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萬 里 總 官
①
천년고도(千年古都) 낙양성(洛陽城).
눈발이 날리고있는 늦겨울 어느 날,
낙척서생(落拓書生)으로 보이는 약관의 서생 하나가 느릿느릿 낙양성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잔설(殘雪)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찌든 삶에 지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고 있었다.
"쯧쯧, 얼마 전 연산(燕山:北京)에서 대과(大科)가 있었다더니 그때 낙방한 모양이구먼."
"젊은 사람이 저리도 패기가 없다니 ."
옷깃을 여미며서생의 옆을 지나치는 행인들이 그의 행색을 보고는 저마다 혀를 찼다.
그러나 지나친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서생에게 관심의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나의 몸에서 남을 제압하는 기운이 흘러나가지 않는군.'
그 순간 낙척서생의 누리끼리한 얼굴에 잠깐 회심의 빛이 떠올랐다가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런 낌새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저 각자의 방향으로 무심히 지나쳐 갈 뿐이었다.
얼마나 갔을까?
그는 사시사철군마(群馬)가 들락거리고 수레가 수백 대씩 연일 오가는
아주 웅장한 장원(莊阮) 앞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것은 가히 하나의 성채를 방불케 하는 장원이었다.
낙양성이 아닌 다른 시점(市店)에 있었다면 그 장원 하나만 갖고도
하나의 시진(市鎭)이 이루어졌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만리대표행(萬里大?行)'
장원으로 통하는 문의 누각 편액에 금빛의 화려한 글씨체가 각인되어 있었다.
거대한 장원은 천하 수백 개소에 분점이 있는 우내(宇內)에서 가장 큰 표행이었다.
수천 명의 표사(?士)가 기라성 같은 표두(?頭)들의 지휘 아래 비록 지옥굴이라 할지라도
표물을 안전히 운송해 주는 곳이었다.
만리대표행에는 세 가지 규칙이 있었다.
첫째, 운송하는 표물의 비밀은 절대 지켜 준다는 것.
둘째, 신용으로 거래한다는 것.
세째, 표물이 훼손되거나 도적 맞으면 표물 값보다 열 배 더한 가격의
순금으로 하루 안에 변상한다는 것이었다.
천하의 어떤 표행도 그런 조건을 제시하지는 못 했다.
그러나 만리대표행만큼은 달랐다.
만리대표행이 세워진 지 어언 이십 년.
사람들은 처음그곳이 사흘도 못가서 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만리대표행은 만인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연일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그 영역과 재산을 늘려 갔다.
세력도 무시 못 할 정도로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들은 강호대세에는 상관하지 않았다.
거래 대상도 흑도와 백도, 녹림도, 하오문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누구든 표물을 맡기면 성의를 다하여 운송해 주었다.
만리대표행의 대표행주(大?行主)는 만가생불(萬家生佛) 구만리(九萬里)였다.
만리대표행 이십팔 표두의 상전이자 일천여 표사의 주인인 구대인(九大人)은
그로 인해 낙양부사(洛陽府使)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만리대표행에 표물을 맡기자면 우선 천통서생을 통해야 했다.
천통서생(千統書生)은 만리대표행에 촉탁되는 표물을 접수하고
표물값의 백분지일(百分之一)을 대금으로 받고 일을 보아주는 사람이었다.
사람과 물건을 가르는 데, 그리고 물건값을 감정하는 데 누구보다도 남다른 재간을 갖고 있는
낙양제일의 처세술가로 통하기도 했다.
그가 지금 한 표방에 앉아 진땀을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 이것을 모두 대금으로 한단 말이오?"
천통서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탁자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방금 전 한 사람의 품안에서 꺼내진 목합 하나가 뚜껑이 열린 상태로 놓여 있었다.
