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禁鎖煉丹洞府
①
청천벽력이었다.
귀빈으로 대우해 준 설옥경이 곡주를 암살했다는 것은 아무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더욱이 설옥경은 신녀곡주를 암살한 후 보이는 사람마다 가차없이 죽여버린다는 것이
신녀곡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호호호홋, 아무도 나를 막지 못한다. 나는 곤륜의 제자란 말이다!"
설옥경은 광소를 터뜨리며 독랄한 손속을 쉼없이 휘둘러댔다.
"크윽 빙미인이 이런 고수일 줄이야."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나며 무고한 생명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그때 사방에서 소란이 나며 미친 듯 날뛰는 설옥경을 향해 신녀검수(神女劍手)들이 들이닥쳤다.
"잡아라, 무조건 쳐죽여야 한다."
"곡주께서 손도 쓰지 못하고 살해당하셨다.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들이 일제히검을 뽑아들고 설옥경을 향해 서리발 같은 기세로 합공을 펼쳤다.
"호홋, 가소로운 것들!"
설옥경은 사방에서 공격해 드는 신녀검수들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두 눈에서 짙은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아수라의 형상이었다.
그녀의 손이 치켜들리며 곧바로 곤륜의 절학인 대청강수의 수법이 떨쳐졌다.
이어 퍼펑! 펑! 거북의 가죽등이 터지는 섬뜩한 음향이 울리며 공격해 들던 신녀검수들이
피범벅이 되어 날아갔다.
그녀들은 이미 구마령주 능설비의 주문에 걸려 잠재력을 폭발시키기 시작한 설옥경의 일 장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설옥경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여 일 각여가 흘렀을 무렵, 휘휘휙!
일곱 사람의 그림자가 허겁지겁 설옥경의 앞으로 떨어져 내리며 칠성진(七星陣)을 펼쳤다.
"소장문, 어이해 이러시오?"
"정신차리시오, 설소저. 대체 어이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지셨소?"
그들은 곤륜산에서 신녀곡까지 설옥경을 보필했던 운학칠검이었다.
운학칠검은 그들의 소장문인 설옥경이 신녀곡주를 살해하고 닥치는 대로
살상을 서슴치 않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정신없이 달려온 것이었다.
그들이 다급히 외치며 다가서자,
"너희들이군. 이리 와 보아라."
미쳐 날뛰던 설옥경이 부드럽게 말하며 손을 늘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소장문, 이제 마성(魔性)이 사라지셨소?"
"어이해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셨소?"
운학칠검은 즉시 칠성진을 거두고 피눈물을 뿌리며 설옥경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들과 설옥경의 사이가 두세 걸음으로 가까워졌을 때,
"표화탄공수(飄花彈空手)!"
갑자기 설옥경의 입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외침이 터지며 그녀의 쌍수가 어지럽게 떨쳐졌다.
너무도 갑작스런 상황이라 운학칠검은 피할 여유도 없었다.
"허억!"
"우, 우리까지 죽이다니 !"
설옥경의 매서운 손속에 당한 운학칠검은 한 사발씩의 피를 토하며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고 말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했던가?
운학칠검은 그들의 상전을 믿고 다가가다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우우우 !"
운학칠검을 일수에 처단한 설옥경은 울부짖는 듯한 장소성을 뽑으며 북쪽을 향해 신형을 뽑아올렸다.
"미친 계집이 북쪽으로 간다!"
"금쇄연단동부 쪽이다. 천라지망을 펴라!"
절경을 자랑하던 신녀곡은 이제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곡의 내부를 진동시키는 비릿한 혈향(血香)과 볼상 사납게 널려 있는 시신들,
그리고 아우성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능설비는 접객원에서 한가로이 누워 있다가 설옥경이 미쳐 닥치는 대로 살육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말을 막 향로에게 전해 듣고 자지러지게 놀라 밖으로 뛰쳐 나왔다.
"오오, 이럴 수가 !"
그는 곡 안의 도처에서 아우성 소리가 들리자 겁에 질려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나, 나를 이곳으로 안내했던 여인이 마녀였다니 !"
