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25장 선중봉적(船中逢敵)

오늘의 쉼터 2013. 12. 13. 21:49

정협지(情俠誌)

 

제 25장 선중봉적(船中逢敵)

배위에서 적을 만나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말 고삐를 마음껏 늦추어 주고 구강으로 나가기 위해

강변을을 향하여 한없이 경쾌한 기분으로 질풍같이 달리고 있었다.

한동안 정신없이 달리다가 약속이나 했다는 듯 속도를 늦추고 어깨를 나란히

했을 때 노영탄은 이렇게 말했다.

" 연소저. 이제 새삼스럽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 가는 길의 목적지를

나는 이렇게 작정하고 있소 .

우선 파양호 백로주로 돌아가서 나의스승 남해어부 상관학 선생을 찾아 뵙기로 ......

오래동안 뵙지를 못했으니 그 동안의 경과도 보고해 드리고 또 ............. "

연자심은 나란히 앞으로 나아가는 말 위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당초에 이렇다 할 목적지가 없이 노영탄을 따라나선 연자심이고 보니

노영탄의 의사를 쫓는 길밖에 없는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연소저와 함께 돌아가신 어르신네 께서 보물을 감추어두셨다는

그 지점을 찾아가고 싶소. 연소저의 의사는 어떠하오? "

여기까지 말했을 때. 연자심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 저야뭐 ......... 하자시는 대로 따라갈 뿐이지만 그렇게까지 또 수고를 아끼지 않고

제 일을 돌봐주신다면 저로서야 그보다 기쁜 일이 ............ "

그러나 사실인즉 노영탄의 마음속에는 그 혼자만의 딴생각이 또 한가지 있었다.

연자심 앞에서 솔직히 털어놓기는 적의 거북한 문제였다.

' 그랬다가. 뜻밖에 오해라도 생기게 된다면? '

그것은 바로 노영탄이 이런 점을 걱정하고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감욱형의 문제였다.

노영탄은 이 순간까지도 감욱형의 안부를 걱정하고.

그 행방을 찾아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노영탄의 가슴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는 이런 감정이란 .

단순히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보답해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 비슷한 것이었다.

더욱이 현제 감욱형의 형편을 생각했을 때. 아버지는 처참한 최후를 마쳤고.

친오라버니나 다름없이 자라난 악중악은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신세로 천애의 일각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니.

노영탄에게 구명의 은혜를 베푼 적이 없다손 치더라도 모른체하고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노영탄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무술 실력과 재간만 믿고

일대 모험을 감행한 셈이다.

자기가 악중악이라고 자칭하고 나서서 강호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주의력을

자기 일신에 집중시켜 악중악으로 하여금 한시라도 황산 꼭대기에 오래 숨어서

안전한 날을 보내도록 해주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지극히 미묘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노영탄은 단순히 일종의 미안하다는. 안됐다는 심정에서

연자심을 데리고 간다온다 말 한마디 없이 길을 떠났던 것이다.

대장부답지 않은 일종의 뉘우침에서 이런 모험을 저질렀지만.

노영탄은 그 결과에 있어서 무엇이 닥쳐오리라는 것쯤은 똑바로 내다보고 있었다.

'만일에 악중악이『숭양비급』을 터득하고 투철히 연구하고

연마하여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날에는 ?

강호에서 견줄만한 상대가없을 만한 상대가 없을 만큼 놀라운 무술 실력을

그가 지니게 될 때에는 반드시 나를 그대로 두려 들지는 않을 게다! '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불리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노영탄이었다.

심지어 앞으로 닥쳐올 그런 결과에 대해서 어떤 방비책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영탄 자신은 강호에서 소위 고수라는 모든 인물들을 혼자서 대적하는 한이 있더라도

악중악을 보호해주고 그로 하여금 황산 속에서 무술을 연마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생명을 내걸고 모험을 저지러고 있지만 악중악이 무술을 연마하고 난 다음에는

도리어 두 사람은 완전히 적이 되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렇게 기막힌 모순이 있을 수 없었다.

있을 수 없는 모순을 노영탄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심정을 노영탄 자신도 명백히 꼬집어내서 해부할 수는 없었다.

그 심정 속에는 대장부답지 않다는 일종의 뉘우침과 부끄러움이 작용하고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확실히 보다 큰 호기심이 작용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도대체 강호에서 그렇게 떠들고 서로 빼앗지 못해서 목숨을 내걸고 덤벼드는

저『숭양비급』이란. 과연 얼마나 무서운 위력을 가진 물건이냐? '

그것은 자기 자신이 몸에 지니고 있는 무술 실력에 대해.

자신 만만 하다는 데서 생기는 호기심이기도 했다.

이제부터 악중악은『숭양비급』을 터득하고 또한 필생의 노력을 경주하고 연마하여.

마침내는 탁월하고 오묘한 무술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서슴치 않고 노영탄의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둘이서 승부를 겨루게 된다면  과연 누가 이길 수 있겠느냐?

이 점은 먼 후날에 두고봐야 알 노릇이라는 자신까지 가져보는 노영탄이었다.

노영탄의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심정을 연자심은 추호도 알 까닭이 없었다.

 둘은 앞만 내다보고 역시 질풍같이 말을 몰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 종일 말을 달렸을때.

