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개(犬)가 된 우물(尤物)
①
금관(金冠)을 쓴 작은 마룡(魔龍) 일천호. 그는 작은 금패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구마령(九魔令)'
전 마도가 복종하는 지고무쌍한 신물인데도 그는 그것을 장난감 정도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가 금패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한 사람이 그에게 열심히 말을 했다.
"혈루회가 무너진 이후 무림동맹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허리를 숙인 사람은 나후신마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초관교두(礎關敎頭) 노릇을 하던 사람이고, 과거 풍운마검방(風雲魔劍幇)의
태상호법(太上護法)이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도는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꾀많은 쌍뇌천기자를 속이기 위해 무산된 척했을 뿐입니다!"
" ."
구령마주의 지위에 오른 일천호는 아무런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듣고 있었다.
"강호에는 이십팔숙(二十八宿)이 있습니다. 그리고 황금총관(黃金總官), 만화총관(萬花總官),
만리총관(萬里總官)이란 삼총관이 있습니다."
"삼총관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지?"
일천호는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질문을 했다.
"황금총관은 장차 영주께 군자금을 대어줄 사람이고 만화총관은 기루(妓樓)를 경영하며
모은 모든 정보를 일러줄 것이고, 만리총관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해 줄 사람입지요."
"이십팔숙은?"
"그들은 아마 백도에 잠입해 있을 것입니다.
얼마 후면 혈루대호법이 십구비위와 더불어 중원에 가서 그들과 합류(合流)할 것입니다."
나후신마는 조목조목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영주께서 출도(出道)하시어 그들 모두를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일천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쌍뇌천기자라는 자는 고금제일지(古今第一智)라고 하던데 ?"
"그, 그렇습니다."
나후신마가 황급히 대답을 하자 일천호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흠, 그가 모를까?"
"예?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
나후신마는 일천호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반문했다.
"과거 비조평에서 이곳 설산 구마루로 일천기재가 왔음을 그가 모르겠는가 하는 말이네."
일천호가 설명을 하자 나후신마는 약간은 당혹스런 기색으로 대답했다.
"모, 모를 것입니다."
"혈루회의 수괴 중 하나였던 귀영마수라(鬼影魔修羅)가 배반했다고 지난 밤 자네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 그랬습지요. 그렇지만 귀영마수라는 그 일을 절대로 모를 겁니다."
나후신마는 벌써 닷 새째 마도의 내력에 대해 말을 하는 중이었다.
마도의 내력은 장차 전 마도를 이끌어나갈 구마령주인 일천호가 의당 알아야 하는 것들이었기에.
일천호의 눈빛이 심연처럼 깊어지며 그는 한 가지 생각으로 염두를 굴렸다.
'그는 알지도 모른다. 백도절기가 초강한 것과 같이 백도인들은 실로 뛰어난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이리 강하게 키워졌을 테니까.'
그후로도 나후신마는 쉬임없이 이야기했다.
일천호는 그가 말하는 것을 한번 듣고는 모두 외워버렸다.
구마령주가 되고 십구 일이 되는 날,
일천호는 구마진경(九魔眞經)의 연공을 위해 일 년 동안의 연공에 들어야 했다.
연공에 들기 전 그는 영주전(令主專)으로 한 사람을 불렀다.
십구비위와 더불어 중원행을 준비하고 있던 혈루대호법이었다.
그는 명을 받는 즉시 달려와 구마령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기하게 달라졌다. 아아, 제왕의 풍모가 여실히 나타나지 않는가!'
혈루대호법은 구마령주의 기도에 새삼 놀랐다.
"속하를 어이해 부르셨는지요?"
"한 가지 귀찮은 것이 있어 불렀네."
"귀찮은 것이라니요?"
혈루대호법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구마령주를 바라보았다.
"떨칠 것이 있네."
구마령주가 짤막하게 말하자 혈루대호법은 황송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무엇인지요? 속하, 지난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영주께 가장 충성할 따름입니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흠,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네."
구마령주의 표정은 몹시 담담했다.
그러나 듣고 있는 혈루대호법의 안색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결국 올 것이 왔단 말인가?'
그는 무겁게 안색을 굳히며 구마령주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 신분내력 말씀이십니까?"
혈루대호법의 반문에 구마령주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
놀라운 것은 구마령주가 전혀 알 길이 없었던 자신의 내력을 물으면서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본래의 자신에 대한 호기심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구마령주는 입가에 흐릿한 조소까지 지으며 한 마디 내뱉었다.
