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32장 정체불명(正體不明)

오늘의 쉼터 2013. 12. 13. 22:49

정협지(情俠誌)

 

32 정체불명(正體不明)

 

신룡검의 정체 

 

 

 시뻘건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정오가 멀지 않을 때였다.

노영탄은 그제서야 아주 상쾌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고 사방을 살펴보고 나서야 이미 정오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무엇에 찔린 듯 가슴이 별안간 뜨끔했다.

눈을 꿈뻑꿈뻑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으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째서 이렇게 고단하게 잠이 들었을까?

그리고 연자심이 어째서 여태까지 나를 깨워주지 않았을까? '

 

어쨌든 시간이 어지간히 늦었으니 몸을 일어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몸에 힘을 써보니 그제서야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몸이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띵하고 아프기 시작했다.

골이 빠개질 것만 같았고 고개를 쳐들 수도 없었다.

전신이 흐늘흐늘하면서 맥이 탁 풀렸으며 손목 발목이 시끈시끈

쑤시고 저리고 아파서 안절부절 못할 지경이었다.

 

' 이상하다! 대체 어떻게 된 셈이지?

 내가어떻게 잠을 잤기에 몸이 이렇게 이상해졌을까?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만저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전신에 오싹 싸늘한 소름이 끼쳤다.

우두둑! 급히 뼈와 뼈마디의 진기를 불러일어켜 보았다.

거기까지는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손목 발목에는 여전히 힘이없었으며 전신이 나른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차근차근히 어젯밤 일을 되짚어 보며 생각해 보았다.

 

'잠이 들락 말락 했을 때. 무슨 꿈을 꾼 것 같았는데 .........

 꿈속에서 한 줄기 희미한 향내가 코에 스며 들어온 것 같았는데 ..........

그것이 꿈속인 줄로만 알았더니 .......

바로 이것이?

바로 내가 강호의 못된 놈들의 독기를 쐬다니! '

 

노영탄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초조하기도 했다.

가까스로 몸을 일어켜서 보따리 속을 뒤져 설령환 한 알을 꺼내 급히 씹어 먹었다.

순식간에 기분이 상쾌해지고 기억력이 회복되어 침상에서 벌떡 튀어 일어났다.

옷을 주워 입을 사이도 없이 판자 한 겹으로 가로막혀 있는 옆방을 쿵쿵쿵쿵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불러보았다.

 

" 연소저! 자심! "

 

" .................. "

 

옆방에서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퍼뜩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거푸 몇 번 힘있게 다시 두드려보았다.

여전히 인기척이라고는 통 들리지 않았으며 대답하는 기색이 없었다.

노영탄은 어느 때보다도 당황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아서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한동안 얼이 다 빠진 사람같이 어리둥절했다.

머릿속이 팽팽 도는 것만 같았고. 귓전에서는 왱왱.

하고 요란스런 소리가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이게 대체 무슨 변이냐? 연자심이 어디로 혼자 갔단 말이냐?

 날 버리고 달아나기라도 했다는 거냐? '

 

아무리 생각해 봐도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바보처럼 멍청히 서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진정하고

흘끗 머리맡에 있는 상 위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놓아둔 채로 의복도 보따리도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그런데 퍼뜩 눈에 띄는 한 장의 종이.

노영탄은 그것이 눈에 띄자마자 왈칵 낚아채듯이 집어들고 단숨에 훑어보았다.

그 위에는 간단히 두 줄의 문장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를 원한다면 즉시 금사보로 오라!

    기한은 이틀이다. 기한이 지나면 더 기다릴 수 없다!

 

그 흰 종이 위에는. 그것을 쓴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단지 맨 끝에 '신룡검' 이라는 석 자가 씌어 있을 뿐이었다.

 

노영탄은 그 흰 종이를 그대로 속옷 주머니에 쑤셔 넣고 급히 옷을 주워 입고서

비호같이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단숨에 옆방 문 앞으로 달려갔다.

쿵쿵쿵쿵 또 두어 번 두드러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극도로 조급해진 노영탄은 그 이상 더 기다려볼 수가 없었다.

손바닥에 힘을 써서 문짝을 그대로 앞으로 밀쳐버렸다.

우지직. 하고 문짝이 뒤로 물러나자 다짜고짜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눈앞이 아찔하고 불똥이라도 팍팍 튀는 것 같았다.

자칫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할 만큼 노영탄은

너무나 커다란 놀라움에 정신이 아득했다.

방안에 있는 침상 위에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부자리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침상 머리맡 상 위에 있어야할.

그 진주와 보배가 들어 있는 보따리마저 고스란히 어디론지 날개가 돋힌 듯

사라져버리지 않았나!

 

'흠. 이게웬일이란 말이냐? '

 

그러나 노영탄은 애써 마음을 침착하게 먹었다.

방을 다시금 차근차근히 살펴보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흠. 이런 결과가 됐다? '

 

노영탄은 곰곰 머리를 짜면서 이 궁리 저 궁리 하다가.

한참 만에야 조용히 몸을 돌려 그 방을 나왔다.

두말 없이 급히 자기 방으로 되도아 온 다음.

수습할 것을 적당히 수습하고 얼굴에는 조금도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으며

평소보다도 더욱 태연자약한 태도로 천천히 여인숙 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연자심의 방 문짝을 부셨을 때. 소리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여인숙의 심부름꾼 두어 녀석들이

벌써 문간에 나와 서서 노영탄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노영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심부름꾼 녀석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 우리 누님은 아침 일찌감치 물건을 살 것이 있다고 밖으로 나가시더니.

여태까지 돌아오지 않으시니 ..........

무슨 까닭인지. 방문은 안으로잠가놓으시고 나간 것을 나는 알지 못하고 하도 답답해서

문짝을떼어놓았는데 ........ 그건 내가 배상해 주겠네! "

 

두 심부름꾼 녀석들은. 문이 부서지는요란스런 소리를 들었을 뿐이지

방 안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는 알 까닭이 없었다.

손님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고 해서 당장에 그 방으로 달려가볼 생각도 못하고 우두커니

밖으로 나가는 노영탄의 뒷모습만 바라다보며 주인에게 보고해서 처리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노영탄이 불쑥 이렇게 말했을 때 두 심부름꾼 녀석들은 서로 쳐다보며 똑같이 의아한 생각을

 품었다. 

두 녀석들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연자심이 외출하는 것을 보지도 못했고.

또 노영탄의 말대로하자면 물건을 사러 나갔다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걸 보면

실로 수상쩍은 일이기는 했으나 손님이 그렇게 먼저 말하는 이상 가타부타 따질 것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 심부름꾼 녀석들은 서로 눈매를 찡긋찡긋하더니

그중 한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 뭐. 대단치 않은 일을 가지고 그다지 걱정하실 게 있습니까?

