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실명대협

서장

오늘의 쉼터 2014. 6. 18. 16:59

 

제1권

 

 

第 一 幕 (서장) 

 

 

 

백도(白道)와 마도(魔道)! 

 

수천 년 내내 대치한 인간무림계(人間武林界)의 두 흐름. 대체 그것은 무엇인가? 

 

특히 백도는 어떠한 것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무엇이 백도인가를 말하는 쪽이 쉬울 것이다.

 

 

우선 구전(口傳)되거나 비급(秘級)으로 전해지는 절기(絶技)들을 제일 먼저 꼽아야 하리라. 

 

'소림비전(少林秘傳) 금강수미무적신공(金剛須彌無敵神功)' 

 

그것은 이제 세상에서 사라진 광음공공(光陰空空)의 비기(秘技)의 재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오막측한 광세기공(曠世奇功)이었다.

 

그것은 정종불가무공(正宗佛家武功)의 정화(精華)로 만마(萬魔)가 그 앞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무당비전(武當秘傳) 태청보록(太淸寶錄)' 

 

장삼풍(張三豊) 조사(祖師)의 천뢰진경(天雷眞經) 이후 가장 빼어나다는 도가(道家) 최고수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금석(金石)을 두부와도 같이 으스러뜨리는 위력을 지닌 현문선천강기(玄門先天?氣)이기도 했다.

 

 

마공(魔功)은 그 푸른빛 기류 아래 여지없이 흐트러지고 마는 것이다. 

 

'전진파(全眞派) 허중쇄월지력(虛中碎月指力)'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는 지공(指功)으로 십 장 밖의 순강(純鋼)에 동전만한 구멍을 뚫는 수법이다.

 

 

그것은 마도무림의 호신강기를 산산이 박살낸다. 

 

'사천당가(四川唐家) 만천호접표(滿天蝴蝶飄)' 

 

이것은 절기가아니라 나비 모양의 암기(暗器)이다. 그러나 지극히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도검(刀劍)으로도 잘리지 않는다.

 

 

게다가 날아드는 만천호접표는 장력으로 물리치려 하면 나선형으로 방향을 틀어 더욱 빨리 들이닥친다.

 

 

거기에 독분(毒粉)이라도 바른다면 그 위력이야말로 필설로 형용치 못할 수준이 되지 않겠는가? 

 

'소림사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 

 

그것은 절기도아니고 암기술도 아니었다. 철저한 수비를 바탕으로 하는 진세(陣勢)였다.

 

 

그것은 펼쳐지는 형태조차 비밀이었다.

 

 

그러나 그 진식으로 인해 뜻을 꺾어야만 했던 흑도거마(黑道巨魔)의 수가 수백에 달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백도의 수호절기로 삼아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대항마복룡진(大降魔伏龍陣)' 

 

백도구절기(白道九絶技) 중 최고라 일컬어지는 것으로 그것도 하나의 진세였다.

 

 

구백 명의 고수들에 의해 사상(四象), 육합(六合), 팔괘(八卦)가 뒤엉키고 거기에

 

삼재복룡(三才伏龍)이 뒤엉켜 시전되는 개세의 대진세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천하는 여러차례 피로 씻기워졌을 것이다. 

 

천외천혈마(天外天血魔), 풍운마검방주(風雲魔劍幇主), 혈루회주(血淚會主),

 

혈수광마웅(血手狂魔雄) 등 백도구절기에 의해 사라져야 했던 거마들은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 외에도 아미진전(峨嵋眞傳) 강룡복마인(降龍伏魔印), 개방 대환환취영비급(大幻幻醉影秘級),

 

무산(巫山) 신녀곡(神女谷) 비전수(秘傳手) 공공난무신녀공(空空亂舞神女功) 등이 백도구절기에

 

꼽혔다. 

 

그러나 이들 절기들이 바로 백도를 말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인간을 제외하고 백도를 말하겠는가? 

 

지주(支柱)! 

 

백도계 사람들은 백도를 수호하는 거성(巨星)들을 지주라 불렀다.

 

 

노명숙(老名宿)과 장로(長老)들, 태산북두로 인정받는 정의파의 영웅들 그중에도

 

유독 빼어난 여섯 개의 기둥이 있었다. 

 

이름하여 육대지주(六大支柱)! 

 

당세 백도무림계는 그들이 존재함으로 해서 마(魔)를 꺾을 수 있었다. 

 

'소림사 정각대선사(淨覺大禪師)' 

 

그는 불도대종사(佛道大宗師)이다. 어서부터 곡기(穀氣)를 끊고 살아왔으며 불학(佛學)에 통달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과 벌근세수경(伐筋洗髓經)을 위시한 진산칠십이종절예

 

(鎭山七十二種絶藝)로 꽉 차 있어 가히 소림사의 걸어다니는 장경각(藏經閣)이라 불릴 정도였다. 

