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23장 와신상담(臥薪嘗膽)

오늘의 쉼터 2013. 12. 13. 21:41

정협지(情俠誌)

제 23장 와신상담(臥薪嘗膽)

악중악 황산에 은둔하다 

 

파란 풀들이 골고루 덮여 있는 이 공지 한복판에는 거창하리만큼 큼직한 바윗돌이

한 개 놓여 있었다.

그 바윗돌은 번쩍번쩍 빛이 나고 또 평평해서 마치 누군가 침상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이 거창한 바윗돌과 마주한 세 거루의 복숭아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이 큰 키에

시퍼런 잎사귀들이 무성할 대로 무성해 있었으며 가지마다 먹음직스러운

복숭아가 벌겋게 무러익어서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 넓찍한 공지는 간신히 햇볕을 쬘 수 있는 곳이 단지 한 면뿐이고 다른면은

깎아 세운 것 같이 험준한 절벽들 뿐이었다.

또 다른 면이 있다면 그것은 높이 하늘을 뚫고 구름 속으로 깊이 솟아 있는

날카로운 산봉우리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공지는 마치 인공으로 깎고 다듬어서

만들어진 하나의 평대(平臺)와도 같이 불쑥 솟아서 하늘을 찌러는 높은 봉우리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때없이 지저귀는 새소리 그리고 시원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바람.

사방을 아무리 돌아다보아도 영원히 죽음같은 적막이 감돌 뿐이었다.

잔디밭을 온통 뒤덮은 기화요초가 가벼운 바람에 하느작거리고.

나무의 가지와 잎사귀 또한 소곤거리듯 간드러지게 흔들리니.

그 속세를 등진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아서

별천지요. 도원경을 이루고 있었다.

별안간.

" 쉭! "

기다라게 뽑는 쇳소리 같은 휘바람 소리가 이 고요한 풍경화 같은 공지의

적막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울려퍼졌다.

그 휘바람 소리가 딱 끊기는 순간. 깎아 세운 것 같은 절벽 산봉우리 위에서

난데없이 두 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시커먼 그림자는 산봉우리 위에 나타나자 엉금엉금 기기도하고.

데굴데굴 구러기도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면서 차차 이 공지로 가까와 질수록.

한둘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그림자로 변했다.

삽시간에 그 수많은 시커먼 그림자들은 평평한 공지 잔디밭 위에 떨어졌다.

그제서야 그것이 떼를 지어서 몰려 다니는 원숭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맨 먼저 앞장을 서서 뛰어내린 놈은 무시무시하게 몸집이 큰 두 마리의 원숭이였다.

땅 위에 벌떡 일어서니 전신이 황금색 누런 털이요.

키가 사람의 절반만큼이나 크고. 새빨간 두 눈동자. 울퉁불퉁 억세게 생긴 뼈마디.

동작이 민첩하고 눈치 빠르기가 사람 이상이었다.

두마리 원숭이가 한번 움직이면 뒤에서는 무수한 다른 원숭이들이 옹기종기 따라나섰다.

이 두 마리 큰 원숭이들은 마치 그들의 두령인 것 같았다.

뒤를 따르는 한떼의 원숭이들은 큰 놈 작은 놈 키가 고르지 못했고 형형색색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몸에 덮인 털만은 똑같이 누런 황금색이었다.

큰 원숭이에 비해서 머리 하나는 작아 보이는 놈들이 우글우글 두령 원숭이의 뒤를 쫒아서

몰려들었다.

" 깩깩깩. "

" 헹헹헹. "

입으로 쫑알거리는 놈. 콧소리를 내는 놈. 무수한 원숭이들은 깡충깡충 뛰고 까불고

시시덕거리고 서로 잡아당기고 밀치고. 온갖 발짓을 해가면서 그 들의 두령 원숭이를

따라서 무더기를 이루고 공지 위로 몰려들었다.

이 한떼의 원숭이들은 백 마리도 더 돼 보였다.

그 수많은 원숭이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크고 작은 놈들이 완연히 구별되었고.

그중에서도 20여 마리는 꽁무니를 따라서 나타났는데.

키가 불과 한 자 남짓한 어린 놈들이었다.

그러나 이 어린 놈들도 그 동작이 민첩하기가 큰 원숭이 이상이었고.

장난질과 말썽을 끊이지 않고  부리는 놈들이었다.

그 20여 마리 중에서 제일 작아 보이는 세 마리 새끼 원숭이들은.

공지잔디밭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깡충깡충 뛰더니 다짜고짜로

세 거루 복숭아나무 위로 살금살금 기어 올라가 복숭아를 따먹어려 했다.

앞장을 섰던 큰 원숭이가 그 눈치를 채고는.

당장에 긴 팔을 뻗어 그 어린 놈들을 끌어내려서

새빨간 볼기짝을 몇 번인가 철썩철썩 때렸다.

" 까까까까 .......... "

어린원숭이 놈들은 볼기짝이 아파서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새빨갛고 조그만 눈동자를

뱅글뱅글 돌리고 혓바닥을 날름 입 속으로 집어넣은 채 목을 움츠려트리고 꼼짝도 못했다.

여러 원숭이들이 까불고 장난질을 치고 정신없이 잔디밭 위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

갑자기 날카로운 휘바람 소리가 또 한번 들렸다.

원숭이들은 그 휘바람 소리를 듣더니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두 줄로 갈라져서 대오를 짜고 잔디밭 위 큰 바윗돌을

바라다보며 늘어섰다.

두 마리의 제일 큰 금모거후(金毛巨후)는 이때 나란히 그 큰바윗돌 위에 앉아서

두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서 여러 원숭이들을 내려다보았다.

" 갹갹갹갹! "

두 마리 큰 원숭이 중에서 한 놈이 입을 크게 벌리더니

괴상한 소리를 몇 차례 짖어댔다.

무슨 명령을 내리는 모양이었다.

아래에 늘어서 있던 뭇 원숭이들은 그 소리를 듣더니

일제히 그들의 두령 원숭이와 똑같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잔디밭에 앉아버렸다.

그리고는 아까와는 딴판으로 엄숙하고 조용한 품이 실로 가관이었다.

바윗돌 위에 앉아 있는 두 마리 큰 원숭이는 동시에 팔을 쳐들고 손을 흔들었다.

등들미에 있는 주봉의 바윗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 갹갹갹갹! "

입으로 또다시 몇 번인지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당장에 양편으로 갈라선 대오에서 제일 앞장을 섰던 큼직한 원숭이 두 마리가

그 큰 바윗돌을 한바퀴 빙글 돌더니.

