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7장 매림노파 (梅林老婆)

오늘의 쉼터 2013. 12. 7. 22:02

정협지(情俠誌) 2권

제 7장 매림노파 (梅林老婆)

 

검정매의 전갈

 

 두 젊은이를 태운 배는 그냥 강물을 헤치며 흘러가고 만 있었다.
 무궁무진 하다던 노영탄의 이야기도 주로 오년 전 숭양표국 대문 앞에서

음으로 감욱형을 발견했던 소년 시절의 잊기 어려운 추억에서 맴돌기 일쑤였다.

 물론,

그것은 감욱형에게도 꼭같이 잊기 어려운 소녀시절의 추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땐, 정말 노공자께서두 시골티가 뚝뚝 드는 철부지 소년……, 호호호……
 저 혼자만이 시골뜨기의 매력을 찾아냈을 거예요!"

 감욱형의 말투는 점점 흉허물 없이 친근해졌다.
 "그럴 수밖에 있겠소! 산 두메에서 생긴대루 튀어나온 놈이었으니까…핫!핫! 핫!"
 "호호호……."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는 상쾌한 감격에 터져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대화는 꽤 오랫동안이나 곧잘 중단되었다.

 중단되는 대화…

그것이 곧 서로 그리워 하다가 만난 젊은이들의 진정한 대화인지도 몰랐다.
 이야기가  중단될 때마다 감욱형은 고개를 갸우뚱 해서  믿음직하고 흐믓한
 노영탄의 한 편  어깨에 뺨을 대고, 강물위 먼 하늘만  바라다보았다.

 앞이 훤하게 틔는 것만 같았다.
 비록 딸로 태어나서,

남의 힘을 빌린다고는 하지만, 

회양방 향비 때문에 무참히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흥분에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강물 위에 솟아오르는 아침 양광을 송두리째 가슴팎에 안아 보고 싶은 감욱형이었다.

 앞으로 닥쳐올  놈들과의 싸움.

그것은  험난한 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아침 양광 같은 광명(光明)이 아닐 수 없다.

그 광명이  바로 옆에 와 있지 않은가.

 노영탄의 어깨에 뺨을 비벼대며 혼자서 새삼스럽게 방끗! 웃어도 본다.
 "무엇을 그렇게 혼자서만 웃고 계시오?"
 "너무 기뻐서요! 어찌 했으면 좋을지……호호호……."

 턱 아래 와 있는  감욱형의 꽃송이 같은 미소를 바라다보며

노영탄도 말 없이 빙그레 따라 웃을 뿐이었다.

 자살을 하려던 오년 전의 바보소년.
 그에게 그렇게도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아침이 있을 줄 어찌 뜻했으랴.

 무술은 뭣 때문에 배웠느냐?
 악을 무찌르기 위해서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노영탄도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새롭게 하면서 눈부신 아침 하늘을

상쾌하게 바라다 보고 있었다.

 추울 까닭이 없었다.
 아리따운 아가씨의 체온(體溫)이 바로 몸에 와 있지 않은가.

 비록 깊은  겨울날,

쌀쌀한 아침,

한없이  널브러진 강물 위는  살을 에어낼 듯이 매정스런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젊은이들은 추울 까닭이 없었다.

 간혹, 한 두척의 고기잡이  배들이 돛을 아침 바람에 나부끼며

그들의  옆으로 지나쳐 가기는 했으나, 

사람의 그림자라곤 하나도 찾아낼 수 없는 두  사람만의 강물이었다.

 둘이서는 돛대 밑에 나란히  서서 일부러 차가운 바람을 쏘여도 보고, 

힘을 합쳐서 노를 저어도 보고,

유유히 강상풍경(江上風景)을 즐기며 흘러가고 있었다.

 배가 호수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난데없이 수많은 기러기떼가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스칠 듯이 날아들더니

시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 기러기 떼들이 노영탄과 감욱형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날아들기 시작했을 때,
 맨 앞장을 선 두령격인 제일 큰 기러기 한 마리가 웬일인지 

갑작스레 날개를 움츠러뜨리고 끼럭! 끼럭! 두어서너번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그러더니 화살이 꽂히듯이 아래를 향해서 곤두박질을 치는 것이었다.
 질서정연하게 대오(隊伍)를 지어 뒤를 따라가던 여러 기러기 떼들은, 

이 광경을 보자 불시에 무슨  봉변이나 당한 듯이 일제히 날개를 거두고,

역시  아래를 향해서 곤두박질을 쳤다.

 그리고는 여태까지의 한일자 대오가 양편으로 싹 갈라져서

여덟팔자 대오로 변해가지고 제각기 모가지를 길게 내뽑고

조심스럽게 앞을 바라다보는 것이었다.

 "무슨 까닭일까요? 곧잘 날으던 기러기 떼가 별안간에?"
 "이상한 일인데? 저게 무슨 흉조(凶兆)가 아닐까!"

 강물 위,

동녘 하늘의 찬란한 아침에 도취해  있던 감욱형과 노영탄은,

급히 머리를 쳐들어 이 광경을  유심히 바라다보며

누가 먼저 꺼낸지도 모르게 이런 말들을 하고 있었다.

 기러기 떼들의 날으고 있는 품이,

꼭 무슨 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것만 같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얼마 사이를 두지 않고, 

 멀리서 한 점의 새카만 그림자가 남녘  하늘로부터 날아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가깝게 대드는 그 새카만 그림자가 한  마리의 무섭고 크고 사납고

날쌔게  생긴 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눈이  번갯불같이 번쩍번쩍,

 새카만  털에서는 눈부신 광채를 발산하며, 

펼쳐진 날개만도 그 폭이 너더댓자나 되어 보이는 큰 매 한마리.

 이 매는 쏜살같이 기러기들의 대열을 향해서 날아 들었다.
 기러기 떼들이  여덟팔자로 갈라져서 대오를  정비하고

경계를 든든히 하는 것을 보자, 

그 매는 일부러 장난질을  쳐서 그것들을 놀려보자는 배짱인  듯 싶었다.

 두 날개 죽지를 훨쩍 펴서 날쌔게 휘적거리더니 한편 발을  길게 뽑아서,

날카로운 발톱을 쇠갈퀴처럼 무섭게 해가지고 다짜고짜로 앞장을 선

큰 기러기에게로 덤벼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러기 떼들도 각오를 단단히 하는 모양이었다.

 자기네 편이 진용을 정비하고,

앞장 선 큰  기러기를 옹호하고 있는데,

마치 이까짓 것쯤은 안중에  없다는 듯,

덮어놓고 덤벼드는 매의 거만하고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꼴을 보고

양 편으로 갈라선 기러기 떼들도 날개를 펼쳐서 용기를 내면서

일제히 매를 포위하고 협공해 버리자는 기세로 덤벼드는 것이었다.

 기러기떼들처럼 단결력이 센 날짐승은 드물다.

 웬만한  강적과 맞닥뜨렸다고 해도,

겁을 집어먹거나 뿔뿔이 흐트러져 버리는 법이 없는 것이 기러기의 특징이다.

 제 아무리, 

이 매란 놈이 크고  무섭고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다 할지라도,
수많은 기러기 떼들을 동시에 대적하고 싸운다면 견디어 낼 힘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큰 매란 놈은 확실히 괴상한 놈이었다.
 수 많은 기러기 떼들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직한데도, 

 이놈은 웬일인지 상대방을  한번 건드려 보고, 

찝적거려 보고,

놀려 보고  장난질을 쳐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도무지 겁을 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 검정매는 심보가 간악하고 짓궂고 심술 사나워 보였다.
 슬쩍,

 앞장을 서서 기러기떼를  거느리고 있는 큰 기러기의 머리 위로  날아 들더니,

다른 기러기들이  저를 포위하고 협공으로 덤벼들 기세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도,

일부러 모른 척.

