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罪를 짓는 美人
①
다음 날 아침 능설비가 눈을 뜰 때,
'아아 !'
이제껏 그를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의 앵두 같은 입술이 벌어지며 가벼운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바로 어젯밤 신녀곡주가 베푼 연회장에서도 능설비에 대한 것을 잊지 못해 하던 설옥경이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능설비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설옥경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한 시진 전에 왔어요."
설옥경은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에 살짝 볼우물 두 개를 만들었다.
그녀 자신도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사내에 대해서라면 북풍한설 꽁꽁 언 빙심(氷心)으로 닫혀 있던 가슴이 한 사내에 의해
철저히 무너져 내릴 줄을 .
능설비는 수줍음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설옥경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만금(萬金)을 그에게 주고 다시 한 번 보고 싶을 정도로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다만 나 혼자만이 영원히 보고 싶은 분이다!'
설옥경의 방심(芳心)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신녀곡주께서 주신 영약 덕분에 외상이 다 나은 듯하니 제가 붕대를 풀어드리겠어요."
"아니오."
설옥경이 붕대를 풀기 위해 섬섬옥수를 내밀자 능설비는 가볍게 손을 저어 만류했다.
" ?"
설옥경은 멈칫하며 붕대 쪽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췄다.
능설비가 그녀의 행동을 제지한 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지금 그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붕대를 풀면 의당 설중귀에게 당했던 상흔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능설비의 가슴은 백옥같이 깨끗한 상태였다.
그는 어떠한 외상을 입더라도 쉽게 아물어 버리는 근골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마종천강지체(魔宗天?之體)이기 때문이었다.
능설비는 고금 최초로 그런 체질이 된 인간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이 분의 뜻에 따라 할 뿐이다.'
설옥경은 살포시 미소짓다가 그윽한 시선으로 능설비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제가 살고 있는 곤륜산의 운학곡(雲鶴谷) 역시 아름답습니다.
원하신다면 거기로 모시고 가겠어요."
그녀의 눈빛은정(情)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했다.
그녀는 지금 능설비 이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소저는 구명지은인이오.
내게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은 사실 평생을 통해 소저가 처음이오."
능설비의 말은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마력(魔力)으로 끌어낸 정이기는 하나 평생 처음 받아보는 정감어린 눈빛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설옥경은 한없이 부푼 마음으로 아무 말이든 술술 풀어놓았다.
"소녀는 보름 정도 머물며 신녀권법(神女拳法)의 기수식 몇 가지를 전수받을 예정입니다.
상공을 생각하면 빨리 나가고 싶습니다만 곤륜파와 신녀곡 사이의 긴밀한 유대를 위해
보름간은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내 생각은 마시오. 나란 인간은 밝은 햇빛 아래서는 자취를 감추고 마는 눈과 같이 쓸쓸한 놈일 뿐이라오."
"아아, 지난 날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는 모르나 앞으로는 다를 것입니다."
설옥경의 몸이가벼운 흥분으로 떨림을 보였다.
이제껏 사내들 앞에서 그렇게도 도도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능설비가 손을 벌린다면 당장이라도 그의 가슴으로 뛰어들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소장문, 신녀곡주께서 부르십니다. 저희들과 함께 신녀헌(神女軒)으로 가시지요?"
밖에서 운학제일검 자천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옥경은 그의목소리를 듣자 못내 아쉬워하며 조그맣게 말했다.
"공적인 일이라 빠질 수는 없습니다. 빨라도 초경쯤은 되어야 상공을 찾아뵐 수 있을 겁니다."
"초경이라 ."
능설비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옥경은 능설비와 떨어지는 것이 가슴 아픈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밖으로 나갔다.
신녀곡의 귀빈이 된 곤륜파의 일봉칠룡(一鳳七龍)은 신녀곡 호법들과 더불어
신녀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능설비는 방 안의 푹신한 침상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그는 귀를 쫑긋 세운 상태였다.
언뜻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하나,
사실 그는 근처 오 리 안의 모든 것을 아주 세세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그의 청력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곡내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땅 속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는 간과하지 않았다.
