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11장 숭양구우(崇陽九友)

오늘의 쉼터 2013. 12. 8. 16:31

정협지(情俠誌)
제 11장 숭양구우(崇陽九友)

 

벽송간에서 벌어진 싸움

 

 

독응구붕 영감은 감욱형이 묻는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점점더 까닭을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이 철부지 계집아이야! 그것을 도리어 내게 묻는단 말이냐?

그럼 너는 왜 천암사에 있어야 할 아이가 여기 와 있단 말이냐?

그것 참?

너희들은 아직도 영문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내가 여기 오게 됐다는 것부터 큰일이다!

큰 사고다 !"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언뜻 알아차릴 수 없어서 악중악과 감욱형은 그저 깜짝 놀랄 뿐.

물끄러미 영감의 표정을 살피면서 다음 말을 기다리는 도리밖에 엾었다.

독응구붕 영감은 그제야 음성을 나지막하게 가라앉혀 또  몇 마디를 던졌다.

"그거 참 공교롭게도 여기서 너희들 둘을 한꺼번에 만나게 됐구나!

어째든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잠시  쉬다가 날이 어둡기만 하면 곧 길을 떠나야 한단 말이다!"

이건 또 무슨 까닭인지.

점점 더 요령부득일 뿐.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길로 바라다보고 있는 악중악과 감욱형의 아래위를 새삼스럽게

훑어보고 나서야 우리 파의 대표 아저씨와 우리 몇 사람은 간신히 숙천(宿遷) 지방에 이르렀다.

뜻하지 않은곳에서 난데없이 회양방 놈들을 만나게 되었다.

우연히 놈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놈들의 이야기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소식을 탐지하게 됐거든........

본래 회양방 놈들은 한편으로는 홍택호 호반에서 우리들과 일대결투를 해볼 준비를 서두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회양방의 두령 금모사왕이란 녀석이 소위 무예계의 고수라는 놈들 몇 명을

비밀리에 하남지방으로 파견시켜 우리들의 벽송관을 한 번 뒤집어 엎어볼 궁리를 한 것이다.

그래 가지고 그 틈을 타서 저 숭양비급을 감쪽같이  제놈들의 수중에다 넣어보자는 흉계를

꾸민 것인지. 놈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엉큼스러운가. 너희들도 생각해 봐라!

하기야 우리 대표 아저씨가 벌써 이런 시맥을 알아차리고 비급을 그대로 벽송관에 두지 않고

다른 곳에 감춰버리 긴 했지만 ......

그러나 우리들의 본거지가 놈들에게 아무렇게나 뒤흔들린대서야 어디 그게 될 말이냐!

강호 넓은 천지에 이런 소문이 퍼진다면.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구........

그래서 대표 아저씨는 도중에서 놈들의 이런 흉계를 눈치채자.

즉시로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을 파견해서 빨리 벽송관으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행이 회양방 놈들이 우리 숭산으로 파견했다는 고수란 놈들은

무술의 재간도 대단치 않은 놈들이어서 그것쭘이야 우리 세 사람의 힘이면 너끈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구........"

여기까지 말하는 독응구붕 영감의 얼굴은 흥분과 긴장으로 시뻘겋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숨을 돌리는 듯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늘 아침에 나는 어떤 조그마한 읍으로 들어섰는데.

시장기를 참을 수 없어 음식점을 찾아서 요기를 좀 한다는 게

시장하던 판인지라 ........

한꺼번에 너무 과식을 했던 모양이지........

갑작스레 배탈이 나서 옴짝달싹 못하고 주저앉게 돼서......."

악중악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독응구붕 영감이 하는 이야기도 우습거니와 그 얼굴.

그 표정의 괴상한 데는 도저히 잠자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하하........하하........ 아저씨도 딱도 하십니다.

무슨 음식을 그다지 주책없이 잡수시고 갑자기 배탈이 나시다니?"

"인석아! 웃을 일이 아니란 말야!

너희들도 길 가다가 배가 고파 봐라 !

그저 아무거나 닥치는 대루 틀어넣게 되는 거지 !"

" 아이 참 아저씨도 ....... 호호호......."

"허어. 이런 철부지들 !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

내 이야기나 더 들어보기나 해라 !

그래서 다른 두사람.

바로 저 어양검사와 건곤취객 둘이서는 급한 길에 거추장스럽게 구는 나를 떼버리고

자기네들만 먼저 가버렸단 말이다.

그러나 나도 몸은 비록 늙어다지만 걸음은 어지간히 빨라.

부리나케 뒤를 쫓아서 가는 판인데 .........

바로 이 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

또 갑작스레 배가 아프기 시작해서 견딜 수가 없더구나.

하는 수 없이 한군데 숲 속을 찾아 들어가서 뒤를 보고 나오자니까

나무가지에 걸쳐두었던 걷옷이 온데 간데가 없지 않겠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요.

마른 평지에서 배가 뒤집히는 격이지........

통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는데........

옷이 없어지다니.........

그래서 갈팡질팡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판인데 .......

멀리 길 건너편으로 중악이. 너의 모습이 흘쩍 내 눈에 띄더구나.

처음에는 내 눈이 어지러워져서 사람을 잘못 본 줄로만 알고 감히 악을 써서 부르지도 못하고.....

너희들 둘이서 이 여인숙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봤을 때야 분명히 너희들이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그 길로 즉시 나도 따라 들어온 것이다.

아. 그랫더니 저 버리장머리 없는 심부름꾼 녀석들이  앞을 가로막아서 ..........

내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

여관에 들지 못하게 하자는 놈들만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

독응구붕 영감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맺으려고 할 때.

심부름꾼 한 녀석이 불숙 뛰어 들었다.

여태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벙글벙걸 하면서.

"영감님 방을 따로 치워 놓았습니다! 

건너 가실까요?

진지상두 차릴까요?

또 약주나 안주를 시키시려면 미리 말씀해 주십쇼!"

악중악은 날이 저물려면 아직도 꽤 오랜 시간이 있음을 알고 .

구붕 영감을 돌아다보며 상의하였다.

"아저씨! 어떻게 하실까요?

노인께서 옷차림이 이래서야 어디 되겠습니까!

우선 제가 모시고 거리에 나가서 옷을 한 벌 사오도록 합죠.

