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14장 반교지도(反敎之徒)

오늘의 쉼터 2013. 12. 11. 22:32

정협지(情俠誌) 3권

 


제 14장 반교지도(反敎之徒)

 

 

적화주에서 엇갈리다.

 

"이크 ! 이놈이 별안간 웬일일까? "

고봉상인 낙이산 노인은 깜짝 놀라 자리에 드러누운 채 어깨를 들먹거렸다. 

난데없이 창문으로 날아든 검정매는 바로 묵우란 놈이었으며.

그놈은 쇠갈귀같이 무서운 발톱 사이에 곽 끼고 온 편지 한 장을

고봉상인 노인의 침상 앞으로 슬쩍 떨어뜨리고 자못 거만스러운 태도로

그 날카로운 눈동자를 두리번거려서 방안의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다시 어디론지 흘쩍 날아가버렸기 때문이다.

고봉상인 노인은 급히 편지를 집으서 뜯어보았다.

단숨에 끝까지 눈을 옮겨 내려가는 고봉상인 노인은 무슨 까닭인지

얼굴빛이 핼쑥해지면서 두 눈이 휘둥 그레젔다.

편지 한 자 한 자 더덤어 내려가는 노인의 눈동자만 응시하면서

똑같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편지속에는 중대한 연락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

두 사람이 똑같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연유를 물어보려고 입을 열까 말까 망서리고 있는 찰나에.

고봉상인 노인이 심각한 어조로 먼저 말을 꺼냈다.

" 낭월 형님께서 보내신 편지인데 ........

악중악이란 녀석이 벌써 그곳에 가 있다는 걸.

그건 다행한 소식인데 ........

일이 시끄럽게 되는 모양인 걸 !

대표 형님께서 그 녀석이 스승을 배반하고 제 멋대로 산을 내려갔었다고

여간만 화를 내지 않은 모양이다.

이미 여러 사람 앞에서 그녀석이 지니고 단니던 옥룡검까지

도루 빼앗아 들이기로 결정했고. 그 뿐만이 아니라

이번에 회양 지방에서 일을 끝내고 난 뒤에는 중악을 다시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엄중히 심문하고 징계처분을 내리기로 했다니 ..........."

여기까지 말하더니 고봉상인 노인은 무슨생각을 했음인지 .

갑자기 말을 딱 끊고 노영탄과 감욱형을 한참동안이나 우두커니 바라다 볼 뿐이었다.

무엇인지 자못 주저하고 망서리는 기색이었다.

"노동지 ! 그러고 보면 자네도 이미 외부 사람으로 칠 수는 없는 사람이니 .......

뭐 굳이 숨겨야만 될 까닭이 없을 것 같군.

하여튼 우리 문중의 이야기를 듣고 과히 웃지나 말아주게 !

허어.그것 참 !

우리 숭양파에 최근 몇 해 동안에는 이렇게 가지가지 변고가 잇따라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거든 ..........

이제는 정말 우리 파를 위해서 매우 한심스러운 불상사까지 일어났으니 .........

아. 글쌔 어쩌자고 중악이란 녀석이 주책없이 ........ "

감욱형은 고봉상인 노인의 말을 한마디 한마디 놓치지 않으려고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노인이 만면에 근심스럽고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악중악의 문제만 나오면

얼굴빛이 침통해지며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은 눈치를 알아차린 감욱형은.

여기에는 필시 중대한 사고가 일어났음을 깨달을 수있었다.

" 어저씨. 무슨 일인데요?"

안타까운 빛을 감추지 못하는 감욱형의 음성은 가볍게 떨리기조차 했다.

" ......... "

그러나 고봉상인 노인은 입을 꽉 다문 채로 역시 심히 말하기 거북하다는

침통한 얼굴을 보일 뿐이었다.

감욱형과 악중악으로 말하자면 마치 수족과 같이도 가깝고 친하고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이 있는 사이인지라 지대한 관심이 없을 수 없다.

노인이 입을 벌리지 않으면 않을수록 감욱형은 점점 더 궁금증을

참을 길이 없어서 언성을 높여서 힐문이나 하듯 추궁했다.

" 아저씨! 중악 오빠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건가요?

속 시원하게 어디 말씀해 주세요! 

궁금하고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을 들어면서 눈치만 살피고 있던 노영탄은

 영문을 알 수 없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봉상인 노인이 무슨 말을 해도.

따져보자면 노영탄은 결국 숭양파에 있어서 문외의 사람이다.

남의 문중이나 파 내의 중대하고 복잡한 일에 관해서

그것이 무슨 일이냐고 따져 물어본다는 것도.

입장이 난처해서 그저 잠자코 고봉상인 노인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 자세한 사정을 말씀해 주세요!"

감욱형은 또 한 번 목마른 사람이 물을 달라듯. 초조하게 졸라됐다.

그제야 고봉상인 노인은 긴 말을 하기 싫다는 듯.

그 검정매가 던져주고 간 편지를 두 사람 앞으로 내밀어 주면서 마지못해서 

침통한 언성으로 몇 마디를 했다.

" 중악이란 녀석은 본래 성깔이 대단한 녀석이어서 ..........

언제나 으스대고 뽐내고 천둥벌거숭이같이 누구에게나 안하무인격으로

덤비길 잘하는 오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녀석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그 녀석이 이렇게 제멋대로 주책없는 짓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는 걸!"

노영탄은 감욱형의 뒤에 바싹 붙어 섰다.

어깨 너머로 그 편지를 읽어려는 것이었다.

감욱형은 당장에 떨리는 손으로 그 편지를 펼처 들었다.

이 편지에는 이러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이산 아우님께.

중악이란 녀석은 이미 위험한 지경에서 빠져 나와서 이곳으로 왔소.

그 동안 하고 돌아다닌 소행에는 자못 파란곡절이 많은 모양인데.

우리파의 대표자는 그 녀석이 스승을 배반한 행동을 했다는데 몹시 격분해 있소.

우리파를 다스리는데 대표적인 보물이 되는 보검을 이미 빼앗기로 했으며

이번 일을 끝낸 다음에는 숭산으로 데리고 가서 심문에 회부하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또한 놀라운 사실은 중악이란 녀석이

어젯밤에 갑자기 행방을 감추고 실종되어 버렸다는 일이요. 

발끈 뒤집혀서 수색을 해보고 조사를 해보니

이 녀석은 두 번째로 재멋대로 달아나버렸을 뿐만 아니라

보검 옥룡검을 빼앗길까봐 그것까지 가지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소 ........

이러한 소행은 분명히 스승을 배반하고 교리에 거역하는

반교. 배교의 도배들이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겠소.

실로 우리 파를 위해서 유감스러운 일이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소.

만일에 이런일이 강호 넓은 천지에 소문이 퍼진다면

이는 우리 무예계의 웃음거리가 될 뿐더러

우리들 선배 된 몸으로서 감독의 직책을 소흘히 했으니 .

하늘에 계신 우리 조사의 영혼에 대해서 실로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는 일이요.

우리 대표자는 이미 상세하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렸소.

즉. 무릇 우리문중의 제자로서악중악의 종적을 알아차린 자는 경각을 지체치 말고

체포할 것이며.힘에 부쳐 그를 체포할 수 없을 경우에는 곧 보고를 할것 .

또 거가 만일 천암사로 숨어들어서 몸을 감추는 겨우가 있다 하더라도

모든 선배와 제자들은 대표자의 명령대로 행동할 것이며

결코 임의로 방임한다거나 은닉시켜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요.

          낭월 백 올림

 

편지를 다 읽고 난 노영탄과 감욱형은 대경질색 했다.

특히 감욱형의 입장에서는 누구보다도 초조하고 당황했다.

세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서로 얼굴들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누가 무슨 말을 먼저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마침내 고봉상인 노인이 참다 못해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고

나지막 하고 위엄 있는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 중억이란 녀석은 그 타고난 천품이나 자질이 어느 모로 봐도 얻기 어려운 기재여서

우리 파의 여러 형님들이나 장로들께서 심히 아끼고 사랑하고 .

그 앞날에 촉망하는 바가 자못 컸었는데 ..........

『숭양비급』의 오묘한 경지를 잘 터득시키고 연구시켜서 우리 파의 밝은 앞날을

개척 하는데 위대한 인물이 되고 훌륭한 공적을 남길 수 있도록 해보자고 했는데 .......

이 녀석이 이렇게 주책없이 제멋대로 거들먹거리다니 .........

허어 ! 그것 참! 이건 진실로 우리 문중에 커다란 불상사인걸 ! "

이 말을 듣더니 감욱형은 그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고봉상인과 노영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초조한 음성으로 안타깝게 물었다.

" 중악 오빠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

이렇게 한 마디를 했을 뿐.

금시에 말문이 막혀버리는 감욱형은 수정같이 맑은 두 눈동자를 깜작깜짝.

눈시울에는 벌써 눈물방울이 가득히 맺히기 시작했다.

이런광경을 눈앞에 보고 있던 노영탄은 묵묵히위안해 줄 말을 찾을 수 없어서나

감욱형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만 같았다.

천성이 자후한 데다가 마음씨가 곱기 이를 데 없는 감욱형인지라

어렸을 적 부터 같이 자라난 악중악에 대해서는 마치 수족같이 떨어질 수 없는

친밀한 감정이 있을 것이요.

