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21장 애파정도(愛波情濤)

오늘의 쉼터 2013. 12. 13. 13:31

 

정협지(情俠誌)

제 21장 애파정도(愛波情濤)

 

연자심의 사랑 

 

 

 

장백산 땅딸보 미씨 형제는 옥면비표와 복파독호 양대타주를 거느리고

항주의 회양방 지부를 순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홀연 급보를 접했다.

그것은 한빙선자 연자심과 악중악이 서천목산 속에서 행적을 드러냈다는 보고였다.

그들 넷은 사람을 파견하여 금사보 본거지로 급히 연락하고 한편으로는 밤을 세워가며

이 산 속으로 달려든 것이었다.

지형에 익숙치 못한 까닭으로 그들 넷은 사면으로 갈라서 천천히 산꼭대기로  수색해

올라가기로 하고 휘바람을 불어서로 연락을 취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이 차츰차츰 산봉우리 맨 꼭대기에까지 올라왔을 때는 노영탄이 먼저 도착한 지

꽤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을 때였다.

회양방의 네 놈들은 난데없이 나타나는 인물을 보자 급히 한 군데로 모였다.

달빛이 밝지 못했다.

거기다가 저편 인물은 복면을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네 놈들은 그가 대체 누구인지를 알아낼 수 없었다.

복면한 사나이의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동자에서는 두 줄기 광체가 화살처럼 꽂혀 나왔다.

얼음같이 싸늘하고 매서운 광체가 네 놈을 노려보고 있었다.

뚱뚱이 땅딸보 미극량이 꽤 위엄 있게 호통을 첬다.

 

"네 이놈 ! 섣불리 사람을 희롱할 생각을 하지 마라 !

당장에『숭양비급』을 이 자리에 썩 내놓지 못할까?

그것만 선뜻 내놓는다면 네놈의 목숨만은 살려줄 수 있으나

만일에 우리의 뜻을 거역한다면 네놈은 한칼에.......

알겠느냐?  헤헤헤........ 헤헤 ."

 

미극량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한 줄기 거센 바람이 그의 신변으로 습격해 들어왔다.

미극량은 움찔하고 그 이상 입을 벌릴 수도 없이 대뜸 몸을 움츠러뜨리고 한쪽으로 피했다.

다른 세 놈들은 미극량이 말을 하지 못하고 급히 몸을 피하는 것을 보자.

무슨 영문인지 알지도 못하고 똑같이 머리를 돌려 바라보았다.

세 놈이 머리를 돌렸을 때 바윗돌 위에는 이미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세 놈이 또 한 번 깜짝 놀랐을 때.

" 아하하하........핫핫! "

등들미에서 난데없이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 놈은 또다시 그쪽으로 급히 몸을 돌려 쳐다보았다.

그때는 벌써 뚱뚱보. 말라깽이 두 땅딸보가 손을 휘두르며

그 복면한 사나이에게 덤벼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호같이 몸을 쓰는 복면한 사나이의 날쌘 품으로 보아.

그의 무술이 얼마나 비범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만은 볼 수 없었다.

그가 바로 숭양파의 반도인 악중악이라 단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뚱뚱이 땅딸보가 복면한 사나이에게 싸움을 거는 것을 보자.

말라깽이 땅딸보도 몸을 한 번 꿈틀하더니 역시 복면한 사나이를 노려보며 덤벼들었다.

뚱뚱이 말라깽이 땅딸보 형제들이 힘을 합쳐서 공격을 가하니

일대 격투가 벌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때 호. 표 두 타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저희들끼리 가벼운 휘바람을 불어서

신호를 주고받고 서로 호응하더니.

바윗돌 가까운곳으로 몸을 날려 바위 위에 있는 동굴 속을 수색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흠?  네놈들이 굴 속을 뒤지려고? '

복면한 사나이는 호. 표 두타주의 움직임을 알아채자.

다소 초조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왼손을 별안간 밖으로휘감더니 거대한 손바람을 일으켜서 신변에 걸리적거리는

두 땅딸보를  쓸 듯 물리치면서 그와 동시에 흘쩍 몸을 날려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몸이 한번 꿈틀하는가 싶은 찰나 다시 빙글 돌더니

불끈 솟구쳐 올라서 곧장 호. 표 두 타주의 등들미에 우뚝 내려섰다.

땅을 디디고 서자말자 그는 오른손으로 획 하고 맹렬한 손바람을 일으겼다.

호. 표 두 타주는 이때 바로 암벽 가까운 곳에 가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한쪽은 바로 낭떠러지에 임해 있었다.

두 땅딸보가 복면한 사나이에게 쩔쩔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는 찰나에 복면한 사나이는 흘쩍 몸을 날리더니 

그들의 뒤를 쫓아와서 질풍같이 빠르고 무시무시한 손바람으로 그들을 습격하는 것이다.

