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13장 답설무흔(踏雪無痕)

오늘의 쉼터 2013. 12. 11. 22:28

   정협지(情俠誌) 3권


  제 13장 답설무흔(踏雪無痕)


검의 그윽한 향기

 

마침 저쪽에서 네 사람이 노영탄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감욱형과 독응구붕.어양검사 단목심곡. 그리고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었다.

네 사람 중에서 감욱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세 사람들은 비록 일찍부터

노영탄이라는 이름을 듣기는 했었지만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대면해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때. 그들은 노영탼을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를 알지 못했다.

감욱형이 눈치 빠르게 선뜻 앞으로 나서면서 사람들에게 노영탄을 소개했다.

" 이분이 바로 노영탄 ........ 노공자세요 !"

그리고 노영탄에게 공손히 절하며 물었다.

"노공자께선 어떻게 ......여기까지 와 주셔서 ....... 정말 감사합니다."

노영탄은 여러 사람에게 차례로 정중하게 절했다.

만면의 미소를 띠고 손톱만큼도 흐트러짐 없는 늠름하고 준수하게 생긴 청년의 모습.

그는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

"소생은 금사보를 떠난 뒤에 우리들의 지난날의 약속대로 휴녕(휴寧)까지 달려갔었소.

그러나 거기서는 감소저의 종적도 찾을 길이 없을뿐더러 숭양파에서 무슨 행동을

개시했다는 소식조차 알 길이 없었소 .

도중에 또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게 되어서 아직도 미산호까지 도착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여간만 궁금한 것이 아니었소 .

그래서 소생은 곧 큰길로 다시 나와서 서주까지 직행을 했으며.

미산호까지 가서 감소저를 찾아볼 결심을 했소."

여기까지 말한 노영탄은 힐끔 감욱형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 나더니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말을 계속했다.

" 소생은 서주까지 갔을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소.

내 애당초부터 숭양파의 제자도 아닌 몸으로서 .

내 자신을 스스로 알아달라고 뽐내고 나선다면 .

이것은 숭양파의 선배들이 볼 때 얼마나 이상하고 우스운 일이 될 것이냐!

그래서 소생은 심사숙고한 끝에 잠시 그대로 서주에 머물러 있어 보고 미산호 까지는

가지 않기로 작정했소.

그것은 감소저께서 소생과의 약속대로 휴녕으로 갈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

반드시 서주를 통과해 가시리라는 생각으로 ........."

여기까지 말하자 .

노영탄의 얼굴에는 어떤 수줍음 같은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 그 이튼날 . 소생은 우연히 거리에서 감소저의 오라버니란 분을 보았소.

무엇에 쫓기는 듯 심히 초조하고 황급한 태도로 어떤 여인숙에 투숙하려는 판이었소.

그런데 감소저까지 그와 동행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처음에는 아는 체를 하고 두 분을 불러볼까 그런 생각도 했었지만 다시 냉정히 생각해보니

역시 소생은 감소저의 오라버니라는 분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소.

이런 까닭으로 소생은 혼자만 알고 몸을 슬쩍 피해버렸소.

두 분께서는 소생이 가까이 나타났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셨서리라 ........."

노영탄은 하던 말을 일단 중지하고 새삼스럽게 네 사람의 얼굴을 차례차례 휘둘러보았다.

심히 말하기가 거북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얼굴빛을 태연히 하려고 애쓰면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을계속했다.

" 매우 미안하게 됐소! 사실인즉. 소생은 감소저와 감소저의 오라버니 뻘이 된다는

그분을 모른 척 하기는 했지만. 구붕 선생님과 감소저께서 서로 만나시기 전에

이미 그여인숙에 들어가 있었소!

그리고 감소저와 오라버니 사이에 주고 받으신 말씀도 다 듣고 있었소!  하 하 하 ......."

노영탄은 다소 어색하게 웃었다.

웃음이 없이는 이런 마음을 솔직히 고백하기는 어쩐지 쑥스럽다는 그런 태도였다.

그러나 차마 말로 다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두 눈이 나타내고 있었다.

새카만 눈동자 저 깊숙한 곳에는 감욱형에게 대한 무한한 정이 서리어 있는 것만 같았다.

노영탄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절한 정이 서리어 있는 그 눈동자는 쉴 새 없이

감욱형의 전신을 더덤고 있었다.

비록 그가 들었다는 감욱형과 악중악의 대화가 무엇이었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의 정과 그리움에 넘치는 두 눈동자는 감욱형이 그에게 대해서

얼마나 지대한 관심과 안타까운 걱정을 악중악에게 솔찍히 표시했었는지.

그때 그 정경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아하 ! 그러신 것을 저희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 저희들이 감쪽같이 속은 셈이군요 !"

간신히 이렇게 어물어물해 두기는 했지만.

감욱형의 탐스러운 두 볼이 무안을 당한 사람같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건곤취객 방곤 영감. 단목심곡. 독응구붕 영감들이 쭉 늘어서 있는 앞에서

도저히 그 이상의 표시를 나타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말 못하는 가슴은 희열로 물결치 듯 부풀어 오르는 듯 출렁대고 설레고.

왈칵 대들어 부등켜 안기라도 하고 싶은 그리움을 억지로 참는 것이다.

감욱형은 아랫입술을 윗니로 잘강잘강 몇 번인지 깨물 뿐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심산 속의 호수처럼 새파랗게 가라앉아서 촉촉히 젖어 있는 것같이

무엇을 호소하는 것같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감욱형의 두 눈동자는 유난스럽게

어떤즐거움과 흥분된 감정을 감출 수 없다는 듯이 쉴 새 없이 깜짝깜짝 남몰래

노영탄의 아래위를 더덤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이 그리운 사람들의 시선이 아무도 모르게 번쩍하고

맞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이것만으로 젊은이들의 가슴속을 무형의 실마리가 있어 얽어매 놓았으며.

피차간에 깊은 정과 이해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 하하하 ........하하 ....... 소생이 감쪽같이 속였다구요?

그러나 절대로 손톱만큼이라도 어떤 악의에서는 아니었소!

그것만은 ........"

쾌활한 웃음과 함께 노영탄은 거북한 입장을 변명이나 하듯 다시 말을 계속했다.

" 소생은 그때. 그 여인숙에서 구붕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엿듣고 ..........

회양방 놈들이 강호의 도의도 무시하고 사람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숭양파의 근거지인 벽송관을 몰래 습격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여간만 격분하고

원통히 생각한 것이 아니었소.

그래서 감소저와 그 오라버니라는 청년이 각각 방향을 달리하고 헤어질 때.

소생도 굳은 결심을 했소.

시급히 숭산으로 달려가서 미력이나마 힘이 되어 보겠다고 ..........

그래서 소생은 아무도 모르게 여러분의 뒤를 쫓아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소!

아슬아슬하게도 이 여러 쥐새끼 같은 놈들과 맞닥뜨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소!"

네 사람은 노영탄의 설명을 여기까지 듣고서야.

노영탄이 이 자리에 나타나게 된 경위를 확연히 깨달을 수가 있었다.

" 핫 ! 핫 ! 핫 ! 그것 참 ! 일이 이렇게 공교롭게 된 것이로군 !"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 호탕하게 웃어 제치며 찌렁찌렁 울리는 쾌활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아우라고 부르기로 하지! 자네는 아직도 젊은 나이에 가지가지로 놀라운 재간을 가지고 있으니.

정말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네.

더군다나 오늘밤 싸움에는 지대한 원조를 받게 됐으니.

이점 감명 깊게 생각하여 마지 않는 바 일세!"

노영탄은 급히 한편 손을 휘둘러서 그 말을 막으며 답례의 인사말을 했다.

" 선배님! 그건 천만의 당치도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저는 그다지 과찬을 해주실 만한 위인은 못됩니다.

단지 강호 넓은 천지에서는 뜻이 맞고 길이 같은 친구라면 다같이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무릇. 나쁜 짖을 해서 사람을 괴롭히는 놈들은 똑같이 우리의 적 입니다.

누구나 이런 놈들을 만나면 다같이 힘을 합처서 철저하게 혼을 내야죠.

세 분 선배님들의 무술 실력이시라면 오늘밤 같은 몇 놈들의 까부는 위인들쯤을

물리치시기는 여반장 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철모르고 뛰어들어서 티끌 만한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인가 하올 뿐입니다!"

" 아니. 정말 훌륭했다네! 정말 우리들은 놀랐다니까!

자네같은 대담무쌍하고 재간이 뛰어난 청년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단 말야! 

핫 ! 핫 ! 핫 ! "

방곤 영감은 솔찍하게 감탄하여 마지않으며 통쾌한 웃음을 몇 번이고 연거푸 웃었다.

이때 어양검사 영감이 옆에 섰다가 선뜻 말을 꺼냈다.

"그런데. 오늘 회양방에서 침범해 온 놈들이 도합 몇 놈이나 되나?

우리는 먼저 그것을 명백히 조사해서 밝혀 가지고 그 뒷수습을 깨끗이 하고 난 다음에

안으로 들어가서 서서히 이야기 하기로 하세!

모두들 의사가 어떠한가?"

아닌게 아니라 그 점이 중대한 문제였다.

이리하여 여러 사람들은 다시 벽송관의 앞뜰을 향해서 조심조심 걸어나갔다.

"에그머니! 저게 뭘까?"

앞장을 서서 걸어가던 감욱형이 자지러지게 놀라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 뭐라니?"

독응구붕 영감의 대머리가 어둠 속에서 번쩍하면서 감욱형의 등들미에 우뚝 서서

시커먼 어둠 속을 조심조심 바라다 보았다.

어양검사와 건곤취객 방곤 두 영감도 깜짝 놀라서 감욱형을 뒤로 밀치고

앞으로 썩 나서서 허리를 꾸부리고 앞을 바라다보았다.

