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19장 필사추적(必死追跡)

오늘의 쉼터 2013. 12. 13. 10:27

정협지(情俠誌) 4권


제 19장 필사추적(必死追跡)

 

사라진 숭양비급을 찾아

 

 

몽롱한 별빛 아래서 산과 들판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엄동의 사납던 추위도 이제 깨끗이 사라져버리려는 모양이었다.

대지위에는 한 줄기 두 줄기 가늘기는 하지만 파릇파릇한 신록의 기운이 벋쳐나기 시작했다.

강남(江南) 땅의 봄은 유난히 빨리 찾아들었다.

노영탄이 밟고가는 .해동이 지난 뒤의 땅은 질척질척하면서도 보드랍고 감촉이 경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영탄은 회안 방면을 향해서 일각도 지체치 않고 급히 달려가고 싶은 생각에.

한편으로는 그의 독특한 재간인 경신법을 써서 몸을 날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머릿속이

여러가지 생각으로 술령대는 파도처럼 어지러웠다.

그날 그때 노영탄은 감욱형을 회음성 밖인 양장이라는 고장에 있는 팔천장 양의방의 거쳐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기는 혼자 돌아서서 회음성 안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밤이었다.

숭양파의 제자도 아닌 자기가 만일 감욱형을 따라가서 같은 곳에서 투숫하게 된다면

사람들의 오해를 면치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였다.

또 미산호를 떠나온 이래 노영탄은 언제나 감욱형을 혼자 보내기가 마음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숭양파의 대표자가 거쳐하고 있는 신변 가까이 다다랐으니 .

그 이상 감욱형을 위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영탄은 혼자서 회음성 안으로 들어가서 따로 여인숙을 찾아 하룻밤을 지내고.

그 이튼날 날이밝기가 무섭게 여인숙을 나와 곧장 홍택호에 있는 앵무주를 향해

길을 떠났던 것이다.

호수 근쳐까지 와서 막 적화주를 지나쳐 가게 됐을 때.

노영탄은 본래 별일이 없는 터인지라

이곳을 그냥 과문불입(過門不入)하고 지나쳐버리려고 했었다.

숭양파와 회양방의 결투나 보고 난 다음에 서서히 오매천녀를 다시 찾아보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

노영탄이 호반에 다다랐을 때 그를 부르는 사람의 소리가 있을 줄이야. 

" 아저씨 !  영탄 아저씨 ! "

그것은 대림. 대문 두 어린아이들이었다.

" 아저씨 ! 아저씨 !  잠깐 ........ 잠깐만 ........거기 좀 계세요 ! "

두 어린아이들은 노영탄을 보자마자 만면에 희색을 감추지 못하고.

목청이 터져라고 악을 썼다.

노영탄은 어린 것들이 안타갑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대로 지나쳐버릴 수는 없었다.

노영탄은 두 어린아이들을 불러서 까닭을 물었다.

" 너희들은 어째서 이렇게 이런 새벽부터 호수에 나와서 놀고 있는 거냐? "

" 아이참. 저희들은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에요 !"

" 뭣이?  나를 왜? "

두 어린아이들이 자기를 기다리느라고 호반까지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자.

노영탄은 깜짝 놀랐다.

" 도대체 무슨 일이냐?  너희들이 여기까지 와서 나를 기다리고있다니?

나는 갈길이 바쁘다 !  어서 말해라 ! "

노영탄은 그 동안에 이 적화주에 무슨 사고라도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궁금한 마음으로

이렇게 조급히 물었다.

두 어린아이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그 까닭을 대강 이야기해 주었다.

" 영탄 아저씨의 사부님 되시는 남해어부 상관학 노인께서 어제 우리 적화주에 오셨어요 !

무엇인지 연락하실 일이 있으시다고요 ! "

스승이 이곳까지 왔다는 소식을 듣자노영탄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당장에 배 위로 뛰어올라 두 어린아이들을 따라서 적화주로 들어갔다.

배가 얼마쯤 적화주를 향해 들어갔을 때 두어린아이들은 또 이런 말을 했다.

" 하지만 남해어부 노인께서는 우리 적화주에 오래 머무르시지 않고

어젯밤에 호수를 떠나셔서 다른 데로 가셨어요 ! "

" 뭐라고? 음...... "

스승 남해어부가 이곳까지 오기는 왔으나 급히 떠나갔다는 사실을 알자.

노영탄은 여간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노영탄은 적화주로 향하는 배를 타고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 사부께서 이곳까지 오셨다면 결코 까닭없이 다녀가시지는 않았을 터인데 .........

무슨 연락하실 일이 있으시다고 했다니 반드시 나에게도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이리라. '

이리하여 노영탄은 마침내 두 어린아이들에게 배를 빨리젖도록 지시해서 .

급히 적화주 섬을 향해 들어간 것이었다.

섬으로 돌아와서는 물론 급히 오매천녀를 찾았다.

그제서야 비로소 남해어부가 일종의 단약을 만들기 위해서 장백산으로

그 재료를 채집하러 가야만 될 일이 생겨 회양 지방을 지나던 차에

잠시 그섬에 들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해어부는 마침 회양방과 일대 결투를 벌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암암리에 여러 방면으로 탐지해 보았다.

양쪽의 역량이 비등비등하니 초청해 온 몇몇 고수급 인물들도 결코 경거망동을

하지 않을 것이고 자연 싸움의 규모가 커지고 치열해지다보면 양쪽이 똑같이

엄청나고 처참한 전화를 면치못하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한편 남해어부는 노영탄의 실력이나 재간을 가지면 이번 결투에 능히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섬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그대로 동북 지방을 향해서 길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막 이 섬을 떠나려고 했을 때 난데없이 비밀 정보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금모사왕 오빈기 부자가 엄청난 양의 화약을 준비했다는 사실이었다.

남해어부 상관학이 이 적화주 섬을 그대로 지나쳐 갔던들 회양방과 숭양파의

결투는 얼마나 소름 끼치는 처참한 전화를 양쪽에 입히고야 말았을지 .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에 놀라운 정보을 입수하게 된 것이었다.

오빈기 부자가 이번 결투로써 내편 네편 할 것 없이 양쪽의 인물들을 모조리 거꾸러뜨려서

무림의 고수들을 일망타진해 버림으로써 그들 부자만이 이 세상의 유명한 인물이 되어

무림에서 패권을 잡고 한번 호령해 보자는 음흉하고 악독한 계교를 꾸미고 있는 사실을

알아차린 남해어부는 여전히 태연자약 추호도 당황하는 빛이 없었다.

왜냐하면 남해어부는 노영탄의 실력이나 재간을 넉넉히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영탄만한 놀라운 무술 실력을 가졌으면 족히 이런 결투를 수습하고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남해어부는 적화주에 있는 오매천녀에게 종이쪽 한 장을 남겨두고

다음과 같이 부탁했을 뿐이었다.

" 그들의 결투가 시작되기 전에. 되도록 빨리 이 편지가 노영탄에게 전달되도록 해주시오 !

