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16장 검광도영(劍光刀影)

오늘의 쉼터 2013. 12. 12. 23:30

정협지(情俠誌) 3권

 

제 16장 검광도영(劍光刀影)

 

 

숨겨진 계략

 

 

이렇게 두 진영의 결투가 치열해져가고 있을 때.

앵무주 동서 양편의 기괴하게 생긴 바윗돌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두 개의 조그마한 섬 위에는 동시에 두 사람의 종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쪽 조그만 섬  위에 나타난 것은 가냘프게 생긴 여자의 그림자였다.

이 여자의 그림자는 이미 섬 위의 바윗돌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 있었다.

이 여자는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털과 옷자락을 나부끼면서 고개를 수그리고

자기 발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수 수면에서 백 수십 장 거리나 떨어져 있는 높은 곳이었다.

파랗게  그리고 거울처럼 조용하게 가라앉은 호수는 마치 두 팔을 넓게 벌려서

이 여자의 그림자가 자신의 가슴속으로 뛰어들기를 기다리고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여자는 다름아닌 바로 감욱형이었다.

푸른 호수의 수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감욱형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해 졌다.

문득 고개를 돌려 섬 위를 멀리 바라다보았다.

싸움터 넓은 광장에서는 바이야흐로 숭양파와 회양방이 서로 대치하고 서서 .

수많은 사람들이 맹렬히 싸우고 있는 광경이 한 폭의 움직이는 풍경화같이

감욱형의 시야 속으로 뚜렷이 들어왔다.

' 그만두어라 !  이제 모든 것과 마지막 하직이다 !

은혜도. 원한도. 인정도. 원수도. .........

한번 이 아래로 뛰어들기만 한다면 ............

이 조용하고 맑고 서늘한 호수는 나의 온갖 근심 걱정을 깨끗이 씻어주리라 !

그리고 나는 길이길이 넓고 시원스런 푸른 물결 위에 누워서 잠들고 말 것이다! '

이렇게 생각했을 때 감욱형의 얼굴엔  그저 눈물만이 흘러내려 앞을 몽롱하게

가릴 뿐이었다.

어지럽고 허전하고 쓸쓸하고 경황없는 심정으로 맑은 바람에 머리털을 나부끼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바윗돌의 끝닿는 곳까지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마침내 감욱형은 앙칼지게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눈을 꼭 감았다.

단숨에 몸을 날려 천야 만야한 아래로 뛰어들려는 찰나.

감욱형은 뜻밖에도 어떤 억센 바람의 힘이 가로마고 덤벼드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무지 몸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발을 조금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 이게 무슨 까닭일까?

  어째서 전신이 말뚝이 박히듯 한 곳에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일까?'

감욱형이 하도 이상스러워서 다시 두 눈을 살며시 떴을 때.

난데없이 등들미로부터 이상한 사람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다.

" 애!  이것은 네가 취할 길이 아니다! 옳은 처사가 아니다! "

'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의 음성이 들릴 수 있을까?

  또 그 음성은 분명히 나를 부르고 있으니 .......... '

감욱형은 가슴이 선뜻해저 사람의 음성이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리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등들미에 있던 바윗돌 위에는 한 중년 부인이 서 있지 않은가 !

그 중년 부인은 나이가 사십 전후쯤 되어 보였다.

미목이 청수하게 생긴 깨끗하고 말쑥한 얼굴에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

맑게 가라앉은 두 눈에서는 인자한 사랑과 동정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윗돌 위에 말없이 태연하게 서 있는 그 여자는 전신에 눈처럼 하얀 옷을

입고 있었으며 호수의 바람을 맞아 펄럭거리는 옷자락에 아침 햇살이

밝게 비치니 그모습은 마치 관세음 보살이 살아서 나타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중년 부인이 방금 감욱형에게 던진 몇 마디의 말은 무한한

자비심과 동정심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확고부동하고 든든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감욱형은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 바라다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이 중년 부인이 어디로부터 나타났는지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이 중년 부인은 정말 사람일까?  나에게 무엇을 얻어려 온 보살일까? '

감욱형은 우선 이런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치 않다면야.

감욱형이 이곳까지 기어 올라왔을 때.

단 하나의 사람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중년부인도 몸을 돌리는 감욱형을 바라보더니 

역시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얼굴을 쳐들더니 생끗 가볍게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 애. 현실을 도피한다는 것은 슬기로운 방법이 아니다. 

아무 보람도 없는 일이지 ..........

너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어째서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못 하는 거지? "

감욱형은 또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마치 꿈속에서 깨어난 사람같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때 감욱형은 뜻하지 않은 어떤 구세주가 눈앞에 나타난 것같이 가슴속이 활짝 트이는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 중년 부인은 신선이 아니면 이 속세와는 전혀 다른 어떤 알지 못할

세상에서 나타난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 눈앞에 나타난 하느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를 어찌 가만히 앉아서 놓쳐버릴소냐?'

또 그 중년 부인의 말투를 들어보면 분명히 감욱형에게 어떤 곤란한 일이 있음을

미리 알고서 특별히 구해주고자 이곳에 나타난 사람 같았다.

이렇게 판단을 내렸을 때.

감욱형은 한시라도 머뭇거릴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급히 공손히 몸을 굽혀 절하며 말했다.

" 선배님은 뉘신지요? 이 후배는 감욱형이라 하옵니다. "

그 중년 부인은 몹시 기특하다는 듯 묵묵히 감욱형의 다음 말만을 기다리고 있았다.

무엇이라 대답이 있음직한데 통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 중년 부인을 보자.

감욱형은 멈짓하고 하던 말을 끊어버렸으나.

이왕 내킨 걸음이다 생각하고 용기를 내서 다시 말을 했다.

" 신변에 도무지 감당키 어려운 곤란함이 있어서 ..............

생각다 못 하여 이렇게 어리석은 짓으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보려고 한 것뿐입니다! "

이말을 듣더니 그 중년 부인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 너의 내력은 이미 내가 알고 있다 .

또 너와 나와는 인연이 있는 사람이니 응당 한 번은 만났으야 할 사람이었다.

내 이름은 악청룡(岳菁蓉)이라고 한다.

아마 너는 잘 모르겠지만 .........

그러나 너도 일찍이 '살아있는 보살(活觀音)' 이라고 일컷는 분의 성명 석 자쯤은 

들어본 일이 있을 텐데?  그노인이 바로 나의 사부님이시다. "

감욱형은 그 중년 부인의 이런 말을 듣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에서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도 어리둘절해서 멍하니 그 중년 부인의 얼굴만 바라볼 뿐 

마치 얼이 다 빠진 사람 같았다.

감욱형으로서는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평소에 강호에서 신화 속에 나오는 인물에 가까운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이라고 일컫는

정인신니(靜因神尼)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자주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 바로 그 놀라우신 분이 .

바로 내가 눈앞에 뚜렷이 보고 있는 아리따운 중년 부인의 사부님이 되신다니!

그렇다면 이 중년 부인의 무술이 얼마나 탁월하고 기막힐 것인지는 가히

짐작할 수 없는 바 아니냐 !

이렇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감욱형에게는 또 한 가지 알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 정인신니라는 분은 숭양장로와 연령이 비슷했고  또 두 분은 파니 무술이니 하는

테두리를 벗어나 불도로써 사귄 사이였는데 ...........

악청룡이라는 이분이 정말 활관음 정인신니의 제자라면 적어도 그 나이가 6.70세는

되었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이렇게 젊으신 분이 ?'

그러나  악청룡은 한동안 묵묵히 감욱형을 살펴보더니

벌써 그 마음 속을 꿰뚫고 들여다보가라도 했다는 듯이 .

또 한 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하하.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  나는 올해 꼭 예순 살이다.

너희들의 전대 (前代)의 대표자이던 창랑거사 황보자우 하고도

나는 상당히 친했었는데 ........... "

이렇게 말하더니 악청룡이라는 그 중년 부인은 점점 더 미소를 금치 못하면서

상냥스러운 음성으로 감욱형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이었다.

" 너는  바로 너의 아버님의 원수를 갚아보겠다는 거지?

그렇다면 너는 다시 무예를 더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

이렇게 되고 보니 감욱형은

그 이상 무엇을 더 망설이고 의심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곧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감욱형은 꿇어앉은 채 경건하고 진실된 태도로 악청룡이라는

중년 부인을 처다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 저 같은 몸이 대선배님의 눈에 들어서 제자가 될 수 있다 하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만일에 정말 선배님의 문하생으로 삼아주신다면 어찌 감히 전력을 기울여

공부하지 않겠습니까? "

중년 부인 악청룡은 손을 내밀더니

감욱형의 손목을 잡아끌면서 또 이렇게 말했다.

" 요즘 무림은 파벌이니 당파니 계통이나 하는 것으로 어지럽고 시끄럽다.

네가 만일에 나의 문하생이 되어 들어온다면 너는 무엇보다도.

이런 파벌이니 당파니 하는 관념에서 초월해야만 된다.

이전의 문호(門戶)적인 편견을 다시 마음속에 티끌만큼이라도 지니고

있어서는 못쓴다.