옥면비표는 제법 무술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리고 눈치 빠르고 반응 또한 빠른 자였다.

등들미에서 바람이 이는것을 깨닫자.

선뜻 몸을 멈추고 두 다리를 든든히 디디고 섰다.

복파독호는 비교적 동작이 느린 편이였다.

손바람이 쳐들어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든든히 버티고 서보려 했으나 쉽사리 균형을

잡을 수 없게 됐고 마음이 당황하기 시작하니 몸은 더욱 들떴다.

한 발자국 미끄러지는 순간 그의 몸은 오른쪽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오른쪽이란 바로 깊이를 알 수 없도록 천야만야한 낭떠러지였다.

복파독호가 자신의 몸이 한편으로 쏠리는 것을 깨닫고.

그 아래가 바로무시무시한 낭떠러지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 몸을 돌려보려고 애쓰는 찰나.

그복면을 한 사나이는 연거푸 비호같이 날쌘 동작으로 매서운 손바람을 일으켜

그에게 육박했다.

" 으으으윽 ! "

처참하고 무서운 최후의 비명이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한번 번쩓하는 찰나 복호독호의 몸뚱이는 이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낭떠러지 아래로 거꾸로 박혀 덜어져버리는 것이었다.

옥면비표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혀를 빼물었다.

낭떠러지 한변에서 꼼짝 못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땅딸보 미씨 형제들은 그 복면한 사나이가 불과 두번 손바람으로 복호독호를

낭떨어지아래로 떨어뜨려 귀신을 만들어버리는 광경을 두 눈으로똑똑히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 으흐흐응 ! "

나지막하게 짐승처럼 부르짖으며 일제히 복면한 사나이에게로 덤벼들었다.

복면한 사나이는 이 상황을 빨리 수습하려는 모양이었다.

한번 손을 쓸 때마다 그것은 최후의 승부를 결정짓는 무서운 살수의 술법이었다.

먹는냐 먹히느냐 하는 결사적인 싸움임을 그는 명백히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번 또 한번 손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그것은 거대하고 무섭고 빠른 광풍으로 변했다.

그는 무슨일이 있어도 나머지 세 놈을 그대로 도망치게 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한 손바람을 일으켜 산봉우리 꼭대기를 온통 휩쓸어버리는 것이었다.

불과 서너 번 맞닥뜨려보고 나서. 땅딸보 미씨 형제는 이미 복면한 사나이의 무술이

헤아릴 수 없도록 무섭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놈이 심상한 놈이 아니로구나 ! '

' 무시무시한 놈인데 ! '

그들은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었다.

형제 놈들은 연거푸 휘바람 소리를 내어 신호를 주고받으며 각각 무기를 뽑아 들고

죽을 힘을 다하여 복면한 사나이에게 미친 듯이 덤벼들었다.

" 가소로운 놈들! 하하핫 ! "

복면한 사나이는 이미 미씨 형제들이 겁을 집어먹었다는 사실을 간파한 모양이었다.

형제 놈들이 무기를 뽑아드는 것을 보자 .

이렇게 한바땅 웃음소리를 대담하고 호탕하게 터뜨리는 것이었다.

"쨍 !"

하는 날카롭고 매서운 음향이 바르르 떨려 나오는 순간 시퍼렇고 살벌한 광체를

눈부시게 사방으로 퍼뜨리며. 등에 메고 있던 칼을 선뜻 뽑아 들었다.

복면한 사나이는 싸늘한 눈초리로 한동안 옥면비표를 노려봤다.

칼은 북극의 위치를 노리면서 칼 끝을 곧장 땅딸보 형제를 향하고 뻗어 들어갔다.

땅딸보 형제가 기세를 합치더니 다시 좌우 양편으로 갈라서서 칼 끝을 막아내려고 했을 때.

어찌 상상했으랴!

복면한사나이가 홀연 몸을 돌려 칼을 거두어들이더니

싸늘하고 매서운 검광이 번쩍하고 일어나며 옥면비표의 턱 밑을 스치고 지나가지 않은가!

" 으으으으악 "

또 한번 처참하고 무서운 비명이 일어났다.

옥면비표의 목에서는 핏줄기가 분수처럼 뻗쳐 올랐다.

한 점의 살덩어리가 붙은 채로 그의 머리는 영원히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 이크 ! '

땅딸보 미씨 형제는 복면한 사나이가 한 칼로 옥면비표를 쳐치해 버리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자.

극도의 공포로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한 심정이었다.

복면한 사나이가 검세를 늦추기 전에 땅딸보 형제는 홀연 몸을 구부리더니

땅을 살살 기듯이 산 아래로 도망칠 준비를 했다.

