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31장 여인실종(女人失踪)

오늘의 쉼터 2013. 12. 13. 22:46

정협지(情俠誌)

 

31 여인실종(女人失踪)

 

사라진 연자심 

 

 

노영탄과 연자심은 그들의 일거일동에 세심한 신경을 썼으며 매사에 조심조심

절대로 남에게 꼬리를 잡히지 않도록 비상한 노력을 했다.

또 응유산에 한번 바다 괴물이 출몰한 이후로는 감히 여기접근하려는 사람이

없어서이들 두 젊은이들의 섬 속 은거 생활은 좀처럼 남의 눈에 뜨일 리가 없었다.

1년이란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또 가을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감추어두었던 보물도 찾아냈고.

바다 괴물도 깨끗이 퇴치해 버렸는지라.

이 응유산 속에 은거하면서 두 사람만의 조용하고 한가로운 나날을 흐뭇하게 보냈다.

무술을 연마하는 일 이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노영탄은 자신의 무술이 크게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저 동굴 속에서 알게된 네 가지의 독특한 무술 술법을 심혈을 기울려가며 연구하고

실천해 보았고 또 한편으로는 연자심을 돕고 지도하여 연습에 정진하도록 했다.

이 깊은 산 속에서 년을 지내고 보니 .

이 두 젊은이들이 비록 이런 조용하고 한적한 생활을 즐겨한다고는 하지만.

세상만사를 멀리 떨어져서 완전히 등지고 털끝만한 소식도 접해볼 기회가 없으니.

자연 궁금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더군다나 노영탄은 자기의 처지나 신세를 생각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 노성의 임종시의

유언을 생활할 때마다 가슴을 칼로 에는 것만 같이 괴롭고 초조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한시 바삐 강호로 다시 나가서 그의 형을 찾아봐야겠다는 일념이 떠나는 날이 없었다.

하물며 당년에 스승의 명령을 받들고 이곳에까지 와서 보물을 발굴해 냈음은 그 목적이

오로지 괴로운 사람. 외로운 사람. 약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있었음에랴!

이제 보물도 뜻대로 찾아냈고 무술도 정진에 정진을 쌓은 오늘날.

그대로 이 깊은 산 속에 칩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개인의 향락에만 도취해서

나날을 보낸다는 것은 젊은 사람으로서 너무나 보람 없는 일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스승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 '

 

이를 때마다 노영탄을 채찍질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은

역시 남해어부 상관학의 위엄에 가득 찬 거룩한 모습이었다.

젊은 마음은 한번 결심하면 걷잡을 수가 없었다.

또 연자심도 벌써부터 강호 땅을 한번 활동해 보고 싶다는 염원이 간절했다.

두 사함은 서로 상의한 끝에 결국 그들의 의협심을 발휘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과감히 바깥 세상으로 나가보기로 결심을 단단히 했다.

 

" 좋아요! 저도 이 깊은 산 속에서 영원히 이런 날만 보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좀 ......

  따라다니면서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드릴 수 있다면 서슴치 않고 ........... "

 

연자심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다.

여름이 다 가고 초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이었다.

두 젊은이들은 행장을 적당히 꾸려 나무 속 집을 단단히 잠그고 산꼭대기에서 내려왔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한 쌍의 부부처럼 나란히 나룻배를 탔다.

다시금 속세로 들어가는 것이다.

곧장 연운항으로 배를 몰았다.

비록 그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이 노영탄의 손에 찔려 죽었다고는 하지만.

응유산 일대는 여전히 죽음의 지역이었다.

갖가지 배들이 아직도 길을 멀리 돌아서 왕래하고 있었다.

두 젊은이들이 떠났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는지라

더군다나 오가는 배라고는 한 척도 구경할 수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그들은 벌써 연운항에 배를 대었다.

아침 시간이 아직도 이르기는 했지만 멀리 강변 저편을 바라보니

큰 거리에는 벌써 사람들이 조수처럼 밀려다니며 옹기종기 다닥다닥 맞붙어 있는

수많은 상점들도 이미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항구와 부두 근처에서도 떠나가고 들어오는 배들로 웅성웅성 떠들썩대기 시작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나룻배를 항구로 들이댄 다음에 곧 돛을 내려서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부두의 빈 자리를 찾아 접근해 들어갔다.

바로 이때. 홀연 한 척의 중형 범선이 돛을 높이 올리고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자그마한 나룻배 뒤에 쏜살같이 나타났다.

벌써 항구 안에 들어오고 있는데도 그 중형 범선은 여전히 돛을 할짝 펼쳐서

높이 올리고 물결을 요란스럽게 헤치며 화살이 스쳐 지나가는 듯.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나룻배 바로 옆을 건드릴 듯 위태롭게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이때 바로 배꼬리에 앉아 있었다.

강변 저편 언덕 위를 멀리 바라보면서 서로 웃어가며 이야기를 주고받느라고

그 중형 범선이 그들의 나룻배를 스칠 듯 지나쳐 달아나는 것도 흘끗 무심결에

한번 바라다보았을 뿐 별로 주의해서 건너다 보지 않았다.

그 중형 범선은 선창 안에 수많은 여객들을 싣고 있었다.

어느 먼 곳에서 이 항구로 들어오는 범선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 수많은 여객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체구의 몹시 건장한 장정 하나가

노영탄과 연자심의 나룻배를 스칠 듯이 지나쳐 가는 순간에.

왜 그런지 무엇에 찔린 듯이 뜨끔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연자심의 얼굴을 뚫어져라 몇 번이고 노려보았다.