두 사람은 이미 산고개가 중첩해 있는 소유령을 넘어섰다.

산길이 차차 아래로 향하고 내려가는 비탈길이 되자.

두 사람은 채찍을 가볍게 휘날리며 천천히 산길을 따라서 내려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나지막한 언덕 위를 올려다보자니.

벌써 장강(長江)의 호탕하고 시원스런 물줄기가 파랗게 그들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우르쿵 !

난데없이 무서운 뇌성이 하늘 높이서 터쪘다.

여태까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던 날씨가 돌변하면서 사방팔방에서

마치 준마들이 달려들듯 시커먼 구름장이 하늘 가득히 몰려들고.

산기슭으로부터 싸늘하고 사나운 바람이 모질게 휘몰아 올라왔다.

사나운 폭풍우가 눈앞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저편 언덕 위로 훤하게 트인 널찍한 곳이 바라다 보였다.

나무가 과히 울창하지 않은 숲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 어디로 비를 피한다? '

당황해서 망설이고 있을 때. 연거푸 일어나는 뇌성벽력.

우르르 ! 쿵쾅 !

번쩍. 번쩍. 갈래갈래 퍼지는 무수한 섬광이 마치 금빛 뱀같이 공중에서 춤을 추며.

시커먼 구름속을 이리저리 헤치고 화살같이 날았다.

사방은 삽시간에 점점 더 어두컴컴해졌다.

쏟아지고야 말 사나운 빗줄기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허둥지둥 어디 잠시 비를 피할 곳이 없나 해서 사방을 필사적으로 휘들러보았다.

이때 연자심이 멀찌감치 떨어진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안타까운 음성으로 외쳤다.

" 아 ! 저기. 저기 강가에 집이 한 채 보이지 않으세요?

빨리 저리로 가보지요!

거리가 과히 멀지 않으니 비가 쏟아지기 전에 어쩌면 피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

연자심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다보니

과연 산기슭 강변 위에 자그마한 집 한 채가 눈에띄었다.

그rjt은 단지 한 채.

외롭고 쓸쓸하게 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이상한 집이었다.

" 어서 빨리 말을 달려요 ! "

연자심은 명령조로 또 한번 이렇게 외쳤다.

노영탄은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채찍을 높이 들어 말을 후려갈기며 고삐를 바싹 죄었다.

둘은 말 등에 찰싹 엎드리다시피 몸을 깔고.

멀리 바라다 보이는 그 괴상한 집을 목표로 비호같이 말을 몰았다.

두 사람이 그집 앞에 간신히 당도 했을 때.

시커먼 하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탁 터져버리고 말았다.

쏴 !

주먹덩이 같은 사나운 빗줄기가.

마치 별안간에 큰 물독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것같이 땅 위에 내리 깔렸다.

노영탄과 연자심이 가까이 가서보니

그것은 보통 집이 아니었고 허물어진 산신묘였다.

어느 연대에 지은 것인지 그런 것은 도무지 알 수 없었고.

문짝도 간데없이 다 떨어졌으며 기둥도 태반이 쏠리고 기울어졌는데.

그래도 본래는 두 칸의 편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허술한 벽뿐이요.

지붕은 어디로 날아가벼렸는지 허공이 그대로 바라다 보이는 노천뿐이었다.

다행히 정전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은 어느정도 형체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아쉬운 대로 비를 피할 수가 있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나란히 말을 끌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 다행이군요! 여기서 비가 그칠 때까지 쉬었다 가지요! "

연자심은 그래도 기쁘기만 한 모양이었다.

대전은 그다지 넓은 면적은 아니었으나 두 사람과 두 필의 말이 비를 피하여

들어서기에는 그다지 좁은 곳은 아니었다.

노영탄은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신단의 형체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그 앞으로는 제삿상이 한 개 놓여 있었는데

먼지가 잔뜩 쌓여서 앉을 만한 곳이라곤 없었다.

노영탄은 말안장에서 보따리 하나를 꺼내 풀었다.

널찍한  담요 한 장을 펼쳐서 제삿상 위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그 위에 깔았다.

" 우선. 이리 좀 올라 앉아서 쉬시오! "

연자심은 경쾌한 동작으로 그 신단 위 담요에 앉아서 책상다리를 하고 한쪽 발을

흔들흔들 시종 유쾌하고 명랑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밖에서는 빗소리가 점점 더 굵어지고 요란해젔다.

기왓장 위를 후려갈기는 빗줄기는 마치 높은 곳에서 조약돌을 쏟아 붓는 것 같았다.

창틀 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푸르고 몽롱한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져서 먼곳의 경치나 물체들은 완전히

빗줄기에 가로막혀 방향도 형체도 분간할 수 없었다.

때는 전심때가 훨신 지났을 무럽이었다.

그렇게 밝고 화창하던 날씨가 한줄기 거센 빗줄기로 말미암아 먹을 끼얹은 듯

시커멓게 변했다가 빗방울이 요란하게 땅을 후려갈기자.

아까와는 딴판으로 또다시 훤해지기 시작했다.

강남땅에는 언재나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들려 할 무럽이면 폭우가 퍼부었다.

이런 폭우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돌발적이요.