무슨일이 있더라도 그날 정오까지는 반드시 앵무주에 도착하도록 하라고 꼭 일러주시오 ! "

이리하여 남해어부 상관학이 이 섬을 떠나자말자 .

오매천녀는 경각을 지체할 수 없어 날이 밝기를 기다려 곧 두 어린아이들을 호반으로 내보내.

노영탄이 지나갈 만한 목을 지켜 섬으로 불러들이도록 한 것이었다.

오매천녀는 이런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해 주면서 남해어부가 남겨두고 간 편지를 

노영탄에게 내주었다.

노영탄은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과연 스승 남해어부의 일 자 일 획을 소흘히 하지않은 깔끔한 친필이 또박또박 .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탄은 이런 사실을 알아들을지어다.

내 이곳을 지나쳐 가는길에 회양방의 오빈기 부자가 이번 결투에서 양쪽의 고수를

모조리 몰살시켜 버리자는 흉계를 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태가 엄중하긴 하나 그다지 놀라거나 겁낼 것은 없다.

단지 초이튼날 정오 이전으로 꼭 결투장에 도착해서 양쪽의 싸움을 정지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앵무주 옆에 있는 두 섬으로 몸을 피하도록 하여라.

시간이 지체되어 화약이 폭발되기만 한다면 섬은 물결 속에 삼켜져버릴 것이요.

두 번 다시 그들을 구출할 길은 없어질 것이다 !

네가 스승과 작별한 이후에 여러 방면으로 활약한 바는 매우 훌륭하다 .

내 심히 마음 든든히 생각하는 바이다.

이번에도 온갖 노력을 기울려서 일만 성공해 놓는다면 그 덕이야말로 무량할 것이며.

그래야만 내 제자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줄 안다.

                                                                     스승 남해어부 적음.

 

노영탄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내심 기뻐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편지에서 스승의 필적을 대하니 마치 그의 자상한 얼굴을 보는 듯 기뻐기 한이 없었으나.

과연 스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그의 분부대로  순조롭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 걱정스러웠다.

시간을 따져보니 이미 그다지 여유 있는 시각이 아니었다.

노영탄은 곧 당장에 떠나야겠다는 그의 말을 듣더니 오매천녀는 왜 그런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노영탄에게 이렇게 물었다.

" 자네가 지금 당장 이 섬을 떠나 육지로 올라가서 앵무주로 가겠다고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물을 건너서 그 섬까지 올라갈 작정인가? "

오매천녀의 물음을 듣고 노영탄도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노영탄은 자기가 떠나기에만 정신을 쏫고 어떻게 호수를 건너서

그 섬에 올라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기야 그의 경신법의 재간을 부리면 물이고 육지고 훌훌넘어서다니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워낙 거리가 먼 호수요. 또 수면에는 파도도 잔잔할 리 없어니.

이렇게 오랜 동안을 두고 장거리를 혼자 힘으로 날아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디 그뿐이랴. 호수 가운데는 크고 작은 섬들이 줄비하게 깔려있고 울퉁불퉁 거칠고 험한

지형도 잘 모르는데다가. 늦게도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만일에 한 걸음만 늦어진다면

그때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천지가 뒤집힐 무서운 폭발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 아닌가 !

노영탄은 오매천녀의 질문을 받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매천녀는 이 광경을 보더니 선뜻 눈치를 채고 또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 그다지 근심할 것은 없네 ! 내 벌써 그를줄 알고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어 !

대림이와 대문이 더러 자네를 배에 태워다주고 오도록 ........

그들은 그곳의 지형을 샅샅히 잘 알고 있으니까 결코 틀림이 없을걸세 ! "

이렇게 말하면서 오매천녀는 즉시 두 어린아이에게 배 한척을 준비하도록 분부하는 한편

노영탄에게 다시 마지막 부탁의 말을 했다

" 자네. 사부님 말씀을 들어보자면 그 오빈기란 자는 무술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

괴상망측하고 음흉악독한 계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어서 남들에게 이간질을 붙이길

아주 좋아하는 위인이라니. 아마 이 어지럽고 무서운  결투의틈을 교묘히 노려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든지 저 혼자만 슬거머니 몸을 피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하셨네 !

자네는 무엇보다도 이런 점을 명심하고 그 자의 종적을 한번 붙잡은 이상에는

절대로 호락호락 놓쳐버려서는 안 되네 !

내 이말을 저버리지 말도록 잘 .......간직할 수 있겠나 ? "

" 네 ! 선배님들의 간곡하신 부탁 결코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

노영탄은 서섬치 않고 이렇게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이때 벌써 두 어린아이들은 한 척의 배를 대놓고 그 위에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하여 노영탄은 오매천녀에게 작별을 고하고 배 위로 뛰어올라서 곧 적화주를 떠나

앵무주로 달려갔던 것이다.

대문. 대림 두 어린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호수위에서 자라났다.

내공. 외공의 무술에 있어서 오매천녀가 열심히 지도해서 이미 만만치 않은 기초를 

쌓아올렸을 뿐만 아니라 물에서 놀고 배를 젖는 데도 신기할 정도로 정통해 있었다.

거기다 또 홍택호 일대의 지형에 관해서는 깊은 곳이건 얕은 곳이건 샅샅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눈치 빠른 두 어린아이들은 노영탄이 앵무주까지 일각을 다투어서 급히 가야만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기묘한 재간을 발휘해서 날아가듯이 노를 빨리 저었다.

살짝살짝 물결을 헤치고 화살같이 사나운 파도를 뚫고 나가며 10여 분도 채 지나지 않은

빠른 시간에 거침없이 앵무주 기슭에 배를 들이댔다.

노영탄은 뱃머리에 섰을 때 이미 섬 위에 버려진 난장판같이 뒤숭숭한 싸움터를 모조리

휘둘러보았다.

숭양파. 회양방 쌍방이 똑같이 극도로 긴장하고 흥분해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을

때였다.

노영탄은 초조했다.

무엇을 망서릴 때가 아니였다.

배가 섬에 닿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흘쩍. 그대로 몸을 날려서 단번에 섬 위로 뛰어든 것이었다.

양쪽의 처참하고 치열한 결투를 막아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감욱형이 실종되어

그곳에서 찾아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감욱형의 종적을 찾고자 애쓰다가 천만 뜻밖에도 그 호수 밑바닥의 굴길을 

발견하게 됐으며 아울러 세상에 희귀하고 좀처럼 구경하기도 어려운 네 가지 무술에 관한

도형까지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뜻밖의 사실보다.

노영탄이 제일 놀란것은 금모사왕 오빈기 부자를 잡아냈는데도 감욱형 아가씨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고 마치 풀기어려운 수수께끼처럼 알아낼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노영탄은 회안 지방으로 달려가면서도 여러가지 과거지사와 앞으로 닥쳐올 미지의 일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제 오빈기 부자가 다 같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회양방은 그들의 두령을 잃어버리고 

그 수많은 방도들은 마치 머리가 잘린 군룡들같이 두서없이 뿔뿔이 흩어져서 어떠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을 것인가?