 날카롭고 쇠갈퀴같은 한편 발톱을 안하무인격으로 휘두르더니, 

큰 기러기를 가볍게 툭 건드려 보는 것이었다.

 큰 기러기는 혼자서 그것을 대항 할 만한 힘이 없어,

펄떡펄떡  두번을 재주를 넘듯 몸을 엎치락 뒤치락 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큰 매는  기러기 떼들이 포위하고 덤벼들 틈도 없이, 

두 날개를 거만스럽게 한번 푸두둑!  하고 불쑥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구름 속을 뚫고 뺑소니를 쳐버리는 것이었다. 

가벼운 장난에 불과 했다.

 기러기떼를 거느리고 앞장 서 가던 큰 기러기도 어디 상처를 입었을 정도도 아니었다.

 이런 꼴을 보고 있던 수많은 기러기떼들은 이미 그 검정매도

종적을 찾을 수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지라, 

그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

시급히 대오를 다시 정비해 가지고 가던 방향으로  그대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그 검정매는  또다시 구름 속에서 훌쩍 형체를 드러내더니 쏜살같이 날아 나왔다.

 이 짓궂은 장난꾸러기는 아직도 멀리 가지 못한 기러기떼들의 뒤를

바싹 쫓아 대 섰다.

전광석화같이 날쌘 동작으로 기러기들의 대오를  또 한번 스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이었다.

 두번째나 깜짝 놀란 기러기들의  대오는 다시 흐트러져서

일대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큰 매는 이렇게  장난질을 쳐놓고,

웬일인지 이번에는 높이 날아서  뺑소니를 치지도  않고,

그와는 반대로  아래를 향하고 곤두박질을 치듯, 

화살이 꽂히듯 일직선으로 내리 닫더니, 

 마치 제비가 강물을 차듯 물 위를 스치고 다시 감욱형이와 노영탄이 타고 있는

배 한편 모퉁이를 스치고 지나쳐 가는 것이었다.

 감욱형과 노영탄은 배위에 나란히 앉아서 이 광경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검정매 한놈이 기러기 떼를  희롱이나 하듯 장난치고 짓궂게 노는 꼴이, 

 어떻게 보면 기막하게 우습기도 했고 볼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검정매가 두 사람 타고 있는 뱃전을 스치고 지나쳐 갔을 때,

욱형은 그 매의 왼편 다리를 힐끗 바라다보고 거기 한 조각의 헝겁이

감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감욱형은 놀랍다는 듯 또  한편 기이하다는 듯 허둥지둥 하더니

대뜸 쉬익! 하고 휘파람을 한번 쨍쨍 울리게 부는 것이었다.

 "어쩌면 저게 여길 알구 찾아왔을까! 기특한 놈!"
 휘파람을 불고 나서 혼자 중얼대는 감욱형의 말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게 된 것은 노영탄이었다.
 노영탄은 사실 아무런 딴 생각도 없이 그 검정매의 거만스럽고 짓궂게

노는 품을 흥미진진한 생각으로 귀엽게 여기며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감욱형은 아주 익숙한 솜씨로 휘파람을 불어서 그 매를 부르고 있다니.
 매를 불러서 같이 놀아보자는 걸까?

 노영탄은 괴상한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휘파람을 불어서 검정매를 불러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노영탄은 그 까닭을 감욱형에게 물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영탄이 입을  채 열기도 전에 그  검정매는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그들이 타고 있는 배 언저리를 한 바퀴 빙글 돌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감욱형은 또 다시 두번째 휘파람을 호되게 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감욱형의 두번째 휘파람 소리를 듣더니,

그 검정매는,
 '이미 휘파람 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들었노라! 하는 듯이.'

 두 날개를 재빨리 움츠러뜨리고,

마치 하늘에서 별이 흘러서  별똥이 떨어지기나 하듯

단숨에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서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이키! 이 매가? 정말 괴상한  놈인데?

사람의 휘파람 소리를 이렇게 잘 알아듣다니?'

 노영탄은 점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두눈이 휘둥그래져서

 어리둥절 혼자 중얼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  검정매가 뱃머리에 자리를 잡고  버티고 섰다.

그제야  노영탄은 그 매를 가까운 거리에서 똑바로 바라다보았다.

 그 놈은 땅위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키가  두자나 되어 보이고

불이 번쩍 일 듯이 금빛이 찬란한  두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품이

이만저만 위엄이 있어 보이고 사납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왼편 다리에 비단 헝겊을 감고 있는 것을 노영탄도 쉽사리 발견해 낼 수 있었다.
 '흐음? 괴상한 짐승인데!'

 노영탄은 하도 위엄 있어  뵈는 검정매의 모습에 질리기라도 했다는 듯, 

그 노는  꼴이 이상한 데 놀라면서, 

이렇게 혼자서 속으로 생각할  뿐,

아무 말도 더 하지를 못했다.

 점점 까닭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욱형은 선뜻 그 검정매에게로  달려가더니 다리에 감겨져 있는

붉은 비단 헝겊을 푸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검정매는 꼼짝도 하지 않고 태연히 서 있을 뿐.
 사람을 두려워 하는 기색이라곤 털끝 만큼도 없었다.

 마음대로 그 붉은 헝겁을  풀어보라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의젓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 붉은 헝겊은 뭐라는 거요? 감소저, 

그것을 풀어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요?"

 노영탄은 영문도 모르고 조급한 생각을 금치 못하며,

이렇게  감욱형의 등덜미에대 대고 물어봤다.

그러나 감욱형 역시 시치미를 뚝 떼고 묵묵무답.

 방그레 혼자서 웃기만 하면서,

그 붉은 비단 헝겁을 완전히 풀어 젖혔다.
 그 붉은 헝겁 속에는 역시 새빨간 종이쪽지 한장이 싸여져 있었다.

 감욱형은 그 종이쪽지를 펼쳐 들고 말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되는 이상야릇한  표정이 금시에

감욱형의 얼굴을 번쩍번쩍 스쳐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노영탄도 감욱형의 어깨 너머로  그 붉은 종이쪽지를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줄의 글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 우리의 중진(重鎭)들과 간부급 인물들은 이미천암사(天巖寺)에 모였다.
           문하(門下)의 제자들은시급히 그곳으로 총집합하라. ]

 

 그 종이 쪽지 맨 끝에는 둥그런 달이 하나 그려져  있으며,

 그것이 사방으로  기이한 광채를 발사하고 있었다.

 감욱형은 그  붉은 종이쪽지를  단숨에 훑어보고도  여전히

의미심장하다는 듯, 까닭 모를 미소를 지을 뿐.

 "그 종이쪽지는 또 뭐라는 거요? 어째서 이 검정매 다리에서 그런 것이?"
 노영탄은 궁금함을 견딜 수 없어서 이렇게 조급히 물었다. 

그제서야 감욱형은 살짝 얼굴을 노영탄에게로 반쯤 돌이키고

회색이 만면해서 입을 열었다.

 "까닭을 모르시오니 궁금하실  거예요.

이 검정매는 우리  아저씨… 낭월(朗月) 사백(師伯)님의 연락병(連絡兵)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둥그런  달이 그려져 있는 거죠. 

이 검정매란 놈은 이름을 묵우(墨羽)라 하구요. 

언제나 이곳 저곳 날아다니며 소식을 전달해주는 게 제  책임이오니……

방금 제가 놈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우리들 문중(門中)에서 부르는
휘파람을 불었더니 그래서 제놈도  똑똑히 알아차리구요……호호호……
참말로 기특하고 신통한 놈이죠.

아마 다른 곳으로도 또 소식을 전달해 줄 임무를 띠고 

이곳을 지나쳐 가던 참이었나 봐요!"

 말을 마치자,

감욱형은 비단  헝겊 속에다 붉은 종이쪽지를 뚤뚤 말아서 
다시 검정매의 다리에 감아주었다.

 "흐음? 그래서? 그건 정말  영물인데……,

사람보다 중대한 구실을 하는 기특한 놈이로군!