두 배의 거리가 몹시 가깝다고는 하지만 배와 배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매우 짧았는 지라.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시선은 돛대에 가로막혀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체구가 건장한 장정은 몇 번이고 선창 밖으로 머리를 길게 뽑아서

이편의 나룻배를 유심히 바라보려 애썼으나 노영탄과 연자심이 타고 있는 배는

그때 벌써 뱃머리를 빙 돌려서 강기슭에 가까운 부두의 빈 자리를 향해 유유히 들어가고 있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나룻배가 강기슭에 닿자.

동아줄로 단단히 매놓고 보따리를 집어들고  언덕으로 올라서서 큰 거리로 서슴치 않고 들어섰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예전에 한번 들러서 음식을 먹은 일이 있던 주관 열빈루 앞에 다다랐다.

두 사람이 막 2층을 올려다보며 기웃거리고 있을 때.

문간에 서 있던 심부름꾼 녀석이 어느 틈에 알아보았는지 반색을 하며 그들을 맞아들였다.

 

" 서방님! 이층으로 올라가셔서 쉬시죠! "

 

하면서 안에다 대고 신바람이 난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 손님이 오셨소! 이층에 자리를 잡아놓으시오! "

 

노영탄과 연자심은 한동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꼭 이 주관에 들어가야겠다는 무슨 계획이나 작정이 있어서 온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부름꾼 녀석이 이렇게 수선을 떨고 손님을 끌어들이려고 서두르는 꼴을 보자.

그대로 지나친다는 것이 너무나 매정스러운 것 같아서 두말없이 2층으로 올라섰다.

뒤를 따라서 급히 올라온 심부름꾼 녀석이 연방 굽실거리고 공손하게 대해줄 뿐만 아니라.

벌써 두 사람을 위하여 창가로 놓인 조용한 식탁에 자리를 잡아놓으며 어느 틈엔지

따끈따끈한 차까지 두 잔을 올려다 놓아주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마주 대하고 앉으면 나지막한 음성으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행복감에 넘치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들의 입가에는 늘 감돌고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곤그리고 기탄없이 웃고 ..........

이렇게 막 자리 잡고 앉았을 때 돌연 2층으로 올라오는 층계에서 쿵쾅쿵쾅 하는

요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한바탕 웃어젖히고 시끄럽게 지껄여대는 수선스런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아래층으로부터 세 사람의 장정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 사람 중의 한 놈은 바로 조금 전에 범선 위에서 연자심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던

그 자였다.

세 장정들은 심부름꾼 녀석의 뒤를 따라서 자못 으쓱거리는 거만스런 걸음걸이로

쉴새없이 떠들고 웃고 하면서 2층에까지 올라왔다.

범선 속에서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던 그 장정은

노영탄과 연자심이 2층에 마주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자.

또 한번 무엇에 찔리기라도 한 듯 깜짝 놀랐다.

아무도 모르게 두 눈을 똑바로 떠서 두 젊은이들을 지극히 짧은 순간이기는 했으나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다시 머리를 돌리고 일행과 함께 어울려서 웃고 떠들고 하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정면으로 대하고 있었다.

 

' 흠? 괴상한 놈들인데 ......... '

 

신경이 날카로운 노영탄이 그 장정들을 그대로 지나쳐 봤을 리 없었다.

세 놈이 똑같이 만면에 풍진이 가득 찼으며 제각기 무기를 몸에 지니고 있음이 확실했다.

 

'흠. 수상한 놈들이다!

 무슨 짖을 하고 다니는지는 몰라도 강호를 어지럽히고 있는 놈들이 분명하다! '

 

노영탄은 이렇게 남몰래 그 세 장정들의 일거일동에 날카롭게 신경을 쓰면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세 놈의 장정들은 노영탄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좌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 여보게 술도 좀 넉넉하게 가져오고 안주도 적당히근사한 걸로 몇 가지만 ......."

 

한 놈이 이렇게 심부름꾼에게 주문하고 나더니.

그들은 또다시 서로 싱글벙글 웃어가면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소리가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몇 마디 오고 가고 하는 동안에

놈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며 자리가 왁자지껄해졌다.

심부름꾼 녀석이 재빠르게 술과 안주를 올려다가 그들 앞에 놓았다.

제각기 서슴치 않고 꿀꺽꿀꺽 몇 잔씩 술을 따라 마시고 난 다음부터

시작된 세 놈의 고담준론은 그야말로 방약무인(傍若無人).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고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찌껄여대는 것이었다.

얼굴빛이 거무튀튀하면서도 누르퉁퉁한 놈이 다른 두 놈을 보고 하는 소리가.

 

" 우리는 언제나 관내로 들어올 때는 육로로 걸어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배를 타보니

이건 아주 고역이던 걸! 만약 이번에 한바탕 벌어질 광경을 기를 쓰고라도 구경하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면 나는 절대로 이런 고역을 무릅스고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걸세! "

 

몸집이 후리후리하고 우락부락하며 얼굴빛이 까무잡잡한 또 다른 장정 한 놈이 받아넘겼다.

 

" 그러고 말고! 배 안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에 나는 노상 구토만 하고 있었으니.

옴짝달싹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아주 파김치처럼 축늘어져버렸었지.

이런 빌어먹을!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

 

" 허.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그런 때도 있는 법이지.

  뭘 그까짓 것쯤 가지고 그렇게 엄살이 심한가!  하하하 ! 핫핫! "

 

두 놈의 언성은 기탄없이 높아졌으며 두 놈 똑같이 진짜 토박이 관동 사람의 말투였다.