혹은 숭양파와 회양방의 모든 인물들은 아직까지도 그 양편 섬 위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그대로 있는 것일까? '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 갖가지 사념 때문에 뒤숭숭하고 어지러웠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노영탄은 잠시도 쉬지않고 앞으로 앞으로 팔다리와 몸을 날렸다.

그의 경신법이란 실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놀라운 재간이었다.

백여 리나 되는 먼길을 불과 한 시간도 못 되는 동안에 거뜬히 달리고 말았다.

멀리 멀리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는 회양방 의 아성 금사보의 모습을 

노영탄은 쉽사리 발견했다.

'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일까? ' 

노영탄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깜짝 놀랐다.

금사보 안은 노영탄이 상상한 결과는 전혀 딴판으로 조금도 누락하거나 암담한 기색은 없었다.

그와는 전혀 반대로. 등불이 예전보다도 더 한층 휘황찬란하게 밤이 낫같이 밝혀져 있었다.

마치 무슨 성대하고 굉장한 전례를 거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이놈들 봐라 !  지독한 놈들인데 ..........

지금도 오히려 불을 밝히고 꿈틀거리고 있다니?

이놈들이 대체 아직까지도 풀이 죽지 않고 무슨 짖들을 하고 있는 걸까? '

노영탄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어.

극도의 의심을 품고 몸을 더 한층 빨리 날려서 금사보의 높은 담 밑까지 단숨에 날아들었다.

금사보 주변 형세나 그 구조 같은 것에는 이미 정통해 있었다.

아무것도 고려해 볼 나위가 없었다.

곧장 거침없이 서쪽 보루의 담 밑으로 달려갔다.

과연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서쪽 보루의 담 위는 경비가 소흘하기 짝이 없었다.

노영탄은 몸을 살짝 땅바닥에 깔았다가 껑충 뛰어올랐다.

단숨에 보루 담 위로 날아올랐다.

두 눈을 크게 떠서 보루 안을 한번 휘둘러본 노영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흠!  이 흉악한 놈들이 ...... 아직도 목숨이 붙어서는 저희들 소굴로 다시 돌아오다니 ....... '

바깥쪽 보루고 안쪽 보루고 할 것 없이 가는 곳마다 사람 소리가 웅성웅성 와글와글 했다.

사람의 그림자가 갈팡질팡 허둥그리고 돌아다니며 그 바쁜 품이라든지

또한 극도로 긴장해 있는 품이 얼마 전에 생명을 내걸고 결투를 했다는 기색은 추호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이놈들 ! 어디 자세히 형편을 살펴보고 나서 ......... '

노영탄은 보루 담 위 .어두컴컴한 곳에서 몸을 다시 흘쩍 날려.

이 건물 저 건물 지붕 꼭대기를 뛰고 넘고 하여 단숨에 후면에 있는 한쪽 보루로

곧장 뚫고 들어갔다.

숨소리까지 죽이고 안쪽 보루 뒤편으로 살금살금 돌아 들어선 다음에는 .

기묘하게 몸을 감추어서 안쪽 보루의 정면에 있는 대청이 마주바라다 보이는

건물의 지붕 꼭대기로 올라갔다.

거기서는 안쪽 보루의 광경이 손에 잡힐 듯이 환하게 건너다 보였다.

대청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똑똑히 내려다볼 수있었다.

노영탄이 지붕 꼭대기에 자리잡고 몸을 숨기고 있노라니.

난데없이 뗑뗑뗑 ! 징을 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그 순간에 여태까지 떠들석하던 사람들의 소리는 죽은 듯이 가라앉아버렸다.

징소리가 밤 공기를 흔들고 어둠 속으로 요란스럽게 퍼지는 순간.

그사보안쪽 보루에서 웅성거리고 있던 모던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를 잡고 우뚝 섰다.

갑작스레 어디선지 우렁찬 음성으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함 소리는 천지를 진동할 듯 깊은 밤중의 적막을 무섭게 뒤흔들면서 깨뜨려 놓았다.

그러더니 뒤를 이어서 안쪽 보루의 대청으로부터 두령의 모습을 한 사나이가

전신에 번쩍번쩍 빛나는 새 옷을 걸치고 뚜벅뚜벅 아주 정중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그 사나이는 대청 입구 돌층계 위에 자못 엄중하게 버티고 서더니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여러 친구들 ! 여러 동지들 ! 오빈기 부자는 마침내 강호 천지의 의리도 인정도 돌보지 않고 

저희들의 동지와 친구들을 팔아먹고 말았소 !

우리 회양방의 두령 자격은 이것으로써 깨끗이 상실됐소 !

이제 이 비급한 부자 놈들은 어디론지 도망하여 종적을 감추고말았으니.

우리 회양방의 앞으로의 존패 문제에 관해서는 여기 계신 여러 친구 여러 동지들이 신중히

그 방법을 강구해서 결정짖기를 바랄 뿐이오 ! " 

말을 마치자

그 사나이는 층계 아래에 있는 수많은 방도들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골고루 훓어보았다.

이때 회양방의 전체 방도들은 차례 차례로 일제히 안쪽 보루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대청 아래 넓은 마당에 빽빽하게 몰려들어서 입추의 여지도 없을 지경이었다.

하나하나가 똑같이 엄숙한 표정을 하고 묵묵히 서서 숨소리도 내지않으며.

그 장정의 하는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는 판이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대청 뒤로붙터 네 사람의 굵직굵직한 장정들이 나란히 걸어나왔다.

그들 네 사람들도 또한 몸에 번쩍번쩍하는 새 옷을 걸쳤으며 아주 단정한 몸차림을 하고 있었다.

노영탄이 자세히 건너다보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

바로 사대타주라고 하는 호.표.웅.상 네 지도자급 인물들이었다.

그들 사대타주 가운데는 괴롭고 피곤한 기색을 미쳐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는 자도 있었다.

얼마전 결투에서 부상당한 몸을 아직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성 싶었다.

먼저 걸어나온 장정 녀석이 사대타주 편으로 한번 힐끗 눈짖을 해서 건너다보더니

또다시 찌렁찌렁 울리는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 우리 회양방을 이끌고 나갈 영도자는 사라졌소!

사대타주님들의 의견으로는 숭양파 놈들이 우리 회양방의 고루령기를 빼앗아 가고 말았으니 ...

이런 원통하고도 위급한 시기에 처해서 우리들이 우리 회양방을 존속시켜 나가고자 할진데

시급히 영도자를 뽑고 고수들을 망라해서 우리들의 사령기를 도로 빼앗아 오고 동시에

놈들에게 보복하여 우리 방의 명성과 위신을 다시 강호에 떨쳐야겠다는 것이오! "

그 장정은 있는 목청을 다해서 여기까지 떠들더니 .

잠시 말을 멈추고 머리를 돌려 또 한번 사대타주들을 흘낏 쳐다봤다.

호.표.웅.상 사대타주들은 일제히 머리를 끄덕끄덕해 보였다.

그제서야 그 장정은 또다시 말을 계속했다.

" 현제와 같이 무림의 고인들 께서 우리 금사보에 많이 왕림해 주시기는 실로 쉽지 않은 일이오.

