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38장 사생결단(死生決斷) 2

오늘의 쉼터 2013. 12. 14. 10:39

정협지(情俠誌)

 

38 사생결단(死生決斷)

 

강호의 고수들(2)

 

 

 경기대 아래 모여 있던 관중들 가운데는 낭월대사의 이 말을 듣고. 

여기나타난 서생이 바로 궁문의라는 것을 추측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어째서 해남인마와 옛날부터 따져야 할 묵은 셈이 있는 사이인지

그 자세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해남인마는 가릉서생 궁문의의 얼굴을 바라보자마자.

금세 분노의 불길이 용솟음쳐 오르는 모양이었다.

얼굴빛이 갑작스럽게 변하면서 침통한 음성으로 소리를 질렸다.

 

" 흥! 나 역시 일찍부터 네놈을 찾아서 묵은 셈을 청산해 버리려고 했었다! 잘됐다.

네놈이 그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도 먼저 자진해서 달려 나와 죽음을 택하겠다고 덤벼더니......

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오늘이야말로 네놈과 사생결단을 해보겠다 !"

 

가릉서생 궁문의는 그런 말을 듣고도 눈도 깜짝하지 않으며 태연자약했다.

싸늘하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응수했다.

 

" 늙은 귀신 같은 놈아! 쓸데없는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말아라!

네놈이지녔다는 재간이 몇 푼어치나 된단 말이냐?

빨리 그것을 몽땅 털어놓아 봐라!

네놈은 이 몇 해 동안에 입심을 부리는 연습만을 하지는 않았겠지! '

 

해남인마는 그 말을 듣더니 간단히 코웃음을 쳐버렸다.

 

" 흥!  아니꼬운 놈 ! "

 

그는 금세 앞으로 불쑥 나서는가 싶더니 거꾸로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두 어깨를 떡 펴면서 버티고 서더니 두 손으로 천천히 허리춤을 짚었다.

그는 비록 빈손으로 두 주먹만 움켜쥐었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수천 수만 근의 중량이 있는 큼직한한 바윗돌처럼 위엄이 있고 든든해 보였으며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타오르는 품이 기세가 자못 등등해 보였다.

 두손으로 허리춤을 푹 찌르고 서서 한참동안이나 상대방을 노려만 보고 있다가.

드디어 손바닥을 홱 뒤집고 다섯손가락을 꼿꼿이 뺃쳤다.

장심을 밖으로 향하더니.

대뜸 가릉서생 궁문의를 향해 거침없이 맹렬한 일장을 발사했다.

가릉서생 궁문의는 이미 60 전후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외양만 보면 30여 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사람 같아 보였다.

이것은 그의 남달리 정순한 경지에 도달한 내공의 위력이 불가사이하게도

늙은 얼굴을 늙게 보이지않게 하기 때문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이었다.

평생을 두고 얼마나 많은 대결투의 무시무시한 장면을 치러냈는지 모르며.

무술실력이 정심(精深)할 뿐더러 박학다식. 견문이 넓은 훌륭한 무인이었다.

가릉서생 궁문의는 해남인마가 소매자락을 걷어붙이고 손을 뽐내는 품이 .

이만저만 으쓱거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대뜸 알아차렸다.

 

' 흠. 이놈이 손을 쓰는 품이 확실히 괴상망측한 걸! '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체 어떠한 수법으로 덤벼들려는지.

그것을 용이하게 간파할 수는 없었다.

궁문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상대방의 일거일동을 노려보면서.

한편으로는 몸 안에 간직하고 있는 온갖 기운을 전신의 혈맥으로 총집중시키며.

남몰래 조심조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해남인마는 해남인마대로 그 덤벼드는 기세가 자못 흉흉했다.

두 손바닥을 벌컥 앞으로 뿌리더니 경기대 위에 깔린 모래를 회오리 바람처럼 말아 올려서

가릉서생 궁문의의 신변으로 곧장 습격해 들어갔다.

그 회오리 바람같이  휘말리는 손바람은 유난히 억센 기운을 뻗치면서도 

이상하게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것은 순순히 음유의 힘으로만  뽑아내지는 장력이기 때문이었다.

궁문의는 눈앞으로  닥쳐오는 상대방의 공세를 똑바로 봤을 때 내심 깜짝놀랐다.

 

' 지난번 홍택호 앵무주에서 이 해남인마란 놈이 뽐내던 무술이란 대단한 것이 없었는데 ..........

십오년 동안이나 무술을 연마했다고 자랑하지만. 우스광스럽게만 여겨왔더니.

흥! 오늘 이 자리에서는 전혀 딴판인 걸!

여기에는 반드시 어떤 엉뚱한 속임수가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이놈이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 '

 

이런 판단을 내리며 소맷자락을 훌쩍 쳐들어 홱 뿌리며 손바닥을 번개처럼 뒤집은 궁문의.

그 역시 억센 손바람을 일어켜서 아주 가볍게.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해남인마의 공세를

막아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결사적인 일격과 일격이 맞닥뜨린 것도 아닌데 궁문의는

발밑이 미끌미끌하며 흔들리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 흠! 이논이 어지간한 힘으로 덤벼드는걸.'

 

궁문의는 적을 섣불리 다루어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했고.

동시에 그의 평생의 절기를 최대한도로 발휘하지 않으면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지도 모른다는

판단 아래 정신을 또 한번 바짝 차렸다.