식사는 갔다 오셔서 잡수시기로 하구요......어떻겠습니까?

이말을 듣더니 독응구붕 영감은 신바람이 나는 모양이다.

그 괴상망측한 얼굴에 벙글벙글 웃음을 띠면서 .

새삼스럽게 위신을 갖추는 듯 한편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심부름꾼 녀석에게 명령했다.

"좋아! 네 이놈. 아주 맛있는 술을 준비해라!

우리는 나갔다 와서 두서너 병 근사하게 마셔야 겠다!"

"네에.......분부대로 합죠!"

심부름꾼이 돌아간 다음에. 악중악과 구붕 영감은 감욱형에게 몇 마디를 일러놓고.

여인숙대문을 나서서 넓은 거리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서주란 고장은 본래 강호 넓은 천지에서도 몇째 안가는 대도시였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은 언제나 연락부절이요.갖가지 상업이 번성하는 지방이고 보니

당장에 옷 몇 벌쯤 구하는 데는 아무런 힘도들지 않았다.

악중악은 독응구붕 노인을 모시고 아무데나 눈에 띄는 옷가게를 찾아 들어가서 

겉옷과 속옷 두벌울 사서 갈아입게 했다.

거리 구경이나 하고 한가하게 돌아단닐 만한 정신의 여유도 없는 판인지라. 

곧장 돌아서서 급히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마침. 여인숙의 심부름꾼 녀석은 술이며안주며 먹음직스럽게 차려 놓았고 .

그 옆에서 감욱형도 눈이 빠지도록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 밖으로 이미 땅거미가 다가들고 있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으나 바람이 모질고 사납게 불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이 공교롭게 만나게 된 여인숙 방 안에서 식탁을 둘러싸고 다정스럽게 앉았다.

독응구붕 영감은 술주전자를 선뜻 집어들더니 두 사람을 건너다보면서 그 괴상하고

익살맞은 웃음을 연방 웃어가며 자못 기분이 상쾌한 모양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눈이 내릴 모양이니 . 이 낮선 고장에서 어찌 한잔 술이 없을쏘냐!"

손톱만치도 사양하는 빛이 없이 여감은 주전자 아가리에다 숫제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한참 만에야 술이 든 주전자를 내려 놓으면서.

"에.......통쾌하다! 술맛도 그럴 듯 하구.........하하하...........

너희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정말 기쁘고 든든하다!"

일변 길다란 젓가락을 들어서 고기뽁음을 닥치는 대로 입안에다 가득히 틀어넣었다.

감욱형은 아무래도 여자의 몸인지라 음식을 같이 먹는데도 조심조심 얌전을 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음식이고 간에 덥석 젖가락질을 해서 입 안에 마구 밀어넣지도 않았고 .

술 한 잔 입술에 적셔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악중악은 달랐다.

거리를 한바퀴 돌고 난 판인지라 .

뱃속에서 쭈룩쭈룩 소리가 날 지경이고 보니 어찌 식탁에 즐비하게 벌어진 맛있는 

음식과 안주들을 그냥 바라만보고 있을 수 있으랴.

또 독응구붕 영감이 어찌나 먹음직스럽게 음식을 입 안으로 틀어넣고 있는지.

그 모양을 바라보고 앉았노라니 식욕이 뭉클하게 치밀어 올라 역시 영감과 같이 

닥치는 대로 덥석덥석 집어서 입으로 틀어넣었다.

그러나 술은 과히 좋아하는 습성이 아닌지라 .

그냥 안주와 다른 음식만 배불리 먹었다.

세 사람은 술이며 밥이며 배불리 먹고 난 다음에 제각기 방으로 돌아가서 잠시 동안 쉬기로 했다.

첫 닭이 울무렵.

독응구붕 영감은 악중악과 감욱형을 깨워 세사람이 길을 떠날 차비를 차렸다.

제각기 살며시 들창 밖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 나왔다.

악중악은 은전 몇 잎을 세어 방바닥에 놓아 여관비를 셈해주고 껑충 두 발을 굴러서 단숨에

방 대들보 위로 솟구쳐 올랐다 .

그리하여 앞서 가는 독응구붕 노인과 감욱형의 뒤를 빨리 쫓아 나갔다.

여인숙을 나온 지 채십 분이 못됐을 때 .

세 사람은 벌써 서주성 밖으로 빠져 나왔다.

한군데 과히 깊지 않은 숲을 찾아서 그 옆에 걸음을 멈추고 서면서 독응구붕 영감이

악중악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편 대표 아저씨는 여러 아저씨들과 같이 지금쯤 바로 회음(淮陰)성 밖에 머물러 있을 게다.

양장(楊莊)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마을이지.

그리고 그들은 회양방의 근거지인 금사보로 쳐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게다.

중악이.너를 그 위험한 사지에서 구출해 내자는 목적으로 .

그 들은 네가 이미 그 곳에서 탈출해 나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터이니........

너는 이제야 말로 한시를 다투어 빨리 달려가서 대표 아저씨를 안심시켜 드리구........

또 회양방 놈들을 앞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이지.

그것을 다시금 잘 궁리해야만 될 것이다.

나는 이 길로 급히 숭산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같이 떠난 두 늙은이들은 내가 뒤쫓아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몹시 애태우고 있을 터이니까.....

나도 이 이상 우물쭈물 하고 있을 수 없단 말이다!

욱형아!  너는 역시 천암사로 돌아 가는게 좋을게다 .

그리고 너는 이런 점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지금의 회양지구는 어디를 가나 가시덤불같이 거친 판국이다.

 또 회양방 놈들은 수 많은 기인고수라는 인물을 몰아다가 가는 곳마다 숨겨놓고 있으니까.

네가 몸에 지녔다는 무술의 재간만을 가지고는 네 몸 하나도 감당해 나가기 어려울 지경일 터이니

만일에 두 번 다시 회양방 놈들의 손아귀에 빠져서 납치라도 당해 버리면.

그야말로 얼마나 위험한 일이얀 말이다 .

그러니까 너도 잘 생각해서 혼자 가기싫거든 차라리  여기서 나를 따라서 나를 따라서

곧장 천암사로 동행하는 것이 좋겠고.........."