사대타주님들의 의견인즉 이분들을 초청해서우리 회양방을 지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여러

선배되시는 이분들께서 우리 회양방을 지도해 주시겠다고 승낙만 하신다면 앞으로 우리

사령기를 도로 빼았아서 숭양파 놈들에게 설욕 보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신을 강호에 떨치고 무림에서 명성을 날닐 수 있을 것이며.

우리 회양방을 광명과 발전을 길로 이끌 수 있다고 하시는 것이오! "

장정은 몹시 비분강개한 어조로 여기까지 단숨에 떠들어대고 나서.

잠시 말을 중단하고 아래을 내려다보더니 더한층 높은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 여러분 동지들의 의견은 어떠시오? "

아래 모여 있는 수많은 방도들은 웅성웅성 거리며 ......

마치금세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 좋소 ! "

" 이의 없소 ! "

" 그대로 진행합시다 !"

이런광경을 보더니 .

그 대창 위에 서 있는 장정과 사대타주들은 자못 기쁜 모양이었다.

그들 다섯 명이 급히 대청 뒤로 들어가자마자 이번에는 얼마 안 되어서 대청 뒤로부터

또다른 일곱 명의 인물들을 인솔하고 나왔다.

그 일곱 명의 인물은 바로 흑지상인 고비. 운몽노인. 해남인마. 기경객. 홍의화상 우람부루.

그리고 장백산에 사는 땅딸보 형제 미극량과 미극심이었다.

그 일곱 명의 인물들이 대청에 나타나자 .

아래 모여 있던 수많은 방도들은 악을 쓰고 부르짖고 외치고 한참 동안이나 열광적으로

환호성을 네질렸다.

한참 만에. 처음에 말을 하던 그 장정은 손을 높이 쳐들어서 방도들의 환호성을 진정시키면서

또다시 찌렁찌렁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 오늘은 우리 회양방이 새로 탄생한 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오 !

이순간부터 우리 회양방의 새로운 방주이며 대표자가 되신 분은 이분 ..........

온 천하에 그 놀라운 명성을 떨치고 계신 대선배 고선생이시오 ! "

장정의 말을 마치자 아래서는 또다시 요란스런 아우성 소리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웅성웅성거리며 고비라는 새 두령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고비는 선뜻 앞으로 서너 걸음 나서더니 두손을 한데 잡아서 흔들흔들 .

아래 있는 방도들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표시했다.

그리고 자못 감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이 고비는 강호 땅을 떠나 산 속에서 칩거 생활을 한 지 이미 이십여 년이 지났소.

이번에 귀방을 위해서 미력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하산하였더니

천만 뜻밖에도 오빈기란 위인이 신의를 망각하고 배신 행동을 하여 여러분 친구와 동지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말았소 !

이제 여러분의 열렬한 지지와 옹호를 받게 되었으니.

이 고비는 여러 말 하지 않고 단지 일신의 생명을 내걸고 회양방을 위해서 싸워볼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는 바이오 !

여러 동지들은 여하한 환란이나 고통이 닥쳐오더라도 생사와 운명을 같이한다는

꿋꿋한 정신으로 협조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오 ! "

말을 마치자.

고비는 또 한번 두 손을 모아서 흔들흔들 .성심 성의껏 인사를 했다.

대청 아래 모여 있는 여러 방도들은 또 한번 도가니 속에서 끓는 물처럼 열광적인 환호성을

내질렸다.

그때. 맨 처음에 말을 시작하던 장정은 또다시 높은 음성으로 외쳤다.

" 동지 여러분 ! 우리는 이제 잠시 동안 몸을 쉬고 나서 오늘밤 자정 정각에

우리 회양방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개단제맹의 전례를 거행해야 되오 !

그때에는 이 자리에 한 분도 빠짐없이 집합하여 지금과 같은 각자의 열과 위치를

그대로 지켜주시기 바라오 ! "

말을 마치고 그 장정과 지도자급 인물인 사대타주들은 일곱 명의 마귀 두목 같은 자들을

거느리고 대청 뒤로 들어갔다.

이편에서는 수많은 방도들이 제각기 흩어져 가느라고 또 한번 번잡을 떨고.

아우성을 치고 회양방의 아성인 금사보는 웅성웅성 떠들썩 하고 혼잡한 가운데.

한없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 아. 이놈들 봐라! '

지붕 꼭대기에 숨어 있는 노영탄은 이 한 막의 연극 같은 광경을 건너다보자.

내심 놀라움과 걱정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회양방 놈들이 그야말로 돌출기병의 대담성을 가지고 여전히 이따위 수많은 마귀 두목 같은

위인들을 매수해 들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이렇게 되고 보면 오빈기 부자를 없애버린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구나!

그 결과는 도리어 회양방 놈들의 흉흉한 기세를 자극하고 불질러 놓은 데 불과하게 됐으니 .....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이 놈들의 정세로 보아서는 한 가지 파동이 완전히 가라앉기도 전에 또다시 새로운 파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된다면?

무림의 원수니 은혜니 하는 저주스러운 감정은 점점 더 격렬해질 뿐이 아닌가 !

영원히 그것을 풀어버리고 수습할 길은 없을 것인가? '

노영탄은 이렇게 혼자만의 심각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띵해지면서도.

다시 안쪽 보루의 넓은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방도들은 모조리 흩어져버리고 넓은 마당은 비로 쓴 듯 조용해졌다.

이때 노영탄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 이놈들이 자정이 돼서야 다시 모여서 무슨 짖들을 할 모양인데.

그때까지는 아직도 꽤 오랜 시간이 있어야 되고 ..............

이 이상 이곳에 더 오래 남아서 염탐을 한다고 해도. 대단한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회양방 놈들의 인마(人馬)가 모조리 금사보로 돌아와 있는 것을 보면

숭양파의 사람들도 지금쯤은 호수를 나와서 육지로 올라와 다시 회음지구 양장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

안 되겠다 !

여기서 더 오래어물어물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역시 한시바삐 회음지구로 가바야지 숭양파에 회양방의 동향도 빨리 알려주어서

이에 대쳐할 준비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우선 급한 일이다 ! '

이렇게 결심을 한 노영탄은 일각이라도 이곳에서 지체할 필요가 없어서

곧 행동을 개시했다.

뚫고 들어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서서 몸을 날쌔게 날려 금사보 밖으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방향이 훤히 내다보이는 길이었다.

몸도 마음도 다리도 경쾌하기 이를 데 없고 앞을 막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곧장 회음 지구를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회안에서 회음까지는 불과 몇십 리 길밖에 안 된다.

바람같이 가벼운 경신법을 써서 순식간에 회음성 밖에 다다랐다.

양장이란 제법 번잡하고 사람이 많이 들끊는 널찍한 고장이었다.

이 고장 북쪽 거리 한편으로 유난히 눈에 띄는 널찍한 저택이 한 채 있었다.

높고 든든하고 두껍게 둘러싸인 담 안으로는 시퍼렇게 무성한 숲속에 파묻혀서

붉은 벽돌과 푸른 기화가 은은히 바라다보였다.

이것이 바로 양장에서 제일 유명한 팔선장 양의방의 주택이었다.