저런 신통한  놈이 기러기떼들을 데리구서 짓궂은 장난을 하다니…… 핫! 핫! 핫!"

 노영탄은 검정매의 놀라운 재간에 감탄하면서 이렇게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붉은 종이쪽지를 보고 난 감욱형은 몹시 조급해지는 모양이었다.

 몸을 돌이켜서 노영탄의 한편 팔을 잡으면서,
 "이 종이쪽지에 쓰여진 것을  보면, 우리 파의 영도자, 중진, 간부급 인물들
 모두 이미 회양지구(淮揚地區)에 집결한 것 같군요.

저의  소식을 벌써 모두들 알구 있는  모양이죠.

제가 낙이산 사숙님과 도중에서 놈들에게  위태로운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모양이에요.

그래서  차제에 회양방 놈들과 정식으로 승패를 결해  볼 작정인 것 같군요!

제 생각으론 우리들도 빨리 이 집합처로 가야만  될 것 같아요.

여러 선배님들,

아저씨들께서  몹시 걱정들을 하실 것이구요……,

또 저로서도 한시 바삐 낙이산  아저씨와 악중악 오라버니의 행방을 알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옵구요……."

 감욱형은 말을 마치자,

그 파아란 호수 속의 새카만 별같이  반짝이는 두 눈동자를 똑바로 뜨고

노영탄을 말끄러니 쳐다보았다.

 자기의 말에 대한 노영탄의 결정적인 의견을 빨리 알고 싶다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노영탄은 웬일인지 한동안 입을 묵중하게 다문 채로 말이 없었다.
 "네에?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빨리 그곳으로 가야 되지 않겠나요?"

 감욱형은 초조해서 재촉하는 말투였다.
 한참만에야 노영탄은 빙그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감소저!

당신께선 소생이 당신네들 숭양파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으셨구려?
 소생이 어찌 함부로 당신네들의 진용에 가담할 수가 있겠소?"

 정말 뜻밖의 말이었다.
 "네? 그러시다면……?"

 감욱형은 너무나 뜻밖의  말에,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며 이렇게  당황하게 한마디를 했다.

노영탄은 도다시 입을 꾹 다문 채로 묵묵히 강물 위  먼 아침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이었다.

 "단지, 우리 숭양파의 제자가 아니시라는 한가지 이유때문에요?"
 감욱형은 초조해지는 심정을  참을 길 없어 또  한번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감소저와 소시적부터 오라버니처럼 같이 자라났다는

그 사람을 나는 다시 대하고 싶지 않소!"

 여태까지와는 딴판으로 노영탄의 말은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 악중악(岳中嶽) 말씀이시군요!"
 "맞았소!"

 그제서야 감욱형도 오년 전의  과거지사가 새삼스럽게 눈 앞에 훤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낙양에 있을 때,

숭양표국 뒤뜰에서 노영탄이  악중악에게 창피와 망신을 당하던 장면…….

 옛날의 사무친 원한을 풀기 어려워,

두번 다시 악중악과는  대면하기 싫다는
노영탄의 심정은 당연한 일이 아니랄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감욱형의 입장에서는?

점점 더 당황해지고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시다면?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저와의 약속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원수를 갚아 주시겠다던 약속은요?

모든 게 허사였군요?

저의  힘이 되어 주실 수 없으시단 말씀이신가요?"

 감욱형은 앙칼진 음성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극도의  실망과 안타까움을 감출수 없었다.

 노영탄은 한참동안이나 감욱형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나서야

시원스럽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하핫!

그건 감소저께서 소생의 뜻을 오해하신 것이요.

소생은 감소저에게 구명(救命)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요.

또 감소저의 힘이 되어서 원수를  갚아드릴 것을 쾌히 응낙한  바요.

여기서 무슨 후회나 변심이 있을  리 없소.

그러나 소생이 파양호를  떠나 바깥 세상으로 나올때,

우리 은사(恩師)께서  재삼 각곡히 훈계하시는  말씀이 있었소.

그것은 어떤 파이니, 방이니  하는 것을 막론하고,

그들의 싸움이나, 원수니, 은혜니 하는

시끄러운 문제에 휩쓸려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소.

초연한 입장에 서서  무예계에 감돌고 있는 원한,
횡포…… 이런 것들을 없애버리는데 전력을 기울이라고 말씀하셨소. 

 또 회양방안에는 용서할  수 없는 만악지도(萬惡之徒)들이  섞이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전부가 없애버려야 될 죄인들도 아니며,

원수니 원한이니  하는 것을 풀어버릴 것이지 맺어만 둘  것이 아니니,

단지 그 원흉급의 몇 놈들만  없애버리면 무예계를  어지럽게 하는 분쟁과 살륙을 

 소멸시키고 도탄에 빠진 죄없는 생명들을 구출해 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소!"

 "그러시다면 회양방에도 동정할 여지가 있으시다는 말씀이신가요?"
 "동정하구 안하구가 문제가  아니요!

우리는 나쁜 놈들 가운데서  좋은 놈은 똑바루 알아야겠다는 거요?"

 두 사람의 표정은 똑같이 심각해졌다.
 "그렇지만 우리 숭양파는 무예계의 정통을 계승하고 나쁜 놈들을 없애자는."
 "그것도 소생은 잘 알고 있소!"

 노영탄의 표정은 더 한층  긴장해 지면서 서슴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가는 것이었다.

 "모든 사정을 소생도 잘 알고  있소.

저 금모사왕이란 자는,

이십년 전에 홍택호 호반에서 간신히  몸을 피해 잔명을 건졌으니,

응당 깊이깊이  뉘우침이 있어야 할 터인데도 여전히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뛰고 있으니

실로 한심스러운 놈이요.

놈은  끝끝내 보복의 일념을 버리지 못하고……,

더우기 나쁜 것은 놈이 본래부터 어디까지나 순전히 탐욕에서 날뛰고 있다는 사실이요. 
놈은 전심전력을 기울여  당신네 파의 비전(秘傳)의 보물이라는

저 숭양비급을 탈취하려는 것이요.

그러나  사실인즉, 우리 은사(恩師)의 말씀에  의하면

이 이 진귀한 책을 수중에 넣기 어려운 것은 물론,

설사 그것을  수중에 넣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놈은 

그 책속에 있는 무술의 오묘불가사의한 경지를 터득해 낼만한 위인이 못 된다고 하셨소.

또 당신네  파에 있어서도 조사(祖師)
이신 숭양장로 이후로는 이  무술의 오묘한 경지를 터득해 낸 사람이

아직도 없다고 말씀하셨소."

 "네? 노공자께선 어찌 그런 자세한 점까지를……."
 감욱형의 심각한 표정은 놀라움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한 청년이다!'
 '역시 믿음직한 사나이다!'

 감욱형의 놀라움은 분명히 어떤 희망과 광명을 잃지 않은 놀라움이었다.
 노영탄의 심각한  표정은 장엄하게  바라다보이기조차 했다.

진중한  말투로 어떤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듯 자신있게 다음 말을 이었다.

 "어번에 금모사왕이란 자는 무예계 변두리에서 우굴우굴  하던 수 많은

기인들을 총동원시켜서 원수를  갚아보고,

또 그런 기회를 타서 무예계를  제패해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소.

이것은 어림도 없는  어리석은 수작으로, 그 죄 용서할 수  없거니와,

당신네 파에서도 이거 때문에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은 면키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오!"

 감욱형의 놀라움은 점점 더 컸다.
 이 청년은 어떻게 여기까지  앞을 내다보고 있는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는  감욱형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다보고만 있던 노영탄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면서 다음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감소저! 소생의 뜻을 알아  들으셨소?

 소생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런 정신,

그런 신념에서만  약한 자를 돕고 악한 무리를 없애는데 힘이  되어 드리겠다는……,

이 점만은 알아 주시기를……."
 "네!"