 

'무당(武當) 태청백우자(太淸白羽子)' 

 

'전진파(全眞派) 건곤금령자(乾坤金玲子)' 

 

이 두 사람은 도가쌍기(道家雙奇)이며 동시에 천하쌍자(天下雙子)로 불렸다. 무공보다 인품,

 

그리고 도량(度量)이 천하의 표본이 되어 천하만인이 그들을 활선(活仙)으로 존경했다. 

 

'뇌전신개(雷電神?)'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었다.

 

백도에서는 그에게 동의총순찰(同義總巡察)이라는 지위를 주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개방총수로 수천 명에게로 가는 비합전서구(飛?傳書鳩)를 도맡아 처리한다. 

그는 이제껏 한 번도 자리에 누워 잠자지 못했다.

 

 

그가 가장 바쁜 이유는 바로 그가 구백 명으로 이루어지는 대항마복룡진을 발동시키는

영기주인(令旗主人)이기 때문이었다. 

 

'구유회혼자(九幽廻魂子)' 

 

살아 있는 화타(華陀), 죽은 편작(扁鵲)의 부활체라 불리는 무림신의(武林神醫)이다.

 

 

그는 백골에 살을 붙이는 의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평생의 숙원으로

 

금강대환단(金剛大丸丹)의 연단에 심취해 있다. 

 

또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의술을 베푸는 자비스럽고 덕성 좋은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구유회혼자마저도 언제나 상석을 양보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 

 

머리를 털면 일천만종(一千萬種) 약방문(藥方文)이 비듬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지는

 

절대신의가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 대체 그는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억조창생이 그를 신(神)으로 여기는 것인가? 

 

'무림제일주(武林第一柱)'! 

 

그는 무림에서가장 거대한 기둥이라고 불렸으며 무림동의맹(武林同義盟)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그는 살아 있는 제갈공명이고 백도의 법전(法典)이었으며 살아 있는 자(尺)였다.

 

 

한 마디로 위대하다고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천하 모든 사람들이 숭앙해 마지않는 사람,

 

그리고 마도(魔道)를 걷는 사람이라면 꿈에서도 찢어 죽이고 싶어할 정도로

 

치를 떠는 마도의 천적, 뜻하는 바는 모조리 이루어내는 사람! 

 

그는 바로 쌍뇌천기자(雙腦天機子)라 불리는 자였다. 

 

그는 단목유중(檀木儒仲)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도 항상 쌍뇌천기자라 불렸다.

 

 

천기석부(天機石府)에 기거하는데도 사람들은 언제나 그가 자신의 바로 곁에 있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위명과는 달리 쌍뇌천기자는 항상 겸손했다.

 

 

남들이 자신을 보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면 얼른 달려가 일으키며, 

 

'나는 남다를 바 없는 사람이지요. 허헛 .' 하며 홍안(紅顔)의 소년같이 웃곤 했다. 

 

일백만협사(一百萬俠士)가 아버지라고 여기는 사람, 백도의 대흥(大興)을 위해 자신마저도 버린 사람! 

 

그가 없었다면아니, 그의 천재적 계략이 없었다면 백도는 지리멸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쌍뇌천기자가 더없이 바빠졌다.

 

 

수천 장의 동의첩(同義帖)이 그의 손에서 떠났고, 암중에 일천고수가 숭산의 소실봉에 모였다. 

 

최근에 일어난천여 건의 혈사(血事) 때문일까?

 

아니면 누구도 모르는 백도의 첩자, 동의대호법(同義大護法)이 마도에 잠입시킨

 

그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려왔기 때문일까? 

 

백도와는 상반된 길을 걷는 마도(魔道)!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파괴뿐이었다.

 

 황금과 색(色), 그리고 패권(覇權) 그 모든 것이 파괴로 이어진다.

 

 

그러한 연유로 그것에 머물면 인간이 아니라 마(魔)로 불린다. 

 

핏빛 꿈에 젖어 사는 악(惡)의 씨앗인 그들에게도 한 가지 바라는 일은 있었다. 

 

마도인들이 마지막에 가서 죽는다는 설산(雪山)의 비밀묘(秘密墓)인 고금대마총(古今大魔塚)! 

 

일컬어 구마루(九魔樓)라 불리는 그곳을 참배하는 일을 무한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魔)의 바람은 영원히 잠들지 않는다. 언제고 번개가 되고 피비(血雨)가 되어 세상을 몰아치리라! 

 

가자, 마도인들이여!

 

그대들의 핏빛 꿈이 잠들어 있는 구마루를 향하여! 

 

고금대마총이 깨어지는 날 한 마리 혈붕(血鵬)이 날아오르며 구주팔황(九州八荒)이 온통 피에 물들리라!