노영탄은 일찍이 감욱형을 이곳까지 바래다주고 간 일이 있었다.

집을 찾거나 기웃거릴 필요도 없었다.

곧장 팔선장의 주택으로 달려 들어갔다.

시커먼 칠을 했고 유난히 높직한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 노영탄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무슨 인기척이 없나 하고 사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안에서는 사람의 음성. 등불이 밝혀져 있는 것 같은 기색도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망설이다가 드디어 손을 움직여 대문에 달린 커다란 쇠고리를 힘있게 흔들었다.

그제서야 안에서는 깜짝 놀라는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 거. 누구요 ? "

노영탄은 급히 대답했다.

" 나 ...... 나 노라는 사람이오 !

혹시 숭산 탁도장. 탁창가 선생께서 이곳에 계시지 않은가 해서요 ........ "

" 아 그래요 ? "

안에서는 적이 마음을 놓았다는 듯한 음성이 또 한번 들리더니.

비로소 대문이 열렸다.

불쑥 뛰어나온 것은 중년쯤 돼 보이는 장정이었다.

그 중년 장정은 노영탄의 위아래를 유심히 훑어보더니.

두 손을 맞들어 인사를 하고 물었다.

" 노형은 누구신지요?  또 탁창가 선생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어신지요? "

노영탄도 역시 두 손을 맞들어 공손히 답례를 했다.

" 소생은 영탄이라 하오. 탁창가 선생과는 오래 전부터의 교의(交誼) 관계로 ........ "

그 중년 장정은 노영탄의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선뜻 이렇게 말했다.

" 노형께서는 잠시 안으로 들어오셔서 기다리시오.

곧 장주님께 연락해 드릴 것이니 ......... "

말을 마치자 한 옆으로 비켜서면서 노영탄을 안내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마당을 지나 대청까지 와서 자리를 잡아 노영탄을 앉혀 놓고는 곧장뒤로 돌아 들어갔다.

' 이렇게 밤 늦게 남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닌데 여간 불안한 눈치가 아닐걸 !

이 집 주인이 나를 의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숭양파 사람들도 이곳에없는 눈치 같기도 하고 ...... '

이렇게 생각할 때 . 노영탄은 자기의 입장이 쑥스럽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렇다면 숭양파 사람들은 대체 어찌 된 셈일까? '

노영탄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며 망설이고 있을 때.

홀연 대청 밖에서 큰 기침 소리가 두번 들려왔다.

" 에 ! "

" 어흠 ! "

두 사람이 대청으로 나섰다.

앞장을 선 것은 7.80세나 되어 보이는 수염과 머리가 하얀 노인이었고 뒤를 따라 나온 것은

바로 대문을 열어주던 그 중년 장정이었다.

노영탄은 선뜻 일어서서 두 손을 맞잡고 절을 했다.

그 노인은 노영탄의 얼굴을 유심히 훓어보더니 고개를 끄떡끄떡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 늙은 몸이 바로 이곳의 주인이오.  사람들이 선장이라고 부르오.

무슨 까닭으로 이곳에까지 와서 탁도장을 찾는지 그 연유를 묻고 싶소 !"

노영탄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잠시 망설이기는 했으나.

결국 솔직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 소생은 홍택호에서 탁창가 선생과 작별한 후 숭양파 분들이 호수를 나와 육지로 올라오게

되었는지 심히 궁금하온지라 ........

댁에 탁창가 선생께서 기숙하고 계신 일이 있으셨다 하옵기에 좀 만나뵐 수 있을까 해서

실례를 무럽쓰고 이렇게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 

노인은 노영탄의 말을 듣더니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급히 물었다.

" 아하!  바로 노형이 ?  저 남해어부 상관 선배님의 수재자라는 ? "

노영탄도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대답했다.

" 네 . 바로 소생이 .......... "

노인의 날카로운 안광이 한번 힐끗 하고 노영탄의 얼굴을 쏘아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옆에 서 있는 중년 장정도 노영탄이라는 이름을 듣더니 새삼스럽게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그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지 않으며 점잖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노형의 용맹은 일찍부터 잘 듣고 있었소 !

처음 대하는 처지지만 보아하니 과연 우리 선배님의 수제자 라기에 부족함이 없는 친구로군!

오늘일만 하더라도 우리 남해어부 상관 선배님의 민첩하신 연락이 있었고 .

또 노형이 의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생각하고 빨리 달려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공전의 일대 참변을 빛어내고야 말았을 것이 아니겠소 ! "

노영탄은 지극히 겸손한 말투로 시종 침착하게 대답했다.

" 천만에요 !  그건 너무나 지나치신 칭찬이십니다 ! "

노인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 숭양파 여러 동지들은 오늘 낯에 호수에서 뛰쳐나와서 나의 집에 들르기는 했었소.

그러나 그들은 벌써 미산호 천암사를 향해 떠나버리고 말았소.

노형은 이왕 나의 누추한 거처나마 찾아주었으니 .

여기서 하룻밤 쉬고 내일 아침에 일찌감치 떠나는 것이 어떻겠소? "

노영탄은 말없이 곰곰 생각해 보았다.

이미 숭양파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갔다는 소식도 알았으니.

그다지 초조하게 서두를 일도 없을 것 같고 해서 노인의 말대로 여기서 하루를 푹 쉬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노영탄은 동이트기가 무섭게 몸을 일어켰다.

즉시 팔선장 양의방 노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미산호 천암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올수록 노상에 행인들이 늘어났다.

노영탄은 대로 상에서 경신법을 써서 까닭없이 세상 사람들을 놀래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될 수 있는 데까지 논둑 밭둑의 거칠고 좁은 길을 찾아서 남의 눈을 피해가면서 미산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땅거미가 다가들 무렵에 노영탄은 이미 호반에 다다랐다.

마침 호숫가에는 자그마한 나룻배들이 몇 척 떠 있는지라 .

그중 한 척을 풀어 가지고 곧장 묘아서를 향해 저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노영탄이 탄 배가 기슭에 닿을라 말라 했을 때 벌써 저편에서는 사람의 그림자가 절간으로부터

달려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앞장을 서서 달려든 것은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었고 뒤를 따르는 것은 독응구붕. 어양검사

두 영감이었다.

세 영감들은 뜻밖에도 노영탄을 맞이하여 너무나 감개무량해서 즉시 천암사로 안내하고

들어갔다.

절간 문을 막 들어서자니 그곳에는 철장단심 탁창가와 고봉상인 노인이 엄숙한 모습으로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노영탄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탁창가는 반색을 하며 앞으로 내달아서 그를 맞이해 들였다.

탁창가는 감격한 마음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가슴속이 벽찬 모양이었다.

" 노 동지 !  이번에 정말 대의를 위하는 거룩한 정신으로 우리들을 구해 주어서 .........

우리들은 가까스로 구사일생의 환란을 극복하고이렇게 살아났으니.

동지의 그 인정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용감무상한 정신과 태도를 우리들 숭양파 제자들은

길이길이 잊지 않겠네 ! "

노영탄은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맞잡아 공손히 절을 했다.

" 도장님께서는 너무나 지나치신 칭찬이십니다.