그들이 처음 내려왔던 주봉의 바윗돌을 바라다보며 걸어 올라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본래 바윗돌 절벽 아래로는 잔디가 깔려 있는 평지와 바짝 붙은 곳에 석동이 한 군데

있었다.

그러나 그 석동은 큰 바윗돌로 막혀져 있었고 한 줄기 가느다란 구멍만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여간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치기 쉬웠다.

그 두 마리의 큰 원숭이들은 동굴 이구까지 가서 문을 가로막고 있는 큰 바윗돌을

밀쳐보려고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일제히손을 멈추는 것이었다.

두 원숭이는 머리를 수그리고 한동안 무슨 소린지 쑥덕쑥덕하며 무언가를

서로 의논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다시 머리를 수그리고 몸을 쭈그리더니 조심조심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었다.

갑자기 두 원숭이는 깡충 뛰어 몸을 빼더니 머리를 돌리고 큰 바윗돌 위에 있는

두령 원숭이를 향해 큰 소리로 갹갹갹갹 서너 번을 짖었다.

저편에 있던 두 두령 원숭이들이 이 소리를 듣더니

당장에 그 바윗돌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화살이 날 듯이 동굴 앞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그러자 잔디밭에 있던 여러 어린 원숭이들도 뒤를 따라 깡충깡충 뛰어서

일제히 동굴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두령 원숭이 두 마리의 금모거후는 동굴 앞까지 가더니.

역시 땅 위를 샅샅이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었다.

두 두령 원숭이는 별안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그런지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다.

쌍쌍이 두 발로 땅을 한번 쿵 하고 구르더니 머리를 발딱 쳐들고.

" 쉭쉭! "

쇠소리 같은 날카로운 휘바람을 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무수한 원숭이 떼들도 일제히 괴상한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이랗게 떼를 지어서 몰려 있는 수많은 원숭이들이 제각기 괴상한 음성으로 한바탕 짖어대니.

그 소리는 산과 골짜기를 흔들며 울려 퍼지고 메아리치며 그칠 줄 몰랐다.

끽끽. 갹갹!

윙윙. 왱왱!

온갖 괴상한 소리가 만산만곡을 뒤집어엎을 것만 같았다.

원숭이 떼들이 이렇게 미친 듯이 외치고 부르짖고 아우성을 치고 있을 때.

홀연 동굴을 가로막아 놓은 큰 바윗돌이 들썩하고 움직였다.

동굴 속에 사람이 있어서 그 큰 바윗돌을 미는 것 같았다.

그 큰 바윗돌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동굴 안에 있는 사람은 힘이 굉장히 센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떤 무서운 힘으로 미는 것 같았다.

쿵!

금세 산이 허물어질 것 같은 놀라운 굉음이 일어났다.

마침내 그 둥그런 바윗돌은 밖으로 밀려나와서 잔디밭 위에 나둥그러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큰 바윗돌은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했다.

이렇게 거대한 바윗돌을 밀어서 굴리기까지 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힘이었다.

그대한 바윗돌은 굴러갈수록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잔디가 깔린 평지가 끝나는 곳은 다소 경사가 져 있었다.

바윗돌은 이 경사진 지점까지 굴러가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굴렀다.

원숭이 떼들의 무수한 눈동자가 휘둥그래졌다.

하도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고만 있을 때.

그 거대한 바윗돌은 이미구르고 굴러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 바윗돌이 얼마나 무거웠던지.

굴러간 뒤의 잔디밭에는 눌린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기까지 했다.

원숭이 떼들은 놀랍기도 하고 이상스럽기도 해서 어쩔 줄 몰랐다.

이런 판에 동굴로부터 후다닥 한 사람이 날 듯이 뛰어나왔다.

몸을 쓰는 품이나 빠르기가 마치 한 마리 큰 새가 훌쩍 나는 것 같았다.

원숭이 떼들의 머리 위를 슬쩍 번갯불처럼 스치고 표표히 몸을 날려

단숨에 대여섯 길이나 먼 곳으로 떠가더니.

잔디밭 평평한 땅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바윗돌 위에 우뚝 내려서는 것이었다.

갹갹. 끽끽!

윙윙. 왕왕!

원숭이 떼들은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보자.

또다시 괴상한 음성으로 저마다 외치고 부르짖고 아우성을 치고 야단이었다.

그런데도 그 한쌍의 금모거후만은 역시 침착하고 점잖은 태도로 까부는 법이 없이.

그 바윗돌 위에 서 있는 사람을 한참 동안이나 유심히 바라다보고 있었다.

별안간 그 두 두령 원숭이들은 쌍쌍이 두 팔을 높이 쳐들어 휘두르더니.

쉭 하고 또 휘바람을 미친듯이 사납게 불며 훌쩍 날아서는 그 사람을 향해

다짜고짜로 육박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원숭이 떼들은 두령 원숭이가 행동을 개시하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대담해진 모양이었다.

일제히 두령 원숭이를 따라서 외치고 부르짖고 아우성을 치면서 우르르

그 바윗돌을 향해 습격해 들어갔다.

바윗돌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두마리의 큰 원숭이가 덤벼드는 것을 보자.

형세가 급박하고 맹렬해진 것을 깨닫고도.

여전히 태연자약 겁을 내거나 조급히 구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몸을 다소 구부정하게 굽히는 체하더니

두 손을 높이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는 불현듯 내공의 억센 힘으로 두 손을 동시에 앞으로 확 뻗어서는

맹렬한 손바람을 일어켜 두 원숭이의 앙가슴을 들이쳤다.

두 마리의 큰 원숭이들은.

황산금사원(黃山金絲猿) 중에서도 왕과 왕후격인 원숭이들이었다.

나이가 다 백 살 전후였지만 체력이무섭도록 강했으며 영민하고 민첩했다.

백수십 쌍의 후손을 거느리고 산봉우리 꼭대기에 산 지 이미 오래 됐고.

평소에는 좀처럼 산 아래에 내려가지도 않았으며 다른 동물들을

이 산꼭대기 평지에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다.

이 평지에는 말하자면 대왕 노릇을 하는 존재였다.

원숭이 떼들은 동작이 기막히게 민첩하고 그 수가 또한 엄청나게 많은 데다가.

지세가 험준한 곳인지라 다른 짐승들은 감히 그들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외부의 사람이 침범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두 두령 원숭이는 놀라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정세가 급박함을 깨닫자.