 손님께서 좋으실 대로 하십쇼! "

 

말을 마치더니 바로 노영탄을 안내하고 문간방 셈을 치르는 곳까지 왔다.

노영탄은 서슴치 않고 방 값을 치러준 다음. 은전 몇 닢을 더 꺼내놓고 점잖게 말했다.

 

" 이건 얼마 안 되는 것이지만 방문을 상하게 한 배상으로 알고 써주시오!

  나머지는 두 친구 용돈에나 보태 쓰고 ......... "

 

회계 보는 선생이라는 자와 심부름꾼 녀석들은 연방 고맙다고 허리를 굽실굽실하면서

노영탄을 여인숙 문 밖까지 전송해 주었다.

여인숙에서 이렇게 뛰쳐나온 노영탄은 거리에 가득 차서 오락가락하는 무수한 행인들을

바라보자니 마음이 타오르는 듯 초조하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훌훌 날아서 금사보에 우뚝 서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이 신룡검이란 도대채 누구일까?  무엇 때문에 나하고 맞서자는 것일까? '

 

또다시 생각이 자신에게로 미쳤을 때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 자신이 언제 경솔히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서 남의 눈에 이상하게 띄었는지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러고 보면. 연자심이 실종됐다는 것은 분명 어떤 놈이 미리 음모와 흉계를 꾸미고

노리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신에 남달리 탁월한 무술을 지녔다고 뽐내는 내가 어리석게도

남의 음모나 흉계에 넘어가서 털끝만큼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울화통이 터지고 분함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영탄은 갖가지 복잡한 궁리에 젖어면서도 지극히 침착하게 천천히 걸었다.

어느새 이미 시가지를 멀찌감치 벗어나서 성 밖 교외에까지 와 있었다.

교외로 나서자 인적이 점점 드물어지는지라 그제서야 노영탄은 마음을 놓고

걸음을 멈추어 궁벽하고 좁디좁은 시골길을 찾았다.

세인의 이목을 피해서 마음대로 경신법을 발휘하여 단숨에 회안을 향해 몸을 날렸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응유산에서 1년 동안이나 은거 생활을 해오는 동안에.

불철주야 무술을 연마하여 연자심의 무술도 굉장한 정진을 보았다.

그러나 연자심의 무술쯤은 문제도 되지 않았고 노영탄으로 말하자면

이 1년 동안에 그의 온갖 재간이며 실력이 무림의 소위 유명한 고수들이라고 뽐내는

어떤 선배도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놀라운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연자심이라는 아가씨 하나를 보호하지 못하고.

무슨 강호에서 의협을 하겠다고 뽐내는 거냐! '

 

노영탄의 심정은 지극히 우울했다.

부끄러운 생각 앞에 몸둘 곳을 몰랐다.

신룡검이라는 석 자만 생각하면. 노영탄은 근심 .걱정. 놀라움. 분함. 부끄러움 .........

갖가지 착작한 심정에 사로잡혀서 어찌해야 좋을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 대체. 이 신룡검이란 존재가 무엇 때문에 연자심을 납치해 갔단 말인가?

 그 수단과 방법이 강호의 저 뒷골목에서 꿈틀거리는 깡패같이 비루하기 짝이 없는 짓이 아닌가!

 아니꼬운 놈! 연자심을 납치해 가면서 종이 한 장을 남기고 달아나다니? '

 

한 가지 한 가지가 생각할수록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기만 했다.

하루 진종일 노영탄은 잠시도 몸을 멈추지 않았다.

회안성 안으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내공이 탁월한 힘으로 웬만한 일이면 견디어 나갈 수 있는 노영탄도 배가 너무나 고픈지라.

우선 성 안으로 들어서서 주루를 찾아 술과 음식을 든든히 먹고 나서 일을 치를 작정을 했다.

이미 금사보가 지척지간에 바라다보이고 또 제안받은 시간도 아직 멀었으니.

그만한 여유는 넉넉히 있다는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거리거리에 등불이 막 켜질 무럽이었다.

찻집이며 음식점이며 모두 떠들석하고 웃음과 한담의 꽃이 피어서 가뜩가뜩 손님들이 차 있었으며.

향긋한 술내음과 구수한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며 하늘 높이 퍼져 올라가고 있었다.

노영탄은 널찍하고 큼직한 간판을 걸고 있는 주루를 찾아서 성큼성큼 올라갔다.

주루 안이 한참 손님으로 붐비는 때고 대문간에도 쉴새없이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며.

문 앞에서는 여러 명의 심부름꾼 소년들이 뛰어 들어오고 뛰어 나가고 하면서

손님을 접대하느라고 눈코틀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고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내일 모래가 새로 면목을 세상에 떨치고 뽐내는 회양방과 숭양파가 천하에 공개하고

무술을 경쟁해 보는 날이다.

쌍방의 초청을 받고 싸움을 거들러 몰려든 명수들을 제외하고라도 각 지방의 인물들이.

흑이건 백이건 어느 편을 막론하고 수륙 양로로 분분히 풍문을 듣고 몰려들어서.

이 한판의 분잡한 광경을 구경하고자 하는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강호의 일반적인 관례로 말하자면.

어떤 파나 방 사이에 사사로운 일로 결투해야할 경우에는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단지 쌍방의 당사자들만이지점을 선정하고 시간을 정해 가지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살거머니 서로의 생사를 판가름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코 공개하고 결투하는 법이 없었다.

그 승리나 패배가 누구에게 돌아가든 간에 공개한다면

패배한 편은 물론 얼굴을 들 수 없게 되지만

승리한 편도 역시 똑같이 시끄러워지기 때문이었다.

승리를 한 파에 대해서는 반드시 또 다른 파나 방에서 도전을 하고 덤벼더니

이것이 소위 나무가 크면 바람도 세다는 격이었다.

강호에서 가끔 일어나는 과거의 대결투란 것은 모두가 이렇게 비밀리에 진행되었었다.

그런 사실이 꽤 오랜 시일이 경과되고 나서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무림의 새로운 승자와 패자의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곤 했다.

이와 같은 과거의 관례에 따라서 결투하는 쌍방에서는 자기네들 파나 방의 사람이나 말을

총동원하는 이외에는 아주 특수한 인연으로 친밀하게 지내는 몇몇 친구를 초청해서

싸움을 거들어달라고 부탁을 할 뿐이었다.

소위 무림의 고수급 인물이라는 사람들도 특별한 인연이나 친분이 없는 인물은 애초부터

이런 결투에 참가해 볼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강호에 비록 그 수효는 많다고 하지만 이름 석 자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졸병급 위인이나.

혹은 대단치도 않은 송사리 떼 같은 소두목급 존재들은 더군다나 이런 무시무시한 싸움판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조차 없는 것이었다.