숭양파와 저와는 피차간에 사문을 통하여 깊은 인연이 있을 뿐더러.

평탄치 않은 길에맞닥뜨렸을 때 응당 칼을 뽑아 서로 돕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

의협에 사는 사람이라면 피차간에 위급을 구하여 살아가는 것이 당연할 뿐입니다 !"

이렇게 말을 해놓고  한동안  망설이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했을 때 이제는 무엇을 더 망설이거나 주저할 때가 아니었다.

대뜸 단도적 입적으로 물었다.

" 저 감씨택 아가씨. 감욱형의 소식은 아직도 없습니까?  어찌된 일일까요?"

여러 사람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며 똑같이 머리를 옆으로 흔들 뿐.

묵묵히 피차의 표정만을 곁눈질해 보면서 일언반구 말들이 없었다.

이자리에서 노영탄은 여태까지 감욱형의 종적을 찾느라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단닌 경과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 허 . 혼자서 용감하게도 금모사왕 부자를 한꺼번에 쳐치해 버렸다니 !

그건 참 기막힌 일이로군 ! "

여러 사람들은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한편 회양방 놈들이 아직도 머리를 수그리지 않고 또다시 악당들을 모아 놓고

신방을 조직하며 그 전례까지 마련하고 있다는 소식에는 숭양파의 모든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와 흥분을 참을 길이 없었다.

이번에는 그 아슬아슬한 사건을 치러고 나서도 회양방 놈들이 여전히 음충맞은 흉계를

버리지 않고 또다시 꿈틀거리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무수한 발을 가진 악독한 벌레처럼 밟히고 또 밟혀도 꿈틀거리고야 마는 회양방 놈들 ....

" 저런. 고약한 놈들! 또 그 따위 흉계를 꾸미고 있다니 ! "

" 그 마귀 두목 같은 놈들이 또다시 한데 몰려서 말성을 일어킨다면.

세상은 도저히 편안할 수가 없겠는 걸 ! "

철장단심 탁창가는 분노에 가득 찬 독백을 침통한 생각에 젖어서.

탁창가의 표정만 살피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때 사동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 향단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

탁창가는 사동의 말을 듣더니 침통한 공기를 헤쳐버리자는 듯.

노영탄의 어깨를 탁 쳤다.

" 이 사람 . 노 동지!  우리들이 급히 이곳으로 달려온 것은 .

우리의 아웃뻘 되는 동지 감영장의 영혼이라도 위로해 주고 그를 위해서 원수를 갚았고

설욕을 했다는 사실을 지하에 있는 고인에게도 전해 주자는 뜻에서일세 ! " 

철장단심 탁창가가 이렇게 말했을 때.

노영탄은 감욱형의 아버지 감영장이 회양방 놈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는 지나간 사실이

기억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 직접 하수자인 대력귀수 풍풍이 잡혀와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 말하자면 위령제를 지내시는 ......... ? "

" 그렇지! 노 동지도 남의 일같이 생각지 않는다면 함께 참가해서 구경이라도 해주는 것이

어떻겠나 ? "

" 좋습지요 ! "

노영탄은 선선히 대답했다.

" 자. 그러면 저리로 같이 ! "

탁창가는 앞장을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엄중하고 심각했다.

노영탄도 나란히 그의 옆을 따라 섰으며 숭양파의 여러 동지들이 또 그 뒤를 따랐다.

천암사 후원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을 때.

탁창가는 뒤를 따르는 다른 동지들의 귀를 꺼린다는 듯.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옆을 따르는 노영탄에게만 넌지시 하는 말이 있었다.

"이건 노 동지만 알아두게만. 세상 사람들이 알까 두렵고 도무지 숭양파의 위신상을

생각해도 기막히는 일이어서 ........ "

" 네?  무슨 사건이 있었나요? "

" 대력귀수 풍풍이란 놈 말일세 ! 

그놈은 육지처참을 해도 오히려 그 죄가 무거울 만큼 천하에 악독하고 음흉한 놈이라서 .......

욱형이가 실종을 하게 된 까닭도 말하자면 그놈에게 ......... "

" 네?  그놈 때문에요? "

" 그놈은 우리 동지 감영장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딸인 감욱형에게까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네. "

" 네? 모욕을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

" 여기서 지금 긴 이야기를 할 수 없네만은 그놈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일 대 일로

대결하고 나선 욱형이를 희롱하고 모욕하고 ....... "

" 희롱이라니요? "

" 천하에. 무림에서는 입 밖에도 내기 부끄러운 못된 짓을 그놈은 거침없이 했거든.

한마디로 말하자면 젊은 처녀의 가슴을 탐하고 심지어 젖가슴에 손을 데려는

음충맞은 짓을 ...... 다행히 우리편이 재빠르게 대응을 해서 욱형이는 봉변을 면하기는

했지만 ........... "

" .................... "

노영탄은 눈앞이 금세 아찔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었고 또 더 이상 묻고 싶지도 않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질 뿐.

탁창가를 따라서 묵묵히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은 딴 생각으로 만 가득찼다.

' 이런 일로 해서 감욱형이 온데간데 없어졌다면 ?

분노와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결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

이렇게 생각했을 때 노영탄의 눈앞은 캄캄했다.

그러나 자신이 목격하지도 못한 일이고 보니 감욱형의 그 후 행방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내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천암사 후원에는 숭양파의 선후배 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일제히 검정색 의복으로 무장을 갖추고 단정하고 엄숙하게 두 줄로 갈라서서.

그 가운대로 기다란 길을 틔어놓고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 기다란 가운뎃길 끝에는 향안이 한 자리 마련되어 있고.

그 위에는 과일이며 음식이며 여러가지 제물이 놓여 있었다.

굵고 기다란 향촉이 밝혀져 있는 옆으로는 향불에서 타오르는 서너 줄기 가느다란

연기가힘없이 피어올랐고 향탁 맨 가운데로는 자그마한 시렁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으며 그 시렁 아래에는 한 개의 위패가 단정히 놓여 있었다.

감공 영장지위(甘公 永長之位)

꼬불꼬불 가늘게 피어오르는 향불 연기 속에서 넓은 공간은 죽음과 같이 조용하고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철장단심 탁창가와 그 뒤를 따르는 몇 사람들이 훤히 트인 중앙의 통로로 길이

늘어서서 양편으로 갈라섰다.

탁창가는 엄중한 태도와 침통한 얼굴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향안 앞으로 나서더니 .

몸에 입고 있던 학창의를 벗은 다음 .

등에 메고 있던 누런 빛 비단 띠를 풀고.

저 사각형의 비단 함을 꺼내더니 정중하게 위패 뒤에 비어 있는 시렁 위에 모셔놓았다.

탁창가가 다시 옆에 늘어서 있는 사람의 행열 속으로 물러나오자.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제부터 삼가 고 감영장 동지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하오 !"

방곤 영감의 말이 끝나자 마자.

이엄숙하고 고요한 공기를 깨트리고 난데없이 들려오는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멀찍이 떨어진 제단의 정면으로부터 들려왔다.