다짜고짜로 두 마리가 한꺼번에 행동을 게시하여

그 사람에게 덤벼든 것인데. 상대쪽 인간이 무술이 탁월하여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두 원숭이가 그 사람에게 아주 가깝게 접근해 들어갔을 때.

홀연 그 사람이 팔에서는 무섭게 억센 바람이 일어나서

그들 둘을가로막아버릴 뿐만 아니라.

그 무서운 손바람은 그들 두 원숭이의 몸을 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두 원숭이는 마침내 땅을 디디고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걸음걸이가 어러울 정도였다.

주춤주춤 뒤로 몇 걸음인지 물러서서야 간신히 몸을 가누고 설 수 있게 됐다.

두 원숭이는 심히 괴상하게 여겼다.

분명히 그 사람은 처음 섰던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고.

또한 그들의 몸에 손 하나 대지도 않았다.

' 그런데 어째서 우리들을 똑바로 서 있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냐? '

두 원숭이는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평상시에 멧돼지나 사슴과 싸움을 할 때는 몸을 재빠르게 썼고 힘이 센데다

또 민첩하고 활발했는지라 언제나 그 따위 짐승들쯤은 손 안에 쥐고 놀 듯이.

기진맥진하게 만들어버리곤 했다.

그런 까닭으로 언제나 저희들이 힘이 제일 세다고만 믿어왔다.

한낱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혼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보통 사람이고 보면 이 두 원숭이와 싸워서 도저히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무술 실력이 섣부른 사람으로는 역시 이들 원숭이를 대적하기란

그리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런데여기 나타난 사람은 내공의 힘만 가지고도 이 두 무시무시한 원숭이를

대적하고 도리어 재를 날려버리듯이 조금도 힘이 드는 기색이 없었다.

그 사람은 손바람 한번에 두 원숭이를 격퇴시켜 버리더니

다른 원숭이 떼를 지어 덤벼드는 것을 보자. 자기의 본령을 드러내어

원숭이 떼를 한번 혼내 줄 결심을 하는 모양이었다.

" 에잇!  이놈의 짐승들! "

그는 한번 호통을 치더니.

몸을 훌쩍 솟구쳐서 원숭이 떼를 향해 쳐들어가는 것이었다.

원숭이 떼들의 선봉에 선 놈들은 이미 앞으로 무찔러 들어가고 있었으나.

그 사람이 정면으로 날아 쳐들어오는 것을 보자.

제각기 겁을 집어먹었다.

원숭이 떼들은 양편으로 갈라지며 몸을 피했다.

그 사람은 몸을 날려 원숭이 떼들이 몰려 있는 한복판에 내려서더니

두 팔을 한 일자로 평평하게 쭉 뻗고 마치 꽃을 찾아서 나는 나비와 같이

한 바퀴를 빙글 돌면서 동시에 두 손으로 원숭이 떼들의 몸을 쓸고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사람이 두 손으로 한번 원숭이 떼들을 스치고지나갔을 때.

크고 작은 무수한 원숭이들이 우수수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또다시 몸을 한번 솟구쳐 오렸다가 내려앉으면서 30여 마리의

원숭이의 몸을 건드려서 당장에 자빠뜨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 두 마리의 두령 원숭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갹갹 끽끽!

또 시끄럽게 짖어대는 아우성 소리가 일시에 일어났다.

수많은 다른 원숭이들이 두령들의 표정을 재빨리 알아채고 저마다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모조리 뒤로 물러서서 쭈거리고 앉아버렸다.

그 사람은 이 광경을 보더니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천천히 걸어서 세 그루 복숭아나무 옆으로 가서 우뚝 섰다.

복숭아나무 옆에는 굵기가 사람의 넓적다리만큼이나 되는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사람은 한 손으로 소나무를 짚으며 버티고 서더니

겁을 집어먹고 한 군데로 몰려 있는 원숭이들을 향해 한바탕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 에잇! 못된 짐승들아! 꼼짝말고 있거라! "

다음 순간.  그 사람은 왼손을 펼치더니.

별안간 나무 허리깨를 자르듯이 옆으로 후려쳤다.

딱!

요란스런 소리가 단지 한번 들렸을 뿐.

사람의 넓적다리만큼이나 굵은 소나무는

마치 칼로 벤 듯이 두 동강으로 잘라지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여러 원숭이들은 또다시 야단법석을 떨었다.

캑캑 칵칵!

또 한바탕 짖어대고 울부짖고 아우성을 쳤다.

놀라운 사실 앞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비명의 부르짖음 같았다.

두 마리의 두령 원숭이 금모거후들은 한동안 서로 깩깩거리더니

껑충 몸을 날려 날 듯이 재빠르게 그 사람 앞으로 달려갔다.

두 무릎을 구부리고 꿇어앉아서 그 사란을 향해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동시에 두 원숭이의 눈 속이 촉촉이 젖는 것이 뚜렸이 보였다.

눈자위에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며 그 사람의 옷자락을 지분지분 잡아당기며.

한편으로는 손을 들어 땅 위에 나자빠져 있는 수십 마리의 부하 원숭이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갹갹갹갹 하고 나자빠져버린 부하 원숭이들이 불쌍해서 볼 수 없다는 슬픈 비명의

소리를 질렸다.

그 사람은 머리를 한번 끄떡끄떡했다.

그리고는 땅 위에 나자빠져 있는 원숭이들 옆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몸을 구부리더니 두손을 들어서 그  여러 원숭이들의 몸을 한번씩 탁탁치면서 지나쳐갔다.

두 마리의 두령 원숭이들 앞에는 실로 놀랍고 신기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 사람이 한번씩 손을 대고 지나간 여러 원숭이들이 하나씩 두 눈을 번쩍 뜨고.

엉금엉금 기어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땅 위에 나자빠졌던 수십 마리의 원숭이들은 모조리 팔딱팔딱 제멋대로 뛰면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이때 두 마리의 금모거후도 부하 원숭이와 같이 꼿꼿이 일어섰다.

수많은 부하 원숭이들을 거느리고 .

그사람을 향해 한바탕 울부짖고 괴상한 소리로 환호성을 올렸다.

큰 놈 작은 놈 무수한 원숭이들이 깡충깡충 팔딱팔딱 제멋대로 뛰고 까불고

부등켜안고 캑캑거리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꼴은 실로 가관이었다.

홀연 그 두 마리의 두령원숭이는 그 사람 옆으로 가까이 가더니 옷자락을 자꾸만 끌어당겼다.