알아듣겠느냐?

그리고 또 능히 이런 초연한 태도로 실력을 연마하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일 수 있겠느냐? "

감욱형이 악청룡 부인의 말을 들어며 한편으로 곰곰 생각해 보니

이것은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기연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어찌 이런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그대로 놓쳐버릴 수 있을 것이랴?

감욱형은 전후를 헤아리거나 무엇을 망설일 생각도 없이 선듯 대답했다.

"삼가 분부하신 대로 만난을 무릅쓰고 실천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 "

싸늘한 표정으로 감욱형이 어렇게 대답할 것인가 하고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던

중년 부인은 그제서야  또 다시 싱끗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  너만큼 천부의 자질을 갖추었으면 ..........

또 너는 이미 무술에 있어서는 상당한 기초를 닦았으니까 ...........

머지 않아서 조화의 오묘한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너는 모름지기 이 길에 전심전력 일체의 다른 잡념은 깨끗이 버리고 .........

절대로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

되는 대로 해보겠다는 그런 정신이나 태도를 가지면 안된다.

내말을 잘 알아듣겠느냐?

자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너라 ! "

중년 부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감욱형에게 한 번 손짓을 해서 부러더니

곧 오른쪽에 있는 바윗돌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감욱형이 그 중년 부인을 보니

그 부인은 몸을 돌려 바위에서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오른쪽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감욱형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 어째서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여기서 어디로 더 올라가는 것일까?'

이렇게 심히 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감욱형은 감히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그 중년 부인의 뒤를 바싹 따라갔다.

그런데 큰 바윗돌 하나를 돌아서 지나쳤을 때 별안간 앞에 가던

그 중년 부인 악청룡의 종적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뒤를 쫒아가던 감욱형이 머리를 잠깐 수그렸다가 다시 쳐드는

눈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 이상한 일인데? 그부인은 어디로 숨어버렸을까? '

아무리 머리를 쳐들고 휘둘러보아도 그 중년 부인 악청룡의 그림자는

어디서도 찾아낼 수없었다.

감욱형의 노라움은 점점 더 커졌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

한편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에 겁이 나기도 했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종적을 감춰버리다니 ?

도깨비란 말인가 ?

그렇지 않으면 귀신이란 말인가 ?

여태까지 한 말은 허수아비하고 한 말일까 ? '

감욱형이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어리둥절해진 눈초리로 겁을 집어먹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망설이고 있을 때 홀연 고개를 쳐들어 보니.

앞으로 바라다 보이는 맨 꼭대기 한 군데 커다랗게 위로 쑥 삐져나온

바윗돌 위에서 그중년 부인 악청룡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 빨리 날 따라오너라! 이쪽으로 걸어와야 한다 !"

그때까지도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

그 음성 만을 듣고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음성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빨리 쫒아갔다 .

그때서야 비로소 그 주변의 지세를 똑똑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래 감욱형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바윗돌의 위치는 이미 그 바윗돌의 맨 끝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며.

그것이 또한 칼로깍아 세운 것 같은 절벽 아래였다.

바위 아래로부터 통해올라오는 한 가닥 좁은 길을 빼놓고는

사면으로 길이 없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야말로 입족(立足)할 만한 여지도 없는 곳이었다.

한편으로는 깍아 세운 것 같은 절벽에 푸른 이끼와 잡초가온통 깔렸을 뿐이요.

또 한편으로 시선을 옮기면 바로 백장정도 더 돼 보이는 천야만야한 허공에

큼직한 바윗돌이 둥둥 떠 있어 간신히 그림처럼 걸려 있는 것이다.

아래로 눈을 깔면 호수의 검푸른 물이 있을 뿐 .

분명히 길 같은 것을 찾아낼 수 없는 곳이었다.

' 그런데 악청룡이라는 저 부인은 어떻게 이곳을 지나서 앞으로 나아갔을까? '

감욱형은 그때까지 그 한 가닥 좁은 길에서 정신없이 악청룡이라는 중년 부인만

목표로 하여 뒤를 바싹 따라가느라고 주변의 지세를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자연 아무런 이상한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는 더 나아갈 만한 길이 끊어져버린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보니

악청룡이란 부인이 앞에서 부르고 있는 음성을 듣기는 했으나 .

어떻게 몸을 움직이고 어떻게 기어 올라가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에는 여태까지 밟아온 좁디좁은 한 가닥 길이 있을 뿐.

다른 길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좌우전후를 두루살펴보고 난 감욱형은 .

까닭을 알 수 없는 의심스러운 마음에 또다시 극도로 초조해질 뿐이었다.

' 어떻게 음성이 들리는 곳을 찾는다? '

감욱형은 무의식 중에 고개를 쳐들고 앞을 바라봤다 .

별안간 감욱형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기이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감욱형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그 바윗돌 위 머리를 두고 있는 방향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깍아 세운 듯이 미끄럽고 평탄한 절벽 위에는

굴이 하나 뚫어져 있었다.

한사람의 몸뚱이만한 커다란 굴이었다.

그 굴을 찾아내자 감욱형은 문득 이렇게 깨달았다.

' 옳지 ! 악청룡이란 부인은 반드시 이 굴속을 뚫고 나갔을 게다 !

그리고 이 굴 뒤편으로는 아마 길이 있어서 앞에 있는 큰 바윗돌까지

돌아갈 수 있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 '

감욱형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한 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동굴은 감욱형의 머리 꼭대기에서 약 1장 쯤 거리를 둔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는 하지만 그 언저리는  온통 손도 대보기 어려운 만큼 미끄러운

이끼가 깔려 있어서 흘쩍 몸을 날려 단숨에 뛰어 들어가는 방법 이외에는

절대로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갈 도리는 없었다.

이때 감욱형은 용감하게도 숨을 죽이고 정신을 바싹 차린 뒤.

전신의 기운을 다해서 두 발에 힘을 모아 가지고 몸을 위로 솟구쳤다.

솟구쳐 오른 몸이 날듯 그 동굴의 언저리를 스쳤을 때.

감욱형은 번쩍하고 번갯불처럼 두 팔을 별려 가지고 허리에 힘을 주어서 한번 꿈틀했다.

몸을 다시허공 속에서 평ㅍ평히 뉘어 가지고 동굴 입구를 정확하게 계량한 다음.

마치 꽃 속을 꿰뚫는 나비와도 같이 머리를 앞으로 발을 뒤로 하고 동굴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몸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감욱형은 곧 다리를 구부리고 가슴을 움츠러뜨려서

가볍고 날센 동작으로 발을 디디고 섰다.

그제서야 그 동굴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과연 그 동굴로는 한가닥 길이 통해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한쪽 끝이 바로 그 바윗돌 뒤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감욱형은 재빠르게 뚫고 나갔다.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 나가 그 동굴을 완전히 꿰뚫고 나갈 수 있을 만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눈앞이 훤히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 스승 악청룡이 한 옆에 서서 웃어가며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 하아 ! 너는 그래도 어지간히 찬찬하고 조심스러운 아이다 !

하지만 너는 내가 굴 속으로 들어간 줄만 알았겠지?

이건 네가 주의가 부족한 탓이다.

이후부터는 더욱 조심해야 돼 !"

스승 악청룡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감욱형은 부지중 얼굴이온통 새빨개졌다.

그리고 더욱 조심조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방을 자세히 휘둘러보았다.

차차 주변의 괴상하게 생긴 바윗돌들의 위치와 모습이 또렷하게 눈앞에

드러나는 것이었다.

중년 부인 악청룡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곳은 .

또 한 덩어리의 거창하게 커다란 바윗돌이었다.

앞으로 바라다 보이는 또 하나의 바윗돌과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쳐다보며

대치하고 서 있는데 이바윗돌과 바윗돌 사이는 깊숙히 패어져서 .

그속에 사람이 들어서 있다 해도 다른 바윗돌 편에서는 찾아낼 수가 없게 되어 있다 .

이런 까닭으로 조금 전에도 악청룡이 마치 보이지도 않는 바윗돌 속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었다.

또 이 바윗돌들은 그 위치가 상당히 높은 곳에 있으며 .

똑바로 동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햇빛을 정면으로 쬐서 번쩍번쩍 눈부신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앞으로 바라다 보이는 또 하나의 바윗돌은 햇빛을 한쪽으로 등지고

있기 때문에 어두컴컴하고 음울해 보였다.

이렇게 자세한 지세를 살피고 나니.

감욱형은 가슴속이 후련해지고 정신조차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때 스승 악청룡의 말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시간이 이미 꽤 오래됐다.

우리는 곧 여기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자.

여기까지 온 길을 잘 기억해 둬야 한다! "

이렇게 말하며 감욱형의 손을 잡아 끌고 절벽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 절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 너는 이곳 지세를 자세히 보아두어야 한다

여기서 바윗돌 꼭대기까지 가려면 아직도 삼십육 장이나 되는높이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절벽의 바윗돌로 말하면.

