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美 男 計
①
매서운 바람과함께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호북성(湖北省)의 깊숙한 곳,
흰 가루를 온통 뒤집어 쓴 듯한 설원(雪原)이 험준한 산령을 향해 흰 비단이 펼쳐지듯 치달리고 있는데,
그 위를 바람처럼 가로지르는 여덟 개의 선(線)이 있었다.
자세히 본다면 그것은 설지비행술(雪地飛行術)을 시전해 허공을 날아가는 여덟 사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중 일곱은 고동색 경장을 걸친 사내이고, 나머지 하나는 흰 옷을 걸친 아주 빼어난 미녀였다.
일곱의 사내는 나무갑을 소중히 품에 안고 있는 미녀를 호위하는 형세로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만년설련을 왜 신녀곡에 전해야 할까?
이 일 덕분에 곤륜산을 떠나 중원을 구경하게 되어 즐겁기는 한데 .'
빙기옥골(氷肌玉骨)의 미녀는 힘들이지 않고 경공을 펼쳤다.
바람이 스치며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옷 위로 굴곡진 몸매가 완연히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유독 높은 콧대가 사내들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을 듯 싶었다.
급하게 깎여진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쌓인 눈을 휘감아 올렸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 백룡(白龍)이 춤을 추는 형상이었다.
바람이 더욱 거칠어지며 용은 그 모습을 흐트렸다.
'좋은 날이다!'
미녀의 발갛게상기된 모습에는 생명감이 가득했다.
그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눈보라 속을 뚫고 숲 쪽을 지나칠 때였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인적이 끊긴 황량한 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다니 ?'
미녀와 일곱 사내는 급히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으핫핫, 정말 운이 좋은 날이 아닌가?
이놈에게서 빼앗은 은자로 악양(岳陽)에 가 미녀 다섯을 사서 마음껏 즐기리라!"
눈 덮힌 숲속에서 거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숲속에는 흑삼청년 하나가 가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나뒹굴고 있고,
그 앞에는 복면을 쓴 사람 하나가 감산도(坎山刀)를 들고 막 청년의 품안을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감산도의 끝을 타고 붉은 핏물이 똑똑 떨어지며 눈 위에 혈화(血花)를 그려냈다.
"이런 우라질!"
청년의 품안을뒤지던 복면인이 느닷없이 욕설을 터뜨렸다.
"은자 한 푼 없이 곰팡내 나는 고서나 끼고 떠돌아다니는 낭객(浪客) 놈이라니, 재수 옴 붙었군!"
복면인은 침을퉤 뱉으며 감산도를 번쩍 치켜들었다.
"으으 !"
흑삼청년은 공포로 하얗게 질린 채 신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이 설중귀(雪中鬼)에게 걸린 것을 원망해라. 네놈이 입이 있다는 것도 슬픈 일이고!"
설중귀라는 화적은 감산도를 번쩍 들어 청년의 목을 향해 내리쳐 갔다.
청년의 목이 차디찬 칼날 아래 떨어져 나갈 찰나, 갑자기 피이이잉! 하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나며
솔방울 한 개가 날아들었다.
직후, 청년의 목을 내려쳐 가던 육중한 감산도가 날아든 솔방울에 맞아 반으로 잘라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어이쿠 어, 어느 기인이 적엽비화(摘葉飛花)를!"
설중귀는 반 토막 난 감산도를 든 채 자지러지게 놀라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설중귀의 뒤에는 칠남일녀가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괘씸한 놈. 동의맹법(同義盟法)이 천하정기를 수호하고 있는데 설원에서 도적질을 하고
그것도 부족해 선량한 사람을 살해하려 하다니!"
흰 옷의 미녀가 눈꼬리를 치켜뜨며 싸늘히 호통을 치자 가슴판이 아주 넓은 대한 하나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설소저(雪少姐), 이런 화적 놈의 처단은 속하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는 운학제일검(雲鶴第一劍) 자천걸(紫天傑)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곤륜파의 문하제자 중에서 성취가 두 번째로 탁월한 인물이었다.