"귀찮아 떨치고 싶을 뿐이야."
" !"
혈루대호법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구마령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그 말이 진심이라면
그는 정말 고금에 희귀한 대마제(大魔帝)일 것이다.
"그, 그것은 ."
혈루대호법은 비지땀을 흘렸다.
"훗훗, 그대는 내가 구마령주가 되는 것을 철저히 봉쇄하려 했었지.
거기에는 그대가 일호를 총애한다는 것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야."
"어, 어찌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혈루대호법의 등줄기로 땀이 축축히 흘러내렸다.
"훗훗, 계집을 믿느니 사내를 믿는 것이 낫다고 그대가 지은 혈루보락(血淚寶錄)에 적혀 있더군."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
"훗훗, 그렇다면 그대는 일호를 후예로 삼기보다 차라리 나를 끌어들여 나를 더 잘 키워
일찍 구마령주로 만들어야 했어.
일호보다야 내가 더욱 믿음직스러울 테니까."
" !"
혈루대호법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마령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가에 조소를 더욱 짙게 피워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대는 굳이 일호를 고집했고 나를 암살하려 했어.
나는 왜일까 궁리하다가 결국 그대가 나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구마령주는 시련을 겪어내며 아주 무서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절대 자신의 심중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몹시 담담해 보였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남 이야기를 하는 듯 .
"약속하지. 내 신분의 비밀을 말해도 자네를 죽이지 않겠다고."
구마령주는 구마령을 쳐들어 보였다.
그것은 마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정, 정말이십니까?"
"물론!"
'으으음 .'
혈루대호법은 진땀을 흘렸다.
잠시 후, 그는 이마를 땅에 댔다.
"속하는 구마령주의 대충복입니다. 절대 배반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알아주셔야 합니다!"
"물론 알고 있네."
"감사합니다."
혈루대호법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그는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계속했다.
"저는 일천폭풍혈건대(一千暴風血巾隊)에게 명해 일천기재를 취하라고 했습니다."
" ."
"저는 이미 수소문해 그 당시 태어난 기재 일천의 명단(名單)을 갖고 있었고 영주는
그 중의 한 사람이셨지요."
"흠!"
"다, 다른 기재들은 기억하지 못하나 영주에 대한 것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들을 죽인 사람이 바로 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라니?"
구마령주의 검미가 살짝 치켜져 올라갔다.
"능, 능은한(陵銀漢)과 난유향(蘭幽香) 청해쌍선(靑海雙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와 관련이 있단 말인가?"
구마령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
"그들은 능설비라는 당시 갓 태어난 고금기동자(古今奇童子)의 부모였을 뿐입니다."
혈루대호법은 말하며 구마령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과거에 집착해 능설비 노릇을 하시지는 않으리라 나는 믿는다.'
구마령주로 키워진 자, 과거 일천호라 불렸던 그의 본명은 능설비였다.
그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부모를 잃었다.
혈루회주였던 혈수광마웅이 그의 친부모를 죽이고, 그를 일천 번째의 기재로 취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혈루대호법이 된 혈수광마웅은 바로 구마령주의 친부모를 죽인 사람임이 밝혀지고 만 것이었다.
"내 본명이 능설비였다 훗훗, 싫지 않은 이름이군."
구마령주는 중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정말 지독한 분이다. 아아, 이제 마도는 이분을 믿고 날개를 펴고 구만 리를 날 수 있을 것이다.'
혈루대호법은 그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는 감격한 어조로 구마령주를 향해 읊조렸다.
"영, 영주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나가보게."
구마령주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어투로 짧게 한 마디만을 할 뿐이었다.
혈루대호법은 절을 두 번 했다.
그는 하직인사를 마치고 나가려다가는,
"영주, 하직 예물을 준비했다는 말씀을 제가 드렸는지요?"
"예물?"
"속하의 충정에서 나온 예물이 있습니다.
속하가 영주의 진짜 부하임을 밝히는 예물이니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무엇인가?"
구마령주는 예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건성으로 물었다.
"속하가 밖으로 나가는 대로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혈루대호법은 절을 하고 물러나갔다.
구마령주는 무신경한 듯 눈을 다시 감았다.
'능설비 한 순간이나마 그 이름으로 불렸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단 말인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에게 있어서 과거의 모든 것은 한낱 스쳐간 꿈일 수밖에는 없었다.
구마령주로서의 현재의 그가 존재할 뿐이었다.
이각이 지났을까?