난데없이 쏟아지는 소나기로 두서너시간을 줄기차게 퍼붓다가는

언제 비가 왔더냐는 듯이 딱 그치고 금세 새파란 남국의 하늘이 사람을 희롱이나 하듯

살짝 드러나기 일쑤였다.

그러나 때로는 이 갑작스레 사납게 퍼붓는 비가 그대로 오랫동안 계속되는 수도 있었다.

그것은 무서운 기세로 삽시간에 강물을 범람시키고 마침내는 강변을 휩쓸어 연안 일대를

처참한 수재 속에 몰아 넣기도 했다.

그래서 강남 지방의 늦은 봄과 초여름은 언재나 수시로 발생할 우려가 있는 수재 때문에

백성들이 불안 속에 사는 계절이기도 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사납게 퍼붓는 빗속에서 그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낡고 허물어진 묘 안이다.

걱정을 아무리 해봤댔자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며.

밖의 빗소리는 조약돌을 뿌리듯 요란스럽고 줄기차게 들려오기만하니 꼼짝할 수 없어

그저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비가 멋기만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노영탄은 다시 말안장 위에서 보따리를 풀고 마른 과자며 과일 같은 것을 꺼내

연자심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비가 그치면 어떻게 할까요. 연소저? "

" 뭣을요?  새삼스럽게 ............... "

" 내 생각 같아서는 이렇게 했으면 좋을 것 같소.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은 바로 강변에서 멀지 않은 곳이오.

사면으로는 거친 벌판길 밖에 없으며 호구와 평택 두 고장까지의 거리를

따져보자면 두 군데가 다 같이 비슷비슷하니 비가 멋거든.

우리는 서쪽으로 떠나기로 합시다.

호구성 안에 가서 잠시 쉰 후 다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 것이 어떻겠소? "

노영탄이 묻는 말에 연자심은 마른 과자를 두어 입 베물어 먹다가 .

한쪽 손으로 엉클어진 앞머리를 가다듬어 올리면서 대답했다.

저는 이고장 지리는 통 모르는 걸요 뭐.

노공자께서 어디든지 가자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뿐이죠. "

말을 마치자.

연자심은 또 한번 싱긋 브드러운 미소를 띠며.

그 맑고 시원한 눈초리로  노영탄을 쳐다봤다.

언제나 봄눈이 소리도 없이 녹듯이 사람의 가슴속을 또한 녹여줄 것만 같은 연자심의 미소.

노영탄은 그 속에 완전히 도취해 있는 자기 자신을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노영탄도 따라서 가벼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 연저! 돌아가신 어르신네가 보물을 감추어두셨다는

그 지점을 찾아낸 뒤에는 어찌할 작정이시오? "

그것은 너무나 뜻밖에 말이었다.

묻는 말이 뜻밖이 아니라 노영탄의 말투가 여태까지와는 딴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연소저라고만 부르던 말투가 그냥 연저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누님의 뜻이 되는 말이지만 .

노영탄과 연자심의 경우에는 그것을 누님의 뜻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아가씨. 사랑하는 아가씨가 손위일 경우에 부르는 ..............

그것은 젊은 남여들 사이에 독특하고 미묘한 말투였다.

연자심은 분명히 노영탄보다 한두 살 위였다.

그러나 이렇게 단둘이서만 마주 대하고 앉아서

처음으로 연저라고 불러주는 노영탄의 말을 듣고 보니

처녀의 수줍음으로 연자심은 두 볼이 금세 활짝 붉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

연자심은 한동안 고개를 푹 수그리고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더니.

간신히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음성으로 가볍게 말했다.

"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 "

이말을 듣더니 노영탄은 연자심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거의 연자심의 귓전에다 입을 댈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차근차근히 속삭이는 것이었다.

" 연저!  이 강호 천지란 험악하고 음흉하고 악독한 땅이오 !

무서운 살육 행위가 쉴새없이 계속되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원수를 맺고 서로 으르렁거리니 실로 한심한 일이오.

우리들은 이렇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끼리 만나게 됐으니

이는 역시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오.

보물이 감춰져 있는 곳을 찾아낸  다음에는 ..........

내 생각 같아서는 ............. " 

무엇을 생각했음인지.

노영탄은 일단 여기서 말을 잠시 중단했다.

" 우리들은 ......... 우리들은. 어떤 사람의 힘으로도 찾아내기 어려운.

풍경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별천지를 물색해 거기서 둘이서 같이 은거 하면서.

화조월석(花朝月石) 자연을 즐기며.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구름같이

유유하고 편안한 웃음 속에서 속세를 등지고.

단둘이서만 아무런 불평도 불만도 모르는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 

그렇게 하면 이 시끄러운 강호를 떠돌아 다니면서

목숨을 내걸고 하잘것없는 인간들과 싸우느니보다 얼마나 행복하겠소? "

이말을 듣고 난 연자심의 가슴속은 형언키 어려운 흥분과 감격으로

두근두근 마구 파동치는 것이었다.

단둘이서만 행봇스럽게 살 수 있는 그들만의 세계를 찾아가자는 노영탄의 말에

찬성하지 않을 리 없는 연자심이였고 그 기쁨은 이루 말로서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처녀의 수줍음은 좀처럼 선뜻 입을 벌려 대답할 수 없게 했으며.