그 위에 천 년 묵은 이끼가 온통 빈틈없이 뒤덮이고 깔리고 해서 절대로

그것을 스쳐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유용술(遊龍術)이니. 벽호공(壁虎功)이니 하는 술법이 아무리 높다 해도

여기서는 써볼 도리가 없다 .

단지 몸에 지니고 있는 진기의 힘에 의해서만 .

절정에 다다른 경신법으로만 위로 비약해 올라갈 수 있을 뿐이다 !"

악청룡은 여기까지 말하고 감욱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 뭐 그다지 놀랄 것은 없다. "

극도의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도 벌리지 못하는 감욱형을 보자

악청룡은 이렇게 한마디를 던지더니

입가에 인자한 웃음을 띠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 이 삼십육 장이나 되는 높이를 단숨에 뛰어오르거나 날아서 올라간다는 것은

너는 그만두고 나로서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너한테 주의를 시켜두는 거다 왕년에 나의 은사이신 정인신니 노인께서는

사해를 훨훨 구름처럼 돌아단니시며 유력(遊曆)하시다가.

이 바윗돌을 발견하시게 되자.

그 자리에서 곧 이 바위돌 틈에 숨어서 아무도 모르게 도를 닦으실 결심을 하시고

두 번 다시 시끄러운 세상에 내려가지 않을 작정을 하셨던 것이다. "

' 우주와 자연 속에는 이렇게 기이한 조화도 있는 것인가 ! '

감욱형은 사방을 휘둘러보면 볼수록 바윗돌들이 신기하게 자리잡고 있는 품이

감탄할 뿐이었다.

정말 기적이 당장에 일어날 것만 같은 곳이었다.

악청룡은 천천히 발을 옮겨놓으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정인신니 스승께서는 이 바윗돌 꼭대기에 한 군데 조용하고 깨끗하게

도를 닦을 수 있을 만한 곳을 물색해서 터전을 마련하셨으며.

동시에 그곳에 오르내리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

백련 천련(百鍊千鍊) 불에 달구고 달군 단단한 강철을 구하시어 아홉 개의

쇠말뚝과 쇠줄을 만드신 것이다.

그것을 다시 금강대력(金剛大力)의 놀라운 수법을 쓰셔서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강철 말뚝을 절벽을 뚫고 박아놓으셨으니.

그것은 4장의 길이를떼어놓고 1개씩 그러나 겉에서 보면 단지

이말뚝을 연결하고 있는 강청 줄만이 보일 뿐이다.

너도 그것이 보이지는 않을 게다 !"

여기까지 말하더니.

악청룡은 한 손을 들어 절벽을 가리키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 이 아홉 개의 강철 말뚝과 강철 줄들은 그 빛깔이 이끼와 똑같아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절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어디 한번 올라가 보련?

몸 안의 진기를 한 곳에 바싹 모아 가지고.

강철 줄의 위치를 똑똑히 보면서.

4장을 뛰어넘을 때마다 숨을 한 번씩 쉬고 .

한 발 한 발씩만 이 강철 줄을 디딜 수 있는데 .

다소 힘이 드는 노릇이긴 하지만 두 다리를 떼어놓는 순서를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흐트러지거나 틀려서는 큰일이란 말이다.

다리를 떼어놓는 순서가 흐트려지면 당장에 힘이 그 균형을 잃게 되어서 중도에

천야만야한 절벽 아래로 추락해 버리게 마련이니까 ............ "

이 무시무시하고 아슬아슬한 바윗돌의 통로를 설명하면서도

악청룡은 태연자약하게 미소를 띠고 털끝만큼도 흐트러짐이 없이

감욱형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계속해 나갔다.

" 하하하 ......  그다지 놀랄 것은 없대두 .......

우선 내가 올라가는 것을 한번 보아라.

그러나 만일 네가 힘에 부칠 것 같으면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

내가 꼭대기에서 활차(滑車)로 너를 달아 올릴 수도 있으니까 ........ "

악청룡은 말을 마치더니 가벼운 음성으로 얌전하게 명령했다.

" 주의해 ! 이걸 봐 ! "

소맷자락을 훌쩍 !  바람처럼 한번 휘두러기가 무섭게 .

악청용은 당장에 몸을 허공으로 날아 올렸다.

무슨 기운을 뽐내거나 손짓 발짓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데.

그 몸이 날쌔기가 마치 놀라서 흩어지는 기러기와 같고.

민첩하기가 날아가는 새와도 같았다.

한 번 껑충 몸을 솟구쳐는데 그 높이가 이미 12장이나 되었다.

단숨에 강철 말뚝 두 칸의 줄을 거침없이 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숨쉴 만한 여유도  주지 않게 날쌔고 빠른 경신법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재간이다.

단숨에 4장 거리나 되는 강철 말뚝과 말뚝 사이를 네 칸이나 뛰어 넘고도 

악청용은 몸이 흔들리거나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고 행동은 털끝만큼도

쉬는 법이 없었다.

또다시  세 번째 간격을 뛰어넘을 때는 악청용은 오른쪽 발로 강철 쇠줄 위를

살짝 스치는 척하고  두팔을 아래로 늘어뜨려서 무엇을 누르는 척 하더니

그대로 전신이 갑자기 허공으로 훌쩍 나는 것이었다.

단숨에 강철 줄 두 칸을 거침없이 넘었다.

여섯째 칸에 이르러서야 악청용은 다시 왼쪽 발을 디디고 연거푸 위로 몸을 날렸다.

아홉째 말뚝이 있는 강철 줄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맨꼭대기에 접근해 있었다.

악청용은 몸을 한번 꿈틀하더니 어느 틈엔지 그대로 바윗돌 위에 흘쩍 내려서는 것이었다.

감욱형은 아래에서 머리를 쳐들고 위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긴장과 놀라움과 존경으로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을 뿐

완전히 자신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런데 다시 내려올 때는 무슨 방법으로 내려오는 것일까?'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돌연 귓전을 스치고 들려오는 가느다란 음성이 있었다.

그 음성은 가느다랗고 낮으면서도 아주 똑똑하게 들렸다.

"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아라 !  내가 어떻게 내려가나 ..........."

감욱형은 또다시 머리를 쳐들고 위를 쳐다보았다.

악청용은 바윗돌 맨 꼭대기에서 멀리멀리 감욱형을 바라다보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할 뿐이었다.

이야말로 스승 악청용이 천 리를 갈 수 있는 독특하고 놀라운 음성으로

자기에게 말하는 것이요.

또 고개를 한 번 끄덕하고 손을 한 번 휘두러기만 해도 그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신기하고 오묘한 힘이라는 것을 감욱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악청용은 바윗돌 맨 꼭대기에서 아래로 흘쩍 뛰었다.

몸은 허공에 떴으면서도 거꾸로 뒤집혀졌다.

머리가 아래로 내려가고 다리는 위로 올라가고 마치 옥녀가 제비처럼 물을 차며

날아가는 것같이 곧장 바위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세 번째 강철 말뚝이 있는 쇠줄에 다다랐을 때는 또다시 갑작스레 몸을 뒤집어

그위치를 바꾸었다.

머리가 위로 가고 다리가 아래로 오는 원래의 자세를 회복하더니 

오른쪽 손을 뻗어서 강철 줄을 움켜잡고 잠시 몸을 쉬고 나서 여전히 그것을

놓아버리고아래로 곤두박질쳐서 내려왔다.

똑같은 방법을 되풀이하기를 세 번.

악청용은 처음과 같이 감욱형의 신변에서 가까운 바윗돌 위에 내려섰다.

얼굴빛은 티끌만큼도 변함이 없었다.

숨도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부드러운 웃음을 만면에 드러내며 감욱형에게 말했다.

" 나의 몸 쓰는 법을 보았지 ?  어디한번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

물론 나도 이걸로써 네가 얼마만한 경신법의 재간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구경하고 싶기도 하고 .........

그러나 대단할 것은 없다.

정신을 진정시키고 침착하게 차근차근 한 칸에서 한 번씩 몸을 날리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 "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는 눈초리로 감욱형을 바라다보고 있는 스승 악청용의

모습은 감욱형에게 지대한 격려와 고무를 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감욱형으로 하여금 갑자기 온갖 용기를 용솟음쳐 오르게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느낀 감욱형은 공손히 대답했다.

" 이 제자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 "

악청용은 이 말을 듣더니 만면에 자상한 미소를 띠고 대견하다는 듯

서슴치 않고 이렇게 말했다.

" 좋아 ! 대담하면서도 조심성 있고 차근차근히 ..........

정신을 깨끗이 가라앉히고 추호라도 당황해하지 말고 ............

이런 점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 "

감욱형은 등에 메고 있는 보검을 잔뜩 졸라매고 몸차림을 단단히했다.

몸 안에 지니고 있는 진기를 불러일어키고 숨을 죽이고 온갖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서 아홉 개의 강철 말뚝과 강철 줄의 위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번쩍 !

별안간 몸을 움츠렸다가 허공으로 솟구쳐서 단숨에 4장이나 되는 높이로 몸을 뽑았다.