복면한 사나이는 땅딸보 형제가 한 발자국을 떼어놓기도 전에 펄쩍 앞으로 날아들더니

그들의 달아나려는 앞길을 가로막아버렸다.

복면한 사나이는 수중의 보검을 또 한번 휘두러더니.

마치 용의꼬리를 흔들듯 길길이 퍼져나가는 매서운 광체를 곧장 땅딸보 형제의 가슴팍을

겨누고 습격해 들어갔다.

뚱뚱이 땅딸보가 앞에 서서 먼저 그 예리한 검봉을 막아내야 했다. 

뚱뚱이는검광이 가슴팍으로 전광석화같이 대드는 것을보자.

피할 도리가 없어 급박해졌는 지라 .

얼떨결에 손에쥐고 있는 독륜이란 무기를 번쩍 쳐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 쨍그렁 ! "

하는 매서운 쇳소리와 함께. 빛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독륜이 두 동강으로 부러졌을 뿐만 아니라.

뚱뚱보의 오른손이 동시에 팔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 앗! "

극도의 고통을 참지 못해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뚱뚱보는 당장에 졸도해 버렸다.

말라깽이 땅딸보는 자기의 한쪽 손이 달아난 것이나 진배없이 마음이 아프고

또한 초조하고 당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중에 잡고 있던 독륜을 미친 듯이 휘두러며 복면한 사나이에게 맹렬히 육박해 들어갔다.

복면한 사나이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한쪽으로 빼는 채 하더니

왼쪽손가락 두 개를 꼿꼿이 세워서는 말라깽이 땅딸보의 두 눈을 질풍같이 찌르며

오른손에 든 보검으로 번갯불처럼 눈부신 속도로 치고 찌르고 하면서 말라깽이 땅딸보의

독륜을 막아냈다.

말라깽이 땅딸보는 복면한 사나이가 든 보검이 금이라도 베고 옥이라도 깍을 수 있는

무서운 무기라는 것을 간과했다.

감히 그 무서운 보검의 검봉과 맞닥뜨릴 수는 없었다.

그가 찔끔 겁을 집어먹고 팔을 거두어들이는 찰나.

고개를 푹 수그려서 복면한 사나이가 찔러 들어오는 왼쪽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복면한 사나이의 검세는 추호도 느리지 않았다.

칼 끝을 또 한번 매섭게 휘두르니 거기서 퍼져 나오는 매서운 검광이

 여전히 화살같이 찌르고 들어오지 않는가.

말라깽이 땅딸보는 당황한 바람에 흘쩍몸을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복면한 사나이도 또한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땅딸보를 쫓아서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랐다.

말라깽이 땅딸보는 몸이 허공에 뜨기는 했으나 이미 피할 길은 막혀버리고 말았다.

" 으아아아악 ! "

또 한번 처절한 죽음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때에는 벌써 말라깽이 땅딸보의 앙가슴은 복면한 사나이의 칼끝에 정통으로

꿰뚫려서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뒤였다.

" 으흐흐흐흥 ! "

이때 땅 위에 졸도했던 뚱뚱이 땅딸보가 정신이 드는 듯 짐승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복면한 사나이는 당장에 그곳으로 달려가 한칼에 처치해 버리는 것이었다.

" 네놈도 더 괴로워할 것 없이 빨리 저 세상으로 가거라!  하하하핫 !

흠! 네놈들은 이렇게 해주어야만 악독한 짓들을 못할 터이니 ! "

땅 위에 나자빠진 세 구의 시체를 휘둘러보며복면한 사나이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가볍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밤이었다.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두움과 죽음 같은 고요만 감돌 뿐.

서천목산 주봉 꼭대기는 또다시 고요함을 회복했다.

바윗돌 벽 아래로는 한 덩어리 큼직한 바윗돌이 있으며

그 뒤로는 크고 깊은 석동(石洞)이 하나 있었다.

동굴 입구 앞에는 이루헤아릴 수 없이 키가 큰 황초(荒草)들이 우거져서

 이 동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석동은 그 드나드는 구멍이 몹시 좁았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서면 넓고 시원하며 지면도 평탄하고 깨끗한 동굴이 열렸다.

석동 안은 또 다시 두 칸의 동실(洞室)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때 안쪽으로 있는 동실에는 한자루의 촛불이 켜졌다.

실내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석탑(石塔)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으며.

또 다른 청년 하나는 아직도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노영탄은 그제서야 얼굴을 싸매고 있던 복면을 풀었다.

가볍게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들어 석동 안의 이모저모를 구석구석 휘둘러보고 나서야

시선을 다시 한빙선자 연자심의 얼굴로 돌렸다.