예전의 결투장에서는 해남인마는 금모사왕과 미리 짜고 일부러 패전하는 체 가장했었으며.

해남인마 자신도 다년간 고심하고 연마한 절기를 몽땅 선보이는 것을 아까워했던 것이며.

여력을 축적해 두었다가 최후 일각에 써보자는 속셈이 숨어 있었다.

이런 과거의 내막을 궁문의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비무대회만은 여러 모로 따져보아서 그때와는 정세가 전혀 딴판이었다.

비단 회양방과 숭양파의 결투장일 뿐만 아니라.

무림의 모든 명수들이 모여든 자리이고 보니.

해남인마로서도 이번 한 판 싸움으로 그의 과거의 불명예를 깨끗이 씻고.

놀라운 재간을 발휘해서 상대방을 물리쳐야만 다시 무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중대한 국면에 처해 있는 것이었다.

해남인마는 손바람을 일어켜 상대방에게 일격을 가하고 나더니.

진기가 뻗치는 모양이었다.

오른 손으로는 상대방을 막아내며 왼손을 재빨리 놀려서 품속으로부터 한 개의

가죽 주머니를 끄집어 냈다.

해남인마가 끄집어낸 가죽 주머니는 그 길이가 반 자쯤 돼 보이고 폭이 여덟 치쯤.

뭉실뭉실한 품이 흡사 쓰개 주머니 같았다.

그 주머니의 거죽 빛깔은 거무죽죽한데 무슨 가죽으로 만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손으로 깔짝깔짝 만지작거리니까.

그 가죽 주머니는 당장에 숨이 죽어버리는데.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비단 가릉서생 궁문의도 알아낼 수 없을 뿐더러.

이경기장에 모여 있는 어떤 사람도 알 수 없었다.

해남인마는 왼손으로 그 가죽 주머니를 주물럭주물럭하면서도 풀어 놓으려 들지도 않았다.

그 가죽 주머이를 움켜쥔 손을 공중으로 높이 쳐들어서 흔들흔들 휘젓기만 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쉴새없이 손바람을 내뽑아 적을 만아내며 슬금슬금 두 발을 움직여

경기대 동쪽 가장자리로부터 멈칫멈칫 서쪽 가장자리로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회양방의 휴게대를 등들미에 두고 딱 버티고 서는 것이었다.

 

' 이놈이. 이제 무슨 괴상망측한 수작이냐? '

 

궁문의는 해남인마의 이런 동작을 보자.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놈이 무슨 해괴망측한 농간을 부리려는 것인지.

혹은 어떤 신출귀몰한 작전을 쓰려는 것인지 추측할 도리가 없었다.

 

' 흠. 네놈이 필시 잔꾀를 부리려고! '

 

퍼뜩 이렇게 간파한 궁문의는 두 눈에서 번쩍하고 불똥이 튀는 것만 같았다

그도 작전과 술법을 달리해야만 되겠다는 것을 재빨리 깨달은 것이다.

가릉서생 궁문의는 누구 못지않게 신경이 날카로운 인물이었다.

이런 것을 느끼는 순간 숨을 죽이고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듯하더니

별안간 소맷자락을 높이 쳐들어 흘쩍 휘둘렀다.

한바루의 부채. 길이가 한 자 반쯤 돼 보이는 짤막한 부채 한 자루가

소맷자락 속으로부터 튀어나오더니.

궁문의의 오른손에 잔뜩 움켜 쥐어졌다.

무기 치고는 멋들어지면서 귀염성 있는 물건이었다.

궁문의란 인물은 본래가 준수하고 말끔하게 생긴 풍체에다가.

그 외관만이 아니라 경사에 통달하고 남달리 훌륭한 경륜을 지니고 있으며.

시사가부(詩詞歌賦) 정통하지 않은 바 없으며 거문고 바둑 서화 ............

각 방면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인 만큼.

그가 뽑아든 무기도 이렇게 손톱만큼도 흉악한 인상을 주지 않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 눈을 번쩍 뜨고 미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그의 유일한 무기는 바로 이 한자루의 부채였다.

이 부채야말로 궁문의로 하여금 무림에 쟁쟁한 명성을 떨치게 한 기이한 물건이며.

확실히 강호에서 좀처럼 보기드문 골동품이기도 했다.

본래 이 부채는 그 이름을 온옥선(溫玉扇)이라고 했다.

진짜 한옥(漢玉)으로 만든 것인데 전해진 말을 들어보면.

어떤 천하무적의 명장이 일평생을 기울려서 깍고 다듬고 갈고 해서.

황제에게 완상품으로 바쳤던 보물이라고 한다.

어째서 그리 됐는지는 몰라도. 이보물은 궁중으로부터 밖으로 흘러나오게 되어서.

마침내 궁문의의 증조부의 수중에 들어오게 됐다는 것이며.

그것이 다시 오늘날에 이르러 궁문의의 생명같이 소중한 보물이요.

무기가 된 것이라고 한다.

가릉서생 궁문의의 증조부는 남송 때 과거에 낙제한 선비였다

몇번이도 과거를 봤지만 번번히 떨어지고 급제할 가망이 없는지라.

낙담하여이렇다 하는 일도 없이 허송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달리 배운 재간도 없으니.

입신양명해 볼 길이 막연한 데다가 국사는 나날이 어지러워 졌고.

내우외한으로 무슨 커다란 변고가 눈앞에 닥쳐오고야 말 것만 같았고.