악중악과 감욱형은 마치 세상 밖에 갓나온 송아지 모양.

호랑이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모르는 축이었다.

비록 숭양파의 제일 나이 어린 후배들이라고는 하지만 각자 뛰어난 재간을 스스로 믿는 바

있엇고 일단 세상 밖에 나가서 강호 넓은 천지를 돌아다니게 되면 마음껏 재간을 발휘해서

웬만한 상대방이면 쉽사리 대적할 수 있으리라는 자부심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바깥 세상은 그렇게 평탄하지는 못했고 거칠고 사납기 이를 데 없었다.

늙으신 아버지가 비명에 살해를 당해 버리고. 고봉상인은 부상을 입었으며.

감욱형 자신마저 놈들에게 납치를 당하고야 말았다.

이런 사실들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자신이 배운 것이나 몸에 지닌 재간이란 것이 아직도 어림없이 미숙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래서 감욱형은 독응구붕 노인의 의견을 듣자 그자리에서 선뜻 대답했다.

"아저씨 말씀 잘 알아듣겠어요.

저는 역시 아저씨를 따라 숭산으로 돌아가서  무술도 더 연마하고 한편 견식도 넓히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악중악은 이 며칠동안 가지가지의 변고를 연거푸 당하고 격어왔다.

마음속이 어수선하고 뒤숭숭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

독응구붕 영감의 말을 듣고는 내심 저대로의 단 생각이 있는 지라 . 선뜻 대답했다.

"아저씨께서 절더러 회음으로 가라고 하신다면 .

저도 아저씨 분부대로 그리갑죠!"

독응구붕 영감은 그 생각이 대견하다는 듯 또 말했다.

"너는 회음 양장이란 곳으로 직행해서 . 팔선장(八仙掌) 양의방이란 사람만 찾으면 바로

대표 아저씨를 찾아낼 수 있을 게다.

이 팔선장이란 분은 역시 우리 선배 되시는 고명하신 어른으로서 나와 더불어 숭양파와는

끊기 어려운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대표 아저씨도 바로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니까........"

뿐만 아니라.

또 몇 마디의 침중하고 엄격한 경계와 부탁의 말까지 덧붙였다.

"너는 절대로 내가타이르는 말을 잊어버려서는 절대 안 된다.

대표 아저씨에게 그 뭐냐 성이 연가라는 계집아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상상키도 어려운시그럽고 성가신 일이 생기고야 말 것이니......

그 점을 명심해라!"

악중악은 여전히 가슴 한복판에 뭉클하게 얹혀지는 불쾌감을 씻어버릴 수 없어지만.

그저 어물어물 노인의 말에 순순히 응하는 체 되는 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저 혼자만의 딴 배짱을 가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오랜 상의 끝에 각각 방향이 결정되는지라 .

곧 길을 달리하여 갈라지게 되었다.

독응구붕 노인은 몸을 가볍게 쓰는 재간에 있어서는 그 출중한 품으로 강호 넓은 천지에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몸을 한 번 움직이고 날리자 마치 한줄기 연기와도 같이 가볍고 조용하게 자리를뜨는 것이었다.

감욱형도 게으름을 부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뜻 자신의 진기를 불러 일으켜서 절정의 재간인 경신법을 전개해 영감의 뒤를 쫓아 나갔다.

감욱형은 몸을 훌쩍 날리는 순간.

머리를 돌이키고 한 손을 악중악을 향해서 높이 쳐들어 보이면서 큰소리로 악을 썼다.

"오빠! 부디 몸조심하세요!"

그때까지도 악중악은 땅을 디디고 멍청히 서있을 뿐이다.

두 사람이 날 듯이 사라지는 광경을 눈앞에 보며 또 감욱형의 고함소리를 듣고보니

별안간에 새삼스럽게도 감개무량한 듯 . 또 부끄러운 듯 했다.

무엇이라고 대답해 줄 말도 얼핏 생각나지 않아서 부지중 한편 손을 높이 쳐들어서

감욱형을 향하고 몇 번인지 흔들어주었을 뿐이었다.

그때 벌써 감욱형은 지상에서는 종적도 찾아볼 수 없게 제 갈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얼마동안 악중악은 넋이빠진사람같이 여전히 멍하니 서 있다가 .

별안간 무엇에 깜짝 놀란 사람같이 갑자기 두 발을 몇 번인지 쿵쿵 구르더니 

훌쩍 번갯불처럼 몸을 움직여 앞만 바라다보고 어디론지 날아가버렸다.

독응구붕 영감과 악중악. 감욱형 세 사람이 각각 양편으로 갈라져서 

몸을 날리기 시잣한 바로 그 순간에 이상한 일이 또 생겼다.

그들 세 사람이 조금전까지  서 있던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않은 곳에는

자자분한 수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좁은 숲이 한 군데 있었다.

그 숲속으로 난데없이 한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번갯불처럼 번쩍하고 나타났다.

이 시커먼 그림자는 전신을 검정빛 옷으로 휘감았으며 등에는 한 자루의 큰 칼을

둘러메고 얼굴 역시 검정 수건으로 싸매 가리고 있었다.

그는 나무 옆으로 불쑥 나서더니 무엇인지 한참동안 곰곰이 궁리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발로 땅을 쿵! 하고 구르더니

비호같이 날새게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올려가지고 마치 한 마리의 큰 새가 훨훨 공중을

날 듯. 독응구붕 영감과 감욱형이 몸을 날린 방향으로 급히 몸을 날리는 것이었다.

그 몸을 쓰는 술법이 가볍고 빠른 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로 눈앞이 어지러워

어리둥절하게 할 만큼 놀라왔다.

이월 초이튿날도 겨우 앞으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독응구붕 영감과 감욱형은 한시도 숼새없이 길을 달려서 이미 숭산 산기슭에까지 와 있었다.

땅거미가 지려면 아직도 다소 시간이 있을 무렵이었다.

구붕 영감과 감욱형은 곧장 벽송관 앞까지 달려들어갔다.

 

벽송관은 그 건물의 규모가 굉장히 크고 금벽의 색채가 휘황찬란한 도관(道館) 이었다.