그 사람을 끌어다가 커다란 바윗돌 위에다 자리잡아 않혀놓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산이 떠나갈 듯이 요란스럽게 휘바람을 한번 불었다.

휘바람 소리를 듣더니 수많은 부하 원숭이들은 질서정연하게 각각 제자리를 찾아서

두 줄로 대오를 만들고 그 큰 바윗돌 앞 잔디 위에 도사리고 앉았다.

갹갹갹갹!

두 두령 원숭이는 또 한번 괴상한 소리를 질렸다.

그 소리를 듣더니 여러 원숭이들은 마치 사람이나 다름없이 일제히

그 사람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었다.

절이 끝난 다음에는 또다시 처음과 같이 단정히 앉아서 찍소리도 없이 조용해졌다.

두 마리 두령 원숭이는 동시에 팔을 높이쳐들어 휘저었다.

그 신호를 따라서 다른 두 마리의 큼직한 원숭이들이 대오 속으로부터 나오더니

석동을 향해 걸어갔다.

굴 속에 들어갔던 두 놈이 잠시 후 네 손에 큼직한 대광주리 하나를 떠받들고 나오더니

큰 바윗돌 앞까지 와서 그것을 내려놓고 처음과 같이 대오 속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들어갔다.

큰 바윗돌 위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은 그제서야 여러 원숭이들이 노는 꼴을 유심히 관찰했다.

신변 가까이 와 있는 두 마리의 금모거후는 각각 수놈과 암놈으로서 원숭이 떼를 지배하는

후왕(후王). 후후(후后)라는 것을 자세히 안 모양이었다.

큰 원숭이 두 마리가 대광주리를 내려놓자.

후왕이 곧 앞으로 나서더니 광주리에 덮인풀 잎사귀를 헤쳐놓았다

그 사람은 대광주리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광주리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모두가 달걀만큼이나 큼직큼직하고 시뻘건 과실들이었다.

빛깔이 투명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러는 품이 여간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후왕은 광주리 속에서 선뜻 제일 크고 제일 빨간 과실 다섯 개를 골라내더니

공손히 바윗돌 위에 앉아 있는 그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후왕은 또다시 과일을 집어가지고 바윗돌 위로 돌아가서 후후에게 세 개를 나눠주었다.

얼마 안 되는 동안에 과일을 전부 분배했다.

어린 원숭이놈들도 두 개씩 차례가갔고 앞줄에 있는 몇 마리 큰 원숭이들은

세 개씩 차지하고도 아직도 몇 개가 남는지라.

과일을 분배하던 큰 원숭이가 그것마저 바윗돌 위에 있는 그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여러 원숭이들은 과일을 받아 들더니 일제히 그것을 입 속으로 틀어 넣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먹고 싶어서 침을 흘리고 있었는 듯 했다.

후왕과 후후 두 두령 원숭이도 자기 몫의 과일을 연거푸 통째로 입에 넣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은 몹시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는 과일을 받아들고 이모저모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제서야 그 과일에서 맑고 깨끗한 향기가 코를 찌르며 왈칵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그 과일이 도대체 무슨 과일인가 들여다보고만 있더니

여러 원숭이들이 미친 듯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자.

그제서야 맛이 괜찮으리라는 생각으로 한 개를 집어서 입 안에 넣었다.

입 안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과일에서는 서늘하고 미각이 저절로 풍겨나는 것 같았다.

한번 이로 깨물어 보니 그 과일은 온통 단물 투성이요.

껍질은 달고도 새큼하며 과즙은 향기로우면서도 콕 찌르는 자극이 있어

여간 맛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한번 맛을 보고 나더니 그제서야 손에 들고 있던 10여 개의 과일을

하나씩 계속해서 먹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열 몇 개의 과일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정신이 산뜻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며

피곤함도 없어지고 배고픈 생각도 사라졌다.

이렇게 수선스런 상황이 끝났을 때 날은 이미 정오에 가깝게 되었다.

그사람은 원숭이 떼가 잔디밭 위에 단정히 앉아 찍소리도 없이 있는 광경을 보자.

손을 높이쳐들어 휘저어며.

" 그만 가거라! "

하고 호통을 첬다.

원숭이 떼들은 마치 그의 의사를 알아차렸다는 듯.

한바탕 환호성을 지르고 깩깩거리더니.

잔디밭에서 뿔뿔이 흩어지며 뛰고 쫒아가고 찌르고 잡아당기며 무더기로 까불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후왕 후후 두 원숭이들은 여전히 바윗돌 위에 앉은 채로 그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사람도 물끄러미 두 두령원숭이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충의를 아는 원숭이의 모습.

그 사람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자신의 변화무쌍하고 기구한 어떤 과거지사를 생각하고 놀라움과 흥분과

또한 억제키 어려운 분노에 잠기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니라 바로 숭양파의 반도 악중악이었다.

노영탄에게 서천목산 절정에까지 쫒겨 올라가 두 사람이격렬한 결투를 전개했을 때.

악중악은 아차 하는 찰나에 노영탄에게 혼수혈을 찔려서 인사불성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이미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주위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 뿐이었다.

침울하고 무거운 공기가 전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두 눈을 크게 떠서 사방을 휘둘러보았으나 .

그 주변네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단지 눈앞에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것은 그 자신이 어떤 동굴 속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악중악은 입을 벌렸다.

가만 가만히 나지막한 음성으로 불러보았다.

" 자심아! 자심아! "

몇 번을 연거푸 불러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죽음같이 무서운 침묵과 적막뿐이었다.

그때 어떤 놀랍고 이상스러운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 자심이가? '

또 다른 생각 하나가화살이 꽂히듯 그의 머릿속 한구석을 찔렸다.

악중악은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당황하여 자기 허리깨를 더덤어 보았다.

" 아! "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불덩어리같이 뛰어 내닫을 것만 같은 흥분된 마음이 그래도 맥이 탁 풀리면서도

후련하게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 책. 천신만고.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간신히 손에 넣은 무림의 지보(至寶)라는

『숭양비급』그것이 아직도 고스란히 그 누런 비단 헝겁으로 자기 허리에 묶여 있지 않은가!

그는 또다시 팔이 닿는 대로 자기 주변을 더덤어보았다.

그가 누워 있는 한쪽 옆으로 보검 옥룡검도 아무 탈 없이 놓여 있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손과팔을 마음껏 움직이고 흔들어보았다.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움직여졌다.

단지 시큰시큰하고 저리고 마비되었던 것 같으나 한번 진기를 전신에 불러일어켜 보니

아무 데도 막힌 데가 없었다. 