자연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약중악으로 말하자면 노영탄에게 있어서도 전혀 무관심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노영탄의 천성 역시 지극히 관대하고 중후한 편이었다.

비록 오랜 옛날에 악중악에게 품고 있던 설욕이니 앙갚음이니 하는

미묘한 감정이 있다해도 이미 그들 사이에는 5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경과되었다.

악중악에 대한 인상이란.

벌써 노영탄의 머릿속에서는 희미해졌을 뿐만 이니라.

은사 남해어부 상관학이란 사람은 실로 속세를 초월하고 달관한 기인이었으니.

노영탄이 그를 따라서 5년 동안이나 조석으로 받아온 교훈은 노영탄이란

일개 청년으로 하여금 속이 탁 트인 커다란 그릇이 되는데 절대적인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 노영탄은 두 차례나 회양방의 아성인 금사보에 뛰어 들어 가서 그때마다

악중악을 구출해 내었다.

두 차례나 되는 경험을 통해서 노영탄은 악중악의 무술의 재간을 따라오기에는

아직도 멀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런 관계로 노영탄은 지난날의 사소한 감정 같은 것은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악중악에 대해서도 관심을 품고 지내온 일은 별로 없었다.

이제. 감욱형이 초조히 구는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까.

노영탄은 도리어 북바쳐 오르는 일종의 동정심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노영탄은 어디까지나 숭양파의 문하생이 아니라는 자기의 입장을 냉정히 생각했다.

그래서 남의 파와 문중의 사사로운 일에 제삼자로써 중뿔나게 이렇다 저렇다 의견을

표시할 수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두 사람의 정경을 살펴보며 대답할 말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

퍼뜩 ! 노영탄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는 한 가지의 대책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무엇이냐고. 고봉상인 노인 앞에서 일일이 설명한다는 것도 쑥스러워졌다.

문득. 노영탄은 감욱형을 쳐다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자못 점잖은 어투로 차근히 말하면서 감욱형의 태도를 유심히 살폈다.

" 감소저! 어떻게 생각하시오?

소생의 생각 같아서는 오라버니께서는 아직도 회양지구에 계실 것만 같소.

이제. 이미 회양방과 상약한 날짜가하루라는 여유밖에 없도록 절박해 졌으니 .........

소생도 그 전날까지 시일을 대서 그곳으로 가겠노라고 약속한 바도 있고 .........

어차피 가셔야 할 길이라면 감소저께서도 지금 당장 소생과 같이 그곳으로 달려가서

귀파의 여러 인사들을 만나 보시고 이번 사건이 대관절 어찌된 일인지

자세한 형편을 알아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

감소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

사실인 즉.

노영탄에게는 딴 생각이 있었다.

감욱형이 우선 자신의 말을 듣고 급히 회양지구로 같이 떠나만 간다면.

그 다음 행동에 관해서는 또다시 단둘이서만 상의하고 결정하자는 혼자만의 계획이었다.

감욱형은 그 새카맣고 맑은 눈동자로 노영탄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당황하고 초조한 극도의 근심극정에 싸이게 된 감욱형은 노영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말을 꺼내는지를 알아차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자니 아무래도 노영탄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만 같았다.

또 그렇지 않아도 일각이 삼추같이 회양지구로 나갔으면 하고 그때 가 오기만 고대하던 

감욱형이었다.

나중에야 어찌되든.

우선 노영탄의 말은 반가운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감욱형은 선뜻 대답했다.

" 노공자의 의견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군요 !

그럼. 우리 떠나기로 작정이 됐으면 머뭇거릴 것 없이 한시라도 바삐 길을 떠나기로 하죠 !"

고봉상인 노인도 노영탄의 의견을 듣고 그것이 가장 타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노영탄이 어떤 궁리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야 꿈에도 했을리 없었으나  감욱형이

첫마디에 선뜻 노영탄을 따라서 회양지구로 떠나겠다는 말을 듣고.

이 노인은 두 젊은이들을 바라다보며 무엇인지 의미 깊은 듯한 미소를

주름잡힌 두 볼에 띠면서 말했다

" 흐음 ! 노동지의 의견이 가장 타당한 말이라고 나도 생각하네만 ........

그리고 한 번 떠나기로 작정이 됐으면 한시라도 바삐 떠나는게 좋겠지만 ........

너무 서두를 것은 없어 사람이란 총망 중에 실수 하기 쉬우니까 .........

차근차근히 몸도 좀 더 쉴겸. 뭘 좀 요기라도 하고 떠나도 그다지  늦지는 않을 거야 !"

이리하여 고봉상인 노인은 두 젊은이를 위해서 밥상을 차려 내왔다.

그리고 또 일변. 동승을 불러서 두 사람이 타고 떠날 나룻배도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노영탄과 감욱형 두 젊은이들은 노상 떠나고 돌아다니고 ..............

그렇게 해야 만 될 기구한 운명의 희롱을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 선배님! 부디 조심하십시오 .......... 또 기회 있으면 뵙게 될 날이 .......... "

노영탄은 침상에 일어서지도 못하는 고봉상인에게 정중히 절하고 물러섰다.

그러나 고봉상인 노인은 희색이 만면했다.

그의 병세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절대적인 서광이 비치었기 때문이다.

" 내 걱정은 말구 .........허허허 ........ 참 기이한 인연이군 !

나도 이제는 몸을 완전히 추스를 수가 있게 됐으니 ..........

부디 먼 길에 몸조심하게 ....... 욱형이 너도 모든 일에 경솔함이 없도록 ........ "

감욱형과 노영탄은 나룻터에서 또다시 배를 탔다.

동승 두 아이들이 손을 흔들면서 호숫가에 언제까지나 서서 두 젊은이들의 앞길을 축복해주었다.

노영탄의 보검 금서는 고봉상인 노인의 용연선독을 푸는 데 쓰여서 꼼짝도 못하는 병세를

깨끗이 회복시켜 주었고 거기다 설령환 몇 알까지 먹고난 노인은 정신이나 체력이

완전히 원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봉상인 노인은 병이 완쾌된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우연한 기회에 노영탄이라는 젊은 동지

한 사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대견하고 마음 든든한지 몰랐다.

그 늠름한 풍체 겸손하고도 총명한 인품 거기다가 비록 이야기로  듣기만 했으나

그가 지녔다는 놀라운 무술의 재간 이런 훌륭한 청년과 미모의 소녀 감욱형을 세워 놓고

바라다보았을 때 노인은 노인대로 생각하는 봐가 달라서 그들이 또한 같이 이번 길을

떠난다는 데 대해서 만면에 미소를 금치 못했던 것이다.

감욱형과 노영탄은 그럭저럭 고봉상인의 처소에서 반나절이나 휴식을 한 셈이었다.

몸도 거뜬해졌거니와 또다시 둘이서 같은 길을 떠나게 됐다는 게 여간만 즐거운 일이 아이었다.

그러나 일각을 다투는 중대한 시간에 처해있는 그들이었다.

그들은 뒤를 돌아다볼 겨를도 없이 곧장 회양지구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배에서 내려 육지로 올라선 다음부터는 두 젊은이들은 그들의 독트관 재간인 경신법을 써

남쪽을 향해서 비호같이 몸을 날려 시간을 일 분 일 초라도 단축할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총망하게 몸을 날려 가면서도 노영탄은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차근차근

감욱형에게 말해 주었다.

" 감소저께서 갑자기 악중악 오라버니가 어디로 갔을 것이냐? 고 물으셨을 때.

소생은 퍼뜩 이런 생각을 했었소.

다른 생각이 아니라 현제 이 지방 일대는 거의 완전히 회양방의 세력 범위 안에 들어 있다는 것.

또 회양방과 숭양파가 엄중한 대진 상태에 있으며 쌍방이 똑같이 소위 고수라는 인물들을

무수히 불러 모았다는 점 ..........

그러니까 악중악이 비록 자기 마음대로 도망질을 첬다고는 하지만 .

제일 먼저 두려워할 것은 스승이나 선배들 혹응 문중의 사람들 눈에띄어서 붙잡힌다는

사실일 것이며.

둘째로는 회양방 곰들에 눈에 띈다는 것도 두려워할 것이 뻔 하다는 사실.

그리고 또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았을 때.

그는 한빙선자 연자심과 함께 금사보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예요.

어찌 그가 혼자서만 단독 행동을 할 수 있겠소 ?

그리고 나는 또 그들 둘이서 금사보로 탈출해서 도망쳤을 때 .

홍택호 적화주에 살고 있는 오매천녀를 찾아가도록 하라고 분부해 둔 기억이 났소.

이렇게 여러 모로 생각해 본 다면 한빙선자 연자심이 아직도 적화주 오매천녀의 거처에

머물러 있을 것이 거의 확정적이고 보니 .

그렇다면 악중악이란 사람도 그곳으로 달려 갔으리라는

가능성이 충분히 남아 있을 것이 아니겠소 !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오매천녀는 자기의 거처를 남에게 알리기를 싫어하는 지라

고봉상인 노인 앞으서 이런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이었소. "

감욱형도 요모조모로 생각해 본 결과 이런 관찰이나 견해가 가장 타당하고

정확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영탄과 감욱형은 악중악과 한빙선자 연자심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일각이 삼추같이 간절했다.

그래서 경각을 지체치 않고 떠나기로 작정되자.

즉시 경신법의 재간을 최고도로 발휘해서 일로 홍택호를 향해 달려갔다.