그는 무서워 벌벌 떨다가 제 정신이 아닌 듯 어둠 속으로 무작정 내닫기 시작했다.
"가지 말아요!"
능설비의 뒤를향운과 향로가 쫓아오며 다급하게 외쳤다.
"나, 나는 무섭소. 나는 힘이 없는 일개 서생에 불과하단 말이오.
이곳에 있다간 언제 죽을지 모르잖소?"
능설비는 정말자신에게 죽음이 떨어지기라도 한 듯 새파랗게 질려 접객원의 뒷쪽으로 달려갔다.
그쪽으로는 천야만야한 낭떠러지가 있는 곳이었다.
낮이라면 아주 보기좋은 곳일 텐데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공포에 짓눌린 밤이었기에 어둠 속에 시커멓게 솟아 있는 낭떠러지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했다.
능설비는 벼랑가에서 뒤쫓아온 향운과 향로에게 손을 잡혔다.
"두려워 말아요, 능상공."
"그래요,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을 거예요."
두 여인은 위로의 말로 능설비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이미 능설비에게 마음을 뺏긴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능설비라는 존재는 모든 것이었다.
공포에 질려 벌벌 떠는 능설비가 보기에도 애처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한순간, 그녀들의 눈빛이 갑자기 흐트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포로 가득했던 능설비의 눈빛이 갑자기 시뻘건 광구(光球)로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은 능설비가 자결했다고 소리쳐야 한다.
능설비는 마음이 약한 서생이다.
그는 두려워 달리다가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은 것이다.
너희들은 그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다!"
능설비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혼백이 제압된 향운과 향로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임독양맥(任督兩脈)이 뚫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저항할 수 없는 섭혼마음(攝魂魔音)이었다.
"그렇습니다."
"이 눈으로 능설비 상공께서 벼랑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여인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서 능설비가 시키는 대로 중얼거렸다.
'후훗, 이제는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풀을 건드리지 않고 뱀을 잡게 된 것이다.'
능설비는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다가 어둠 속으로 신형을 뽑아올렸다.
그는 비마충소무영(飛魔沖宵無影)이란 신법을 전개해 단숨에 허공 높이로 치솟아올랐다.
그리고는 즉시 무흔류마신행(無痕流魔神行)이란 수법으로 허공에서 몸을 직각으로 꺾으며
한 줄기 검은 선으로 화해 사라져 갔다.
신녀곡의 밤을공포로 짓이겨 놓은 마(魔)가 떠나가는 것이다.
산 자라면 그의 섬뜩한 지략에 숨을 멈추고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으리라!
신녀곡 북단의단애(斷崖) 아래 많은 수의 무림인들로 이루어진 군진(群陣)이 펼쳐져 있었다.
"흐으으으 !"
그 가운데서 처절한 흐느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한 여인이 달빛을 받아 새파랗게 빛나는 보검을 번쩍 치켜든 채
분노에 찬 시선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보검을 치켜든여인은 신녀곡주의 의발전인인 백초선랑(百草仙娘) 화빙염이었다.
" !"
보검을 쥔 그녀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발 아래에는 가슴과 등에 수십 군데를 검과 장풍에 맞아 피범벅이 된
설옥경이 멍한 눈빛을 하고 누워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조금 전까지 광기에 몸부림치며 살육을 저지르던 그녀가
이제는 그저 평범한 한 여인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촛점을 잃은 그녀의 눈빛은 공허하기만 했다.
"네가 감히 사부를 죽이다니 !"
화빙염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이를 덜덜 떨었다.
그녀는 금지(禁地)를 지키고 있던 중 설옥경이 미친 듯 달려오자
직접 나서서 그녀를 제압한 것이었다.
화빙염의 주위로는 신녀곡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즐비하게 서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상취도장의 제자가 미치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신녀곡주는 동의맹 제칠맹주이자 약왕전(藥王殿) 부전주(副殿主)인데 제십맹주인
상취도장의 전인에게 죽음을 당하다니 동의맹이 생긴 이래 이런 비극은 처음이다.'