한번 두번 세번 손짓 발짓을 해서 몸을 풀어보니.

그의 전신의 원기는 당장에 전과 같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어째서 자기에게 이다지도 급격한 변화가 생겼는지.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도리가 없었다.

' 나는 어째서 이렇게 바보같이 눈앞에 벌어진 사태를 모르고 있었냐?

자심이란 년이 노가라는 녀석과 함께달아났을까?

자심이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협박을 당하고 강제로 끌려갔을 것이다!

혹시 그 녀석이 자심이를 어떻게했을는지도 .......... '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악중악은 벌떡 뛰어 일어섰다.

' 쫓아가야 한다!  이넓은 천지에 .

어떤 행각으로 달아났다 하더라도 그 노가란 녀석을 그대로 놔줄 수는 없다! '

악중악이 극도의 분노와 흥분에 싸여서 보검 옥룡검을 움켜잡았을 때.

뜻밖에도 칼자루에 한 조각의 하얀 헝겁이 매여져 있는 것이 눈에띄였다.

' 이건 뭐지? '

그는 당장에 그 흰 헝겊을 덥석 움켜잡아 풀어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동굴 입구의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한줄기 희미한 빛에 의지하여 똟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 흰 헝겊 위에는 몇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것은 선혈로 쓴 혈서같았다.

 

정(情)이란 것은  환(幻)이나. 환이란 것은 또한 진(眞)이로다.

지나간 날의 티끌 같은 일들은 꿈과도 같고 앞날의 일은 또한

연기와 같도다. 너무 상심치 말기 바라노라

                                                             작별하면서........연자심

 

이 한 폭의 혈서를 보고 난 악중악은 그 느낌을 무엇이라 형언해야 좋을지 몰랐다.

한동안 머릿속에서 무엇이 웅웅! 소리치며 함부로 빙빙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에 움켜쥔 흰 헝겁을 꼬깃꼬깃 뭉쳐서 속옷 주머니에 집어넣고 .

멍청히 얼이빠져 서 있을 뿐이었다.

홀연 휘바람 소리가 몇 번인가 들려왔다.

그는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그제서야 악중악은 그가 서 있는 석동이 처음에 있던 석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굴 밖에서는 이상하게도 수선스런 발자국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어리둥절하면서도 동굴 입구로 가까이 다가서서 바윗돌 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동굴 밖에는 무수한 원숭이들이 우글우글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동굴 밖의 광경을 살펴보니

서천목산의 절정과는 완전히 다른 지점이었다.

 

노영탄은 악중악의 혼수혈을 찌른다음.

그로 하여금 숭양파의 수색을 피하게 해주기 위해서

연자심과 둘이서 필사적인 모험 끝에 그를 끌고 그 무시무시한 산림 속을 헤치고 뚫어.

마침내 서천목산에서 황산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꼬박 3.4일 동안을 고생하고 헤맨 끝에 간신히 이 절경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악중악이야 어찌 꿈엔들 알 수 있으랴.

노영탄과 한빙선자 연자심은 이 평평한 잔디밭 땅이 원숭이들이 몰려서 살고 있는

곳인 줄은 전혀 몰랐다.

단지 이곳이 지세가 험준해서 외부의 사람이 쉽사리 침범할 수 없고 또 마침 동굴이

한 군데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악중악을 동굴 속에 뉘워놓고 간 것이었다.

노영탄과 한빙선자 연자심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서 악중악을 편안히 누인 다음.

설령환 몇 알을 먹이고 노영탄은 다시 그의 막혔던 혈도까지 풀어주고나서

표연히 산을 내려간 것이다.

악중악은 너무나 혈도가 오랫동안 막힌채로 있었기 때문에 혈도가 풀어진 다음에도

당장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날 수 없었다.

열두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천천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좀처럼 원기를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졌으나 노영탄이 악중악의 체력이 너무나

소모되어 타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용의주도한 생각으로 그의스승 남해어부의 비제인

환약인 설령환까지 몇 알 먹여놓고 갔기 대문에 그래도 쉽사리 악중악의 원기가

회복된 것이다.

노영탄을 따라서 이 산을 떠나기 전의연자심의 괴로운 심정이란 무엇이라

이름 붙여 부를 수도 없었다.

연자심이 악중악과 더불어 함께 지낸 얼마 동안의 시간을 생각했을 때.

거기에는 젊은이들의 미묘한 갖가지 감정이 오고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것을 매정스럽게 뿌리치고 표연히 악중악 곁을 떠나간다는 것이

너무나 괴롭고 고통을 참기 어려웠다.

그러나 노영탄에게 쏠린 연자심의 불 같은 열정은 이런 미묘한 감정을

용감히 초월하고야 만 것이다.

마침내 연자심은 흰 헌겊 조각을 찟어내고 손가락을 깨물어서 몇 줄의 글을

악중악에게 남겨놓은 것이다.

악중악은 그때야 동굴 밖에 무서운 원숭이 떼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자심을 빼앗긴 서운함과 거기 따라서 불길같이 치미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어.

이궁리 저궁리 하느라고 어지러운 머릿속이였으나.

결국 그는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 앞에 용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온갖 힘을 팔에 모아서 두 손으로 벌컥 동굴 입구의 거대한 바윗돌을 떠밀어

보았던 것이다.

악중악은 그 거대한 바윗돌이 형체가 둥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또 동굴 밖의 잔디밭이 아래로 경사가 져 있다는 사실도 알 까닭이 없었다.

무작정 나중에야 어찌 되든 벌컥 떠밀어 본 것이 결국 그 바윗돌은 구러고 굴러서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 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금모거후 그것은 정말 신기한 동물이 아닐수 없었다.

후왕이 노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악중악은 실로 만감이 교차했다.

바윗돌 위에 넋을 잃은 사람같이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앉아서 어수선한

머릿속을 가라앉히기에 힘썼다.

후왕과 후후는 악중악을 놀라게 해서 심히 황송하다는 듯 묵묵히 바윗돌 위에

앉아서 보호나 해준다는 듯 점잖은 얼굴을 하고 눈만 꿈쩍꿈쩍하고 있었으며

잔디에 있는 어린 원숭이들도 여태까지와는 딴판으로 안심했다는 듯.

깩깩거리며 장난질들을 치고 있었다.

' 원숭이도 이렇거늘 .......... 자심이란 년은 나를 버리고 노영탄이란 놈을 따라가다니. '

연자심을 생각할수록 악중악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고 노영탄이란 존재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이때 잠자코 있던 후왕이 홀연 악중악의 몸을 손으로 툭툭 치는 것이었다.