 감욱형은 단지 한 마디 감격에 넘치는 대답을 짧게 했을 뿐이었다.
 노영탄은 잠시 무슨 생각에 젖는 듯 하더니 천천히 묻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감소저! 천암사로 시급히  가셔야겠다고 하시지만,

 그 절이 어느곳에 있는 지를 모르신다면 어떻게 찾아가실 작정이요?"

 "저는 일찍이 가본 일은 없지만……,

미산호(微山湖)라는 호수 속에 있는 그만 섬 속에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어요.

 어떻게 그곳을 찾아가야 하올지?
그것은 전혀 생각해 본 일이……."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한다?"
 노영탄은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한동안 두 눈을 꿈벅꿈벅 하면서

무엇인지 심사숙고 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였다는 듯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지명을 알기만 한다면,

그곳을 찾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소.

하지만 우리들은 지금 강물위에 떠 있는 몸이니……,

가도가도 물밖에  보이지 않고 인적이 끊어지다시피 된 여기서는……,

심히 곤란하게  됐소.

당초에 소생은 회양방 놈들이 뒤를 쫓아올 것을 꺼려서 호수를 찾아서 들어선 것이었는데,

우리가 이제 천암사로 찾아가기로  작정을 한 이상에는 빨리 육지로 올라가야 되지 않겠소!"

 "글쎄요! 어찌 했으면……?"

 둘이서 이런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을  때,

여태까지 잠자코 서  있는 검정매 묵우란 놈이 별안간, 

공중을 무찌를 듯이 몸을 날려 하늘 높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감욱형과 노영탄은 그 검정매가 그 이상 머물러 있기가 싫어서 어디론지

아가는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난데없에 푸드득! 푸드득! 하고 요란스럽게  날개를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 

하늘을 쳐다봤을 때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도 없는 백로(白露)한 마리가 

그 검정매에게 쫓겨가고 있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배는 이미 완전히 호수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하하하……, 저 놈이 또 짓궂게 장난을 쳐보려는 모양이지!"
 노영탄이 이렇게만 생각하고  혼잣말을 하고 있을때,

별안간 호반(湖畔)  한편에 있는 갈대 숲속으로부터 한척의 조그마한 나룻배가

도둑질이나 한 듯이 살며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 나룻배에는 단지 두  어린아이들이 타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 불과  아홉 살이나 열살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들. 

하나는 사나이였고, 또 하나는 계집아이였다.

 두 어린아이들은 구슬을 곱게 다듬은 것 같이 매끈하고 깨끗한 몸차림이었다.
 이 추운 겨울  날씨에 두 아이가 다 같이  얇다란 홑옷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촙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이 또랑또랑 하고 

 생기가 넘쳐 흐르고 있는 아이들만 같았다.

 그 중에서 계집아이가  먼저 검정매의 푸드득거리는 날개소리를 듣더니, 

 깜짝 놀라며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백로 한마리가 검정매 묵우에게 쫓기워서 붙잡힐 듯 붙잡힐 듯 하는

아슬아슬한 판이었다. 

이 광경을 바라다보고  있던 그 어린계집아이는 초조한  듯,
분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두 발을 동동 구르더니

그 나룻배 위에서 수십척
이나 되는 높은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큰 목소리로 안타까운 듯이 악을 썼다.

 "설령(雪翎)아! 설령아! 빨리 이리 오너라!"
 동시에, 두  팔을 높이 쳐들더니

손바람을  일으켜서 검정매 묵우에게  곧장 습격을 가했다.

 그런데도 검정매란 놈은 괴상한 놈이었다.

 힐끔! 어린  계집아이가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기세를 알자 마자,

그 손바람이 습격해  들어오기 전에 날쌔게 두 날개를 거두어 가지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돌려서 높이 높이 날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 어린 계집아이는 기묘한  재간을 가지고 있었다.

몸을 공중에 높이  솟구쳐 오른 것도  어린아이로서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허공에 둥둥  뜬 채로 단숨에 그 백로 한마리를 손으로 움켜 잡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훌쩍 몸을 가늘게 한번 뒤집더니,

경쾌하고 교묘하고  세련된 솜씨로 마치 나뭇잎이  한들한들 날아서 떨어질 듯 

그 조그만 나룻배 위에 다시 내려앉았다.

잡아 가지고  내려온 백로에게 일변 입을 맞추며,

일변  옆에 서 있는 어린 녀석에게 앙칼진 음성으로 떠들어댔다.

 "얘! 너, 그 고기잡는 쇠꼬챙이를 이리 꺼내라!

있다가 그 검정매란 놈이 또 덤벼들거든 그걸루 찍어버리란 말이다!

감히 우리 설령이를 쫓아다니며 못된 짓을 하나, 어디 두고 보자꾸나!"

 이 어린 계집아이의 몸을 허공으로 날리는 재간이란

이미 상당히 오묘한 경지에까지 이르른 것이었다. 

이 광경을 무심코 구경하고 있던 감욱형과  노영탄은

똑같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것, 맹랑한데!"
 "어린 계집아이가 어쩌면 저렇게요?"

 둘이서는 이렇게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백로가 바로 이  어린아이들이 키우고 있는

날짐승이라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감욱형은 우선 두 어린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고,

또  계집아이가 사내녀석을 보고 고기잡이  쇠꼬챙이로

검정매 묵우를 찔러버리라고 하는 소리를 듣자,

당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쉬익! 쉬익!"
 감욱형은 당장에 휘파람을  몇번인지 연거푸 불었다.

검정매를 얌전하게  내려오라는 신호였다.

대단치  않은 일에 어린아이들의 쇠꼬챙이에  찔렀다가는 큰 일이다.

 검정매 묵우도 감욱형의 명령을 순순히 듣고 휠휠 몸을 가볍게 날려서

처음과 같이 뱃머리 제 자리에 내려앉았다.

 그 계집아이와 사내녀석은  그제야

이 호수 위에  저희들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린것들의 두 눈이  별안간 휘둥그래졌다.

더군다나 그 검정매가  감욱형과 노영탄이 기르고 있는  날짐승이라고 판단한

계집아이는 예쁘게 생긴 말똥말똥한 두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고

새카만 눈썹을 찡긋해 보였다.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가리키면서 쌀쌀스런 음성으로 호령을 하는 것이었다.

 "여보세요!

당신네들은  뭣하는 사람들인데 감히 함부루  이 적화주(荻花洲)엘 들어오는 거에요?

그리구 또 저따위  돼 먹지 않은 매같은 날짐승에게 우리 설령이를 쫓아다니게 해서

성가시게  구는 거예요?

당장에 사실대로 낱낱이 말씀하지 못하실까요?"

 계집아이가 이렇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사내녀석은 두 손에  하나씩,

쌍노(쌍노)를 혼자서 힘 안들이고 빨리 젓는 것이었다.

 그 조그만 나룻배는  쏜살같이 감욱형과 노영탄이 타고  있는 배 한 옆으로 대들었다.

 '흐음? 고것들 점점 맹랑한 아이들인데! 제법 호통을 다 칠 줄 알구…….'
 둘이서는 꼭 같은 생각을 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하고,

가까이 다가드는 어린아이들의 나룻배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감욱형과 노영탄 둘이서는

그  어린 계집아이의 얼굴을 가까이서 똑바로 바라다봤다.

 어린 얼굴이지만,

이만 저만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쌜쭉해진 매서운 두 눈에 입을 뾰로통하게 빼물고

이 편을 쌀쌀스럽게 노려보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어른 못지 않게 점잖을 빼고 호통을 치는 말투란.
 "고것들! 정말 귀엽고 똑똑하게 생긴 아이들인데, 핫! 핫! 핫!"

 노영탄은 깜찍스러우면서도 귀염성이 똑똑 듣는 두  어린아이들을 발견하고,
자못 흥미 있는 웃음을 상쾌하게 웃어 주었다.

 어린아이들의 노는 품이 밉다거나,  화가 나질 않고

그 천진난마한 품이 도리어 사랑스럽기 이를데 없었기 때문이다.