또한 상취도장이란 정파대명숙(正派大名宿)의 무기명전인(無記名傳人)이기도 했다.
그가 손가락을갈쿠리처럼 오무려 설중귀를 낚아채려는 듯 다가서자,
"아이고,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 놈에게는 노모와 벌어 먹여야 할 처자식이 있습니다."
설중귀가 털썩꿇어앉으며 눈물을 떨구었다.
"용서라고? 흥, 네놈은 죽어 마땅하다!"
운학제일검 자천걸은 불의를 대하고는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냉소를 흘리며 막 손을 쓰려 하자 설중귀의 입술이 보일듯 말듯 움직이며
누구에겐가로 전음을 보냈다.
"영주, 하는 수 없이 이들을 제압해 고문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설중귀의 귀로 전음이 흘러들었다.
"아니야, 계집의 눈빛이 조금 흐트러졌어. 속단은 금물이니 연극을 계속해 보게."
전음을 듣고 난 설중귀가 갑자기 운학제일검 자천걸의 다리를 붙잡으며 애걸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구구 제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추잡한 놈. 무림계에 존재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운학제일검 자천걸은 비굴할 정도로 애걸을 하는 설중귀를 경멸하며 손을 쓰려 했다.
그 순간 우두커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백의미인이 불쑥 말을 던졌다.
"죽이지는 말고 무공을 폐하는 것으로 용서해 주게."
그녀는 빙미인(氷美人) 설옥경(雪玉卿)이란 여인으로 곤륜산 근처에서는
여신(女神)으로 여겨질 정도로 대단한 여인이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운학제일검 자천걸은 설옥경을 향해 허리 숙여 배례를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설중귀를 향해 지력을 튕겨냈다.
"으윽!"
지력이 몸의 요혈(要穴) 몇 군데를 찌르자
설중귀는 고통을 느끼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벌렁 나뒹굴었다.
설옥경은 설중귀가 나뒹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흑삼청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 위에 쓰러져 있는 흑삼청년의 가슴은 온통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봉두난발되어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눈빛만은 아주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매우 특이한 눈빛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울렁이게 하는 ."
설옥경은 흑삼청년의 눈빛과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하나의 비수랄까?
아주 강한 느낌이 문득 그녀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으음 가, 가야지."
설옥경이 주춤바라보고 있는 사이 흑삼청년은 배시시 몸을 추스리며 일어서려 했다.
그의 가슴에 난 깊은 도흔(刀痕)에서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려 눈을 붉게 물들였다.
"으윽!"
흑삼청년은 일어설 듯하다가 상처가 난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휘청거렸다.
그가 다시 쓰러지려 할 때 설옥경의 섬섬옥수가 그의 오른팔을 살짝 움켜쥐었다.
운룡금나수(雲龍擒拿手)라는 수법인데 매우 능숙하고 빠른 출수(出手)였다.
"서생은 의지력이 대단하군요."
"고, 고맙소. 낭자!"
청년은 쿨룩 기침을 토하며 자신을 부축해 준 설옥경에게 감사를 표했다.
곤륜의 운학칠검은 허약하게만 보이는 청년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형편없는 서생 놈 !'
'저리 약하니 도적에게 당하지.'
'내 손가락 하나도 당해내지 못하고 죽을 나약한 문귀(文鬼) 같으니라구 .'
곤륜산에서 검술과 내공을 닦은 철담간장의 일곱 사내들이 코웃음을 치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빙미인 설옥경만은 나약한 청년서생을 능멸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녀의 호수 같은 망막에 얼굴 하나가 가득 차 있었다.
아주 날카롭고도 아름다운 눈썹을 가진 얼굴,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불쑥 나타나는
절세미남자의 얼굴이 그녀를 사로잡아 버리는 것이었다.