"이크! 저게 뭐란 말인가?"

"사람 같은데!"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어둠 속이기는 했으나 불과 네댓 간 앞 장경루로 올라가는

돌 층계 위에 무엇인지 시커먼 것이 두 개 나딩굴고 있지 않은가.

네 사람은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조심조심 앞으로 다가들어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앗! 여기 이런 게?"

놀라 자빠지며 제일 먼저 상반신을 뒤로  제치고 몇 걸음을 물러서는 것은

앞장을 섰던 감욱형이였다.

네 사람과 보조를 같이 해서 걸어 들어가면서도 노영탄만은 태연자약했다.

다른 사람들이 놀라는 품을 보더니 한옆에 버티고 서서 도리어 통쾌한 웃음을 

기탄 없이 웃어 제치는 것이다.

" 핫! 핫! 핫! 그다지 놀라실 것은 없지요!"

네 사람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서 어둠 속에서도 노영탄의 일거일동만 유심히 주시했다.

"뭐라도 들여다보실게 있나요! 시체지요. 송장죠!  하하하......핫! 핫! "

과연 그것은 두 개의 시체였다.

돌층계 위에 나딩군 체 그대로 뻗어버린 두 개의 검정빛 무장을 갖춘 시체였다.

노영탄은 그제서야 자세한 경위를 설명했다.

" 소생이 이 두 놈들을 발견했을 때. 이놈들은 누방 앞에서 심히 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리몰리고 저리 숨고 두 놈들이 쑥덕쑥덧 귀속말들을 하고 .........

소생은 처음에는 이놈들의 급소를 단숨에 찔러서 쓰러뜨리기만 해 가지고 이곳 주인 되시는

분에게 넘겨 드리기나 하려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두고 보자니.

아. 글쌔 이놈들이 이 건물에다 불을 질러버릴 흉계를 꾸미고 있을 줄이야 ?

급기야 놈들은 소생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는데 손을 쓰는 품이 어지간히 잔인하고 악독한

놈들이더군요!

소생이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놈들은 바로 이따위 놈들 .........

까닭없이 살인. 방화. 약탈을 일삼아 선량한 백성을 괴롭히는 놈들을 제일 미워합니다.

놈들은 대담무쌍하게 . 혹은 용감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제놈들의 성명 삼자를 밝히고

덤벼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강호 천지에서 다년간 행패만 부리고 돌아단니던 음산쌍호.

소생은 일찍부터 놈들 형제 둘이서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같이 여기고 살인. 방화 ........

온갖 악독한 짓을 떡먹듯이 하고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두 놈을 한꺼번에 없애버리고 말았습니다!"

" 흐음 ! 놀라운 솜씨인 걸 !" 

"그렇게 악독한 놈들을 두 놈씩이나 한꺼번에 ........흐음 !"

" 이놈들도 그다지 만만한 놈들은 아닌데 ......형제를 모조리 단숨에! 흐음! 대단한 재간인걸 !"

감욱형만은 잠자코 노영탄의 설명을 듣고만 있었다.

독응구붕 .어양검사 그리고 건곤취객 방곤 영감. 다같이 무예계에서 굴지의 인물들인

선배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노영탄에게 찬사를 보내는 마당에 감욱형은 자신마저

그들과 같이 찬사를 보내기에는 극도의 흥분과 기쁨으로 부풀어 오른 가슴의 파동이

너무나 벅찼다.

칠흑같이 어둠 속에서도 감욱형의 빛나는 두 눈동자는 쉴 새 없이 노영탄의 전신을 더덤었는데

존경의 도를 넘어선 감정이 숭배의 경지에 까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음산쌍호 복씨 형제로 말하자면 강호 넓은 천지에서 정정당당한 무술의 재간을 지니고 있는

인물 축에는 못 든다 하더라도 깡패 망나니들의 사도의 술법을 쓰는 어두운 세상에서는

나름대로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위인들이며 결코 아무에게나 호락호락 굴복할

존재들은 아니었다.

노영탄이 이 무서운 형제들을 젊은 청년의 힘으로 한꺼번에 처치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뿐이랴.

노영탄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듯 태연자약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 핫 ! 핫 ! 핫!  그다지 놀라시거나 과찬하실 일은 못됨니다.

이따위 놈들 가지고 쩔쩔 맨대서야 어디 무술을 배웠다는 보람이나 있는 노릇인가요!"

네 사람은 그 이상 칭찬해줄 말이 나오지 않아서.

그저 경탄과 감격에 가득찬 눈동자로 언제까지고 노영탄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둠속에서 추호만큼도 자신을 흐트러뜨림이 없는 노영탄의 태도.

그렇게 준수하고 늠름하고 인자하게 생긴 젊은 선비의 풍체속 어느구석에 이다지

놀라운 무술의 재간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인가.

아무리 보아도 보통 무인같아 보이지 않는 노영탄의 모습에 그들은 또 한 번 놀랄 뿐이었다.

그가 천하에 제일가는 고인 (高人). 무예계의 제1인자라는 남해어부의 단 하나인 제자였을

줄이야 누가 감히 꿈엔들 상상할 수 있었으랴.

그들은 다시 앞뜰로 들어섰다.

거기에는 팔조독경 오백평과 초산활귀 맹성이 여전히 옴짝달싹도 못하고 혼절한 채

나둥거러져 있었다.

한 놈.두 놈 따져 보고 나서야 회양방에서 도합 여섯 놈이 침범해 왔다는 정확한 숫자를

파악했다.

도망쳐 버린 두 놈이 어떤 놈들인지.

처음에는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했으나.

서로 여태까지의 경과를 이야기하는 동안에 그 두 놈들이 바로 어양검사. 독응구붕 두 영감과

맞닥뜨렸던 놈들이라는 것도 판명되었다.

"이건 좀 창피한 노릇이지만 ........."

독응구붕 영감이 번쩍번쩍하는 대머리를 흔들어 가면서 부끄러운 듯이 입을 열었다.

"나하고 단목형하고는. 방곤형이 부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뒤뜰로 뛰어나왔지.

뒤뜰 가산 못 근처에 다다르니.

난데없이 두 놈의 시커먼 그림자가 허공에서 슬쩍 앞으로 스치고 날아들더니.

그대로 우리 앞으로대들질 않겠어!

그래서 우리 들이서는 정말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고 놈들과 맞닥뜨리는 수밖에 없었단 말야!"

독응구붕 영감은 이렇게 말하면서 단목심곡 영감을 힐끗 쳐다봤다.

' 잠자코 있지만 말고 자네도 뭐라고 말을 좀 해 !'

이렇게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사실. 노영탄의 무술의 재간에 비하면.

선배라고 아니할 수 없는 세 영감의 이날 밤의 싸움은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부끄러움이 앞을 서서 그들이 싸운 경과를 떳떳이 처음 대하는 청년 앞에서

말해볼 용기조차 없는 것이다.

어양검사는 이 말을 듣고도 그 저 머리를 끄덕끄덕 할 뿐 꿀 먹은 병아리 모양 말이 없다.

어쩔수 없이 독응구붕 영감이 그 번쩍번쩍하는 대머리 이마를 어색하게 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 둘이서는 '이놈들! 뭐하는 놈들이냐?' 고

고함을 지르며 동시에 두 손을 다 써서 손바람을 일어켜 한 놈씩 막아냈지.

두 놈은 통 입을 벌리는 법이 없이 덮어놓고 우리한테 덤벼들기만 한단말야.

두 놈의 무술의 재간을 보니 결코 만만한 놈들이 아니었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단 말이지 .

한창 싸우고 있는 판에 어디선지 처량하게 부는 휘바람 소리가 획! 획! 하고

두 번 들려 왔거든 .........

그 소리를 듣더니 두 놈들은 당황해하는 꼴이란 .......

사실은 우리들도 영문을 알 수 없어서 깜짝 놀랐지 !"

여기까지 말하고 난 독응구붕 영감은 노영탄을 힐끗 ! 한 번 쳐다보았다.

부끄럽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끝을 맺지않을 수 없다는  군색함을 역력히 드러내며

다음 말을 계속했다.

" 일진일퇴. 한참 동안이나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까 .

놈들은 좀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더군!

그런데 앞뜰로부터 또다시 몇 번인지 괴상한 휘바람 소리가 들려오니까 .

두 놈은 그 소리를 듣더니 더욱 초조하고 당황한 듯 .

동시에 암호를 쓰더니 흉기를 하나씩 꺼내들고 번쩍! 번갯불이 일 듯이

나하고 단목형에게로 덤벼더는 아슬아슬한 판에.

웬일인지 놈들은 그냥 벽송관 밖으로 도주해 버렸단 말야.

우리는 놈등의 뒤를 쫓아갈 생각도 했지만 .

첫째로는 놈들이 도합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또 앞뜰에서 무슨 사태가 벌어졌는지 그것이 걱정두 되구 해서 쫓아갈 것을 단념하고

놈들을 놓아주게 된거야 !"

선배라는 영감들도 노영탄의 앞에서는 그 이상 자랑할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묵묵히 서로 얼굴들만 처다보고 서 있을 때 .

 

난데없이 무수한 등불들이 몰려들었다.

심산유곡 벽송관의 깊은 밤이.

무슨 잔치나 하는 듯 수많은 등불로 웅성거리게 됐다.

여러 젊은 제자들과 관동들이 잠을 깨서 제각기 등불을 켜들고 몰려든 것이다.

" 이크! 이게 웬일이냐? 이 깊은 밤중에 악중악 아저씨가 난데없이 여길 나타나다니?"

등불을 켜들고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는 이렇게 깜짝 놀라는 관동들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 뭐? 악중악 형님이? 그를 리가 없다 !"

