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실명대협

제2장 적자생존

오늘의 쉼터 2014. 6. 18. 17:12

제2장 적자생존

 

 

 

 

 

'지금 이 순간부터 종소리가 날 때까지 보이는 대로 죽여라.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명(命)이 내려졌다.

 

 

이제 혈부에 있는 사람은 모두 너의 적(敵)이다.

 

 

네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상대가 너를 죽일 것이다.

 

 

종소리가 나면 멈춰도 된다.

 

 

그것이 바로 옥으로 선택(選擇)된 것이니까.' 

 

실로 놀라운 글이었다.

 

 

보이는 대로 죽여 버리라니 그렇다면 이제까지 같이 생활해 온 천 명의 또래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다.

 

자신이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비록 나를 미워한다지만 죄없는 아이들인데 .' 

 

일천호는 손에땀을 쥐었다.

 

그 땀이 쪽지에 축축하게 스며들었다.

 

 

그는 길지는 않지만 살아온 나날 중 지금 이 순간같이 초조해 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스슥! 옷자락이 스치는 듯한 아주 경미한 인기척을 듣게 되었다. 다음 순간, 

 

"죽어라!" 

 

악에 바친 기합소리가 터지며 작은 그림자 하나가 번득이며 일천호의 면전으로 들이닥치는 것이 아닌가? 

 

그림자의 손에는 비수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일천호의 허리띠에도 찔러져 있는 일척마비(一尺魔匕)라는 비수였다. 

 

비수는 청색독망(靑色毒芒)을 날리며 일천호의 목젖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순간이었다. 

 

"어엇!" 

 

일천호는 깜짝놀라 몸을 뒤틀었다.

 

 

그것은 거의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그의 목젖을 노리며 파고들던 비수는 바람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고 뒤이어 땅! 하는

 

쇳소리가 나며 불똥이 튀었다.

 

 

일척마비가 일천호의 목을 자르지 못하고 석벽에 부딪쳐 부러지며 불똥을 튀긴 것이었다. 

 

"으으, 너는 멍청이 일천호(一千號)인데 어떻게 가장 뛰어난 구십구호의 일도를 피할 수 있단 말이냐?" 

 

 

필살의 일초를허사로 돌린 구십구호 소년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일천호의 얼굴과 부러져나간 자신의 일척마비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반면, 일천호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소년의 코 밑 솜털이 땀방울에 촉촉히 덮이는 것까지

 

너무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사실 일천호의 내공은 일천 명 중 최고였다.

 

또한 오성(悟性)과 암기력(暗記力)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구십구호가 그것을 지금에야 처음 알았기에 기절초풍 놀란 것은 당연했다. 

 

"네, 네가 나의 검초를 피하다니 ." 

 

구십구호는 일천호의 허리 어림을 바라보며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거기엔 독이 발린 비수가 그대로 있었다.

 

 

그는 일천호가 그것을 쓸까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보이는 대로 죽여라' 

 

자신이 받아 본 쪽지에 그런 글이 적혀 있었지 않았던가?

 

 

자신이 옥으로 선택되려면 상대가 누구든 죽여야 했다.

 

 

자신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는 일천호의 비수가 자신의 목줄기를 꿰뚫을 것이었다. 

 

구십구호의 눈빛이 절망으로 흐트러지는데, 

 

"이 순간이 꿈이기를 !" 

 

갑자기 꿈꾸는듯한 넋두리 소리가 났다. 

 

" ?" 

 

구십구호는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일천호를 바라보았다. 

 

일천호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구십구호의 부러진 비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바라보던 일천호는 느릿한 동작으로 등을 돌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떼어놓았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구십구호를 뒤로 한 채로. 

 

그 순간, 절망으로 물들어 있던 구십구호의 동공에서 번득이는 광채를 일천호는 느끼지 못했다. 

 

그가 세 걸음 정도 갔을까?

 

 

무엇인가가 그의 등판 쪽으로 쉬익!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그것은 일천호의 등판에 정확히 격중되었다.