문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열리며 방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과거 일호로 불렸던 여인, 현재는 제일비위(第一臂術)로 불리는 여인이
조심조심 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녀는 구마령주의 앞으로 다가와 다소곳이 허리를 숙였다.
"영, 영주! 예물을 갖고 왔습니다."
"꺼내놓고 물러가라.
한 시진 후 중원을 향해 마조를 타고 날아올라야 할 테니 준비를 서둘러라."
구마령주는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시, 시간은 넉넉합니다."
제일비위는 말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직후, 사르르 옷자락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 ?"
힐끗 시선을 돌려 제일비위를 바라보는 구마령주의 시선에 그녀가
자신의 옷자락을 스스로 벗어내리는 모습이 비쳤다.
동그란 두 어깨와 비단결같이 희고 보드라운 살결.
그 위에 선명히 드러난 한 점의 붉은 수궁사(守宮砂)가 눈이 부시도록 현란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全裸)의 몸이 되었다.
성숙한 여인의 전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흰 대리석으로 깎은 매끈한 조각을 연상케 했다.
"혈루대호법께서 제게 명하셨습니다. 예물은 제 몸입니다. 부디 거둬 주십시오."
제일비위의 음성이 떨렸다.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그녀의 유난히 긴 속눈썹도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천천히 바닥에 자신의 몸을 눕혔다.
매끈하게 빠진 두 옥주(玉柱) 사이의 신비림(神秘林)과 금새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두 개의 젖무덤이 도발적인 모습으로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구마령주는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너를 취하란 말이냐?"
"영, 영주 마음대로 하십시오."
"네가 원한 일은 아닐 텐데?"
"모, 모든 것은 명 받는 대로 행해질 뿐이지요.
저는 영주의 머리카락 한 올만도 못한 천한 계집입니다."
그녀의 피부에는 닭 피부에나 있음직한 굵은 소름이 돋고 있었다.
그것이 구마령주를 노엽게 했다.
'아직도 나를 거부하는군. 그렇다면 내 비록 바라지는 않으나 너를 꺾기 위해
혈루대호법의 예물을 취하리라.'
구마령주는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너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겠다."
"영주의 뜻대로 하십시요."
제일비위는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였다.
구마령주가 자신을 어떻게 하든 순순히 따르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다.
거역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테니까.
구마령주의 입가에 매달린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너는 이제부터 혈견(血犬)이다."
아름다운 여인을 개에 비유하다니 그것은 가장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보면 언제나 옷을 벗어야 한다."
" ."
제일비위는 수치심으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었다.
"훗훗, 네가 원해 이뤄진 일이다. 사실 드러누워 꼬리를 치는 종자란 개밖에 없지 않느냐?"
"그, 그렇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흐흑 ."
혈견이 된 우물(尤物), 그녀의 유독 긴 속눈썹을 비집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훗훗, 개는 주인 앞에서 울면 안 된다. 항상 즐거워하며 꼬리를 쳐야 하는 것이다.
무릎을 꿇고 기어다녀라."
"흐흑 ."
더할 수 없이 모욕적인 언사였다.
그녀는 과거에 자신의 발가락에 끼인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한 사내에게
도리어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구마령주의 호통이 터졌다.
"어서!"
"말,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녀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모으고 일어나 젖가슴을 축 늘어뜨린 채 엉금엉금 기며
개 우는 소리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워어엉 ."
" !"
구마령주는 말없이 턱을 괸 채 엉덩이를 흔들며 기어다니는 제일비위를 바라보았다.
'너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미워하는 것은 너와 나를 덮은 마(魔)의 장막(帳莫)일 뿐이다.
아느냐?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마(魔)인 것을!'
"워어엉 워엉!"
제일비위는 서럽게 개처럼 짖어댔다.
개(犬)가 된 우물 그리고 사람이기를 포기한 영주(令主). 이곳에는 하늘(天)이 없다.
하늘은 지금 구마령주의 손에 쥐어져 있을 뿐이다.
"워엉!"
혈견은 구슬픈소리를 내며 방을 열 바퀴 넘게 기어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얼굴에서는 수치심마저 사라져 버렸다.
개가 된 것이 당연한 듯,
그녀는 엉금엉금 기며 딸기빛 붉은 입술 사이에서 개울음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이십 마리 금색마조는 예정한 대로 날아올랐다.
혈루대호법과 구마령주에 의해 혈견이라 이름 붙여진 제일비위를 위시한 십구비위,
그들은 중원을 향해 쉬임없이 날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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