" 그럴 리가 없다니 ......... 그럼. 저게 누구란 말이냐? 악중악 형님이 아니라면 ........"

이렇게 수군대는 젊은 제자들도 있었다. 

 너무나 외양이 비슷하게 생긴 노영탄을 처음에는 틀림없이 악중악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악중악이 아니요.

노영탄이란 딴 청년임을 알게 됐을 때 그들의 놀라움은 더 한층 컸다

"온. 세상에 저렇게 비슷한 사람이?"

"그래. 정말 악중악 형님이 아니란 말이냐?"

아무리 수군대 보아도 그는 분명히 노영탄이라는 딴 사람이라고 하니.

여러 관동들과 젊은 제자들은 점점 영문을 모르고 노영탄을 둘러싸고 등불을

가까이 디밀어 볼 뿐이다.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 위엄있게 소리를 질러서 분부했다.

" 이게. 무슨 실례의 짓들인고! 어서 저리들 물러나!

이친구는 우리 동지인 노영탄이란 분이시다.

무슨 구경거리나 난 것처럼 몰려들어서 ..........

저 원명 원량! 너희들 둘이서는 저편에 나동그라져 있는 팔조독경오백평이라는 놈과

초산활귀 맹성이라는 두 놈을 네 다리를 한테 합쳐 꽁꽁 묶어서 나무 쌓아 두는 광 속에

가둬 두어라! 날이 밝으면 처치해 버릴 수 있도록 ........."

한편. 여러 사람들은 대전에 있는 객당으로 몰려 들어갔다.

우선 각각 자리잡고 앉아서 쉬기로 했다 .

관동 원명은 여러 사람에게 맛있고 향기로운 차를 끓여 냈다.

하룻밤을 두고 떠들썩했던 벽송관 깊은 숲속에도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은 다시 자리에 누울 생각은 하지않고 이 한밤을 완전히 밝히며

통쾌하게 이야기나 해보자는 것이었다.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 싱글벙글 웃어가면서 먼저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 이번에 회양방 놈들은 가소롭게도 섣부른 생각을 했단 말이지!

그래 가지고 저희들 뜻대로 힘 안 들이고 될 줄 알고?  핫 !핫 ! 핫 !

놈들은 우리 숭양파 전체가 출동을 하구 벽송관에는 방비하는 사람이 통 없는 줄 알았거든!

어림도 없는 놈들!

텅빈 남의 집엘 달려들어서 제멋대로 한바탕 휘둘러보자는  수작이었지.

우리들이 재빠르게 되돌아서서 여기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

더군다나 노영탄 아우가 달려왔다는건 정말 천우신조라고 해야 될 일이지! 핫! 핫! 핫! "

노영탄은 급히 허리를 굽혀 절하며 대답했다.

"선배님께서는 너무 겸손하신 과찬이십니다.

소생은 그저 기미(驥尾)에 붙어서 미력이나마 도와 드렸을 뿐입니다."

노영탄의 대답응 듣더니.

건곤취객 방곤 영감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자못 위엄 있는 표정을 하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 아우! 자네는 우리들하고 나이의 차이는 많다고 하지만 .

피차간에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든지 .

대대로 내려온 세의(世誼) 같은 것을 따져 본다면.

자네가 말끝마다 선배님! 선배님! 하는 것은 적의 듣기에 거북하이.

도무지 그럴 필요가 없단 말야!"

노영탄은 이 말을 듣고 싱긋 웃었을 뿐 무엇이라 대답을 해야 좋을지 입장이 난처했기 때문이다.

방곤 영감은 여전히 엄숙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들의 스승 남해어부 상관학 선배님으로 말하자면 .

당대의 무예계에서 첫손을 꼽아야 될 고명하신 분일뿐더러.

선후배 관계에 있어서도 그분을 따라갈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네.

우리 숭양파를 창설하신 조사 숭양장로만 하더라도 왕년에 강호천지를 무찌러고 명성을

떨치게 되었을 때에 남해어부 상관학 선배님과는 각별히 교정이 두터우셨으며.

우리들의 전대의 대표자이시던 창랑거사 황보자우 아저씨만 하더라도 역시

이 상관학 선배님과는 특별한 교정이있으셨을 뿐더러 언제나 그 앞에는 예의를 깍듯이 갖추고

존경을 표시해 왔으며. 감히 동배(同輩)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사이였네.

다만 우리 스승이신 상관학 선배님 께서는 이미 무예계를 떠나 딴 세상에 사시는 분인지라.

속세의 시끄러운 파란곡절을 대단케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들의 예전 대표자들로 하여금

선배로서 모시기를 끝끝내 싫어 하시고 동지로서 호칭하자고 고집하신 것 뿐일세!"

넓은 객당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엄숙한 말투로 플려나가는 방곤 영감의 말을 듣자.

여러 사람들은 그제야 점점 밝혀지는 노영탄의 정체 앞에.

마치 그들이 존경하여 마지 않는 위대한 선배 남해어부 상관학의 분신이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듯 존경의 시선을 노영탄에게로 집중했다.

방곤 영감도 새삼스럽게 노영탄을 다시 한 번 쳐다보면서 만면에 대견하다는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 아우! 자네가 우리들의 대선배 상관학 선생의 유일한 입실제자(入室第子)이고 보니

규칙대로 하자면 우리들이 도리어 자네보고 선배라고 불러야 마땅하겠네.

그러나 상관학 선배님께서는 이미 속세를 등지시고 먼 곳에 사시는 분이니

우리들이 세속적인 안광으로 교분을 논할 처지도 못되고 .

또 그런 속된 예의로 자네를 대한다면 도리어 무성의 한 태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자네가 말끝마다 선배님! 선배님! 하는 것은 도리어 우리들이 감당하기 어려워서 ....."

노영탄은 방곤 영감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가로막아 버리며 어디까지나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아직도 나이도 어리고 배운 것이 없는 소생의 몸으로 어찌 감히 자존망대(自尊妄大) 하겠습니까!"

건곤취객 방곤 영감은 노영탄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몇 번인지 끄덕끄덕 만면의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혈기방장한 청년의 몸으로서 이렇게 겸손한 노영탄의 태도에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아우 자네는 정말 남해어부 상관학 선배님의 유일한 고제자(高第子)가 되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일세 !

몸에 그만큼 놀랍고 뛰어난 무술의 절기와 예의를 지니고도 오히려 이렇게 공손하고

겸허할 줄 아니 존경하지 않을 도리가 없거든 ...........

이렇게 하기로 하세!

우리들도 속세에서 흔히 돌아다니는 칭호로 자네를 부르기는 싫으니 동지라고 하지.

서로 동지라고 호칭하기로 어떤가? 자네생각에는 ........."

노영탄은 그 이상 사양하고 겸손한 태도만 보이면  그것이 어떤 형식에만 사로잡히는

태도가 되어버리고 마음에도 없는 허례허식 같이 상대방에게 오해를 받게 될 것을 생각하고

허심탄회한 웃음을 상쾌하게 웃어 보이며 선선히 대답했다.

"하하하 ....... 어르신네들께서 일개 젊은 아이를 무엇이라 불러주신들 ..........

그게 그다지 문제가 돼겠습니까!

하찬은 존제를 그렇게까지 불러주신다면 소생은 복종하옵는 것 뿐이죠 !"

"와하하하 ........하하."

"핫! 하 ! 핫 ! "

"호호호 ........호호."

형형색색의 웃음소리가 한데 뒤섞여서 넓은 객당의 새벽 녘 맑은 공기를 흔들었다.

"그럼. 이제부터 저는 노공자를 아저씨라고 불러야만 되겠네요 !  호호호........"

봄눈이 녹는 것 같이 소리없고 조용하고 얌전한 미소가 감욱형의 입가에 가느다랗게

떠오르는 찰나. 두 볼은 무안을 당한 사람처럼 화끈하고 빨갛게 달아올랐다.

'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공연히 ......... '

' 잠자코 있으면 그뿐인 것을 .........'

이런 생각이 감욱형의 머릿속을 바늘 끝으로 꼭 찌르는 것 같았지만.

왜 그런지 그렇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자리에서 선배니 후배니 동지니 하고 촌수를 따지자면.

감욱형은 응당 노영탄을 보고 아저씨라 불러야 마땅한 입장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그런지 쑥스럽고 부자연스럽고 이상하게 여겨저서 자신도 모르게 불쑥

입밖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이런 말을 해놓고 두 볼이 새빨개진 감욱형 보다도 더 한층 당황해진 사람은 노영탄이 었다.

그는 대뜸 한편 손을 흔들어 감욱형의 말을 가로막아버렸다.

 "그건 .....그건 천만에 .......소생이 어찌 감히 아저씨 노릇을 ?

우리들 사이에는 역시 지금과 같이 그대로  핫........핫........핫........ '

젊은 마음과 마음이 미묘하게 출렁대고 있는 이 순간에 감욱형은 마침내 대담해졌다.

노영탄이 말을 더 계속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해 버리려는 눈치를 알아챈 감욱형은

더욱 앙큼스런 화살을 던졌다.

"그건. 그건 무엇 때문이죠 ? 무슨 까닭으루요 ? 엄연히 아저씨뻘이 되시는 분인데 뭘 ........

호호호 ......... "

두 볼이 타오르는 부끄러움이 홍조를 지워버리기 위해서인지 .

감욱형은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깔깔대고 웃었다.

빤히 알고 있는 상대방의 마음 속에 한 개의 조약돌을 퐁당 !

던저서 귀여운 파문을 일어켜 보고 싶은 아가씨의 심정이리라.

"그야 ......... 그야 ..........구테여 아저씨니 뭐니 ..........."

감욱형이 깔깔대고 웃는 바람에 더욱 입장이 군색해진 것은 노영탄이였다.