두 사람의 숭양파 젊은 제자가 하얀 상복 차림으로 하나는 오른쪽 하나는 왼쪽에서

대력귀수 풍풍의 팔을 잔뜩 움켜잡고 곧장 향안을 향해서 달려나오는 것이었다.

' 바로 저놈이 ?  저런 천하에 음충맞고 악독한 놈이? '

한편. 사람의 행열 속에 끼여 서서 이 광경을 바라다보는 노영탄은 부지중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모든 일이 이미 지나갔으며 감욱형도 이 자리에 없고 또 대력귀수 풍풍은 위령제의

제물로 이 자리에까지 끌려 나온 마당이니 ........

노영탄은 타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면서 끌려 나오는 대력귀수 풍풍의 꼬락서니를 

묵묵히 노려볼 뿐이었다.

훤히 트인 길의 한편에서 .

두 젊은 제자들은 풍풍을 똑바로 일어켜 세웠다.

땅 위에는 이미 굵직하고 든든한 기둥이 마련되어 있었다.

두 제자들은 풍풍의 양쪽팔을 뒤로 돌려서 그 기둥에 묶어버리고 그의 머리털까지

글어올려서 기둥꼭대기에 달려있는 굵직한 쇠사슬에 칭칭 감았다. 

대력귀수 풍풍은 이미 급소인 혼수혈을 찔린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감욱형의 가슴을 주물러보려고  야비하고 엉컴스런 장난질을 치던이 악당도 이제는

어쩔 도리없이 정신이 마치 뼈가 없는 동물처럼 흐늘흐늘했다.

이때 상강조수 영감이 행렬에서 급히 뛰어 내닫더니 팔을 뻗어 풍풍의 목들미를

뒤에서 한 번 힘껏 후려첬다.

그제야 풍풍은 혈도가 트인 모양이었다.

숭양파의 젊은제자 한 사람은 한 사발의 냉수를 들고 불쑥 앞으로 내닫더니

입에다 찬물을 잔뜩 넣어가지고 풍풍의 얼굴에 대고 힘껏 뿜어주었다.

" 으흐흐흐흐흣 ! "

대력귀수 풍풍은 짐승의 처참한 비명 같은 음성을 내면서 전신을 오싹오싹 몇 번인가

떨었다.

그리고 나서야 맑은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하얀 상복을 입은 두 제자들은 다시 풍풍의 앞으로 우르르 달려들었다.

북!

좌우 양편으로 갈라서서 풍풍의 옷자락을 힘껏 잡아 젖혔다.

가슴팍에서 배 아래로 시커먼 털이 징글징글한 짐승의 털처럼 덥수룩한

풍풍의 상반신이 또한 짐승의 고깃덩어리같이 무시무시하고 우락부락한

육체가 그대로 들어났다.

대력귀수 풍풍은 자신의 되어가는 꼬락서니를 스스로 훓어보더니

이미 죽음을 면키는 어렵다는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입이 삐뚤어질 지경으로 한바땅 껄껄거리고 앙천대소를 했다.

그리고는 목청이 터져라고 악을 섰다.

" 네 이놈들!  너희들 늙은 놈들이 내 목을 밸 작정이지!  헤헤헤  .........

그렇다고 해서 네놈들만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다고는 생각지 마라 !

언젠고 반드시 누구든지 나를 대신해서 네놈들에게 원수를 갚을 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잊지마라 ! "

" 이놈아!  듣기 싫다 !  네놈의 죄를 네가 알 것이지 ......... "

" 여기까지 와서도 무슨 발악이냐?  네 소행을 생각해 봐라 !

젊은 아가씨의 몸에다 추잡한 손을 데려고 .........

이놈!  네 소행은 무림 전체의 수치요 모욕이다 ! "

벽력같은 음성이 분노에 부들부들 떨리는 두 젊은 제자들의 입에서 추상처럼

싸늘하게 터져 나왔다.

두 젊은 제자들은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긴장된 침묵 속에서 엄숙하고 단정하게 섰다.

소복을 입은 제자 가운데서 한 사람은 바로 감영장의 수제자인 하약신조 유갱이였다.

유갱은 별안간 땅 위에서 향안을 향하고 감영장의 위패 앞에 털석 꿇어앉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했다.

머리가 땅을 치도록 쿵쿵쿵! 절을 세 번이나 했다.

젊은 제자 유갱은 또다시 몸을 벌떡 일어켰다.

만면에 극도의 노기를 띤 젊은이의 얼굴은 잔인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 무서운 얼굴로 똑바로 앞만 노려보며 대력귀수 풍풍에게로  곧장 육박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간으로써는 가장처참한 장면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이 어린 처녀 감욱형에게 어려운 모욕을 주고 무림의 정신과 규칙을 어긴 대력귀수 풍풍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 길이었다.

" 에잇!  천하에 고얀 놈! "

극도로 긴장한 유갱의 얼굴빛은 새파랗게 변했으며 우렁찬 음성이 긴 했으나 부르르 떨려 나왔다.

솨악 !

별안간 소름 끼치는 매서운 쇳소리가 들렸다.

유갱은 허리에 차고 있던 서슬이 시퍼런 긴 칼을 단숨에 뽑아 든 것이다.

두 눈이 클 수있는 데까지 커다래졌다.

이를 악물었다.미친 사람의 부르짖음 같은 소리가 또 한번 터져 나왔다.

" 스승님!  스승님의 원수를 .......이제야 갚습니다 ! "

바로 그 찰나 예리하고 싸늘한 광체를 발하는 큰 칼이 번쩍하고 대력귀수 풍풍의 목들미를

단숨에 후려쳐버렸다.

" 으아아아악 ! "

대력귀수 풍풍이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부르짖음이였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유갱은 그 하얀 상복에 온통 뒤집어쓴 핏방울도 아랑곳없다는 듯 흘쩍 칼을 집어던지고

소매를 걷어올리더니 벌컥 앞으로 대들어서 풍풍의 머리를 선뜻 집어들었다 .

옆에 서 있던 또 한 제자가 준비해 가지고 있던 금쟁반을 얼른 내밀고 밑을 받쳤다.

감영장을 죽이고 또 그의 딸에게까지 모욕을 준 극악무도한 대력귀수 풍풍.

그도 이제는 한 개의 흙덩어리 같은 모가지로 변해서 감영장 위패가 서 있는 향안 위에

제물로 놓여졌을 뿐이었다.

금쟁반에 받친 풍풍의머리를 향안 위에 올려놓은 유갱은 벌컥 땅 위에 꿇어 엎드렸다.

" 으흐흐흐흣 !  스승님 ! "

그대로 목을 놓아 통곡하는 것이었다.

엄숙한 표정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서 있는 수많은 숭양파의 선배 후배 제자들의

얼굴에서도 두 줄기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이것으로 감영장의 위령제는 끝이났다.

 

탁창가는 즉시 제자들에게 향안과 위패를 물리고 자리를 깨끗이 수습하도록 명령하고

여러 사람의 앞으로 나서면서 자못 장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여러 선배님들. 그리고 여러 동지들. 이것으로 감영장 동지의 영혼을 다소나마

위로해 드렸다고 생각하오 !