그런데 이렇게 떠들석한 판국에서도 연자심을 뚫어지게 도둑질해서 노려보던

그 장정 한 놈만은 비교적 침착하고 조용하게 가라앉은 편이었는데.

다른 두 놈처럼 함부로 떠들고 덤비고 하는 법이 없이 잠자코 두 놈의 주고받는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아주 점잖은 체를 하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 노형들께서는 나의 잘못을 과히 언짢게 생각지 마시고 용서하시오!

  그러실 줄 알았더라면 배를 타고 가자고 내가 고집을 부리지 않을 것을 ......... "

 

얼굴이 누르퉁퉁한 장정 놈이 곧 말을 이어 나갔다.

 

" 사형! 오. 천만에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시오!

그야 우리들이 변변치 못한 .......... 시골뜨기여서 ........ 하하하 ........

어찌 남을 원망하겠소!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시오! "

 

얼굴이 거무튀튀하게 생긴 장정 놈이 또 말을 계속했다.

 

" 여보게 화삼이. 자네는 그래도 우리들보다는 훨씬 낫단 말야.

 배를 타고 한 번도 토해보지 않고 꿋꿋이 견뎠으니 ........

난 자네에 비하면 아주 변변치 못한 병신이고 ....... 시골뜨기지 ........ "

 

사형이라고 불리는 그 장정이 그 말을 듣더니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이.

 

" 호형께선 노상 우스운 소리만 하시오.

  이것쯤이야 습관이 됐느냐 습관이 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지 무슨 대단한 일이겠소."

 

" 허허허 .......하하하! "

 

세 장정들은 한바탕 기탄없이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그러더니 또 큼직한 술잔을 들어서 꿀꺽꿀꺽 단순에 들이켰다.

석 잔 술을 금방 마서버리고서 그 화삼이라는 장정 놈은 손으로 입을 쓱쓱 문지르면서

높은 음성으로 떠들어댔다.

 

" 여보 사형! 사형의 말씀대로 하자면. 우리는 이틀 안에 회안부에 도착할 수 있다는 거요? "

 

사가란 놈이 머리를 끄덕끄덕하며 빙그레 웃고 대답했다.

 

" 문제없소! 반드시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도록 내가 보증할 것이니 아무 걱정 마시오! "

 

호가라는 장정 놈이 대뜸 묻는 말이.

 

" 사형! 사형이 말씀하시던 저 무슨 신룡검인지 뭔지 하는 위인도 이번에 꼭 나타나는 거요? "

 

사가라는 장정이 웬일인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나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넌지시 말했다.

 

" 호형! 이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있는 데서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 마시오! "

 

이렇게 일단 입을 막아놓고 나서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 그 신룡검이란 놈은 때없이 아무 곳에나 닥치는 대로 출몰하는데.

그놈이 대체 어떻게 생긴 놈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오.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놈은 남자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여자라고도 하니 .........

어쨌든 그놈이 불시에 나타날 때 그놈과 맞닥뜨린 사람들도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단 말이오.

어디 그뿐이겠소! 제일 이상한 점은 그놈이 회양방에 대항하는 입장에 서 있다면.

숭양파를 성가시게 굴지는 않을 것인데.

이놈이 어떻게 된 놈인지 회양방에도 골치덩어이요.

또 숭양파의 수많은 고수급 인물들이 이미 이놈의 손에 참패를 당하고 망신만 당했으니 .......

대체 이놈이 무슨 맘보와 배짱을 가지고 이런 짓을 하는지 그걸 아는 사람이 없거든!

그래서 자연. 이 몇 달 동안에 신룡검이라는 그 이름이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진 것이 아니겠소! "

 

세 놈의  장정들이 주고받는 말은.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는 노영탄과 연자심의 귓전에 똑똑히 들려왔다.

 

' 으음? 믯이라고? 이놈들의 이야기는 ......... '

 

노영탄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연자심의 얼굴만 바라다 보았다.

연자심 역시 놀라운 빛을 감추지 못하고 노영탄의 얼굴만 바라다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번개처럼 마주쳤을 때.

노영탄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시치미를 뚝 떼고 놈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 위해서.

음식을 먹다가 한담을 하는 체하고 귀를 기울여보자는 신호였다.

이때 주관의 손님이 차츰차츰 많아졌다.

그 세 놈의 장정들의 말소리도 나지막하게 가라앉았고 단지 화삼이란 자만 말을 하고 있었다.

 

" 사형! 사형의 말씀이 내일 모래면 회양방과 숭양파가 서로 약속을 하고 회안 지방에 있는

금사보에서 쌍방이 두 번째 무술을 겨루어보기로 결정했다고 하셨는데.

대체 이런 사실을 사형은 어떻게 알게 되셨소? "

 

이 말을 듣더니 사가란 장정이 대답하는 말이.

 

" 허. 그것참! 그런 걸 물을 게 뭐 있소?

벌써부터 소문이 퍼진 지 오래인 중원 천지에서 누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이오?

작년에 회양방파와 숭양파가 홍택호 호반에서 일장의 처참한 결투를 치르고 난 다음에

회양방은 해골 사령기를 숭양파에게 바치고 말았으니.

이치로 따지자면 회양방은 응당 해산해 버려야 될 것인데.

흑지상인 고비와 운몽노인 등 몇 사람의 고수급 인물들이 또다시 세 방을 조직하고서는

도리어 예전보다도 더욱 날뛰고 설치고 있다오.

그래서 이번에는 숭양파와 대결하여 그 사령기를 도로 찾아내자는 목적으로 

쌍방이 잡아먹을 듯이 옥신각신 반목에 반목을 거덥하다가.