목합 안에는 용안(龍眼)만한 크기의 구슬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청홍황백(靑紅黃白)의 네 가지 영롱한 빛깔이 어울려 보기(寶氣)를 뿜고,
표면에 서리 같은 기운을 갖고 있는 <사채용수만보신주(四彩龍首萬寶神珠)>였다.
그 가치로 말한다면 가히 일국(一國)의 반을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표물이 대체 어떤 것이기에 ?"
천통서생은 주눅이 든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탁자 앞에는 방금 전 만리대표행에 도착한 얼굴이 누렇게 뜬 낙척서생이 앉아 있었다.
"표물은 이것이오."
그는 품안에서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놓았다.
표물을 확인한천통서생의 두 눈이 더욱 휘둥그래졌다.
"이토록 작은 것을 운반하는 데 천만 냥 값의 사채용수만보신주를 내겠다는 말씀이오?"
"그렇소."
"으음 ."
천통서생은 진땀이 나는지 소맷자락으로 이마를 훔쳤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말을 이었다.
"표물을 운반하는 대금이 황금 십만 냥이 넘는 일이라면 표방접사(?房接使)인 소생이
접수의 가부(可否)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 ?"
낙척서생이 넌지시 질문을 던지자 천통서생이 진중한 어조로 답했다.
"대표국주께서 친히 결정하셔야 합니다."
"후훗, 남의 처마 아래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법 이곳의 법도대로 하리다."
낙척서생은 말을 마친 다음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만리대표행의 후원(後園)은 웅장한 규모만큼이나 아름다움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그곳에는 열두 군데의 매복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석옥(石屋)이 한 채 있었다.
석옥의 주위로는 겨울이라 해도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천축신자죽(天竺神紫竹)이 울창하다.
지금 그 자죽의 울창함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 석옥 앞을 느릿느릿 거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모습으로 보아 그는 몹시 한가해 보였다.
그가 바로 만리대표행의 주인인 만가생불 구만리였다.
그가 고즈넉한시간을 사색으로 즐길 때,
"대표국주, 천통서생이 오십니다."
근처에서 젊은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한 사람이 아주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러 구만리의 앞으로 다가와 내려섰다.
"자네가 이 시각에 나의 거소로 찾아오다니 어쩐 일인가?"
구만리는 다가선 천통서생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괴이쩍은 일이 생겼습니다."
" ?"
"이것을 보십시오. 이 귀한 사채용수만보신주를 갖고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천통서생은 말과 함께 목합 안의 신주를 구만리에게 내보였다.
"그것이 표물로 들어왔단 말인가?"
"표물이 아니라 대금으로 들어왔습니다."
"허어, 어떤 물건이기에 이 귀한 것을 대금으로 치루려 한단 말인가?"
구만리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떠올랐다.
천통서생은 화주(貨主)인 낙척서생이 맡긴 비단주머니를 구만리의 손에 건네 주었다.
"으으, 이것은 !"
구만리는 그것을 받다가 자지러지게 놀랐다.
'왜 그러실까?'
천통서생은 구만리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해 그러시는지요?"
"이, 이것을 모르는가?"
비단주머니를 천통서생 앞으로 내밀어 보이는 구만리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으음, 무게가 이십 팔 냥에 만년한철과 황금,
그리고 자금사(紫金砂)가 합쳐져 이루어진 합금(合金) !"
만가생불 구만리는 눈매가 아주 정확한 자였다.
그는 비단주머니를 받는 즉시 무게를 저울로 달아보듯 정확히 알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비단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느낌이 주는 물건의 정체까지도.
구만리는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이 물건을 맡기신 분이 태, 태상마종(太上魔宗) 영주(令主)이심을 몰랐단 말인가?"
"흐읍 태, 태상마종!"
천통서생은 그만 심장이 멎는 듯 자지러지고 말았다.
그가 어찌 그토록 지고무쌍한 신분의 이름을 꿈에선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두 사람은 그저 망연한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후훗, 그대가 만리총관(萬里總官)인 게로군."