멀지 않아서 중원 천지에 반드시 변란이 일어날 것이라며 민심이 극도로 소란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조상 때부터 집안이 부유했고 논밭 전지는 물론 막대한 재산과 보물을 지니고 있는

거부의 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눈앞에 큰 변란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아챈 그는 마침내 일체의 소유를 포기하고.

단지 자질구레한 금은 보석 따위만 간직하고 대소 가족 전원을 거느리고 표연히 정처도 없이

살던 고장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는 곧장 파촉(巴蜀) 땅에까지 도착해서 일단 그곳에 머물러보기로 작정했다.

사천지방을 살펴보니

토지가 비옥할 뿐더러 민심이 순후하고 비록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장이라고는 하지만.

문화적으로도 매우 발달된 지방이어서 외족의 유린을 받을 근심이 없는 지라.

바로 이 고장에 정착해서 다시 생활을 꾀해볼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때에 그는 이미 중년을 훨씬 넘어선 나이였다.

젊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심경에 커다란 변화를 일어켰고.

신체가 아직도 매우 건강한 편이었는지라.

허구한 날 밖으로만 돌며 산에 오르고 물을 건너고 명산대천을 찾아서 유력하며 한가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그가 청성산에 올랐을 때 뜻하지도 않은 곳에서 어떤 늙은 화상 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은 보자마자. 서로 의기투합하여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너무나 뜻밖애도.

이 늙은 화상은 알고보니.

일신에 절기를 지니고 있는 불문(佛門)의 은사였다.

맨 처음에는.

이 늙은 화상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좌선하는 방법과 호흡법을 거르쳐준 데

불과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궁문의의 증조부는 마침내.

이늙은 화상의 내력과 재간을 알아내고야 만 것이다.

강문의 증조부는 엄숙하게 꿇어앉아서 이 화상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고.

무술의 재간을 전수해 달라고 떼를 써보았으나 늙은 화상은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며 궁문의의 증조부가 불문의 제자가 아닌 이상 절대로 자기를 스승으로 섬길 수는 없다고 딱 잡아뗐다.

재삼 재사 궁문의의 증조부가 끈질기게 졸라대는 바람에 그들은 마침내 한 가지의 절충안을 세워서

궁문의의 증조부를 속가 제자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여주고 무술을 전수해 주게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궁문의의 증조부는 일거일동을 화상에게 배우면서 두 사람의 두터운 친교와 사제의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런 인연으로 가릉서생 궁문의의 증조부는 세상에도 드문 탁월한 무술을 몸에 지니게 됐으나.

외부의 제자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렬을 내리고 단지 자기 집안 사람에게만 이것을 전해 주어서

무술을 연마하게 하는 한편 경서의 공부를 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궁문의 일가일문 사람들이 강호에 발을 뜰여놓기를 꺼려온 것도.

그들의 증조부의 이런 유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지 강호에서는 궁씨 집안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그리고 궁문의의 부친의 대에 와서는 궁씨 집안도 변창해졌으며 명성이 더욱 쟁쟁하게

세상에 퍼지게 됐는지라.

세상 사람들은 그들 일가일문을 민강파라고까지 부르게 된 것이었다.

궁문의의 증조부는 임종시에 이 온옥선이라는 부채 한 자루를 궁문의의 조부에게 물려주면서.

이것을 간직하여 대대로 전해내려 가게할 것이라며 적장자(嫡長子)로 하여금 보관토록 해서

궁씨 가문의 전가지보를 삼으라는 유언을 했다.

이리하여 궁문의의 조부 때부터 이 온옥선은 일종의 무기로서 쓰이기 시작했으나.

이미 삼대를 두고 전해 내려 오면서 그 명성을 강호에 널리 떨쳤으며 모르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다.

궁문의라는 인물의 외관 만을 보고서는 그가 바로 민강파의 직계인 적전제자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한번 이 온옥선이라는 부채를 번쩍 하고 내보이기만 하면

당장에 그의 신분을 알아낼 만큼 그것은 너무나 유명한 보물이었다.

 이렇게 구씨 일가일문이 강호에서 너무나 유명할 뿐더러 온옥선이란 보물의 존재를 사람마다

알게 되고 보니 자연 그것을 탐내고 넘겨다보는 사람들이 무수하게 생겨났다.

그래서 마침내 구씨 문중에서는 한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들은 진짜 화전 세옥을 여러덩어리 만들어서는 온옥선의 형상을 모방하여

수많은 가짜 온옥선을 만들어서 일가의 사람들이 모조리 한 자루씩 몸에 지니기로 했다.

그것을 부채로 대용도 하고. 때로는 무기로 쓰이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이 진짜 온옥선이

과연 누구의 수중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내지 못하게 됐다.

이런 미묘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궁씨의 일가일문에서는 한 가지 둑특한 선법(扇法)을 연구해 냈다.

그것은 민강선의 술법이라고도 하고 또 궁가선의 술법이라고도 부른다.

이렇듯 온옥선의 본질을 따져보면 귀중한 골동품일 뿐더러 세상에 둘도 없는 희안한 보물인 것이다.

온옥선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그것이 한 덩어리의 옥으로 다듬어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부채 자루도 부채살도 똑같이 온옥을 갈고 다듬고 꽃같은 조각을해서 만들었으며.

부챗살 중에서 양편 두 개가 비교적 굵다랄 뿐이요.