일찍이 숭양파를 창시한 조사 숭양장로는 그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숭산의 남쪽에

은거해 있었는데 숭양파를 창설하면서부터 한편을는 자기 파의 중심이 되는 근거지를

마련할 목적으로. 또 한편으로는 적당한 것을 물색해서 숭양비급을 몰래 연구해 볼 작정으로.

그가 본래 은거해 있던 한 군데 자그마한 도관을 확충하고 수축해서 벽송관이라는

이름으로 고친 겻이다.

숭양파의 명성이 강호 넓은 땅에 떨쳐지게 되면서 부터 벽송관이라는 이름도 무예계의

모던 사람들이 중요한 곳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오랜 동안을 두고 어떤 사람도 가히 호락호락 제 마음대로 이 숭산을 어지럽게 굴지 못했으며.

더군다나 함부로 벽송관엘 드나든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삼 대를 전해 내려 온 다음에야 벽송관은 비로소 숭양파의 대표자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다.

이리하여 그것은 하나의 전통을 이루다시피 해서 무릇 숭양파의 대표자가 되는 인물은

반드시 이 도관 속에 언제나 자리 잡고 머물러 있어야 하며 어떤 중대한 사고가 발생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아무때나 산에서 내려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또 문하의 제자들 가운데서 중대한 사고가 발생했다거나 혹은 무슨 원조를 받고 싶은 때에도

일체 그것을 벽송관에 사전보고를 해야만 했다.

문하의 제자들이 보고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서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 권한은 물론

전적으로 대표자에게 있었다.

동시에 숭양파의 대표자는 각 대의 제자가운데서 선출해 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표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이란 반드시 입문한 연한이 오래되었다든가.

혹시 나이가 제일 많다던가 하는 점에는 있지 않았다.

다음 대의 대표자로 선정된 인물은 반드시 이 숭산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그 당대의 대표자로 부터 친히 무술의 전수를 받아야 했으니.

악중악이 바로 그 당년의 계승자요.

대표자로 선정되어서  벽송관에 머무르면서 대표자 철장단심 탁창가를 따라서 무예를

공부하게 된 것이 바로 이 규칙에 의해서 행해진 일이었다.

예전에 숭양장로가 처음으로 숭양파를 창설했을 때에는 제자를 받아들이는 수효에 있어서

몇 명이라는 제한은 없었다.

그는 도합 네 명의 제자를 받아들였다.

제일 큰 제자를 창랑거사 황보자우라 했고.

둘째 제자를 와운수(臥雲洙) 공택운(공澤雲)이라 했으며.

셋째 제자는 지룡검(地龍劒) 대천하(戴天河)라 했다. 대천하의 형되는 사람이 천룡검

대천악(戴天岳)이란 사람이었으니 바로 그가 오매천녀의 남편으로 상강파(湘江派)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관계로. 그 후에 숭양파와 회양방이 두 번씩이나 결투를 하게 됐을 때 대천악은

그 아우를 도와주려고 싸움터에 나섰다가 결과에 있어서는 형제가 똑같이

회양방의 복병들 때문에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다.

숭양장로의 맨 끝의 제자가 바로 그 후에 개세천왕이라 자칭하고 나서서

회양방을 창립하고 숭양파를 배반하고 달아난 연약파였다.

이러한 처참하고 비통한 역사와 얽히고 설킨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창랑거사는 비분과 분노와 저주를 참을 길이 없어 마침내 자기 파의 창설자요.

조사 숭양장로의 영전에 문하의 모든 제자들을 일제히 모아놓고서 정식으로 선포를

했던 것이다.

즉 일후 부터는 숭양파 문하에는 제자를 세 사람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려던 것이다.

그리고 무릇 숭양파의 제자로서 수하를 막론하고 스승을 배반하거나 교규를 어기는 자는

극형에 처할 것이며 교규를 범한 자의 후손까지도 함께 없애버린다는 무시무시한 규칙을

세운 것이다.

그것은단지 일후의 시끄러운 우환을 막자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창랑거사 자신이 자기가 받은 충격만 생각하고.

도량이 넓지 못한 편협한 소견 때문에 이토록 엄격하고 가홋한 방법을 세운데 불과했다.

그후에 와서는 개세천왕도 . 창랑거사도 쌍방이 똑같이 이것을 후회 했었다.

형제같은 처지에 골육상쟁을 한다는 것이 심히 옳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개세천왕과 창랑거사는 물과 불처럼 서로 합쳐질 수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내홍(內訌)의 소문이 바깥 세상으로 새어나가게 되자.

전 무술계에서 둘도 없는 지보라는 숭양비급은 자연 강호 넓은 천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제각기 엉큼한 생각과 엉큼한 야심을 품고 있는 이파의 허다한 인물들이 .

이비급을 넘겨다보고 침을 흘리며 이것을 수중에 넣어볼 기회를 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실로 이런 이파 인물들의 모략과 선동이 마치 불에다 기름을 뿌리고 부체질을 하듯이 .

쌍방의 감정을 더욱 충동시켰기 때문에 마침내 무예계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공전의 결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결투가 가라앉자 한 세대의 소위 선배 되는 인물들은 모조리 없어지다시피 되었다.

그 중에서 몇 사람이 남았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손을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또 이 결투에서 요행히 잔명을 보존한 몇 몇 선배격의 인물들도 제각기 종적을 감춰버려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두 번 다시 강호 넓은 천지에 발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숭양파의 대표자는 이때부터 철장단심 탁창가가 계승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창랑거사의 둘째 제자였다.

창랑거사는 세 사람의 제자를 거느리게 됬으며.

그밖에 와운수 공택운과 지룡검 대천하의 제자들을 합쳐서 도합 아홉 사람을

숭양구우(崇陽九友)라고 일컫게 되었다.

숭양구우 가운데서

제일 나이어린 인물이 바로 감욱형의 아버지 금면불수(金面彿手) 감영장(甘永長) 이었으며.

제일나이많은  인물이 바로 미산호에 있는 천암사의 주지인 대화상 낭월선사(朗月禪師)다.

이밖에 철장단심 탁창가를 선두로 하고. 송운상인(松雲上人) 파천봉(巴天鋒).

상강조수 강도(江濤). 건곤취객(乾坤醉客) 방곤(方坤). 어양검사 단목심곡(端木心谷).