날씨거 매섭게 차고 바람이 모질게 불었다.

땅이  하늘과 맞닿은 허허 벌판 광막하고 거친 길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도리어 두 사람에게는 얼마나 다행한지 몰랐다.

길을 막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고 그것이 훨훨 길을 빨리 닫는데 편했기 때문이다.

 불과 한나절 남짓한 동안에 노영탄과 감욱형은 홍택호 호반에 거침없이 도달했다.

한없이 널브러진 시원스런 호수의 수면. 두 젊은니에게는 인연 깊은 옛날의 호반이었다.

또다시 그곳에 둘이서 나란히 서게 되니 감구지회(感舊之懷)도 새로웠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예날의 발자국을 그대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같이 길이 익숙했다.

둘은 호반에서 자그마한 나룻배를 한 척을 구해서 올라타고 곧장 적화주를 향해서 들어갔다.

배는 쏜살같이 물결을 헤치고 달려나갔다. 

천천히 옛날의 감회를 더듬으며 호수의 경치를 감상할 만한 시간이나 정신적 여유가 없음이

유감이었지만 냉정히 생각할 때 두사람에게는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배를 빨리 달리고 싶을 뿐.

노영탄도 감욱형도 똑같이 그들의 머릿속에 꽉 차 있는 것은

한빙선자 연자심과 악중악 생각뿐이었다.

호수의 파란 수면이 획획 휙휙 화살같이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나룻배에 앉아서

둘은 그 문제만을 걱정하고 머리를 썼다.

" 허 심히 난처하고 미묘한 문제에 부딪치게 됐소.

악중악 오라버니와 그 한빙선자라는 아가씨를 찾아낸 다음에는

이 미묘한 관계를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 "

노영탄도 그렇게 근심스러운 말을 몇 마디 했을 뿐.

그 이상 묘한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 글쌔요 ! 저 역시 지금은 어떻게 해야만 좋을지 머릿속이 몹시 어지로울 뿐인데요 ! "

감욱형 역시 지금은 어떻게 해야만 좋을지몰랐다.

감욱형과 악중악의 관계가 너무나 미묘한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악중악은 감욱형과 더불어 어렸을 적부터 같이 자라난 남매나 다름없이 친밀한 사이이다.

그러나  이제 악중악이라는 청년은 스승을 배반하고 교리에 어긋나는 짓을  제멋대로 한

배사(背師). 반교지도(反敎之徒)로 지목을 받는 몸이 된 것이다.

한편. 감욱형은 어디까지나 숭양파 문중의 제자의 한 사람이고 보니.

대표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으며.

이것이 감욱형을 심히 괴롭게 하는 미묘한 문제였다.

이치로 따지든지 혹은 숭양파의 제자의 하나라는 입장에서 보든지.

악중악의 숨어 있는 곳을 알아냈다면 당장에 숭양파의 대표자나 사장(司長)급 인물들에게

보고해야만 하는것이 현제 감욱형이 처해 있는 위치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악중악을 발견했다면 그들 숭양파에 넘겨야만 되는 입장에 처해있고 보니

감욱형과 악중악의 처지가 심히 미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감욱형으로서는 이와 같이 숭양파의 규칙되로만 처사할 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중악에게 어떤 편의를 봐준다든가 도움을 줄 수도 없는 난쳐한 입장이다.

노영탄으로 말하자면 애당초부터 악중악과 대면하기도 꺼려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악중악이 적화주로 갔으리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그것이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 소개로 연유해서 생긴 결과라고 생각했을 때.

역시 입장이 곤란해지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일후에라도 숭양파의 사장급 인물들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고.

악중악이 적화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곧 이곳에 살고있는 오매천녀가 이런 반도를 은익하고 비호해 주었다는

의심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가?

노영탄은 물론 이런 여러가지 점을 생각했기 때문에 비로소 적화주로 감욱형을 데리고

달려오기로 결심한 것이었지만 달려왔다는 사실만으로는 이미 미묘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 공연히 내가 가장 쑥스럽고 어색한 입장에 뛰어 들게 됐을 뿐이 아니냐?

악중악과의 개인적인 사사로운 원한이나. 창피니. 설욕이니.

그 따위 문제는 잠시 논하지 않키로 한다고 하더라도 악중악은

현제 숭양파에서 체포하려는 반도가 아닌가?

그러면 내 자신은 숭양파의 무엇이란 말인가?

하등의 이렇다할 만한 관계도 없는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미묘한 관계에 휩슬려 들어갈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

노영탄은 숭양파를 위해서 악중악을 잡아줄 수도 없고

또 자기가 주동이 되어서 악중악에게 숭양파의 문중으로 되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으며 더군다나 숭양파에 악중악을 처벌하지 않으리라는 보증을 한다거나 .........

그렇게 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보다도 더 한층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또 있었다.

그것은 한빙선자 연자심이라는 아가씨가 바로 회양방의 옛날 방주이던

사람의 딸로서 숭양파와는 절대적인 원수의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에 숭양파에서 이 아가씨의 신분을 알게만 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호락호락 놓아주지 않을 것인데 여기에 또한 미묘하게 된 것은

이 아가씨가 현제 회양방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아가씨 역시 일단 회양방의 손아귀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위태로운 경지를 면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뻔한 일이다.

노영탄은 잔악무도한 회양방 놈들의 소행을 누구보다도 미워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놈들과 대적하는 위치에 서 있는 숭양파와는 냉정히 따저 보자면

하등의 관련성도 없는 제삼자의 입장에 서는 사람이다.

감욱형과의 특수한 관계만 제외한다면 노영탄은 이틈에 끼어서

남의 일에 왈가왈부할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서도 역시 악중악과 한빙선자 연자심을 위해서 이 궁리 저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노영탄은 이모저모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이 역시 아리따운 아가씨 감욱형을 생각하는 피할 수 없는 입장 때문이었으리라.

' 이제악중악과 한빙선자 연자심은 둘이 똑같이 숭양파에서는

용납해 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똑같이 회양방의 손아귀를 피해 단녀야만 되는 신세다.

만일에 오천녀가 이들의 이러한 환경이나 처지를 알게 된다면 .........

그래서 두 사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

그때에는 이 두 젊은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해 봤을 때.

노영탄도 도무지 어찌해야 좋을지를 알 수 없고 머릿속이 어지러워질 뿐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한다죠?

두 가엾은 젊은이들을 구출해 줄 방법은 없을까요?"

" ............... "

감욱형이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노영탄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묵묵히 입을 다물고 대답이 없었다.

두 사람은 생각하면 할수록 근심극정이 커질 뿐.

아무런 묘계도 타개책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 감소저께서 아무리 초조히 구셔봤자 우리들끼리 어떻게 결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겠소?

우선 맞닥뜨려 보는 도리밖에 ............

빨리 적화주로 가서 당사자들을 만나 본 다음에 어떻게든지 타개책을 생각해 내기로 하십시다!"

노영탄은 어떤 자신이 있다는 듯 이렇게 감욱형을 위안해 주었다.

두사람이 이 궁리 저 궁리를 하고 있는 동안에 나룻배는 벌써 갈대숲을 꿰뚫고 섬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가슴 벅찬 감구지회와 그리움을 금할 수 없는 그 매화나무 숲은 옛적이나 다름없이

요염하리만큼 붉은 색채 속에서 그들을 맞아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매화나무숲 속은 여전히 죽음 같은 고요가 감돌고 있을 뿐.

사람의 숨소리 하나 들려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그마한 배를 나루터가까이 대놓고 서슴치 않고 기슭으로 올라갔다.

난데없이 두 줄기 찬란한 구름같은 사람의 그림자가 대나무숲 속으로 부터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욱형 아줌마!" 

"영탄 아저씨!"

기쁨에 넘처서 외치는 두 마디 소리가 노영탄과 감욱형의 귀전을 요란스럽게 스쳤다.

그것은 바로 대문과 대림 두 어린아이들이었다.

노영탄과 감욱형은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이 하도 반갑고 신통해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똑같이 붉은 꽃무늬가 찬란한 바지저고리를 가뿐하게 입고 날아갈 듯

경쾌한 몸차림을 한 두 어린아이 들은 노영탄과 감욱형의 곁으로 단숨에 뛰어들어

팔에 매달리고 손을 잡아끌고 기쁘서 어쩔 줄 모르면서 수선을 떨었다.

감욱형은 초조한 판인지라 그 이상 참지 못하고 급히 물어봤다.

" 애.대문아! 할머니는 어디 게시냐? 그리고 또 다른 손님들은 계시지 않느냐?"

두 어린아이들은 감욱형의 말을 듣더니.

저편에다 대고 있는 목청을 다해서 고함을 질렀다.

" 할머니. 욱형 아줌마하구 영탄 아저씨가 또 왔어요! "

그리고나서 대문은 감욱형의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 아이 참! 욱형 아줌마! 조금만 일찌감치 오시지 않고서 ............

중악 아저씨하구 자심 아줌마는 벌써 떠나가신 걸 ...........

그 아줌마하고 그 아저씨가 어쩌면 그렇게 영탄 아저씨와 욱형 아줌마를 닮았을까!

한판에 찍어낸 것같이 얼굴이 똑같아서 .............

그 아저씨와 아줌마가 여기 왔을 때 우리 둘이서는

정말 욱형 아줌마하구 영탄 아저씨가 돌아온 줄로만 알았거든요 ........