무어라 까닭을 말하며 그저 우물쭈물 두 볼이 귓전까지 새빨개져 가지고

벌린 입으로 혀끝을 지긋이 깨물며 그 이상 말을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말과 표정을 살피고 있던 건곤취객. 어양검사  그리고

독응구붕 영감들도 그만하면 눈치를 챘다는 듯 서로 처다보며 빙그레 웃을 뿐이다.

이윽고 방곤 영감이 또 한바탕 껄껄대며 웃고 나더니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얘. 욱형아 ! 너도 세상에 흔해 빠진 계집아이가 아닐진데 .

무엇 때문에 반드시 명칭이 필요하다는 거냐 ?

노동지와 너는 이미 오래전 부터 친구로서 지내왔다면 앞으로도 여전히 그런 관계로

사귀어 나갈 일이지 그래서 안 될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

무슨 아저씨니 조카니 ........ 그런 것을 우리 노동지도 따지기 싫어하는 사람일거다 !"

이 몇 마디 말은 감욱형의 부끄러움에 부채질을 했다.

귀밑까지 빨개진 얼굴을 푹 수거리고 입을 꼭 다문 채 땅만 내려다보는 감욱형.

수줍음에 고개를 숙인 아가씨의 모습은 아름답기보다 가련해 보였다.

노영탄은 자기 때문에 공연한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주는 것 같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좌불안석. 자리에서 일어설 듯 혹은 그대로 다시 주저앉으려는 듯 하고 .

이상야릇하게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고 까닭모를 대답을 했다.

" 네 ! 네 ....... 어러신네들께서 그런 뜻 이시라면 ..........."

여러 사람들은 또 다시 와 하고 환성을 터떠렸다.

어린관동 녀석들까지 즐겁다는 듯 손뼉을 치며 까불었다.

두 젊은이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것같았다.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눈앞에 보이는 두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서리어 있는 애절한

그리움과 싹트는 사랑을 그 그림자라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객당안이 조용해졌다.

감욱형과 노영탄도 다시 정색을 하고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기는 하지만.

어쨌던 여러 사람 앞에서 어색한 기분을 금 할 길이 없었다.

"여러분 ! 진지들 잡수십쇼 ! "

날이 훤히 밝아 왔다.

아침식사를 알리는 도사(道士)의 걸쭉한 음성이 감욱형과 노영탄을

이런 어색한 분위기에서 해방시켜 준 셈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의 태양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멀리멀리 쫓아버렸다.

서리와 이슬이 삼라만상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는 심산유곡에 아침해가 내밀기 시작했다.

만무리 이미 활기를 회복했다.

산도 나무도 바위도 그 사이에서 지저귀는 새들도 기쁨이 넘치는 명랑한 낯으로 

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또한 통쾌하기도 한 겨울날 아침을 맞이했다.

 

벽송관은 하룻밤의  분란을 치르고 난 다음에.

평소의 조용함과 깨끗함과 안정된 분위기를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아침식사가  끝났다.

여러 사람들은 잠시 휴식했다.

건곤취객 방곤. 어양검사. 독응구붕 세 영감과 노영탄. 감욱형. 다섯 사람이 상이한 결과

팔조독경 오백평과 초산활귀 맹성을 끌어내어 심문하기로 결정했다.

벽송관 대전위에 임시로 향당(香堂)을 한 자리 꾸몄다.

정면으로는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 자리잡고 그오른편에는 어양검사 단목심곡 영감 .

왼편으로는 독응구붕 영감 . 이렇게 숭양파문중의 세 선배 격 인물들이 버티고 앉았다.

노영탄은 세 선배들 위치에서 다소 떨어진 측면에 혼자서 따로 자리를 자고 앉았다.

감욱형은 수양파의 제자 중 한 사람인지라  그 위치를 찾아서 방곤 영감의 등 뒤에 섰다.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 우렁찬 음성으로 아침결의 깊은 산속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호통을 첬다.

" 어젯밤. 감히 우리 벽송관엘 당돌하게도 침입해 들어왔던 두 놈을 냉큼 이리로 끌어내라 !"

" 예 ! "

돌층계 아래  몰려들었던 수많은 부하들이 와 !

함성를 지르며당장에 두 놈을 가두어 둔 광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삽시간에 다시 돌층계아래로 몰려들어 두 줄로 질서 정연하게 갈라섰다.

가운데로 훤히 트인 길로 팔 다리를 꽁꽁묶어서 송장같이 뻗어버린 두 놈의 범인이

질질끌려 나왔다.

팔조독경 오백평과 초산활귀 맹성. 두 놈들을 어젯밤에 꽁꽁묶어서 광 안에 가둬둘 적에

노영탄은 놈들의 혈도를 다시 풀어주어서 목숨만은 살려 주었다.

그러나 하룻밤을 광 안에 갇혔다가 끌려 나오는 두 놈들은 얼굴빛이 초취하기 이를 데 없었고

제정신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두 놈이 향당 위로 끌려올라갈 때 초산활귀 맹성은 이미 평소의 그 위풍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이 전신이흐늘흐늘 뼈 없는 동물같이 간신히 기어올라가서 심판을 기다릴 뿐.

팔조독경 오백평은 그래도 억지로 제 정신을 수습하려고 애쓰며 두 눈을 부럽뜨고

이를 악물고 평소에 하던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껄려 올라가면서도 흉흉한 안광으로

향당 위에 앉아 있는 여러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건곤취객 방곤 영감은 끌려온 두 놈을 내려다보며 한편 손을 높이 들어 향당에 배설되어 있는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 .

추상같이 싸늘하면서도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으로 준엄하게 호통을 첬다.

" 네! 이놈들! 천하에 대담무쌍한 비도 놈들아!

감히 강호천지에 정당한 규칙이란 것을 무시하고 신의란 것을 헌신짝 같이 여기고 

우리 벽송관에 몰래 침입해 들어 오다니 ! 

이놈들! 하늘이 무심할 줄 알았느냐?

이제 우리에게 붙잡힌 몸이 되어서 .

그 꼬락서니를 하고도 아직도 주둥아리를 놀려서 하고 싶은 말이있다면.

어디 서슴치 말고 말해봐라 !"

그러나 그대로 굴복할 팔조독경 오백평은 아니었다.

" 흐응 ! "

코웃음을 치고 징글맞게 한바탕 웃어 제치더니

아직도 남아 있는 목청을 있는 대로  뽑아내어 발악을 하는 것이다.

" 늙은 것이 함부로 주책없이 설치지 말란 말이야!

이 서방님이 네 놈들의 손아귀에 빠졌다고 멋대로 죽여버릴 수도 있겠지만

너희들 숭양파들도 깨끗이 멸망해 버릴 때가 경각지간에 닥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란 말이다!

네 놈들 한 놈도 남지 못하고 뼉다귀도 추리지 못하고 없어져버릴 것이다.

헤헤.......헤헤헤 이 서방님이 설사 네 놈들 손에 죽는다 해도 그것은 보람 있는 일이 될 터이니까...

....헤헤헤............"

방곤 영감은 물론. 다른 여러 사람들도 이 말을 듣고는 놀랍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해서

한동안 팔조독경 오백평을 노려다 볼 뿐이었다.

이 놈은 반드시 무슨 까닭과 속셈이 있어서 이따위 말을 기탄없이 지껄여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방곤 영감이 또 한 번 호통을 첬다.

"네 놈은 끝까지 대답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적이로다 !

아직도 그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릴 용기가 남아 있다니 !

빨리 네 놈들 회양방의 음모와 흉계를 사실대로 이 자리에서 고백해라 !

그렇지 않으면 네 놈의 목숨은 살아서 돌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 "

팔조독경 오백평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괴상한 눈초리로 여러 사람들을

힐끗 힐끗 휘둘러보면서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한편 어깨를 으슥해 보이면서

미친 사람같이 외첬다.

"헤헤헤 .......네놈도 겁이 나는 모양이로구나.

이 서방님을 공손히 대접해서 회양방에까지 고스란히 돌려보내 드려야 할 망정이지 ......

그렇지 않는다면 네 놈의 죽을 죄를 용서받지 못할 줄 알아라 ! "

이렇게 악을 쓰면서 팔조독경 오백평의 사나운 눈초리가 번갯불처럼 감욱형의

얼굴을 힐끗 쏘아 봤다.

정말 . 생사를 모르고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날뛰는 미친놈의 태도였다.

방곤 영감과 그밖에 여러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다같이 분노를 참지 못하여

얼굴빛이 불같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더군다나 감욱형은 오백평의 미친개처럼 날뛰는 모습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자니.

그 어떤 사람보다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원한을 참을 길이 없었다.

'저런 짐승같이 악독한 놈이 감히 이 자리에서도 ? '

회양방 놈들의 아성인 금사보에 납치 당하고 감금되어 겪었던 가지가지 고초를 생각해 보자니

감욱형은 더 한층 분노의 불길이 가슴 한복판으로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 흥 ! 이놈이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 있다고 ............

관대한 처분을 내려준 걸 모르고서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니 ! '

노영탄도 이런 생각을 혼자 하면서 어처구니없는 눈초리로 팔조독경 오백평을 노려보고 만 있었다.

노영탄은 회양지구 일대에 있어서. 일찍이 팔조독경 오백평의 추악한 명성을 너무나 귀 아프게

듣고 있었다.

어젯밤에 여전히 악날하고 잔인한 잔꾀를 써 보려는 오백평을 친히 대하고 보니

노영탄은 그대로 참고 넘어가기가 힘 들었다.

노영탄의 강직한 성격이나 정의감에 불붙는 감정으로는 한 번 악한 놈이라고 인정하고

적대시 해야만 할 인물에게는 추호도 용서를 하려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 어디서나 스승 남해어부의 5년 동안의 교훈이 노영탄의 행동을 그림자 처럼

따라다니며 감시하고 있는 셈이다.