철우독응(鐵羽禿鷹) 구붕(區鵬). 고봉상인(孤峰上人) 낙이산(樂以山). 등의 인물들이다.

 

이 아홉 사람들 가운데서 철장단심 탁창가는 대표자로서 무술의 재간이특별히 뛰어나서며.

그 밖의 송운상인. 상강조수. 건곤취객. 낭월대사 등 네 사람은 강호넓은 천지에서 .

숭산사로(崇山四老) 라고 일컫는 명인들로서 무술의 재간들도 서로 비슷비슷하게

고명한 축들이었다.

 

독응구붕 영감과 감욱형이 막 도관 앞에 다다랐을 때 .

난데없이 나무 숲 속으로  부터 두 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번갯불처럼 흘쩍 튀어나왔다.

손에는 광체가 번쩍번쩍 하는 장검을 들고 있었으며 .

두 놈이 똑같이 무서운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뭣하는 놈이냐?  우리 숭양파의 규칙도 모른단 말이냐!"

독응구붕 영감과 감욱형은 깜짝 놀라서 주춤하고 멈춰 섰다.

그러나 그 시커먼 두 그림자를 자세히 살펴보며. 악을 쓰는 음성을 들어보니 .

심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것은 괴상한 놈들이 아니었고 벽송관의  꼬마 제자들이었다.

밤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캄캄했고 나무가 울창하게 무성한 숲 속이었는지라 .

제 편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뛰어나와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독응구붕 영감은 한참만에야 너털웃음을 치면서 꼬마 제자들을 꾸짖었다.

" 허허허...... 어린 녀석들이 그렇게눈 짐작도 없고 아릿아릿해서 무엇에다 쓴단 말이냐 !

이 녀석아 ! 내 이 번쩍번쩍하는 대머리도 못 알아 본단 말이냐 ?"

그 시커먼 두 개의 그림자는 독응구붕 영감의 음성을 알아차리고 급히 뒤로 물러서며

장검을 도로 칼집에 꽃았다.

그리고는 다시 공손한 걸음걸이로 서너 걸음 앞으로 나섰다.

틀림없이 관동(館童) 들이었다.

한 녀석은 원명(源明). 또 한 녀석은 원량(源亮)이라 했다.

꼬마 제자들은 독응구붕 영감에게 허리굽혀 절하며 말했다.

"방선생 아저씨와 단목 선생 두 분께서는 어젯밤에 벌써 이곳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아저씨께서 돌아오시기를 눈이빠지도록 기다리고 계신데요.......

욱형 누님까지 동행을 해 오셨으니......

빨리 안으로 들어가십쇼 !"

두 꼬마 제자들은 놀라움이 기쁨으로  변해서 연방 어둠 속에서도 싱글벙글하며

한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안내했다.

한편 원량이라는 관동은 몸에 지니고 있던 대나무 피리를 꺼내서 입에 물고

세 번이나 힘껏불었다.

휘익!  휘익!  휘익!

대나무 피리의 맑고 높은 음향이 심산유곡의 밤 공기를 흔들어 쇳소리같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독응구붕 영감은 이 광경을 보자 이상하다는 듯 관동들에게 물었다.

"어째서서 깊은 밤중에 . 우리 관은 이다지 경계가 삼엄한 것이냐?

감욱형도 근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영감에게 물었다.

" 적군의 수상한 행적이라도 나타난게 아닐까요?"

앞장을 서서 걸어가던 원명이 고개를 돌이켜 뒤를 돌아다보며 대답했다.

" 놈들은 아직도 나타나지는 않았사옵니다.

단지 방선생 아저씨와 단목선생 아저씨께서 경비를 엄중히 하라시는 분부가 있으셨사와 .......

그래서 저희들은 번갈아 보초를 서고 있사오며 이렇게 피리 소리로 연락을 해드리고 있사옵니다."

말을 마친 네 사람은 벽송관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막. 돌층계를 올라서려고 했을 때. 안으로 부터 누군지 두 사람이 이편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중 한사람이 껄껄대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독응구붕 영감에게 말했다.

"여보게 대머리! 자넨 걸음이 빠르기로 유명하다고 자칭하는 친구가 이제서야 어정어정

기어들다니.......하하하..............."

독응구붕 영감은 선뜻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번쩍번쩍하는 대머리 뒤통수를 긁적거리고

서 있을 뿐.

" 하하하....... 그게 무슨 꼴이냔 말일세 ?

먼길을 가는 사람은 몸이 제일이라고 그렇게 타일렀는데도.

자네는 음식을 닥치는 대로 함부로 틀어넣고서 ..............

길을 오는 도중에 내내 설사만 하구.

간신히 걸어온 모양이지?

꼴을 보자니 다리에도 맥이 탁 풀렸고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모양일세 그려!

우리는 벌써 어젯밤에 여기까지 왔단 말야!

사람도 저렇게 변변치 못하게 ........."

독응구붕 영감이 무슨 말대꾸를 해줄 생각을 하고 있는 판에.

또 다른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자넨. 천암사에 가서 한바탕 잘 놀고 온 모양일세 그려?

그러기에 욱형이 까지 같이 데리고 온 것이겠지.

그렇게 딴곳으로 돌아단니고 왔으니 자넨 걸음이 제 아무리 빠르다한들

우리들의 뒤를 쫓아올 수야 있었겠나 ?"

두 친구에게 놀림감이 되다시피 했으나 .

그 괴상망측하게 생긴 얼굴이 씨무룩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변해서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심히 억울하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 자네들은 남의 딱한 사정도 모르고서 그따위 소리들은 하지 말게 .........."

독응구붕 영감은 이렇게 한마디를 뚝 던지고 나서. 악중악과 감욱형을 만나게 된 데서부터.

여태까지의 자세한 형편과 경과를 두 사람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 두 사람이란 바로 건곤취객 방곤과 어양검사 단목심곡이었다.

방곤이란 사람은 나이 오십을 훨씬 넘었으며. 어양검사는 깔끔하게 생긴 편이나 비쩍 말라서

전신에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모습이 가련해 보일 지경이었다.

소매자락이 힘없이 휘적휘적. 그 풍체나 옷차림이 소위 속세를 초탈한 사람같아 보이는데.