그리고는 방금 스승 악청용이 몸을 쓰던 방법대로 오른쪽 다리를 뻗어 강철 쇠줄 위를

정확하게 디디고 그 틈을 타서 숨을 돌리고 힘을 늦추면서 두 팔을 아래로 누르는

듯하다가 또다시 몸을 펄쩍 날렸다.

감욱형은 모든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했다.

한눈 하 번 팔지도 않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위만 바라다보고 몸을 솟구쳐 올려 아홉 번째 강철 말뚝이 있는

쇠줄에다다랐을 때에야 살짝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발끝으로 가볍게 쇠줄을 디디고

다시 허리에 힘을 주어한번 버티고 불끈 솟으니

그때 벌써 바윗돌 위에 날아들 듯이 올라가 있었다.

감욱형이 막 몸을 가누고 꼿꼿이 섰을 때 난데없이 등덜미에서 쏴! 하는 바람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급히 머리를 돌려 바라다보니 스승 악청용이 어느 틈에 쫓아 올라왔는지.

만면에 웃음을 띠고 한 옆에 서서 몹시 기쁜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 너의 담력도 어지간하구나 ! 경신볍도 이미 상당한 기초를 쌓았고 ...........

확실히 될성부런 재목이다 ! "

말을하면서 악청용은 벌써 감욱형을 데리고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이때에야 감욱형은 또다시 이곳의 지세를 사방으로 자세히 살펴 보았다.

바윗돌 맨 꼭대기 면적은 그다지 좁지 않았다.

대략 10여 평이나 됨직하게 널찍한곳이었으며

그 형상이 마치 사발이나 대접을 엎어놓은 밑바닥 같아 보였다.

사면으로는 바윗돌들이 불쑥불쑥 삐져 있고 언저리로는

백 장도 더 돼 보이는 절벽과 비탈과 낭떠러지 뿐이었다.

그 한 가운데로는 역시 꽤널찍한 평지가 한 군데 있고 거기에는

온갖 기이한 꽃과 풀들이 가득 깔려서 자라나고 있으니

마치 하늘 밖의 선경(仙境)과 같은 곳이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면 바위 꼭대기 언저리에는 언제나 흰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서 감돌고 있으며 물 위에는 때없이 갈매기가 훨훨 시원스럽게 날개를

펼치며 넘나들고 있었다.

고개를 쳐들어 위를 바라보면 무변대하게 펼쳐진 창궁(蒼穹).

아래를 굽어보면 호호탕탕한 벽파(碧波) 금빛으로 번쩍이며 출러거리는 물결.

끝닫는 데를 찾을 수 없었다.

하늘 밑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경지였으니

도를 닦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바위 꼭대기 평지에는 두 채의 아담하고 정갈한 방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악청용이 거쳐하는 곳이다.

스승과 제자 둘은 곧 그 안으로 들어가 몸을 쉬기로 했다.

이리하여 감욱형은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이 바위 꼭대기 별천지 속에서

악청용을 따라 무예의 연마에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심혈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한편 앵무주에는.

숭양파와 회양방의 결투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금모사왕 오빈기와 그가 초청해 온 마귀 두목 같은 위인들은 이 계교 저 궁리를

짜본 결과 그들의 전 진영을 총동원해서 일시에 자웅을 겨루어볼 작정을 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이 순조롭게 선뜻 감행될 리가 없었다.

그들 수많은 마귀 두목 같은 위인들은 한 놈 한 놈 모조리『숭양비급』이라는

책자를 제 손아귀에 넣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표면상으로는 이런 눈치를

티끌만큼도 드러내지 않고 막상 싸움터에 나서야 할 차례가 되면 이놈이

저놈에게 미루고 저놈은 저놈대로 꽁무니를 슬슬 빼는 형편이었다.

마침내 금모사왕은 비장한 결심을 했다.

한파의 두령으로써 과감히 모든 부하들을 제쳐놓고 진두에 혼자 나서서

탁창가와 대결해 볼 결심을 한 것이다

' 흐음. 비급하고 엉큼스런 놈들 ! 고수라고 대접을 해서 초청해다 놓으니까.

야심은 다른 데로만 쏠려 있고 ...........

용감히 내달아 싸울  생각을 하는 놈은 없어니 ..........

어림없는 놈들 ! 내가 죽 쑤어서 개 좋은 일 할 줄 아느냐?'

금모사왕 오빈기는 벌써부터 이 마귀 같은  놈들의 딴 속셈을 꿰뚫고 들여다보듯이

잘 알고 있었으며 이렇게 마음속으로 놈들을 조소하고 있었다.

또 오빈기 자신도 혼자만의 딴 궁리를 하고 있는 지라 .

얼굴빛 하나도 변함이 없이 태연자약하게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좇아 선뜻

태도를 결정한 것이다.

한편 홍의화상과 철기사는 꽤 오랫동안 다투어 보았지만 둘이 다 만만치 않은

적수인지라 좀처럼 승부가 나질  않았다.

홍의화상 우람부루는 이미 그의 유일한 무기 저 악독한 용연선독장을 한번

뽐내며 써 보았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었다.

철기사 운천고는 추호도 괴로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끄떡없이 대항해 내는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본래 철기사 운천고는 일찍부터 홍의화상이란 위인이

독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 철기사는 이 따위 독기쯤은 문제없이 막아낼 만한 묘한 방법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약 10여 년 전에 철기사는 일찍이 운남성과 귀주성의 접경 지대 큰 산 속 깊은

가시덤불 속에서 열두 개의 쇠골패짝을 가지고서 무시무시하게 거창한 구렁이의

아가리로부터 그곳 로로족의 추장 한 사람의 목숨을 살려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철기사 자신도 그 구렁이의 독기를 쐬고 쓰러져버렸다.

이렇게 되자 그 로로족의 추장이라는 사람은 철기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의 조상 때부터 천 년이나  전해 내려왔다는 웅황정(雄黃精)이란 약으로

철기사의 독기를 뽑아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철기사가 구렁이의 독기에서 다시 살아난 다응에 그 추장이란 사람은

자기 생명을 구해준 보답으로 웅황정을 철기사에게 주었다.

이후부터 철기사는 이 웅황정의 힘으로 무수한 사독과 더럽고 무서운 병독을

피할 수 있었으니 이 웅황정이란 것이 웬만한 기독(奇毒)이나 괴질쯤은

문제없이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미리부터 잘 알고 있었다.

낭월대사와 철기사는 정이 깊은 사이였다.

또 낭월대사는 의리(醫理)에 깊이 통하고 견식이 넓은 사람인지라

고봉상인 노인이 홍의화상의 용연선독 때문에 몸을 다친 것을 보았을 때부터

즉시로 철기사 운천고를 초청해다가 그의 도움을 받아서 천 년 묵은 웅황정으로

용연선독을 막아낼 생각을 했던 것이다.

과연 홍의화상의 용연선독이 맹렬한 기세로 발사되었지만.

그것은 끝끝내 철기사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와는 반대로 철기사의 천 년이나 묵은 웅황정이 한번 농후한 웅황의 냄세를 퍼뜨리니

홍의화상의 용연선독은 당장에 맥을 못추고 꽉꽉 막혀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두 사람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무술만으로 싸우는 도리밖에 없었다.

홍의화상은 비록 용연선독장이 위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지만 .

그의 손바람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맹렬한 위력을 떨치고 있었다.

철기사는 홍의화상이 체구가 거대하고 힘이 억센데다가 손바람마져 상당히 빠르고

사납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

이놈과 대결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철기사의 손바람은 다소 약한 편이았다.

철기사 운천고는 자기의 손의 힘이나 재간이 상대방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알아채자.

선뜻 그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금빛이 번쩍거리는 두 자루의 갈래창이 동시에 홍의화상 우람부루를 향해서

겨누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흐음. 이놈이 손재간으로는 감당키 어렵다는 거지!  네놈이 그렇다면 나도 ............. '

홍의화상 우람부루의 흉악하게 생긴 두 눈이 반쩍 !  하고 광체를 발하더니.

여테까지와는 딴판으로 한쪽 손을 간단히 한 번 휘둘렀다.

무기를 가져오라는 신호였다.

이신호를 보자

홍의화상의 등들미 가까운 곳에 여태까지 대령하고 있던 한 놈이.

그의 유명한 무기 구환용두장을 흘쩍 던져주었다.

이리하여 쌍방은 똑같이 손바람을 버리고 무기로써 대항하여

승패를가려보자는 것이었다.

싸움터 한복판에는 또 다른 네 쌍의 적수들이 맞붙어있었다.

그들도 어울려서 어떤 편이 어떤 편인지분간할 수 없도록 뒤범벅이 되어

칼과 창이 분분히 허공 속에서 날고 번쩍이고 있었다.

바로 회양방의 사대타주들이 숭양파의 젊은 제자 네 사람을 맞이하여

격전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숭양파의 제자들은 결국 나이가 상대방보다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탓으로

아무리 보아도 벌써 회양방의 네 놈과 대결하기가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자 별안간 숭양파 편에서 난데없이 또 두 사람이 비호같이

싸움터 한복판으로 날아들었다.