'이곳은 고수 일만 명을 동원해야만 부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잠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천라지망(天羅地網)이며 기관이다.'
그가 천이통을쓰며 주위를 정탐할 때, 끼익 문이 열리며 시녀 둘이 걸어들어왔다.
바로 향운과 향로 두 검비였다.
둘은 지난 밤에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단지 이제껏 그네들이 본 사내들 중 가장 아름다운 사내의 임시 시종이 되었다는 데 몹시 기뻐할 뿐이었다.
향운은 비파를들고 있고 향로는 장기판과 장기알을 나무합에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능설비는 설옥경의 금란지우(金蘭之友)로서 대접을 받았다.
그가 머무는 접객원은 구파일방의 노명숙(老名宿)은 되어야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설옥경 또한 신녀곡이 생긴 이래 최고의 귀빈으로 대접을 받았다.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만년설련 한 갑을 기증했기 때문이었다.
띠이잉 띠잉! 비파음이 실내에 울리기 시작했다.
향운은 비파로 비파행(琵琶行)을 노래했고, 향로는 침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능설비와 더불어 장기를 두었다.
"호홋, 솜씨가 보통이 아니신데요?"
향로는 능설비의 장기 솜씨에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은 점심녘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의 산해진미였다.
능설비는 진종일 방 안에서 두 검비와 소일했다.
외부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머무는 접객원 근처에는 매복이 허다했다.
능설비가 밖으로 한 걸음만 나간다면 즉시 큰 동요가 벌어질 것이었다.
신녀곡의 위로어슴프레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능설비는 창을조금 열어두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세 가지다.'
은빛의 편린으로 쏟아지는 달빛에 드러난 능설비의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
'그 중 두 가지는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는 간단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허공의 달을 응시했다.
'분명한 것은 그 세 가지를 오늘 밤 안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순간, 휙! 하는 밤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나더니 이어 두 검비의 음성도 들려왔다.
"이제 오십니까, 빙미인?"
"호홋, 능상공에게 반하지 않을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강호에 빙명(氷名)이 자자한 설소저께서 빠져들 줄이야 "
향운과 향로의부러운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접객원의 문이 열리며 설옥경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볼은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신녀헌에서 여기까지 십 리 길을 쉬지 않고 한 달음에 달려온 때문이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조급함 또한 모를 것이다.
"아아, 아직 주무시지 않고 계셨군요."
설옥경은 창가에 서 있는 능설비를 발견하고는 들뜬 소리를 내며 다가섰다.
방 안은 조금 어두웠으나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으로 인해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는 있을 정도였다.
"향로 낭자가 잠을 쫓는 차를 끓여다 준 덕분이오."
능설비는 어둠속에서 예의 그 신비스런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의 미소를 대하는 설옥경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황홀감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능설비도 그녀에게 반한 듯 자못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설소저, 할 말이 있소."
"무, 무슨 말씀이신지 ?"
그녀는 기대에찬 눈빛으로 능설비를 바라보았다.
"아아, 조금 가까이 와주지 않겠소? 도처에 무림여인들이 있어 크게 말하기가 부끄럽소."
능설비도 가슴이 설레이는 듯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으음 !'
설옥경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나직한 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끼며 주춤주춤 능설비에게로 다가갔다.
달빛을 받아 방 안에 드리워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아주 가까워졌다.
"소저!"
능설비가 두 손을 내밀어 설옥경의 섬섬옥수를 살그머니 쥐었다.
금석(金石)을 쪼개는 신공을 지닌 손이지만 작고 보드랍기만 했다.
자신의 손이 능설비의 손에 쥐어지자 그녀는 한 차례 몸을 세차게 떨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설옥경은 능설비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급한 심장의 고동과 뜨거운 숨결이 더욱 그녀를 달구었다.
능설비의 손이 자신의 허리에 닿음을 느꼈다.
" !"
그녀는 입술을깨물며 애써 격한 숨결을 참았다.
"나는 소저를 !"