밤은 깊을 대로 깊었다.

동굴 밖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는 파도소리 외에는 천지간의 일체의 움직임이

딱 끊어져버린 것 같은 순간이었다.

초불빛이 흔들흔들 불꽃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흐릿하기는 하지만 보드라운 촛불빛이 노영탄과 연자심의 두 자루 칼 위에 비치고 있었다.

둘은 묵묵히 서로를 마주보고 있을 뿐 무슨 말을 먼저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몇 달 동안을 두고 끊임없이 일어난 여러가지 변고 때문에 그들은 금사보에서 헤어진 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회안 성중에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들에게는 피차간에 뚜렷한

인상이 남아 있었다.

노영탄이 비록 사람을 잘못 알아보았다고 하지만 한빙선자 연자심은 20년 동안이나

조용하게 간직해 온 마음의 호수에 얄궂은 파도가 용솟음쳐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루에서 처음으로 노영탄을 대했을 때.

그의 깊은 정이 듬뿍 서려 있는 듯하던 두 눈동자.

그 두 눈동자가 따스한 정에 넘쳐서 연자심을 한번 주시했을 때.

그것은 마치 한 개의 예리한 화살처럼 같이 연자심의 티끌 한 점 없이 결백한

마음의 문을 쏘고야 만 것이었다.

연자심은 노영탄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처음 대하는 청년이 왜 그런지 처음 보는 사람 같지 않았고 아주 낯익은 친구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두고 외롭고 쓸쓸하게 만 살아온 연자심이였다.

그것이 이 소녀를 얼음장같이 싸늘한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매정하고 쌀씰스러웠으며 그래서 한빙선자라는 별명까지 듣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따운 아가씨 한빙선자 연자심의 가슴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서 활활 타오르는

한 덩어리 정열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이 소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랑해 주고 감사주는 사람도 없었다.

쌀쌀스럽고 막막한 이 소녀의 환경이 가슴속을 꽁꽁 얼어붙게 하였던 것이다.

단단하고 차디차게 얼어붙은 한 덩어리 녹지 않은 얼음 속에서도.

연자심의 뜨거운 열정은 꺼져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그 속에 숨겨져 간직되어온 것이었다.

연자심이 처음으로 노영탄을 대했을 때 .

이 청년의 깊은 정이 덤뿍서려 있는 눈초리는 마치 봄날의 따뜻한 양광과도 같이

소녀의 가슴 속에 뭉쳐 있는 단단한 얼음 덩어리를 녹여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은 마치 녹아서 소리치며 흘러내리는 봄 물살과도 같이.

그 속에 걷잡을 수 없는 파도를 용솟음쳐 오르게 한 것이었다.

그날 밤이 되어서 연자심과 동행하던 세 두령들이 노영탄에게 해를 가하고자

서두르고 있었을 때 연자심은 무슨 힘이 시키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생명을 돌볼 생각도 없이 방규를 위반한다는 큰 죄까지 무릅쓰고

몰래 노영탄에게 사전에 연락을 해준 것이었다.

연자심은 이 청년이 그다지도 탁월한 무술의 절예를 몸에 지니고 있는

고수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노영탄이 발휘하는 절묘한 무술을 눈앞에서 보았을 때.

이 청년에게 기울어지는 연자심의 뜨거운 마음은 더 걷잡을 수가 없어졌다.

사랑이란 항시 입으로 쉽사리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말이 필요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털어놓고 싶은 것이 또한 사랑인지도 몰랐다.

말로는 꼬집어서 표현할 수도 없이 샘솟듯이 졸졸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애정.

연자심은 사실 그때 무엇인가를 노영탄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만한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 또한 사랑인지 몰랐다.

그저 믿음직한 청년 왜 그런지 까닭도 없이 이 청년이야말로 자기가

오랫동안 동경해 마지않던 반려같이 만 생각됐다.

소녀의 가슴속에 꽉 차 있으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하던 젊은 열정은 마침내

노영탄의 출현으로 거센 파도를 출렁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go

그러나뜻밖에도 노영탄이 감욱형의 행방을 초조히 알고 싶어 탐문했을 때.

그 조급히 서두르는 표정이나 말투를 보자니.

그것은 마치 무섭고 든든한 제방과도 같이 갑자기 연자심의 용솟음치기 시작한

열정의 파도를 꽉 막아버리고 만 것이다.

그 찰나에 느꼈던 연자심의 신산스럽고 얄궂고 안타까운 심정은 이루 형언키 어려웠다.

원망스럽기도 했다.

분하기도 했다.

가슴이 찢기듯 아프기도 했다.

평생을 두고 거울같이 보드랍고 잔잔하게만 간직되어온 처녀의 호수같은 마음속에

거센 파도를 출렁거리게 해놓은 청년.