 

 

 

 

 

 

 

 

第 二 幕 (서장)

 

 

핏빛보다 더 붉은 노을이 타고 있다. 

 

불문의 성지라여겨지는 소림사를 자락에 품고 있는 숭산은 타오르는 화마(火魔)에 잠긴 듯

 

발갛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소실봉(少室峯)의 정상. 

 

언제부터인가 미간(眉間)을 찌푸린 채 우뚝 서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연륜(年輪)을 상징하는 흰 수염과 내천(川)자의 주름살에 고뇌(苦惱)의 빛을 가득 드리운

 

그는 바로 무림제일주 쌍뇌천기자였다. 

 

타오르는 노을속에 언제까지나 움직일 것 같지 않던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그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 어이해서 아직 오지 않는단 말인가?

 

설마 비합전서구(飛?傳書鳩)를 날린 다음 정체가 발각되어 제거되었단 말인가!" 

 

천하제일지혜(天下第一智慧), 만사통(萬事通)의 무소부지(無所不知)인

 

그에게도 어떤 모르는 것이 있었단 말인가?

 

 

쌍뇌천기자는 그 한 마디를 내뱉고는 깊이 침잠한 시선을 들어 서천(西天)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베어버릴 듯한 기개(氣槪)로 날이 서 있는 소실봉. 소림사(少林寺)는 정상으로부터

 

멀지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 경내에는 지난 며칠 전부터 중무장을 하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일천고수(一千高手)들이

 

있었다. 

 

'무림동의지맹(武林同義之盟)'! 

 

천하를 받치는기둥(柱)인 무림동의지맹을 사람들은 동의맹(同義盟)이라 약칭했다.

 

 

소림사는 바로 그 동의맹의 총타(總陀)였다. 

 

사흘 전, 동의맹십맹주(同義盟十盟主)의 만장합의(滿場合義)나, 동의대호법(同義大護法)의 요구에

 

의해서만 발휘되는 무림첩이 동의맹의 일천호사(一千護士)들에게 발송되었고,

 

그에 따라 총타인 소림사에서 대집회가 이룩된 것이다.

 

 

한데 삼산오악(三山五嶽) 구류백파(九流百派)에서 모인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무림첩이

 

발부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일천호사가 모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수뇌부(首腦部)의 몇 사람에 국한되었다. 

 

'으으, 음! 그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는 한, 일이 이렇게 미루어질 수 없다.' 

 

땅이 꺼지는 듯한 장탄식(長歎息)이 동의대호법 쌍뇌천기자의 입에서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그는 여전히 함몰되어가는 노을빛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아, 혈루지회(血淚之會)의 잔당(殘黨)이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단 말인가!' 

 

그의 한숨은 바로 무림백도(武林白道)의 한숨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이해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 . 

 

노을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초경(初更)이 되었을까? 

 

그때 돌연 피이이잉! 하는 향전음(響箭音)이 만학천봉(萬壑千峰)에 소성(嘯聲)을 남기며

 

정적(靜寂)을 깨뜨렸다.

 

 

그와 함께 분분한 외침소리도 터져 나왔다. 

 

"적(敵)이다." 

 

"잠입자(潛入者)다. 막아라!" 

 

"어서 나한진(羅漢陣)을 펴 포위하라!" 

 

"붕괴된 혈루회(血淚會)의 잔당(殘黨) 중 서열(序列)이 이위(二位)인 귀영마수라(鬼影魔修羅)다!" 

 

휙! 휙! 휙! 소림사의 경내로부터 속인(俗人)과 무도승들이 재빨리 뛰쳐나오며 잠입자를 저지할

 

태세를 갖추었다. 

 

"으으 막지 마시오. 나를 막아 시간이 지체되면 으으 백도가 위태하오." 

 

서쪽 기슭에서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피를 낭자하게 흘린 채 비틀거리며

 

소림사 쪽으로 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오척단구(五尺短軀)의 청염노인(靑髥老人), 그는 한 손으로 복부를 움켜쥐고 있었다.

 

 

한데 배를 움켜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뭉클뭉클 핏덩이가 쏟아져 나오며

 

누런 창자가 내비치고 있지 않는가?

 

 

그는 복부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허공을 스쳐지나가는 속도는 가히 섬전(閃電)이었다. 

 

"서라!" 

 

"무슨 잔꾀를 부리려느냐?

 

네놈 귀영마수라(鬼影魔修羅)는 이미 동의맹이 정한 공적명단(共敵名單)에 들어 있다.

 

 

보이는 순간 쳐죽여도 살인자(殺人者)라 할 사람이 없을 정도란 말이다!" 

 

동의맹의 대집회장을 수비하던 무사들이 눈을 부라리며 귀영마수라라 불린 잠입자를 포위해 들었다.

 

 

그들이 막 공세를 취하려 할 때 갑자기 데에엥! 신종성(神鍾聲)이 울리며 그들의 모든 동작을

 

일시에 멈추게 했다. 