설중귀는 쓰러진 채 그 모양을 보고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영주의 진짜 모습이 저리도 뛰어날 줄이야 아니, 저 얼굴도 역용한 모습일지 모른다.
하여간 설옥경은 지금 영주의 섭백미심안(攝魄迷心眼)에 걸렸으니 이제는 문제없다.'
그는 눈을 감고 혼절한 체를 계속하고 있었다.
흑삼청년을 바라보는 설옥경은 아주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잊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게 만난 이름모를 청년서생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늘한 눈빛이
그녀의 작은 가슴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나, 나는 떠돌이요. 헌데 저기 누운 도적은 내가 빈털털이라는 것을 모르고 나를 벤 것이오."
청년은 혼절한체 누워 있는 설중귀를 가리키며 다 죽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금창약을 발라야겠어요."
설옥경은 아주조심조심 그를 앉힌 다음 품안을 뒤졌다.
그녀는 우선 붉은 비단으로 싼 나무상자 하나를 꺼냈고, 이어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그 안에서 가루약 한 봉지를 꺼냈다.
운학칠검은 설옥경이 생면부지의 청년서생에게 공손하게 행동하자 몹시 얼떨떨해 했다.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초개같이 보는 소장문(小掌門)이신데 이해할 수 없군.'
'저 허약한 놈의 무엇이 소장문을 유혹한단 말인가?'
운학칠검은 몹시 불쾌한 표정들이었다.
그렇다고 소주인이 하는 일에 미주알 고주알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그냥 묵묵히 설옥경이 하는 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설옥경은 청년서생의 가슴에 난 상처 부위에 금창약을 바른 다음 흰 붕대를 둘러 주었다.
청년은 진정으로 고맙다는 눈빛을 설옥경에게 보냈다.
"소생은 능설비(陵雪飛)란 사람이오. 아아, 낭자께 구명지은(求命之恩)을 입어
천수대로 살게 되어 고맙기는 하나 사실 소생은 오갈 곳 없는 외로운 처지외다. 쿨룩쿨룩 !"
그는 심한 기침과 함께 말끝을 흐렸다.
" !"
청년을 바라보는 설옥경의 눈빛이 떨렸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사랑인지 동정인지
모를 뭉클한 것이 억제하지 못할 정도로 치밀어 올라오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파리 한 마리 죽일 힘도 없이 나약해 보이는 청년은 사실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예정된 것이었다.
그의 눈빛은 질긴 그물(網)과도 같았다.
그 그물은 무공에는 강하나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곤륜산의 빙미인 설옥경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것이었다.
"아아 걸을 힘도 없소."
능설비라 자신의 이름을 밝힌 청년은 힘겹게 중얼거리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정말 불쌍한 사람이다.'
설옥경은 손으로 눈가를 씻었다.
언제 흘러내렸을까?
두 줄기 눈물이 그녀의 발그스름한 뺨을 타고 소리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능설비의 얼굴을 꽃무늬가 새겨진 자신의 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그런 그녀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운학칠검 중의하나가 보다못해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무산이 지척인데 언제까지 지체하실 겁니까?"
"이제 한 시진만 가면 신녀곡인데 서두르지 않아도 돼.
또한 밤이 깊어 오갈 데 없는 이 사람을 모른 체한다는 건 인정이 아냐.
같이 가도록 해야겠어."
설옥경은 맹목적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눈빛은 전과는 아주 달랐다.
그렇게도 지혜롭던 눈빛이 이제는 사랑이라는 그물에 걸려 연민의 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운학칠검은 낯설고 나약해 보이기만 하는 능설비를 감싸는
그녀의 행동에 야릇한 질투심을 느꼈으나 그녀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능설비를 부축하며 분분히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모습은 눈보라 속에 묻혀 멀어져 갔다.
세찬 바람에 눈발이 춤을 추듯 어지러이 흩어졌다.
남아 있는 사람은 눈 속에 나가 떨어진 설중귀뿐이었다.