이번에 흑지상인  고비란 자가 세상을 등지고 20여 년 동안이나 깊은 산 속에서

칩거 생활을 하다가 돌연 두 번씩이나 산을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회양방을 맡아서 장악하고 신방으로 개조했다는 사실은 무림에 일대 충격을 주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금모사왕 오빈기가 세상을 떠난 뒤.

회양방이 새로운 기치를 내걸고 운몽노인. 해남인마. 홍의화상. 기경객 등

마귀같은 자들을 총망라하여 전보다도 더 한층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고.

강호의 도의라는 것을 전혀 돌보지 않고 천하를 제패해 보겠다는 야망만 가지고

극악무도한 소행으로 무림을 주름잡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고 무서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당년에 회양방과 숭양파 쌍방이 홍택호 호반의 앵무주에서 일장의 결투를 전개 했을때.

금모사왕은 일찍이 핍박한 정세를 감당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방의 사령기를

숭양파에 바치고 말았다.

그 후에 회양방도 숭양파도 쌍방이 다 같이 자체 내부에서 변고가 발생한 까닭으로.

한때는 지난날의 묵은 셈을 따지고 있을 만한 거를이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이 평온무사하다는 듯한 기색을 가장하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인즉 암암리에 쌍방이 다 같이 극도의 경계심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지난날의 원수와 원한이 조금도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회양방의 입장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생명같은 사령기를 빼앗겼다는 굴욕과 원한을 일각인들 잊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랴!

1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 회양방의 새로운 두령 흑지상인 고비는이제야말로

그 설욕의 시기가성숙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무슨일이 있어도 숭양파에게 해골 사령기를 돌려받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

한편 숭양파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들은 회양방과의 일대 결투 때문에 뜻하지 않았던 허다한 변고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무림 전체의 둘도 없는 지보적 존재인『숭양비급』까지 실종되어 찾아볼 도리조차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일파의 총력을 기울여서 탈취한 회양방의 해골 사령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실제에 있어서 무슨 대단한 소용이 있는 물건이냐!

단지 한 가지 싸움에 승리를 차지했다는 허수아비 같은 상징으로서 존재하는 이외에는

숭양파 전체에 대해서 하등의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물건일 뿐이다.

회양방은 해골 사령기를 도로 찾으려고 무척 애썼다.

접선할 기회만 있으면 어떤 방법도 불사하고 사람을 중간에 내세워서 돌려줄 것을

강력히 요구해 왔다.

그러나숭양파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까닭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안 된다는 한마디로 완강히 거절해 왔다.

흑지상인 고비는 숭양파가 자기편 요구에 응할 만한 가망이 절대로 없다는 마지막 결론을 내렸다.

싸우는 길밖에 없었다.

실력으로 대결하여 승패를 판가름하는 유일한 길이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고비는 이번 기회에 선전포고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전서를 숭양파에 발송했다.

그것은 숭양파와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천하에 공개하여.

무술 실력을 견주어 쌍방의 승패와 존망을 결정하자는 도전이었다.

 숭양파에서는 회양방의 도전장을 받고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여간 근심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도자요. 파의 대표자인 탁창가는 무술을 공개적으로 견주어보고 판가름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한 파의 생사존망의운명을 송두리째 걸어보자는 모험이 될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만일에 패한다면?

무술 실력으로 회양방 놈들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때에는 숭양파의 운명이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무림에 있어서 숭양파란 두번다시 입족할 여지조차 없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의 도전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싸움을 거부할 수 있느냐?

그것은 숭양파로서너무나 비급하고 창피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철장단심 탁창가는 숭양파의 여러 장로급 인물들과 모든 정세와 형편을 검토하고

연구하고 나서야 신중한 태도를 결정했다.

단지 두 갈래 길이 있을 뿐이었다.

하나는 회양방의 도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길.

결국. 숭양파의 전력을 기울려서 회양방과 무술 실력을 견주어보는 길밖에 없다는

비장한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숭양파와 회양방이 쌍방의 태도를 결정하고 천하에 공개해 놓고 무술로 우열을

가려보기로 작정을 했다는 사실은 삽시간에 강호에 소문이 퍼졌다.

각 지방의 무림의 인물들은 남에게 뒤떨어질까 앞을 다투어서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회양 지방으로 몰려들었다.

목숨을 내걸고 무림 전체가 총동원이 되다시피 강호가 들끓는 이 무술대회를

놓치지 않고 구경해야겠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결투라는 무술대회가 열리기 사흘 전부터 금사보의 철통 같은 경계도 해제되었고.

문을 활짝 열어서 시원스럽게 개방해 버렸다.

단지 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일단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규칙을 세웠다.

그리고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미리 입장할 수 없고 대회 당일에야

입장을 허락하여 금사보 안을 참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무술 실력이 보잘것없고 존재도 대단치 않은 졸병들은 제 역량에 자신이없는지라.

감히 입장 시험에 응할 생각도 못하고 대회 당일에 금사보에 들어가볼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또 일부에서는 결투 당일의 광경을 구경하고 싶지만 금사보 안에는 머물러 있기 싫다는

축들이 있어서 회안성 안으로 몰려들어 각각 숙소를 정하고 이날을 기다리고 있는 판이었다.

이런 관계로 노영탄은 주루에 들어갔을 때에 강호 여러 지방에서몰려든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노영탄은 연운항에서 떠나올 때 급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까닭에.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할 겨를이 없었다.

여전히 일개 서생과 같은 몸차림을 하고 보검만을 보따리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걷으로 보면 그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서 길을 가고 있는

시골뜨기 선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루에 들어서니 자리란 자리는 손님들로 가득 차서 웅성우성 떠들 뿐이요.

무슨 제삿날이라도 기다리는 것 같은 흥분되고 설레는 기분이 꽉 차 있었다.

가까스로 빈 틈을 찾아서 자리잡고 앉으니.

그제서야 심부름꾼 녀석이 차를 따라주고 음식 주문을 받았다.

노영탄의 울적한 심사는 이루 형언키 어려웠다.

주루에서 웅성웅성 떠들고 앉아 있는 할 일 없는 사람들과는

전혀 딴판으로 털끝만한 호기심이나 흥분도 일지 않았다.

심부름꾼 녀석에게 술을 주문했다.

술의 힘을 빌어서나마 우울하고 초조한 심정을 잠시라도 잊어보자는 생각이었다.

얼마 안 있자.

술과 안주가 나왔다.

노영탄은 혼자서 술을 따라서 한 모금 마시며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 외관이나 말하고 있는 표정들을 보면.

강호 각 지방에서 몰려든 인물들임을 알 수 있었다.