 "애! 꼬마 아가씨야! 이 검정매는 우리들이 기르고 있는 매이긴 하지만……,

우리가 매보고 너희들의 백로를 쫓아다니며 짓궂게 장난질을 치라구 시킨 것은 아니다!

또 애당초부터  우리는 그 백로가 너희들이 기르는 것인 줄두 알지 못했었구……알겠니?"

 "그럼, 그건 그렇다 치구라도, 뭣땜에 우리 적화주엘 맘대루 들어오는 거예요?"
 어린 계집아이는  그래도 지지 않겠다는 듯, 

 무슨 힐문이나 하듯  말끔하게 연유를 따지자는 것이었다.

 "얘! 그건 무슨 까닭인지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다.

우리가 이 호수에 들어오는 데는 무슨  규칙이라두 있다는 거냐?

어째서 안된다는  건지 우리는 잘 모르겠다!'

 이번에는 어린 사내녀석이 남의 말을 가로채고 선뜻 나섰다.
 "아니, 그래 우리  적화주에선 아무나 함부루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그런 규칙도 모르나요?

또 저 회양방 허구 무슨 끄나풀 부스러기라두 되는 사람들이라면,

그건 더 시끄러운 노릇이죠!"

 동생 녀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나더니,

이런 계집아니는 매섭게  눈을 한번 흘겨 주면서

두  사람의 아래 위를 자세히 훑어보고 나서 다시 야무지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네들이 회양방 사람들이라 해두, 우리 손톱만치도 무서울게 없단 말예요."
 '흐음! 보통 아이들이 아닌데!'

 감욱형은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두 어린아이들을 더 한층 주의해서

라다보고 있었으며 노영탄은 또 한번 상쾌하게 웃어 주었다.

 "핫! 핫! 핫! 정말  기특한 소린데! 회양방두 무섭지 않다구?

암  그래야지, 하하하…….

너희들은 참  용감하구 똑똑한 아이들이구나! 핫! 핫! 핫!  그것들 참!"

 감욱형과 노영탄은 두 어린아이들을 자세히 관찰할수록, 

그들의 천진스러운 표정이며,

당돌하게 말하는 품이 재미스러웠고,

사랑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두 어린아이들은 나이도  몇 살 되지 않았지만,

천진난만한  동심(동심)그대로의 귀여운 아이들이었고,

더군다나 꼬마 사내녀석이 감욱형의  마음에는 유난히 사랑스러웠다.

 또 한다리는  움츠러뜨리고 외다리로 뱃머리에 서 있는 백로를 바라다보자
니, 그것도 금빛 눈에 새빨간 주둥이,

온  몸뚱어리가 백설같은 흰 털을 곱게 타고난 모습으로 계집아이를 따르고

길든 품이 귀엽기 이를 데 없었다.

 감욱형은 어린아이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음에 기쁨을 금치 못하고, 

쩍 몸을 날려 아이들이 타고 있는 나룻배 위로 건너가서 친해 보려고 했다.

그랬더니,

두 어린아이들은 감욱형이 그들을 향해서 몸을 날리는 것을 보자,

그것은 저희들이 배를 갑자기 습격하려 덤비는 행동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감욱형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렸을 때, 

그 어린 계집아이도  별안간에
몸을 펄쩍 뛰어서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두 손을 재빨리  놀려서 바람을 일으켜 가지고 허공에 떠 있는

욱형에게 쳐들어갔다.

 그 뿐이랴.

 나룻배에 혼자  남아 있는 사내녀석은 이것을 보더니

경각을  지체치 않고 두 손에 잡고  있던 노를 단숨에 왈칵 밀어서

그 조그만 나룻배를 이삼십척이나 먼 곳으로 힘안들이고 피해 버리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이  광경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두  어린아이들은 몸을 쓰는  품이 기막히게 민첩할뿐만 아니라

호수  위에 배를 띄워놓고 놀고 있는 모양이 물에 대해서

대단히 정통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감욱형이 비록 남 못지 않은 재간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판이요,

또 물에 대해서 얼마만한  지식이나 자신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만일에 공중에 솟구쳐 올랐다가 헤엄도 칠 줄  모르며
물 속으로 그대로 떨어졌다가는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추운 겨울 날씨에 물에 빠져 버리게 된다면

감욱형은 도저히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이다.

 노영탄은 당황해졌다. 망설일때가 아니었다.

급히  두 팔을 요란스럽게 휘젓고, 발에 힘을 모아서 땅바닥을 차버리듯,

타고  있던 배를 꼬마녀석의 배 옆으로 바싹 밀어놓았다. 

그리고는 몸을 바람처럼 가볍게 날려서 허공으로  솟구쳐 올려가지고

감욱형의 신변으로 쫓아 대서서 가까이 부딪쳐 보려고 했다.

 과연.
 감욱형은 이 어린 계집아이가 갑작스레 손바람까지 써가며

자기를 가로막고 덤빌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몸이 허공에 떠 있는 채로, 빨리 피해버릴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감욱형도 한 손으로 바람을 대수롭지  않은 힘으로

그 어린 계집아이의 손바람을 놓치지 않고 막아냈다.

 웬만큼 힘을 쓰면 어린  계집아이의 손바람쯤이야

쉽사리 막아낼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감욱형의 몸이 다소  흔들흔들 해지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허공에 더 오래 떠 있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대로 물 위에 거꾸로 박혀야만 될 판이었다.

 '아차! 실수를 했구나!'
 퍼뜩! 전신의 기운을  뽑아내어서 서 높이 솟구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갑자기 날쌔고 억셈 바람에게 압도를 당해버리고 말았다.

 이때, 벌써  어린아이들의 나룻배는 자리를  떠버렸고,

노영탄이 타고 있던 배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버린 것이다.

발을 디디고 내려설  곳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이미 그것은 불가능했다.

 감욱형은 공교롭게도 헤엄을 칠 줄 몰랐다.
 눈을 똑바로 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단지 새파란 호수의 물결만이  아찔! 하게 보일 뿐.

헤엄을 못 치는  감욱형에게는 심히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지극히 당황해졌다.

바로 이때였다.

 감욱형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기묘하고 억센 당기는 힘이 난데없이
 자기의 몸뚱어리는 위로 끌어올리려는 것을 깨달았다.

 물위를 향해서 떨어져 내려가는 속도가 차츰차츰 느려졌다.
 감욱형은 머리를 돌려서  힐끔! 위를 쳐다봤다.

그제서야 노영탄이 자기  신변 가까이 떠올라서 아무도  모르게

물 위로 떨어져 내려가는 자기를 구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감격하여 마지  않으면서도, 또한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큰일 날 뻔 했구나!'
 감욱형은 다시 머리를 수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노영탄과 둘이서 타고 온  배도 그때는 벌써 바로 눈 아래 떠 있었다. 

감욱형은 급히 아래로 내려앉아서 배 위로 발을 디디고 섰다.

 이때 노영탄도 제자리를 도로  찾아서 배위로 내려섰으며

그 어린 계집아이도 제대로 찾아서 처음 자리에 내려섰다.

 계집아이가 배 위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자,

꼬마 녀석은 재빨리 손을  써서 처음 나오던 갈대 숲을 향하고

 배를 쏜살같이 몰아 가면서 일변 목청을 높여 악을 쓰는 것이다.

 "어디, 우리를 쫓아올 수 있으면 쫓아와 봐요!"
 "무슨 어린아이들이 저렇게 깜찍스러울까!"

 감욱형은 하도  어처구니 없다는 듯,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우두커니  서서 달아나는 어린 아이들의

나룻배를 바라도보고 있을 뿐이었다.