모두 열두 개 살이 각각 그 길이가 하 자 다섯 치 사푼 폭에 두께가 겨우 반 푼밖에 안 되는

열두 개의 살이 추호도 들쑥날쑥한 점이 없이 고르다.

부채의 표면은 백금을 앏다랗게 펼쳐서 만들었으며 부챗살에는 금실을 써서 정착시켰고.

백금의 표면에는 또 네 폭의 산수화를 새겨넣었다.

그러나 온옥선이 희안한 보물이라는 점은 이런 조각의 정교한 점에 있지 않았고.

그 품질이 천하에 보기드물다는 데 있는 것이니.

그것은 이 부채의 원료가 천재를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온옥이라는 점이었다.

온옥은 옥의 일종으로서 강철처럼 단단하면서도 또 기름 덩어리 같이 부드러운 물건이어서

손으로 스쳐보면 반질반질 매끈매끈 반점의 티끌도 없는 순백체이며 .

어느 때 어느 곳에다 굴려두어도 항시 변함 없는 온도를 유지하고.

차지도 뜨겁지도 않기 때문에 온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온옥의 괴상한 점은.

그것을 물이 있는 가까운 곳에 던져두면 즉각 새파랗게 투명한 색체로 변하지만.

물 근처에서 멀리 떨어져 나오면 당장에 투명한 색채로 돌아간다는 점이며.

만약에 불기운이 있는 곳에 가까이 놓아두면. 즉각 엷은 분홍색으로 변했다가.

불기운을 떠나서 멀어지면 다시 흰 빛으로 되돌아가곤 하는 점이다.

또 날씨가 음산해지거나 비가 내릴 기색이 보이면.

이 온옥의 곁으로는 일종의 깨알 같은 물방울이 쓰며나오며.

날이 개는 기색만 있으면 이 물방울이 씻은 듯이 없어져버리곤 한다.

그보다도 가장 진기한 점은.

이온옥이 백 가지 독소를 능히 제거할 수 있으며 사람의 몸에 부스럼이나 상처가 생겼을 때.

이것으로 그 언저리를 거볍게 한번 스치기만 해도 얼마 안 가서 곧 아물어버리고.

감쪽같이 허물조차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기묘묘한 효능을 구비하고 있는 보물인지라.

세상 사람들이 탐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가릉서생 궁문의 부친은

그의 증조부의 장손이었으며 궁문의는 그의 부친의 장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가규를 지켜서 이 온옥선이란 보물을 궁문의가 몸에 지니고 있게 된 것이었다.

평소에는. 궁문의는 여간해서는 무기를 뽑아들지 않았다.

단지 참다 참다 어쩔 수 없는 특별한 경우에만 이 부채를 뽑아 들게 되는데.

그것도 진짜가 아니고 가짜 부채를 쓰는 것이다.

 

본래. 궁씨 일가 일문의 가규란 것은

 

'손이 부채를 버려서도 안 되고. 부채가 손을 떠나서도 안 된다 '

 

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온옥선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인지라.

진짜 외에 따로 가짜를 한 자루 몸에 지니고. 싸워야만 될 적이 나타났을 경우에는

어띠까지나 가짜 부채를 써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분간해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비무대회의 경기장에 나서서는 가릉서생 궁문의는 해남인마가

괴상한 속임수를 쓰고 덤벼든다는 사실을 간파했고.

또 그 가죽 주머니 속에는 반드시 해괴망측한 물건이 들어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재빨리 무기를 손에 뽑아 든 것이었다.

그리고 선뜻 뽑아 든 그 무기는 진짜 온옥선이었다.

궁문의는 부채를 손에 움켜잡더니 쩌렁쩌렁 울리는 무서운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 이 늙은 귀신 같은 놈아!

네놈이 먼저 섣부른 수작을 하고 잔꾀를 써보려고 했으니.

내가 부채를 뽑아들었다.

이후에라도 어리석은 원망은 하지 말아라! "

 

그는 해남인마가 먼저 괴상한 가죽 주머니를 끄집어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도 무기를 꺼내든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야 일파의 지명지사의 신분으로써

비급하게 먼저 무기를 뽑아 들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느냐는 뜻을 명백히 선언하는 것이었다.

해남인마는 이때 벌써 자기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잡고 버티고 서 있었다.

호통소리를 듣고도 일언반구 대답이 없었다.

홀연. 왼손을 번쩍 쳐들었다.

별안간. 가죽 주머니를 빙글빙글 휘젓더니

쉬 하고 공중으로 날려서 궁문의의 얼굴 앞으로 화살같이 던져버리며.

그와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바람을 일어켜서 가죽주머니 뒤로부터

그것을 밀면서 맹렬한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 꽝 ! "

 

화약이 폭발하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쓸개 덩어리 같은 가죽 주머니가 손바람의 압력에 터져버린 것이다.

주머니가 폭발하는 찰나 그 속에서는 별안간 오색이 찬란한 꽃잎들이 

꾸역꾸역 미어져 나오다가 다시 확 헤쳐져서 공간 속으로 나부꼈다.

해남 인마는 거기다 대고 또 일장의 압력을 가해서 무수한 꽃잎들을 바람속에 휘몰아서

가릉서생 궁문의에게 정통으로 습격을 하는 것이었다.

그 무수한 꽃잎들은 눈부시도록 찬란한 갖가지 색채를 발하면서

해남인마의 손바람의 압력을 또 한번 받더니.