 

"맹, 맹주(盟主)!" 

 

"어이해 이곳까지!" 

 

무사들은 종을치며 다가선 사람을 보고 모두 오체복지(五體伏地)에 들어갔다. 

 

휘이이-! 바람에 날리는 깃털과도 같이 능공허도(凌空虛渡)란 신법(身法)으로 경외심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는 무사들에게 다가 서는 금색가사(金色袈娑)차림의 노승(老僧)이 있었다. 

 

정각대선사(淨覺大禪師). 

 

소림사의 현임방장(現任方丈)이자 무림동의맹의 제일맹주(第一盟主)인 그였다. 

 

그의 바로 뒤에는 자포노인(紫袍老人) 하나가 동행하고 있었다.

 

 

바로 방금 전까지 소실봉의 정상에서 장탄식을 흘리던 쌍뇌천기자였다.

 

 

그는 향전음을 듣자마자 어기비행술(御氣飛行術)로 질풍(疾風)같이 움직여

 

정각대선사와 더불어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들이닥친 것이었다. 

 

"어찌 되었오?" 

 

쌍뇌천기자는 벌써 부상당한 잠입자를 부축하고 있었다. 

 

정말 놀랍지 않는가?

 

나타난 자는 백도의 공적인데 두 사람은 죽마고우(竹馬故友)같이 친근해 보이니! 

 

"겨, 겨우 알아냈소이다!" 

 

귀영마수라는 칠공(七孔)으로 검은 피를 줄줄 쏟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는 마수인(魔手刃)이라는 마공(魔功)에 당해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꾸고,

 

피가 썩는 중상(重傷)을 입은 것이다.

 

 

그런 몸으로 천리(千里)를 달려왔으니 아직 말을 할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무 무엇인가를 모으고 있소.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나 으으 마도의 이십팔숙(二十八宿)

 

그리고 일천폭풍혈건대(一千暴風血巾隊)가 지난 반 년(半年)간 비밀리에 꾸민 것으로 보아

 

보통 일은 아니오. 분쇄(粉碎)해야 하는 일이오!" 

 

귀영마수라는 끊어지려 하는 의식을 겨우 이어가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들이 모 모이는 장소는 비조 평(飛鳥坪)이라는 곳이오." 

 

"비조평? 남안탕(南雁蕩)의 비조평 말이오?" 

 

쌍뇌천기자가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 그렇소. 나는 그것을 알아낸 직후 혈 혈수광마웅(血手狂魔雄)에게 당했소. 겨우 여기까지 왔소." 

 

귀영마수라는 목소리를 길게 끌다가 의식을 잃었다. 

 

"고맙소!" 

 

쌍뇌천기자는 실신한 귀영마수라를 내려다보며 진심이 담긴 어조로 뇌까렸다. 

 

그때, 한 사람이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은 고맙다는 말보다 한 알의 구전신단(救轉神丹)이 이사람에게 더 필요할 것이오, 천기자(天機子)." 

 

손에 금빛 단약(丹藥)을 든 노인, 그는 바로 동의맹 약왕전주(藥王殿主)인 구유회혼자(九幽廻魂子)였다.

 

 

그는 귀영마수라에게 단약을 먹이면서도 몹시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귀영마수라는 마도거효(魔道巨梟)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본맹(本盟)의 첩자(諜者)이었을 줄이야 !' 

 

기실 지금 혼절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귀영마수라는 대흉마(大兇魔)로 소문난 위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겉보기 신분일 뿐 그는 오래 전부터 동의맹의 첩자로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구유회혼자는 귀영마수라에게 단약을 으깨어 먹인 후 쌍뇌천기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쌍뇌천기자는 정각대선사와 더불어 무엇인가를 혜광심어(慧光深語)로 급히 논의하는 중이었다. 

 

이각(二刻) 후, 소림사 대웅전 앞. 

 

사흘 전 모인 일천호사 중에서 단 오십(五十) 명만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세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경공술(輕功術)에 특히 강하다는 것, 둘째는 내공이 노화순청(爐火純靑) 수준 이상에

 

이른 사람들이라는 것, 셋째는 모두 역전노장(歷戰老將)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쌍뇌천기자 앞에 시립하고 있었다. 

 

"지리멸렬된 마도계는 최후의 발악으로 한 가지 대사건을 꾀하고 있었소." 

 

쌍뇌천기자가 심각한 투로 중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 낌새는 오래 전에 알았으나 정작 그 일이 무엇인지 몰랐고 현재도 모르고 있소." 

 

" !" 

 

장내는 물뿌린듯 고요했다. 가히 묘 속과 같이 적막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쉬운 대로 일이 꾸며지고 있는 장소를 알 수 있었소. 바로 비조평이 그 장소요.