그들은 사대타주들 앞에 우뚝 서기가 무섭게 대뜸 두 손으로 손바람을 일어키며

정면으로 덤벼들면서 찌렁찌렁 울리는 무서운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 그대들은 잠시 뒤로 물러가서 쉬어라! 우리들이 저놈들을 처치해버릴 터이니 ........"

싸움을 대신 맡으며 내닫는 사람은 바로 건곤취객방곤 영감과 상강조수 두 영감이었다.

회양방의 사대타주들은 바야흐로 숭양파의 젊은 네 사람을 공격하여 힘 안 들이고

물리쳐서 승리를 거둘 줄로만 알고 있는 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저편에서 또 두 놈이 달려들더니 그들의 맹렬한 공세를 쉽사리 막아내며 

덤벼들지 않는가!

호. 표. 웅. 상  사대타주로 말하면 회양방 중에서는 일류급에 드는 고수들이다.

한 놈 한 놈이 절기(絶技)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강호에서도 가장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번 대결에 있어서는 그들 사대타주도 다소간의 곤욕을 면할 수 없었다.

건곤 취객과 상강조수는 숭양사로에 끼는 인물들일뿐더러 무림에 있어서도

그들보다 더욱 유명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 자 우리들과 대결해 보자 ! "

회양방과 숭양파의 이번 대결투는 실로 그 승패로써 그들의 존망(存亡)을 결정짓는 것이다.

이런 중대한 장면에서 어찌 경솔히 적과 대결할 수 있을 것이랴.

한 파의 존망과 개인의 목숨을 내걸고 덤벼드는 이 싸움터에서 무림에서 쟁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건곤취객 방곤과 상강조수 두 영감이 비범한 수법으로 대적할 것은 물론이었다.

" 네 놈들은 그 수효가 넷이나 되어서 숭양파의 소식도 모르고 이 싸움터에 무작정 나왔다는

거냐 ? "

" 네 놈들쯤은 문제가 안 된다! 대결할 만한 용기가 있거든 자아 ! "

두 영감은 위풍당당하게 버티며 또 한 번 호통을 첬다.

숭양파의 맹렬한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상강조수의 저 무서운 은쟁지 수법은 열 줄기 사나운 바람을 일어켜서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와

함께 곧장 호. 표. 두타주를 향하고 화살처럼 쏘아 들어갔다.

한편 건곤취객 영감도 그의 독특한 수법인 유룡선취장의 수법을 가지고 웅. 상. 두 타주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호.표.웅.상  사대타주들은 어쩔 수 없이 두 패로 갈라졌다.

결국 이 대 일로 두 놈이 숭양파의 한가람씩을 맡아 가지고 협공의 태세를 취하며

상강조수와 건곤취객 두 영감을 대항하는 판이었다.

그러나 상강조수  건곤취객 두 영감은 맨손으로 대적하는 것이며.

회양방의 사대타주들은 각각 무기를 손에 잡고 상대방에게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검광도영(劍光刀影).

칼과 창에서 발사되는 매서운 광체가 눈부시게 춤을 추며 사방으로 불꽃처럼 튀는 것 같았다.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러 치고

장작을 패듯 내리치고

나무를 찍듯 깍아서 허물어뜨리려 들고

다시 찌르고

다시 뽑고

또  내리치고

찌러고  ............

눈이 팽팽 돌아가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상강조수  건곤취객 두 영감의 급소를 노리고

쳐들어가는 것이었다.

" 흥 ! "

상강조수 영감은 이 눈코 뜰 새 없는 급박한 사태 속에서도 가볍게 코웃음을 한 번 첬다.

그리고는 두 팔을 높이 쳐들더니 열 손가락을  홱 뿌리쳤다.

몇 번인지 연거푸 쇠소리같이 쨍쨍한 소리가 매섭고 싸늘하게 터져 나왔다.

그에 따라서 영감은 몸을 삽시간에 바꾸어 버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제일먼저 호타주 앞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오른쪽의 다섯 손가락을 물을 튀기듯 별안간 홱 뿌리니

줄기줄기 다섯 갈래의 무서운 힘이 뻗어나는 것이었다.

상강조수 영감의 은쟁지 수법이 일어키는 다섯 줄기의 무서운 힘은

곧장 복파독호(伏罷毒虎)라는 별명을 가진 호타주의 급소인 오대혈도(五大穴道)를

찌르며 맹렬히 습격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상강조수 영감의 날카로운 안광이 번쩍하면서 한번 번갯불처럼 옆을

흘겨보는가 하는 순간 그의 왼편 손바닥이 흘쩍 뒤집히더니 또 일탄(一彈)을 쏘았다.

그 손에서도 똑같이 줄기줄기 다섯 갈래로 뻗히는 무서운 바람이 쇳소리같이 매서운

소리를 내면서 상강조수 영감의 등들미에서 쳐들어 오고 있는 옥면비표(玉面飛豹)

표타주의 다섯 군데의 혈도를 노리고 화살같이 빠르게 습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복파독호는 상강조수영감이 갑작스레 전광석화와 같이 육박해 들어오는지라.

뒷걸음을 쳐서 몸을 뒤로 빼볼 겨를도 없었다.

그대로 멈칫멈칫제 위치를 지키며 그 무서운 은쟁지의 힘을 막아내보려다가.

마침내 오른쪽 팔의 곡지혈(曲池穴)을 찔리고 말았다.

" 뎅그랑 ! "

처참한 쇳소리가 요란스럽게 일어났다.

복ㅎ독호는 손에 잡았던 무기를 땅에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픈 것을 억지로 참으며 간신히 몸을 뒤로 비스듬이 뽑아서 비칠비칠 은쟁지의

무서운 힘을 가까스로 피한 셈이었다.

한편 옥면비표는 여전히 상강조수의 등들미로부터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사태가 이만큼 급박했고 또 전력을 기울려서 앞에 있는 복파독호를 공격하고 있는

위기일발의 찰나이니 상강조수 영감이 제아무리 무섭다 해도 자신의 등들미로부터

상대방을 공격하는 재간은 없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옥면비표의 오산이었다.

상강조수 영감은 벌써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

영감의 공격의 힘은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뒷통수에도 눈이 달려 있는 사람같이 왼쪽손가락을 물방울을 튀기듯 홱 뿌리니

그기서 뻗어나는 다섯 줄기무서운 힘은 마치 구름을 꿰뚫고 나는 화살같이

옥면비표에게로 쏘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 이키! 이 늙은 놈이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단 말인가 ! '

옥면비표는 찔끔해서 동작을 멈칫하고 날쌔게 몸을 피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두 다리가 이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빨리  두 다리를 떼어놓을 만한 겨를이 없었다.

' 이키 ! '

터저나올 듯하는 비명 소리를 억지로 참고 견뎌보려 했을 때

옥면비표는 눈앞이 아찔아찔 .

하늘과 땅이 거꾸로 뒤집혀서 곤두박질을 치며 빙빙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철석! 쿵! "

옥면비표는 머리속에서 요란하면서도 처참한 굉음을 느꼈을 뿐.

어질어질 땅 위에 벌떡 나딩굴고 말았다.

옥면비표 표타주는 상강조수 영감에게 그의 급소인 기해혈(氣海穴)을 직통으로

찔리고 만 것이었다.

또 저편에서 는 건곤취객 영감이 이미 다비인웅(多費人熊) 웅타주의 급소를 찔러

쓰러뜨리고 말았다.

단지 열추흑상(裂추黑象) 상타주 만이 아직도 남아서 건곤취객 영감에게 덤벼들고

있었으나 그 역시 오래가지않아서  그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물러나버리고 말 것만

같이 기진맥진해 들어가는 꼬락스니가 말이 아니었다.

대세는 이미 결정적이다.

상강조수 영감이 이만하면 상대방의 기세는 꺽어놓은 셈이니.

이제는 다소 쉬어가면서 공세를 늦추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을 때.

난데없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거만스럽게 호령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 이 늙은 것아 ! 주책없이 함부로 까불지 않는 게 좋을 거다 !

어디 내 .네 놈하고 한번 해보겠다 !

자신이 있다면 꼼작 말고 게 있거라 ! " 

상강조수 영감이 이 소리를 듣고 얼핏 측면으로 달려들려고 하는 놈을 힐끗 바라보았다.

거것은 몸이 비쩍 말랐고 키가 작달막한 늙은이로 생김생김이 아주 괴상하기는 하나.

두 눈만은 사람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무서운 광체를 발산하면서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어리 같아 보였다.

상강조수 영감이 몸을 움직여 대들려고 했을 때 홀연 등들미에서 바람소리가 일어나는 것

갔더니 또다른 사람의 서리발 같이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 상강조수 동지 ! 잠시 몸을 쉬시오 ! 저 늙은 마귀 같은 놈은 내가 대신처치할 수있으니."

상강조수 영감이 이 소리를 듣고 머리를 그쪽으로 돌렸을 때 거기에 나타난 것은

바로 숭양파가 초청해 온 무림의 명숙(名宿) 대파산(大巴山)의 가릉서생(嘉陵書生) 궁문의

(宮文儀)였다.