파편처럼 부서져서 마치 하늘에서 온통 꽃비가 쏟아지듯 궁문의가 서 있는 주변을 휘감았다.

그리고 무수한 꽃잎들은 조각조각마다 습기가 찬 짙은 빛깔의 안개를 뽐어냈고.

거기 햇빛이 비치니 찬란한 색채의 변화가 마치 비단에 수를 놓아서 그물을 펼쳐놓은  듯.

아름답기가 형언키 어려웠다.

또 일종의 담담하면서도 그윽한 향기까지 풍기면서 바람을 타고 앞으로 앞으로 너울너울

날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한편. 가릉서생 궁문의도 해남인마의 가죽 주머니가 터지는 찰나에

오도도독 하는 소리를 내면서 오른손으로 온옥선을 펼쳤다.

백금과 금으로 만들어진 그 부채의 표면도 했빛에 반사되어서 눈부시게 찬란한 금빛을 발산했다.

꽃잎들이 터져 나오는 순간에 궁문의는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분노가 북받쳐오르기도 했고 또 놀라운 생각도 들었다.

 자기자신을 위해서 겁을 집어먹었다기보다는. 숭양파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걱정한 것이었다.

동쪽 휴게대가 바로 바람결이 흘러 내려가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따위 괴상한 꽃잎들의 파편이 풍기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경기대 위로 흘러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 냄새를 맡는 사람치고 중독이 안 될 사람이 없으리라는 것을 생각한 까닭이었다.

알고보니.

해남인마란 놈은 해남도 깊은 숲속에서 천년 동안이나 해감 속에 섞여 파묻혀 있던 도화장독이라는

독소를 가죽 주머니 속에 꾸려 넣어가지고 와서 마침내 이 자리에서 발사해 버린 것이니.

그 수단이야말로 비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가릉서생 궁문의는 이 꽃잎의 내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또 온옥선은 이따위 독소가 경기대 아래로 흘러 내려가지만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방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가릉서생궁문의는 그래도 입을 꽉 다물었다.

그 따위 독소가 겁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간으로 퍼져서 무형 중에 입 속으로 침범해 들어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해남인마가 발산하는 무서운 독소를 품은 꽃잎의 파편들.

그 앞에서 휘적휘적 부채질을 하는 궁문의의 민강선법.

온옥선은 마침내 눈처럼 하얀 광막을 펼치더니 궁문의의 신변을 휘감아 보호하면서.

한편 맹렬한 역풍을 일어켜 꽃잎들을 즉각 멋들어지게 격퇴시켜 버리고 말았다.

꽃잎처럼 흩어져서 안개같이 자욱하게 퍼져 나가던 괴상한 독기는 해남인마의 손바람의

힘에 밀려서 곧장 앞을 향해 쏘아 들어가다가 돌연 저편에서 맞닥뜨리는 가릉서생 궁문의의

부챗바람에 가로막혀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로 밀려나올 도리도 없게 되어

두 가지의 거창한 힘과 힘 사이에 끼여서 별안간 회오리바람처럼 휘말리더니

양 옆의 공간을 찾아서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가릉서생은 그 광경을 바라다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욱! 하고 전신에 힘을 쓰는 찰나.

그는 몸을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옥선으로 힘껏 부채질을 해서 양편 공간으로 흩어지는 꽃잎의 파편들을 경기대 면적 위에

그대로 가라앉혀버리고 경기대 아래로 하나도 날아 떨어지지 못하게 봉쇄해 버리는 것이었다.

 궁문의는 도화독기가 끼치는 결과를 익히 알고 있어서 경기대 아래에 가득 차 있는 관중에게

한 잎이라도 떨어지기만 하면 많은 생명이 독살될지 모른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똑똑히 간파했기

때문에 부채질에 온갖 힘을 다 기울려서 그것이 흩어러지지 못하게 눌러버린 것이었다.

 

' 그렇면 그렇지 !'

 

궁문의는 마음 속으로 개가를 올렸다.

다행히 그 독기는 무섭고 끈적끈적한 습기를 지니고 있어서. 보통 공기처럼 당장에

확 퍼져버리지 않고 부챗바람의 강력한 힘을 받자 그대로 엉켜붙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공간에 동동 떠 있는 한 가지 색채가 장막을 펼친 것처럼 쫙 깔려서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만약에 해남인마가 손바람을 써서 흩어놓지만 않았다면 이 독기는 공중에 떠서

이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독기는 숲속에 안개처럼 서리어서 응달과 습한 곳에서 자라나고 있을 때에는.

멀리서바라보면 마치 한 장의 널쩍한 광막같이 찬란한 색채를 발산하면서도 아무 데로나 이동하지는 않는 것이다.

경험이 있는 나뭇꾼이나 사냥꾼이면 비록 그 독기를 심히 두려워한다 할지라도.

먼 데서 발견하고 길을 돌아서 피해 버리는 것이며. 그 독기를 쐬 중독이 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아무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이 독기의 무서운 작용을 알지 못하고 멀리서 그 아름답고

찬란한 색채의 광막을 바라보다가 앞으로 가서 자세히 보고 싶은 충동을 금치 못하는 것이며.

심지어 손으로 더듬어보고 주물러 보려다가 그대로 독기를 쐬고 나자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본래가. 이따위 독기는 습하고 어두운 산 속에서 썩어나는 기운이 오랜 세월을 두고 뭉치고 뭉쳐서

극히 얇다란 수무로 변하여 공중에 도는 열기에 흡수당해서 높은 공간으로 증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무도 독무도 보통 안개보다는 무게가 있기 때문에 한없이 높이 떠오르지는 못하고 .