악중악은 무슨 일인가 하여 머리를 돌려서 유심히 원숭이를 살펴보았다.

후왕은 한 손으로 악중악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지분지분 잡아 당기며

또 한쪽 손으로는 산봉우리 꼭대기를 가리키며 .

깩깩깩깩 알 수 없는 소리를 연방 내지르는 것이었다.

' 흠!  이놈이 날더러 저 산꼭대기로 올라가자고 하는 것이구나 .......... '

악중악은 눈치 빠르게 원숭이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선뜻 몸을 일어켜서 머리를 끄덕끄덕하면서 원숭이의 뒤를 따랐다.

후왕은 악중악이 몸을 일어키는 것을 보더니.

쉭!

하고 찌렁찌렁 울리는 휘바람을 한번 멋들어지게 불었다.

그리고는 후왕은 악중악을 끌고 바윗돌 절벽 위로 올라가며 머리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잔디밭에서 까불고 있던 어린 원숭이들은 후왕의 휘바람 소리를 듣자.

일제히 조용해 지더니 후왕의 뒤를 쫓아서 열을지어 걸어갔다.

바위 절벽 앞까지 온 후왕은 갹갹갹갹 !

또 몇 번인지 괴상한 소리로 짖어대더니 몸을 훌쩍 날려 산봉우리 꼭대기에 늘어진

등나무 덩굴을 재빠르게 움켜잡고는 다시 몇 번인가 몸을 껑충껑충 날려 단숨에

산봉우리 꼭대기로 올라갔다.

산봉우리 꼭대기로 올라간 후왕은 머리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며 맹렬히 짖어댔다.

악중악에게 자기를 따라오라오라는 뜻이었다.

악중악은 머리를 쳐들어 뒤를 바라다보며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다.

' 저놈이 뭣 때문에 나더러 올라오라고 하는 것일까? '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악중악은 잔디밭에서 산봉우리 꼭대기까지 거리를

눈 짐작으로 재 보았다.

족히 10여 장의 높이는 돼 보였다.

그러나 그 정도의 높이쯤은 악중악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경신법을 가지고는 한두 번 껑충 몸을 솟구치기만 하면 올라갈 수 있는 거리밖에 안 됐다.

악중악은 마침내 두 다리에 힘을 모아서 두 팔로는 아래를 짚고 훌쩍 위로 몸을 솟구쳐 올랐다.

바위 절벽 중턱쯤 가서 다시 한 팔로 등나무 덩굴을 꽉 움겨잡고 한숨을 돌리고 .

다시 기운운을 모아서 또 한번 껑충 허리를 꿈틀하고 비트는가 하는 순간 비호같이 산봉우리

꼭대기까지 뛰어 올라갔다.

산봉우리 꼭대기에 발을 붙이고 서서 지세를 자세히 살펴보고서야 비로소 .

이 산이 얼마나 높고 험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방을 휘둘러보니 단지 구름과 안개가 가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높은 산꼭대기 에서는 멀리 몇 군데 삐죽삐죽 솟은 작은 봉우리들이 겨우 바라다보일 뿐.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뒤를 따라오던 여러 어린 원숭이들도 일제히 그곳까지 기어 올라왔다.

귀에는 성난 소나무 소리만 천지를 뒤덮을 듯 들려오고 바람소리 그치지 않으며

자신의 옷자락을 훨훨 날릴 뿐이었다.

높고 높은 산봉우리 맨 꼭대기에 단지 혼자 서서 .

티검불 같은 인간 세상을 멀리 떨어져 새삼스럽게 휘둘러 보노라니.

말 못하는 원숭이 떼들이 몰려 있을 뿐이었다.

악중악은 이 순간의 심정을 자신도 무엇이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천지가 넓고 크고. 인간 또한 수없이 많이 살고 있지만.

그는 마침내 이런 사람의 발길도 닿기 어려운 고봉절정에 숨어 있는 신세가 되어서.

산짐승 속에 끼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

" 체! "

악중악은 하도 기가 막혀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쓰디쓴 웃음을 입가에 띠웠다.

대장부 악중악의 두 눈에는 어느 틈엔지 눈물이 글썽했다.

가슴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불길 같은 분노 ........

그는 입을 딱 벌려서 바람을 힘껏 들이마시고 다시 푸우 .

내뿜으며 미친 사람같이 부르짖었다.

" 이놈! 내 반드시 복수하리라! 네놈을 죽여버리고야 말 테다! 와하하하! 핫핫!  "

그는 역시 미친 사란처럼 소리높여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얼굴이 한편으로는 껄껄거리고 웃고

또다시 있는 목청을 다 뽑아서 고함을 지르고 .......

" 이놈! 노영탄. 내 너를 죽여버리지 않는다면 ....... 나는. 나는 사람이 아니다! 개자식이다! "

그는 마치 당장에 발광할 사람만 같았다.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렸다가 울었다가 또 웃었다가 그의 안타깝게 외치는 높은 음성은

산바람을 타고 산골짜기로 메아리처서 되돌아올 뿐이었다.

악중악이 어찌나 광태를 부렸던지 원숭이들은 깜짝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악중악이 고함을 지르고 나서 머리를 돌려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으로

옆에 있는 어린 원숭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그 어린 원숭이는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깩깩깩깩 하면서.

악중악의 옷자락을 붙잡더니 껑충껑충 뛰어서 그의 어깨 위에 올라섰다.

악중악은 한 업이 귀여운 생각이 들어서 어깨에 원숭이를 올려놓은채.

새삼스럽게 사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산봉우리 꼭대기에는 면적이 그다지 넓지는 못했다.

바위 절벽을 가까스로 의지하고 수십 개의 동굴이 뚫려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원숭이들이 살고 있는 거처인 것 같았다.

그것들을 두루두루 바라다보고 있을 때.

후왕은 어느 틈에 들어 갔었는지 굴 속으로부터 다시 나오고 있었다.

굴속에 들어갔다 나온 후왕은 손에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운 수밀도 세 개를 들고

악중악 앞으로 가더니 두 손으로 받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악중악은 얼마전에 홍과 몇 개를 먹고 난 다음 조금도 배가 고픈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세 개의 수밀도는 너무나 사람의 식욕을 돋구었다.

그리고 후왕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무엇인지 기대한다는 듯.

간절히 그것을 먹어달라는 눈치였다.

악중악은 마지 못해 한 손을 뻗어 그 중 한 개를 집어들고 껍질을 훌훌 벗겨서

입 안에 넣고 깨물어 보았다.