상강조수 영감은 궁문의의 무술이 탁월하고 절묘하다는 것을 평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인물이 자진해서 내달아 남을 도와준다는 것은 정말 무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런 움직임을 알게 된 상강조수 영감은 두 손을 마주 잡아 높이 쳐들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표하고 흘쩍 몸을 뒤집어 싸움터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가릉서생 궁문의는 선비의 몸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나 태도가 날아갈 듯이 가볍고 깨끗해 보였다.

나이는 겨우 삼십 전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이미 육십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는 싸움터 한복판에 위엄 있게 버티고 서면서 상대방 늙은이에게 손을 한 번 점잖게

휘둘러보이 더니 추상 같은 음성으로 호령했다.

" 서로 보지 못한 이후에 무고했는가?  실로 얻기 어려운 기회로다.

이 궁문의가 그대와 헤어지고나서 이미 십오 년 !

그대는 그 동안 무슨 신기한 재간이라도 배웠다는 건가 ? "

한편 회양방 편에서 뛰어나온 늙은 인물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팔도독경 오백평의

스승인 해남인마였다.

그는 이미 15년 전에 금사강(金沙江)에서 가릉서생 궁문의와 맞부딛쳐 싸워본 일이 있었다.

두 사람의 힘이나 재간은 정말 호적수였다.

어느 편에도 승부가 없었다.

궁문의의 됨됨이나 성품이 온건하고 냉정한 편이였기 때문에 비록 해남인마와 더불어

싸움을 하기는 했으나 지극히 점잖은 태도로 물러서준 셈이었다.

해남인마란 경산(瓊山)에 칩거해서 숨어 있기를 10여 년.

그 동안에 그는 여러가지 신기하고 독특한 재간을 연마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이 싸움터로 달려나올 때에는 금모사왕 일당의 인물들과 한 가지 엉뚱한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재간이나 힘을 모조리 털어 놓지말고 일부러 상대방과 대적하기

어려운 것처럼 가장해 보이자는 것이었다.

자신의 힘이나 재간은 남몰래 깊숙히 간직해서 여유를 만들어 놓고 상대방을  슬쩍슬쩍

놀려서 골탕을 먹여 보자는 그런 잔꾀였다.

이런 음흉한 계교를 품고있는 까닭으로 궁문의가 두 손을 휟둘렸을 적에도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힘을 써서 가릉서생의 손바람을  슬쩍 스쳐보았을 뿐 정말로 재간이나 힘을

겨루어보고 싶다는 태도는 아니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건곤취객 방곤 영감도 이미 웅. 상. 양대 타주의 급소를 찔러서

넘어뜨리고 말았다.

회양방 편에서는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경각을 지체하지 않고 또 한 놈이 뛰어 내달으며 방곤영감을 가로막았다.

그는 기경객이었다.

방곤 영감이 기경객을 맞이하여 막 접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숭양파 편에서도

또 다른 한 사람이 비호같이 뛰어 내달아서 방곤영감을 대신했다.

그 사람은 바로 운대산(雲臺山)에 사는 천인대사(天忍大師)였다.

이렇게 네 인물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바야흐로 치열한 격투를 전개하고 있을 때

금모사왕 오빈기는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거만스런 걸음걸이로 친히 싸움터 한복판에 나섰다.

그는 펄쩍 팔을 쳐들더니 철장단심 탁창가를 손가락질해서 가리키며 우렁찬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 그대와 나는 일파의 대표자라는 입장이니 언제까지나 내빈으로 초청받은 사람들을 시켜서

싸움을 하고 있을 것이랴 !

이제 이 오빈기는 숭양파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장술이나 검술의 절예라는 것을 한 번 구경해

보고 싶다 !"

" 아하하하 ........핫핫 ! "

철장단심 탁창가도 굴할 리 없었다.

가소롭다는 웃음을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그러나 철장단심 탁창가는 금모사왕 오빈기 일당의 엉큼스러운 음모나 계획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 제깟 놈이 나하고 일 대 일로 대결하자고?

네 놈 하나쯤을 겁을 내고야 어찌 일파를 대표해서 부하를 거느리고 이 마당에 섰을 것이랴? '

탁창가는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하게 생각했다.

정말로 금모사왕 오빈기가 자기와 더불어 일 대 일로 정정당당하게 무술로 승패를 겨루어

보자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추호도 주저함이 없이 한 바탕 가소롭다는 너털웃음으로써

쾌히 응낙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탁창가는 세삼스럽게 자기의 옷매무새를 고치고 차림을 가뜬히 하더니

천천히 한복판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정확하게 내디디며 걸어 나왔다.

한편에서는 기경객과 천인대사 . 해남인마와 가릉서생 궁문의 네 사람이 쌍쌍이어울려

결투가  이미 최고조의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며 숭양파나 회양방이나

그들의 일거일동에 털끝만큼이라도 소흘히 하지 않으려고 수많은 시선들이 그리로 쏠려 있었다.

그러나 싸움판은 그것이 문제가 아닐 만큼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서거나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른 것이다.

쌍방의 대표자와 두령이 몸소 내달아 마지막으로 자웅을 겨루어보자는 극도로 긴장된 상황이고

보니 이편 저편 모던 사람들의 신경은 날카로워진 정도가 아니라.

실로 소름 끼치는 흥분과 긴장으로 싸움터의 티끌만한 움직임에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때. 금모사왕 오빈기는 외눈을 부라리며 사방을 한번 휘둘러보았다.

한쪽밖에 없는 팔을 천천히 쳐들어 거만스럽게 휘둘렷다.

그리고는 우렁차고거친 음성으로 호통을 첬다.

" 여러분!  잠시 동안 손을 멈추시오! 내 할말이 있으니 ........"

죽느냐. 사느냐 목숨을 내걸고 치열하고 긴장된 아슬아슬한 싸움을 하고 있던 네 사람들도

금모사왕의 고함 소리를 듣더니 몸을 주춤하고 손을 멈칫했다.

' 오빈기는 싸움이 최고조에 달한 이 판에서 또 무슨 소리를 하자는 거냐?'

그들의 시선도 금모사왕에게 집중되면서 무슨 말이 떨어질 것인지를 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금모사왕 오빈기가 싸움터 한복판에 떡 버티고 서자 싸움판은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숨소리조차 죽이고 그의 입만 노려보는 찰나.

금모사왕은 또다시 우렁찬 음성으로 자못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 이 오빈기는 오늘날 여러 고명하신 벗들이 두터운 우정으로 이곳에까지 달려와서

회양방을 도와주심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더 없는 영광으로 아는 바이오 !"

' 이놈이 또 무슨 섣부른 수작을 하려고? '

철장단심 탁창가의 무서운 눈초리가 불똥이라도 튀어나올 것같이

금모사왕의 유들유들하게 생긴 입술을 노려보고 있었다.

금모사왕 오빈기는 한층 더 거친 음성을 높였다.

" 이제 이 오빈기는 회양방의 방주로서 신중히 생각해 보았소 !

이번 숭양파와 회양방의 결투는 어디까지나 쌍방의 문호에 서려 있는 사사로운 원한을

해결하자는 것이므로 . 절대로 국외자인 제삼자에게까지 누를 끼처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사실이오 ! "

오빈기는 또 한 번 그 커다랗고 심술궂게 생긴 외눈을 두리번거리며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이번에는 탁창가를 정면으로 쏘아보며 음성을 더 한층 높이는 것이었다.

" 본인은 이제 숭양파의 대표자와 몸소 대결하여 어느편이든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것으로써

당장에 승패를 결정지어 버리고자한다 !

만일에 본인의 무술이 상대방을 당할 수 없을 경우에는 우리들의 해골 사령기를 선선히 바치고

이후에는 강호에서 종적을 감출것이다.

허나 숭양파 역시 끝까지 약속대로 준수해야 될 것은 물론이다.

첫째로 나의아들을 석방할 것 

둘째로는 숭양파의 대표자가 본인에게 패하여 쓰러졌을 겨우에는 『숭양비급』을

두말없이 내놓을 것! "  

말을 마치자 오빈기는 탁창가를 새삼스럽게 쏘아보았다.

빨리 자기의 결정에 동의하라는 눈초리 같았다.

철장단심 탁창가는 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오빈기가 이렇게까지 정정당당하게 선언을 하고 나서는 이상 .

그는 진심으로 성심성의 껏 양파의 원수나 원한을 무술 실력으로 승패를 가려서

해결하자는 줄로만 알았다.

상대방의 의사를 솔직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숭양비급』의 중대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상대방이 이미 그들의 생명같은

해골 사령기를 내걸고 도전해 온 이상 .

어찌 멈짓멈짓 뒷걸음질을 치거나 비겁하게풀이 죽을 수 있을 것이냐!

그것이 설사 최고 최대의 결사적인 모험의 길이라손 치더라도

탁창가는 거기 응하지 않을 수없는 판이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무림의 쟁쟁한 인물들이 총동원이 되어서 모여든 이 마당에서

숭양파의 체면은 여지없이 시궁창 속으로 파묻혀버리는 것이 아닌가 !