지면 위에서 고작해야 2. 3장 높이밖에 더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어떠한 짐승일지라도 한번 이 독기를 쐬이기만 하면.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져서 쓰러졌다가 열두시간을 경과하지 못하고 육신이 썩어서

고약한 냄새를 발산하며 일종의 액체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도화독기는 그다지 고약한 냄새를 발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곰팡내같이 썩는 냄새를 가볍게 풍기는 것인데.

해남인마가 이 독기를 한 군데로 잡아 넣는 데 성공한 다음.

거기다가  갖가지 향정을 가미해서 발산시켰기 때문에 향긋한 냄새가 사방으로 풍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악독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 해남인마의 흉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가릉서생 궁문의 단지 한 사람 뿐이었고 경기대 아래 수많은 관중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해남인마가 오색이 찬란한 안개 같은 연막을 발산하자.

그것이 마치 모기장이 펼쳐지듯 가릉서생 궁문의의 신변에 휘감겨 들어가는 광경을 보고.

경기대 아래 관중석에서는 모든 사람이 긴장이 풀리고 도리어 이상하다는 호기심에서

의견이 분분해졌다.

 

" 야! 괴상한 놈이다! "

 

" 저놈이 요술을 쓰는 걸까?"

 

" 꽃잎이 퍼지더니 별안간 오색이 찬란한 안개로 변하니! "

 

" 희한한 재간을 부리는 놈이구나! "

 

그러나 관중들이 더욱 이상하게 여기고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은.

상대방인 궁문의가 지극히 신중한 태도로 부채질을 하고 있을 뿐이요.

해남인마에게 조금도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괴상한데! 부채질만 하면 어쩌자는 걸까? "

 

모든 관중들은 똑같은 말을 할 뿐.

무슨 영문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동쪽. 서쪽 숭양파와 회양방 몇몇 선배급 인물과 고수급 인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며 아우성을 칠 뿐이었다.

 

" 야! 근사한 재주를 부리는 데! "

 

" 잘한다! 멋지다! "

 

그들이 가릉서생의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할 리 없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이 그 안개같이 찬란한 독기 앞에 희롱당하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박수 갈채를 보내는 관중들을 생각할 때.

궁문의는 더군다나 비장한 심정으로 결사적으로 부채의 위력을 발휘해서

그것을 주저앉혀버리는 것이었다.

 

' 이런 죽일 놈! 이 따위 흉악한 마귀 같은 놈을 이 천지에 그대로 살려두었다가는

죄 없는 사람을 얼마나 해칠 것이랴 !

이번 기회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놈을 처치해 버리지 않고는 ............. '

 

가릉서생은 태연자약하게 부채질만 하면서도.

속으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남몰래 이를악물었다.

숭양파 편에서는 낭월대사가 누구보다도 이런 정세를 재빨리 간파했다.

해남인마가 발산시킨 것이 무서운 독기이고 보면.

궁문의가 제아무리 부채질을 잘해서 막아낸다손 치더라도 시급히 소멸시켜 버릴 수 없을 것이며.

그뿐만이 아니라 해남인마는 형세를봐가다가 돌발적인 암습을 꾀하고있을 것이니.

가릉서생의 무술이 탁월해서 당장에는 두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지구전으로 들어가 시간을 끈다면 견뎌내기 어려우리라는 판단이었다.

낭월대사는 퍼뜩 이런 생각을 하자 대뜸 왼편에 앉아 있는 송운상인의 귀에다 대고 무엇인지 쑥덕쑥덕했다.

송운상인은 별안간 희색이 만면해지더니 선뜻 품속을 더듬어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서

낭월대사에게 주었다.

낭월대사도 그 주머니를 받아들자 희색이 만면해지며 그것을 경기대를 향해서 높직이 쳐들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가만히 말했다.

 

" 궁대협! 내 독기를 멸살시킬 만한 물건을 제공하리다! "

 

낭월대사는 말을 마치더니 한쪽 팔을 휘휘저었다.

조그마한 주머니 한 개를 가릉서생의 등들미를 향해서 훌쩍 던져주었다.

 가릉서생 궁문의는 부채질만 빨리 하느라고 열중해 있는 판이었는 데.

홀연 낭월대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지라 여간 기쁘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돌려 흘끗 바라보니 과연 낭월대사가 무엇인지를 자기에게로 집어던져 주는지라.

대뜸식지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그것을 꼭 물어버리듯 잡아서 수중에 넣었다.

가릉서생은오른손으로 부채질을 맹렬히 하면서 왼손을 써서 그 조그마한 주머니를 코에다

가까이 대보았다.

일종의 웅환 냄새가 강력하게 코를 찌르고 머릿속에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되니.

가릉서생은 용기백배.

신바람이 나서 손에 잡은 부채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고.

민강선 술법 중의 삼단계에 속하는 절기를 아낌없이 발휘했다.

활짝 펴진 가슴과 같은 높이에서 옆으로 홱홱 부쳐대니

부채에서는 천층 만층의 파도와 같은 바람이 너울거리며.

제1단의 술법인 공작개병(孔雀開屛)의 술법을 써서 해남인마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과연 민강선의 술법은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한번 공작개병의 술법을 발휘하자.