그러나 그는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찾는 소녀는 따로 있다고 하지 않는가.

' 네가 바보였구나!  어리석었구나!  엉뚱한 사람을 보고 공연히 이편에서만

정을 쏫아보려 하다니...... '

연자심의 그때의 서글펐던 감정이란 평생을 두고도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둘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을 뿐 서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됐다.

바다위에 떠도는 부평초와도 같이 높은 하늘을 흐러는 구름과도 같이

그들 청년과 소녀는 아무리 접근해 보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다.

거센 사랑의 파도가 마음대로 물결칠 수도 없었다.

가느다란 사랑의 미풍조차 나부낄 수도 없었다.

그들 청년과 소녀는 여태까지 걸어온 길이 달랐으며 앞으로 걸어가야할 길 또한 각각 달랐다.

그때 연자심은 형언키 어려운 서글픔과 원망스러운 심회를 가슴 깊이 품고

금사보로 돌아왔으며마치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어린 양과같이

그 무서운 마귀들의 굴 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연자심은 생명이 경각에 달린 위태로운 찰나에 어떤 사람에게 구함을 받았다.

눈을 떠보았을 때 그는 노영탄이라는 청년이 아닌가!

이 순간에. 연자심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서려있던 서글픔도 안타까움도 원망스러움도

씻은 듯이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슬픔과 즐거움과. 극도의 흥분이 얽히고 설켜서 아름답고 깨끗한 환상을 짜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름답고 깨끗한 환상도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연자심의 마음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화산으로부터.

전보다도 더 두껍고 깊고 차디찬 얼음의 동굴 속으로 냉동댕이쳐진 셈이였다.

악중악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악중악이 노영탄에게 지지 않을 청년이라는 것을 연자심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연자심은 무엇을 잡으려다 놓친 것 같이  마음속이 텅 비고 허무하기만 했다.

그 허무한 마음속 한복판에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극도의 안타까움과 놀라움이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노영탄과 그 생긴 모습이 똑같은 악중악을 발견했을 때.

연자심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놀라움에 쌓여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것은 연자심이 청년 노영탄과 몇 머디를 서로 주고받고  했을 때.

양쪽의 형편이나 처지를 쉽사리 알아차리고 서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야릇한 심정을 부등켜안은 채로 청년과 소녀는

한동안 한 쌍의 길동무가 되어서 같이 길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거기에서 얻은 것은 두 사람이 똑같은 실망과 공허감 뿐이었다.

그 실망과 공허한 심정 속에서도. 악중악과 한빙선자 연자심을

간단히 떼어놓을 수 없었던 것은 동병상련의 처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자심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쉴새없이 빙빙 돌아단니고 있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연자심은 그 그림자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 역시 호수같이 잔잔한 마음속에 한 개의 조약돌을 풍덩 던져서

커다란 파문을 일어키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물론 노영탄이었다.

한편 악중악으로 말하자면 비록 단순히 남매지간 같이 함께 자라난 사이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감욱형이라는 또 한 소녀늬 인상을 평생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왜 그런지 감욱형이 아직도 어린아이 같이 여겨졌다.

그런 점에서 악중악의 눈앞에 나타난 연자심이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점령해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자심과 악중악은 금사보에서 노영탄에게 구출되어 나온 후

적화주에 가서 오매천녀를 만나보게 됐으며.

이 노파가 바로 연자심의 이모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기서 연자심은 비로소 자신의 신세나 처해 있는 위치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악중악은 호수에서 나가면 연자심과 같이 숭양파의 대표자를 만나보자고 말했다.

연자심은 이때 앞으로 닥쳐올 자기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따라서 악중악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하루이틀 길어질수록 노영탄에 대한 감정이

다시 악중악에게쏠려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연자심은 오매천녀의 승낙을 받고 악중악을 따라서

호수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악중악은 연자심을 데리고 숭양파의 대표자를 만나러 가지 않았으니.

결국 연자심을 속인 것이었다.

곧장 항주까지 와서는 비로소 그가 스승을 배반하고 교규를 어겼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했었다.

그와 동시에 악중악은 대담하게도 사랑을 호소했다.

전심전력을 기울여 연자심을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더불어 어디든지

한 군데 명산승지를 찾아서 『숭양비급』을 바탕으로 더욱 무예를 단련해서

거세무적의 무술을 연마해 가지고 다시 강호에 나타나서 모든 무림의 고수들을

정복시켜 버리고 한번 멋들어지게 살아보자는 앞날의 다짐까지 했었다.

한빙선자 연자심은 악중악의 이런 태도에 놀라기도 했다.

한때 심각하게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사태가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일개 소녀의 몸으로 어찌해야 할지 별다른 타개책을 찾을 수 없었다.

