 악랄한 손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경기가 십구비위를 포위해 들던 무당의 문하제자들을 덮쳐갔다.

 

 

직후 사방 여기저기에서 거북등 터지는 격타음이 터지며 답답한 신음소리가 뒤따랐다. 

 

"크윽 보, 보통 자들이 아니다." 

 

"우욱! 고, 고수들이다!" 

 

무당의 문하제자들은 십구비위의 강맹한 공세에 진열을 흐트리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무공 수위가 비록 높다하나 십구비위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잠시 흩어진 진세의 뒷쪽에서는 주설루가 깃발을 흔들며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중궁(中宮)에서 홍문(洪門)으로 무찔러 가시오!" 

 

그녀가 흔들고있는 깃발은 동의대호법 쌍뇌천기자가 무림동의맹에서 부여받은

 

여러 가지 영패 중 하나가 되는 '동의천명기(同義天命旗)'. 무당의 문하제자 중

 

그녀를 아는 자는 없었으나 그 시발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주설루는 계속하여 외쳐댔다. 

 

"삼십육천강검진(三十六天?劍陣)이 당도할 때까지 막으면 됩니다.

 

놈들은 지극히 강하니 근저하지 말고 우회하여 치십시오!" 

 

그녀는 무리를지휘해 보기는 처음이었으나 그 솜씨는 매우 능숙했다. 

 

그러나 피에 굶주려 미쳐 날뛰는 십구비위들의 살수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

 

모두 죽여버려라!" 

 

"우리는 태상마종 구마령주의 부하들이다!" 

 

"참(斬)!" 

 

그들의 폭갈이터지는 곳에서는 예외없이 단말마의 비명이 뒤따랐다.

 

 

그리고 무지개같이 뿜어지는 핏줄기 . 

 

무림백도는 지난 이십 년간 싸움을 잊고 화평하게 지내왔다.

 

 

무당파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무공을 수련하는 것보다는 수신(修身)하는데 몰두하여 이십 년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싸움은 점점 치열해져 갔다. 

 

십구비위는 이미 진중(陣中)을 벗어나 단애 쪽으로 혈로(血路)를 뚫은 상태였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진리는 이미 그들에 의해 깨어지고만 것이었다.

 

 

그런데도 무당의 문하제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아수라장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높다란 나무 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그림자 하나가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천기석부에서 나와 떠난 척했던 능설비였다. 

 

'십구비위는 지극히 강하다. 그러나 더욱 강한 것은 실력이 비교되지 않는데도

 

악착같이 덤벼드는 백도인들의 혼백이다!' 

 

능설비의 표정은 그리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강한 무공을 일신에 지니고도 일부러 비밀리에 살인을 한 자였다.

 

 

그가 무서워 했던 것은 그가 죽여야 했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자극되어질 백도인들의 복수심을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백도는 절치부심할 것이다. 오늘 마도는 잠시 승리했을 뿐 곧 그 이상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 

 

능설비는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혈루대호법이 내 손에 죽을 각오를 하고 저지른 일이 마도 전체에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 

 

아주 가까이서비명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하건만 능설비는

 

그 모든 것을 듣지 못하는 듯했다. 

 

'백도의 사기를 꺾어버려야 한다. 영영 복수할 꿈도 꾸지 못하도록 철저히 유린해야 한다.' 

 

잠든 듯이 있던 그의 입매에 순간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후훗, 쌍뇌천기자가 사라진 동의맹은 덩치만 큰 거인일 뿐,

 

이제 그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준다면 태산만한 제 몸뚱이를 지탱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버릴 것이다.

 

앞으로 두 가지 일만 성취한다면 백도계는 싸울 꿈을 버리리라.

 

그리고 그 일을 할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나다!' 

 

능설비는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했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한동안 발아래를 굽어 보다가 한 줄기 연기로 화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 

 

며칠 사이 벌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강호평화가 하루 아침에 송두리째 깨어져 버렸다. 

 

천기석부의 붕괴와 신녀곡주의 사망으로 인한 신녀곡과 곤륜파와의 갈등,

 

구마령주의 출현으로 인한 무당 상청관의 초토화 실로 엄청난 사건들이

 

한꺼번에 봇물이 터지듯 무림계를 강타했다. 

 

이제껏 너무도평화로웠기 때문이었을까?

 

 

중원천하를 뒤덮기 시작한 마수(魔手)가 뿌리는 혈향(血香)은 공포를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개봉(開封)은 황하강(黃河江) 남쪽의 대평원에 위치한 고도(古都)였다.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각 나라가 도읍을 정하였을 뿐 아니라,

 

강남(江南)의 개발이 진척함에 따라 문물의 집산지로 번창하였던 곳이었다.