실로 형언할 수 없이 미묘한 맛이었다.

복숭아는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눈 녹듯이 스스로 녹아서 달고 향기로우면서도

끈적끈적하지도 않고 조금도 텁텁한 맛이 없으며 산뜻하기 이를 데 없어

일찍이 먹어본 어떤 과일 보다도 맛있었다.

복숭아를 먹으며 악중악은 곰곰 생각해 봤다 .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희한한 일이었다.

아래 잔디밭 평지에서 그 세 그루의 복숭아나무를 보았으며 거기에는

주렁주렁 무르익은 복숭아가 가지가 찢어지도록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복숭아들은 지금 먹고 있는 복숭아와 크기도 빛깔도 똑같은 것이었다.

처음 먹은 것이나 . 그 세 그루 나무에서 딴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아직도

여름이 먼 늦은 봄에 이렇게 복숭아가 무르익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반드시 특수한 품종으로서 그 빛깔도 맛도 보통 과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봉우리 꼭대기를 다시 한 번 휘둘러보고 나서 악중악은 몸을날려

평지로 내려왔다.

후왕과 후후도 같이 따라 내려왔다.

악중악은 밤에 잠잘 곳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후왕과 후후를 앞장 세우고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동굴을 막고 있던 거대한 바윗돌은 이미 없어졌고 아무것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악중악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우선 기쁨을 금치 못했다.

이 동굴 안에는 석실이 셋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여태까지 누워 있었던 곳은 제일 작은 석실이며 밖으로 가장 가까운 지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안으로 자리잡고 있는 두 칸의 석실은 비교적 넓고 시원했으며 비쳐 들어오는 햇빛도

매우 밝았다.

악중악이 심히 이상스럽게 생각한 것은 그 석실들을 자세히 살펴봤을 때.

그기에는 온통 엷은 남빛 광체가 가득 차 있어 밝은 품이 백주의 노천 같으면서도.

거기 새어 들어오는 빛은 햇빛보다도 약하고 부드럽다는 사실이었다.

밖에서 가장 가까운석실에 들어섰을 때에는 악중악은 그 안으로 또 두 칸의 다른 석실이

있다는 사실을 얼른 알 수 없었다.

동굴 밖으로 가깝게 자리잡고 있는 석실에서 안쪽의 석실로 통하는 문은 낮아서

한 사람이 간신히 몸을 구부리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문이란 것도 소나무 가지와 잎사귀로 뒤덮여 있어서 좀처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후왕이 앞장을 서서 그 소나무 가지와 잎사귀를 밀치고 헤치며 악중악을 안으로 인도해

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거기 또 다른 석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이 석실 안으로 들어서자 악중악은 또 한번 놀랍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

그 두 석실은 빛이 유난히 밝게 비칠 뿐만 아니라.

석탑과 돌 걸상까지 마련되어 있고 오른쪽 석실에는 향로와 금궤도 있었으며.

안쪽 석실에는 그 동벽에 청심거욕(淸心去慾)이라는 글씨까지 새겨져 있었다.

일필에 흘려서 갈겨버린 글자로서 마치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 멋들어지게 새겨진

글씨에는 아무런 낙관도 없었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 어떤 인물이 새겨놓은 것인지

알라낼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점을 종합해서 생각할 때 분명히 이곳에는 어떤 사람이 은거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석실은 바로 그 인물이 처음으로 개척하고 뚫은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과연 어떤 인물이 이 깊은 산중 절벽에다 이런 석실을 마련하고 ...........

그 인물은 어디로 갔으며 어떻게 됐을까?

동굴벽에 새겨놓은 글자의 수법이나 필치만 보아도 비범한 인물임을 알 수 있으니.

그는 반드시 무림의 굉장한 선배인지도 모를 일이다. '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악중악은 또 한번 그 석실 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모든 가구들이 아직까지도 제법 단단하고 완비하게 자리잡혀 있어서쓸모 있는

것들이였으나 단지 한 가지 이부자리가 없다는 것만이 유감이었다.

한편으로 악중악은 앞으로 무엇을 먹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무엇을 먹으면서 기력을 채운다! '

자신도 모르는 새 긴 한숨이 나왔다.

악중악은 머리를 수그린 채로 땅 위를 구석구석 두루 살펴보았다.

바깥 쪽으로 나 있는 한 칸 석실에 무수한 대광주리들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그것들은 얼마 전에 원숭이들이 홍과를 담아 가지고 나왔던 것과 똑같은

광주리들이었다.

악중악은 그 광주리 앞으로 가서 뚜껑을 열어보니 그 속에도 홍과가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을 본 악중악은 일종의 흥분이 느껴졌다.

약싹빠른 원숭이 족속들은 이렇게 과일을 대량으로 채집해 두고 양식으로 삼고

있음이 분명했다.

' 흠. 이렇게 맛좋은 홍과가 많이 있고 또 거기다사 싱싱한 수밀도를 언제던지

따먹을 수 있다면 다른 음식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굶주려 죽는 일은

더더욱 없겠다!'

먹을 것까지 걱정 없다고 생각했을 때 .이 동굴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별천지요.

무릉도원처럼 생각되었다.

' 됐다! 이 동굴 속에서 어떠한 고난이라도 참고 견디리라!

다행히『숭양비급』을 몸에 지니게 됐으니 발분고투.

이것을 연구하고 터득해서 내 것으로만 만든다면.

그때는 산 아래 세상으로 달려 내려가 강호에무서울 것 없이.

복수해 주어야 할 놈들을 모조리 시원스럽게 처치해 버리리라! '

악중악은 이렇게 생각하니 도리어 신바람이났다.

보복을 하겠다는 일념 앞에.

가슴속에 얽히고 설켜 있던 근심 걱정이 시커먼 구름장이 일시에 깨끗이 걷히고 흩어졌으며.

파랗고 깨끗한 하늘이 눈앞으로 다가드는 것만 같았다.

" 여보게 후왕. 그리고 후후.

나는 이 동굴 속에서 자네들과 같이 얼마 동안 살아야 되겠네! 내 말을 알아듣겠나? "

악중악은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이 이렇게 혼잣말을 원숭이에게 해보기도 하고

또 손짓 몸짓 발짓을 해서 동굴 안을 가리키며 자기가 머물러 있어야겠으니.

그런 줄 알고 모든 점에서 편의를 봐 주고 협력해 달라는 의사를 표시하느라고 무척 애썼다.