그러나 우리 숭양파는 또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소 !

그것은 바로 악중악에 관한 일이오.

놈은 대담하면서도 경망스럽게 스승을 배반하고 숭양파의 전통을 모독하고 우리들의 보물인

옥룡검까지 훔쳐 가지고 달아났소 ! 

놈의 중대한 죄과는 도저히 용서할 도리가 없는 것이오 !

이후로 누구든 무릇 숭양파의 제자된 사람으로써 악중악의 종적을 발견하게 됐을 때에는

즉시로 사장에게 보고해 주기 바라오 . 반드시 그놈을 붙잡아 엄중한 징계 처분을 내려서

교규(敎規)를 바로 잡아야겠소.

놈을 알고도 은닉해 준다거나 그 소행을 비호해 주는 자가 있다면 엄중하게 처단할 것이오 !"

여기까지 말하고 난 철장단심 탁창가는 더 한층 그 태도가 정중해지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 우리 숭양파는 이제 결정을 내렸소 !  명년 9월 9일 중양절을 기해서 우리파 문하의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숭산 벽송관에서 집합하여 다음 대의 대표자의 위치를 계승할 만한 제자를

선출하기로 했으니 이점을 잊지 마시기 바라오 !"

 

한 동안 짧은 침묵이 흘렀다.

철장단심 탁창가는 웬일인지 여러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휘둘러보고 나서야 다음 말을 계속했다.

 

" 우리 숭양파의 진산지보인 『 숭양비급』은 실로 천하에 진귀한 보배요.

이것은 외부의 사람들도 보지 못했을 뿐더러.

우리 숭양파의 제자들도 과연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본 사람은 드물 것이오.

이제우리는 공전의 일대 결투를 치러고 난 이 마당에서.

마침 모든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고. 또 노 동지로 말하더라도 이미 외인이 아니니.

본인은 이제 대표자의 입장에서 이 진귀한 보물을 여러분 앞에 공개해서 보여드리고자 하오 ! "

탁창가는 말을 마치자 엄숙한 걸음걸이로 향단 앞까지 걸어갔다.

시렁 위에 올려놓아 두었던 비단 함을 선뜻 두 손으로 들었다.

' 흠 바로 저것이었구나 !  회양방 놈들이 바로 저것을 뺏지 못해서 눈이 뒤집혀 날뛰는 ......... "

숭양파의 모든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탁창가가 손에 들고 있는 비단 함을 주시했다.

노영탄도 역시 신기하다는 안광으로 그 사각형 함을 주의해 보고 있었다.

누구나 한번 보고 싶어서 갈망해 마지않던 물건 .

강호 천지에서 희세의 진귀한 보물이라 일컫는 이 기서(奇書)

그것은 과연 어떻게 생긴 책자일까?

그것은 과연 무슨 현묘한 점을 지니고 있다는 건가.

여러 사람들의 눈초리는 극도의 호기심으로 불붙고 있었다.

탁창가는 두 손으로 그 비단 함을 떠받들어서 정중하게 향안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신성불가침한 물건을 함부로 다치기 황송하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하고 조신조심 거죽을 싸고 있는 누런 비단보를 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마치 한 자루의 화살처럼 그곳으로 만 꽂혔다.

여러 사람들의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기침소리 한번 들리지 않는 조용하고 긴장된 공기 속에서

탁창가는 오른쪽 팔을 뻗어서 그 비단 함의 맨 위를 덮은 뚜껑을 가만가만히 열었다.

이 천하에 희귀한 지보를 만인 앞에 처음으로 공개하려는 순간.

탁창가는 비단함 속에 이중으로 장치되어 있는 또 하나의 속 뚜껑을 조심조심 열어보았다.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탁창가는 별안간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숨이 막힌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앞으로 내밀었던오른손의 맥이 탁 풀리며 그대로 뚝떨어져버릴 것도 같더니.

주춤하고 급히 뒤로 물러나가 버렸다.

" .................. "

입을 벌릴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마치 무슨 기막히게 무서운 물건을 건드리다가  캄짝 놀라서 손을 떼고 물러서려는

그런 놀라운 표정이었다.

그의 예리한 안광도 순식간에 흐리멍텅해지는 것 같았다.

얼이다 빠져버린 사람처럼 어리둥절해서  멍하니 서 있는

그의 얼굴빛은 점점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옆에 서 있던 낭월대사와 송운상인 두 영감이 그 광경을 보자

깜짝 놀라서 급히 앞으로 내달았다.

두영감들은 영문도 모르고 이편 저편에 서서 동시에 그 비단 함의 속뚜껑을 가만가만히

열어보았다.

" 아니 !  이럴 수가? "

그들 두 사람도 역시 탁창가와 마찬가지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하고

너무나 놀라운 사실 앞에 이렇게 외마디소리를 외쳤을 뿐.

향안 옆으로 물러서서 어리둥절해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천하에 희귀하다는 보물의 정체를 구경하고자하던 여러 사람들은 더 한층 긴장하면서.

괴상하고 놀라운 이 사태에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 도대체 비단 함 속에 무엇이 들었기에 ? '

여러 사람들이 일시에 우르르 앞으로 몰려들었다.

향안을 둘러싸고 목들을 길게 뽑았다.

노영탄도 향안에서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았다.

그 역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일종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여러 사람들 틈에

끼여서 앞으로 나섰다.

깊고깊은 우물 속이라도 들여다보는 것처럼 향안으로 몰려든 여러 사람들의 머리가

그 비단 함을 들러싸고 지극히 짧은 동안이기는 했으나 긴장된 눈초리로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들이 또한 일시에 벌떡 들리며 뒤로 물러났다.

' 으응? '

아무도 입을 벌리지 못하고 극도의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비단 함 속에는 비급도 아무것도 없었다.

속이 텅 빈 함이 그들의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홀연 젊은 제자 하나가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 이거. 이건 뭘까요? "

젊은 제자는 그 텅 빈 함 속에서 단지 한 장의 조그마한 종이쪽을 찾아낸 것이었다.

여러 사람들은 또 한번 깜짝 놀라면서 일제히 그편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 종이쪽에는 간단히 몇 자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탁창가는 간신히 정신을 회복한 듯. 다시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철장단심 탁창가는 비단 합 속에서 발견해 낸 종이쪽을 받아들고 전광석화 같이

빠른 눈초리로 단숨에 훓어보았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또 한번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단 합 속뚜껑을 열어보았을 때보다도 더 큰 놀라움이 그의 얼굴빛을

또 한 번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만들었다.

탁창가는 묵묵히 그 종이쪽을 등들미 쪽에 서 있는 낭월대사에게 넘겨주었다.

삽시간에 여러 사람들이 낭월대사를 둘러싸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체 종이쪽에는 무엇이 적혀 있기에? '

그것을 받아든 낭월대사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수많은 시선이 화살처럼 꽂히는 그 조그마한 종이쪽에는 지극히 간단 명료하게

몇 자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책자『 숭양비급』은 심히 죄송한 일이오나.

불초 제자 악중악이 소용이있어 가지고 감니다.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