드디어 온 천하 무림의 인물들이 모조리 모인 자리에서 쌍방이 공개하고

무술의 자웅을 겨루어보자는 것뿐이오! "

 

여기까지 말한 사가란 장정은 벌꺽 술잔을 높이 들더니

두 모금에 꿀꺽꿀꺽 마셔버리고 젖가락으로 고기 아주를 듬뿍 집어서 먹음직스럽게

입 안에 털어넣고서 또 말을 계속했다.

 

"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이번에 무술을 겨루어보는 것이 회양방 숭양파 쌍방의 단순한

쟁탈전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무림의 온갖 고수급 인물들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총동원이 되어 몰려들어서 든든히 성벽을 쌓고 버티고 있으니.

형세는 지극히 분명하오!

어느 편에서든지 한 번 손을 까딱하고 움직이기만 한다면.

천지가 뒤집힐 만큼 굉장하고 처참한 싸움판이 벌어질 것만은 뻔한 노릇이 아니겠소! "

 

알고보니 이 세 놈의 시골뜨기 장정 녀석들은 공연히 남의 싸움에 신바람이나

극도의 호기심을 품고 불원천리 여기까지 배를 타고 달려든 놈들인 모양이었다.

사가란 장정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듣다가 .

호가라고 하는 거무튀튀한 장정이 갑작스레 끼어들며 하는 말이.

 

" 허. 그것 참! 이번에 노형이관외 지방에 일이 있어서 들르셨다

우리들에게 이런 소식을 전해주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이런 굉장한 구경거리를 놓쳐버릴 뻔했단 말이오! "

 

화삼이란 장정이 얼른 뒤를 이어서 하는 말이.

 

" 그런데 듣자니. 금사보 안은 평소에도 경계가 여간 삼엄하지않다는데.

우리들은 아는 사람도 달리 소개해 줄 사람도 없고. 아무 인연도 없어.

생판 낯선 사람인데 어떻게 들어갈 수 있단 말이오?

우리가 맘대로 들어가도록 그냥 내버려둘지 그게 걱정인걸! "

 

사가라는 장정이 자못 의기양양하게 자기 앞가슴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그 점에 관해서는 두 분께서 마음 턱 놓으셔도 좋소!

못 들어가게 될 경우에는 나만 내세우시오!

이제부터 금사보는 사방 문을 활짝 열어서 개방하고.

무술 경쟁을 참관하려 온 사람이면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입장을 허락하기로 하였다 하오.

단지 문을 들어가기 전에 문제없이 이 심사에 통과될 줄 아오! "

 

말을 마치자.

세 장정들은 또 한바탕 저마다 통쾌한 웃음을 기탄없이 껄껄거리고 웃어젖혔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그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세심히 귀담아 듣고 나서.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극도의 호기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 흠! 세상엔 한가한 놈들도 많군!

 남의 일에 저렇게 신바람이 나서 떠드는 놈들이 있으니 ..........

그런데 대관절 그 신룡검이라고 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들이 떠들고 있는 신룡검이란 인물은 무술이 어지간히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 어쨌든 얼른 여기를 뜹시다! "

 

노영탄은 연자심에게 이렇게 귓속말처럼 아무도 못 알아듣게 한마디를 넌지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식값을 셈해주고 총총히 주관 열빈루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서슴치 않고 큰 길로 나서서 앞만 바라다보며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뜻했으랴.

그들의 뒤를 바싹 따라오고 있는 괴상한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

노영탄과 연자심은 산에서 내려왔을 때.

역시 아무런 특징도 없는 평복을 입고 있었으며 보검도 보따리 속에 넣어둔 까닭으로.

보통 행인들과 다름이 없는 몸차림이었다.

단지 연자심의 뛰어난 미모가 보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해서 비록 백주 대로라고는 하지만 .

오가는 행인들이 상당히 붐비는 고장이고 보니.

그들의 뒤를 따르며 일거일동을 노리고 있는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노영탄과 연자심의 뒤를 남몰래 쫒고 있는 자는 바로 주루에서 떠들고 있던 세 장정 중의

하나인 사가라는 놈이었다.

본래 이 사가라는 위인은 회양가도에서 귀신같이 도둑질을 잘하기로 소문난 놈이며.

남의 여자를 겁탈하는 데도 유명한 놈이었다.

사가라는 놈은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처럼 뛰어난 무술을 몸에 지니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놈의 놀라운 재간은 재치 있는 손끝에 있었다.

두 손을 한번 번쩍 하고 휘두르기만 하면 벌써 상대방의 물건을 자기 물건으로 만들어버리는

소매치기의 재간이란 실로 신출귀몰한 것이었다.

거기다 또 한 가지 이놈은 전신에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일종의 마취제 같은 독약을 지니고 있으니

그 독기가 상대방을 정복시키는 데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이놈이 애당초에 범선에서 연자심을 발견했을 때.

눈앞이 아찔하도록 끌린 것은 일찍이 넓은 천지에서 구경한 일이 없는 연자심의

매혹적인 미모 때문이었다.

그 다음 주루로 올라와서는 이놈의 재빠른 손보다도 날카로운 눈동자가 먼저 연자심의

보따리를 노렸다.

괴히 크지는 않지만 제법 길고 두툼한 보따리 속에서 이놈은 은은히 비쳐 나오는

보광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남의 물건을 노리는 데는 백발백중 귀신같이 정확한 놈이었다.

 

' 저 보따리 속에는 분명히 무슨 보물이 들어 있을 것이다! '

 

거의 확정적인 판단을 내리자 .