한가지 괴상한 특징은 그 가느다란 허리에 큼직한 조롱박을 차고 있어서 때없이

건들건들하고 번쩍번쩍하는 점이다.

어양검사는 방곤이란 사람과 비교하면 준수하고 점잖은 풍체를 지닌 사람이다.

나이 비록 오십을 넘었다고는 하지만 언뜻 보자면 불과 삼. 사십 대 같이 젊어 보였다.

아직 머리털 하나도 변색 되지 않았으며. 옷차림도 단정한 편이다.

준수하고 점잖은 풍체에 옷차림까지 깨끗하고 단정하니 이 사람은 누가 보나

귀공자의 인상을 준다.

허리에 차고 있는 한 자루의 장검도 몸집과 격에 어울려서 자못 위풍당당하게

품이 있어 보인다.

두 사람은 독응구붕 영감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야.

여태까지 시간이 지체된 까닭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되는 심정인 모양이다.

" 흐음?  그건 정말 신출귀몰한 일인데 .......

어떤 복면을 한 청년이 악중악이를 금사보에서 구출해냈다니 ?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 걸!

단기필마로써 능히 회양방의 아성에 뛰어들어 악중악을 구해냈다면.

그 청년의 무술의 재간이란 우리도 놀랄 지경이겠는데...... 흐음 !"

감탄하여 마지 않는 건곤취객 방곤의 옆에서 어양검사 단목심곡은 통쾌한 웃음을

참지 못하며 기쁘서 어쩔줄 몰랐다.

" 핫 ! 핫 ! 핫 !

그거 참 통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로다 !

회양방 놈들이 악중악을 인질로 잡아 두고 우리 숭양파를 괴롭혀 보자는 엉뚱한 개교도

결국은 일장춘몽이 되었단 말이지 !

핫 !핫 ! 핫!

헛물을 마시고 눈이 뒤집혔을 놈들의 꼬락서니를 생각만해도 ......

진실로 통쾌한 일이다 !"

그러나 웬일인지 건곤취객 방곤 노인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 졌다.

"그건. 잘 모르겠는 걸! 그 복면을 하고 나타났다는 청년이란 ?"

방곤 노인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 뭣 말씀이세요 ?"

감욱형이 답답함을 못참겠다는 듯 이렇게캐물었다.

건곤취객 방곤 노인은 심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욱형 쪽으로 돌리며

어떤 의문점을 물어보고자 애쓰는 눈치가 역력히 드러났다.

" 흐음 ?  그러면. 악중악의 말에 의하면 그 복면을 했다는 청년의 무술의 재간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고 거의 어떤 조화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사람이더란 말이지 ?

욱형이 너는 너를 구출해주었다는 청년이 바로 노씨라는 사람인 줄 알고 있다는 말이냐 ?"

감욱형은 가장 중요한 점을 물어주어서 고맙다는 듯.

선뜻 고개를 끄덕끄덕해 하면서 대답했다.

" 제 생각으로는. 중악 오빠가 저에게 이야기해 주기를 꺼리는 눈치지만.

사실은 반드시 그 사람이 바로 노씨라는 분 같아요.

그 노씨라는 분은 금사보에서 구출해 주고나서. 도중에서 오빠가 놈들에게 다시 납치되어

감금당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당장에 금사보로 달려가서 오빠를 구출해 낸 거예요.

동시에 저더러 미산호의 천암사로 가서 이런 급보를 전한 뒤 대표 아저씨에게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라고 알려줬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는 우리 주악 오빠는 구출됐지만 .

그 노씨라는 분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됐으니 ........

오빠에게 물어봐도 통 말을 하려 들지 않아요.

그저 덮어놓고 모른다고만 하니........

그분이 설사 우리 오빠와 같은 파의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의 생명을 걸고. 만난을 무럽쓰고 오빠를 구출해줬는데........

어떻게 모르는 체를 하구 딱 잡아땔 수야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아저씨 !"

말을 마치고 난 감욱형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긴장과 근심이 한데 엉클어진 표정이었다.

" 남에게 구명의 은혜를 입고 그것을 모르는 체 한대서야 ......그야 어디 될 말이 겠으요?"

감욱형은 몹시 안타깝다는 듯 이렇게 또 한마디 덧붙였다.

순진한데다 천진난만한 소녀의 기질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감욱형이였다.

어렸을 적부터 응석과 애교가 버릇이 되어 아버지 감영장의 총애 속에서 자라난 소녀였다.

감욱형은 천성이 똑똑하고 외모가 또한 예쁘게 생겼기 때문에 .

숭양파의 여러 아저씨 무인들에게서도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라났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부친이 이 세상을 떠나고 보니 .

제일 크고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역시 무남독녀 외동딸인 감욱형이었다.

한도안은 몸부림과 통곡으로 부친의 뒤를 따라서 그대로 자결이라도 할 것같이 슬픈 나날을

보냈으나 다행히 숭양파의 대표자와 여러 선배 아저씨들이 타이르고 달래고 위로해 주어서

가까스로 살아온 셈 이었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를 사별했고 다시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보니

감욱형은 그야말로 혈혈단신. 오빠나 다름없이 같이 자라온 악중악은 멀리 숭산으로 

올라간 채 내려올 줄 모르게 되니.

숭양파의 대표와 다른 여러 선배 아저씨들이 상이한 결과 고봉상인에게 딸려서 

산동지방으로 보내어 그곳에 있는 집이나 잘 돌보고 있게 하자고 결정했다.

고봉상인 낙이산과 감욱형의 부친인 금면불수 감영장은 같은 스승을 섬긴 동배의 제자

사이였기 때문에 특히 고봉상인 노인에게 감욱형을 맡기기로 결정했었던 것이다 .

낙이산과 감영장은 지청룡 대천하의 똑같은 제자들이었고 .

또 고봉상인 낙이산의 아내되는 채홍녀(彩紅女) 백기련(白綺蓮)은 슬하에 소생을 가저보지

못한 여자로서 감욱형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게 된 뒤부터는 항시 돌봐주곤 해서

어떤 사람보다도 마음이 맞고 친숙한 사이였다.

이렇게 여러모로 생각하고 상의한 끝에 감욱형을 고봉상인에게 맡기기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숭양파의 대표자 철장단심 탁창가는 일찍이 보지 못한 중대한 설명서를 발표하여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문하의 제자들에게 골고루 전달케 하였다.