능설비는 설옥경의 허리에 얹은 손에 힘을 주며 얼굴을 그녀 쪽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설옥경은 차가운 어떤 느낌에 취하고 말았다.
'창문이 열렸을까?'
그녀는 조금 놀라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순간 그녀의 눈 속으로 시뻘건 광구(光球) 두 개가 파고들 듯 들어섰다.
능설비의 두 눈이었다.
그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라 마의 불이었다.
"흐윽!"
설옥경은 그만자지러지게 놀라고 말았다.
'내공이 꽤 강하군.
그렇다면 향로에게 썼던 마혼최백술(魔魂催魄術)보다 훨씬 강한 마공을 쓸 수밖에!'
능설비는 사악한 미소와 함께 설옥경의 두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 이게 무슨 ?"
그녀는 놀라 손을 빼내려 했다.
그녀는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후기지수(後起之秀)였다.
곤륜신공에 달통해 웬만한 거마를 만난다해도 승률이 많을 정도로 강한 여인인데
지금 능설비 앞에서의 그녀는 한없이 작고 왜소해 보였다.
우르르릉!
능설비의 장심에서 마공이 쏟아져 나왔다.
"내 말을 들어라!"
그는 최혼음공(催魂音功)을 전음입밀로 발휘했다.
그러자 설옥경이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냈다.
"으으, 네가 !"
그녀는 혼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정신력이 강한 계집이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이 제혼마령술(制魂魔靈術)로 사로잡을 수밖에!'
능설비는 잔혹한 눈빛을 던지다가 그녀를 바싹 끌어당겼다.
설옥경의 가슴이 그의 완강한 가슴에 짓눌려 터질 듯이 찌그러 들었다.
"흐윽 !"
설옥경은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앵두 같은 입술을 벌렸다.
그 위로 능설비의 차가운 입술이 덮쳐갔다.
직후, 능설비의 가볍게 벌려진 입술 사이에서 혈기류(血氣流)가 흘러나오며
설옥경의 체내로 뭉게뭉게 흘러들어갔다.
그것은 혈교(血敎)의 제혼마령술법이었다.
절전된 지 천 년이나 지난 마공 중의 마공이 태상마종 구마령주에 의해 시전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전자보다 내공이 훨씬 약한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수법이었다.
" ."
설옥경은 곧 의지를 잃고 말았다.
그녀의 두 눈은 멍하게 뜬 상태였고, 얼굴빛은 잘 익은 대추같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능설비는 우장으로 그녀의 천령개(天靈蓋)를 덮고 왼손을 들어 그녀의 속옷 속으로 집어 넣었다.
무슨 음탕한 짓을 벌이려는 것일까?
설옥경은 능설비의 손이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는데도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 꼼짝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능설비 역시 여체를 더듬는 사내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좌장을 그녀의 회음부에 대었다.
그의 좌장과 우장에서 동시에 마공이 흘러나가 설옥경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일각이 지난 후,
설옥경은 목석같이 되었고 눈빛마저 아주 차갑게 변해 있었다.
능설비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조금 돋아 있었다.
그는 자세를 유지한 채 전음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대마종의 분신체(分身體)가 되었다.
너는 한 시진 동안 대마종과 같이 용맹해질 것이다."
"예."
설옥경은 감정없는 어투로 대답했다.
"나는 네게 마력을 전했고 그것은 한 시진 동안 계속될 것이다.
너는 그것으로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명해 주십시오."
그녀는 혼백을제압당한 상태여서 능설비의 말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능설비의 입가에 잔혹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신녀곡주를 방문해 그녀를 주살하라. 찰라지간에 해치워야 한다."
"예!"
"그녀가 죽으면 너는 쫓기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울부짖으며 아무나 보이는 대로 처치하며 북쪽으로 가라!"
"옛!"
"곤륜의 무공을 십분 발휘하면 두 가지 일을 모두 성사시킬 수 있다.
너의 내공은 조금 전에 비해 세 배나 강해졌으니까.