모두의 모습이 사라진 직후 설중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과연 뛰어난 분이시다. 무산 신녀곡은 영주 한 사람에 의해 피에 잠기게 될 것이다!'
설중귀는 능설비가 곤륜파의 사람들과 함께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헌데 놀라운 것은 그의 얼굴이 점차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얼굴은 흉악한 도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그것은 바로 만가생불 구만리의 얼굴이 아닌가!
무산(巫山)은 사천성(四川省)의 동쪽에 양자강(揚子江)을 품고 솟아 있는 험산준령이다.
강의 양쪽으로 험산이 중첩되어 있어 무협(巫峽)이라고 부르는데 서쪽의 구당협(瞿塘峽),
동쪽의 서릉협(西陵峽)과 더불어 삼협(三峽)으로 일컬어진다.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은 예로부터 시문(詩文)에 자주 오르는데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절벽의 경치는 가히 절경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초(楚)의 양왕(襄王)이 꿈에 무산의 신녀(神女)와 맺어졌다는 전설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무산에서 가장빼어난 봉우리인 신녀봉(神女峯) 절곡(絶谷) 안에는
세인들이 무산금지(巫山禁地)라 부르는 정대문파(正大門派)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름하여 신녀지곡(神女之谷).
그 안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았다.
그 여인들은 모두 일신에 고강한 무공을 지닌 고수들이었고,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도 늙어 보이지 않는 주안술(駐顔術)에 몹시 능했다.
신녀곡의 우두머리는 화영미혼선(花影迷魂仙)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이미 백이십 살이나 되었지만 주안술 덕분에 서른 남짓한 미부인으로 보였다.
지금 그녀는 친히 신녀곡의 어귀에까지 나와 있었다.
신녀곡으로 들고 나는 길은 지난 십 년간 화수환경(花樹幻景)과 검진(劍陣)으로 인해 막혀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 한 발의 향전(響箭)이 날아들며 금지가 활짝 열린 것이었다.
그때 신녀곡의어귀를 나는 듯이 달려오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곡의 입구에 나와 있던 화영미혼선은 그들의 빠른 신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이 신품소요객의 도움으로 더욱 강해졌고, 상취도장의 의발전인 설옥경은
특히 강하다더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여아(女兒)는
내가 길러 단목노인(檀木老人)의 문하생으로 들여보낸 주설루(朱雪淚)와 나의 의발전인인
빙염(氷艶)뿐이다.'
그녀가 내심 중얼거릴 때, 스스슥! 가벼운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설화(雪花)로 인해
지극히 단조로워진 곡구(谷口)를 통해 안으로 들이닥치던 사람들이 일제히 화영미혼선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들은 바로 청년서생 능설비를 부축하고 달려온 곤륜의 운학칠검과 빙미인 설옥경이었다.
"신녀곡주이십니까?"
설옥경이 나서며 화영미혼선을 향해 장읍하자,
"호홋, 예상보다 사흘을 빨리 당도하다니 신법이 아주 탁월하군요.
그런데 다친 사람이 있는 것을 보니 도중에 싸움이 있었나 보군요?"
화영미혼선은 공손하게 말하며 운학칠검이 부축하고 있는 능설비를 바라보았다.
백 년 전의 천하제일미인이었던 그녀는 백이십의 나이에도 설옥경의 미모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눈매가 매서운 분이시군.'
설옥경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능씨서생인데 크게 다쳤습니다. 곡주께서 거절하신다면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화영미혼선의 의중을 묻자,
"신녀곡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법으로 여기고 있지요.
그리고 우리에겐 영약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 안으로 들어가요."
화영미혼선은 흔쾌히 승락하며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뒷편에서 '예엣!'하는 대답소리가 들리며 붉은 구름 한 점이 미풍에 날아오듯
작은 홍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화빙염(華氷艶)이라고 불리는 천하의 미인 하나가 붉은 경장차림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신녀무보(神女舞步)에 이어 평사낙안(平沙落雁)의 신법을 연이어 펼쳐
설옥경의 바로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화빙염은 설옥경에 비해 나이가 두 살 아래였다.