그것은 감영장을 암살한 회양방 놈들을 찾아내서 복수를 해주어야만 되겠다는 비상한 결의문

이었다.

그러나 누가 꿈엔들 생각 했으랴.

산동지방으로 떠나가는 도중에서 고봉상인과 감욱형이 홍의화상과 맞닥뜨리게 되어.

고봉상인은 중상을 입고 감욱형은 놈들에게 납치되어 가게 될 줄이야.

철장단심 탁창가는 이때까지도 모던 억울함과 분함을 억지로 참아가면서 .

되도록 무예계에 처참한 싸움을 일어키지 않으려고 애써왔었다.

그러나 사태가 이에 이러고 보니.

그 이상 참고 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는 몸소 천암사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철장단심 탁창가는 천암사로 내려와서 숭양파의 전체 제자들을 소집해 가지고

그 앞에서 중대한 결의를 표명했다.

" 여러 선배님들! 또 여러 후배 동지들!

우리는 이제 숭양파의 명예와 위신을 위하여 이 이상 회양방 놈들의 잔인무도한

살육행위를 수수방관할 수는 없게됐소!

전원이 비장한 각오와 결심으로써무예계의 올바른 전통을 사수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싸워야 할 때가 왔소!"

철장단심 탁창가는 한편으로 회양방 그 자체는 뻔히 알려진 한정된 인물들로서

그다지 두려워할 만한 존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금모사왕이 몰아들인 수많은 고수라는 위인들이.

더군다나 몇몇 이파의 기인이라는 놈들이 모질고 악독한 존재들이라는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마귀 두목 같은 위인들이 남몰래 의도하는 바는 전혀 다른데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숭양파가 산속에 모셔둔 무술의 지보(至寶)인 숭양비급을 빼앗는데 있었다.

앗차! 하고 하 번 발을 헛디더 실수를 하는 날이면. 숭양파라는 존재는 재와 같이 연기와 같이

바람에 날려서 형체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는 판이다.

생사와 존망이 오로지 이 한 점에 달려있는 것이다.

철장단심 탁창가는 심사숙고 . 경거망동을 삼가해 왔었다.

조사 숭양장로가 눈을 감기전 신신 부탁한 바를 배반할 수없었다.

숭양파의 명맥이 끊어지는 일을 결코 경솔히 할 수는 없었다.

참다참다 못해서.

철장단심 탁창가는 무예계의 여러 정통파 고수들에게 오로지 의협심에 호소하는 초청장을

발송했었다.

그는  그 전갈에서 회양방의 야심만만한 악독한 소행을 자세히 설명 했으며.

아울러 무예계에는 일대 결투가 불가피하게 다가오고 있으니.

여러 정통파들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일치단결. 합심협력해서 이번 결투를 승리로써 수섭하여.

이십여 년 전의 저 무섭고 처참한 수라장을 두 번 다시 연출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간곡하게

주장했다.

마침내. 

여러 정통파의 인물들은 그의 간곡한 호소에 감동하여 다시 한 번 그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결심을 하게되 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

여러 정통파 인물들 가운데서도 .

이것을 단순히 숭양파와 회양방의 파벌적인 싸움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두 파 사이의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무예계의 전반적인 일대 결투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숭양파라는 어떤한 파의 이익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 대규모의 싸움을 일어키기를

원치는 않는다는 태도를 표명한 인물들도 많았다.

철장단심 탁창가는 비록 그가 희망하는 바 각 방면의 절대적인 원조를 획득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사태가 이미 칼을 뽑지 않고 활을 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러렀다.

이리하여.

그는 그 이상 무엇을 더 망서리고 고려해 볼 여유가 없게 되었다.

시급히 회양지구로 친히 달려가 고봉상인이 부상당한 형편을 돌봐주고 .

그 길로 다시 납치당한 감욱형을 구출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뜻했으랴.

그가 숭양파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미산호에 있는 천암사에 다다른지 채 하루도 못됐을 때.

감욱형이 표연히 그의 앞에 나타날 줄이야.

" 아니. 너 이게 어찌된 셈이냐?

회양방에 납치되어 간 줄로만 알고 있는 계집아이가 이렇게 어디서 바람처럼 나타나다니 ?"

철장단심 탁창가의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

숨이 턱에 닿은 감욱형은 어떤 말을 먼저 해야 좋을지 몰라서 겁을 잔뜩 집어먹고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어서 말을 해보거라.

여태까지 경과를 자세히 보고하란 말이다 !"

철장단심 탁창가는 엄격하게 호령을 했으며.

감욱형은 그의 명령대로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욱형의 보고를 듣고 탁창가는 놀라는 한편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가 꺼림직하게 생각하고 노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던 한 가지 일이 저절로 해결되어서

감욱형을 구출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감욱형이 뜻하지도 않은 근심스런 소식을 가지고 왔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악중악이 회양방 놈들에게 납치당했다는 사실.

그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비록.

무예계에서 제일인자라는 고명한 인물  남해어부의 제자인 노영탄이.

의협심에 불타올라서 또다시 금사보에 단신 침입하여 악중악을 구출하려 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은 미지수에 속하는 일이었다.

철장단심 탁창가의 생각으로는.

금사보라는 회양방의 아성은 용이 버티고 있는 물 속 같고 호랑이가 으렁그리고 있는굴 속 같은

곳이며 회양방의 방주 금모사왕이 이미 악독하고 무서운 고수들을 무수히 끌여들인 판이니.

이만저만하게 어려운 일이 아닌 성 싶었다.

남해어부의 무술의 재간이 비록 고명하고 절묘하기 귀신 같다고는 하지만.

그의 제자 하나쭘을 가지고는 무수한 마귀의 두목같은 놈들을 반드시 싸워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젊은 청년 한 사람의 힘으로써 능히 악중악을  이험악하고 무서운 호랑이 굴 속에서

구출해 내리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한 가지 .

철장단심 탁창가만이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만 근심 걱정하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악중악의 완강한 개성이나 뽐내려 들기 좋아하고 자칫하면 거만스러운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악중악은 스승의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산을 내려갔으니.