연자심으로 하여금 얼굴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고개를 푹 수그리게 만들었다.

한참 만에야 연자심은 외면을 하듯 머리를 옆으로 돌리며 빙그레 웃는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 어쩌면 그렇게 대담하신 말씀을. 부끄러움도 없이 청산유수 같이 잘하시나요?

호호호 ............. "

방울 같은 웃음소리.

노영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냘픈 연자심의 손을 덥석 움켜잡고.

어서러져라 꼭 손아귀 속에 넣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색을 하고 자못 점잖은 말투로 그의 진심과정열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 연저 ! 그대와 나는 결코 이렇게 세속적으로 만나게 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하오.

우리들의 사이를 속되게만 해석하실 필요는 없소.

나의 은사 남해어부께서는 늙어신 몸으로 강호의 협객으로 수십 년 동안을

넓은 천지를 편력하시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비환이합(悲歡離合)을

구경하셨는지 모르고 또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은혜니.원한이니. 인저이니

원수니하는 것들을 몸소겪어셨는지 모르오.

이십 몇년 전에 마침 사모님과 더불러 속세를 등지고 은퇴해 버리시려 했을 때.

천만 뜻밖에 사모님께서 불치의 병으로 자리에 누우신 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으며 나의 은사께서는 그것을 평생을 두고 슬퍼하시며

나에게도 간곡히 타이르신 말씀이 있소.

만일에 서로 심성이 맞는 배우자가 생긴다면 피차간에 진정으로 평생을 바쳐서

사랑할 수 있는 사이라면 응당 이 어수선한 강호를 하루라도 속히 떠나서

일체의 인간 대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끊어버리고.

한낱 어부가 되든 나무꾼이 되든 속세를 등지고 자신만의 마음 편한 세계에서

자신의 생활을 즐기는 것이 현명지책이라고까지 말씀 하셨소.

이러한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토록

할 것이며 유감되고 후회됨이 없도록 선쳐해야 한다고 하시었소! "

 노영탄은 말하는 동안에 연자심의 손을 자기 가슴팍으로 왈칵 끌어당겼다.

노영탄은 대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나니 속이 후련한 모양이었다.

시원스런 미소를 입가에 띠면서 또 몇 마디를 계속했다.

" 연저의 아리따우면서도 재질이 넘치는 모습을 나의 은사께서 한번 보신다면.

반드시 기쁘하실 거요.

더군다나 연저와 오매천녀 선배님의 인연이나 관계를 아시게 된다면.

얼마나 놀라시고 대견하게 생각하실지 모르는 일이오! "

연자심으로서는 어쨌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노영탄이 이다지도 대담하고 솔직하고 담백하게 자기 심중을 고백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으로는 무한히 기쁘면서도 얼굴 밖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수줍음 ........

연자심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대답을 회피해 버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 이제 그만 제 손을 놓아주세요! "

연자심은 노영탄의 손길을 가볍게 ㅃ리쳐버리고 몸을 일어켜 틀만 남은 창밖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아이좋아라!  어느 틈에 비가 그쳤군요 ! "

노영탄도 따라 일어서서 창가로 가까이 갔다.

그렇게 사납고 줄기차게 쏟아지던 비가 씻은 듯이 개고 높은 하늘에서는 파란 색체가

군대군대 시원스런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두 젊은이들은 이야기에만 정신이 팔려서 어느 틈에 비가 그치고 날씨가 겐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의 하늘에는 어느듯 황혼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머리를 들어 먼곳을 바라보니.

어느 틈에 얼굴을 내민지도 알 수 없게 핏빛같이 시뻘건 태양이 이미 강변 저쪽 산넘어로

비스듬히 비껴나가고 있었다.

산 고개를 비추고 강물을 비춰주는 한 줄기 저녘놀의 금빛이 반짝반짝하는 붉고 짙은

색체는 두 젊은이등의 가슴속을 또한 한없는 희열과 희망에 불붙게 해주었다.

둘은 급히 몸을 일어켜 묘문을 나섰다.

호구라는 고장의 성 안을 향해서 빨리 길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두 필의 말이 또다시 나란히 채직을 높이 휘두르며 달리고 있을 때.

난데없이 강변으로부터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나룻터는 여기요!  나룻배가 있으니 이쪽으로 오시오 ! "

노영탄과 연자심은 .

그 고함소리를 듣고 무심결에 훌쩍 고개를 돌려 강변쪽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그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강변에 조그마한 나룻터같이 몇 개의 말뚝이

꽂힌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강변에는 나지막하게 돛을 단 배 한 척이 떠 있었으며.

바로 그 위에서 뱃사공 한 사람이 그들을 보고 손짓을 하면서 부르고 있었다.

노영탄은 이 뜻하지 않은 광경을 바라보면서 적이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이렇게 황벽한 고장에 어떻게 나룻터가 있을 수 있을까 ?

또 손짓을 해서 손님을 부르는 뱃사공까지 있다니 ..........

이건.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 "

노영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앞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나루터와의 거리가 어지간히 멀다고는 하지만 .

그 뱃사공이란 사람의 나이는 약 50세 가량이며 몸에는 무명 적삼을 입었고.