그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착잡함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의 뒷편으로는 어슴프레한 달빛 아래 시커먼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그곳은 신녀곡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절대의 금지인 금쇄연단동부의 입구였다.
신녀곡 근처에 있으나 신녀곡이 아닌 장소, 신녀곡주가 십 년 전 어느 날 동의맹에 기증한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동굴 입구의 앞에는 이십칠검사(二十七劍士)가 서서 화빙염이 설옥경을 문초하는 장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들도 사람인 이상 호기심이 있으련만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사내였다.
신녀곡 사람은 아니나 신녀곡의 비전절기인 공공난무신녀권식(空空亂舞神女拳式)을
능숙하게 펼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만천호접표가 가득 든 주머니 하나씩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들은 철통 같은 경비망을 펼쳤고,
그들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년을 죽이리라!"
화빙염은 이를갈며 보검을 내려쳐 갔다.
그녀가 설옥경을 죽인다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보검이 막 설옥경의 목을 치려할 때,
"멈춰라!"
창노한 음성이터지며 금쇄연단동부 안에서 흰 그림자 하나가 미끄러지듯 날아나왔다.
수염이 아주 아름다운 노인이었는데 그의 몸에서는 약내음이 물씬 풍겼다.
그는 한달음에 화빙염의 곁에까지 다가섰다.
그가 나타나자 근처 모든 사람들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구유회혼자시여, 속하들을 용서하십시요."
"설련을 갖고 온 설옥경이 미쳐서 곡주를 살해했습니다."
사람들이 노인을 마중하는 모습은 마치 부처의 현신을 보는 불제자들의 모습같이 공손했다.
구유회혼자는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이자 동의맹의 수뇌인물로 십 년 전 쌍뇌천기자와 더불어
실종된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그보다 오래 전을 따지자면 신녀곡주의 정혼자이기도 했다.
그는 설옥경의 맥을 짚고 있었다.
'내공이 모두 사라졌다.
아아, 무슨 힘이 이 여인의 내공을 찰라지간에 모두 소모되도록 했단 말인가?'
구유회혼자는 몹시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이마를 땀으로 적시고도 모자라 등줄기를 땀으로 축축히 적시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전설로만 알려진 마법(魔法)이 출현한 것일까?'
그는 냉큼 설옥경의 몸을 들어올려 팔과 허리 사이에 끼었다.
그리고는 침중한 어조로 화빙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노부가 처리하겠다."
" ."
화빙염은 그저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이 일은 아주 신비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보아서는 해결이 안 될 일이니
너는 가서 곡주의 시신을 수습해라."
"노호법께서는 그 계집을 어이하실 작정이십니까?"
화빙염이 묻자,
"일단 한 가지를 알아야겠다. 약고(藥庫)에 가서 자세히 조사해 보면 알게 되겠지."
"흐윽 !"
화빙염은 북받치는 설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지마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구유회혼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미 생사(生死)의 문제는 초월한 그였다.
"흐흑,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화빙염은 이를갈며 눈에서 독광을 뿜어냈다.
그 모습은 설옥경을 당장 쳐죽여도 직성이 풀리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
구유회혼자는 그런 화빙염을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조금 전 자신이 나왔던
금쇄연단동부를 향해 신형을 돌려세웠다.
'마(魔)가 시작되는 것일까. 단목노형이 예견한 대로 마풍(魔風)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일을 막기 위해 준비를 했는데도 .'
동부로 향하는구유회혼자를 호위무사들이 바로 곁에서 호위를 했다.
그의 노구가 오늘따라 유독 쓸쓸하게만 보였다.
동부 안을 들어서서 열 걸음 정도 나가면 계단이 나온다.
계단은 몹시도 길었다.
그 아래에는 오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녀석부(神女石府)가 있었다.
신녀석부는 현재 동의맹의 약왕전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는데,
구유회혼자는 그 중에서 의서(醫書)가 가장 많은 방으로 설옥경을 안고 들어갔다.