그 아저씨와 아줌마가 여기 있어서 욱형 아줌마와 영탄 아저씨랑 함께

놀 수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

대문이란 어린아이의 하는 말을 듣고 감욱형과 노영탄은 가슴이 선뜻 했다.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한동안 서로 쳐다보았을 뿐.

악중악과 연자심은 그러면 이미 이곳에서 어디론지 떠나가버린 것이 아닌가!

두 아이들은 까불면서도 또 무슨 말인지 닥치는 대로 반갑다는 의사를 지껄여댔으나.

감욱형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 둘이서 이곳에서 떠나갔다면 장차 이일을 어떻게 한다? ' 

이런 근심걱정이 앞을 가려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감욱형이었다.

그래도 노영탄은 정신을 진정시키고 까불어대는 대문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 애. 대문아! 대림아! 빨리 할머님을 만나 뵙도록 해다우! "

노영탄의 말소리가 그칠까 말까 했을 때 벌써 매화나무숲 속으로부터

얌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틈엔지 언제나 곱상하게 늙은 백발을 바람에 휘날리면서 오매천녀가

그들의 앞으로 걸어나오면서 자못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알 수 없는 일인데? 바로내일이 숭양파와 회양방이 일대 결투를 한다는 날인데 .....

이렇게 긴박한 때에 어째서 너희들 둘이서는 이렇게 한가하게 여길 찾아왔느냐?

무슨 긴급한 사건이라도 생겼다는 거냐? "

오매천녀의 표정은 점점 까닭을 알 수 없다는 듯 심각해졌다.

오매천녀의 묻는 말에 감욱형과 노영탄은 선뜻 대답해야 할 말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이 적화주를 떠난 것은 불과 며칠전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먼 길을 날고 달리고 하면서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잇달아 뜻밖의 여러가지 사고를 겪고 난 그들은 그 불과 며칠 사이가 몇 해나 되는 

아득한 세월같이 생각되었다.

그동안의 가지가지 경과를 한 마디로 선뜻 대답하기는 정말 힘든 일이었다.

오매천녀가 묻는 말에 천갈래 만갈래 어디서 부터 서두를 잡아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감욱형과 노영탄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못하며

오매천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두른 우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그리고 나서도 여전히 묵묵히 오매천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노영탄이 그 이상 잠자코 있기 거북해서 먼저 입을 열었다.

" 선배님께서는 모든 일을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현명하게 통찰(洞察)하실 줄 아옵니다만.

이 어린 후배들은 꼭 찾아뵈어야만 될 일이 있어 이렇게 달려온 길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심히 중대하고 긴요한 일입니다! "

"흐음? 무슨 일이기에 그다지 중대하고 긴요하다는거냐? "

오매천녀는 이렇게 점잔은 음성으로 몇 마디를 물어볼 뿐.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그 이상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오매천녀는 감욱형과 노영탄의 표정나 태도를 일견했을 때.

벌써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반드시 무슨 사건이 발생되어서 이렇게 갑자기 달려왔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으나.

막상 노영탄의 말을 듣고 보니 오매천녀 역시 뜻하지 않은 돌발사고가 무엇인지

추측키 어려워 깜짝 놀랄 뿐이었다.

한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대문과 대림 두 어린아이들도 처음에는 노영탄과 감욱형을 보자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까불었으나 차차 두 사람의 태도를 살펴보자니

그 전날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린 소견에도 무슨 일인지 중대한 일이 발생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상한 표정을 하고 어리둥절해서 어른들의 얼굴빛을 유심히 살피고 서 있을 뿐이었다.

오매천녀의 날카로운 안광이 노영탄과 감욱형의 얼굴 위를 번갯불처럼 스쳐나가더니

이윽고 이런 말을 했다.

" 엇그제의 일이다.

욱형이 오라버니뻘이 된다는  악중악이란 청년이. 성이 연이라는 아가씨를 데리고 이곳엘 왔다.

그들은 어떤 복면한 사람에게 구함을 받아서 금사보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했으며

또 그 사람이 그들을 보고 내게로 가보라고 지시해 주었다고 하더라 .........

말하는 눈치가 그 복면한 사람이란 바로 노영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과연 영탄이 너였느냐?

너희들 둘이서 이곳을 떠나간 후에 바깥 세상의 형편은 어떻더냐?

어째서 떠나간지 며칠이 못되어서 되돌아왔느냐?

그들 두 사람과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거냐? "

오천녀의 말을 듣자.

노영탄과 감욱형은 바로 그것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 선배님께서는 모든 일을 용하게 알아차렸습니다.

저희 후배 둘이서 이곳으로 급히 달려온 것도 바로 그들 두 사람의 일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뜻 대답하고나서.

노영탄은 며칠 동안의 경과를 자세히 오매천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감욱형과 노영탄이 이 호수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간 뒤에 어떻게 해서 회양방 놈들을

만나게 된 일 악중악과 연자심이 어떻게 해서 다시 놈들에게붙잡히게 된 경위

또 둘이서 어째서 각각 헤어지게 되었으며.

노영탄이 어떻게 다시 금사보로 침입해서 악중악과 연자심을 구출해 낸 사실.

다시노영탄이 멀리 숭산에까지 달려가서 감욱형을 만나게됐으며.

그래 가지고 회양지구로 되돌아 오게 된 사실을 일일이 상세하게

오매천녀에게 설명하고 보고했다.

사실과 경위를 들은 오매천녀는 대경질색 했다.

더군다나 대문과 대림 두어린아이들은 노영탄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는 듯

노영탄이 혼자서 금사보에 침입해서 수많은 회양방 놈들을 대적하고 용감히 싸웠다는

대목에 가서는어린아이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을 딱 벌리고 마치 제미있는

옛날 이야기에 끌려 들어가는 듯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감욱형에게 있어서도 두고두고 몇 번을 들어도 신바람 나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그러나 이제 악중악이란 청년은 마침내 배사 반교의 도배로 지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

노영탄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계속해 내려갔을 때 오매천녀의 얼굴빛이 갑자기 매섭고

싸늘하게 변했다.

" 그건 또 무슨 일이냐?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불과 이 며칠 동안에 이다지도 많은 사고가 발생했다니 .............

그 악중악이란 청년이 나의 이 섬에서 며칠 동안 머무러는 사이에.

나는 벌써 그 청년이 얼마나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나 성격이 또한 순박하고

중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지나치게 오만한 점이 있더라.

성깔이 대단하고 고집이 세고 .............

나는 그 청년을 대해보고 혼자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일단 중대한 자극을 받게 되면 당장에 편협하고 충동적인 청년이라고 ............

하아 ! 그것 참 ! 회양방의예전 방주이던 개세천왕 연약파도 바로 그 청년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바로 그 뽐내고 오만하고 고집 센 성격 때문에 무예계에 그렇게 처참한 싸움을 일으켰었는데 ...."

무엇인지 통탄하여 마지않는 오매천녀의 표정은 침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나서야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이제 무예계서는 이 파 저 파 할 것 없이 모조리 꿈틀거리고 저마다 맹렬한 활동을 개시했으니 ....

숭양파와 회양방의 싸움이 도화선이 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만일에 악중악이 진심으로 숭양파를 버리고 교리를 배반하고 달아났더면

뛰어난 자질과 놀라운 천품을 지닌 몸으로서 어떤 이파의 문하에 들어가 그들에게 가담한다면.

멀지 않은 장래에 있어서 또 하나 새로운 개세천왕이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느냐?

어째든 최소한도 숭양파가 이제부터는 중대한 한 개의 씨를 뿌려 놓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도리는 없을 것이다."

오매천녀가 단숨에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노영탄과  감욱형은 이런 사실보다

한시 바삐 악중악과 연자심이 어디로 갔는가를 조급하게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 그런데. 그들 둘이서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갔을 까요 ?

선배님께서는 그것을 혹 아시는지요 ? "

감욱형이 참다 못해서 이렇게 물어봤으나. 오매천녀는 거기에 대해서는 선뜻

시원스런 대답을 하지 않고. 땅이 꺼지도록 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세상만사란 실로 변화무쌍해서 사람의 뜻으로는 예측할 수도 없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많다 .

길고긴 이야기를 어찌 한두 마디로 다 하겠느냐!

우선 방으로 들어가서 피곤한 몸들을 쉬어가면서 나의 자세한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보도록 ....... "

한편 오매천녀는 대문.대림 두 아이들에게 명령했다.

" 애들아. 너희들 방으로 들어가서 차나 좀 끓이고 우선 간단히 요기할 만한 음식을 준비해라 !"

그 뒤를 따라서.

오매천녀는 앞장을 서서 감욱형과 노영탄을 안내하고 천천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노영탄과 감욱형은 아무리 초조한 심정이라 할지라도 오매천녀의 뜻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매화나무숲을 천천히 지나서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깨끗한 보료가 세 자리 깔려 있으며 과실이 수두룩하게 차려져 있었다.

"자아. 어서들 이리 앉아서 떡이라도 좀 들어라 !"

오매천녀는 노영탄과 감욱형을 각각 자리잡아 앉혀놓고 .

자기도 음식을 집어먹고 차도 마시면서 두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을 꺼냈다.