언제 들어왔을까?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만가생불 구만리의 거소에서 불쑥 걸어나오는 청년이 하나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누리끼리한 얼굴빛, 담담한 눈빛과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보아
뛰어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인물이었다.
바로 사채용수만보신주를 표물의 대가로 치룬 낙척서생이었다.
그가 다가서자만가생불 구만리는 황급히 오체투지했다.
"속하 만리총관 영주께서 설산(雪山)에서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영주께서 낙양에 오심을 이제야 안 것을 꾸짖어 주십시오!"
"오오, 구마령주를 몰라 뵈다니 속하를 처단해 주십시오!"
천통서생은 초주검이 된 채 이마를 땅에 박았다.
만리대표행에 나타난 낙척서생은 바로 구마루를 떠난 구마령주의 역용한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본시 그대들의 죄를 물을 작정이었네만 구마령을 꺼내보지 않고 알아본 것을 감안해 용서해 주겠네.
그러나 이곳의 경비는 너무 허술하네. 그대들 생각에는 완벽하다 생각할 것이나
정파의 육대지주 중 둘이 힘을 합한다면 이곳은 한 시진 안에 초토가 될 것이네."
구마령주는 구마령이 든 비단주머니를 회수한 다음 느릿한 걸음으로 석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이 각이 흐른 후,
석옥 안에는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졌다.
고로육(古老肉), 건작자계(乾灼子鷄), 파채작동순(芭菜灼冬筍), 홍소배골(紅燒排骨),
당초육편(糖醋肉片), 어향가자(魚香茄子)의 요리를 비롯한 이백 년 묵어 영주(靈酒)가 된
여아홍(如兒紅)이 곁들여졌다.
상석에는 구마령주가 앉아 있었다.
그는 상아 젓가락을 사용해 음식맛을 음미해가며 만리표행주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백도구절기(白道九絶技)가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 다 남아 있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육대지주에 대해서는?"
"그들에 대한 것은 미궁(迷宮)입니다.
특히 쌍뇌천기자 단목유중의 거처를 아는 사람은 전무합니다."
그 말에 구마령주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흠, 쌍뇌천기자 그 자는 제일 먼저 쓰러져야 한다.'
그의 눈빛이 한순간 잔혹한 빛을 발하며 만리대표행주를 직시했다.
"그대는 무엇을 준비했는가?"
"이곳 만리대표행의 안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가 있어서
그들은 각기 동서남북 칠로(七路)로 나뉘어 각기 이십팔개분타(二十八個分舵)를 맡고 있습니다."
만리대표행주가 말한 이십팔수들이란 바로 이십팔표두의 다른 이름이었다.
동(東)에는 각(角), 항(亢), 저(저), 방(房), 심(心), 미(尾), 기(箕).
서(西)에는 규(奎), 루(婁), 묘(昴), 위(胃), 필(畢), 자(자), 삼(參).
남(南)에는 정(井), 귀(鬼), 류(柳), 성(星), 장(張), 익(翼), 진(軫).
북(北)에는 두(斗), 우(牛), 여(女), 허(虛), 위(危), 실(室), 벽(壁).
이들은 오래 전부터 강호에 세력을 꾸며왔었지만 겉보기에는 그들 모두는 만리대표행의 표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임무는 정파를 탐색하고 마도의 충신들을 끌어모으는 일이었다.
만리총관인 만리대표행주는 손에 땀을 쥐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 혈루대호법과 연락이 있었습니다."
" "
"그분은 곧 구마령주께서 나오실 것이고 그때와 동시에 전 백도와의 사생결단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마령주는 잠잠히 듣고만 있었다.
만리총관은 더욱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속하들은 영주께서 나오시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소림사와 무당상청관(武當上淸觀),
화산옥함별부(華山玉涵別府), 개방의 총타 등 네 군데에 부하들을 집중적으로 숨겨두었습니다."
"힘을 분산시켰군."