 

거기에서는 필경 백도의 존망(存亡)을 좌우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오." 

 

존망이라는 말이 모두를 심각하게 했다. 

 

쌍뇌천기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쉬지 않고 거기 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라면 그곳 비조평까지 쉬지 않고 가더라도 지치지 않을 것이외다." 

 

"그곳에 가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중인들 중 하나가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엇이든 현재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철저히 파괴(破壞)해야만 하오." 

 

쌍뇌천기자는 말을 마치고 턱끝을 가볍게 끄덕였다. 

 

직후, 스스슥! 열 명의 남색 옷을 걸친 미동(美童)들이 쌍뇌천기자의 뒷편에서 빠른 속도로

 

미끌어져나와 시립해 있는 동의맹 특급고수(特級高手)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미동들은 각기 다섯 개씩의 금낭을 지니고 있다가 특급고수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이것을 지니십시오." 

 

"이것은 ?" 

 

"준비물입니다." 

 

고수들이 금낭을 받아들고 의아해 하며 묻자 미동들은 짧게 답했다. 

 

금낭 안에는 주먹만한 철구(鐵球) 열 개, 나비모양의 비표 다섯 개,

 

그리고 한 봉지의 미혼산(迷魂散)이 들어 있었다. 

 

'신화탄(神火彈)까지?' 

 

'으음, 사천탕가(四川唐家)의 만천호접표(滿天蝴蝶飄)를 다섯 개씩이나 써야 할 일이라니 .' 

 

'대체 무슨 일이기에 .' 

 

고수들은 금낭안의 물건을 확인하고 몹시 긴장했다.

 

그들을 지켜보는 쌍뇌천기자의 안색도 그리 좋은 편은 못 되었다. 

 

주위는 벌써 어둠 속에 깊이 침잠해 들고 있었다.

 

이제 삼라만상이 잠에 들어야 할 시간인데, 

 

"떠나시오!" 

 

쌍뇌천기자의 일갈(一喝)이 적막한 산사의 밤을 흔들었다.

 

그의 명(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휘휙! 휙!

 

오십 명이 동시에 어둠을 뚫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어떤 사람은 제운종(蹄雲踪)으로, 어떤 사람은 칠금신법(七禽身法) 중 연비식(鳶飛式)을 시전했다.

 

 

그들의 신법은 각기 달랐다.

 

 

비룡행공(飛龍行功), 제운종(蹄雲踪), 암향표(暗香飄), 일위도강(一葦渡江),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등등 . 

 

대체 무얼 위해 쌍뇌천기자는 오십이나 되는 특급고수를 이 야심한 밤에 비조평으로 급파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꾸민 쌍뇌천기자도 그들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를 것이다.

 

 

 

 


 

第 三 幕 (서장)

미인의 눈썹을 닮은 편월(片月)이 교교스런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달빛 아래 태고의 정적을 품은 듯 광막한 원시림의 수해(樹海)가 검게 펼쳐져 있었다. 

 

그 원시림(原始林)을 오십 리(五十里)나 헤치고 가야 이를 수 있는 곳에 비조평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잠들어 있을 이 시각에 그곳에서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떠나라!" 

 

초원의 어둠이소스라쳐 깨어날 정도의 음산한 마음신후(魔吟神吼)와 함께 끄륵! 끄륵!

 

새의 울음이 일며 날개 길이가 이 장(二丈)에 달하는 금색마조(金色魔鳥) 이십 마리가 일제히

달빛을 뚫고 날아오르지 않는가? 

 

금색마조의 등에는 안장(鞍裝) 비슷하게 얹혀진 목갑(木匣) 하나씩이 있을 뿐 사람들은 타고 있지

않았다.

 

 

스무 마리 수리는 긴 울음소리를 토하며 구중천(九重天)으로 날아올랐다.

 

 

그 일대장관을 달빛마저 가려진 지상(地上)에서 핏빛 쌍수(雙手)를 지닌 사람 하나가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술을 비집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흐 사십구차(四十九次)도 무사히 끝난 셈이다.

 

이제 제오십차(第五十次) 구마루행(九魔樓行)만이 남았다." 

 

그는 핏빛의 두 손과 어울리는 아주 시뻘건 눈빛을 하고 있는 백발노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뒷쪽으로는 스무 명의 황의고수가 시립해 있었다.

 

 

그들은 몹시 지친 듯 모두 땀으로 옷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들은 하나같이 만족한 것이었다.

 

 

특징이라면 이마에 혈건(血巾)을 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폭풍혈건대(暴風血巾隊)' 

 

그들은 수년 전, 혈루회(血淚會)가 무너지지 않았을 때만 해도 강호를 질타(疾打)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이 없어진 최근 들어서는 백도에 잡혀 죽을까봐 신표(信標)인 혈건조차

 

이마에 두르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흡사 유적(幽寂)과도 같았다.