후왕은 지극히 영민하고 지혜로운 동물이었다.

당장에 부하 원숭이 일고여덟 마리를 불러 들이더니

무슨 소리인지깩깩그리고 손짓 발짓을 해서 지휘를 하며 삽시간에 그 석실을

깨끗이 치우고 정돈했다.

밤이 되었다.

후왕은 네 마리의 큰 원숭이들을 특별히 파견하여  동굴 입구에서 파수까지 보게 해주니.

이쯤되면 악중악도 베개를 높이 하고 그 안에서 편히 잠잘 수 있었다.

이튿날 이런 아침.

악중악은 상쾌한 기분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왔다.

옆으로 흐러고 있는 샘물에서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나니

하룻밤 푹 쉬고 난 몸은 정신이 산뜻해지고 원기가 마디마디에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얼마 안 되어서 원숭이 떼들은 또다시 산봉우리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오더니

평지 잔디밭에서 까불며 뛰놀기 시작했다.

악중악은 손짓 발짓을 해서 후왕을 불러가지고 사냥을 해보자는 뜻을 표시했다.

후왕은 악중악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리자.

당장에 몇 마리의 큰 원숭이들과 깩깩거리며 상의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 몇 마리의 큰 원숭이들은 후왕의 말이 끝나자.

기뻐서 어쩔줄 모르며 재주를 넘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야단법석이었다.

우르르 몰려 들어서 악중악을 둘러싸고 옷자락을 지분지분 잡아당기며

빨리 산을 내려가자는 눈치였다.

후왕은 그 모습을 보더니 무슨 소리인지 나지막하게 갹갹하고 호령을 했다.

몇 마리의 큰 원숭이들과 여러 부하 원숭이들은 그제서야 찍소리도 못하고

조용해졌으나 역시 기뻐서 어쩔 수없다는 듯 생글생글 주둥아리를

하물하물하며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악중악은 보검을 단단히 졸라매고 옷매무새를 가뜬히 한 다음.

" 그러면 가보자! "

악중악은 사람에게 말하듯 명령했다.

그는 큰 원숭이 다섯 마리와 같이 등나무 덩굴을 타고 평지로 떨어져 내려갔다.

깍아 세운것 같은 절벽을 삽시간에 날아서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갔다.

황산 산림 속에는 짐승이 굉장히 많았다.

특히 사슴과 노루는 이 산속 가는 곳마다 깔려 있었다.

악중악이 사냥을 하자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산짐승들을 잡아서 그고기를 먹자는 생각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 가죽과 털을 벗겨서 침상에 까는 이불과 요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였다.

그의 무술 실력과 다섯 마리 큰 원숭이들의 약삭빠른 협력으로 그들이 오후에 평지 잔디밭에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꽃사슴 세 마리와 노루 일곱 마리라는 굉장한 수확이 있었다.

악중악은 원숭이들을 지휘하여 껍질을 벗기고 뼈를 골라내고 불을 피우게 해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원숭이 떼들이 기뻐서 깡충깡충 뛰고 까불고 재주를 넘고 하는 광경은 실로 가관이었다.

원숭이들은 기막히게 맛있는 육식을 배불리 먹었으며악중악은 석장이나 되는 노루 가죽으로

요를 만들어 석탑에 깔아서 침구 문제를 손쉽게 해결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며칠이 흘러갔다.

악중악의 생활은 이미 안정될 정도로 자리잡혔으며 복잡한 심정도 차차 가라앉아갔다.

이리하여 악중악은 그 희세의 진기한 보물이라는『숭양비급』을 연구할 계획을 세우고

한 걸음 한걸음 착착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맑고 깨끗한 산봉우리에 이런 아침이면 악중악은 몸을 일어킨 다음 곧장 산골짜기 샘물로

뛰어들어 전신을 깨끗이 모욕하고 동굴로 들어갔다.

그 누런 빛 비단에 싼 상자를 석궤 위에 받들자시피 올려놓고 조심조심 풀어서

그 속에서 다시 자그마하고 광체가 눈부신 옥갑을 꺼내어 가볍게 그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 천하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고 탐내는『숭양비급』을 끄집어 냈다.

『숭양비급』은 도합 27쪽밖에 안 되며 길이와 폭이 겨우 반 자밖에 되지 않았다.

속속들이 역시 누런 비단을 겹치고 붙여서 만든 것으로.

책 표지에는 저 숭양장로가 얼마 전에 써넣은『숭양비급』이라는 넉 자가 해서체로

똑똑히 씌어져 있었다.

속을 펼치니 깨알같이 잔 글씨들이 한 자 한자 새겨져 박은 것같이 한예(漢隸)와

소해(少楷)체로 적혀있었으며 어던 부분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붉은 글씨로 주석까지

붙여져 있었다.

불과 27쪽의 얇고 작은 책자 속에 내공의 갖가지 재간을 연마하는 방법과

각종 유형 무형의 강기와 정종(正宗)이 되는 주먹 손 칼을 쓰는 술법이

빠진 것이 없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숭양비급』이 비록 온갖 무술의 정화와 그 지대한 정신의 일체를 갖추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지간히 깊고 순결한 무술의 바탕이 없이는 터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 무림의 지보라는『숭양비급』은 지극히 뛰어난 천품의 자질과 거기 따르는

백절불굴의 정신력이 없이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휴지나 다름이 없고.

그 가운데서 털끝만큼도 소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불가사이한 책자였다.

그러나 악중악은 이것을 연구하고 터득하고 연마해서 완전히 자기 것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한 것이다.

여기까지 이러기에는 무엇보다도 연자심에게서 받은 충격이 제일 큰 자극이 되었다.

' 대체 노영탄이라는 놈이 무엇이냐?  내가 그놈에게 져서 연자심을 빼앗기고 말다니 ........ '

이런 정신적인 타격과 자극에서 생기는 불길같은 보복심.

그것은 마침내 악중악으로 하여금 견인불발(堅人不拔)의 정신력이 되게 하였고

또 그의 무예에 대한 천재적인 소질과 아울러 여태까지 닦아온 무술의 근본적인

바탕을 가지고 한다면 적어도 1년 후면 능히『숭양비급』의 오묘한 경지를 완전히

터득하고 세상에 견줄 만한 인물이 없을 만큼 탁월한 무술을 연마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만만해진 것이다.

이리하여 악중악은 황산의 절정인 높은 산봉우리 속에서 속세를 완전히 등지고

온갖 잡념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전심전력『숭양비급』의 연구와 연마에 몰두하게

되었다.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