이놈은 다른 두 놈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며술을 마시는 체 하면서도

노영탄과 연자심의 일거일동을 놓치지 않고 남몰래 훔처보고 있었다.

노영탄과 연자심이 음식을 다 먹고 자리를 떴을 때.

이놈은 적당한 핑개를 대고 동행하는 두 놈의 곁에서 떨어져 나와서 슬금슬금

두 사람의 뒤를 쫓아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노영탄과 연자심이 과연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이놈이 알 까닭이 없었다.

 

" 다른데 조용한 여인숙을 잡기로 합시다.

어쨌든 이 고장에서 하룻밤 쉰 후 내일 행동을 개시하기로 합시다. "

 

얼마가지 않아서.

노영탄은 어느 여인숙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연자심에게 이렇게 말했다.

본래 두 젊은이 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쉬고 밝은날 금사보로 잠입해 들어가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본래 계획대로 서슴치 않고 여인숙 문 안으로 들어섰다.

하인배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서 지체없이 조용한 방 두 칸을 잡아주었다.

사가란 놈은 노영탄과 연자심이 방을 정하고 들어가서 쉬고 있는 틈을 타.

슬며시 뒤로 돌아 들어가서 하인배 한 녀석을 당장에 매수해.

두 사람이 들어간 방을 똑똑히 확인해 놓고 나서 주루로 돌아왔다.

주루로 돌아온 사가란 놈은 뚱딴지 같은 말을 꺼냈다.

 

" 저. 우리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이고장에서 하룻밤 더 묵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곧 떠나도록 합시다! "

 

" 거. 하루라도 늦어지면 좋은 구경거리 놓치지 않겠소? "

 

두 놈 중의 한 놈이 이렇게 걱정했으나. 사가란 놈은 태연했다.

 

" 상관없소! 나 하는 대로만 노형들은 따라오시면 아무 걱정 없소! "

 

본래 사가란 놈과 그 두 장정 녀석들은 이고장에서 잠시 쉬었다가.

즉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혼자만 엉뚱한 속셈을 품고 있는 사가란 놈이 별안간 어물어물 까닭 모를 소리를 하며

하루를 묵어 가자고 하니 다른 두 놈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화삼과 호가라는 장정 둘이 관외 지방에서는 역시 힘께나 쓰는 비적의 무리들이지만.

관내 지방에 일단 들어와 놓고 보니

사사란 놈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 사형의 의사가 그렇다면 어쩔 수 있소?

우리 들이야 사형만 따라서 나선 길이니 ............ "

 

두 놈들은 이렇게 수그러지는 도리밖에 없었다.

밤이 이경을 조금 넘었을 때  ............

사위는 쥐죽은 듯 조용하고 시커먼 하늘에는 깜박거리는 별 하나도 없었다.

사가란 놈은 살금살금 자리에서 기어 일어났다.

몸에다 갖가지 무기를 지니고 준비를 든든히 한 다음.

낮에 똑똑히 보아두었던 길을 따라서  노영탄과 연자심이 묵고 있는 여인숙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순식간에 여인숙 대문 앞에 다다랐다.

사가란 놈은 한동안 무엇인지 다소 망설리는 체하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여인숙 대문은 이미 단단히 잠겨져 있었다.

단지 문 앞에 메달린 한 개의 큼직한 등룡만이 바람에 흔들흔들 꺼질 듯 졸고 있었다.

사가란 놈은 마지막 결심을 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후원 담 밑으로 돌아 들어가서.

경신법을 써서 높은 담을 단숨에 흘쩍 뛰어 넘었다.

후원 뜰에 선 사가란 놈은 제 집이나 찾아들어가듯 .

낮에 기억해 둔 대로 노영탄과 연자심이 거처하고 있는 방을 찾아서 달려들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공교롭게도 각각 방을 차지하고 떨어져 있었다.

사가란 놈은 벌써 여인숙의 하인배 녀석을 통해 똑똑히 알아두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연자심이 묵고 있는 방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선 것이다.

사가란 놈은 연자심의 방을 향해 살금살금 기어갔다.

창 밑에 이르자 혓바닥으로 살살 몇 번인지 창을 핥았다.

창호지는 쉽사리 젖어서 뚫어졌다.

그 조그마한 구멍으로 몸에 지니고 있던 냄새나는 독기를 훅 뽐어넣었다.

 

" 에취! 에취! "

 

얼마 안 되어 방 안에서는 재치기 소리가  연거푸 두 번이나 들려 나왔다.

 

' 흥! 그러면 그렇지. 내년이 별 수 있겠니! '

 

사가란 놈은 자신만만했다.

그 재치기 소리는 이놈의 냄새나는 독기가 이미 마취 작용을 발휘하기 사작한다는 증거였고.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다 써보아도 백발백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가란 놈은 돌아서서 살금살금 노영탄의 방 창 밑으로 기어갔다.

똑같은 방법으로 창호지를 뚫고 마취제 독기를 뿜어넣었다.

사가란 놈은 제가 쓰는 마취제 독약이 금방 효력을 발생하는 것을 확인하자 대담무쌍해졌다.

아무것도 겁날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허리춤에서 짤막한 단도 한 자루를 선뜻 뽑아들더니

서슴치 않고 연자심의 방 창틈에다 찔러서 부수기 시작했다.

사방 귀퉁이 마다 칼끝을 찔러서 헤치고 부수고 창살 문짝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사가란 놈은 살금살금 창으로 기어 올라서 방 안으로 바람처럼 가볍게 내려섰다.

부리꺼진 시커먼 어둠 속을 두 손으로 펼쳐서 더듬어보았다.