부챗바람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딴판으로 격렬해지면서.

그 무서운 도화독기의 모기장처럼 펼쳐진 연막을 마치 거창한 파도가 무엇을 휘말아버리듯.

역풍속에 휘감아서 반대 방향으로 즉 해남인마를 향해서 불어가도록 힘껏 반격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해남인마는 일종의 거창한 바람이 습격해 들어올 때. 

그것을 재빨리 막아낼 만한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발산한 독기가 도리어 자기 편으로 불어오는 것을 보자 내심 깜짝 놀랐다.

 

' 이놈이 제법 만만치 않은 재간을 지니고 있는 걸 !"

 

그러나 해남인마는 태연자약했다.

선뜻 손바람을 일어켜서 그 무서운 독기를  또 한번 앞으로 밀어내버리는 것이었다.

해남인마는 이 경기장에 나서기 전부터 미리 그의 비제의 해독약을 먹고 왔는지라.

독기가 조금도 두려울 바 없었고 그것이 자기에게로 반격해 들어올지라도 절대로

중독이 안 된다는 자신이 만만했다.

가릉서생은 연거푸 제2단의 후예사일(后예射日)이라는 술법을 전개했다.

 

드르륵!

 

별안간 요란스런 소리를 내더니 온옥선을 접어버렸다.

그것은 당장에 한 자루의 옥척으로 변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쉭 하고 큼직한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흘쩍 팔을 구부려서 부채를 다시 가슴 팍에 대가지고 벌컥 앞으로 뿌렸다.

놀라운 힘이 발동했다.

마치 무시무시한 교룡이 동굴 속으로 뚫고 들어가듯 .

그 놀라운 힘은 일직선으로 해남인마의 얼굴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남인마는 일찍이 10여 년 전에. 금사강에서 궁문의와 대결할 적에

이 술법의 무서운 맛을 본 일이 있었다.

이 후예사일이란 술법의 변화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어찌 됐든 해남인마라는 위인도 당대 무림에서 고수급 인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자였다.

그의 내공 외공 모든 부분의 무술이 남 못지않게 오묘한 경지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가릉서생의 맹렬한 공격 앞에서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자신을 흐트러뜨리는 기색을 보이지않았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감돌고 있는 도화독기를 노려보면서 한편으로는 허리를 움츠려뜨려서

몸을 더욱 확고부동한 자세로 유지해 나가면서. 두 손바닥을 평행선으로 써서 하나는 막고

하나는 들이치며궁문의 후예사일의 술법을 막아내는 대 성공했다.

그러나 해남인마는 결국 가릉서생의 습격이 전광석화와 같아서연거푸 제3단의 술법이쳐들어오리라는 것을 미쳐 생각하지는 못했다.

궁문의는 제2단의 술법을 전개했을 때.

벌써 다음에 쳐들어갈 제3단의 최후의 일격까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왼손으로는 그 조그마한 주머니의 아가리를 풀어 헤치면서 해남인마가

제2단의 술법을 무난히 받아 넘기려고 했을 때 두 발로 경기대를 쿵 하고 굴렸다.

 

" 이놈! 이번에 한번 더 받아봐라! "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드르륵!

 

또 한번 요란스런 소리를 내더니 부채를 다시 펼쳐 잡았다.

팔을 움츠러뜨리고. 가슴을 불쑥 내밀고 몸이 부채와 일체가 되어서 찰싹 달라붙은 채

온옥선은 한 자루 호형의 매서운 칼날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리깎으면서 쳐들어가니

이수법을 개천벽지(開天闢地)라고 하는 것이다.

개천벽지의 술법을 전개시키면서. 그와 동시에 궁문의는 왼손을 날쌔게 놀려서

조그마한 주머니의 아가리를 완전히 풀어 헤치고 그속에 들어 있는 천년묵은 웅황정 분말을

확 뿌려버렸다.

 그 분말은 궁문의의 손바람의 힘에 몰려 마치 쇠털 같은 빗발이 되어서 그 도화독기를 향해 맞부딪혀 들어갔다.

 

해남인마는 가릉서생의 제3단의 술법이 연거푸 습격해 들어오는 것을 알아채자.

그 이상 도화독기에만 신경을 쓰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껑충! 솟구쳐오르는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마침내 오른쪽 다리가 온옥선에 스쳐서

시뻘건 피가 주르르 터져 나왓다.

그래도 해남인마는 껑충 솟구쳐올랐기 때문에 다행히 치명적인 급소를 찔리지는 않았으므로.

아픔을 참으면서 여전히 궁문의의 부채의 힘이미치는 테두리에서 벗어나보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도화독기와 천년 묵은 우황정 분말이 맞부딪혔다.

독기는 즉각에 녹아서 물로 변하더니 주르르 아래로 흘러버렸다.

해남인마가 다년간의 고심 끝에 만들어냈다는 이 보물.

무서운 독기도 마침내 궁문의 앞에서는 이슬방울같이 녹아버린것이다.

해남인마도 이쯤 되고보니 풀이 죽지 않을 수 없었다.

약이 바짝 올라 떨려나오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궁문의!좋아! 우리 다음 기회에 한번 더 만나기로 하자! "

 

가릉서생은 이 순간에 최후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서 해남인마를 죽여버릴 수 있는

살수를 써 볼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을 돌이켰을 때 이렇게 많은 군중들이 몰려든 넓은 마당 한복판에서

잔인하게 살생을 저지른다는 것은 의협에 사는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깨끗이 단념했다.