 노영탄이 보기에는 감욱형이 다소  불쾌하고 괘씸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흐음! 어린것들이 지나치게 까부는 걸! 어른들을 놀려 놓고 달아나 버리다니…….'
 노영탄도 하는 수없이 이렇게 혼자  중얼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비록 어린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난데없이 갈대숲 저편에서 슬쩍 나타났다가 달아나 버리는 꼴이 수상쩍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뭣을 하는 아이들일까? 이대루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노영탄은 드디어 이렇게 결심을 하고 급히 뱃버리를 돌리고 노를 저어서

장 갈대숲을 향하여 어린아이들의 뒤를 쫓아 대섰다.

 갈대숲을 향하고 달려 들어갔을  때는 이미 두 어린아이들의 나룻배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물소리만이 쏴! 쏴! 갈대숲을 헤치고 흔들고 하는 모양이었다.
 노영탄은 전속력을 냈다.

 곁눈질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다보며 뚫고 들어갔다.

 한참만에야 갈대숲을  꿰뚫고 그 밖으로 나섰다. 

갑자기 앞이 탁  틔어지고 눈부신 광선이 훤하게 비치어 왔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갑자기 내동댕이 쳐진 셈이었다.
 감욱형과 노영탄은 꼭 같이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여기는?"
 "여기가?"

 둘이서는 동시에 입을  벌린 채 한동안 얼빠진  사람같이 사방을 휘둘러 볼 뿐이었다.

 갈대숲을 꽤 오랫동안 꿰뚫고 나올때까지 빽빽하게 얼히고 설킨 풀 속이 어둡고 캄캄했다.

그런데 이렇게도 밝고 시원스럽고 훤한 곳이 있었다니!

 노영탄과 감욱형의 두 눈이 휘둥그래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별안간 환히 드이어 진 눈 앞에는, 거울같이 반드럽고 파란  호수,

수면 위에 한군데 큰직한 섬이 그림같이 떠 있지 않은가.

 그 섬의 사면이 빽빽한 갈대숲으로 둘러싸여져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 두 어린아이들이  나타나지 않았고,

또 그 아이들을 쫓아서  갈대숲을 꿰뚫고 나오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 섬을 발견해내지도 못했을  것이요,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쳐 갔을 것이었다.
 물 위에 그림처럼 둥둥  떠 있는 섬에 있는 버드나무와 매화나무가 가득 차도록
 심어져 있었다.

 추운 겨울 날씨인데도 매화는  만개했으며,

그 그윽한 향기가 코 뿐만  아니라 사람의 가슴속까지 깊이 스며들 지경이었다.

 감욱형과 노영탄은 진동하는 매화꽃  향기에 싸여서 이 세상의 별천지를

요하듯 천천히 배를 저어 섬을 향하고 다가들어 가고 있었다.

 두 어린아이들이 어디로 갔나 하고 두루두루 살펴보자니,

그들은  벌써 어느 틈엔지 나룻배를 섬  기슭에 있는 자그마한 나루터에다 멈추어 놓고, 

 계집아이와 꼬마녀석은 섬 기슭 물가에 나란히 서서 사람을 놀리듯 웃어가며

두 사람을 건너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하아! 고것들 참, 맹랑하고 감찍하고……, 정말 귀여운 아이들인데…….'
 감욱형은 얼마전까지도 적이 불쾌한 기분이었으나,

이제 또 다시  두 어린아이들이 아양을 부리며 노는 꼴을 보니

더 한층 귀여웁고 사랑스럽게 이를 데 없었다.

더군단, 생각지도 않은 곳에 전개된  매화꽃과 매화의 향기가 빚어내

아름다운 경치에는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요,

지금까지의  불쾌하던 심정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흠! 묘한  곳인데! 이런 재미나는  풍경속에서 살고 있는 어린  것들이어서
그렇게 똑똑하고 깜찍하다는 건가!"

 노영탄은 이렇게  혼자 중얼대고 감탄하면서  사방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멀리,  앞을 한참 동안이나  유심히 바라다보고 있던 노영탄은  그제서야
매화나무 숲 속 깊숙이 들어간곳에서 은은히 내다보이는 집 한채를 발견했다.

 그 집도 역시 붉은 담장에 푸른 기와를 올린 그림같이  아담한 집이었다.

런데 이 순간에 갑작스레  노영탄의 가슴을 쿡 찌르는 한가지 놀라운 생각이 있었다.

 '흐응! 그렇다면 여기가?'
 '바로 저 집이?'

 노영탄은 혼자서만 이렇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더욱 자세히

그 그림같은 집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혼자만이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어떤  인물을
갑자기 생각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별천지같이  아름다운 곳이죠?

그런데 뭘  그다지 유심히 바라다보며 계시나요?"

 감욱형이 이상한 눈치를 챘던지 이렇게 물었다.
 "아니, 아무것두……우리 좀 더 들어가 보기나 합시다."

 노영탄은 자기 심중에 생각하고  있는 그 인물이 정말 살고 있는 곳이 틀림 없다면,
 자연  사실이 밝혀지리라 생각하고, 

이렇게 시치미를 뚝 떼고  배를 곧장 섬으로 향해서 들이댔다.

 배는 순식간에 섬 기슭에 닿았다.

배가 기슭에  닿을락 말락 하고 있을  때
그 두 어린아이들은 또 다시 숲속으로 뛰어나왔다.

 어린아이들은 저희들 둘이서만 뛰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머리가 백설같이 햐이얀 노파 한분을 모시고 나온 것이다.
 노영탄은 그 노파를 한번 바라다보자 놀라움과 반가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역시 여기였구나!'
 이렇게 노파가 그 인물에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노영탄은 왈칵 감욱형의 한편 팔을 부여잡았다.

 "여보시오! 감소저! 우리 빨리 저리 갑시다."
 감욱형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디루요?"
 "저 할머니 앞으루……."
 "그 노인이 누구신데요? 왜요?"
 "자세한 것은 나중에 알기루 하시구……우선 나와 같이……자 어서……."

 노영탄은 감욱형을 끌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멀찌가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껴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정중하게 절하고,

분명한  음성으로 공손히 말하는 것이었다.

 "제자 노영탄과 감욱형이옵니다.

길을 잃고 호수로 흘러들게 되었사와,

대선배님께서 금지구역이라 하시는  곳엘 잘못 알고 들어왔사오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옵시기를!"

 그 노파도 물론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노영탄과 감욱형의 아래위를 한동안 유심히 훑어보았다.

 "너희들은 어디서 나타난 젊은 아이들이기에?"
 위엄 있고 얌전하게 한  마디를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노영탄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두 어린것들이 앞을 다투어

손짓 발짓 몸짓까지 해서 여태까지의 경과를 고해 바치는 것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우리 설령이가 이들의  검정매한테 혼이 날 뻔 한 것을 간신히……."

 "또 덤벼들면 쇠꼬챙이루 그냥 찔러 버리려 했지……."
 두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노파는 가느다란 웃음을 빙그레 입가에 띠었다.

 "하아! 그런 일이 있었다구……알았다. 너희들은 잠자코 있거라!"
 노파는 두 어린아이들을 이렇게 가로 막아 버리고 노영탄을 보고 말을 꺼냈다.

 "너는 아마 나를 아는 모양이지. 등에 금서보검을 메고 있는 것을 보니,

의 옛날 친구인  남해어부 상관학이와 다소 연고가 있는 아이같은데……, 

리고 그 검정매는 내가  보기에는 숭양파의 낭월화상이 기르고 있는 매 같은데……,

그러면 너의 숭양파와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거냐?"

 노영탄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은 것이 거듭 반가왔고 다행했다.
 아무 거리낌도 없이 선뜻 대답했다.

 "남해어부께선 바로 소생의 은사이시옵니다. 

 전에 스승께서 늘 홍택호에 은거해 계시는 옛날  친구 한 분이 있으시다는

말씀을 하셨사옵니다. 

 세상에서 오매천녀라 일컫는 분이  바로 저희들의 대선배님이 되시는

할머님이라 생각 하옵고 이렇게……,

이 검정매는 분명히 숭양파의 낭월대사께서  기르시는 것이옵고……,

또 이  소녀 감욱형은 바로 숭양파의 제자올시다.