 

따라서 송(宋)의 궁전 유적지인 용대(龍臺)를 비롯하여 상국사(相國寺),

 

남경문(南京門) 밖의 우왕대(禹王臺) 등 유명한 고적도 적지 않다. 

 

지금 개봉부는잔설이 간혹 보이나 대부분의 장소는 눈이 녹아 질펀한 진흙탕이었다.

 

 

완연하다고는 할 수 없으되 분명 봄은 봄이었다. 

 

사람들은 두꺼운 옷 대신 얇은 옷들을 찾아 걸치고 있었다.

 

 

그동안 살을 에일 듯한 동장군 덕에 집 안에서 틀어박혀 살았던 재자가인(才者佳人)들도

 

때를 만난 듯 승경지(勝景地)를 찾아 유람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렇듯 봄은 만물이 생동하기에 더욱 활기차 보인다

 

 

그 좋은 봄날의 하오 무렵 옷차림이 아주 허름한 문사(文士) 하나가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개봉부 안으로 찾아 들었다.

 

 

그는 매사에 서두름이 없는 사람 같았다. 

 

얼마 후, 그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개봉제일의 기루인 '군방기루(群芳妓樓)'에 다다를 수 있었다. 

 

군방기루는 개봉뿐만이 아니라 천하에 이름이 난 기루였다.

 

 

그 안에 근무하는 점소이 수만 해도 이백 명에 달했고, 기적(妓籍)에 올라 있는 기녀들의 수도 오백,

 

기적에는 올라 있지 않으나 언제라도 부를 수 있는 미희(美姬)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문사는 군방기루를 한 번 힐끗 바라보고는 맞은편의 허름하기 짝이없는 다루(茶樓)로 들어가

 

구석진 자리를 하나 차고 앉았다.

 

그는 녹차 한 잔을 시켜 마시며 탁자 표면을 보고 있었다. 

 

'그 자의 행방은 만리총관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 자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개방 사람들뿐일 것이다.' 

 

그는 이런저런생각을 하다가 손을 소매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황색 수술이 달린 작은 패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문사의 뒤로는큰 육각형의 창문이 있었다.

 

 

그 창은 군방기루의 한 창문과 정면으로 마주 보이도록 자리잡고 있었다. 

 

군방기루 안, 다루의 창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창 앞에 사시사철 서서 다루의 창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계화(桂花)라고 불리는 나이 지긋한 기녀였다.

 

 

이미 주객(酒客)들의 수발을 들 나이가 지났건만 기루 주인은 그녀를 기적에서 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의자매처럼 대하며 그녀에게 온갖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 !" 

 

언제나 부드럽던 계화의 눈빛이 한 순간 이채로움을 띠었다. 

 

'오, 오셨다!' 

 

이채로움은 이내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십오 장 가량 떨어진 다루의 창가 탁자에서 폭사되는 신광(神光) 한 줄기를 발견하고는

 

그리 놀라는 것이었다.

 

 

신광은 문사가 탁자 위에 꺼내 놓은 작은 신패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계화는 얼른 무릎을 꺾으며 다루 쪽을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잇따라 아홉 번 절을 한 다음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영주,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자의(紫衣)를 걸치고 손에 부용선(芙蓉扇) 하나를 든 사람입니다." 

 

그녀는 전음입밀을 보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허름한 다루에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군방기루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연(紫娟)이라는 절세기녀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자색궁장에 손에는 부용선을 들고는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루의 문을 들어섰다. 

 

"호홋, 지척지간에 있는 다루인지라 한 번 와보고 싶었는데 ." 

 

그녀는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다가는 그만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곳은 사람 살 곳이 아니라 벌레나 와서 살 곳이군." 

 

그녀는 다루 안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에 비위가 상한 듯 코를 움켜쥐며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다루 주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헤픈 웃음을 지으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헤헷, 한번 왔다가신 것만 해도 저희 회춘다루(廻春茶樓)의 영광이올시다.

 

자연소저가 왔다갔다는 것을 개봉부 전체에 소문을 낸다면 돈이 없어

 

기루에 가지 못하는 파락호들이 벌 떼같이 몰려들 겁니다요. 헤헷!" 

 

다루 주인은 자연이 나간 밖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구석진 자리에앉아 있던 문사는 주인의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은자 하나로 찻값을 후하게 치른 다음 밖으로 나갔다. 

 

그가 막 모퉁이를 돌아갈 때,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 쭈욱 가시면 '표비장(飄飛莊)'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비밀장소입니다." 

 

속삭이는 듯한목소리가 전음입밀로 문사의 귀를 파고들었다.