 

일천호는 등판에 화끈함을 느끼며 몸을 틀었다. 

 

"비, 비수를 던졌군." 

 

구십구호는 흰이를 드러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죽이고 싶으냐?" 

 

 

일천호의 눈에는 전에 없었던 위독함이 떠올랐다. 

 

 

"으핫핫, 너는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통쾌하게 웃어제끼는 구십구호는 빈손이었다.

 

그가 쥐고 있던 반토막의 비수는 일천호의 등줄기 속으로 파고들어간 상태였다. 

 

 

"으음 !" 

 

 

구십구호를 노려보던 일천호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 털썩 고꾸라지고 말았다. 

 

"으하하, 하나를 해치웠다!" 

 

구십구호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웃어 제낄 때, 

 

"나후건곤절(羅喉乾坤絶)!" 

 

앙칼진 소녀의목소리가 터지며 열여덟 송이의 검화(劍花)가 허공 가득 퍼졌다. 

 

"흐읍 !" 

 

구십구호의 입에서 짧고 급박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일천호를 해치운 후 기뻐하느라 자신의 경계를 게을리 한 탓이었다. 

 

흑삼을 걸친 미소녀가 일척마비를 어지럽게 흔들어 일으키는 검막(劍幕)이 찰라지간에 구십구호의

 

몸을 휘감아 버렸다.

 

 

나후건곤절의 수법은 강호(江湖)의 어떤 고수도 조롱하지 못할 독랄무비(毒辣無比)한 검초였다. 

 

파파팍! 구십구호의 머리 위쪽이 반으로 쪼개지며 허연 뇌수가 흥건한 핏물과 함께 벽면에 튀었다.

 

 

구십구호는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썩은 짚단처럼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미소녀는 일천호의 곁에 쓰러진 구십구호를 내려다보며 도도하게 웃었다. 

 

"호호! 누가 칠백오호(七百五號)를 막겠는가!" 

 

흑삼의 미소녀는 칠백오호였다. 볼우물이 아주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귀여운 얼굴 뒤에 사람을 죽이고도 웃을 수 있는 독랄한 심성이 숨어 있을 줄이야! 

 

칠백오호가 까르르 웃을 때 살금살금 다가서는 은밀한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삼백육십사호(三百六十四號). 

 

그도 소녀였다.

 

 

그녀는 고양이가 걷듯이 소리없이 다가와 일척마비를 번쩍 들어 나후통천식(羅喉通天式)이라는

 

수법으로 길게 뻗어냈다.

 

 

시퍼렇게 번득이는 독망(毒芒)이 고개를 제끼며 웃어대는 칠백오호에게 기쾌한 속도로 쏘아져 갔다. 

 

"크억!" 

 

처절한 비명을지르며 칠백오호가 앞가슴을 부둥켜안고 앞으로 나뒹굴었다.

 

 

칠백오호가 벌렁 나뒹굴 때 일각(一脚)이 들이닥쳐 그녀의 하복부를 후려찼다.

 

 

마치 가죽공이 터지듯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칠백오호의 아랫배가 터지며 오장육부가 쏟아져 나왔다. 

 

"호호! 검수(劍手)는 언제나 육감(六感)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 교두 어르신네의 가르치심이었는데

 

그것을 잊었느냐?" 

 

삼백육십사호는 웃으며 몸을 날렸다. 

 

'초관오칙(礎關五則)' 

 

소년소녀들은 그것을 지난 수 년간 가르침 받아 왔었다.

 

 

그것은 무사(武士)의 수신요결(守身要訣)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첫째, 누구도 믿지마라! 

 

둘째, 언제나 경계하라! 

 

셋째, 어떤 장소에서건 경계(警戒)를 소홀히 하지 마라! 

 

넷째, 불안(不安)하면 먼저 베라. 죽고 나서 후회하느니 죽이고 나서 후회하라! 

 

다섯째, 암전(暗戰)이 되어도 승리(勝利)만 하면 된다. 패자(敗者)보다는 비겁자가 오히려 낫다! 