방금  호수 위에서 이 검정매란 놈이 날아가는 것을 발견하고 불러내린 길이옵니다."

 오매천녀라는 그 노파는 노영탄의 말을 자세히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이번에는 두 눈을 크게 떠서 감욱형을 한참 동안이나 유심히 쳐다보더니

렇게 물었다.

 "감욱형이라구……,

흐음 감씨댁  아가씨란 말이지.

그런데 어째서 얼굴빛이 그렇게 초췌하냐?

어디 몸이라두 불편한 게 아니냐?"

 감욱형은 앞으로 선뜻 나서서 공손히 머리를 수그리고 섰다.
 "네, 도중에 여러번 회양방 도배들에게 심한 봉변을 당한 몸이오라……."

 감욱형은 여태까지 당해온 경과를 대강 설명해서 들려주었다.
 감욱형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오매천녀는 탄식하며 말하는 것이다.

 "내 이 호수 속에 틀어 박혀서 살아온지 이미 이십여년,

그때 숭양파와 회양방이 큰 싸움을  치르고 난 다음부터는

적이  평온무사한 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몇  해 동안에 회양방은 다시금 옜날의 원한에 부채질을  하듯
맹렬히 보복해 보려고 날뛰고 있다.

나는 마치 그들에게는 목구멍의 가시 같은 사람이다.

지금  당장에야 감히 이곳에까지 침범해서 나를 괴롭게 굴지는 못하지만

조만간 달려 들고야 말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평소에 엄격한 규칙을 세우고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외부 사람을 여기 들여놓지 않기로 한 것이다.

뜻밖에  오늘 내 손주 아이들  둘이서 갈대숲 밖으로 나가서  놀다가
너희들같은 진객을 모셔들인 셈이 되었구나.

어서들 집안으로  들어가서 쉬기로 하자!"

 두 어린아이들은 이  광경을 보고야 눈이 휘둥그래졌다.

꼬마들은  본래부터 이 진객 두 사람이 싫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이제 할머니의 말을 듣고 보니,
저희들과 한편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어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것이었다.

 두 어린아이들은 왈칵 덤벼들어서  하나는 노영탄의 손을 잡아 끌고,

또 하나는 감욱형의 팔에 매달리며 야단법석이다.

 "아저씨!"
 "아주머니!"
 정이 뚝뚝 듣는 음성으로 두 사람을 따르는 품이 여간만 귀엽지 않았다.

 "너무들 까불지 마!

이것들이 도무지  사람구경을 못하구 저희들끼리만 쓸쓸히 지내던 참인지라……."

 오매천녀도 이 불의의 내객이  자못반갑다는 듯

이렇게 말하며 입가에서 부드러운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오매천녀는 현재 혼자 몸으로 두 손자를 거느리고 이곳에 살고 있다.
 이십여년 전에 홍택호 호반에서 일대 격투가 벌어졌었을 때, 

오매천녀는 정통파인 숭양파의 영수(領袖)급 인물중의 한 사람이다.

 노파의 남편이었던 천룡검(天龍劍)이란 사람도,

그 당시 같이 이  결투에 가담해 있었다.

그 결투의 결과가, 대단한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쌍방이 다 같
 많은 부상자를 내게 되는 판에 천룡검도 싸움터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오매천녀는 이 위태로운 정세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남해어부에게

빨리 달려와서 구원해 주도록 연락을 했었다.

그래서 간신히 자기의 목숨만은 건졌다.

그 후로는 손자를 데리고 이 홍택호 호반에서 세월을 보내며,

바깥  세상의 은혜니, 인정이니, 원수니, 보복이니 하는 것들을

등지고 숨어버린 것이었다.

 오매천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통비원(通臂猿)이라고 불렀다.

 이 외아들은 몇해 전에 며느리와 더불어 때를 같이하여

이름도 모를 괴상한 병(奇疾)에 걸렸다. 

오랫동안 병석에서 신음하던  통비원 부처는

또한  때를 같이하여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슬하에 어린  손자 둘을 남겨 놓은 채.
과부 할머니와,  부모를 잃은 두 아린  것들.

그들 세 식구는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두 어린 것들은,

하나를 대문(戴雯)이라고 했고,

또 하나는 대림(戴霖)이라 했다.
 허구한 날,

오눌이 둘이서만 장난질을 치고 나날을 보낼 뿐이다.

 호수 위에서 떠  있는 이 자그마한 섬(浮洲)  속에서는 애당초에

바깥 세상 사람들과 접촉해 볼 기회라곤 생각할 수도 없었다.

 늙은 과부 할머니 외에는, 

통 사람 구경이라곤 해볼 수 없는  두 어린것들.
그렇게 심심하고, 쓸쓸하고  외롭게 자라나고 있는 가엾은  오누이였다.

이런 판에, 난데없이  노영탄과 김욱영이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같이  두 어린아이들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하나는 예쁘고  상냥스럽게 생긴 젊은 아줌마. 

또 하나는 점잖고  인자하게 생긴 젊은 아저씨.

 두 어린아이들이 펄펄 뛰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감욱형과 노영탄을 환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얼마가지  않아서, 오매천녀가 거느린 일행은
그림같이 바라다뵈던 그 집 문전에 다달았다.

 감욱형과 노영탄 둘이서는,

정말 신선이 살고 있는 별천지  속의 풍경이라도 바라다보는 사람들같이,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오매천녀가 살고 있는  집을
신비스러운 놀라움 속에서 넋을 잃고 언제까지나 바라다보고 있었다.

 조촐하고, 아담하고, 조용하기 이를데 없는 집이었다.

집 언저리에는 이름도 모를 가지가지 기화이초(奇花異草)가 찬란한 색채를  자랑하며

심겨져 있었다.

 그것들은 계절의 변화도 없이 춘하추동 사시를 두고 언제나 이 그림같이

담한 집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쳐들고 먼  곳을 바라다보자면 끝 닿는데를 알 수 없게 널브러진
매화나무숲이 사면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의 아름다운 꽃이 모조리 한군데 모여서 무변대한 바다를 이루고 있는,

그 맨 가운데서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이,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파아란 호수와 찬란한 꽃숲만이 바라다뵈는

별천지의 풍경이었다.

 오매천녀는 집안으로 들어서서 노영탄과 감욱형 두 사람을 한편으로

자리잡아 앉혀 놓더니,

제일 급한 일을 잊어버렸었다는  듯,

한개 비단 무늬가 눈부시도록 예쁜 상자를 열고  선뜻 세알의 환약을 꺼냈다.

서슴지 않고 그  세알의 환약을 감욱형에게 주면서 하는 말이,

 "이것은 내가 다년간 심혈을 기울여, 

백년 이상 묵은 매실(梅實)을 따서 만든 냉향단(冷香丹)이라는 것이다. 

정신을 맑게 하고 혈맥을 활기있게 해  주는데 효력이 있다.

욱형이, 너  보아하니 몹시 원기가 빠진 모양이구나.

특별히 이 환약 세 알을 네게 주는 것이니 이걸 먹고 하루 바삐 몸을 추술여라!"

 "황송하옵니다!"
 오매천녀의 정성스런 대접.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감욱형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감사합니다!"
 단지 두 마디.

 당장에 땅에 꿇어 앉아서 환약 세 알을 받아 입안에  넣었다.

환약이 목구멍을 넘어갔는가 했을 때, 

 벌써 입속에서 온통 넘쳐나는 것 같은 맑고  깨끗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가벼우면서도 새뜻하고 싸늘한 기운이 전신이 끼치더니

곧장 머리위로 뻗쳐 올라가는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한번  따끔하고 무엇에 찔린 듯이 떨렸다.

 그렇게 효력이 놀라운 환약이었다.