술을 마시며 떠들고 웃어대고 남쪽 사투리 북쪽 토박이 말들이 한데 뒤범벅이 되어서

악마구리 끓듯 했지만 노영탄은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유심히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중 심한 북쪽 말투로 떠들어대는 장정이 하나 있었다.

 

"듣자니 금사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 시험이란 게.

무술의 외공 내공의 실력이 이만저만한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면

섣불리 응해볼 수없을 만큼 어렵다는걸! "

 

이렇게 북방 말투의 장정이 말을 꺼내자.

옆에서 또 다른 장정이 대뜸 그 말을 받아서떠들어댄다.

 

" 그런데 이렇게 미리 입장을 허락하는 시험이 엄격하다는 것만 보아도 이번 대회가

얼마나 볼만한 것인지를 알 수 있지만 그것보다도 듣자니

이번 무술대회는 양쪽의주요 인물들 이외에 각지에서 아주 굉장한 고수급 인물들이

참가한다던데! "

 

 

이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남방 말투의 목소리로 기탄없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흥! 그까짓 것들 모두 소용없단 말이오!

 무슨 고수니 하고 뻐기는 인물 따위들이 제아무리 수가 많고 재간이 놀랍다 해도.

 저 신룡검이 한번 나타나기만 한다면야 그 따위 놈들도 그의 적수가 되지는 못할 위인들이지! "

 

신룡검! 노영탄은 신룡검이라는 석 자를 듣기만 해도 정신이 바짝 차려지며 더 한층 유심히

그들의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 사람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자리에 같이 앉아 있는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묻는 말이 있었다.

 

" 이 사람아! 요쯤 두세 달 동안 만나는 사람치고 신룡검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대체 신룡검이란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자네는 이 사람이 과연 얼마나 굉장한 인물인지 그걸 자세히 알고 있나? "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마른 기침을 서너 번 하고 나더니

마치 신바람이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 하는 말이.

 

" 내가 모를 리가 있나?

 알고말고. 솔직히 자네들에게 이야기 하지만 ......... "

 

그 사람은 무슨 까닭인지 같이 앉아 있는 여러 친구들을 긴장시키면서.

여기서 말을 일단 중단하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아두 나지막하게 가라앉혀서 다음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 말일세.

이 분이 회양방 가운데서 두령급에 있는 인물 하나를 잘 아시는데.

그 두령급 인물이 일찍이 우리 스승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거든 ........

언젠가 한번 해남인마란 자와 이 신룡검이 맞딱뜨리게 되었는데.

불과 십여 차례 왔다갔다 대결하는 채 하다가

해남인마가 당장에 감당을 못하고 쓰러져버렸다고.

이런 일이 있은 뒤에.

해남인마가 직접 대결해 본 경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데 ........

저 신룡검이란 인물은 어느 파를 막론하고

그에게 능히 견뎌낼 만한 적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더라네.

이만하면 이 사람의 무술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나 말일세!

웬만한 위인이야 어디 그 앞에서 얼씬해 보겠나! "

 

비록 말하는 사람의 음성이 아주 낮다고는 하지만.

노영탄은 그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듣고 있었다.

남몰래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표면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체.

혼자서 술을 따라 마시면서 태연히 앉아 있었다.

 

' 신룡검이란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이들이 화제에 오르고있는 것이냐!

  난데없이 나타나서 귀신처럼 연자심을 납치해 간 괴상한 인물! "

 

노영탄은 금사보에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지 이 신룡검이라는 위인의 정체를

파악하고 싶은 긴장된 심정을 꾹 누르느라고 야무지게 목구멍을 찌르는 배갈 한 잔을

단숨에 훅 들이키면서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게 말일세. 또 언젠가 한번은 저 숭양파의 장로급 인물들 세 사람도.

이 신룡검이란 사람에게 굉장한 희롱을 당하고 말았다거든.

그런데도 그들 세 장로는 신룡검이라는 인물의 외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조차 똑똑히 알지도 못한다는 거야 .......

그래서 그 사람을 신룡검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걸세! "

 

옆에 있는 몇몇 친구들의 표정들이 몹시 심각해졌다.

 

' 이 강호에 이렇게 굉장하다면서도 괴상한 인물이 있단 말인가? '

 

그것을 한번 구경해 보고 싶다는 극도의 호기심에서.

그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얼굴마다 경탄과 신비가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장정은 점점 더 의기양양해지는 듯.

그역시 일부러 신비스러운 표정을 해가면서 또 다음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 신룡검이란 인물은 귀신 같은 놀라운 재간보다도.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거든! 그건 말일세 ........ 아주괴상한 일이지만.

회양방이나 수양파가 똑같이 이 신룡검이란 인물이 과연 그들의 적인지.

친구인지 자기편인지 남의 편인지 그걸 분간할 수 없다는 사실일세.

이렇게 되고 보니.

쌍방에서 다 같이 이런 놀라운 인물을 제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할 것이 아니겠나!

그러면 이번 무술대회에 이 신룡검이란 인물이 참가하느냐?

참가한다면 어느편을 거들어서 그의 귀신같은 재간을 발휘할 것이냐?

이 점이 바로 기막히게 흥미진진하고 구경할 만한 일이란 말일세! "

 

 무턱대고 여러 사람들을 긴장시키느라고 신바람이 나서 수근거리는

이 장정의 자나쳐가는 이야기가 얼마간 허풍이 섞여서 전적으로 믿을 만한 말은

못 된다손 치더라도 노영탄으로서는 이 궁리 저 궁리 여러 모로 생각해 보고.

극도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역시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 이 자들의 주고받는 말을 종합해 보자면.

결국 신룡검이라는 인물은 정파냐 사파냐 그것조차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위인인 모양인데 .......

그렇다면 어째서?

나와 무슨 인연이나 불가피한 관계가 있어서 내게서 연자심을 빼앗아 갔단 말인가? '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봤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그것이 누구라는 것도 생각해 낼 수 없으니.

연자심을 밤중에 납치해간 까닭은 더욱 생각해 낼 길이 없었다.

옆 상에 몰려 앉은 몇몇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 이상 계속되지는 않았다.

행여나 그밖에 또 무슨 별다른 이야기들이 없나 해서 아무리 귀를 기울여보아도.

그들의 입을 통해 신룡검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 신룡검이라는 괴상한 인물이 그 누구라 해도 좋다!

 연자심을 찾기 위해선 무림의 어떤 거물이요.

 또 어떤 신출귀몰한 재간을 지닌 위인 일지라도 맞닥뜨려보는 도리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우선 지시한 장소까지 가보자! '

 

노영탄은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했다.

한 주전자나 되는 배갈을 혼자서 다 마시고 밥도 좀 뜨는 체하며 안주 몇 가지를 집어먹고 나니.