" 정말 이상한 일이다 ! 너희들 둘은 악중악이라는 청년과 연자심이라는 아가씨와 

용모가 똑같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지혜로운 점에서도 몹시 비슷하다.

또 따져보자면 서로 서로 깊은 인연이 있는 사이란 말이다.

연자심 !  그 애를 여태까지 나는 아가씨라고 불렀지만 .........

이제 와서는 무엇을 숨기겠니 !

너희들은 내말을 들어면 대단히 놀라겠지만. 연자심이란 계집아이는 바로 나의 생질녀다 ! 

그 아이를 낳은 사람이 바로 나의 동생이란 말이다 ! "

오매천녀는 또 한 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매쳔녀의 말은 과연 노영탄과 감욱형에게는 너무나 뜻밖의 사실이었다.

이런 기이한 인연이 ?

둘이서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오매쳔녀가 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그것이 도리어 두렵다는 표정을 하고 노파의 입만 응시하고 있었다.

오매천녀는 몇 번인지 나지막하게 기침을 해서 음성을 가라앉히며

다음 말을 계속했다.

" 나는 이제 너희들 넷을 차례차례 앞에 놓고 대하게 되니

마음속에 얽히고 설키는 기쁨과 슬픔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다.

우선 기쁘다는 것은 이 어려운 무예계에 아직도 너희들같이

준수하고 총명한 인재들이 있어 뒤를 이어 나갈 수 있으며 앞으로

넉넉히 무예계를 진흥 시키고 무덕을 선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요.

슬프다는 것은 지나간 먼 옛날을 돌이켜 생각할 때 ........

과거지사를 어찌 일시에 다 이야기할 수있으랴만 ............

원수와 원한으로써 처참한 살육을 일삼다가 .........

고인이 되어버린 여러 친구와 동지들을 생각할 때............

하지만 내가 공연히 옛말을 하나보다 !

역시 인생이란 생각하면 꿈과 같은 것이다.

모든 정이니. 은혜니. 원한이니. 공명이니. 이해 관계니 하는 것도 따져보면.

순식간에 인생을 스치고 사라져버리는 허무한 것에 지나지 못한다 !

마치 우리들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능 구름이나 연기처럼 ........

세월이 흐러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

굳이. 권리를 다투고 이익을 빼앗기 위해서

이 세상을 어지럽게 할 필요가 무엇이란 말이냐? "

오매천녀의 이런 심각한 말도 노영탄과 감욱형의 귓속으로는 똑똑히 들어오지 않는 것만 같았다.

일각이 삼추같이 초조하게 알고 싶은 것은 단지 악중악과 연자심이 어디로 갔느냐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슬픔에 가득 차서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오매천녀 앞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어 말이 끝날 때까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오매천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오열에 잠겨 있었다.

그런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두 어깨만 가볍게 들먹그리며

간신히 다음 말을 계속해서 내려갔다.

" .......대관절 악중악이 어떻게 됐다는 일이냐 ?

우선 악중악이 스승을 배반하게 됐다는 원인과 경과를 자세히 이야기 해다오 !

사정에 따라서는 내 몸은 비록 늙었으나 숭양파와의 깊고 깊은 인연을

따지고 나서서라도 그 청년을 위해서 잘 말해 보마.

아마 내 생각 같아서는 무슨 그 이상의 무거운 처벌이 그에게 내려질 것 같지는 않다 !

또 숭양파의 대표자란 사람도 그 청년의 수행에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면 반드시

너그럽게 생각해 줄 것이요.

절대로 가혹한 처벌을 주지는 않을 것 같다만 ........

그 청년이 그다지도 제 멋대로만 제 고집대로만 행동을 하고 나한테 다녀간 것까지 ...........

나를 속이고 간 셈이니........

만일에 그 청년이 스승을 배반하고 교리에 어긋나는 짓을 한 줄 내가 알았다면

결코 자심이란 년을 딸려 보내지는 않았을 것을 ........

이제 와서는 그 청년이 어디로 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 "

잠시 이야기를 거치는가 했더니.

오매천녀는 급히 뒤를 이어서 악중악이 두 번째 적화주를 다녀가기까지의 경과를

두 사람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본래. 악중악이 이 호수에서 떠나간 뒤에 한빙선자 연자심은 혼자 적화주에 머무르면서

오매천녀를 따라서 고매검(古梅劍)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연자심은 한가할 때에는 대문.대림 두 어린아이들을  벗삼아 뱃놀이도 하며

그다지 쓸쓸하지 않은 나날을 보내기는 했으나 . 어딘지 모르게 악중악에 대한

그리움과 관심 때문에 남몰래 가슴 태우고 있었다.

호수속 섬 위의 조용한 세월이 거침없이 흘러갔다.

바로 노영탄과 감욱형이 적화주에 도착한 그 전날 오후에 악중악은 어디선지

표현히 혼자서 배를 저어서 적화주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의 태도와 표정은 이상하게 당황하고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심히 초조한 기색조차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적화주에 닿자마자 다짜고짜로 연자심에게 이런 말을 했다.

" 연소저! 나는 이번에 호수밖에 나가서 숭양파의 대표자 되는 사람을 만나보고 왔소.

현제 숭양파의 대표자와 여러 스승과 선배들은 모두 회음지방에 와 있소.

내가 말하기 전에 벌써 여러 선배와 스승들은 연소저를 구출해 내게 된 여러가지 동기와

경과를 대표자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하오.

그래서 대표자 되는 사람은 곧 연소저를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솔직히 표시했소.

나는 이 길로 즉시 연소저를 모시고 호수 밖으로 나가서 회음지방에 있는

대표자와 면회를 시켜 드릴 작정으로 이곳까지 되돌아 온 것이요 !"

악중악을 다시 만나게 된 한빙선자 연자심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뿐이랴.

숭양파 대표자가 되는 사람이 자기를 만나 주겠다고 한다니

이렇게 놀랍고 고마울 데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언제나 악중악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같이 지낼 수 있으며.

저 무서운 회양방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춤을 추고 싶을 만큼 기쁜 일이었다.

오매천녀는 악중악과 연자심을 한 번 대해 봤을 때부터 그들 두 젊은이 들이

어느정도 친밀한 정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으며 그런 사실을 몹시 대견하게 여기고

있었다.

악중악이 숭양파의 대표자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내심 걱정하는 바가 없지도 않았다.

' 숭양파 사람들이 예전의 미묘한 원한의 감정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자심이를 대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점을 걱정하기는 했으나 오매천녀는 어떤 자신이 있어서

연자심을 데리고 가겠다는 악중악의 의견에 쾌히 승락했었다.

"그건 기쁜 일이다 ! 숭양파의 대표자라는 사람이 너를 만나고 싶다는 것은

너의 인품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니 망설일 것 없이 어서 따라가서

친히 면대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오매천녀까지 쾌히 승락하자.

악중악과 한빙선자 연자심은 경각을 지체하지 않고 적화주를 떠나 호수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찌 뜻했으랴.

노영탄과 감욱형이 또한 난데없이 표연히 이곳에 나타나서

이렇게 뜻밖에 놀라운 소식을 오매천녀에게 전하게 될 줄이야.

이렇게 되고 보니 오매천녀 역시 악중악이 연자심을 데리고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을 알길이란 묘연할 수밖에 없었다.

노영탄과 감욱형은 오매천녀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알 수 없는 놀라움에 사로잡힐 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악중악이 적화주까지 되돌아와서 한빙선자 연자심을 데리고 어디론지

떠나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그들 두 젊은이들 사이에는 이미 친밀한 도를 넘어선

특수한 감정이 얽혀져 있다는 또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 둘이서는 대체 어느 방향으로 어디를 목적지로 하고 이곳을 떠나갔다는 건가?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선뜻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농영탄과 감욱형의 얼굴빛은 똑같이 지극히 우울하고 침통해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도 뜻밖의 일인지라 선뜻 묘안이 떠돌지 않았다.

"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다지요 ? 어디 가서 두 사람을 찾아낼 수있을지? 정말 답답하군요 ! "

이렇게 조바심을 참지 못하는 감욱형의 말에 노영탄 역시 만족할만한 대답을 주지는 못했다.

" 글쌔요 ! 소생 역시 답답하오 ! 하도 졸지에 당하는 일이 되어서 .......... "

그저 이렇게 안타까운 대답을 몇 마디 해 줄 뿐.

노영탄은 묵묵히 고개를 수그린 채 곰곰히 혼자 생각해 보았다.

악중악은 정말로 스승과 선배를 배반하고 숭양파의 교리를 어기고 대담한 행동을 할 것인가?

그가 한빙선자 연자심을 데리고 달아났다면.

그는 무슨 힘으로 숭양파와 회양방 쌍방의 압력을 막아낼 수 있다는 건가.

악중악 혼자만의 무술의 재간을 가지고 그것을 넉넉히 막아낼 수있다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한 노영탄은 머리를 옆으로 쩔레쩔레 흔들었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 흠! 그렇다면 ........ "

노영탄은 무슨 뜻인지 알 수도 없는 혼잣말을 이렇게 한마디 하고 나더니

이욱고 비장한 결심의 빛이 날카로운 눈동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 감소저. 우리도 한시 바삐 회음지구로 갑시다!

현제 형편으로서는 우선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을 것 같소 ! "

" 좋아요! 그럼 저도 함께 따라가야죠! 

우선 두 사람을 찾아 놓구 면대해 보구 나서야 .