 

문사는 전음대로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표비장'은 남의 이목을 끌 정도의 장원은 아니었다.

 

 

언제나 문이 닫혀 있었고, 근처 사람들은 그곳에 사람이 사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아주 조용한 장원이었다.

 

 

장주는 연경(燕京)에서 고관 벼슬을 하던 사람의 미망인으로 새와 꽃을 가꾸며

 

세월을 보내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원의 깊숙한 곳에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엄청난 별부(別府)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만화지(萬花池)' 

 

그곳은 지하 십 장 정도 되는 곳에 있는 별부였다.

 

 

그 안에는 모든 아름다움과 온갖 환락이 있다.

 

 

산해진미와 미주가효(美酒佳肴), 금(琴), 비파, 소(簫), 가무(歌舞)에 능한 계집들,

 

온갖 귀한 물건들 그런데도 그곳에는 단 한 가지 귀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사내들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표비장의 만화지는 세워진 지 십수 년이 지났다.

 

 

모든 것이 언제나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고, 언제나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껏 단 한 사람의 손님도 받지 않았다.

 

 

그래도 여인들은 가꾸고 치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만화지에 머무는 여인들은 일 년 만에 한 번씩 모조리 바뀐다.

 

 

만화지에 들 수 있는 여인들의 자격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방 년 십팔 세에서 하루가 넘어도 안 되었고, 방중술에 정통하지 못하거나

 

자결을 거침없이 할 정도로 절개가 있지 않아도 입지불가(入池不可)였다. 

 

그런 만화지를꾸민 사람은 만화총관이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로 군방기루의 막후 주인이기도 했으며 그녀의 밑에는 열두 명의 부총관이 있었다.

 

 

의복을 관리하는 사람, 악사(樂士)를 다스리는 사람, 미인을 가려뽑는 사람, 미식(美食)을

 

관장하는 사람 등 부총관 하나는 색노(色奴)라 불리는 우물(尤物)들을 열 명씩 거느리고 있었다. 

 

지금 만화지의모든 사람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석부(石府)의 안에는 허름한 옷을 걸친 나이 서른다섯 정도의 문사 하나가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이 누리끼리하고 눈빛이 담담한 문사였다.

 

 

그는 만화지가 생긴 이래 최초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었다. 

 

"흠, 하나같이 아름답군." 

 

그는 눈앞에 있는 백이십여 명의 색노들을 바라보며 저으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색노들은 모두얇은 나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미모로 따진다면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들이었다.

 

 

서시(西施)같이 날씬한 미인, 양귀비같이 몸이 조금 통통한 아이, 키가 작고 귀여운 아이,

 

키가 꽤 크고 몸이 풍성한 미인 등 온갖 종류의 미인이 모두 모여 있었다.

 

 

마치 한 폭의 군화도(群花圖)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쯧쯧, 그러나 향(香)이 없는 것이 흠이로다." 

 

문사는 혀를 차다가 한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만묘선랑(萬妙仙娘) 묘가연(妙佳燕)이었다.

 

 

그녀는 과거 만묘색혼문(萬妙色魂門)을 세워 온갖 요사한 술법으로 천하 무림계를 조롱하다가

 

무림동의맹에 패해 굴복했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현재 구마루를 모시는 마도무림계의 한 사람으로 만화총관의 자리를 맡고 있었다. 

 

"얼마 전 만리총관이 연락한 바 있어 곧 뵈리라 믿고 있었지만 아아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영주!" 

 

만묘총관은 뺨위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소식없이 찾아 미안하네." 

 

문사는 바로 능설비의 화신(化身)이었다.

 

 

그는 무당산을 떠난 이후로 쉬지 않고 달려 이곳에 이른 것이었다. 

 

"아아, 여기에는 온갖 것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은 영주께서 천하를 얻는 일에 힘이 되지는 못 할 것이나

 

영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태세는 갖추고 있습니다." 

 

만화총관 묘가연은 연신 감격의 눈물을 뿌려댔다. 

 

그러나 능설비는 아주 담담했다. 

 

"나는 이곳에 즐기러 온 것이 아니야." 

 

"그, 그럼?" 

 

만화총관의 두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주 중대한 일이 있어서 왔지." 

 

능설비는 아주부드럽게 말을 했다.

 

 

그가 자신을 위해 기약없이 기다리고 있는 여인들이 있는 만화지에

 

즐기러 온 것이 아니라면 무슨 연유로 온 것일까? 

 

능설비에게는 백도의 사기를 꺾어야 하는 당면의 과제가 있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백도의 사기를 꺾는 일과 환락만이 있는 만화지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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