또 숭양파나 회양방이나 다 같이 악중악과 자기 자신을 호락호락놓아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악중악의 의사에 순종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미 10여 년전에. 악중악은 감영장을 따라서 천목산엘 와본 일이 있었다.

서쪽 산이 높고 험준하고 깊숙하여 그 꼭대기에 몸을 숨길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 연자심을 데리고 산꼭대기까지 올라와서 한 군데 석동을 찾아서

그 속에서 은거 생활을 하면서 무술을 더욱 연마해 보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들의 종적을 알아낸 사람이 있어 결국 오늘밤의 분규가 일어났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연자심은 노영탄을 똑바로 대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들어 석탑 위를 바라보자 .

악중악이 혼수혈을 찔린 채로 곯아떨어져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것이었다.

지난날의 갖가지 일들을 돌이켜 생각하고 또 현제의 처지를 생각해 봤을 때.

연자심은 그저 감개무량할 뿐 무엇이라고 입을 열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묵묵히 고개를 푹 수거린 채 앞에 나타나 있는 연자심이었다.

노영탄은 새삼스럽게 이 아리따운 아가씨의 전신을 무거운 시선으로 천천히훓어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석탑 위에 쓰러져 있는 악중악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마침내 먼저

입을 열었다.

" 두 분께서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시게 됐소? "

이말을 듣더니 연자심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순간 두 볼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들릴 듯 말 듯한 가느다랗고 힘없는 음성으로 .

" 이곳은 저이가 오래 전부터 알아두고 있었대요. 그래서 .......저....... 저는 ......... "

연자심은 말끝을 흐려 버렸다.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뜻인지 해석하기 곤란한 말이었다.

이순간 . 노영탄은 무엇인지 가슴 한복판을 쿡 찌러고 내닫는 것만 같았다.

 

' 둘이서 이 외롭고 쓸쓸한 무인지경 산봉우리 꼭대기에서.

그것도 깊숙한 동굴 속에서 함께 지냈다면  .....................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오래 전에 갈 데까지 다 가버린 것이? '

 

노영탄은 정말 자기 가슴속을 무엇이라 형언할 수가 없었다.

거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떫디떫은 심정만 같았다.

 

'내가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오로지 개세천왕이 남기고 간 보물 ...........................

비장의 지도를 연자심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만이었던가? '

 

눈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한빙선자 연자심의 아리따운 모습.

더군다나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다는 듯.

한편 당황스럽다는 듯.

초조히 앉아 있는 연자심의 태도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힘이 되어서

노영탄의 마음을 송두리째 잡아 끄는 것만 같았다.

 

' 내가 이렇게 이 여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나? '

 

노영탄은 자기 가슴속에다 대고 스스로 물어보았다.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인가 보다.

그러나 사랑이란 항시 뜨거우면서도 싸늘한 것이었다.

노영탄과 한빙선자 연자심 사이에는.

이렇게 소리 없는 애정이 묵묵히 두 사람의 가슴속을 한 줄기 강물처럼 흐르고 있으면서도.

양쪽이 다 같이 각자의 긍지라는 것을 버리기 싫은 것이다.

더군다나 노영탄의 입장에서

' 연자심과 악중악이 이미 어떤 선을 넘어서 갈 데까지 갔다면? '

하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는 가슴이 무엇으로 찔리는 듯 섬뜩했고.

그 음성까지 싸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확실히 이상야릇한 심정의 어쩔 수 없는 표현인지도 몰랐다.

나지막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이면서도

그 속으로는 바늘끝 같은 어떤 매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 두 분께서는 이런 곳에 함께 몸을 감추시니 과연 마치 신선과 같은 반려들이시오!

이 노영탄이 영문도 모르고 조용하고 재미있게 지내시는 두 분을 시끄럽게 해드려서

심히 죄송하오!"

 

연자심은 노영탄의 이처럼 매정스러운 말투에 가슴이 내려앉으며 깜짝 놀라지 않을 수없었다.

너무나 뜻밖에 말인지라.

연자심은 한동안 어리둥절해서 그 맑고 시원한 두 눈이 초점을 잃고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연자심은 흥분하려는 가슴을 꼭 누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랫입술을 잘강잘강 씹으면서 새카만 두 개의 동공이 한참 동안이나 노영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노영탄의 이 차디찬말투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어떤 질투와 시기의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을

대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쓰지도 않고 달지도 않은 떫디떫은 일종의 질투심이 분명했다.

연자심은 한편으로 놀라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없이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속 또 다른 구석에서는 '만일 이것이 어리석게 생각한 것이라면?'

이렇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연자심의 가슴속과 머릿속은 전혀 엉뚱한 다른 점을 짚었다.