"분산시킨 것이 아니라 집중시킨 것이옵니다."
"집중시킨 것이 아니라 분산시킨 것이야. 왜냐하면 백도는 사실 우리들보다 강하니까.
힘을 네 곳으로 분산시키면 얻는 것이 없다."
"죄, 죄송합니다. 영주 !"
만리총관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후훗, 우리는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야."
"자,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만리총관은 구마령주의 섬ㅉ한 마기(魔氣)에 제압된 상태였다.
그는 구마령주에 대해 소문으로만 들었다.
그런데 막상 대하고 보니 피에 굶주린 사자와도 같은 인상일 거라는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허공 같다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북풍한설이 주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도저히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착각 속에 빠져 있는 만리총관의 귀에 구마령주의 음성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육대지주 중 사실 지주라 할 사람은 하나 그는 바로 쌍뇌천기자이지."
" !"
"그의 거처를 알지 못하고 그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싸움을 일으킨다면
패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어."
"속, 속하의 생각으로는 쌍뇌천기자는 죽은 것 같습니다."
"후훗, 마도의 일천년장한(一千年長恨)이 걸린 일을 짐작이나 단정으로 처리한다면 아니 되네."
구마령주는 여아홍을 한 잔 들이켰다.
그 빈 잔에 만리총관이 얼른 술을 채웠다.
방 안은 조금 어두운 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만리총관은 자신이 오랫동안 눈 속에 묻혀 있던 돌로 깎은 석상(石像) 앞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구마령주에게서 인간다운 느낌을 기대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석상같이 차가운 느낌을 주는 구마령주가 입을 열었다.
"소림과 무당은 전통적으로 오만해 먼저 적을 치지 않네."
"그, 그렇습니다."
"그런 이상 그들을 서둘러 칠 이유가 우리에게도 없는 것이고 ."
"곧 명을 내려 그 근처에 있는 매복자들을 불러들이겠습니다.
혈루대호법에게 연락하면 즉시 시행될 것입니다."
만리총관은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구마령주는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를 달며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예에?"
만리총관이 의아한 얼굴로 구마령주를 바라보았다.
"싸움은 준비 단계를 거쳐 시작될 것이고, 준비 단계에서 성패(成敗)가 결정나지.
그리고 그것은 나 혼자서도 행할 수 있는 것이니
어떤 움직임을 보여 백도의 의혹을 사면 아니 되는 것이야."
"영, 영주께서 단신으로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나는 여기에 사흘 동안 머물 것이네.
그 사이 그대들이 강호에서 알아낸 모든 비밀을 내게 말해주면 되는 것이네."
구마령주는 그말을 끝으로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정말 지독하게 냉정하신 분이시다!'
만리총관은 구마령주에게서 풍기는 기도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사흘 후, 구마령주는 엄동설한에도 푸르디
푸르기만 한 천축신자죽을 바라보며 만리총관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이 일은 사소한 일이라 영주께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리총관이 약간 저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구마령주가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하나 빠짐없이 말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만리총관은 허리를 숙이며 조금 전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빙미인(氷美人)이 무산(巫山)을 향해 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 말에 구마령주의 눈빛이 신비스럽게 물들었다.
"빙미인이라면 백도삼미인(白道三美人) 중 하나이고,
곤륜파 상취도장이란 자의 의발전인(依鉢傳人)이 아닌가?"
"오오, 속하가 사흘 동안 말씀드린 복잡한 강호정세를 모두 외우셨군요!"
만리총관은 구마령주의 암기력에 탄성을 발했다.
"그녀가 무산으로 간다고 했던가?"
구마령주는 감정없는 어투로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빙미인은 곤륜운학칠검(崑崙雲鶴七劍)과 더불어 상자 하나를 호위해가며
무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무산이라면 신녀곡(神女谷)이 있는 곳이군."
"신녀곡주인 화영미혼선(花影迷魂仙)은 동의맹의 칠맹주입니다.