 

거기에 끈끈한 땀의 열기(熱氣)와 갈망(渴望)하는 눈빛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세히 살핀다면 어딘지 모르게 허탈함이 깃든 표정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일순 우두머리되는 노인이 뒤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수고했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노인은 포권지례(抱拳之禮)를 한 다음,

 

이십 인의 폭풍혈건대원들을 향해 아주 천천히 땅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지위에 있어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는데 상전이 하수(下手)에게 무릎을 꿇다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회 회주(會主)!" 

 

이십 폭풍혈건대는 모두 눈물을 글썽였다. 

 

"속하(屬下)들은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희 사십구조(四十九組)가 모셔온 후예(後裔)들이 무사히 구마루(九魔樓)로 가시어

 

장차 마도천하의 초석(礎石)이 되기를 학수고대하는 지옥귀신(地獄鬼神)이 되겠습니다!" 

 

"죽어서도 마도에 충성합니다! 멸구(滅口)됨은 긍지입니다. 회주시여!" 

 

파팍! 말을 마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들의 천령개(天靈蓋)를 깼다.

 

장내는 일시에 쏟아진 뇌수(腦髓)와 낭자한 선혈(鮮血)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십 인(二十人)은 찰나지간에 자결시(自決屍)가 되고 말았다. 

 

" !" 

 

백발노인은 그제서야 몸을 폈다.

 

그는 품을 뒤져 약병(藥甁) 하나를 꺼냈다.

 

 

마개를 따고 기울이자 아주 미세(微細)한 황색 분말(黃色粉末)이 비(雨)처럼 뿌려지며

 

천령개를 깨고 자결한 폭풍혈건대의 시신을 모두 녹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뼈와 살을 순식간에 녹여버리는 화골사(化骨砂)였다.

 

 

잠깐 동안 스무명의 시신은 화골사에 녹아 흔적이 없어졌고 구깃구깃한 옷가지만이 덩그라니 남았다. 

 

한데, 아아 ! 그곳의 주위에는 이미 무수한 옷가지가 널려 있질 않은가?

 

수백 벌의 파의(破衣)는 자세히 세어본다면 구백팔십 벌이라는 것을 알리라.

 

 

그렇다면 벌써 구백팔십 명이 이곳에서 죽어갔단 말인가?

 

 

정녕 경천동지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한 번만 더 성공을 하면 된다. 훗훗, 변절자(變節者) 귀영마수라가 동의맹에 불었다 해도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수리가 날아가는 곳을 아는 사람은 중원천하(中原天下)에 없다." 

 

노인은 중얼거리며 까만 점으로 화해 날아가는 수리들을 바라보았다. 

 

'사흘 후 자시(子時)에 수리가 올 것이고, 마지막 폭풍혈건대(暴風血巾隊) 이십 명이 가장 먼

 

청해성(靑海省)에서 기재(寄才) 이십 명을 데리고 올 것이다.' 

 

그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사흘 후, 남안탕산(南雁蕩山) 기슭으로 들이닥치는 일단의 무림고수들이 있었다. 

 

"흩어집시다!" 

 

"포위하며 다가가야 하오. 들키면 안 되니까 모두 조심하시오." 

 

자시(子時)의 하늘은 완전한 흑야(黑夜)였다.

 

 

 달(月)도 없는 밤하늘,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서 뿜어내는 고수들의 혁혁한 정광(精光)뿐이었다. 

 

스슥! 오십 개의 화살이 흩어지듯 남안탕산의 오지(奧地) 비조평을 넓게 포위해 가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신법은 놀랄 만했다.

 

그 중 유독 두드러지는 두 사람이 있었다. 

 

대추빛 붉은 얼굴을 한 노도장(老道長)과 언제나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중년문사(中年文士).

 

 

두 사람은 야유(夜遊)하는 사람들 마냥 한가로웠다.

 

 

그러나 그들의 신법은 가장 쾌속(快速)했다. 

 

이십 리 정도 갔을까? 

 

노도장이 전음입밀(傳音入密)로 자신과 나란히 달리고 있는 중년문사에게 물었다. 

 

"신품소요객(神品逍遙客), 어디 가서 무엇을 훔쳐먹었기에 경공(輕功)이 노납만 한가?" 

 

"핫핫, 과연 곤륜(崑崙) 상취도장(常醉道長)의 눈은 못 속이겠군요?" 

 

신품소요객이라 불린 중년문사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의 풍류남아(風柳男兒)답게 뭇여인들을

유혹할 만한 음색(音色)으로 말했다. 

 

"흠, 그간 기연(奇緣)이 있었던 게로군." 

 

상취도장이 궁금한 듯 곁눈질로 신품소요객을 훑어보며 말을 던졌다. 

 

"동의지회(同義之會)에 참가하라는 밀첩(密帖)을 받고 오던 중 기련산중에서 영약을 얻었지요." 