조사 때부터 전해 내려 온 교규대로 따지자면 곧 스승을 배반한 놈이었고.

가볍게 따저도 역시 중대한 규칙을 범한 놈이었다.

탁창가의 본심으로야 악중악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기 이를 데 없었다.

악중악이 좀채 얻기 어려운 기재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천품이나 자질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

오 년 동안이나 벽송관에서 탁창가로부터 친히 무술의 재간을 전수받아 내공. 외공의

재간을 깊이 터득한 악중악이다.

악중악의 무술의 재간이 비록 오묘 불가사이한 조화의 경지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강호 넓은 천지에서 가히 일류급 고수의 자격은 충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철장단심 탁창가가 이제부터는 한 걸음 나가서 악중악에게 숭양비급을 연구시켜도 좋다고

생각했을 때. 공교롭게도 바로 이때 악중악은 도리어 스승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산에서 내려가버린 것이다.

비록.

그의 동기가 옳다고 할지라도.

그의 행동이 이미 교규를 범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도리는 없게 되었다.

탁창가는 일파의 영도자요 대표자이다.

그리고 악중악 또한 그 자리를 계승하여 문하를 다스려 나갈 후계자로 선장된 인물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지위나 위치의 관계만을 가지고 교규를 범한 악중악을 .

그를 이끼고 사랑한다는 까닭으로 징벌을 가하지 않는다면.

숭양파의 모든 문하생들이 불평. 불복을 참는다손 치더라도 .

탁창가의 영도자로서 영도자로서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일후에 또 제자 가운데 교규를 범한 자가 생겼을 때 어떻게 그것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악중악 자신을 위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만일에 악중악의 이번 행동에 아무런 징벌도 가하지 않고  그대로 묵과해 버린다면.

그는 점점 더 대담해지고 안하무인격으로 제멋대로만 날뛴 것이니

이렇게 되고 보면 장래에 있어서 어떠한 교규에 어것나는 행동을 저지를지 상상할 수 엾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현제 악중악은 회양방 놈들에게 납치되어 포로의 몸이 되어있다.

만일에 악중악이 이렇게 사지에빠져 있는 아슬아슬한 판에.

탁창가가 들고 일어나서 그를 처벌한다면 악중악은 그 격하기 쉬운 성격에 극단의 감정대로

행동할 것이며 마침내는 과거의 연약파와 같이 억지로라도 숭양파를 이탈해 나가서

강호 넓은 천지를 어지럽게 하리라는 점 이었다.

악중악이 이파에 가담해서 날뛰게 된다면.

그것은 곧 숭양파로 하여금 또 다시 무예계에 씻기 어려운 웃음거리를 남겨 놓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신중히 고려한 끝에.

탁창가는 여러 선배 무인들의 권고도 있고 해서 경솔히 악중악에게 자극을 주는 길을 피하고.

잠시 이 문제는 따지지 않기로 하며 우선 악중악을 구출해 놓고 보자는 결정을 내렸다.

또 감욱형이 탁창가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회양방 놈들은 이미 숭산으로공문을 발송했으며.

악중악을 인질로 잡아두고 숭양파를 지분거리고 있으며 이월 초이튿날을 기약해서

쌍방이 홍택호 호반에서  결투를 해보자고 서두러고 있다는 것이다.

탁창가는 여러 사람들과 이모저모로 신중히 검토해 본 결과 .

우선 회양지대로 나간 다음에는 회양방의 본거지인 금사보로 접근해 들어가서 기회를 엿보며

행동을 개시할 것이요.

숭양파에서 초청한 여러 고수들이 늦어도 이월 초이튿날 이전에 도착할 것이므로 

그때 가서 다시 정세를 살펴보며 행동을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탁창가는 숭양파의 노소 선후배 이십여 명을 인솔하고 호호탕탕한 행렬로 회음지구에 도착했다.

양장에 있는 팔선장 양의방이라는 사람의 집에 투숙했다.

이 팔선장이라는 인물은 숭양파와 깊은 교정(交情)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창랑거사 황보자우에게 신세를 진 바도많았고 .

여러번 숭양파 문하에 들어가고 싶어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창랑거사 급의 세 인물들이

모두 제자를 세 사람씩 거너리고 있었는지라 규칙을 깨뜨리고 이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정식으로 적(積)에 오른 제자와 똑같은 신분을 지키며.

창랑거사 급의 인물들에게 깍듯이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고 지내왔다.

그 후에 이 사람은 어떤 특이한 사람의 문하에 들어가 탁월하고 절묘한 무술의 재간을

연마했으며. 저 유명했던 무예계의 일대 결투 때문에 창랑거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기 집에 파묻혀서 은거생활을 해왔다.

 

탁창가가 무예계의 의협심에 호소하는 초청장을 각 방면으로 뿌려서

널리 정통파 인물들의 조력을 요청했을 때

이 양의방이란 사람도 그 초청장을 한 장 받게 되자 .

비분강개해서 다음과 같은 답을 즉시 탁창가에게 보내왔다.

 

이를 위해 마침내 칼을 뽑으시려는 선배님들의 용단성에 탄복하올 따름입니다.

다행히 소생이 거처하고 있는 지점은 회양성 밖의 회안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여러가지로 편리하실 듯 하오니 누추한 소생의 거처나마 숭양파의 활동 근거지로 삼아 주신다면

무상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이리하여 .

탁창가는 부상당한 상처를 아직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고봉상인과 회양방 놈들에게

납치 당했다가 극도로 체력이 소모된 감욱형. 두 사람을 천암사에 남겨 두고 .

그 밖에 여러 사람들만 거느리고 일로 회음지대로 달려온 것이다.

감욱형은 누구보다도 성품이 순진하고 관후한 아가씨다.

오 년 전에 우연한 동정지심과 측은지심에서 위기일발에 빠진 노영탄을 구해주기는 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노영탄에게 대해서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자는 생각에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일종의 너그럽고 인자한 이 아가씨의 성품에서 나온 단순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그후. 감욱형은 노영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비록 이 소년이 준수하고 명민하게 생긴 풍체가 가슴속 깊숙히 지워버릴 수 없는 인상을 

남겨 놓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흘러가는 세월을 따라서 희미하게 사라져 갔을 뿐이었다.

 

<다음은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