' 참을 수 있는 데 까지 참아야 한다 ! 될 수 있는 데 까지 피하고 잔인한 살육을 피해라 !

나쁜 놈들이라고 무조건 죽이는 것은 무예의 올바른 정신이나 태도가 아니다 !'

스승을 떠날 때 신신당부한 말이 언제나 노영탄의 칼끝을 가로막고 내닫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노영탄은 아무리 잔인한 적을 상대했을 때에도 두드러지게 이름을 드러내고

강호천지에서 선량한 백성을 해치는 놈을 제외하고는 인명을 해친 적이 별로 없었다.

 노영탄이 금사보에서 처음으로 감욱형을 구출해 냈을 때 공교롭게도 한빙선자 연자심에게

박해를 가하고 있는 팔조독경 오백평과 맞닥뜨리게 되었었다.

비록 오백평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한빙선자 연자심을 악중악이 구출해 가지고

달아난 결과가 됐다고 하지만 . 그때부터 팔조독경의 독하고 잔인한 인상은 노영탄의

머릿속에 깊이깊이 뿌리박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팔조독경 오백평이 벽송관의 기습에 끼어 달려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노영탄은 절대로 호락호락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혼자서 단단히 결심했던 바이다.

그런데도 팔조독경 오백평은 꿇어앉은 죄수의 몸이 되어 가지고도 오히려 미친놈처럼 날뛰고

고함을 지르고 사납고 무서운 눈초리로 감욱형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끝끝내 오만불손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지 않는가 !

불끈 !

노영탄은 가슴속에 불덩어리처럼 용솟음쳐 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 저런 고얀 놈이 ? 아직도 혼이 덜 나서 .........

당장에 주둥아리를 놀리지 못하게 침을 한 번 더 호되게 주어야 할까보다 !'

노영탄은 들먹들먹하는 두 주먹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노영탄은 자신이 처해있는 입장이나 신분을 곰곰히 생각해 봤다.

경거망동을 삼가하고 어디까지나 신중히 처신을 해야겠다고 생각 했다.

냉정히 생각했을 때 자기자신은 한낱 번외자요.

외부에서 우연히 이 자리에 임하게 된 손님의 입장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점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노영탄은 벌써부터 팔조독경 오백평을

또 한 번 톡톡히 혼을 내서 찍소리 못하도록 그 오만불손한 태도를꺾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벽송관의 주인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손을 대기 전 까지는

제3자의 입장에서 먼저 우쭐대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얼굴을 처들고 한바탕 큰소리로 웃었다.

" 어허허허허헛! 헛! "

다음순간 방곤 영감의 얼굴은 침통하고 엄숙하게 가라앉았다.

무서운 음성으로 호통을 첬다.

" 이 생쥐같이 당돌하고 얄미운 놈아!

죽음이 목전에 닥쳐오는 데도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다니!

그래도 네 놈을 다소나마 쓸모가 있다고 인정했기에 망정이지 ...........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네 놈은 내 손으로 목을 졸라버렸을 것이다!

발칙한 놈!

천둥벌거숭이 같이 천방지축을 모르고 날뛰는 네 놈의 그 병신 아비를 믿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다니 네 이놈 !

그래 네 놈이 네 아비만 믿고 까불면 감히 우리 숭양파를 어쩌겠단 말이냐?

에잇! 고얏 놈! "

방곤 영감은 여기서 말을 끊더니.

머리를 돌이켜 왼편에 있는 독응구붕 영감을 보고 말했다.

" 구붕 아웃님 ! 요놈은 좀 더 혼이 나지 않으면 실토를 하지 않을 것 같으오.

사실을 숨김없이 말할 때 까지 어디 아웃님이 슬슬 구슬려 보시오 ! "

" 흥!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맞을 보여 줄까 ! "

독응구붕 영감이 벌떡 일어나더니 자리를 떴다.

" 흥 ! 흥 ! 흥 !  하늘이 높다는 것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철부지 자식이로구나 ? "

독응구붕 영감은 몇 번인지 코웃음을 치며 냉소하더니.

팔조독경 오백평 앞으로 가까이 걸었다.

오른팔을 흘쩍 뻗더니 식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꼿꼿이 일어켜 세워가지고 

오백평의 어깨죽지를 정통으로 화살이 꽃히듯 매섭게 찔렸다.

팔조독경 오백평은 전신을 꽁꽁 묶인채 있어니 손발을 옴짝달싹 할 수 없을 뿐더러

도망을 쳐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어깨죽지 급소를 누러고 화살처럼 날아더는 독응구붕 영감의 두 개의 손가락을

피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팔조독경 오백평은 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금방 얼굴빛이 백지같이 핼쑥해졌다.

별안간 학질이라도 걸린 사람같이 와들와들 전신을 떨었다.

" 우후후 ........훗 ! "

숨막히는 비명이었다.

전신의 뼈 마디마디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것 같고.

아프고. 근질근질하고. 찌릿하고. 시끈시끈하고 ......................

무슨 맛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오백평은 신음소리를 참지 못했다.

여러 사람들의 긴장된 시선 속에서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숨막히게 흘렸다.

팔조독경 오백평의 이마 위에는 땀이 비 오듯 흘러 내렸다.

" 후우 후우 후우. "

점점 급박해지는 가쁜 숨소리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또 다시  몇 초가 지나지 않아서 그의 이마에 흐러는 땀방울은 마치 줄을 끊긴 구슬처럼

쭈르륵 무더기로 흘러 내렸다.

" 으흐흐 ......흐흐........."

호흡 소리인지 비명 소리인지 분간키 어려운 신음 속에서 전신을 와들와들 떨 뿐이었다.

이렇게 지극히 짤은 순간에 한바탕 혼이난 팔조독경 오백평은 그제야 여태까지의 

오만불손 하던 광태가 씻은 듯이 없어졌다.

그는 마침내 나사못을 조이듯이 전신으로 죄어 들어오는 괴로움을 그 이상 참을 수 없어서.

" 나 .....나 ....... 나........ "

하면서 와들와들 떨리는 입술을 크게 벌렸다.

" 나 ...... 나 ...... 말을 말을 할테니 .......여러분 ! 나 .........날 좀 빨리  풀어 주시오 ....... "

팔조독경 오백평의 얼굴에는 한 목숨을 건지고 싶다는 애원의 뜻이 가련하게 넘쳐 흐르고 있었다.

죽음속으로 빠저 들어가는 것같이 초점을 잃고 부옇게 된 크다란 두 눈동자 만이 향당 위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순서없이 휘둘러보며 차마 감겨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 눈동자는 마치 입 대신 이렇게 호소하고 애걸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이때까지 까불고 떠들고 한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절대로 사람을 괴롭히거나 함부로 죽이지도 않을 것이니.

그저 목숨만 .......

여태까지 기고만장해서 떠든 모든말은 한가지도 그것을 이행할 용기가  없어 졌습니다.

모든 의사를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 '

향당 위에 있는 여러 사람들은 팔조독경 오백평의 가련한 애걸의 꼬락서니를 바라보며

가소로움과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저렇게 형편없이 당장에 맥을 못추는 변변치못한 위인이 발악을 하고 미친 듯이

날뛰었단 말이냐 ! "

방곤 영감은 도리어 동정이 가득찬 음성으로 불쌍하다는 듯 이렇게 말하더니.

독응구붕 영감에게 턱을 한 번 끄덕해 보이며 말했다.

" 아우님 ! 한 번만 더 저놈을 풀어 줍시다 !  저놈도 이제야 설마 ........."

이 말을 듣더니 구붕 영감은 팔조독경 오백평에게로 뚜벅뚜벅 걸아갔다.

" 원. 별 시시한 놈이 다 사람을 성가시게 구는 구나 !

이철부지 녀석아 ! 여기가 어딘줄 알고 함부로 기어 올라와서 귀찮게 구는얀 말야 ! "

구붕 영감은 혼자 중얼중얼 하면서 팔을 뻗더니 오백평의 등들미. 등줄기를 탁처 놓고 

가볍게 손바람을 일어켰다.

손바람을 쇠고 나더니 팔조독경 오백평은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는 모양이었다.

얼굴에도 차차 화기가 돌기 시작했고 땀도 흘러내렸다.

가쁜 숨을 몇 번인지 몰아 쉬더니 얼마전과 같은 제 모습을 도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팔조독경 오백평은 제 정신을 다시 돌리기는 했으나 이미 진이 빠지고 맥이 풀려서 

송장이 지껄이 듯 힘없는 소리를 혁. 혁 숨이 막혀 가면서 억지로 토했다.

" 당신네들도 아시다시피 우리 아버님께서는 이월 초이틀을 기해서

홍택호 호반 옛날의 싸움터에서 다시 결투를 해 보기로 당신들과 약속이 되어 있는데

당신네들 숭양파 전원이 이날 이 자리에 빠짐없이 몰려들 가기만 한다면

그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나는 장담하오 !

왜냐하면 우리 아버님께서는 숭명 기경객이란 분의 계획을 채택하셔서  ......... "

오백평이 말을 다하기도 전에.

성미 급한 독응 구붕 영감이 펄쩍 뛰면서 고함을 질렸다.

" 저런 죽일 놈이 아직도 .........

어째서 우리가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오질 못 한다는 거냐 ?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서 .......... "

옆에서 방곤 영감이 구붕 영감의 한편 어깨를 툭 치면서 눈을 찡긋찡긋 해 보였다.

너무 성급히 굴지 말고 놈의 고백을 더 들어보자는 권고였다.

그제서야. 무엇에 놀란 것 같이 어리둥절 했던 팔조독경 오백평은 다시 힘없이

꿈쩍꿈쩍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 .......우리 아버님께서는 .........놀라지 마시고  ......... 내 말이나 더 들어보시오 !