 

"영약이라 지난 번에 비해 내공이 일갑자(一甲子)는 증가한 듯하니 보통 물건은 아닌 듯한데?" 

 

상취도장은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 눈매를 더욱 가늘게 떴다.

 

 

그 바람에 신품소요객은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솔직히 털어놓고 말았다. 

 

"하핫, 인형설삼(人形雪蔘)입니다!" 

 

"이거 정말 부러운데? 이러다가는 말석(末席)이나 차지한 제십맹주(弟十盟主)의 지위를

 

신품소요객에게 도적질당하겠어." 

 

상취도장은 못내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신품소요객을 바라보았다.

 

 

그런 상취도장의 의중을 읽기라도 한 듯 신품소요객이 넌지시 운을 떼었다. 

 

"핫핫, 반 뿌리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아니, 놀기 좋은 장소 몇 곳만 일러주시면 대가로 그것을 드리겠습니다." 

 

"제길 꿍꿍이 속이 있어 반을 남긴 것이었구먼." 

 

상취도장은 멋쩍어 하며 쓴입맛을 다셨다.

 

 

둘은 이토록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친숙한 사이였다.

 

 

하여간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빨리 몸을 날렸다.

 

 

상취도장은 천하지리(天下地理)에 능통한 사람답게 지름길을 잘알고 있었다. 

 

때는 자시(子時)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 무렵 상취도장과 신품소요객은 비조평 가까이 다다르고 있었다.

 

 

그때 돌연, 휘휙! 휙! 하는 파공성(破空聲)이 어두운 허공에서 들려왔다. 

 

"어엇?" 

 

"아니, 수리 떼가 ?" 

두 사람은 멈춰서며 파공성이 들린 하늘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거대한 스무 마리의 수리 떼가 화살이 하늘을 가르듯 날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취도장의 입에서 먼저 놀람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저것은 백년 전에 죽은 천외천혈마(天外天血魔)가 부리던 금색마조네!" 

 

"금색마조 !" 

 

신품소요객도 덩달아 놀람의 외침을 터뜨렸지만 상취도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품속에 손을 밀어넣고 있었다. 

 

끄윽! 끅! 금색마조는 위기감을 느낀 듯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날개짓 한 번에 벌써 수십 장을 날아올랐다.

 

 

 

깃털이 은은한 금채(金彩)를 발해 하늘이 온통 금빛으로 물드는 순간, 

 

"차아앗!" 

 

"핫핫, 저도 암기술(暗器術)을 쓸 수밖에 없군요!" 

 

상취도장과 신품소요객의 손이 동시에 떨쳐지며 화탄(火彈)과 호접표,

 

그리고 독분(毒粉)이 든 봉지가 수리들을 향해 떠올랐다.

 

 

하지만 수리 떼는 너무도 높은 곳에 있었다. 

 

직후 콰쾅!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화탄이 터지며 하늘이 화광(火光)에 젖었다. 

 

"젠장, 이럴 때가 아니야. 금색마조가 나섰다는 것은 우리들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금면마종사(金面魔宗師)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상취도장은 결과가 어찌되었는지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비조평 쪽으로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 순간 신품소요객이 허공을 가리키며 외쳤다. 

 

"한 마리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비장의 소요무(逍遙舞)로 바람처럼 날아올랐다.

 

 

상취도장이 동작을 멈추고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구슬픈 비명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금색마조 한 마리를 신품소요객이 품에 안듯 받아들고 있었다. 

 

금색마조의 몸체에는 다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눈빛만이 술에 대취(大醉)한 것처럼 흐리멍텅했다. 

 

끼르르 륵 . 

 

금색마조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와 때를 맞춰, 

 

"아아앙!" 

 

마조의 등에 묶인 나무갑 안에서 구슬픈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나지 않는가! 

 

예기치 않았던상황에 두 사람은 멈칫 서로를 바라보다 나무갑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엔 태어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 하나가 붉은 포대에 싸여 누워 있었다.

 

 

상자는 조금 깨어졌고 아이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아이라니?" 

 

신품소요객이 놀랄 때, 

 

"흠, 불쌍하게도 죽게 되었군. 쯧쯧, 눈망울로 보아 아주 총명하게 생겼는데 ." 

 

상취도장이 나무갑 속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안스럽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아이의 머리에는 화탄의 파편에 맞은 듯 큰 상처가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포대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몸뚱이는 급작스럽게 청색(靑色)으로 물들어 갔다. 

 

" ?" 

 

순간, 죽어가는 아이를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상취도장의 시선이

 

아이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발견하고는 이채를 발했다.

 

 

은사(銀絲) 목걸이에는 가슴 쪽에 얄팍한 동패(銅牌) 하나가 걸려 있었다. 