그 이상 주루에 앉아 있을 맛이 없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셈을 치러주고 밖으로 나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

노영탄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짓으로 심부름꾼 녀석을 불렸더니.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심부름꾼 녀석이 웬일인지 히죽히죽 웃는 낯을 하고

노영탄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허리를 굽실하면서.

 

" 손님께선 술을 더 들지 않으시렵니까? "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노영탄은 그 심부름꾼 녀석이 무슨 뜻이 있어서 이런 말을 묻는지

전혀 생각지 못하고 무심결에 손을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 아니. 그만........  음식 값이나 계산해 주게! "

 

젊은 심부름꾼 녀석은 여전히 히죽히죽 웃으면서 그제서야 이런 말을 했다.

 

" 손님께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잡수신 음식 값은 벌써 셈이 다 됐으니까요.

또 그 셈을 치르고 가신 서방님께서.

무슨 말씀을 전해 달라고 아마 저편 회계 보는 곳에 일러놓고 가셨을 겝니다. "

 

" 뭐라고? 어떤 서방님이 내가 먹은 음식 값을 셈하고 갔다고? "

 

노영탄은 깜짝 놀랐다.

영문을 몰라서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이상스럽다는 눈초리로 심부름꾼 녀섯을 쏘아보며 시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로군 그래!  나는 이 주루에 혼자서 온 사람인데 ........ 그럴 리가? "

 

심부름꾼 녀석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선뜻 대답했다.

 

" 맞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 서방님께서 손님이 잡수신 음식 값을 대신 치러고 가시는 거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니까요. "

 

이렇게 되고 보니 노영탄은 더욱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 흠. 내가 먹은 음식 값을 먼저 셈해 주고 간 사람이 분명히 있다고?

어떻게 생긴 사람이든가?  나이는 얼마나 돼 보이고? "

 

심부름꾼 녀석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입을 씰룩씰룩하며

눈매에 아첨에 가까운 미소를 띠어가며 말했다.

 

" 헤헤 ........ 그 서방님은 아주 귀공자이시던데요.

준수하게 생기신 데다가 손님보다는 키가 약간 작으신 편이더군요.

옷차림도 점잖으시고 또 돈을 쓰시는 품이 아두 저희들에게도 은전을 듬뿍 집어주시고  .......

그렇게 깨끗하고 점잖으신 서방님을 저희들은 처음 뵈었는 걸요!

손님께서두 보기 드물게 잘생기신 얼굴이지만.

그 서방님께서도 말쑥하시고 점잖으신 선비 .........

여자들이 보면 단번에 홀딱 반할 만큼 살결도 희시고.

늠름하신 품이 아주 미끈하고 맵시 있고 그런데도 위엄이 있어 보이시고 ....... "

 

심부름꾼 녀석은 정말 반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 정체불명의 서방님이라는 존재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노영탄은 시끄러운 생각이 들고 또 궁금증이 앞서서 딱 잘라서 물었다.

 

" 이 사람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나하고는 상관없으니 그만두고.

  그래 무슨 말을 나한테 전하라고 했단 말인가? "

 

심부름꾼 녀석은 그제서야 정신이 든 것처럼 정색을 하고 공손히 말했다.

 

" 네. 그건 저희들은 잘 모릅니다.

저희 회계 보는 곳에 무슨 쪽지를 한 장 맡겨놓고 가신 것 같은데.

거기 가 보시면 자연 아실 수 있을 겁니다. "

 

노영탄은 그 이상 더 물어볼  필요도 없어서 선뜻 회계 보는 곳으로 달려갔다.

주루의 셈을 맡아보고 있는 늙수레한 영감이 노영탄을 보기가 무섭게

종이 쪽지 한 장을 대뜸 내어주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 이걸 어떤 서방님께서 손님께 드리라고 써놓고 가셨습니다.

그 서방님은 분부하시기를 손님께서 음식을 다 잡수실 때까지는 절대로

아는 체를 해서 시끄럽게 해드리지 말고 식사가 다 끝내시고 돌아가실 때

이 쪽지를 드리도록 해달라고 하셨는 지라.

저희들도 감히 먼저 연락해 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노영탄에게는 그런 말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로채듯 그 종이 쪽지를 선뜻 받아들고 펼쳐보았다.

단숨에 필적을 훑어 내려갔다.

불과 서너 줄밖에 안 되는 글이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연운항 여인숙.

연자심이 자던 방에서 발견했던 종이 쪽지의 필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같은 사람의 손으로 씌어진 글씨 같지는 않았다.

그 종이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그간 별고 없소?

만나보고 싶소.

봉황파 앞에서 이경 때쯤 기다리고 있겠소.

 

 

이 종이 쪽지 위에도 역시 서명은 없었다.

그리고 그전 것과 똑같이 맨 끝에 신룡검이라는 석 자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노영탄은 종이 쪽지를 다 보고 나자.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대는 심정이었다.

생각하면 이 신룡검이라는 인물이 이다지도 신비스러울 정도로 자취를 감추고

표연히 그림자처럼 자기의 뒤를 쫓아다니고 있는 것 같아서 적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쁘다는 것은 어찌 됐든 어떤 인물이든 간에 신룡검이라는 인물이

이 고장에 형체를 드러냈다는 사실이었다.

 

' 어쨌든 잘됐다! 무술이 제아무리 놀랍다 해도 그형체를 맞닥뜨려볼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연자심의 행방을 추궁할 수 있을 것이니 ............

그런데 이상한 일이 아닌가?

종이 쪽지의 필적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의 필적이라니?

도저히 한 사람의 글씨라고는 볼 수 없는데

그렇다면 신룡검이란 인물이 둘이 있다는 건가?

어떤 한 사람의 장난질일까? '

 

노영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의혹을 풀 길이없었다.

먼저 받은 것과 나중에 받은 것이 그 필적이 전혀 다르면서도 맨 끝에는 한결같이

신룡검이라는 석 자가 기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갈피를 잡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사건의 초점인 그 인물이 주변에 나타나서 만나자고 하니.

노영탄은 적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무엇을 더 망설일 필요도 없고 해서 즉시 그 종이 쪽지를 주머니 속에 쑤셔넣고

회계 보는 유리창 넘으로 물어봤다.

 

" 봉황파가 어디 있소? 어떻게 가면 되오? 또 여기서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 "

 

셈을 맡아본다는 늙수그레한 영감이 서슴치 않고 대답해 주었다.

 

" 봉황파란 곳은 바로 성 서쪽 교외에 있습니다.

성벽과 접근해 있는 말하자면 성의 변두리 지점이죠.

거리라 해야 여기서 그다지 먼 길도 아니구요. "

 

이렇게 대답을 해놓고 나서 연거푸 묻는 말이 있었다.