뱃머리에 혼자 서서 대나무로 만던  노를 손에 쥐고 있는 품이 조금도 어색하거나

이상한 점이 없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노영탄은 다시 생각을 돌렸다.

방금 연자심과 더불러 산에서 비탈길을 내려올 때에는 급히 말을 달려야 하는 바람에

부근의 지형에 대하여 아무것도 주의해 보지 않았으니.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나루터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 두 사람의 눈에 띄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노영탄과 연자심 앞에 나루터가 보였다고 해서.

그것이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될 것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한 노영탄은 그제서야 말고삐를 그쪽으로 향하고 몸을 돌려 가까이 다가갔다.

배와의 거리가 가까와 질수록  노영탄은 어떤 자신을 가졌기 때문에 유유히 그곳으로

말을 몬 것이었다.

' 조그마한 배에 뱃사공이 단지 혼자 있으니.

아무리 수상쩍은 놈이로서니 내 무술이면 .........

또 이 고장 강물에 대해서도 정통할 만큼의 나이니

어떤 잘못된 사태가 발생하드라도 제깢 놈이 내 손아귀에서 호락호락 빠져나갈 수 있으랴! '

 

이제 여기서 호구라는 고장까지 가려면 아무리 빨리 말을 달려도 두서너 시간은 걸려야만 했다.

또 이 일대의 길도 그다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와는 반대로 . 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간다면 저쪽 강변으로 올라가서

얼마더 가지 않아서 곧장 구강에 다다를 수 있으니.

여간 길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곰곰 따져볼 때 노영탄은 자기 자신의 무술에 대해서 믿는 바 또한 든든한지라.

서슴치 않고 연자심을 데리고 그 배로 강을 건너갈 결심을 하고 나루터의 자그마한

배를 향하고 두말없이 말을 달려 들어갔다.

물가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노영탄은 말 위에서 앉은 채로 그 뱃사공에게 말을 물어보았다.

" 여보시오. 당신의 이 배를 가지고 우리 두 사람과 말까지 함께 싣고 저편까지 건너갈 수 있겠소? "

그 뱃사공은 왜 그런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 서방님 안심하십쇼! 이 강이 제아무리 넓고 깊다고 해도 이 늙은 것이 벌써 이십 년 동안이나

이 나룻배를 저어서 살아왔는데요.

어느날 하루 십여 차례씩 이 강을 건너가고 건너오고 하지 않은 날이 없읍니다.

날도 저물어 가고 하는데 그런 걱정은 마시고 어서 빨리 올라 오십쇼! "

말하는 품이 티끌만큼도 서두르다거나 어색한 데가 없는 뱃사공이었다.

노영탄도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그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생각하고

연자심을 먼저 배에 오르게 하고 자기는 말 두 필을 끌어 올려놓고 나서야

천천히 배 위로 뛰어 올랐다.

그 뱃사공은 사람과말이 모두 배 위로 올라온 것을 보더니.

대뜸 대나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나룻배가 몇 번인지 몸을 흔들흔들 가볍게 좌우로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나는듯이 강기슭을 뒤로하고 쏜살같이 넓은 강물 한복판을 향해 물결을 헤쳤다.

두 필의 말들은 뱃머리에 있는 좁디좁은 갑판위에 매어놓았으며 뱃사공은 뒷편에

있는 갑판에서 대나무 노를태연자약하고 익숙한 솜씨로 저어서 저편 강면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선창 가운데 마주 앉아 있었다.

노영탄과 연자심은 선창 가운데 마주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 도도하게 물결치는 흙탕물 줄기를 무심히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이때 노영탄이 갑자기 고개를 뒤로 돌려 뱃사공을 흘끗 쳐다보니.

연자심에게로 가까이 다가 앉으며 이렇게 넌지시 물었다.

" 연저는 강물에 대해서 경험이 있으시오! "

연자심은 이 말을 듣더니 깜짝 놀란듯 .

역시 나지막한 음성으로 가만히대답했다.

" 없어요. 왜요?  무슨일이 생겼어요? "

노영탄은 머리를 양 옆으로 흔들며 태연자약한 말투였다.

" 아니. 아무 일도 아니오! "

이렇게 천연스럽게 대답하면서도.

노영탄은 쉴새없이 배를 젖고 있는 뱃사공을 주의해 보면서

선창 밖에 강물을 유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이때 그 자그마한 나룻배는 이미 넓은 강물 한복판에 와 있었다.

파도가 점점 높아지고 거칠어졌다.

거기에 따라서 선체가 흔들리는 정도도 심해졌고 .

두 필의 말들이 그것이 겁이 난다는 듯 가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다.

하늘이 아주 캄캄해졌다.

단지 끝닿은 데를 알 수 없게 먼 천변에 한 줄기 저녘놀 만이 비치어서

간신히 훤한 빛을 보이고 있었다.

폭이넓은 강 한복판에 배가 떠 있고 보니

사방에 망망하게 출렁거리는 파도가 있을 뿐.

몇 마리의 물새들이 날아들었다가 날아가버리고 하는 외에는.

다른 배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영탄은 또 한번 유심히 뱃사공의 모습을 곁눈질해서 훔쳐보았다.

뱃사공은 티끌만큼도 수상쩍은 태도가 없이 천연스럽게 노만 젖고 있었다.