 

동패의 표면에는 '일천번(一千番)'이라는 숫자가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아아, 아이인 줄 알았다면 손을 쓰지 않았을 텐데 ." 

 

마음이 약한 신품소요객은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여인과 노약자는 절대 죽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상취도장은 그의 마음을 아는 듯 그의 어깨를 쥐며, 

 

"하는 수 없는 일이었지 않았는가? 자, 어서 가세.

 

금색마조가 비조평에서 떠올랐다면 그곳에는 마의 집단이 있는 게 틀림없지 않은가?

 

가서 그들을 분쇄하다 보면 기분이 풀어질 것이네." 

 

" ." 

 

상취도장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지만 신품소요객은 아이에게서 눈빛을 거둘 줄 몰랐다. 

 

"허허, 마음이 크게 상한 모양이군." 

 

상취도장은 너털웃음을 짓다가는 아이에게서 눈을 뗄 줄 모르는 신품소요객의

 

모습을 보고는 의아해 했다. 

 

'무슨 일이지?' 

 

그도 나무갑 안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벌써 울음을 그친 아이의 눈이었지만 그것은 세상의 온갖 것을 빨아들일 듯한

 

순진무구함을 담고 있었다.

 

 

실로 그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신품소요객을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 너무도 신비(神秘)하다.' 

 

상취도장도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애써 몸을 틀었다.

 

 

그는 일부러 질끈 눈을 눌러 감았다. 

 

'이토록 순진무구한 생명을 빼앗다니 씻지 못할 죄악이다!' 

 

그는 죽어가는아이로 인해 다리가 후들거리는 이상한 허탈감을 느껴야 했다.

 

 

무너뜨려서는 안 될, 해쳐서는 안 될 고귀한 것을 해친 기분이랄까?

 

 

모든 것이 정지된 듯했다. 

 

상취도장이 자책감에 빠져있을 때 어디에선가 선향(仙香)이 일어나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앗 .' 

 

상취도장은 향기가 나는 곳을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신품소요객이 동자(童子)를 닮은 유백색의 설삼(雪蔘) 반 뿌리를 아이의 입에 넣어주고 있지 않는가! 

 

"아이야, 미안하다. 이것으로 죄를 씻겠다." 

 

신품소요객은 처연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그 순간에 '일천번(一千番)'이라는 동패를 건 아이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떠오름을 신품소요객은 느꼈다.

 

 

필설로는 형용치 못할 신비였다. 

 

"하하핫!" 

 

그는 웃으면서상취도장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도장에게 반 뿌리 인형설삼을 선사하지 못해 죄송스러우나 이 아이를 우리 두 사람의

 

공동전인(共同傳人)으로 소요문(逍遙門)과 곤륜파(崑崙派)의 의발전인(依鉢傳人)으로

 

삼으면 보상되겠지요?" 

 

"말이 틀렸네!" 

 

상취도장은 신품소요객의 의중을 간파한 듯 저으기 손을 내저었다. 

 

"예?" 

 

신품소요객이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자 상취도장이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소요문과 곤륜파가 아니라 곤륜파와 소요문이야. 알겠나?" 

 

"핫핫, 이 아이에게 벌써 반하셨군요. 저와 같이 ."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이 통하자 흡족한 웃음을 만면에 가득 지었다.

 

 

그들이 부드러운 얼굴로 대화할 때 돌연 숲의 앞쪽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혈수광마웅(血手狂魔雄)이다!" 

 

"혈루회주(血淚會主)가 나타났다!" 

 

그것은 상취도장과 신품소요객이 지체한 사이 그들을 앞질러 갔던 동의맹 소속 고수들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그 외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꽈르릉! 펑! 하는 벼락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숲속의

 

여기저기서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혈루회주가 살아 있다고 !" 

 

"이럴 때가 아닙니다!" 

 

상취도장과 신품소요객은 너무도 놀라 소리난 곳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그러다가 신품소요객이 멈칫 금색마조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아이를 ?" 

 

"나중에 구하세." 

 

상취도장이 급히 재촉하는 바람에 신품소요객도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신법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며 숲을 향해 날아갔다. 

 

홀로 남겨진 아이의 입에는 신품소요객이 물려준 인형설삼이 즙으로 화해 녹아들고 있었다.

 

 

 설삼의 즙의 반은 아이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반쯤은 방울방울 입가를 타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아! 운명(運命)의 희롱인가? 

 

하필이면 그 흘러내린 방울들이 미혼액에 취해 죽은 듯 누운 금색마조의 부리 끝에 걸릴 줄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금색마조는 푸득푸득 날개를 털고 일어났다.

 

 

영약의 기운이 미혼약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마조는 끄아악! 한 소리 크게 부르짖더니 어린아이를 나무갑에 태운 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금빛 구름이 떠오르는 듯 금색마조는 벌써 까마득히 구중천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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