저. 바다 위에 출몰하는 털북숭이 양민들에게서 서양 화약이란 것을 엄청나게  많이

사들이셨단 말이요.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한개의 무시무시한 지뢰란 것을 만드셨소.

그것을 당신네들이 반드시 경과하리라는 지점에 묻어두고  ........

만일에 우리편에서 초청해온 고수급 인물들이 당신네들과 싸워서 이긴다면 모르거니와 .......

그렇다면 이 무서운 물건을 포발 시키지는 않지만 .

당신네들을 물리치고 이겨낼 수 없는 경우에는 우리편에서는 초청해 온 고수들을 시켜서

고의로 패하여 도주하는 체하고 당신네들을 유인해서 지뢰가 파묻혀 있는 지점 가까이

이껄어 놓고 이것을 폭발시켜 버리기로 ............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요 !

이렇게되었다면 당신네들은 어찌 단 한 사람인들 ...........

살아서 돌아갈 생각인들 할 수 있겠소 !

내가 알기에는 이 지뢰란 물건의 힘이란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그언저리 삼십 장 이내에 있는 사람이면 제아무리 놀라운 재간을 몸에 지녔다 해도

이것이 한 번 폭발하면 절대로 그 화력의 테두리 밖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 하오 !"

여기까지 말하고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팔조독경 오백평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여러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볼 뿐

그것은 너무나 놀랍고 너무나 잔인무도한 흉계요.

일찍이 무예계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감욱형과 노영탄은 서로 흘끗 쳐다보며 몸을 오싹 떨었다.

' 저런 잔인무도한 놈들이 !'

노영탄은 또 한 번 불끈 쥐어지는 두 주먹을 억지로 참았다.

팔조독경 오백평은 두 눈알을 두리번두리번 몇 번이지 굴려가며 여러사람들의 얼굴을

휘둘러보았다.

심중에 어떤 딴 생각이 번갯불처럼 퍼뜩! 스치는 모양이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 본래. 우리 아버님께서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일을 하시려 들지 않았지만.

다년간 은거생활을 해온 여러 무예계의 고수들이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소위 정통파 의 고수들을 깡거리 없애 버릴 작정으로 .

그리고 난 다음에 그들은 무예계를 자기네들 뜻대로 휘두르고 제패해 볼 양으로......

그래서 그들이 우리 아버님께 이런결단을 내리도록 졸라댄 것이었소 !

우리 아버님께서도 그들의 계획을 과히 반대하실 의사가 없어 뜻을 쫓아서 

감행하기로 한 것이요 ! "

그러나 사실인즉 팔조독경 오백평의 말은 절반은 사실이기도 했으나 

또 절반은 고의로 무시무시한 죄악을 유발시키고자 하는 흉측스런 배짱에 지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금모사왕 부자들은 소위 무예계의 고수라는 늙은 마귀 같은 놈들을 

무수히 초청해 놓고 나서야.

이놈들이 저마다 엉뚱한 야심과 시커먼 배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 단 한 놈도 진심으로 힘을 합쳐 주고 도와 주려는 자는 없었다.

이런 마귀 같은 존재들이 꼬리처럼 매달려서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을 무서운

놈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금모사왕 부자는 선뜻 여기에 대쳐해야만 될

한가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만일에. 이 방법이 성공만 한다면 장래에 금모사왕 부자가 무예계를 송두리채 눌려버리고 

호령하며 가히 어깨를 견줄 인물이 없어 독패(獨覇)를 실현해 볼 수 있으리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본래 금모사왕 부자는 심히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냈다.

" 설사 숭양파를 깨끗이 소탕해 버릴 수 있다해도 ............"

이것이 제일 큰 고민이었다.

"협조해 달라고 청해 온 고수라는 위인들이 제각기 제멋대로 날뛰고 야심을 채우려 덤벼든다면 ?"

이것은 눈앞에 뻔히 내다보이는 무서운 우환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에 이렇게 된다면 금모사왕이라는 지위까지 고스란히 늙은 마귀같은 놈들에게 빼앗기고

말 것이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은 흡사 이리때를 방안으로 불러들이는 결과가 될 것만 같았다.

' 이번 기회에 이놈 저놈 가릴 것 없이 양편 놈들을 깡거리 몰살시켜 버릴 묘안은 없을까?'

금모사왕은 오랫동안 침식을 저버리다시피 묘계를 짜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그들 부자가 생각해낸 것이 이 무시무시한 방법이었다.

일석이조를 노린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모든 거추장스런 존재들을 철저히 해결해 치우자는 야심이었다.

' 흐음 ! 그게 제일 좋은 묘계다 ! '

아들의 손목을 잡고 만면에 징글맞은 미소를 띠며 이렇게 딴 배짱으로 그 계교를 받아들인 

금모사왕이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계교는. 어디까지나 금모사왕 부자가 합의를 보고 결정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앙큼스런 아버지와 아들은 이것이 전혀 기경객이라는 인물 혼자서

꾸며낸 의견이요.

계획적인 것처럼 표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뒤에 숨어서 아무도 모르게무시무시하고 끔찍끔찍한 독계(毒計)를

꾸미고 엉뚱항 배짱을 가지고 있었다.

비단 무예계의 정통파 인물들만 모조리 폭사시켜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그들이 초청해온 여러 이파의 마귀 같은 인물들도 한꺼번에 그 지뢰의 폭발 속에

깡거리 태워버리자는 무서운 흉계를 꾸며낸 것이다.

이렇게 되기만하면 시끄러운 후환을 깨끗이 없애고 그들 부자만이 길이 무예계의 온갖 재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정통파든 이파든 모조리 거꾸러뜨린 뒤라면 그들 부자는 힘 안들이고 개세천왕의 유서와

지도를 가지고 아직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고스란히 파묻혀 있는 연약파의 가지가지 보물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또 무예계의 비전 지보라는 『숭양비급』까지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면.

일은 얼마나 묘하고 신바람 나게 될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 두이 이 세상의 온갖 복이란 복을 누려 가면서 한편으로는 마음 편히 절세의

무술의 재간을 서서히 연마해 나간다면 그때에는 천지가 아무리 넓다한들 그들 부자를 제하고야

또 어떤 다른 강자가 있을 수 있을 것이랴. 

그것은 과연 기묘한 계획이였다.

또한 악독하기 비길데 없는 흉계이기도 했다.

금모사왕 부자를 제하고는 하늘도 땅도 어떤 귀신도 알아차릴 수 없는 기기묘묘한 독계였다.

하물며. 숭양파 인물들이야 이런 사실을 어찌 꿈엔들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랴.

이런 흉계를 남몰래 꾸미고 있었기 때문에 금모사왕은 금사보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방어선을 쳐놓고 한편으로는 아들 팔조독경 오백평을 숭산으로 파견하여 몰래 침입해

그 혀를 찔러서 비급을 약탈하자는 것이었다.

그들 부자의 계획은 기막히게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들 부자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단. 벽송관이 든든히 경비를 갖추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노리는『숭양비급』도 벌써철장단심 탁창가가 몸에 지니고 떠났으며

적당한 장소를 택해서 다시 감춰 버렸기 때문이다.

" 이놈아 ! "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질렸다.

" 이놈아 ! 그 지뢰란 것을 어디다 묻어 놓았단 말이냐 ? 그것을 똑바로 대지 못할까 ? "

" 그 ........ 그것 까지는 ......... 나는 .......... 나는 자세히 모르오 ! "

" 고얀 놈 ! 모르다니 ?  또 한 번 혼이 나야 바른데로 대겠는냐 ? "

 처 .......천만에 ........ 나 ......... 나는 사실 그것까지는 모르오 ! 추호도 숨김이 없소 !

모든 비밀을 낱낱히 고백한 이상 내 그것을 안다면 숨길 까닭이 있겠소 ! "

파조독경 오백평은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뚝 떼고 자기의 진심을 알아달라는 듯.

적의 부드러워진 눈초리로 여러 사람의 얼굴을 두루두루 살폈다.

그러나 사실인즉.

오백평은 제가 아는 사실을 숨김 없이 고백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숭양파 사람들에게 붙잡혀 문초를 받게 된 이 마당에서 어쩔 수 없이 

이월 초이튿날 결투에 관해서 회양방 놈들의 작전계획을 누설하기는 했다고 하지만.

아버지 금모사왕과 단 둘이만 알고있는 독계의 전모를 샅샅이 고백할 리는 없었다.

제일 중요한 점인 지뢰를 어떤 지점에다 파묻었는냐 하는데 대해서는 

이렇게 딱 잡아떼고 마는 것이었다.

" 이놈 ! 정말 모르느냐 ? 그것을 어디다 파묻었는지 ? "

"............."

" 이놈아 ! 왜 대답이 없느냐 ? "

"............. "

팔조독경 오백평은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 아무리 호통을 쳐봐도 묵묵부답 벙어리처럼

이 문제에 관해서는 입을 열려 들지않는다.

이놈을 더 추궁해 봤댔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방곤 영감은 .

이번에는 옆에 있는 초산활귀 맹성에게 호통을 쳤다. 

" 네 놈이 대신 대답해라 ! 네 놈은 그 물건을 파묻었다는 지점을 알고 있겠지 ?"

초산활귀 맹성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모가지를 자라모가지처럼 움츠러뜨리고 떨려오는 음성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 .....소 .......소생은 회양방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초청을 받고 도와주려 달려온 몸이니 사실은 무슨 영문인지도 잘 모릅니다.

어찌 그런 중대한 계획을 알 수 있겠습니까 ! "

이말을 듣더니 건곤취객방곤 영감은 더 한층 언성을 높이며 향당의 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호령했다.