 

 

그것은 철저하고도 가혹한 흑도무림법(黑道武林法)이었다.

 

 일천 명의 소년소녀들은 이제껏 그 다섯 가지를 생활의 전부처럼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통로는 세 구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로 짙은 혈향(血香)에 잠겨 있었다. 

 

"으음 ." 

 

문득 미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시체 한 구가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바로 구십구호의 반토막 비수를 등에 맞고 쓰러졌던 일천호였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의 마비(魔匕)를 부러지지 않게 했었다면 너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을

 

그리고 나로 인해 네가 방심하지 않았다면 승자는 너였을 수도 있는데 .' 

 

일천호는 흥건한 핏물 속에 드러누운 구십구호의 시체를 보고 눈물을 떨구었다.

 

 

그의 눈물은 아주 맑았다.

 

 

거기에는 진정으로 구십구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혈부(血府)의 통로 곳곳에서는 대도살극(大屠殺劇)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수와 비수가 맞부딪치는 소리와 연이어 터지는 단말마의 비명소리 온통 피를 뒤집어 쓴 채

 

서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 혈안(血眼)이 되어 있는 소년소녀들은 야차(夜叉)를 방불케 했다.

 

 

혈부 안에는 소년(少年)이 없다. 소녀(少女)도 없었다.

 

 

있다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베는 살인귀가 있을 뿐이었다. 

 

일천호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움직일 줄 몰랐다.

 

 

 바닥의 흥건한 핏물이 일천호의 신발을 적셨다.

 

 

독혈(毒血)이기 때문일까? 썩는 냄새가 유독 고약했다. 

 

 

일천호의 손에는 반토막의 비수가 들려 있었다.

 

 

구십구호에 의해 자신의 등판에 박혔던 비수를 뽑아낸 것이었다.

 

 

상처에서는 피가 그치지 않고 뭉클뭉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일천호의 등줄기에서 흐르는 핏물은 다른 아이들이 흘린 피와는 달리 아주 맑았다.

 

 

믿을 수 없게도 선혈(鮮血)이었다. 

 

일척마비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일보단장산(一步斷腸散)과 절독추명사(絶毒追命沙)가 섞여 만들어진 패혈분(敗血紛)이

 

살 속으로 들어간 이상 살이 썩고 피가 고름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선혈이라니 설마 일천호가 이미 백독불침지신(百毒不侵之身)이 되었단 말인가? 

 

' !' 

 

일천호는 구십구호의 시체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무엇인가가 그를 취(醉)하게 했다. 

 

붉은 피가 망막에 아른거리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주 이상한 열기(熱氣)가 뿜어지는 것이었다. 

 

'죽음이 이리 아름답다니.' 

 

일천호는 신음처럼 뇌까리며 자신도 모르게 핏물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핏물은 손바닥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끈끈하고 뜨거운 느낌이 전신의 혈관을 타고 뇌를 자극했다.

 

 

일천호의 전신이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으으 이 더러운 핏물이 나를 들뜨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일천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빛은 전과는 달랐다.

 

 

전에 없던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진홍의 핏빛이 안광에 배어 있었다. 

 

그것은 천혈단(天血丹)의 약효 때문이었다.

 

 

혈부에 들어서기 전 일천 명의 소년소녀들이 한 알씩 먹었던 마성(魔性)을 일으키는

 

천혈단이 뒤늦게야 일천호의 피를 들끓게 하는 것이었다. 

 

"으으으 !" 

 

일천호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혈광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표정도 고통으로 더욱 일그러졌다.

 

 

그가 옷을 핏물로 물들이고 뜨거운 숨결을 토하고 있을 때였다. 

 

휘익!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모퉁이를 막 돌아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허리띠에는 수급 다섯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는 칠호라 불리는 소년이었다. 

 

칠호는 일천호를 발견하자 지체없이 몸을 날려왔다. 

 

"네 목도 내 것이다!" 

 

칠호는 몸을 틀며 나후파천(羅喉破天)의 일식을 시전해 왔다.