무슨 대책이든 세울 수 있을 게 아니겠으요 !"

감욱형도 이렇게 선뜻 대답하며 노영탄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 이상 망설이고 지체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시간이 노영탄의 눈앞에 보이는 듯이 자꾸만흘러갔다.

" 선배님! 저희들은 곧 물러가겠습니다. 

그들의 행방을 모르고 이곳에서만 머물러 있다가는 그들을 구출해 볼 기회는 영영 놓쳐버리고

말 것이오니.........

언제 다시 뵙게 될지 기약하기는 어렵사오나 일만 끝나면 당장에 되돌아와

선배님의 지도를 다시 받게 될 수도 있을 줄 믿습니다."

노영탄은 정중하게 오매천녀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고 회음지방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렇게 기뻐하고 까불던 대문. 대림 두 어린아이들도 극도의 실망에 싸여서

노영탄과 감욱혀을 전송하며 호반에까지 따라나왔다.

" 영탄 아저씨 ! 언제 또 오시게 되나요 ? 일을 빨리 끝내시고 우리들과 약속을 .......... "

" 욱형 아줌마도 함께 오셔야만 ........"

섬에 찾아드는 사람들이 떠나갈 때마다  꼭같은 인사말을 되풀이 하면서

손을 높이 흔들어 보이는 어린 아이들에게 

이번만은 자신 있는 대답을 남겨 놓기 어려운 노영탄이었다.

"그래. 그래 되도록이면 빨리 너희들을 찾아보려 ............"

어물어물 한마디를 대답해 주면서 돌아서 가는 두어린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다보는

노영탄과 감욱형은 어린 것들이 가엽고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에 마음 약해질 때가 아니었다.

단숨에 호수 밖으로 나와서 육지로 올라간 노영탄과 감욱형은 그들의 독특한 재간인

경신법을 전개해서 곧장 회음지방을 향하고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저녁 구름 속으로 찬란한 놀이 빗기는 서녘 하늘이 점점 어두워 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회음성에 다다랐을 때는 땅거미가 앞길을 가로막을 무렵이었다.

감욱형을 양장이란 곳으로 보내기로 작정한 노영탄은 같이 그곳에 들러 보자는

감욱형의 의견을 완강히 거절하고 각각 길을 달리해 보기로 작정했다.

감욱형과 헤어진 노영탄은 곧장 회음성 안으로 달려들어가서 아무데나 닥치는 대로 한군데

여인숙을 찾아서 투숙하게 되었다.

이월 초이튿날.

새벽 안개가 아직도 걷히지 않았고 삼라만상이 서리와 이슬에 축축히 젖은 이런 새벽.

동녘 하늘에서 아침 서광이 비처 오자면 아직도 먼 이런 시각이었으나.

홍택호 호반에 있는 앵무주 섬 위에는 수많은 사람의 그림자들이 짖은 안개 속에서도

쉴새없이 갈팡질팡 꿈틀그리고 있었다.

앵무주 동쪽 서쪽 양편으로는 우뚝 솟은 날카로운 바위와 조그마한 섬들이 깔려 있었으며

남북 양면으로는 한없이 널브러진 호수가 이 섬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섬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단 출로는 북쪽 가까이 있는 호구 밖에 없었다.

이섬의 남쪽은 물이 얕은 데다가 모래가 많았다.

물 속으로는 온통 암초가 깔려 있어서 큰 배들이 접근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작은 배들도 기슭에까지 가까이 다가들기 어려웠다.

자연 남쪽 호심에 접근할수록 이 섬에서 출입하기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동녘 하늘이 차츰 차츰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짖은 안개가 이제야 간신히 걷히기 시작할 무렵.

숭양파와 회양방 쌍방의 사람들과 말들은 일제히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쌍방이 똑같이 삼엄하고 엄밀한 포진을 하고 대치하여 당장에 치열하고 처참한 일대결투를

전개하려는 일촉즉발의 순간에 임해 있는 판이었다.

 

숭양파의 대표자 철장단심 탁창가는 맨 가운데 분연히 버티고 서 있다.

양옆으로는 몇 사람의 외부로부터  초청해 온 고수급 인물들이 서 있으며.

다소 떨어진 위치에 한 줄로 죽 늘어서 있는 것이 숭양구우(崇陽九友)들이다.

그러나 이 구우 가운데 낭월대사. 송운상인. 상강조수와 건곤취객 네 사람의 모습이 보일 뿐.

어양검사와 철우독응 두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시 뒤떨어진 곳에 늘어서 있는 인물들이 바로 숭양파 문하의 여러 제자들이고.

그 가운데 끼여서 감욱형도 같이 서있다.

 

상대방 회양방에서는 확실히 사람의 수효가 이편보다 많은 것 같았다.

 

금모사왕 오빈기도 맨 앞줄 정중앙에 버티고 서 있다

양옆으로는 그가 초청해 온 고수급 인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뒷줄에 서 있는 것은 호(虎). 표(豹). 웅(熊). 상(象)이라 일컫는 소위 사대타주(四大舵主)라는

뱃사공들. 또다시 그 뒷줄에 서 있는 것은 십여 명의 두목급 인물들이다.

 

대치하고 있는 쌍방 진영의 인물들은 똑같이 긴장한 정신으로 앞만 노려보고 엄숙하게 서 있을 뿐.

무시무시한 침묵에 휘감겨 있는 순간이었다.

 

철장단심 탁창가는 머리에 금빛이 찬란한 도관을 썼고 몸에는 번쩍 번쩍 으리으리하게

빛나는 금수학창. 장엄하고 엄숙한 기상에 이런 새벽 호상의 맑고 깨끗한 미풍이 소맷자락을

가볍게 흔더는 모습은 마치 어디선지 신선처럼 표연히 나타나 세상 밖에 나온 덕이 높은

선비와도 같았다.

그는 먼저 머리를 돌이켜 숭양파의 진용을 잠시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상대편인 회양방 쪽을 한 번 흘끗 건너다 보더니

한 걸음을 앞으로 선뜻 떼어놓았다.

앞으로 무슨 사태가 어떻게 벌어질 것이냐.

회양방만이 긴장한 순간이 아니었다.

숭양파 역시 이 대표자 철장단심 탁창가의 일거일동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탁창가는 천천히 싸움터 광장의 한복판까지 걸어나왔다.

철장단심 탁창가는 숭양파를 영도하는 대표자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고 자못 정중하고

엄격한 태도로 광장 한복판에 버티고 서더니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으로 금모사왕을 향해서 호통을 쳤다.

 

"우리 숭양파는 조사께서 창교하신 이래 항시 세상과 더불어 싸울 줄을 모르고 지내왔다.

단지 그대들의 사형 뻘이 되는 연약파가 스승을 배반하고 교리를 무시하고 『숭양비급』을

겁탈해 보려는 망상을 품고 마침내 탐욕에 눈 먼 나머지 무예계에 일대 처참한 싸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그대가 몸소 경험해 본 일이니 .

응당 그 당시의 처참하고 비통한 교훈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거늘.

뜻밖에도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도 그대는 끝까지 망상과 고집에 사로잡혀 사리를

똑바로 판단할 줄 모르고  ........

또다시 우리 숭양파를 원수로 삼고 적대시하게 됐으니 ..........

사태가 이미 이에 이에이르러서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없다 !

시비곡직은 하늘이 가리실 것이니 ............

단지 한 마디 내가 먼저 설명하고 싶은 바가 있다 !

우리 편과 그대 편 쌍방에서 이미 금일을 기하여 자웅을 결하기로 결정한 이상에는

정정당당히 공명정대하게 판가름을 해보는 것이 어떠할까 ?"

 

탁창가의 비장하고도 날카로운 음성은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딱 거쳐버리며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두 눈이 번쩍하더니.

날카롭고 매서운 안광이 새파란 불꽃이 튀어나오듯 사방으로 흐트러지며 회양방의

회양방의 한 사람 한 사람 빼놓지 않고 훑어 나갔다.

그의 매서운 눈초리에는 어떤 참기 어려운 비통한 원한이 서리어 있었다.

한참 만에야 또다시 침통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 아우 뻘 되는 금면불수 감영장도 그대들 회양방의 음모 때문에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떤 놈의 독수가 저지른 짓이냐 ?

그대. 남아대장부라면 이 자리에 선선히 그 하수자를 내 놓아라 !

그 원한이 풀리기 전까지는 나와 그대는 피차간에 영원히 마음 편한 날은 없을 것이다 ! "

 

탁창가의 말이 끝나자.

금모사왕 오빈기도 행렬에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적과 적의 대표자들은 불과 너댓 걸음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마주 쳐다보며 버티고

서게 된 것이다.

" 헤헤헤 !  헤헤 ............... "

금모사왕 오빈기는 그의 교활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

우선 이렇게 징글맞은 냉소를 퍼붓고 나서야 입을 열어 답변을 했다.

" 탁창가 !  청산유수 같은 그대의 말도 당당한 말이기는 하지만 ...........

헤헤헤 !  헤헤 .........

하지만 그대와 우리들의  사문에 있어서의 원한이 풀리기 어렵다는 사실은

잠시 말하지 않기로 한다고 하더라도 내 이 한편 눈과 한편 팔이 병신이 된 원한을 

그대는 무엇으로 어떻게 풀어 주겠다는 건가 ?

원한이란 비단 그것뿐이 아니다.