" 알았다 ! 이놈들 ! 네 놈들 두 놈 다 배짱으로 ........

그것을 말하지 않키로 결심한 모양이구나 !

어디 두고 보자 !

네 놈들 입에서 실토를 할 때까지 .........

언제까지 말을 하지 않나 보자 !

애들아 !

이 놈들을 당장에 도루 광 속에 끌어다가 가둬 버려라 ! "

" 예 ! "

몇 명의 젊은 제자들이  향당 위로 우루루 몰려 올라와서

팔조독경 오백평과 초산활귀 맹성을 질질 끌어 내려서 광으로 데리고 갔다.

향당에 모였던 여러 사람들이 제각기 흐트러진 다음.

건곤취객과 노영탄. 그리고 그밖에 간부급 인물들은 대책을 강구했다. 

장시간 상의한 결과 최후의 결정을 보았다.

우선 감욱형과 노영탄은 미산호로 빨리 달려가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그 곳에 머무러고 있는 고봉상인 낙이산 노인의 문제를 먼저해결하자는 의도에서 였다.

미산호에서 몹시 초조하고 궁금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을 고봉상인 낙이산 노인의 근심을 덜어 준

다음에 노영탄과 감욱형은 그 길로 홍택호로 빨리 달려가서 여러 사람들과 합세하자는 계획이였다.

한편. 건곤취객과 어양검사. 독응구붕 세 영감은 힘을 합쳐서 팔조독경 오백평과 초산활귀 맹성을

홍택호까지 압송해가서 무슨일이 있더라도 이월 초이튿날 전으로 그곳에 도착하여 

팔조독경을 인질로 내세우고 금모사왕에게 조건을 제시하여 지뢰를 폭발시키지 못하도록

막아버리자는 계획이었다.

벽송관을 비어둔다는 것은 심히 위험한 일이었다.

건곤취객과 그밖에 여러 사람들도 이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

회양방은 이제야 말로 극도로 긴박한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서 두 번 다시 벽송관을 침범할

생각은 없어리라는 단정을 내렸다.

또 가장 중요한 문제는 텅 빈 벽송관에 있지는 않았다.

사태가 기묘하고 놀라운 방향으로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무예계에서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지뢰라는 괴물이 출현했으니.

세 영감은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시급히 회양지대로 달려가지 않을 수없었고.

벽송관만을 돌라다보고 있을 겨를이 없게 된 것이다.

각각 방향이 결정되자.

여러 사람들은 간단한 식사를 급히 끝냈다.

노영탄과 감욱형도 수습해야 할 일을 적당히 수습해서 신변을 거뜬히 정리하고

곧 길을 떠나기로 했다.

" 되도록이면 빨리 다녀 가겠습니다 ! 반드시 기일 전에 홍택호에 다다를결심 입니다.

세 분 아저씨께서도 부디 원로에 몸조심을 하시고 ........

다시 뵈옵게 될 날까지 무사하시기만 빕니다 ! "

준수하고 늠름한 얼굴에 사나이다운 굵직한 미소를 띠며.

노영탄은 세 영감에게 자신만만한 인사를 남기고 산 아래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 노동지야말로 ..... 몸조심하시고 .... 하루라도 빨리 기약한 곳에서 만날 수 있도록 ....."

세 영감들도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자못 대견하고 믿음직하다는 듯.

나란히 산을 내려가고 있는 노영탄과 감욱형의 뒷모습을 전송해 주었다.

감욱형과 노영탄이 산을 내려간지 얼마되지 않아서.

건곤취객 방곤.어양검사 단목심곡.독응구붕 세 영감들도 팔조독경 오백평과

초산활귀 맹성 두 놈의 팔을 단단히 묶어서 앞장을 세우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숭산에서 내려온 노영탄과 감욱형은 궁벽한 산 속의 좁고 거친 길에 다다르자.

재빠르게 경신법의 재간을 전개해서 마치 쌍쌍히 나는 나비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곧장 미산호를 향하고 훨훨 날아갔다.

그들의 경신법이란 실로 놀라운 재간이었다.

숭산을 떠난지 불과 이틀만에. 감욱형과 노영탄은 도중에 무엇하나 거리낄 것이 없이.

단숨에 미산호 호반에 다다랐다.

노영탄의 경신법 재간이란 사실 조화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오묘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때로는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때로는 하늘로 무찌르고 뛰고 날고 하는 놀랍게 빠르고

나샌 품은 말로써 형용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것을 한마디 알기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

'눈을 밟아도 흔적을 내지 않는(踏雪無痕)' 경지라고 할까 ?

그러나 노영탄은 그런 재간을 이번길에서 완전히 발휘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감욱형을 아끼고 걱정하기 때문이었다.

감욱형이 과로해서 피곤하리라는 생각이 늘 염두에서 떠나지 않는 노영탄은

미산호 까지 가는 도중에도 몇 번인지 일부러 걸음을 늦추어서 감욱형을 기다려

보조를 맞춰 주곤 했다.

" 너무 억지를 쓰시면 안 되오 ! 천천히 따라 오시오 ! 좀쉬었다 가도 좋고 ....... "

몇 차례나 똑같은 말을 감욱형에게 되풀이 해 주었는지 몰랏다.

마치 어린 누이동생을 아껴주고 걱정해 주는 점잖은 오라버니의 마음씨 같이

착하면서도 조심스럽고 또한 용의주도한 노영탄의 태도에 감욱형은

그저 묵묵히 떠라가며감격과 기쁨으로 가득차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 괜찮아요 ! "

수줍음을 참지 못해 발그스레해지는 두 볼을 감추느라고 애쓰면서.

이렇게 간신히 대답했을 뿐.

그러면서도. 감욱형에게는 절대로 남에게 지기 싫은 완강한 성깔이 있었다.

부끄럽고 미안한 생각에 두 볼이 노상 붉어져서 따라가면서도 감욱형은

몸에 지니고 있는 경신법의 재간을 최고도로 발휘했다.

이를 악물고 따라가면서도 그것을 표면에 나타내기를 싫어하는 앙칼진 감욱형의 성깔이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길은 점점 더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예정보다도 훨신 빨리 두 사람은 미산호 호반에 다다른 것이다.

" 이제 다 왔으니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가기로 합시다 ! "

노영탄은 자못 점잖게 감욱형의 한편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말했다.

두 젊은이는 호반에 나란히 섰다.

아득하게 펼쳐진 호수의 수면에서는 겨울날 쌀쌀스런 물결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찰랑거리고 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두 젊은이들의 화끈화끈하는 얼굴에 왈칵왈칵 끼쳤을 때.

그 시원함은 비길 데 없었다.

가슴속이 갑작스레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의 앞길도 이렇게 차갑고 시원스럽게 탁 트이는 것만 같았다.

망망한 호수의 수면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두 젊은이들은 괘 오랫동안

겨울날 호반의 조용한 시간을 즐기고 서 있었다.

미산호는 산동성과 강소성의 접경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면적이 비록 홍택호에 비해서 다소 작다고 하지만.

호반에서 바라다 보자면 역시 호탕무변(浩蕩無邊)한 수면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시원스런 호수였다.

낭월대사(浪月大師)가 거쳐하고 있는 천암사는 이 미산호에 떠 있는 한 개

자그마한 섬 위에 지어져 있었다.

이 자그마한 섬의 면적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은 .

그 섬 위에는 천암사를 제외하고는 또 다른 집이 없다는 사실로도 넉넉히 알 수 있었다.

낭월대사는 육십이 훨씬 넘은 노인이었다.

창랑거사가 숭양파의 영도자가 된 후 제일 첫째가는 제자였다.

위인이 근엄하고 중후하게 생겼으며 무술의 재간도 이미 오묘하고 불가이한 조화의

경지에 까지 도달해 있었다.

강호 무림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고수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너무나 솔직담백한 사람이 되어서 세속적인 일에 끌려 들어가거나

참여하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또 한편. 그는 출가하여 중이 된 몸인지라 숭양파의 대표자의 직위를 계승하기를 꺼려하고.

일년 열두 달을 언제나 천암사에 거처하면서 바깥 세상인 강호 땅에 나가서 직접 행동을 할

때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바깥 세상의 가지가지 소식에는 정통해 있었고 연락이 기막히게 빠른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한 마리의 매를 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매란 놈은 사람의 뜻을 알아채는데 비상히 총명한 짐승으로서.

강호 넓은 천지를 고루고루 내왕하면서 서신을 전달하고 긴급한 연락을 하는 데 무시 못할 

중대한 역활을 하고 있었다.

이 크고 사납게 생긴 매란 놈이 바로 묵우였다.

얼마전에 노영탄과 감욱형이 홍택호 적화주 근처에서 만났던 바로 그 검정매임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노영탄과 감욱형이 호반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초저녘이 가까와 올 무럽이었다.

한 줄기 요염하리만큼 새빨간 석양 놀이 부드럽고 가느다랗게 마지막 광체를 발사하면서

천천히 서녘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호수 수면 위에는 단 한 척의 범선도 나룻배도 보이지 않았다.

호반은 어느 쪽을 건너다 보아도 광막하고 거친 벌판 뿐이었다.

" 어떻게 물을 건너간다 ? "

호반의 시원스런 겨울날 황혼의 경치에 도취해 있던 노영탄은 문득 이렇게 혼자말을 하면서

섬에까지 물을 건널 방법을 걱정하고 있었다.

감욱형은 이 말을 듣더니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호수 수면을 향하여 가까이 걸어가더니

무엇에 놀란 듯이 소리를 질렸다.

"저걸 좀 보세요 ! 우리들은 저걸 여태 못 보고 있었군요 ! "

감욱형의 음성을 들으며 노영탄이 급히 앞으로 달려가 보니 호반 한편으로 서 있는 큼직한

수양버들 아래  세 척의 자그마한 배가 매여져 있지 않은가.