내가 손을 떼면 잠시 의식을 되찾을 것이다. 내가 한 말은 잊을 것이고,
너는 웬지 신녀곡주를 만나고 싶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녀곡주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의 분신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우르르르릉 !
능설비의 손바닥에서는 혈무(血霧)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 힘은 바로 능설비의 진원지기라 할 수 있었다.
한 순간 그가 두 손을 설옥경의 몸에서 떼어내자,
"으음!"
그녀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며 눈을 비볐다.
"왜 그러시오, 소저?"
능설비는 설옥경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짐짓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갑자기 악몽을 꾼 듯합니다."
설옥경으로서는 능설비의 능청스런 행동을 눈치챌 리가 없었다.
그녀의 눈빛은 전과 다름없이 맑기만 했다.
그녀는 능설비의 주문대로 잠시 전의 일까지 모두 잊어버린 것이었다.
"소생 때문에 피곤하신 듯하오.
남녀가 한 방에 오래 같이 있으면 오해받기 쉬우니 일단 처소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능설비는 마음씨 좋은 오라비가 말하듯 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 그러는 것이 좋겠어요."
설옥경은 진땀으로 몸을 축축하게 적신 상태에서 방을 나왔다.
밖은 교교한 달빛이 쏟아질 듯 출렁이고 있었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던 설옥경은 갑자기 발걸음을 돌려 신녀곡주가 머무는 화영각(花影閣)으로 향했다.
'신녀곡주를 만나야 한다!'
그녀는 웬지 다급한 마음에 걸음을 몹시 빨리했다.
잠시 후, 화영각을 지키던 시녀들이 그녀가 조급히 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다가섰다.
"이 야심한 밤에 어인 일이신지요?"
"곡주를 뵙고 싶다."
설옥경의 음성에는 조급함이 역력했다.
"호호, 낮에 신녀헌에서 권법을 특별히 전수받으셨다고 들었는데 거기에 의문이 있는 모양이군요."
조금 나이든 시녀 하나가 의심하지도 않고 설옥경을 화영각 안으로 안내했다.
화영각 안은 여인의 거처답게 화려하고 치밀하게 치장해 놓았다.
화영미혼선은 노고수답게 좌정으로 밤을 지새려 하다가 뜻밖의 방문을 받고 서재로 나갔다.
'설소저가 어인 일이지? 혹 향수병이 나서 내일 당장 곤륜산으로 출발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닐까?'
그녀는 몹시 야릇해 하며 서재로 들어섰다.
서재 안에는 설옥경이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지요?"
화영미혼선은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저어 ."
설옥경은 무슨말을 할 듯하며 고개를 들었다.
신녀곡주의 얼굴이 그녀의 망막에 담기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아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아주 짧은 외침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죽어라!"
설옥경의 손이번개처럼 쳐들리며 대천강수(大天?手)가 혼신의 공력으로 시전되었다.
"아, 아니!"
생각지도 못 한 설옥경의 공격에 화영미혼선은 자지러지게 놀라며 손을 마주쳐 나갔다.
절세의 고수답게 지극히 빠른 응초(應招)였다.
그러나 꽈쾅! 화영각을 통째로 무너뜨릴 듯한 굉음이 터지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아악!"
화영미혼선은 설옥경의 단 일 장에 핏덩이가 되어 날아가 서가에 부딪혔다.
그녀의 시체가 피보라를 뿌리며 흩어진 책더미에 뒤엉킬 때 비명소리를 들은 시녀들이
문을 부수며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녀들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곡, 곡주를 암살하다니!"
"이년이 미쳤다!"
그녀들은 대경의 외침을 토하다가 두 눈을 부릅뜨며 설옥경을 향해 단죄(斷罪)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곡주의 원수를 갚으리라!"
"호호호홋, 모두 죽이겠다. 곤륜파의 무공으로!"
화영각은 아수라장으로 변하며 울부짖음과 미친 듯 웃어 제끼는 웃음소리로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나를 막는 자는 모두 죽여버릴 테다!"
설옥경의 광기에 찬 외침소리가 무산 신녀곡의 밤을 여지없이 유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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