노영탄은 아무도 모르게 빙그레 웃으며 생각하는 것이었다.

 ' 내가 공연히 쓸데없이 긴장했었군! 신경이 너무 과민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 '

이렇게 마음을 턱 놓은 노영탄은 그제서야 선창 밖을 내다보며 굵직한 음성으로 말을 붙여보았다.

" 여보시오 ! 사공 영감 ! 이번에 저편으로 우리을 건네다주시고.

또다시 이편으로 돌아오시는 거요? "

뱃사공은 배꼬리에서 태연히 노를 저으며 노상 싱글벙글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 아니오. 이번에 저쪽 강변으로 건너가면 오늘은 마지막입니다.

날도 저물고 했으니 그만 집에 가서 쉬어얍죠! "

바로 이때 였다.

뱃사공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난데없이 요란스럽고 날카롭고 휘바람 소리가

노영탄의 등들미에서 들려왔다.

" 쉬익! "

난데없이 들려오는 휘바람 소리에 노영탄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오싹! 몸을 떨면서 상반신을 꿈틀하는 순간에 그는 벌써 선창 밖으로 뛰어나와

뱃머리에 있는 갑판 위에 우뚝 서서 힐끗 뒤를 돌아다 보았다.

사태는 심상치 않았다.

노영탄은 극도로 긴장했다.

유심히 휘바람 소리가 들려온 쪽을 살펴보니.

과연 시원스럽게 불어오는 강바람을 헤치며 쏜살같이 달려오는 한 척의 나룻배가 있지 않은가.

" 쉬익! "

노영탄이 옴싹달짝도 하지않고 갑판 위에 서서 그대로 동정을 살피고 있노라니.

그 나룻배에서는 연거푸 또 한번 날카로운 휘바람 소리가 울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노를 젖고 있던 뱃사공 영감이 한번 휘파람 소리를 듣더니

즉각에 두 손을 멈추어 버렸다.

마치 휘바람 소리가 들려온 저편의 배가 한시바삐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저편 나룻배는 맹렬한 속도로 이편 배를 향해 서슴치 않고 접근해 들어왔다.

그때 위에서 세줄기 사람의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그 중의 한 놈이 목청을 크게뽑아서 고함을 질렀다.

" 이보게!  황노사 ! 빨리 내려오지 않고 뭘 우물쭈물하고 있나? 그게 바로 그놈인가? "

이편 배의 뱃사공 영감은 뱃머리 갑판 위에서 역시 큰 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 김타주님! 바로 이놈입니다.

여러분이 빨리 오셔서 이놈을 맡아 가십쇼.  제가 곧 건너갑죠! "

배사공 영감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풍덩 !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강물 속으로 뛰어들더니.

순식간에 깊은 물속으로 몸을 감추어버리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저편 배와 이편 배가 주고 받는 수작을 들었을 때.

이미놈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대뜸 깨달았다.

그것을 확실히 알아차렸을때 노영탄은 그다지 겁날 것은 없었다.

그가 몸에 지닌 무술과 또한 강물에도 어느 정도 정통하다는 자신이 있으니.

그다지 겁낼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지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연자심이었다.

강물에는 전혀 경험이나 지식이 없는 아가씨를 데리고.

또 이 망망한 강물 위에서 날은 캄캄하게 어둡고 말았으니.

그렇게 자신 만만한 노영탄도 당황하고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영탄은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말등에 얹어두었던 보따리 속에서 보검 금서검을 선뜻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연자심을 위하여 보검 자정도 뽑아냈다.

노영탄이선창 속으로되돌아가려고 했을 때.

한빙선자 연자심도 이미 선창 밖으로 뛰어나와 있었다.

노영탄을 보자마자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 왜요? 회양방 놈들인가요? "

" 음! "

노영탄은 간단히 대꾸하며 보검 자정을 연자심에게 선뜻 내주면서

심히 긴장한 말투로 말했다.

" 연저! 이것을 몸에 지니시고 선창 속에 숨어 계시오.

불시에 흉기가 침범해 들어오지 않나 그 점을 특히 조심하시고.

이 두 필말을 잘 보고 계시오. "

말을 마치자 노영탄은 연자심의 대답도기다리지 않고  옷매무새를 단단히고치더니.

다시 뱃머리로 걸어가서 몸을 살짝 구부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흘쩍 배 위를 날아 단숨에 배꼬리에 있는 갑판 위에 우뚝서서 노를 잡았다.

저편의 나룻배는 점점 가까이 대들고 있었다.

배 위에는 도합 세 명 한놈은 배 한복판에 버티고 서 있었으며.

다른 두 놈은 뱃머리와 꼬리에 각각 자리 잡고서서.

두 손으로 쌍노를 아주 노련한 솜씨로 휘저어며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편 배에 타고 있는 놈들은 노영탄이 이미 그들의 뜻을 알아차리고 이에 대쳐할 만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더한층 속력을 내서 급히 달려 들었다.

저편 배와 이편 배의 거리가 불과  2.3장 밖에 안 될 만큼 접근해 왔다.

저편 배 한복판에 버티고 서 있던 놈이 별안간 목청을 뽑아서 호통을 쳤다.

" 네 이놈 ! 네 놈이 바로 악중악이라는 놈이지!