 

 

쉬쉬쉭! 시퍼런 독망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칠호의 몸은 사라지고 대신 수없이 많은 줄기의 검망(劍網)이 거미줄같이 퍼져나가

 

일천호의 몸을 휘감았다.

 

 

아차하는 순간 일천호의 목이 떨어져 나갈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때 슥! 하는 아주 경미한 파공성과 함께 한 줄기 청색선(靑色線)이 뻗어 나갔다.

 

 

그리고는 따당!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검편(劍片)이 뿌려지며 핏방울이 비가 되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뒤이어 불신에가득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이럴 수가 나, 나의 검을 그대로 자르다니 ." 

 

그것은 두 눈을 한껏 부릅뜬 칠호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일천호는 줄기줄기 시뻘건 안광만 폭사해낼 뿐 한 손을 쭉 뻗은 채로 미동도 않고 우뚝 서 있었다. 

 

칠호의 얼굴이극심한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그의 입매가 씰룩거려졌다. 

 

"다 다른 사람도 아닌 멍청이 네가 !" 

 

그 말이 끝이었다.

 

 

칠호는 눈을 감지 못했다.

 

 

일천호의 일척마비는 그의 천돌혈(天突穴)을 뚫고 들어가 뇌호혈(腦戶穴) 쪽으로 빠져나갔다.

 

 

칠호는 일천호의 일척마비에 대롱대롱 매달린 셈이었다. 

 

' !' 

 

일천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칠호의 몸뚱이는 비수에서 뽑혀져 구십구호의 시체 위로 가서 한데 포개졌다. 

 

"우우 !" 

 

돌연 일천호는미친 듯이 울부짖는 짐승처럼 허공을 향해 장소성을 토해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마의 장소성이 혈부 안을 진동시켰다.

 

 

그리고는 장소성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 일천호는 몸을 날려 한 줄기 검은 연기가 되어

 

통로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거대한 석전(石殿). 

 

세 개의 태사의(太師椅)가 품자형(品字型)으로 놓여 있고 그 주위에는 일곱 개의 호피(虎皮)가

 

덮힌 의자가 칠성진세(七星陣勢)로 배열이 되어 있었다.

 

 

자리가 빈 의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막 한 사람이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예상한 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조금 예상과 다른 것은 한 가지 가장 많은 수를 죽인 장본인의 번호입니다." 

 

그는 일천 명의 소년소녀들을 혈부 안으로 넣어 생사를 건 혈투를 유도한 마인루주(魔刃樓主)였다.

 

 

그런데도 그의 표정에서는 일말의 자책감이나 죄책감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장 많은 수를 죽인 아이는 일호(一號)나 오백호(五百號), 둘 중 하나일 텐데?" 

 

누군가 말하자마인루주가 다시 대답했다. 

 

"일호는 오십칠 명을 죽였고 오백호는 백 명을 죽였는데 그는 반 시진 안에 삼백 명을 혼자 죽였습니다." 

 

"삼백이나?" 

 

"오오!" 

 

좌중의 인물들이 모두 놀람의 탄성을 자아냈다. 

 

마인루주가 다시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장본인은 바로 일천호입니다." 

 

"일천호!" 

 

"그가 그리 강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군." 

 

좌중은 또 한번 놀람으로 술렁거렸다. 

 

"일천호의 근골(筋骨)이 남다르다는 것은 초관교두를 통해 누누이 들었으나 저 역시

 

그 정도일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여간 일천호 덕에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마인루에 들어갈 일백영(一百英)이 가려졌습니다." 

 

마인루주의 설명이 끝나자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태사의에 앉은 인물이 발하는 음성이었다. 

 

"일백 명은 현재 어찌 되었는가?" 

 

"일백 명은 예정대로 음양마동(陰陽魔洞)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대종사(大宗師)!" 

 

마인루주가 허리 굽히자, 

 

"흠 반 년 안에 오십(五十)을 추리게." 

 

태사의의 대종사라 불린 인물이 명령했다.