해남인마의 말이 떨어지자 가릉서생은 꼼짝도 않고 버티고 선 채로 껄껄껄껄

냉소를 터뜨리며 선선히 대답했다.

 

" 핫핫핫! 그거 좋은 말이다!

이 궁문의는 언제 어디서든지 그대의 도전을 환영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경기대 아래로 껑충 뛰어 내려갔다.

해남인마와 가릉서생이 경기대를 떠나자 마자

징소리가 규칙대로 또 세 번 요란스럽게 울렸다.

 

 

 

회양방의 영도자 흑지상인이 두 손으로 앉아있던 의자를 벌컥 짚더니.

단숨에 몸을 날려 경기대로 뛰어올라서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이제 숭양파는 삼 장을 승리했습니다.

그러니까 일 국을 완전히 승리한 셈이 됩니다.

우리 회양방에서는 특별한 채백 한 필을 상품으로 증정하겠습니다! "

 

말을 하고 있을 때 몸에 붉은 옷을 걸친 방도 하나가 손에 붉은빛 비단함을 하나 떠받들고

휴게대 위로 올라왔다.

흑지상인은 그 비단 함 속에서 채백 한 필을 꺼내더니

그것을 바로 옆에 있는 다른 방도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나서 동편 휴게대를 한번 바라다보고 사나운 눈초리로 비질을 하듯

경기대 아래를 획 쓸어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 우리 방과 숭양파의 고개적인 비무대회에. 각 방면으로부터 영웅호걸 여러분께서.

참가해 주시고 관람해 주시게 된 데 대해서 소생 고비는 실로 감격해 마지않습니다.

이제 경기의 형세를 대강 여러분께 알려드리자면 목전에 있어서 숭양파는 이미

삼 장. 즉 일 국을 승리했고 우리 방은 단지 일 장을 이기고 있습니다.

쌍방의 약정대로 구 장을 승리한 자를 최후 승리자로 삼을 것이며.

만약에 쌍방이 팔 장을 승리했을 경우에 어떤 편이든 일 장만 더 승리하게 되면.

그것으로써 전 국면의 승패를 결정지어버리고 패한 장수는 계산속에 넣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

 

그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경기대 아래를 유심히 훑어보고 나서야 다시 다음 말을 했다.

 

" 우리들의 이번 경기대회는 어디까지나 공개적인 것이기 때문에 따로 대주라는 위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경기대에 출장하여 일 장을 승리한 사람이면 곧그를 대주로 삼을 것이니 .

어느 방면의 영웅호걸을 불문하고 출장해서 상대방의 대주를 일장만 승리하면 그대로 쌍방이

경기 전체에서 일장을 승리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쌍방은 동의했습니다.

이 점을 특히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말을 마치자.

흑지상인은 경기대 아래를 향해서 두 손을 맞대어 흔들어 인사를 표시하고 서쪽 휴게대 위로

몸을 날려 돌아갔다.

경기는 이제 점점 최고조에 달해 가고 있으니.

경기대 아래의 관중들이 감히 남의 싸움을 거들겠다고 선뜻 뛰어오르지 못할 뿐더러.

평소에 우쭐거려보고 싶은 대단치 않은 무인들도 자기 생명까지 내던지고 모험을 하고 싶은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게 됐다.

 

노영탄은 이때까지도 여전히 관람석 맨 가운데 자리에 끼어 있었다.

그저 신룡검이라는 괴상한 사나이가 언제 나타날 것이며 연자심을 어떻게 했을 것이냐 하는 생각으로 일각이 삼추 같은 초조한 심정일 뿐이었다.

무술대회에 출전했다는 소위 고수급 인물이라고 뽐내는 자들의 무술이란 것이 제법 탁월하고

오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노영탄의 안목으로는 털끝만큼도 흥미 없는 놀음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심정이 너무나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해서

그들의 무술 실력이란 것을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고.

더군다나 호의화상 따위의 위인들은 모두가 노영탄에게는 하잘것 없는 패장들에 불과했다.

 노영탄은 일직이 응유산에 은거하면서 저 독특한 네 가지의 술법을 연마하고 난 다음부터는

신출귀몰하다는 어떤 파의 무술이라도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네 가지는 그만두고 그중의 한 두 가지만 가지고도 즉각에 어떤 강적이라 할지라도 물리칠

자신이 있었으니.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에 흥미가 있었을 것이랴.

그러나 이렇게 자신이 만만하면 만만할수록 노영탄은 일종의 치욕감 때문에 몸둘 곳을 모르는 것이었다.

 

' 몸에 지닌 재간이 무슨 소용이냐?

강호를 지배할 만한 놀라운 무술을 지녔다는 몸이 여자 하나를 구출하지 못하고 남에게 납치를 당했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냐?

그런데도  그 신룡검이란 괴상한 인물은 의식적으로 나에게 도전을 해놓고도 여테 나타나질 않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농간이요.

무슨 괘씸한 희롱이란 말이냐?'

 

노영탄은 생각할수록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참고. 또 참고 . 신룡검이 나타나서 과연 어떠한 놀라운 재간으로 자기와 대적할 것인가

하는 것만 생각하고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 판이다.

 

바로 이때 별안간 경기대에서 미친듯이 웃어젖히는 난폭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노영탄은 대뜸 고개를 쳐들고 경기대 위를 바라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