이 넓은 강 양편으로는 우리 방에서 물샐틈이 없는 경계망을 펼쳐놓고있다!

네 놈이 산 채로 이 경계망을 돌파하고 빠져 달아난다는 것은

하늘에 올라가기보다 더 어려운 노릇이다.

우리 방주님께서는 네 놈이 아직도 나이 어려서 철부지 소행이라고 관대히 생각하시어.

단지『숭양비급』만 순순히우리들 수중에 내놓아서 방주님께 바치도록 한다면

네 놈의 목숨만은 살아날 수 있는 길을 틔위 주라고 분부하셨다.

그렇지 않고 우리들의 뜻을 거역하고 날뛴다면 그때야 말로.

이 강물 밑바닥이 바로 네 놈이 몸을 묻을 곳이 되고 말 것이다! "

노영탄은 침착한 태도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호통소리를 듣고나서야.

머리를 휘둘러 사방을 돌아보았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망망한 강물이 흉흉한 파도를 일어키고 있을 뿐.

이편으로 달려들고 있는 나룻배 한 척을 제하고는 다른 배라고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다시양편 산기슭을 건너다 보았으나 거기에도 역시 시커먼 그림자가 한점 두점 은연 중에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이 바라다 보일 뿐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정경이었다.

' 흐음. 심히 난처한 판국인데 ....... 어떻게 한다?  '

그러게 자신만만한 노영탄도 이렇게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보니.

한동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때였다.

" 평! 펑! "

하는 요란스런 소리가 배 밑바닥으로부터 들려왔다.

노영탄은 깜짝 놀랐다.

퍼득!  머리를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 흐음. 방금 뱃사공 놈이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간 채로 한동안 종적을 나타내지 않더니

이놈이 배 밑바닥으로 기어 들어가서 못된 농간을 부려보자는 수작이구나! '

저 배위에 있는 놈들에게 무억이라 한마디 대꾸해 주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

그런 것을 돌볼 겨를도 없었다.

별안간 두 발로쿵 하고 한번 구러더니

몸을 엉거주춤하고 절반을 아래로 구부려서 전신의 힘을 한 곳에모아가지고.

"으윽 "

마치땅이라도 꺼저버리듯이 아래로 전력을 다하여 눌려 버티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스승인 남해어부의 절예 중의 한 가지인 혼원신공이라는 술법이었다.

연자심이 선창 가운데 앉았다가 배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요란스런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사방을 휘들러보고 목소리를 높여 노영탄을 불러보려고 할 때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아무일도 없던 배가 갑자기 아래로가라앉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뱃머리 갑판 위에 있던 두 필의 말이 이 돌발적인 사태에 깜짝 놀라

껑충껑충 뛰면서 괴상한 소리를 내고 울부짖었다.

연자심은 노영탄이 무엇을 하고 있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때 노영탄은 여전히엉거주춤하고 상반신을 구부린 채 .

물속으로 가라앉아 들어가는 배꼬리에 여전히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온갖 힘을 두 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쿵쾅쿵쾅 한 발을 높이 쳐들면 또다른 한 발은 힘껏배바닥을 구르면서

두 팔을 뒤로 휘둘러 가지고왈칵왈칵 몸을 앞으로 고부라질 듯이 내밀었다가

물러섰다 하고 있었다.

두 손에서 일어나는 바람과 전신의 힘으로  배꼬리에서 뱃머리를 움직여

앞으로 몰고 나가는 것이었다.

이자그마한 나룻배는 뱃머리만 물 밖으로 불쑥 드러낸 채.

노영탄이 쿵쾅쿵쾅 뱃바닥을 두 발로 구를 때마다 으쓱으쓱 뱃머리를 솟구쳐 올리면서

앞으로 달아났다.

연거푸 서너댓 번 노영탄이 두 발을 구르니.

자그마한 나룻배는 단번에 화살같이 빠른 속도로 10여 장이나 되는 거리를 달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고보니 배밑바닥에서 들려오던 괴상한 소리는 딱 그쳐버렸으나 .

저편의 나룻배는 여전히속도를 더하여 바싹바싹 뒤를 쫓아오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강바람을 헤치며 얼굴을 시원스럽게 쳐들었다.

그리고는 한바탕 통쾌하게 웃어젖히고 나서 저편 배를 건너다보며 호통을 쳤다.

" 회양방이란 과연 대단한 놈들이구나!

백족지충(百足之蟲)이 죽어서도 꿈틀한다더니 ...........

하지만 네 놈들 같은 섣부른 재간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수작이다!

네 놈들은 그만두고 너희들의 두령이라는 고비란 놈이 친히 여기 나타났다손 치드라도

『숭양비급』을 빼앗아보자는 것은 당치도 않은 생각이다.

공연히 소득없는 일에 헛수고를 할 뿐이다.

네 따위 어리석은 놈들 몇 명의 설익은 잔꾀 따위에는.

이 서방님께서는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고 여쭈어라 !

네 이놈들 선뜻 돌아가지 못할까?

그렇다면 개 목숨 같은 네 놈들의 생명만은 부지하게 해주마! "

노영탄이 말을 마쳤을 때.

저편 배 옆 수면 위로 난데없이 한 놈이 불쑥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바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던 뱃사공 영감이었다.