내 말을 똑똑히 들어 두어라 ! "

 

여기서 일단 말을 중단하면서 금모사왕은 여전히 징글맞은 웃음소리를 연거푸 터트렸다.

 

" 헤헤헤 .........헤헤 !  또 네 놈들 숭양파의 제자 중에서 악중악이란 놈은

우리 방의 옛날 방주님의 따님을 몰래 유괴(誘拐)해 가지고 어디론지 행방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으니 ...........

네 놈들 숭양파의 문하생들이란 모두 이 따위 비루한 놈들뿐이란 말이냐?

적어도 한 파의 종주라는 입장에서 어찌 뻔뻔스럽게도 제자를 시켜서 이렇게 야비하고

추잡스런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두다니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면목으로 이 자리에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도리어 호통을 치고

있다는 거냐!

실로 가소로운 일이다!

네 놈은 무슨 낯짝을 들고 감히 무예계의 인물들 앞에 태연히 서 있느냐?

할말이 있거든 시워스럽게 대답해 보아라 !

헤헤헤 ........헤헤........... "

 

금모사왕 오빈기는 터무니 없는 사실을 함부로 조작하여 이렇게 지껄여 대며.

그 교활한 웃음소리를 안하무인격으로 통쾌하게 터트렸다.

" 와하하하 ............. "

" 아하하하!  핫 ! "

이 긴장된 장면이 일시에 웃음의 도가니 속같이 되어버렸다.

금모사왕 오빈기의 풍자와 조롱에 가득 찬 말투에 회양방 평의 인물들이

두목. 부하 할 것 없이 일제히 앙천대소하며 깔깔뎄기 때문이었다.

우선 이렇게라도 해서 숭양파의 인물들의 약을 올려주고 풀을 꺽어 보자는 오빈기의 배짱이었다.

숭양파의 인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조리 노기가 충천했다.

더군다나 젊은 제자들 축에서는 발을 동동 구르고 주먹을 들먹들먹 당장에 덤벼들어

자웅을 결하고 승패의 판가름을 해보자는 험악한 기세였다.

" 저런 죽일 놈이 !"

" 감히 이 마당에 와서도 저따위 허무맹랑한 모욕적 언사를 함부로 ....... "

" 이놈들 어디 당장에 해보자 ! "

" 저 ......... 저놈을 .......... 그냥 ............ "

상대방의 조롱 가득한 웃음 속에서 또 자기 편 젊은 제자들의 노도와 같은 흥분된 함성 속에서.

철장단심 탁창가는 묵묵히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앞만 노려보며 말이 없었다.

그는 금모사왕이 함부로 지껄여 대는 소리를 듣고 내심놀라움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탁창가는 악중악이 회야 방면으로 간 후에 무슨 짓을 저지러고 돌아다녔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본래. 악중악이 숭산에서 제멋대로 달아났을 때.

화를 참지 못하고 엄벌에 처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탁창가의 본의는 아니었다.

정말로 악중악을 꾸짖고 책망하고 엄중한 처벌을 할 생각은 없으면서도 표면상으로는

이렇게 엄격한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승으로서 선배로서 감독을 잘못 했다는 무거운 책임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탁창가의 이런 안타까운 심정도 아랑곳이 아니라는 듯이 악중악이 두 번이나 

그의 곁에서 탈출했을 뿐만 아니라.

숭양파의 유일한 보검인 옥룡검을 훔쳐 가지고 말없이 도주하리라고는 천만뜻밖이었다.

악중악의 행동을 배사 반교지도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린 철장단심 탁창가의

심중은 지극히 괴로웠다.

또한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탁창가는 끝내 악중악이 왜 이런 경거망동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는지.

거기까지 생각해 낼 수는 없었다.

이제. 이 긴장되고 흥분된 장면에 서서 금모사왕이 떠더는 소리를 듣고 보니

무엇으로 한 대 얻어맞은 사람같이 머릿속이 띵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금모사왕이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어째든 한편으로는 풀이 꺽이고

또 한편으로는 악중악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대답할 말을 모르고 이 긴장된 마당에 묵묵히 서 있는 철장단심 탁창가는 혼자서 내심 곰곰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 악중악은 평소의 그 성격이나 소행으로 보아서 과연 어떤 특별한 원인이 없이는 절대로

교리를 배반하고 무서운 죄를 저지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이 아직도 어린 철부지인지라 .

또 경망하고 우쭐대기를 즐기는 일면이 있는지라 

감정의 충동을 받기 쉬운 성격에 ...........

정말로 여색에 빠져서 제 본성을 망각하고 일신을 그르쳤다는 건가?

결국 악중악은 미모의 애인의 유혹에 빠져서 그것을 물리쳐버릴 만한 용기나 자제력이 없이 ......

스승이나 선배들을 다시 대할 면목이 없어서 도주를 했다는 건가 ?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 사실이 어찌 되었든 또 금모사왕이 하는 말이 정말이든 아니든.

최소한 악중악이 스승과 교리를 배반하고 달아난 것은 반드시 여자와 관련이 되는 문제라는

것만은 결정적인 사실이다.

악중악을 아끼는 슬픔과 아픔과 또한 그것이 크면 클수록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이런 미묘한

감정이 얽히고 설킨 심정으로 탁창가는 혼자서 비상한 결심을 하는 것이다.

' 악중악이란 녀석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붙잡아야만 되겠다 !

그래서 이번에는 엄중한 벌을 주어야만 ............... "

숭양파의 문중에 있어서 제일 경계하고 꺼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요.

바로 색(色) 이라는 한 글자에 있었기 때문이다.

파를 만들고 교를 세운 이래.

이 색에 관한 죄를 범한 자에게는 가장 엄격하고 무서운 징벌을 내린다는 것을 철칙같이 지켜 왔다.

그만큼 숭양파의 제자 가운데는 이 엄격한 교규를 범한 자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고

또 숭양파의 인물들이 이 색이란 문제를 이다지 엄격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강호 넓은 천지에서 칭찬과 존경을 받아온 터이었다.

' 하물며 ......... 보통 제자의 신분도 아니요.

장래에 숭양파의 영도자가 될 인물이 이런 무서운 죄를 범하다니 !'

탁창가는 생각할수록 치미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어쨌든 금모사왕 오빈기의 풍자와 조롱이 가득 찬 말은 .

 이 긴장된 대치 상황에서 상당한 효과를 거둔 셈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는 철장단심 탁창가만이 분노를 참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숭양파의 스승과 선배 격인 모든 인물들도 분노를 참지 못했으며.

여러 제자들 역시 흥분을 가라않히고 냉정히 생각했을 때.

금모사왕 에 대한 분노보다도 악중악에 대한 놀라움과 의아심을 금치 못하게 됐으니 말이다.

심지어 숭양파에 초청해 온 몇몇 고수라는 인물들까지 악중악에 대한 놀라움과 분노를 

참지 못할 지경이었다.

더욱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악중악이 이미 스승과 교리를 배반하고 도주한 몸인지라.

이 자리에 나타나서 금모사왕과 면대하고 흑백을 가려서 따져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철장단심 탁창가도 이 점에 관해서는 아무리 화를 내고 흥분해 보아도 결국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또 이 긴장된 마당에서 악중악에 관한 일을 이 이상 깊이 깨고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점점 더 숭양파에 불리한 결과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탁창가는.

그 이상 할 말이 없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탁창가로 말하자면 일신의 수양도 쌓을 만큼 쌓은 사람이요.

한 파의 영도자요. 대표 자다.

언제까지고 묵묵부담으로 버티고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선뜻 흥분된 심정을 진정시키며 자못 위엄 있는 어조로 점잔케 말했다.

" 이 사실에 대해서는 그 진상이 어떻게 된 일인지.

그것을 신속히 조사해서 규정하기란 힘 안 드는 일이다!

허나 오늘 우리들의 일은 이런 사소한 일과는 그다지 중대한 관계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

우리는 우선 옛날의 묵은 셈부터 시원스럽게 깨끗이 청산하기로 하자 !

만일에 우리 감영장 아우를 암살한 하수자를 끝끝내 이 마당에 끌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 편에서도 네 놈들을 혼을 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그때에는 우리들을 불인불의(不仁不義)라고 원망하지는 말아라 !

알아듣겠느냐?  나중에 딴소리는 하지 말도록 ........... "

철장단심 탁창가는 침통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 몇 마디를 마치자.

머리를 한편으로 돌이켜서 건곤취객 방곤 영감에게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였다.

탁창가의 암호를 받은 건곤취객 방곤 영감은 즉각에 행렬에서 선뜻  앞으로 나서더니.

탁창가의 앞으로 걸어나와서 한옆에 가까이 섰다.

방곤 영감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금모사왕 오빈기의 얼굴을 번갯불처럼 무섭게 스쳐지나갔다.

다음 순간.

방곤 영감은 손을 높이 쳐들더니

등에 짊어지고 있던 보따리 속으로 부터 무엇인지 꾸러미 한 뭉치를 꺼내서

금모사왕 오빈기 앞에다 흘쩍 던졌다.

" 이놈아 ! 이거나 자세히 들어다보고 나서 말을 해 !

이개 뭣인지 알겠니 ?

똑똑히 보란 말이다 !

핫......핫......핫................. "

방곤 영감의 웃음소리는 굵직하면서도 무섭게 싸늘했다.