 

" 손님께선 그곳을 무슨 이유로 물어십니까? "

 

노영판이 영감의 안색을 흘끗 살펴보자니

왜 그런지 놀랍다는 기색을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무슨 딴 의미가 있어서  이런 말을 묻는 것만 같았다.

노영탄은 그대로 반문했다.

 

" 왜 그러시오? 그곳이 어떠한 곳이기에? "

 

셈 보는 영감은 한동안 무엇인지 꽤 망설이더니 아주 점잖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곳에는 강물이 흐러고 있고 그 강가로는 함부로 흩어진

무덤들이 여기저기 울퉁불퉁 삐져나와 있어서 별로 찾아가는 사람이 없다시피

하는 곳이어서 ......... "

 

노영탄은 부지중 머리를 끄덕끄덕해 보이면서 말했다.

 

" 흠. 알고보니 거기가 그런 곳이란 말이지! "

 

말을 하면서 회계 보는 유리창에다 대고 또 한번 고갯짓을 해서 작별의 인사를 표하고.

노영탄은 주루 밖으로 나와버렸다.

회안이라는 고장은 강북 지방에서는 손꼽히는 큰 성이었다.

상업이 번창할 뿐만 아니라

인구가 조밀하여 큰 거리마다 오가는 행인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번거롭고 싞럽기가 이를 데 없는 고장이어서 때는 밤인데도 떠들석한 소음이

거리거리에 가득 차 있었다.

노영탄은 큰 거리를 이리저리 한바탕 구경하고 나서야 아무 데나 눈에 띄는 대로

여인숙 한 군데를 잡아서 일찌감치 방에 들어 자리에 누웠다.

이번에야말로 정신을 바싹 차리고 용의주도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떤 놈에게 또 골탕을 먹거나 농락을 당하게 될까 싶어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의복을 상 위에 단정히 개놓고 푹 쉬면서 정신과 정력을 가다듬었다.

밤중에 신룡검이 부르는 장소까지 가볼 작정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경을 치는 딱따기 소리가 들려왔다.

노영탄은 자리에서 벌떡 뛰어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단단히 하고 금서 보검을 둘러메고 보따리를 옆구리에 질끈 동여맸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방문을 안에서 잠가버리고 창문을 열어젖힌 뒤 흘쩍 뛰어넘어서 밖으로 나왔다.

큰 길로 나서니 집도 없는 들개들이 갈팡질팡 꼬리를 함부로 휘두르며 어둠 속을 해맬 뿐.

하늘에는 별이 총총 박혔으나 사방은아두컴컴했고 때는 초가을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후덥지근한 기운에 싸여 있다가 갑자기 시원스런 바람을 쐬니.

정신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영탄은 주루에서 셈 보는 영감이 일러준 대로 길을 찾아서 큰 거리를 꿰뚫고

성 저편으로 비호같이 몸을 날렸다.

반 시간도 채 못 됐을 때 벌써 성벽밑에 와 있었다.

몸을 흘쩍 날려서 성을 넘어가기만 하면 바로 봉황파란 곳이다.

깊은 밤중이니 성문이 단단히 잠겨져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노영탄은 성벽을 위어래로 더듬어보았다.

눈짐작으로 그것은 5. 6장은 충분히 돼 보였다.

흘쩍 몸을 날려 단숨에 성 위에 올라섰다.

성 밖 장벽 밑을 내려다보니 과연 한 줄기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아주 평온하게 잔잔히 흐르고 있는 편이고.

그 폭이 10여 장이나 되게 널찍해 보였으며.

그 양편 언덕으로는 확실히 수많은 무덤들이 불쑥불쑥 여기저기 함부로 흩어져 있었다.

노영탄은 극도로 긴장된 정신을 침착하게 가라앉히면서 몸을 가볍게 날려 성 밖으로 내려섰다.

내려선 지점은 바로 강가에서 무덤들이 울퉁불퉁 삐져나와 있는 한복판이었다.

노영탄은 막 땅 위에 내려섰을 때 돌연 오른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무덤 하나가 유난히

높직하게 불쑥 솟아 있는 뒤쪽에서 귀신의 장난과도 같이 껄껄거리고 냉소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노영탄은 전신을 오싹 떨었다.

그 웃음소리는 날카롭고 싸늘하여 사람의 등들미에 별안간 냉수를 퍼붓는 것같이 소름끼치는

음성이었다.

무술에 있어서 남 못지않은 기술을 몸에 지니고 있으며 대담하기로도 누구에게 질 리 없는

노영탄이지만 이깊은 밤중 무덤 속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터져나오는 웃음소리에는.

일시나마 전신이 바르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번쩍! 번개 같은 안광으로 단숨에 사방을 휩쓸어 보았다.

울퉁불퉁 삐져나온 수많은 무덤들 위에 무성한 잡초가 번쩍번쩍 바라다보일 뿐.

그밖에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노영탄은 그 웃음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 곳에 버티고 서서 불똥이라도 튈 것 같은 매서운 눈초리로 웃음소리가 들려오던

방향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암암리에 전신의 힘을 한 곳으로 모으며 만반의 방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라도 다시 들려오기만 한다면.

노영탄은 즉각에 손을 써서 상대에게 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마치 귀신의 장난 같은 웃음소리가 드려오는 지점과 노영탄이 몸을 버티고 서 있는 지점의

거리는 불과 10여 장밖에 되지 않았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기는 하지만 노영탄은 어둠 속에서도 능히 사물을 알아볼 수 있는

남다른 안광의 힘을 가졌으니 넉넉히 이만한 거리 밖의 정세를 살펴낼 수 있을 터인데

이번 경우만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노영탄이 버티고 서 있는 지점과 저편 웃음소리가 나던 무덤 뒤 지점 사이에는

여러 개의 높고 낮은 무덤들이 울퉁불퉁 가로막혀 있었으며 그 무덤 하나하나 마다

잡초가 길고 덥수룩하게 무성하여 시선이 뚫고 나갈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영탄은 어쩔 수 없이 한참 동안이나 조용히 기다려보았다.

죽음 같은 적막 속에서 그 소리는 두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이틈을 타서노영탄은 몸 안에 축적되어 있는 진기를 전신에 불러일어키고 암암리리에

일촉즉발의 기세로 수비와 공격의 태세를 갖추고서 침통하고 엄격한 목소리로 소리쳐보았다.

 

" 신룡검이란 쟁쟁하신 대명은 일찍부터 잘 기억하고 있었소!

이 노영탄과 더불어 이 자리에서 만나실 약속을 먼저 지시했으면.

어찌하여 정정당당히 대장부의 면목을 드러내지 않으시오? "

입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노영탄의 두 눈동자는 매서운 광채를 발산하며

한번 깜박이는 법도 없이 앞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어떤 사람이든 무엇이든 간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드려온다면 즉각에 들이치고

추호의 여유도 주지 않고 육박해 들어갈 판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노영탄의 말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시커먼 죽음 같은 적막이 무덤과 무덤 사이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요.