손길에 부딛치는 것은 분명히 연자심의 잠들어 있는 침상 같았다.

침상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서는 부싯돌에 불을 일어켜봤다.

여전히 방 안은 죽은 듯이 조용했고 부싯돌에서 일어나는 불빛이 반짝하는 찰나에.

침상에 둘러처진 방장 속에 연자심이 혼수상태에 빠져서 죽은 사람같이

콤짝도 못하고 드러누워 있는 것을 틈새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연자심은 짧은 속적삼에 역시 짧은 속바지를 입었을 뿐이었다.

사가란 놈은 무엇을 더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듯 선뜻 방장을 걷어젖혔다.

그리고 연자심을 두 팔로 번쩍 쳐들어 등에 떠매었다.

팍 하고 부싯돌로 불을 또 한번 켜보니.

바로 침상 머리맡에 놓여진 조그마한 상 위에 보따리가 보였다.

두말없이 덥석 보따리를 움켜집어서 허리춤에 차고 들어오던 때와 똑같이

훌쩍 가볍게 창문을 넘어서 여인숙 뒤뜰로 나와 부두를 향해 그대로 뺑소니를 쳤다.

항구 근처에는 한 군데 조그마하고 나지막한 용왕묘가 있었다.

묘라고는 하지만 단지 좁디좁은 면적에 용왕의 신상을 모셔놓고.

그 앞에 역시 조그마한 향안 한 개로 제단을 장만해 놓은 데 불과했다.

낮에는 그래도 어떤 노인이 하나가 이 묘를 맡아서 비질도 하고 향불도 피워놓는 체하지만.

밤이되면 이 노인마저 자기 집으로 자러 돌아가고 지키는 사람도 없이 텅 빈 곳이었다.

사가란 놈은 연자심을 떠매고 시커먼 어둠 속에서 미친 놈처럼 달음질을 쳤다.

순식간에 용왕묘 앞에 이르렀다.

그래도 겁이 났던지 이놈은 흘끗 머리를 돌려 한번 뒤를 돌아다보았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죽음 같은 적막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이놈은 그제서야 든든하다는 듯 배짱을 단단히 먹고 번개처럼 빠르게 묘 안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어둠 속을 더듬더듬 향안 앞까지 걸어가서 연자심을 내려놓았다.

무엇보다도  물욕에 눈이 어두운 놈이었다.

보따리마저 땅 위에 내려놓더니 한 자락을 급히 풀고 부싯돌을 팍 하고 그어서 들여다보았다.

이놈은 너무나 기뻐서  가슴속이 방망이질을 치듯 마구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 아! 이것 모두가 희안한 물건들 뿐이구나! '

 

사가란 놈은 어찌나 기뻤던지 자칫 소리를 지를 뻔 했으며

두 눈을 어둠 속에서 무섭게 두리번거렸다.

평생에 구경한번 해본 일이 없는 무수한 보물들이 눈부신 광채를 발산하며

보따리에 싸여 있지 않은가!

그리고 갖가지 진귀한 진주와 마노 속에는 보검도 한 자루 끼여 있었다.

사가란 놈은 얼른 보따리를 꾸려서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 나서야 다시 몸을 돌려 땅 위에 누워 있는 연자심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팍! 부싯돌에 불을 일어켜보았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기는 했으나 연자심의 모습이 확실히 드러났다.

연자심은 홍도와 같이 발그스레한 두 볼에 가느다란 미소를 띤 채로 눈을 꼭 감고

혼수상태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가란 놈은 허리를 구부리고 또 한번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풍만한 젊은 여자의 육체가 송두리째 눈 아래 나둥그라져 있지 않은가!

범선 위에서부터 눈독을 들여온 탐스럽고 아리따운 젊은 아가씨의 미끈한 육체 ...........

짧은 속저고리. 역시 짧은 속바지만 입고 있는 연자심의 무릅 아래 두 다리의 피부는

허여멀쑥한 것이 흡사 백설과도 같았고 손을 스치면 그 보드라운 품이

미끄러질 것만 같아 보였다.

한떨기 해당화가 졸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젊은 아가씨의 매혹적인 교태 .........

가슴속에서 별안간 불끈하고 치밀어 오르는 불덩어리가 있었다.

두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사가란 놈은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치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팔을 뻗어 연자심의 속저고리 자락에 손을 대고 지분거려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아슬아슬한 찰나에. 난데없이 등들미로부터 한바탕 웃어젖히는

냉소 소리가 껄껄거리고 들려오지 않은가!

 

" 아하하하핫! "

 

그 냉소 소리는 날카롭고 또랑또랑했다.

마치 한 줄기 매섭고 싸늘한 바람이 바늘처럼 가슴 한복판을 꼭 찌르는 것 같아서.

사가란 놈은 오싹 하고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사가란 놈은 그래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머리를 돌려 어깨 너머를 살펴보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로 머리 위에서.

 

" 와하하하 ........... 핫핫! "

 

또 한바탕 냉소하는 소리가 전보다도 더 크고 뚜렷하게 들려왔다.

사가란 놈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별안간에 냉수를 한 통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가란 놈은 이만한 일에 그대로 주저않을 놈이 아니었다.

도둑질이 다년간의 직업이었던 이놈은 무수한 경험을 지니고 있는 대담무쌍한 선수였다.

순간 깜짝 놀라서 일시 당황하기는 했으나. 용기를 내서 부싯돌을 그어보았다.

대체 무엇이 이런 웃음소리를 내고 있는지 그것을 비추어보자는 것이었다.