두 젊은이들은 지난날의 잊기 어려운 배의 추억을 더듬으며 기쁘서 어쩔 줄 몰랐다.

감욱형이 앞장을 서서. 한 척의 배 위로 가볍게 뛰어 올라갔다.

서슴치않고 뱃줄을 폴고 노를 잡았다.

노영탄도 두 발로 한 번 땅을 구르기가 무섭게 어너 틈엔지 흘쩍 날아서 배 위에 내렸다.

모든 일에 아무래도 감욱형은 힘이 부쳤다.

노영탄은 선뜻 대들어서 힘을 합쳐서 굵다란 뱃줄을 단숨에 버드나무에서 풀어버리고

배를 띄우기 시작했다.

노영탄은 파양호에서 5년 동안을 지넨 몸이다.

헤엄을 치다거나 배를 젓는데 굉장히 익숙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감욱형이 아무리 혼자서 노를 젓겠다고 버티어 봐도 노영탄이 볼적엔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이 육지에서만 자라난 아가씨가 배를 저을  줄 알 까닭이 없었다.

" 이리 주시오 ! 내가 저으리다 ! "

보다보다 못해서 노영탄은 감욱형이 잡았던 노를 빼앗아서 대신 혼자서 노를젓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듯이 뱃전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버리는 감욱형의 모습은 또한 아름답기만 했다.

자그마한 배 한 척은 정다운 두 젊은이들을 태워 가지고 바람 없이 잔잔한 푸른 물결을

조용히 헤치며 살거머니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평온하고 경쾌하게 한 줄기 성을 그으면서 호심을 향해서 화살처럼 빠르게 달려들어갔다.

마지막 석양이 남길 듯 말 듯 끌고 가려는 한줄기 노을. 창망한 하늘과 수면.  

그리고 싸늘하고 조용한 겨울날 공기 . 이 속에서 두 젊은이들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그들은 말이 필요 없었다.

열심히 노를 저으면서도 그 시선은 한시도 감욱형의 얼굴을 떠나지 않는 노영탄.

또한 입을 꼭 다문 채 노영탄의 얼굴만 응시하고 뱃전에 앉아있는 감욱형.

언어로서 표현조차 할 수 없이 얽히고 설킨 정과 정을 말 없는 침묵이 언어 이상으로

민감하게 두 젊은이들 사이에 전달시켜 주고 있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황혼의 호수 위에 배 한 척을 저어가는 다정스러운 젊은이들의 모습.

이 경치에 이 인물들. 그들은 세상을 등지고 사는 한쌍의 신선의 가족이나  후예라고 해서

무엇이 과언일 것이랴.

어느 틈엔지 자그마한 배는 묘아서에 닿았다.

노영탄은 배를 멈추고 감욱형을 부축해서 먼저 배 밖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서야 자신도 성큼 단숨에 배 위에서 배 밖으로 뛰어 나왔다.

두 사람이 마악 배를 내려 육지로 올라왔을 때.

어느 틈에 보았는지 천암사로부터 동승 두 녀석이 반색을 하고 달려나왔다.

감욱형 앞으로 대들기가 무섭게 숨이 턱에 닿아서 말했다.

" 욱형 누님 ! 어째서 이제야 겨우 오십니까?

아저씨께서는 여간 초조하게 기다리시는 게 아닌데요 ! "

감욱형은 두 동승의 말을 듣고도 말대답을 해 줄 겨를도 없었다.

손짓을 해서 노영탄을 급히 부를 따름이었다.

감욱형은 천암사 문을 향해서 걸음을 빨리 할 뿐이었다.

노영탄도 무슨 말을 꺼낼 겨를도 없이 감욱형의 뒤를 따라가는 도리밖에 없다.

두 사람은 천암사 문안으로 달려 들어간 다음.

다시 뒤로 돌아가서 몇 번인지 회랑을 꿰뚫고.

누각을 돌고.

꼬부라지고 또 꼬부라지고 한 후에야 간신히 한군데 높직히 솟아있는 운방(雲房)문 앞에 다다랐다.

두 사람이 채 걸음을 멈추기도 전에 방안에서는 벌써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차리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 욱형아 웬일로 이렇게 늦었느냐 ?  빨리 들어오너라 ! "

감욱형은 다짜고짜로  노영탄의 한편 팔을 잡아 끌더니 서슴치 않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오십을 훨씬 넘어 뵈는 노인 한 분이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얼굴이 여위었으며 안색이 몹시 초취해 보였다.

그러나 정신만은 오히려 또랑또랑해 보였다.그

 노인은 방안으로 들어서는 감욱형과 노영탄을 흘끔 한 번 바라다보더니

그 초췌한 얼굴에도 자못 흥분을 참지 못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빙그레 힘없는 미소를 띠었다.

" 욱형아 ! 그분이 바로 언젠가 네가 말한 노협사. 바로 그분이신 게로구나 ?"

" 예. 똑바로 보셨어요 ! "

감욱형은 고개을 끄덕끄덕해 보이고 나서 노영탄에게 그 노인을 소개해 주었다.

"우리 숭양파의 대선배이신 아저씨에요 ! 고봉상인 낙이산이라고 하시는 ........... "

" 네 ! 소생은 노영탄이라 하옵는 후배로 .........

이렇게 갑자기 선배님을 찾아뵙게 되어 .........

협사라 불려주심은 너무나 지나치신 과찬이시니 부끄럽기 이를 데 없을 뿐이옵니다.

노영탄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사실인즉. 노인과 노영탄은 아득한 그 옛날 . 오 년 전에 일찍이 감욱형의 아버지가

있던 저 숭양표국에서 서로 대면한 일이 있었다.

단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또 그 당시의 인상이 피차간에 깊이 남아 있지 못한 까닭으로

서로 얼굴은 어디서 본 듯 하면서도 누구인지 생각해 낼 수 없을 뿐이었다.

감욱형은 노영탄에 대한 인연관계와 지금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해서 고봉상인에게 들여

주었다.

고봉상인은 힘없는 음성이기는 했으나 반갑고 대견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 흐음 ! 이건 정말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기이한 인연이군 !

건곤취객이 동지로써 부르기로 했다면 나 역시 동지로써 대함이 마땅하지 ! "

"황송하옵니다 ! 나이 어린 후배를 대하심에 있어서 이다지도 ......... "

고봉상인은 일찍이 남해어부를 따라서 무술의 지도를 받은 일이 있는 대선배였으니.

이번에 노영탄이 감욱형을 따라서 이곳에 오게 된 것도 그의 병세가 어떠한가하고

위문하려 왔기 때문이다.

노영탄이 고봉상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서서 노인의 병세를 살피고 있을 때.

방안에 있는 세 사람은 똑같이 이상스러운 향내가 풍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부지중 일제히 깜짝 놀랐다.

그 향내를 조심조심 맡아보자니 그것이 바로 금서.

고색창연한 무늬가 얼룩덜룩 박혀 있는 한 자루의 보검에서 발산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봉상인은 그 광경을 보자 마음속에 자못 감동되는 바 있는 듯.

노영탄에게 급히 물었다.

" 듣자니 노동지는 저 홍의화상 우람부루라는 자와 맞닥뜨려 본 일이 있다 하던데.

그때 무슨 괴상망칙한 냄새를 맡아 본 일이 있었나 ?"

이말을 듣자 노영탄도 갑작스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선뜻 솔직하게 사실대로 대답했다.

"괴상망측한 냄새라니요? 그때 저는 아무런 이상한 냄새도 맡은 일이 없는 걸요 !

그때 제가 맡은 냄새란 제가 지금 매고 있는 보검 금서에서 발산되는 것과 똑같은

향기였다고 기역합니다만 ............

무슨 까닭에 그런 것을 물어시나요? "

고봉상인은 여전히 극도의 감격을 감출 수 없다는 듯 흥분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 흐음 ! 그럴 걸세 ! 노동지 ! 자네 그 보검을 잠시 내게 보여줄 수 없갰나?"

노영탄은 두말없이 보검을 등에서 풀어서 고봉상인 노인에게 주었다.

고봉상인 노인은 그 보검을 어루만져 보고 자세히 들어다보고 나더니.

갑자기 회색이 만면해지며 힘없는 음성을 높여가며 말했다.

"허어 ! 이건 하늘이 나를 도우신 걸세! 노동지! 자네의 이 금서보검은 만고에 진기한 보물로써

칼자루는 천년묵은 서각(犀角)을 갈아서 만든 것이니.

 어떠한 독이나 취기를 막아낼 수 있을 뿐더러 또한 여러가지 중독 상태를 치료할 수 수 있는

기막히게 귀중한 보물일세.

자네가 홍의화상 우람부루의 독기를 거침없이 막아낼 수있었던 것도 손톱만큼도 이상한 일이

아릴세 !

" 예? 역시 이 보검 때문이었군요!

그리고 보니 제가 홍의화상을 물리쳤다는 사실이 부끄럽기 짝이 없을 따름입니다 !"

" 그야 ..... 그야 ..... 천만에 .....그런데 이것만을 가지고서야 .....실력이 없었다면 .......

어디 그렇게 간단히 될 말인가 .

그런데 그 보검을 잠깐만 내게 빌려주게 !

그보검으로 내 몸 안에 서리어 있는 독기를 빨아들이도록 해서 나도 하루 바삐 건강을

회복해야 겠네 !"

"무엇을 그다지 어렵게 생각하십니까?

자. 얼마든지 이 칼을 쓰실 수 있는 데까지 ......... "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뜻하지 않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졌다.

창밖으로 부터 한 마리의 사납게 생긴 커다란 매가 흘쩍 날아드는 것이다.

 

<다음 반교지도가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