인기척이라곤 통 들려오는 것이 없었다.

 

' 내가 착각을 일으켰었나?  어떤 환각이었을까? '

 

이렇게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어보았으나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노영탄은 분명히 사람의 음성이 껄껄거리고 냉소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을 뿐더러.

어떤 음성조차 들려오는 것이 없으니.

이는 점점 더 노영탄을 긴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 신룡검이라는 위인은 지시한 장소인 이곳에까지 나타나기는 했으나.

갑자기 대적할 만한 용기가 없어서 겁을 집어먹고 감히 내닫지를 못하고

어느 무덤 뒤에 숨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구태여 먼저 시간을 정하여 만나자고 할 필요가 무엇이며.

또 먼저 여기 와서 기다리고 있을 까닭이 무엇일까?

그가 두 번씩이나 남긴 종이 쪽지로 보아서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이다.

결코 장난질을 치는 허튼 수작이 아닐 게다! '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런 생각에서도 노영탄은 또 한번 점잖은 목소리로

위엄 있게 소리를 질러보았다.

 

" 어떤 친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대가 이 이상 내 앞에 나타나기를 꺼린다면.

  이 노영탄도 이 자리에 더 오래 있지는 않겠소! "

 

말을마치자마자.

노영탄은 흘쩍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 깊은 밤중.

무덤이 즐비하게 깔려 있는 칠흑같이 어둡고 괴상망측한 지점에서.

언제까지나 상대방의 희롱만 당하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에서 발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장 저편 무덤 뒤를 목표로 비호같이 몸을 날렸다.

왼손으로는 앞가슴을 호위하면서 상대방의 다음 순간의 공세에 대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오른손으로는 보검을 비스듬히 휘두르며

마치 한 개의 화살이 날아들 듯.

몸 전체가 한 개비의 나뭇가지처럼 어두운 공간을 단숨에 넘어섰다.

전광석화와 같은 행동이었다.

몸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몸이 바로 그 무덤 뒤에 제대로 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영탄은 두 눈을 크게 떠서 살펴보았다.

그 순간 .........

 

" 아니! 이건? "

 

놀라운 심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마디 소리를 입 밖으로 튀어나오게 했다.

 

' 이건 정말. 사람을 뭘로 알고 이렇게 희롱할까! '

 

알고보니

무덤 뒤에는 티끌만한 물건도 없었다.

텅 빈 시커먼 공지 위에 몇 무더기 잡초들이 얽히고 설켜서 함부로 무성해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비슷한 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렇게 되고보니 그렇게 무술 실력이 대단하고 또한 대담무쌍한 점에서도

결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노영탄도 가슴이 섬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신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몸에 붙은 솜틀이란 솜틀이 모조리 삐쭉 일어서는 것 같았다.

 

'이게 뭐란 말인가?  어찌 된 셈인가?  귀신의 장난이란 말인가?

사람이 한 짓이라면 이렇게 날쌔게 나의 시야에서 뺑소니를 쳐버릴 수 있을 것인가? '

 

다음 순간 놀라움이 일종의 허탈 상태로 변했다.

하도 어쳐구니가 없는 일에 그저 어리둥절해서 무덤의 주변을 넋을 잃고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노영탄의 등들미에서 난데없이 또 한번 껄껄거리고 냉소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는 분명히먼저 들려온 냉소 소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노영탄은 정신을 바싹 차렸다.

 

'이놈!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지 않는다! '

 

노영탄은 이를 악물었다.

두 눈동자가 극도로 긴장해서 시커먼 어둠 속에서 새파랗게 매서운 광채를 발사했다.

몸을 꿈틀하면서 동시에 홱 돌렸다.

무엇을 바라다보고 확인하고 할 겨를도 없이

또 상대방에게 털끝만한 여유도 주지 않을 생각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그대로 흘쩍 날아서 소리가 나는 지점을 향해 쏜살같이 육박해 들어갔다.

몸을 땅에서 솟구쳐 올리는 찰나에야 10여 장쯤 떨어진 앞으로 한 줄기 시커먼 사람의

그림자가 노영탄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그 그림자는 강가를 향해 비호같이 달아나는 것이었다.

시커먼 사람의 그림자가 몸을 쓰는 품이 빠르기가 한 마리 새가 날아가는 것 같았고.

전광이 번쩍하는 것 갔았다.

 

'흠! 그러면 그렇지! 네놈이었구나? 이제는 호락호락 달아나지는 못할 걸! '

 

한번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한 이상 절대로 놓쳐버릴 노영탄이 아니었다.

경각을 지체치 않고 두 발로 땅바닥을 쿵 하고 한번 굴렸다.

몸이 허공으로 또 한번 떴다.

다짜고짜로 그 시커먼 그림자의 뒤를 쫓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노영탄은 큰 소리로 외쳤다.

 

" 친구! 그대는 이대로 달아나버리고 말 작정인가? "

 

시커먼 그림자는 노영탄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을 터인데도.

달아나는 몸을 멈추려 들지 않았다.

머리를 돌려서 뒤를 한번 돌아다보는 기색도 없었다.

여전히 강가를 향하고 몸을 급히 날릴 뿐이었다.

노영탄은 초조하면서도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없었다.

몸에 지니고 있는 온갖 힘을 뽑아내기로 결심을 했다.

전광이 번쩍하듯이 별이 곤두박히듯이 날쌘 동작으로

그대로 몸을 날려 덮치고 들어갔다.

그 시커먼 그림자의 거리가 10여 장이나 떨어져 있었고

또 상대방의 몸을 날리는 품이 지극히 빠르다고는 하지만.

한번 노영탄이 온갖 힘을 뽑아냈을 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불쑥불쑥 불과 몸을 두 번 허공에서 꿈틀거렸을 때.

벌써 시커먼 그림자와의 거리는 절반이나 단축되어서

불과 너댓 장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렇게 단숨에 뒤를 바짝 쫓아간 노영탄은 이 짧은 순간에도

상대방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시커먼 그림자의 무술 실력은 확실히 노영탄을 따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도 이미 무술의 불가사이한 비경에까지 도달한 인물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 흠. 어지간히 세련된 솜씨인데! '

 

노영탄이 이런 판단을 내리고 있는 순간에.

그들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강가가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노영탄은 두말 할 것 없이 이번에는 몸을 송두리째 던져서

그대로 육박해 들어갈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때 그 시커먼 그림자는 갑자기 주춤하고 동작을 멈추었다.

홱! 바람처럼 몸을 이편으로 돌리더니 엉거주춤하고허리를 구부리는가 하는 찰나에.

한쪽 손을 쳐들었다.