그래서 고의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천만의 말씀이세요!

저는 오래 전부터 감욱형 아가씨의 놀라운 명성을 잘 듣고 있어요 !

어째서 이번에는 동행해 오시지 않고 혼자서만 여길 오셨나요?"

노영탄도 이 말을 듣고 부지중 깜짝 놀랐다.

새삼스럽게 연자심의 표정을 뚫어지도록 살펴보았다.

어떤 갑작스런 충격을 받고 있는 표정이 틀림없었다.

그 눈동자 그입술.

' 연자심은 분명히 감욱형을 질투하고 있는 것이구나! '

이런 눈치를 알아챈 노영탄은 고개를 돌리면서 선뜻 대답했다. 

" 하. 저 감씨댁 아가씨 말씀이시지요? "

" 네. 그래요. 그 아리따운 아가씨를 어디다가 떼어 놓으시고 이번 길에는 혼자만 오셨나요? "

"감씨댁 아가씨는 나의 구명의 은인일 뿐이오.

그 은혜를 보답해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

소생이 그 아가씨와 언제나 동행을 해야만 될 아무런 까닭이 없지않소?

그저 그뿐이었소!

나는 지금 그 아가씨의 행방을 알 수 없소. 실종되고 말았소 ! "

" 네? 그 아가씨가 실종됐다구요? "

 

노영탄은 그제서야.

2월 초이튿날 숭양파와 회양방이 결투했던 형편을 설명해주고.

또 그 자신이 금모사왕 부자를 시원스럽게 처치해버린 자초지종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노영탄은 한편 품속에서 비단주머니 하나를 꺼내서 연자심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 이것은 바로 소생이 금모사왕 오빈기의 신상에서 찾아낸 비단 주머니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연소저의 돌아가신 어르신께서 남기신 유서와 보물을 감추어

두신 곳을 지시하는 지도요. "

 

연자심은 뺏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히 그 주머니를 밭아서 열어보고

그 속에서 유서와 지도를 꺼내서 자세히 들여다 봤다.

이윽고 연자심은 머리를 조용히 들었다.

아리따운 소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목이 멜 듯한 음성으로 간신히 노영탄에게.

" 두고두고 이렇게 구함을 받게 돼서요 .......

이제또 노고를 아끼시지 않고 불원천리 이 먼곳까지 달려와주셔서 .........

이 은혜와 정리는 길이길이 ........ 제가 땅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 "

 

연자심은 벅차오르는 감격으로 더 말을 계속하지못하고 노영탄에게 와락 다가들며

그 발아래 꿇어 앉았다.

노영탄은 당황했다.

급히 몸을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손으로 연자심을 부축해서 일으켜 주고 있었다.

연자심의 두 어깨에는 노영탄의 손이 얹혀져 있엇다.

부드럽고 야릇한 사나이의 감촉이 연자심의 혈관 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또한 노영탄의 손길은 이루 형언키 어려운 거센 힘인 것도 같았다. 

연자심은 그 힘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땅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노영탄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노영탄은 어리둥절한 채로 두 팔을 뻗쳐서 연자심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두 젊은이의 몸과 몸은 꼭 붙어 있었다.

노영탄은 두 볼이 후끈 달아올랐다.

자신의 두 손이 아직도 연자심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쓰다듬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무엇에 찔린 사람처럼 황급히 팔을 내려 놓았다.

얼굴 전체가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두 팔을 연자심의 어깨 위에서 선뜻 내려 놓기는 했으나 그 순간 노영탄의 얼굴은

어떤 힘이 시키는지도 알 수 없게 두 손을 대신해서 연자심의 한쪽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청년과 아가씨의 볼과 볼이 꽤 오랫동안 꼭 붙어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의 빛깔은 검정이나 회색이 아니요. 새빨간 빛깔 같았다.

팔딱팔딱 마구 뛰는 두 사람 심장 고동 소리만이 서로 장단을 맞추는 것 같았다.

저편으로 살짝 돌리는 연자심의 두 볼에는 눈물 방울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눈물이 촉촉히 젖어있는 연자심의 얼굴은 요염하리만큼 사랑스러웠고.

애교와 매력이 뚝뚝 드는 것 같았다. 

노영탄은 이렇게도 유심히 연자심의 얼굴을 응시해 본 일이 일찍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천히 그리고 점잖게 입을 열었다.

 

" 내 일은 이미 끝닜소 .

나는 이곳을 떠나가야 할 사람이오.

 그대들도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시오.

얼마 안 있으면 숭양파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것이니 ........

 아시겠소?  소생의 말을 ............ "

 

오자마자 떠나는 사람.

연자심은 그 말을 듣더니 목석처럼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어놓지를 못하고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앞만 바라다보는 것이었다.