그러나 일신의 무공은 설옥경에 비해 훨씬 높았다.
그녀는 내려서자마자 설옥경을 향해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언니, 정말 잘 오셨어요. 곤륜파에서 기연으로 얻은 한 갑의 만년설련을 동의맹에
기증한다는 것은 천 년을 두고 미담으로 남을 겁니다."
"저는 가사(家師)의 명에 따라 행할 뿐이지요."
설옥경은 말은공손히 했으나 내심 화빙염의 미모에 적이 놀랐고,
그녀의 두 봉목(鳳目)에서 폭사되는 혁혁한 정광에 감탄하고 말았다.
'화빙염의 무공은 벌써 조화지경(造化之境)에 든 모양이다.
아아, 나도 불철주야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거늘 화소저와는 천양지차가 있구나.'
그녀는 내심 탄식하다가 품안에서 붉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안에는 백 개의 만년설련이 들어 있었다.
설옥경이 운학칠검과 더불어 소문없이 중원 깊은 곳으로 들어온 이유는
그것을 신녀곡에 전하기 위함이었다.
화빙염은 설옥경으로부터 상자를 건네받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보았다.
순간 머리 속을 상쾌하게 해주는 은은한 향기가 사방 일 리 안에 퍼졌다.
상자 안에는 살구씨만한 설련실 백 개가 들어 있었다.
화빙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됐다. 이것이 주약(主藥)으로 들어가면 금강대환단의 연단이 쉽게 성공할 것이다!'
화빙염은 상자의 뚜껑을 닫은 다음 화영미혼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금쇄연단동부(禁鎖煉丹洞府)로 직행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므나."
화영미혼선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선선히 응낙했다.
화빙염은 그녀의 응낙이 떨어지자 설옥경을 바라보았다.
"설언니, 신녀곡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급한 일이 없으시다면 여기서 한 달 정도 머물다 가세요.
지금 당장은 일이 있어서 언니를 안내하지 못하나
사흘 후면 시간이 날 테니 그때 다시 뵙겠어요."
화빙염은 포권지례를 취해 보인 다음 훌쩍 날아올랐다.
그녀의 신법은 아주 빨라 벌써 눈깜짝할 사이에 오십 장 밖으로 벗어나고 있었다.
'혈궁장천행(血弓長天行)의 신법은 바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구유회혼자의 것이다!'
화빙염이 전개한 수법의 소리만을 듣고도 그 신법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능설비였다.
그는 혼절한 체하고 있으나 사실 정신이 지극히 맑은 상태였다.
'구유회혼자는 분명 신녀곡에 와 있다.
신녀곡의 비밀을 알아내어 쳐부수는 것이 나의 임무다.'
나약한 청년서생인 능설비는 바로 구마령주가 분장한 모습이었다.
능설비라는 이름은 본래 그의 본명이 아니었던가?
구마령주가 능설비라는 이름을 쓴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다만 설옥경을 만났을 때 문득 떠올랐기 때문에 가명(假名) 삼아 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쌍뇌천기자를 죽이기 전에는 구마령주가 출현한 사실은 숨겨 두어야 한다.'
구마령주 능설비는 운학제일검의 등에 업혀 있었다.
운학제일검은 자신이 업고 있는 사람이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도 모르고
신녀곡의 절경을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절곡의 안에는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사경(四更)쯤 되었을까?
능설비는 신녀곡의 한 석옥 안에 있었다.
설옥경과 운학칠검은 신녀곡주가 베푸는 연회장에 가고 없었다.
밖의 문가에는 녹삼을 걸친 검비(劍婢) 두 명이 서서 한가로이 지키고 있었다.
능설비는 지금주과(朱果)라는 영과를 한 알 먹고 달게 자야 하는 처지였다.