쉭! 손바람을 일으켜서 공격을 가해 오는 것이 분명했다.

 

" 좋아! 잘됐어! "

 

노영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걸걸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몸을 똑바로 꼿꼿이 가누면서. 한편으로는 보검으로 앞거슴을 방비하고

왼손을 높이 쳐들어서 대결의 태세를 갖추었다.

노영탄도 즉각에 손바람을 일으켜서 시커먼 그림자의 손바람을 가로막았다.

이순간 노영탄은 통쾌하고 기쁜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 어차치 맞닥뜨려야만 될 상대라면 통쾌하게 한시바삐 대결해 보는 것이 피차간에 ........ '

 

이렇게 마음을 든든히 먹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 시커먼 그림자가 몸을 한번 멈추고 반격을 가해 온다면 그 틈을 타서.

노영탄은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깝게 그에게 육박해 들어갈 수 있을 뿐더러.

이렇게 양쪽이 한번 맞붙기만 한다면 승패를 가리지 않고는 어느 편이고

그대로 돌아서지 않을 것이 뻔한 노릇이기 때문에.

 노영탄은 그 시커먼 그림자가 손을 쓰기 시작하고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을 때.

최후의 일각을 각오하고 통쾌함과 기쁨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손바람고 손바람이 맞부딪쳤다.

힘과 힘이 일 대 일로 공간의 한 점에서 불이라고 튈  듯이 맞닥뜨린 것이다.

그 순간 노영탄은어떤 음침하고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바람의 힘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쏘아 들어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영탄은 두 번째로 한쪽 팔을 맹렬히 휘둘렸다.

제2탄의 장풍을 발사하는 것이었다.

첫번째 손바람과 손바람이 맞닥뜨려서 서로 잔뜩 물고 놓지 않으려는 듯 버티게 됐을 때.

그 시커먼 그림자의 몸은 지탱하기 어렵다는 듯 한 번 바르르 떨었다.

굉장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손바람과 손바람이 두 번째 대결하게 되고.

노영탄이 억센 제2탄을 발사했을 때

그 시커먼 그림자는 갑자기 손을 재빨리 거두어 들이더니

몸을 한쪽으로 비스듬이 빼고 빠져나갈 기세를 보였다.

또 다시 몸을 흘쩍 날려서 이 긴장된 장면에서 몸을 빼자는 눈치였다.

그런 속셈을 알아챈 노영탄이 그렇게 만만히 놓아 보낼 리 없었다.

노영탄도 그 그림자와 똑같이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올리며

상대방의 등들미에다 공격을 가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서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 신룡검이란. 알고보니 이렇게 사람을 대하기 두려워하는 졸장부였던가! "

 

노영탄의 호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시커먼 그림자는 지극히 가라앉은 침통한 음성으로 노영탄과 똑같이 소리를 질렸다.

 

" 자! 할 테면 해보지! "

 

그와 똑같은 찰나에.

한 줄기 시커먼광채가 화살같이 앞으로 쏘아 들어왔다.

노영탄은 이 뜻하지 않은 상대방의 역습에 그 이상 더 쫓어갈 겨를도 없이

몸을 멈추고 두 다리를 버티는 도리밖에 없었다.

시커먼 광채.

그것은 분명히 어떤 흉기를 쓰고 넘벼드는 게 뻔했다.

그러나 노영탄은 상대방에게 일장을 가해 놓은 채.

아직 그것을 거둬들이지 않는 순간이었는 지라.

손바닥 힘을 슬쩍 한쪽으로 비스듬이 비트는 체하고

날아드는 흉기를 교묘하게 막아내서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노영탄은 스승을 섬기고 무술을 연마한 이래.

가지각색의 흉기를 쓰는 법을 배웠고 또 쓸 줄도 알지만.

한번도 몸에 어떤 괴상한 연장이나 흉기를 지녀본 일이 없었다.

흉기를 써서 사람을 상하게 한다든지 하는 일은 노영탄으로서는 생각도 못 할 일이며.

부득이한 경우에만 겨우 꽃을 날리고 나무의 잎사귀를 쳐버리고 하는 정도의 재간을

응용할 뿐이었다.

 

' 신룡검쯤 되는 거물급 인물이 비급하게도 괴상한 흉기를 쓰다니? '

 

이렇게생각했을 때 노영탄은 괘심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일종의 형언키 어려운 분노의 불덩어리가 가슴 한복판으로 뭉클하게 치밀어오르는 순간

노영탄은 재빨리 왼손을 써서 손바람을 일어켜 시커먼 어둠 속에서 비호처럼 날아드는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흉기를 거침없이 막아냈다.

손바람 앞에 가로막혀버린 그 흉기란 것은 노영탄의 신변에까지 오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땅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 응? 이건? '

 

그 흉기를 문제없이 가볍게 막았지만 노영탄은 도리어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시커먼 어둠 속에서 발사한 흉기란 것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인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흉기가 아니었고 단지 한 개의 똘똘뭉친 하얀 종이 조각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혀서.

노영탄은 허리를 굽히고 땅 위에 떨어진 종이 조각을 집어올렸다.

그리고 노영탄이 몸을 일어키고 허리를 퍼서 다시 머리를 쳐들고

앞을 바라다봤을 때에는 그 시커먼 사람의 그림자는 벌써 어디론지

종적을 감추고 찾아볼 수 없었다.

손 안에 그 종이 조각을 움켜쥐면서 노영탄은 퍼뜩 깨닫는 바가 있었다.

 

' 이 시커먼 그림자는 반드시 고의로 나를 여기까지 유인해 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나를 만나자는 것이 아니고

이 종이 조각을 전해 주자는 데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여기에는 무슨 심상치 않은 깊은 까닭이 있을 것이 아닌가. '

 

노영탄은 급히 그 똘똘 뭉쳐진 종이 조각을 펼쳐보았다.

그 위에는 간단히 한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내일 금사보에 나갈 때. 누구보다도 신룡검을 정신 차리고 방비하시오.

 

펼쳐진 종이 쪽지 위에는 서명 같은 것은 통 없었다.

어떤 암호 같은 것도 없었다.

노영탄은 그것을 보자.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분명히 신룡검이란 자가 이곳에 시간을 정하고 나를 나오게 한 것인데.

어째서 신룡검을 정신 차려 방비하라는 것일까?

그러면 신룡검이란 인물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란 말인가? '

 

노영탄은 그 종이 쪽지를 손 안에 움켜쥔 채로 한참 동안이나

칠흑같은 어둠 속에 우두커니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다가.

간신히 꿈속에서 깨어난 사람같이 정신을 차려서 하늘 저편을 바라다보았다.

때는 이미 사경이나 된 성 싶었다.

간단히 풀 수 없는 의심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로

그는 빨리 성 안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음 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