 

" 뭐라고 ? 괴심한 놈 ! 이건 또 무슨 서투런 수작이냐 ! "

금모사왕 오빈기는 얼떨결에 이렇게 외치면서 추호도 굴복하기는 싫다는 거만한 태도로

그 괴상하게 생긴 외눈을 더 한층 크게 부릅떴다.

그러나 아무리 허세를 부려봐도 금모사왕 오빈기는 

이순간에 당황해져서 겁을 집어먹고 깜짝 놀라는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너무나 창졸간에 어디서 난데없이 화살같이 날아들 듯이 그의 앞으로 흘쩍 던져지는

괴상한 뭉텅이 한 개는 과연 무엇일까?

보따리 속에서 꺼내서 흘적던진 한 한 뭉텅이 괴상한 물건이 바로 오빈기의 눈앞 .

땅위에 떨어지는 순간 .

건곤취객 방곤 영감은 또 한 번 싸늘하게 웃어 제쳤다.

"어리석은 놈 ! 네 눈 앞에 떨어진 물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것이 아니겠느냐 !

핫!  핫 !  핫 ! ."

" 뭐라고?  이게 뭐란 말이냐 ?"

금모사왕 오빈기의 한쪽밖에 없는 큼직한 눈동자가 슬쩍 자기의 발 앞을 더듬었다.

" 앗 ! "

놀라는 외마디 소리를 지러기에는 회양방의 두령이라는 위신과 자존심이 너무나 컸다.

" 으으윽 " 

오빈기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놀라운 외마디 소리를 간신히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태연한 체를 하려고 애써봐도 번갯불이 스쳐가듯이 졸지에 홱 변해지는

창백한 얼굴빛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는 당황했다.

너무나 졸지에 닥쳐온 극도의 충격 때문에 그저 두 주먹이 와들와들 떨릴 뿐이다.

그의 발 앞에 내던져진 괴상한 한 개의 뭉텅이는 세상에도 드문 특수한 무기로서.

그의 아들 팔조독경 오백평만이 자랑으로 삼고 즐겨서 쓰는 팔조독경이라는 무기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금모사왕 오빈기는 이윽고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섭게 굵은 음성이 떨려 나왔다.

" 뭐라고 이것은 ? 내 아들을 네. 네 놈들이 어떻게 했다는 거냐 ! "

건곤취객 방곤 영감은 극도로 당황해 하는 금모사왕의 꼴을 보자 .

또 한 번 가벼우면서도 싸늘한 냉소를 던졌다.

 

" 흐흐흥 !  그대의 귀중하신 아드님은 지금 우리 숭산에 있는 벽송관에서 휴양을 하고계신단 말야!

진심으로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한시 바삐 우리들이 찾는 암살의 하수자를선뜻

이 자리에 내놓으란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대의 귀중한 아들을 돌려줄 용의가 있으니까..............

만일에 끝까지 의리와 동지라는 것을 소중히 여겨서 그 하수자를 이자리에 내세우지못하겠다면.

그대의 귀한 아들을 우리들에게 제물로 바쳐버리면 그뿐일 것이고 ........... "

 

건곤취객 방곤 영감의 이 말은 서슬이 시퍼런 칼날같이 날카롭고 매서웠다.

그것은 암암리에 금모사왕과  그의 부하들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는 지독한 말이었다.

아들 오백평의 생명과도 같은 무기 팔조독경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지고 이 자리에 냉동댕이치는

숭야양파 놈들에게 아들은 과연 어떤 봉변과 굴욕을 당하고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 금모사왕 오빈기는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만 저만한 아들이 아니다.

금모사왕에게는 단지 하나밖에 없는 금지옥엽 같은 외아들이 아닌가.

금모사왕은 단지 아들이 소중하고 아들을 사랑하고 아파하는 생각만 한다면 .

당장에 숭양파의 감영방을 암살한 흉수를 이 자리에  선뜻 내놓아야만 될 판이다.

한참 동안이나 금모사왕의 두 어깨는 들먹들먹 했고 두 주먹은 와들와들 떨렸다.

당장에 분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렇게 경솔하게 굴 수는 없는 긴장된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질로 숭양파에 잡혀있는 아들 하나만을 살리기 위해서.

암살의 하수자를 잡아내서 넘겨준다는 것은 백 번 천 번 생각해봐도 도저히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짓을 했다가는. 금모사왕이라는 하나의 존재는 강호 넓은 천지에서 의리를 배반하고 동지를

팔아먹은 너절하고 하잘것 없는 인물이 되어버려서 무예계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시 한편으로 생각했을 때.

끝끝내 숭양파의 감영장을 암살한 하수자를 이자리에 내세우지 않는 다면 ?

그의 금지옥엽 같은 외아들 오백평은 어떻게 될 껏인가 ?

숭양파에 바치는 한 개 제물로써 영원히 희생당하고 말아야 할 뻔한 노릇이 아닌가.

금모사왕 오빈기는 실로 진퇴양난이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를 수도 없고 어찌 해야 좋을지를 알 수 없었다.

얼빠진 사람같이 묵묵히 발 앞에 던져진 괴상한 뭉텅이를 내려다 볼 뿐.

대답해야 할 말조차 선뜻 생각이 나질 않았다.

쌍방이 대치하고 있는 극도로 긴장된 공기 중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바로 이순간에.

어데선가 난데없이.

미친 사람같이 껄껄대며 웃어제치는 요란스런 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진동시키며.

여러 사람들의 머리 위로 울려 펴졌다.

한줄기 사람의 그림자가 별안간 회양방의 행렬 속으로부터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더니

숲 속에서 날아오는 한 마리의 새와도 같은 날쌘 동작으로 싸움터 광장 한복판에 우뚝 내려섰다.

쌍방의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세히 보자니.

그 자리에 뛰어든 사나이는 몸집이 거창하게도 크고 뚱뚱한 데다가 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르고

있는 나이 오십 전후의 괴상한 놈이었다.

거무튀튀한 얼굴빛에 또한 시커멓고 진하고 거친 눈썹.

흉칙스럽고 교활하고 악독하게 생긴 이 사나이는 또 한바탕 미친 듯이 껄껄대고 나서야

금모사왕 오빈기에게 찌렁찌렁 울리는 큰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 묵은 셈을 따질 지경이면 똑똑히 따지도록 합시다 !

그 하수자는 여기 바로 나였소 !  방주님 ! 무엇을 감추실 필요가 있단 말씀이요?

적어도 이 풍풍(馮風)은 무슨 일을 저지르던 간에 언제나 혼자서 책임을 져 왔다 !

그렇다고 해서 나를 이 자리에서 당장에 손발을 묶어버릴 생각을 한다면

그건 호락호락 될 노릇이 아니다 !

그 감영장이란 놈은 내 손아귀에 들어서 쓰러지게 됐으니 누구를 원망할 자격이 있단 말이냐?

제 재간이 모자라고 제 힘이 남만 못해서 죽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 놈을 위해서 대신 원수를 갚아 보고 싶다는 놈이 이 자리에 와 있다면 거침없이

나서서 나와 더불어 생사를 결단해 보자 ! "

위풍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이 풍풍이란 자가 한 번 나타나자.

쌍방 진영이 똑같이 놀라 자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파 편에서 한 대 젊은 제자들 가운데는 이 자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다소 선배 축에 드는 인물들이라면 모두들 이 자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개세천왕 연약파의 스승이던 기북인마(冀北人馬) 풍천(馮天)이란 자의 조카뻘 되는

자였다.

풍풍이란 자는 무술의 재간이 놀라울 뿐만 아니라 .

북쪽 천지에 있어서는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는 마귀같은 무서운 인물중 하나였다.

'이 무슨 당돌한 놈이냐 ?'

' 흐음 ?  바로 네놈이었구나 ! 풍풍이란 놈이 바로 ..............'

철장단심 탁창가와 건곤취객 방곤 영감이 각각 한마디씩 입을 열까 말까 하는 찰라에.

어디선지 난데없이 구슬프고도 애절한 호령 소리가 들려왔다.

" 네 이놈! 흉악무도한 도둑놈 같으니 ..........

아직도 네 더러운 목숨이 이 천지 이 하늘 밑에 살아서 돌아단니다니 ! "

처절한 음성이 터져 나오는 방향으로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음성은 바로 숭양파의 행렬 속에서 들려왔다.

한줄기 사람의 그림자가 여러 사람의 머리 위로 솟구쳐 오르더니 비호같이 땅 위에 우뚝 섰다.

땅에 발을 디디고서기가 무섭게 그 그림자는 한바탕 호통을 치면서 두 손으로 맹렬한 손바람을

일어켜 가지고 곧장 풍풍의 얼굴을 향해서 습격해 들어갔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감욱형이었다.

감욱형은 선뜻 넒은 마당으로 내닫는 풍풍을 한 번 보는 순간에.

벌써 그놈이 바로 자기 아버지 감영장을 죽인 원수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 차렸다.

무엇을 더 참고 망서리고 있을 것이랴 !

석류 속같이 고르고 흰 이빨을 앙칼지게 악물며 두 눈에는 벌써 원한이 사무치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가슴속에서 조용히 부르짖었다.

 

' 하늘에 계신 아버님의 영혼이시여 !

이 불효막심한 딸자식을 끝까지 보호해 주셔서

제 손으로 아버님의 원수를 갚아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

 

  <다음 제15장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