그는 가는 코를 골며 잠든 체하는 가운데 이러저러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설옥경을 이용해 신녀곡 안으로 들어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별로 나아진 상황은 아니다.
비밀을 알려면 신녀곡 사람을 이용해야 한다.'
그는 드르릉 드르릉 코고는 소리를 내다가 문 쪽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가볍게 튕겨냈다.
그러자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갑자기 졸리운데?"
"호홋, 향운(香雲)이 너도 졸음을 느낄 때가 있었니? 어서 정신 차려!"
문 밖을 지키고 있던 검비 중 하나가 곁에서 하품을 하는 향운이란 다른 검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으으음 ."
그러나 향운이란 검비는 술에 취한 사람마냥 눈꺼풀을 내리깔고 흐느적거렸다.
"어머? 이 아이가 벌써 잠들다니!"
곁의 검비가 주저앉으려는 향운이를 부축하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향운을 안은 채로 나무 문을 밀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영과를 먹고 능설비가 잠들어 있었다.
향운을 안고 있는 여인은 향로(香露)였다.
둘은 접객원(接客院)의 호위검비(護衛劍婢)들로 나이는 어리나 이미 무공에 달통해 있는
천하의 고수들이었다.
"일단 향운이를 의자에 눕히고 나서 신호를 보내 다른 아이를 부르자."
향로는 중얼거리며 대나무로 짜서 만든 의자에 향운을 앉혔다.
향운은 너무 깊게 잠들어 팔다리를 제대로 놀리지 못할 정도였다.
향로가 향운을의자에 앉히고 나서 일어나려 할 때,
" !"
등 뒤로부터 이상한 느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 차리고 돌아서는 순간 무엇인가가
그녀의 입을 꽉 틀어막는 것이 아닌가!
"웁, 웁 !"
향로는 소리도지르지 못하고 놀란 두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순간 그녀를 돌려 세우는 힘이 느껴지며 그녀의 몸은 뒷쪽으로 돌아갔다.
거기엔 보기에도 섬뜩할 정도의 붉은 동공이 그녀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흐웁!"
향로는 그녀를 꿰뚫을 듯 노려보는 붉은 눈빛에 혼백이 아득해졌다.
붉은 눈빛이 잔혹한 음성을 토해냈다.
"너는 이제 대마혼(大魔魂)의 종이다!"
향로의 눈빛은심하게 떨리다가 촛점을 잃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붉은 눈빛에 혼백을 제압당한 것이었다.
"으으, 나 나는 대마혼의 종 ."
향로는 자신의귀에 들리는 대로 말을 따라했다.
그녀의 눈빛은 찰라지간에 아주 공허한 빛으로 변했다.
그녀의 심령을장악한 눈빛, 그것은 바로 능설비의 초혼마공(招魂魔功)이었다.
능설비는 그물에 걸린 새처럼 가녀린 몸을 파르르 떠는 향로를 향해 물었다.
"곤륜의 만년설련이 왜 이곳으로 보내어졌는지를 말하라."
"모, 모릅니다. 나 나는 만년설련이 금쇄연단동부로 들어갈 것이라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향로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재차 능설비의질문이 이어졌다.
"금쇄연단동부라는 곳은 어떤 곳이냐?"
"십 년 전에 세워진 장소인데 거, 거기 갈 수 있는 사람은 곡주님과 소곡주님뿐입니다.
거, 거기 접근하다가는 누구라도 목이 온전하게 붙어 있지 못합니다."
"위치를 말하라."
능설비의 눈빛이 더욱 붉게 타올랐다.
"으음 !"
향로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십 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 근처에는 신녀곡 사람이 아닌
신비고수 백여 명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나는 새라 할지라도 그 안으로는 가,
가지 못합니다."
지금 그녀가 말하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나면 말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그런 말이었다.
능설비가 꾀하는 것은 다른 것이기 이전에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을 갖자는 것이었다.
무공이 아닌 암중활약으로.
그런 면에서 그는 벌써 큰 것을 해내버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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