그녀는 강호가 평화로워진 이후 무산 신녀곡에 틀어박혀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무산 신녀곡과 곤륜 사이에 특별한 교분이 있지 않은데 빙미인이 무산으로 급히 간다니
몹시 이상한 일입니다. 게다가 얼마 전 곤륜산에서 만년설련(萬年雪蓮)이 발견되었다는
풍문이 있었습니다."
"만년설련이라면 남에게 쉽게 줄 물건이 아닌데 "
구마령주는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로서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만리총관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무산 신녀곡주인 화영미혼선과 무림신의(武林神醫)인 구유회혼자가 젊었을 때
정혼한 사이라고 말했었지?"
"그렇습니다."
"구유회혼자는 소림사에 머물다가 십 년 전 쌍뇌천기자와 함께 그곳을 떠나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고, 무산 신녀곡은 그 사이 쭉 외부와의 출입을 단절했었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 ."
구마령주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는 정파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현재 가장 비밀스러운 일에 대해서 만큼은 명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백도인들은 어리석지 않다. 그들은 자만에 빠져 있지도 않고, 마도가 사라졌다고
방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돌로 된 바닥에 선명한 족인(足印)이 찍혔다.
그것은 지금 구마령주의 심경이 얼마나 진중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무서운 자는 쌍뇌천기자다. 그자를 제일 먼저 제거해야만 동의맹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백도를 무너뜨릴 무서운 계략으로 가득차 있었다.
머지않아 그 계략들은 실전으로 옮겨질 것이고 강호는 또 한번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밤하늘을 유독붉게 물들이는 천마성(天魔星). 신복학(神卜學)에 능한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마의 별이 구마령주의 머리 위에
떠서 저주스러운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어둠이 먹물처럼 풀린 밤이었다.
살을 에일 듯한 송곳바람만이 윙윙 불어갈 뿐,
그나마 달빛이라도 있어서 깊은 산중임을 알 수 있었다.
달빛 아래 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눈같이 하얀 머리를 풀어 흐트리고 있었는데 안색이 몹시도 창백했다.
그는 제단 앞에 서서 암공(暗空)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나의 목숨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천탕마금강대(一千蕩魔金剛隊)를 만들어 놓고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금강대환신단(金剛大環神丹)은 연단되지 않고 쿨룩쿨룩 ."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심한 기침을 했다.
그가 쇠잔한 기침을 연이어 토할 때,
"사조(師祖)시어, 천하는 너무도 평화롭거늘 어이해 걱정을 끊이지 않으십니까?"
낭낭한 음성과함께 한 소녀가 뒷쪽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소녀는 눈 속에 핀 매화를 닮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노인은 소녀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설루(雪淚)야, 조용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여겨지지 않느냐?
지난 이십 년 간 강호는 너무도 조용했다.
그리고 이십 년 전 비조평에서의 일은 무서운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그 때문에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한 것이다."
"걱정하실 것은 바로 사조의 고질병입니다. 어이해 회혼자 어르신께서
선사하신 영약마저 드시지 않고 항상 병마에 괴로워하십니까?"
설루라 불린 소녀의 음성에는 진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차갑게 쏟아지는 달빛을 받아 더욱 처연하게 보였다.
노인은 그런 소녀를 지그시 응시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나태할 수 없다. 아느냐? 나는 숙명적으로 천기(天氣)에 통했고,
그러기에 항상 괴로워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탄식하며자신의 손에 들린 부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은은한 보기(寶氣)를 발하는 부채였다.
'이것을 보면 신기(神氣)가 느껴진다. 항마광음선(降魔光陰扇) 소림의 정각(淨覺)이 준
이 부채가 없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 물건의 힘으로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노인의 병약해진 몸이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려 갈 것만 같았다.
설루라는 아름다운 소녀는 노인을 숭배하기에 그를 위해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산중의 밤은 그저 무심히 깊어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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