그는 설옥경을 작은 나무침상 위에 눕힌 다음 서가에서 두툼한 의서 한 권을 뽑아들었다.
그 책의 제목은 '구유회혼의서(九幽廻魂醫書)'였다.
이 책이야말로 오늘의 구유회혼자를 있게 한 상고의학서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혈교마공(血敎魔功) 제혼마령술(制魂魔靈術)'이란 구절을 보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진정 실전된 혈교의 마공이었단 말인가?
으음, 그렇다면 진짜 살인자는 설옥경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겠군."
구유회혼자가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릴 때,
"역시 구유회혼자답군."
갑자기 천정에서 아주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어엇?"
구유회혼자는 소리가 들린 천정을 바라보다가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한 덩어리 혈무가 박쥐처럼 천정에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냐?"
구유회혼자는 창망히 외치다가 지공을 발휘했다.
뒤이어 파공성이 일며 금석을 뚫는 위력을 지닌 우유빛의 구유천운지력(九幽穿雲指力)이 뻗어 나갔다.
헌데 놀랍게도 막강한 위력의 지력이 혈무 근처에 이르자
그 기운이 봄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믿, 믿을 수가 없다!"
구유회혼자는 기상천외한 현상에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조화를 부려 자신이 발출한 지력을 한 순간에 소멸시켰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 순간 팍! 하는 경미한 파공성이 나며 구유회혼자의 단중혈에 점 하나가 찍혔다.
" !"
구유회혼자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만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지고 말았다.
그와 함께 혈무로 몸을 가린 인영이 느릿느릿 천정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후훗, 구유회혼자 너는 무림동의맹에서 두 번째로 가치있는 자이다.
물론 첫 번째는 쌍뇌천기자이고."
혈무로 몸을 가리고 나타난 사람은 다름아닌 구마령주 능설비였다.
"나는 제일 먼저 쌍뇌천기자를 죽일 작정이다.
그의 거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죽마고우인 너밖에 없는 듯하여 너를 먼저 찾은 것이다.
그 다음에 너를 죽일 것이다. "
" ."
구유회혼자는 뻣뻣하게 굳어진 채 불신이 가득한 시선으로 능설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능설비가 손을 내밀어 구유회혼자의 맥문을 쥐었다.
능설비가 발출한 마공이 맥문을 통해 구유회혼자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며 그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구, 구마루에서 왔는가?"
구유회혼자는 힘겹게 말을 했다.
"흠, 구마루를 어찌 알지?"
능설비가 반문하자 구유회혼자의 표정이 침중하게 물들어 갔다.
"전설이 실현된 셈이군. 설산 구마루에서 대마종이 나타나 복수한다는 천기(天機)가 있었다.
바로 네가 제일 먼저 죽이려는 쌍뇌 천기자가 노부에게 해 준 말이다."
"그는 어디에 있느냐?"
"소용없는 짓이다."
구유회혼자가 대답하기를 거부하자 능설비의 눈썹이 꿈틀 치켜져 올라갔다.
'죽여 버리리라!'
능설비의 몸을덮은 혈무가 훨씬 강해지며 꿈틀거렸다.
그는 살심을 이기지 못하고 장심에 힘을 가하려다가는 겨우 감정을 억제시켰다.
"순순히 말한다면 고통없이 죽여 주마."
"그는 노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너의 출현을 알게 된다면 닷새 안에 노부의 복수를 해 줄 것이다."
구유회혼자는 신념에 찬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복수를 한단 말이냐? 그러기 전에 백도는 내 손에 괴멸당하고 만다."
"어리석은 자 마수(魔手) 하나로 청천(靑天)을 가릴 수 있다고 믿느냐?"
구유회혼자가 냉소를 짓자 능설비의 두 눈에서 줄기줄기 시뻘건 화광이 뻗쳐 나왔다.
"정말 죽고 싶으냐?"