탁창가도 비장한 결심을 했다.

그는 찌렁찌렁 울리는 똑똑한 음성으로 거침없이 답변했다.

" 이야말로 본인의 뜻에 꼭 맞는 제의다.

무림의 여러 선후배는 이 엄숙한 마당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증인이 되라.

이 탁창가는 만일에 실수하여 상대방을 감당치 못할 경우에는 추호도 망설이거나

후회없이 깨끗이『숭양비급』을 바칠 것이다. "

철장단심 탁창가와 금모사왕 오빈기는 말을 마치자 동시에 똑같이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각기 자리를 잡고 제 위치에 바윗돌처럼 무겁게 발을 디디고 섰다.

정신을 한 군데로 집중시키고 몸에 지니고 있는 각자의 온갖 힘과 재간을 불러내는 것이다.

천천히 천천히 신중하고 대담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이편 문호와 저편 문호가 열리면서

쌍방이 다같이 뽐내고 으스대며 얼굴과 어깨를 내밀고 대결하자는 그런 순간이었다.

숭양파 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죽은 듯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안았으며.

싸움터의 한 개 초점을 향해서 온갖 시선들이 쏠렸다.

회양방 여시 모든 사람들이 목을 길게 뽑고 대표자와 두령 두 사람의 일거일동을 주시할 뿐.

감히 기침 소리 한 번 내는 놈이 없었다.

단지 금모사왕 오빈기와 그 일당의 마귀 두목같이 엉큼스럽고 음흉한 놈들만이

사전에 약속이 있는지라.

전혀 딴 속셈을 가지고 마음속에서 음충맞은 계교의 결과를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는 판이었다.

그러나 그들 일당의 마귀 두목 같은 위인들도 버마제비가 매미를 잡아 놓으면 .

그 뒤에는 꾀꼬리가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판국이었다.

즉 금모사왕이 이들 어리석은 위인들과 기맥을 통해서 어떤 속임수로 숭양파를 대적해

보고자 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이들 마귀 두목 같은 존재들까지도 이번 기회에 도매금으로

한꺼번에 처리해 버리자는 약독하고 잔인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해가 한나절에 가까워왔다.

호수의 바람은 찰랑거렸다.

앵무주 섬 위는 만뢰구적(萬뢰俱寂)

산도 죽은 듯. 나무도 죽은 듯. 티끌만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싸움터 한 복판에서는 이제야말로 철장단심 탁창가라는 무림에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일파의 종주가 회양지구를 주름잡고 있는 강호의 거창한 패자 금모사왕 오빈기를

일 대 일로 정면 대결하여 심흔이 으스러질 것같이 무섭고 처참한 싸움을 전개하려는 판이다.

" 으음 ! "

탁창가는 무엇이라 형언하기 어려운 음성을 입 안에서만 굴렸다

신음소리 같으면서도 그것은 일체를 판가름하자는 비장한 결심이 뭉쳐진 음성이었다.

그는 마침내 오른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왼쪽 발로 첫걸음을 성큼 떼어놓았다.

두 눈으로 금모사왕을 집어삼킬 듯 쏘아보더니 와락! 몸을 길게 뽑는가 하는 순간.

오른손이 한 줄기 억센 바람을 일어키면서 금모사왕의 흉복부를 겨누고 번갯불 처럼 쳐들어갔다.

오빈기도 그리만만할 리 없었다.

그도 이미 발을 떼기 시작했고 손을 쓰기 시작했으며 .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상대방의 공세를

유유히 기다리고 있었다.

철장단심 탁창가의 손바람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금모사왕 오빈기는 몸을 아래로 약간 움츠려뜨리더니  구부정한 허리에다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비록 한쪽밖에 없는 병신이라고 하지만 그 한쪽 손으로나마 빈틈없이

즉각 억세고 사나운 바람을 일어켜 탁창가의 손바람을 막아냈다.

두사람의 손바람은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맞부딪혔다.

두 사람이 똑같이 동시에 주춤하고 디디고 서 있는 위치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팔과 손에 마치 전류의 파동같이 흔들리는 매서운 자극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빈기는 경각을 지체하지 않고 민첩하게 서둘렸다.

한쪽밖에 없는 팔을 한 번 흘쩍 휘두러더니 손바닥을 평평하게 뽑아 가지고 측면으로부터

탁창가의 왼편 허리께를 노리고 처들어가는 것이었다.

' 흐음? 팔 하나밖에 없는 놈이 어지간히 억세고 제빠르게 손을 쓸줄 아는구나 ! '

이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탁창가도 상대방의 손바람이 처들어 오는 것을 기다릴 생각없이

팔을 살짝 뒤집어서 손에 지닌 힘을 모조리 아래로 홱 뿌렸다.

그와 동시에 왼쪽 손이 비호처럼 앞을 찌러고 나가면서 오빈기가 기습하려고 하는

손바람을 멋들어지게 막아냈다.

' 으음? 이논이 그래도 제법이로구나! '

금모사왕의 손바람이 그것만으로 꺽여버릴 리 만무했다.

또 한 번 쉬익!  모질고 사납게 빠른 기세로 철장단심 탁창가를 정면으로 습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손바람과 손바람이 맞닥뜨렸다.

그 순간 양쪽이 똑같이 멈칫하고 그 이상 움직이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편과 저편의 억세고 모질고 사나운 손바람의 힘도 똑같이 상대방의 힘 앞에 막혀서

그 이상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바르르 떨고만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두 번을 맞부딪혀 본 손바람의 힘 ..........

이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똑같이 상대방의 장력의 허와 실을 찔러보고

그것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 만만치 않겠는 걸 ! 이놈의 장력은 대단한데 ....... '

금모사왕 오빈기는 바늘 끝으로 가슴 한복판을 찔린듯 따끔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손바람의 힘이 탁창가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는 숨길수 없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탁창가는 이제 두 번째 손을 써보는 동안에 그리 많은 힘을 쓰지는 않았다.

비록 그가 손을 썼을 때 모든 힘을 손바닥으로 집중시키기는 했지만 막상 손을 뿌려

기운을 썼을 때에는 충분한 여유를 남겨 두었다.

자신의 장력이 상대방의 힘이나 재간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명백히 판단하고 나서

싸움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작정이었다.

이편에서는 여유를 만들어서 간직해 두고 우선 상대방의 힘을 저울질해 보고 나서.

저편의 힘이 세질 때마다 이평에서도 비축해둔 힘을 조금씩 점차적으로 발휘하여

압력을 가해보자는 것이 철장단심 탁창가의 작전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탁창가는 제 이장을 내보냈을 때에는 단지 금모사왕 오빈기의 

손바람의 힘을 판단해 내는 데만 정신을 썼다 .

다시 말하자면 탁창가는 자기가 지니고 있는 힘의 10분의 6.7 정도 를 가지고 

오빈기와 한 번 다루어 본 것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오빈기 편에서는 왈칵! 닥쳐드는 상대방의 손바람의 힘을 창졸간에

막아내자니 어지간히 큰 힘으로 버티지 않을 수없었다.

탁창가의 장력과 맞닥뜨려서 바르르 떨지 않을 수 없는 것도이런 까닭이었다.

다음 순간에 오빈기가 제 이장을 써서 습격해 들어왔을 때 .

탁창가는 자기 전력의 10분의 8쯤되는 힘으로 그것을 막아버렸다.

어디까지나 힘을 비축해서 지녀두고 단번에 쏟아버리지 않겠다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두 번 손바람이 맞닥뜨렸을 때 무술의 원칙적인 냉정한 판단에서 볼 때.

탁창가는 이 두 번의 장력만 가지고도 이미 오빈기를 제어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탁창가가 더큰 손바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장력도 오빈기의 힘에 막혀서

바르르 떨기만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이것만으로써 탁창가는

이미 오빈기의 장력이 자기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판단할 수 있었다.

무술의 명가들이 일 대 일로 대결하고 싸울 때에는 불과 3. 4차만 맞닥뜨려보면.

벌써 쌍방의 강약우열이 숨김 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어느 편이고 똑같이 온갖 신경을

날카롭게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을 냉정 침착하게 가라않히고 섣부른

경거망동을 무엇보다도 삼가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에 추호라도 경솔히 움직여서 바늘 끝만한 틈이나 흐트러짐이 상대방에게

엿보인다면 그것으로써 싸움은 결정적인 승부가 가려지는 것이며 싸워볼

여지도 없이 꼴사나운 패배의 구렁텅이 속으로 뒹굴어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손바람과 손바람이 맞닥뜨렸을 때 오빈기는 이미 내심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 음흉하고 악독한 위인은 아랫배에 힘을 주어서 버텨보는 것이었다.

' 흥! 네깟 놈이 아무리 잘난채를 하고 서둘러봤댔자.

  결국은 내 꾀에 넘어가고야 말걸 !'

금모사왕 오빈기는  애초부터 실력으로 대결해 볼 작정이 아니었다.