다음순간.

눈물이 촉촉히 젖은 얼굴을 다소곳이 푹 수그렸다.

가슴속에 일어난 파도가 광풍을 만난 듯이 마구 뛰고 출렁대고 꿈과 같이 만났던.

감격이 허전하고 쓸쓸하고 서글픈 심정으로 변해 갈 때.

연자심은 숨이 넘어가는 사람처럼 가느다란 음성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 다. 다. 당신께선 어디로 가신다는 건가요? "

 

자기가 이곳을 곧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듣고 어떤 실망과 안타까움 속에서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다는 듯 또 한편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긴장에 잠기는

연자심의 모습을 눈앞에 보게 되니 노영탄은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또 연자심이 묻는 말을 듣고야.

자기 자신을 생각한 노영탄이었다.

사실은 자신도 자신이 앞으로 갈 바를 자세히 모르는 것이었다.

이렇다 하고 떠나가야만 될 목적지도 없었다.

노영탄은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생각에 젖어 있었다.

동굴 밖으로 시선을 옮겨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그제서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 아.....

무변대한 천애(天涯).

그리고 또한 한없이 널브러진 바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

나 자신도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오! "

 

이말을 듣더니 연자심은 무슨 힘이 시켰는지는 몰라도 비상한 용기가

가슴속에 용솟음쳐 오르는 모양이었다.

두 볼이 한층 새빨개졌다.

나지막하면서도 대담한 음성이었다.

 

" 저를 .....저를..... 과히 꺼려하시지만 않는다면........

저도. 저도 이번에 노 공자를 따라서 함께 가고 싶어요! "

천만 뜻밖에도 자기를 따라가고 싶다는 한빙선자 연자심의 말을 듣고 난

노영탄의 표정은 지극히 심각했다.

그것은 얼마나 반갑고 기쁜 말이랴!

그러나 그것은 또한 얼마나 놀라운 말아랴!

노영탄의 안광이 별안간에 매서운 광채를 발산하면서 아직도 석탑 위에

나뒹굴어져 있는 악중악에게로 화살같이 꽂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그 날카로운 시선의 화살은 다시 연자심의 얼굴 위에 꽂히더니.

노영탄의 표정은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팔을 높이 쳐들더니 손가락으로 악중악을 가리키면서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분명히 물었다.

 

" 연소저는 저 악중악이라는 청년과? "

 

연자심은 어쳐구니가 없다는 듯 노영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노영탄은 만면에 의심스럽고 수상하다는 기색이 꽉 차 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있을 수 있는 오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색을하고 분명히 대답했다.

 

" 네. 알겠어요. 저이요?  우리 둘은 물론 동행을 해서 여기까지 같이 왔고 같이 지냈지만

우리들의 사이란 순결하고 청백하니까요.

티끌 한 점 없는 깨끗한 사이에요.

저이의 품행이나 심지는 확실히 고상하고 깨끗하다고 저는 존경하고 있었을 뿐이었어요.

하지만 저의 처지나 형편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 때문에 ......

저이를 따라서 도망치는 길밖에는 혼자서 달아날 만한 곳도 없었고 .........

그것뿐이에요. 저는 저이와 아무런 ........ 추호라도 ........ "

 

말을 채 마치지 못하는 연자심의 두 볼에는

또다시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는 새빨간 홍조가 활짝 퍼졌다.

그리고 머리를 푹 수그리더니.

들릴 듯 말 듯한 나지막한 음성이 가늘게 떨려 나왔다.

 

" 저의 마음은 벌써부터 어떤 분에게 송두리째 바쳐지고 있었어요.

그분이야 알고 계신지 몰라도.

저는 영원히 혼자서만이라도 그분을 잊어버리지 못하겠어요 ...... "

 

연자심은 또 한번 말끝을 맺지 못했다.

바로 이 순간 . 돌연 두 손이 덥석 대들며. 연자심의 두 손을 꾹 움켜 잡았다.

연자심이 고개를 쳐들었을때에도 어떤 거대한 힘이 이 아가씨의 두 어깨를 꼭 껴안고 있었다.

연자심은 몸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노영탄의 가슴팍을 뚫고 들어갈 듯이 그의 품속에 상반신을 고스란히 맡겨버리는 것이었다.

꼭 껴안은 두 젊은이들의 숨소리는 딱 끊어지는 듯.

또 파도처럼 거칠어지는 듯.

노영탄은 한참 만에야 정이 넘쳐흐러는 보드라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연 소저가 마음을 고스란히 바쳤다는 그 분이란 사람은 그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이제 와서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있을 뿐이오 ! "

 

밤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리고 동굴 속에는 죽음 같은 적막만이 감돌 뿐이었다.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