반짝! 부싯돌에서 불이 일어나는 순간.

이번에는 난데없이 어디선가 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줄기 모질고 빠른 바람이 사가란 놈의 얼굴에 정면으로 왈칵 덮쳤다.

그와 동시에 부싯돌에서 반짝이던 불빛도 폭삭 꺼져버렸다.

눈 깜짝하는 찰나.

사가란 놈이 눈앞을 번쩍 하고 전광석화같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것은 한 줄기 사람의 그림자 같았다.

분명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시커먼 그림자가 바로 얼굴 앞을 스치고 지나쳐 가는 것만 같았다.

이쯤 되고 보니.

사가란 놈이 제아무리 대담무쌍한 도둑질의 명수라할지라도 언제까지고 땅 위에 나둥그라져 있는

아리따운 아가씨의 육체만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 흠. 괴상한 일인데?  이밤중에 내 뒤를 쫓은 놈이 있다니? '

 

사가란 놈은 마음을 든든히 먹었다.

설쩍! 몸을 뒤로 너댓 걸음이나 날렸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서 단도 한 자루를 선뜻 뽑아들었다.

떨리는 음성을 그래도 어지간히 가라앉혀서 굵직하고 점잖게 호통을 쳤다.

 

" 어느 파의 친구이신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오셨으면 점잖게 얼굴을 나타내시오!

이 백화봉(白花峰) 사이(査二)가. 무엇을 잘못한 일이 있다면 점잖게 나타나셔서 말씀으로 하시오! "

 

사이란 놈의 말투는 여간 점잖은 것이 아니었다.

아주 겸손한 태도로 도전을 하며 체통을 찾는 말투였다.

그도 그럴밖에 없는 이놈은 어떤 시커먼 한 줄기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하고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에. 눈치 빠르게도 상대방의 몸을 쓰는 품이

얼마 만큼 빠르다는 것을 대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몸을 날리는 품만 보더라도. 그것이 제놈이 상대하기에는 힘에 벅찬 비범한 존재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므로 제편의 말투를 아주 점잖게 해서 옥신각신 난쳐한 사태가

벌어질 것을 미리 방비하자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점잖게 호통을 치고 났는데도 사방은 여전히 죽은 듯이 고요하고 털끝만한

인기척도 없는 것이었다.

사가란 놈은 놀라기도 했으나 한편 약이 오르기도 했다.

또 한번 용기를 내서 연자심의 얼굴 가까이 대들었다.

연자심의 몸을 다시 떠메고 어디로든 다른 장소로 떠보겠다는 배짱이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두 팔을 뻗어서 막 손을 대려고 하는 찰나에 흘연 등들미로부터

또 한바탕 걸찍하게 웃는 냉소 소리가 들려왔다.

 

" 와하하핫! "

 

사가란 놈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역시 도둑질에 다년간 익숙한 놈인지라.

대담하게도 그편으로 비호같이 몸을 돌렸다.

 

" 어떤 놈이냐?  이 밤중에 여기서 나를 조롱하고 덤비는 놈이?  썩 나서라! "

 

" ............ "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이번에는 눈앞에 뚜렷이 보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가란 놈의 얼굴 앞으로 용왕묘 정문 가까운 지점에

한 줄기 시커먼 사람의 그림자가 우뚝 서 있었다.

전신에 검정 옷을 입었으며 얼굴에는 복면을 하고 있었다.

무섭게 번쩍거리는 눈만 수건 밖으로 나와 있을 뿐.

그 밖에는 전신이 시커먼 형겁으로 뭉쳐져 있는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깊은 밤중에 난데없이 도깨비처럼 나타난 시커먼 그림자.

그렇게 대담무쌍한 사가란 놈도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머리끝이 하늘로 삐쭉 올라가며 별안간 등들미에 냉수를 통으로 퍼붓는 것만 같았다.

 

'아차! 공연한 짓을 하였구나. 아무래도 이 시커먼 놈이 만만치 않겠는데. '

 

번개처럼 후회와 공포가 뒤섞여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이미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해 있음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 아! 하하하핫핫!  네 이 고약한 놈! "

 

복면한 사나이는. 사가란 놈이 입을 열어볼 틈도 주지 않고 껄껄껄껄 웃어젖히더니.

한쪽 손을 등 뒤로 흘쩍 돌리는 것이었다.

쉭! 매서운 쇳소리와 함께 은빛 무지개가 싸늘하게 뻗쳤다.

그는 한 자루의 보검을 손에 뽑아들었다.

사가란 놈은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보자.

그만 혼비백산 실성한 사람처럼 있는 목청을 다 뽑으려 하면서도

부들부들 떨려 나오는 음성으로 다만 외마디 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 그. 그대는 바로 신룡검? "

 

" .................. "

 

그러나 복면한 사나이는 당황히 구는 사가란 놈의 꼴을 바라다보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여전히 버티고 서서.

두 줄기 무서운 광채를 발산하는 눈동자로 사가란 놈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잘못 걸렸구나. 어째서 이 무시무시한 자가 여기엘 나타났을까?

 후퇴하는 수빢에 ............. '

 

번개 같은 생각이 또 사가란 놈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그것도 어림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복면한 사나이는 바로 묘의 문을 가로막고 서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몸을 돌려본댔자

달아날 만한 구멍은 없으니 후퇴한다는 것은 오히려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라!  어차피 이리 된 바에야! '

 

사가란 놈은 도저히몸을 뺄 만한 틈이 없는 이 막다른 골목에서.