 

 

그 음성에는 항거할 수 없는 어떤 힘이 깃들어 있었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천년대업(千年大業)을 풀 구마령주(九魔令主)와 그를 보필할 십구위(十九衛)만 가리면 되네. 나머지는 ." 

 

대종사라는 인물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뒷말은 들으나마나 상관없는 일이리라.

 

 

구태여 말한다면 불필요한 인물은 제거한다는 뜻이리라. 

 

 

대체 어떤 곳일까? 이곳도 인간세상일까? 

 

우르르르 꽈르르릉! 

 

개벽(開闢)하는 소리보다도 엄청난 굉음(轟音)이 동굴 안을 뒤흔들었다.

 

 

거기에 휘이이이!

 

열사(熱砂)의 사막에서 뿜어지는 기류처럼 일대열풍(一大熱風)이 모든 것을 휘감고 있었다.

 

 

두툼한 지책(紙冊)이 삽시간에 재가 되고 말 정도로 엄청난 열기를 품은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바람 소리에 묻혀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 

 

"크으으 !" 

 

"아아악, 차라리 죽 죽여 주십시오. 마인루주님!" 

 

음양마동의 내부.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만 같은 열풍 속에 고통을 못 이겨 버둥버둥거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그 중에는 젖가슴이 여인답게 봉긋하게 발육하기 시작한 소녀도 있고, 코 아래 수염이 나기 시작한

 

조숙한 소년도 있었다. 

 

피부는 이미 타서 허물을 벗고, 그 위에 다시 물집이 잡혔다.

 

모발 또한 완전히 타서 재가 된 상태였다.

 

 

가히 초열지옥의 형벌을 연상케 하는 끔찍한 장면이었다. 

 

휘류류류류 ! 

 

지옥의 화염(火焰)은 가차없이 소년소녀들의 몸을 유린했다.

 

 

어른도 견딜 수 없는, 내공이 삼십 년 수위 아래라면 한 시진을 버티지 못하고

 

타서 죽을 지독한 열기인데 그 안에 있는 아이들은 달랐다. 

 

벌써 보름째, 그들은 악착스레 살아남고 있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인내심(忍耐心)으로, 어떤 아이는 내공법(內功法)을 이용해,

 

그리고 몇몇은 이곳이 지옥굴(地獄窟)이 아니고 자신의 거실인 양 의젓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아이들 중에서도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서성이는 아이들 수는 열 정도였다.

 

 

그들은 백 명의 아이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아이들이었다. 

 

'일호(一號)> 

 

'사백칠호(四百七號)' 

 

'오백호(五百號)' 

 

'일천호(一千號)' 

 

그렇게 숫자(數字)로 불리는 네 명의 아이들은 남다른 데가 있어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가운데

 

악마의 열풍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일천호는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벽(壁)을 보고 있었다.

 

 

면벽하는 노승(老僧)처럼, 붉게 달아오른 벽 위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다. 

 

그의 손에 죽어간 무수한 동갑내기들.

 

 

그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며 자신을 향해 지르던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그의 뇌리(腦裡)를 때리고 있었다.

 

 

그 얼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일천호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는 혈부를 나온 이후 아주 다른 아이가 되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고 눈빛을 애써 숨기는 신비한 아이가 된 것이다. 

 

일천호는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자책감으로 인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나의 마음 속에 그런 흉성(兇性)이 있는 줄 몰랐다니 내가 속으로 친근하게 여기던 아이들을

 

내 손으로 죽였어.

 

 

구백구십구호도 구백구십팔호도 모두가 내 손으로 죽여버리다니!' 

 

그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음양마동 안이 화로같이 뜨겁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니리라. 일천호는 이미 수화불침지신(水火不侵之身)을 갖고 있었다.

 

그가 땀을 흘리는 이유는 괴로운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굴은 비명소리와 신음소리를 가려버리는 바람 소리,

 

그리고 만물을 태워버릴 듯한 열기만이 가득했다.

 

 

가히 혼백을 제련하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일천호는 면벽하는 가운데 시간을 보냈다.

 

 

무정세월, 그것은 그냥 그대로 쉬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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