저편 배 한복판에 버티고 있던 놈은 노영탄의 호통소리를

귀에 담을 겨를도 없이 허리를 굽혀 뱃전으로 솟구쳐 오른

그 뱃사공 영감에게 나지막한 음성으로 몇 마디를 쑥덕쑥덕 한다.

뱃사공 영감은 아래턱을서너번 끄덕끄덕 하더니

그대로 몸을 벌컥 뒤집어서 또다시 텀벙 하고 물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이때 저편 배 위에 있는 놈은 얼굴을 노영탄에게로 돌리면서

한바탕 징글맞게 웃어젖히더니

서슬이시퍼런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 요 앙큼스런 놈아!  헤헤헤 ........

아무것도 모르고 천방지축 까불고 날 뛰더니 .......

이 아저씨께서는 목숨을 내걸고라도 너 같은 녀석에게는 한 번 강물을

톡톡이 먹여서 혼을 내주어야 겠다!

나중에는 자라새끼처럼 강물 속에 뻗어버리는 네 녀석의 꼬락서니를 보아야만

속이 시원하겠단 말이다! "

말을 마치더니 그놈은 등에 메고 있던 한 자루의 쇠갈귀를 선뜻 뽑아 들었다.

흘쩍!  몸을 솟구치더니.

풍덩 ! 하는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그놈도 또한 뱃사공 영감과 똑같이

물 속으로 뛰어들어 종적을 감춰버리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두 놈이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보자.

퍼득 깨달았다.

' 흐음 !  이놈들이 한꺼번에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이 배에다

구멍을 뚫어서 저절로가라앉혀버리자는 수작이겠지!

이놈들은 강물에 대해서는 상당히 정통하고 또 경험도 풍부할 터이니.

어쨌든 물 속으로 뛰어들어서 놈들과 대결하지 않고는 이 배가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이렇게 단단히 놈들과 대결해 볼 결심을 했을 때.

역시 걱정스러운 것은 연자심이 강물에 대해서 전혀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강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아가씨.

치흑 같은 어둠 속에서 노영탄이 아차! 

실수만 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위험한 지경에 빠져버릴 것이 뻔했다.

그러나 그 이상 더 망설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 놈들과 대결하지 않고 하는 대로만 맡겨두고 있는다면? '

어차피 위험에 빠질 것은 매일반니었다.

' 다른 도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

노영탄은 또 한번 이렇게 굳은 결심을 하자.

흘쩍 머리를 돌려 선창안에 있는 연자심에게 높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 사태가 심히 긴박해 졌소!  나는 물 속으로 뛰어들 테니

꼼짝말고 이 배만 잘 지키시오 !

배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단지 물 속으로 가라앉지만 않는다면

살아날 길이었으니 .....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

부탁하오 ....... "

말을 마치자.

노영탄은 웃통을 벗어버리고 허공으로 뻗더니

소리하나 내지 않고 화살이 꽃히듯이 조용히 물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 광경을 목격한 한빙선자 연자심의 놀랍고 당황하고 초조한 심정은 이루 형언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연자심도 보검 자정을 한 손에 잔뜩 움켜잡고 저편에서 달려드는 나룻배 위의 비도 두 놈의

동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려보면서 한편으로는 강물 위를 유심히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연자심의 시야 속으로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출렁대는 강물이

거센 파도를 일어키며 몰려들 뿐 사람의 소리라고는 전혀 들어볼 수 없었고

또 털끌만한 무슨 동정을 찾아낼 수도 없었다.

물속으로 뛰어든 노영탄은 .

숨을 죽이고 오른손에 보검 금서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두다리를 물 속으로 힘껏 뻗쳐서 곧장 깊숙한 곳으로 뚫고들어갔다.

늦은봄 날씨라고는 하지만 강물은 역시 차갑기가 살을 저며내며 뼈를 깍아낼 것만 같았다.

거기다가 밤중의 물 속이고 보니.

수면에서 아래로 떨어져 들어갈수록 칠흑 같은 어두움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노영탄은 물 속으로 들어가자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한곳에 몸을 멈추고 있다가

간신히 두눈을 떠서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역시 칠흑 같은 캄캄한 강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뜨일 까닭이 없었다.

그는 일찍이 파양호에서 스승 남해어부를 따라서 무예를 배우고 연마했을 때.

거기 곁들여 물 속에서 견뎌낼 수 있는 절묘한 재간을 몸에 지니게 된 것이다.

내공의 정신력을 발휘해서 운기를 통하고 들이마시고 하는 술법을 쓰고 숨을 죽이고

정신을 한 개 초점에 집중하면 물 속에서도 능히 반시간 정도는 끄떡없이 견딜 수 있으며.

밖으로 나와서 호흡을 하지 않더라도 조금도 괴로움을 느끼지않았다.

일찍이 파양호에 있을 적에는 허구한 날호수 물 속 깊숙히 뚫고 들어가서 고기를 잡고

새우와 희롱하는 것을 한 가지의 즐거운 소일거리를 삼아왔었다.

이러한 다년간의 경험에서 노영탄은 물 속에서 두 눈을 뜨면 마치 육지에 있는 것과 똑같이

모든 물체를 판단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아무것도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노영탄은 초조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