비장한 결심을 한 것이다.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휘두르면서 곧장 복면한 사나이를 찔러버리려고 육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복면한 사나이는 어디까지나 태연자약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칼끝이 얼굴 가까이까지 육박해 들어가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여전히 버티고 선 채로 있더니.

칼끝이 바로 얼굴을 찌르려는 아슬아슬한 찰나에 복면한 사나이는 별안간

엄지손가락 식지를 불쑥 내밀 뿐이었다.

복면한 사나이의 간단한 행동은 비호같이 빨랐으며.

또한 어린아이를 데리고 장난이나 하듯이 가벼워 보였다.

사가란 놈이 찌르고 덤벼드는 단도의 칼날을 두 손가락 사이에

마치 집게로 무엇을 꼬집듯이 꼭 기워버린 것이었다.

사가란 놈은 단도가 두 손가락 사이에 끼어버리자

그것이 마치 무슨 뿌리라도 박혀버린 듯 오짝달싹도 하지 않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찌를래야 찌를 수도 없고. 뽑을래야 뽑을 수도 없었다.

 

'과연. 대단한 놈이구나! '

 

사가란 놈은 점점 더 당황하여 퍼뜩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손을 뿌리쳐 단도를 포기해 버릴 작정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바로 그 찰나에.

복면한 사나이는 왼손을 뻗쳐서 몸을 지탱하더니.

오른손에 든 보검으로 한 줄기 서릿발같이 싸늘한 광채를 뻗치며.

전광석화와도 같이 사가란 놈의 목에 쉭 하고 금을 그어버렸다.

핏빛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가란 놈은 땅에 철썩 고구라지며 죽어 넘어지는 것이었다.

복면한 사나이는 그제서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단도를 홱 냉동댕이쳐버렸다.

보검을 칼집 속에 도로 꽂아넣더니

왈칵 사가란 놈의 신변으로 달려들어 그놈의 허리에 차고 있는 보따리를 풀어서

자기 몸에 간직했다.

그리고 나서는. 일각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연자심의 신변으로 달려들었다.

몸을 굽혀 연자심을 떠메어 일어키더니 처음과 같이 솜이불에 말아가지고.

성큼성큼 불과 몇 발자국에 묘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때 밤은 겨우 삼경밖에 되지 않았다.

거리는 아직도 어두컴컴했으며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하늘은 시커먼 장막처럼 어둠에 뒤덮여 있었다.

복면한 사나이는 묘의 문을 뛰쳐나온 다음.

연자심을 떠맨채로 쏜살같이 부두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항구 근처까지 와서는 외돛을 단 범선 한 척을 골라잡고.

복면한 사나이는 쿵! 발을 한번 구르더니 단숨에 배 위로 뛰어올랐다.

즉시 등에 떠메고 있던 연자심을 선창 속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선창문을 단단히 잠그더니 배꼬리에 있는 갑판 위로 흘쩍 뛰어올라서

몸을 번개처럼 번쩍하고 날렸다.

그는 모든 일에 몹시 익숙했고 추호도 거침이 없었다.

단숨에 노영탄이 머무르고 있는 여인숙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복면한 사나이는 바로 얼마 전에 사가란 놈이 했듯이 여인숙 후원으로 돌아 들어가서

서슴치 않고 담을 뛰어넘어 안으로 침입했다.

곧장 노영탄이 자고 있는 방 창 밑으로 대들더니

팔을뻗어서창문 틀을 몇 번인가 가볍게 쿵쿵쿵 두드려보았다.

방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죽음같은 적막이 감돌고 있을 뿐 ............

또 한번 더 힘을 주어 두드려봤다.

여전히 아무런 동정이 없었다.

복면한 사나이는 빛이 보이기는 했으나.

그는 결국 한쪽 팔을 선뜻쳐들더니.

살금살금 창문을 한편으로 밀어보기 시작했다.

창문이 소리도 내지 않고 열리는 것을 보자.

복면한 사나이는 다짜고짜로 몸을 날려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 안은 바깥보다도 더 한층 깜깜 절벽이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사나이는 눈앞의 물체가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모양이었다.

더듬더듬 침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모기장을 흘쩍 걷어 올렸다.

그제서야 그 속에서 사람의 형체를 희미하나마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일 리 없었다.

바로 노영탄이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져서 쿨쿨

숨소리도 크게 단잠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었다.

복면한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노영탄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만 서 있었다.

 

" 치! "

 

이윽고 그는 가볍게 한번 냉소했다.

그 이상 망설일 것도 없고 잠든 사람을 깨울 필요도 없다는 듯 몸을 돌리더니.

침상 머리맡에 있는 조그마한 상 앞으로 갔다.

팍!

그는 부싯돌을 그어서 초에다 불을 붙였다.

상 위에 놓인 백지 한 장을 거침없이 집어들고 붓을 찾아서.

일핍휘지 무엇인지 날아가는 듯 빠른 솜씨로 두어 줄을 써 가지고 다시 접어서 상 위에 놓았다.

한쪽 손으로 홱 바람을 일어켜촛불을 꺼버리면서.

머리를 돌려 새삼스럽게 잠들어 있는 노영탄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입속으로 혼자 중얼중얼 무엇인지 심각한 한탄을 자기만 알게 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는 몸을 다소 움츠리더니 또다시 흘쩍 창을 넘어서 밖으로 나왔다.

복면한 사나이는 실로 나는 화살같이 빠르고 민첩한 동작으로 여기까지 일을 해치운 다음.

여인숙에서 나오자마자.

마치 한 마리의 매가 날듯 거침없이 부두에 잡아놓은 배 위로 날아가더니.

급히 닷줄을 풀고 돛을 펼치며 떠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