어떤 속임수를 써서 상대방을 골탕 먹이자는 엉큼스런 흉계와 음모를 품고 있었다.

금모사왕 오빈기는 별안간 미친 사람같이 너털웃음을 첬다.

" 와하하하! 핫핫핫! "

그 징글맞게 생긴 크고 무지막지한 입이 찢어질 듯 웃어젖혔다.

이 돌발적인 웃음에 철장단심 탁창가가 도리어 당황하지 않을 수없었다.

' 괴상한 몸이다!  이판이 어느 판이라고 너털웃음을 치다니? '

실로 . 눈동자 한 번을 잘못굴려도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판에.

껄껄대고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금모사왕 .

그는 자신의 모자라는 힘이나 재간을 허세로 메워보자는 엉뚱한 속셈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처음대로 신법(身法)을 움직이거나 변함이 없이 팔과 손도 그대로

내뻗은 채 흔들림이 없는 자세를 가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 이러고 보면 . 이놈도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 '

철장단심 탁창가는 이렇게만 판단했다.

그는 오빈기가 어떤 음모나 흉계를 쓰려고 딴청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상대방의 실력이 그래도 웃음을 치고 태연히 버틸 수있을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각을 다투어서 때뜸 여태까지의 장법에서 더욱 압력을 가해서 좀더 억센 힘으로

오빈기의 상반신 흉복부를 번갯불처럼 급습해 들어갔다.

오빈기는 마음속으로 딴 궁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손바람에 힘을 써봐도  

탁창가를 당할 도리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제아무리 놀라운 재간이 있다 하더라고 결국은 팔 하나가 모자라는 불구자다.

두 팔이 멀쩡한 사람을 대적하기란.

이 한가지 조건만으로도 여간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니다.

오빈기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자기편에 그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어떤 파판이 생긴 것처럼 가장해 보이자는 것이다.

슬쩍! 그는 뒤로 물러서는 척했다.

그와 동시에 한쪽밖에 없는 팔을 높이 쳐들더니

역시 손을 날쌔게 뻗어서 탁창가의 손바람의 힘을 막아냈다.

그러나 손바람 속에 내뿜지는 않았다.

남이 보기에만 상대방의 힘을 막아내는 척하고 탁창가의 손바람의 힘이 습격해 들어오자

흘쩍 몸을 거두고 몸을 움츠러뜨리더니 흘쩍 몸을 뒤집어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탁창가가 그렇게 호락호락 놓아줄 리가 없었다.

손에 힘을 더하여 장법을 매섭게 바꾸면서  전광석화 같이 흘쩍 몸을 날려 벌어진 공간을

질풍같이 육박해 들어가며 그와 동시에두 손을 번갈아 쓰면서 좌우 양편으로부터

오빈기의등줄기와 뒤통수를 겨누고 육박해 들어갔다.

탁창가는 무림에 있어서 유명한 인물일뿐더러.

일파의 종주라는 위신상 남과 맞부딪혀서 자웅을 겨루는 마당에서도 언제나 사람을 죽이기를

원치 않았다.

오빈기에게는 실로 생사가 좌우되는 이 위기 일발의 찰나.

철장단심 탁창가는 이 숨막히는 순간에 금모사왕 오빈기의 약속을 생각했다.

오빈기는 명백히 말했다.

어느편이든 급소를 찔러서 쓰러지기만 하면 그것으로 승부가 완전히 가려지기로 하자고.

남아 대장부. 서로 이런 약속을 하고 싸움을 시작한 바이니.

아무리 미운 원수요 .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탁창가는 이제와서 그 약속을 배반하고 태도를 돌변하여

금모사왕의 목숨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런 생각이 번갯불같이 탁창가의 머리속을 스쳤다.

탁창가는 왼쪽 손으로 오빈기의 한쪽 어깻죽지를 슬쩍 한 번 스쳐버리고 말았다.

그것만으로  손을 거두어들이고 동작을 멈추고 한편에 우뚝 섰다.

통쾌하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쟁쟁 울리는 음성으로 점잖게 말했다.

" 오방주 ! 이 탁창가는 실례를 하였노라! 허나 이제야 말로 그대는 싸움을 시작하기전

  피차간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오빈기는 비록 영뚱한 속셈을 가지고 고의로 싸움에 패한 채를 한다고는 하지만

어째든 난처한  입장에 떨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얼굴이 당장에 시뻘개졌다.

마지못해서 어물머물하는 말투이기는 했으나 분명히 대답했다.

" 이 오빈기는 무슨일에나 약속을 어기지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아들부터 먼저 석방하라 !

그래야만 우리의 해골 사령기를 그대에게  바칠 것이다! "

사태가 진전될 것인지.

손에 땀을 쥐고 노려만 보고 있던 쌍방의 진영에서는 이때 긴장과 흥분을 참지 못하고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 이놈! 싸움에서 졌으면 약속대로 빨리 내놓아라. "

" 그렇게 만만히 내주면 안 된다! "

거의 같은 의미의 말을 한 사람이 몇 마디씩 목청을 뽑아 악을 쓰고 있으니

양쪽진영의 아우성 소리는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것같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탁창가는 머리를 뒤로 돌리고 손을 높이 들어 한 번 휘저었다.

건곤취객 방곤 영감에게 신호를 보내서 앞으로 불러들인 것이다.무엇인지 나지막한 음성으로 방곤영감의 귓전에다 대고 지시했다.

방곤 영감은 고개를몇 번 ㄲ덕끄덕하고 물러서더니

금모사왕 오빈기를 바라보며 위엄 있는 음성으로 정중하게 말했다.

" 그대의 아들은 현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와 있다 !

해골 사령기만 선선히 내놓는다면 그대의 아들을 당장 이 자리에 불러들일 것이요.

그것으로 쌍방의 원한이나 원수는 깨끗이 청산될 것이다 ! "

 

그러나 오빈기의 마음속으로는 불덩어리 같은 분노와 저주가 치밀어 올랐다.

' 탁창가. 이놈! 함부로 까불지마라 !

내 팔이 부러지고 눈이 먼 원한이 그렇게 쉽사리 풀릴 줄 아느냐!

내아들의 목숨이 소중하지만 않다면야.

네 놈이 이렇게 힘 안 들이고 나를 이겨낼 줄 아느냐!

이놈 ! 어디 조금만 더 두고보자 ! '

분노와 저주로 이를 악물면서도 금모사왕 오빈기는 그런 눈치를 추호도 표면에

들어내지는 않았다.

오빈기도 철장단심 탁창가가 했듯이 머리를 자기편 진영으로 돌리고 손을 높이쳐들어 

휘둘렸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는 것을 알아차린 두 놈의 두목이 회양방 진영으로부터 달려 나왔다.

그중 한 놈은  비단으로 만든 합(盒) 하나를 두 손으로 떠받들고 나왔다.

오빈기는 비단함을 받아들더니 서슴지 않고 뚜껑을 열었다.

그 합 속에서 다시 붉은 비단에 수를 놓아서 만든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천천히 비단 주머니의 아가리를 벌리더니

그속에서 조그마한 깃발 한폭을 꺼내 그것을 바람결에 펼쳐서 휘둘러 보이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깃발 한 폭이 펄럭펄럭 바람에 나부꼈을 때 .

숭양파와 회양방 두 진영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깃발만을 주시했다.

조그마한 깃발은 그길이가 불과 반 자남짓했다.

형상은 삼각형이었다.

언뜻 보아 검정 실로 짜서 만든 것 같았고 깃발 한가운데는 하얀 은실로 한 개의 해골이

수놓아져 있었다.

검정 바탕에는 흰빛 그림이 이채로운 대조를 이루고 눈부신 광체를 발산했다.

오빈기는 그 조그만 깃발을 손에 잔뜩 움켜쥔 채 즉각 탁창가에게 넘겨주지는 않았다.

단지 멀찍히 떨어진 거리에서 탁창가를 바라다볼 뿐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탁창가는 오빈기의 뜻을 재빨리 알아챘다.

' 음! 아들놈을 석방시키는 꼴을 봐야만 그 깃발을 내놓겠다는 수작이로구나 !

정 네 뜻이 그렇다면 .......... '

탁창가는 다시 머리를 돌려 몇 번 끄덕끄덕하며 건곤치객 방곤 영감에게 무엇인지 분부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챈 방곤 영감은 당장에 휘바람을 모질게 불었다.

"쉬익 ! "쇠소리같이 날카로운 휘바람소리가 호수 위의 적막을 깨뜨리고울려 퍼졌다.

가늘게 퍼져 나가는 휘바람의 여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데없이 동쪽 조그마한 섬 위로부터

똑같이 날카로운 휘바람 소리가 이편으로 들려왔다.

" 쉬익! "

그 휘바람 소리도 모질게 하늘 높이 울려 퍼지며

방곤 영감의 휘바람 소리에 호응하는 모야이었다.

섬 위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저편 섬으로부터 별안간에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하고 나타나더니

바윗돌 뒤로부터 세 사람이 달려나오는 것이었다.

 

 

< 다음 4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