"나는 이미 천수를 누렸으니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나는 네 입을 통해서 기필코 쌍뇌천기자의 거처를 알아낼 것이다."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내게서 말을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네가 이곳까지 들어온 무공의 조예나 노부를 일초로 제압한 솜씨로 보아 노부는 물론이고
이 안의 모든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나 결국은 그의 거처를 알지 못하고 떠나야 할 것이다."
구유회혼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똑똑 석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전주(殿主), 연단이 다되어 갑니다. 나오셔서 불을 조절하십시오."
그 소리를 듣던 구유회혼자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후훗, 연단이라는 말을 듣더니 사색이 되다니 재미있군.'
구유회혼자를 제압하고 있는 능설비는 쾌재를 부른 다음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곧 간다."
놀랍게도 그것은 구유회혼자의 목소리였다.
"알겠습니다."
밖에 있던 자가 아무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목청껏 대답했다.
이어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으로 미루어 그는 의심없이 물러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으으, 무서운 자다. 이 자가 바로 쌍뇌천기자가 경계하던 천마성(天魔星)의 주인공이 틀림없다.
누구도 이 자를 막지 못한다. 결국 쌍뇌천기자만이 이 자를 막을 수 있다!'
구유회혼자는 서서히 능설비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냉설비를 바라보는 흐트러지는 그의 시선이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마인(魔人), 노부와 타협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하자는 거냐?"
능설비는 자못흥미롭다는 듯 구유회혼자를 응시했다.
"쌍뇌천기자의 거처를 알려주는 대신 내 부탁을 들어다오."
"부탁이라면 ?"
"노부는 쌍뇌천기자에게 한 가지 물건을 전해야 한다.
여기 머문 이유가 바로 그에게 줄 물건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 ! "
능설비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구유회혼자의 무거운 음성이 이어졌다.
"그 일은 십 년을 끌다가 설옥경이 곤륜으로부터 설련을 가지고 온 덕분에 진전되어
지금 성공하게 된 것이다.
쌍뇌천기자의 거처를 알려줄 테니 노부와 동의맹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든 물건을 그에게 전해다오."
"나는 그를 죽일 작정인데 물건을 전하란 말인가?"
"그가 죽고 사는 것은 그대와의 싸움에서 판가름 나겠지."
" !"
능설비는 잠시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구유회혼자가 다그쳐 물었다.
"어떻게 하겠는가?"
"좋아. 별로 어려운 주문은 아니니 승낙하지."
능설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유회혼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쌍뇌천기자는 무당산의 자개봉(紫蓋峯) 중턱에 은둔하고 있다."
그는 회한이 깃든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공허감뿐이었다.
"내 품안에는 회혼령(廻魂令)이 있다. 그것을 지니면 네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라 해도
너를 노부의 후예로 알고 네 말대로 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쌍뇌천기자에게 전해야 할 물건은 연단실에 있다.
천 개의 금강대환단이 바로 그것이다."
구유회혼자는 그 말을 끝으로 지그시 눈을 내리 감았다.
이미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의연히 맞이하려는 듯 .
그 순간 능설비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구유회혼자 당신의 얼굴을 빌리는 것이 내게는 가장 편안한 길이 될 테니
시신조차 남기지 말고 죽어줘야겠다.'
그의 손에서 파라혈광무(破羅血光霧)라는 붉은 기류가 일어나 구유회혼자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구유회혼자의 몸이 붉은 기류에 휩싸였다가는 형체도 없이 녹아내렸다.
비명도 없고 몸을 태우는 냄새도 없었다.
그가 입고 있던 옷과 지니고 있던 소지품만이 뎅그라니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평생을 백도를위해 헌신한 무림의 큰 별이 지는 순간인데도 누구 하나 울어 줄 사람도 없었다.
'무협지 > 실명대협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5장 天機石府의 超奇人 (0) | 2014.06.18 |
---|---|
제14장 古今第一智를 찾아서 (0) | 2014.06.18 |
제12장 罪를 짓는 美人 (0) | 2014.06.18 |
제11장 美 男 計 (0) | 2014.06.18 |
제10장 萬 里 總 官 (0) | 2014.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