그렇게 얻기 어려운 기연(奇緣)이었다.
 감욱형은 당장에 원기가 완전히  회복되어 가는 것 같이

새뜻하고 맑아지는 눈동자로 형언키 어려운 감격에 싸여서

오매천녀의 인자한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오매천녀는 자못  대견하고 만족하다는 표정이었다.

새삼스럽게  노영탄, 감욱형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다보며

침착하고 자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본래…… 오랜 옛날부터 강남  땅을 어지럽게 하고 있는

은혜니, 원수니하는 모든  시끄러운 관계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두번다시 바깥  세상에 나가서 이런 시끄러운 분쟁속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 철부지 어린 손자새끼 둘이서는……,

나이는 비록  몇 살 안되지만 생각하는 것이  앙큼스럽고 엉뚱해서……

언제나 호수 바깥 세상에 나가서 한번 놀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구 있거든…….

외롭고 쓸쓸하게 자라나  있는 어린 것들이 너희들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참말로 하늘이 주신 기이한 인연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너희들 의견으로 어떨지?
너희들이 이번에 회양지방으로  나가서 볼 일을 다보고 나거든,

다시  나한테 들러서 얘들 둘을 데리고 한번  강남 땅에 나가

구경 좀 시켜주는 것이 어떻겠니?

너희들 생각에  과히 싫은 일만 아니라면

어린것들을  위해서 좋은 일 좀 해줄 수 없겠니?"

 가라앉은 음성으로  찬찬히 하는 노파의  말이었으나 사실은

그것이 얼마나 간곡한 부탁인지를 알 수 있었다.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얼마나  그리워 하며 섬속의 외로운 나날을

보내는 어린것들이기에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

감욱형과  노영탄은 처량하고 불쌍한 마음조차 금할 길이 없었다.

 지극히 쉬운 부탁이었다.

거절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누가 먼저 입을 연지도 모르게 둘이서는 동시에 선뜻 대답했다.

 "연로하신 선배님의 명령을 저희들이 어찌 거역하겠사옵니까?

또 어린 오누이가 다 같이 무술의 재간이 비범한 바 있사옵고……."

 "……두 아이들이 다  같이 지극히 총명하옵고……

어디를 데리구  가나 걱정 할 일이 없을  것같사오니……

저희들이 회양지방에 가서 볼일을 끝내면 기필코 이곳으로 되돌아와……."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나더니,

오매천녀는 심히 기쁜 표정이었다.

곧, 몸을 일으켜 내실로 들어가더니 한자루의 보검을 들고 나왔다.

 오매천녀는 감욱형 앞에 보검 한자루를 내밀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이 보검의 이름은 녹악(綠 )이라 한다.

왕년에 내가 강남땅을 휩쓸고 돌아 다녔을 적에 몸에 지녔던 유일한 무기였다.

이제는 이것을  내가 간직해 두었댔자 쓸데없는 물건이되고 말았으며……,

또 보아한즉,  욱형이 너는 몸에 지닌 무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서……

이것을 오늘 너에게 물려줄터이니 아무쪼록 이 보검을  현명하고 용감하게 써서

네 아버님의 원수를 갚아보구……강남땅에 의협의 발자취를 펼쳐 보도록 해라!"
 감욱형도 선뜻 보검을 받아들었다.

 가슴 벅찬 감격과 기쁨. 무슨 말로 표현해야 마땅할지 알 길이 없었다.
 감욱형은 보검을 받아든 채 오매천녀 발 아래 꿇어 앉았다.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공손히 대답했다.
 "연로하신 선배님의 정성어린  호의……,

후배로서 기리기리 명심불망하겠사옵니다!"

 이 광경을 옆에 서서 구경하고 있던 대문, 대림 두 어린아이들.
 깡충깡충 뛰며, 손뼉을 치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야아, 신난다!"
 "야아, 근사하다!"

 그러나 보검을 받아든  감욱형의 모습이 신바람이 난다거나,

근사하대서  이렇게 떠드는 것은 아니었다.

 멀지 않은 앞날에  저희들 오누이가 같이 호수  밖의 세상으로 나가서

강남 땅을 구경하고 돌아다니게 될 수 있으리라는 어른들의 주고 받는 말을 듣고
기뻐서 날뛰는 것이다.

 "아저씨! 빨리 일을 보구 돌아와야 돼요!"
 "아줌마두 꼭 같이 와서, 우리들을 데리구 가야 돼요!"

 섬 속의 외로움에서 탈출하려는 두 어린아이들의 설레이고 두근거리는 가슴 속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환호성이 연거푸 폭발되었다.

 "야아, 인제 됐다!"
 "아저씨, 아줌마! 언제쯤 갔다올 거야? 야아 멋지다! 근사하다!'
 "까불지 말구 잠자코 있지 못해!"

 오매천녀는 손자 오누이를  엄격하게 꾸짖어 놓고,

다시 노영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둘 둘이서는 미산호, 호중에 있는 묘아서(묘아서) 섬 속의 천암사를 찾아간다구 그랬지?
 갈길이 비록 그다지 멀다고 할 것은 못되지만,

이 길은 완전히 회양방의 세력 범위속에 들어 있는 길이다.

또  너희들은 두번식이나 저 금사보안을 소란스럽게 뒤집어 놓았다 하니,

놈들은 반드시  사방으로 연락과 신호(信號)를 보내어 도처에서 너희들을 수색하고

잡으려 들고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점을 너희들은 경계하고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째서 그 검정매를  시켜서 숭양파의 중진급 인물들에게 편지를

띄을 생각을 하지 않느냐?

그래서 욱형이  이미 위태로운 지경에서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저편에서도 안심할 것이 아니겠느냐?"

 생각해 보니,

정말 좋은 방법을 둘이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납고 능글맞은 검정매 묵우는 그때까지도 그 집 문 밖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 집안으로 들어간 두  젊은이들을 보호라도 한다는 듯,

또 무엇인지  기다리기라도 한다는 듯, 

그 둥그렇고 날카로운 금빛 눈동자를 힐끔힐끔  굴려가며 제 자리를 떠나려 들지 않았다.

 오매천녀의 의견대로,

노영탄은 경각을 지체치 않고 간단한 편지  한장을 썼다.

긴 사연이  필요없었고 감욱형이 이미 회양방의 진지 금사보에서  구출되

빠져나왔다는 요점만 몇자 적었다.

 곧 편지를 묵우의 한편  자리에 감사서 매주었다.

그리고 감욱형이 친히  명령하여 곧장 천암사로 돌아가도록 일러주고,

두 손으로 안아서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노영탄과 감욱형은  이 집에서 쉽사리 떠날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  오누이 때문이었다.

 대문과 대림 두 아이들은  이 꿈같이 나타난 진객(珍客) 아저씨와 아줌마가
빨리 이곳을 떠나가서  볼일을 보고 돌아와야만,

저희들을 데리고 호수  바깥 세상을 구경시켜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우선 그리웠던  사람의 얼굴을 놓치기 싫은 어린 마음에서

감욱형과 노영탄은 좀체로 놓아주려 들지를 않았다.

 둘이서는 어린것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그대로 물리쳐 버리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이 적화주 섬 속에서 사흘을 보냈다.

 오랫동안 원기를 잃었던 감욱형도 이제야말로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안히 몸을 푹 쉴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대의 무예계에서 기인이라 일컫는  남해어부와 오매천녀가
각각 비제(秘製)해서 세상에  내놓아 본 일이 없다는 진기한 환약, 

설령환과 냉향단 두가지  약을 연거푸 복용한 감욱형은  불과 이삼일동안에

완전히 딴 사람같아 보였다.

 몸에 지니고 있던 본래의 정신이나 체력을 완전히 회복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전보다도 몇배 더 새뜻해진  정신.

전보다도 몇배 더 가볍게 날씬하고  탐스러워진 몸매.

 두가지 환약의 놀라운 효력은  이 봉만(봉만)하게 발육되어 가는

처녀를 더 한층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만들었다.

 유난히 빛나는 살결의 매끄러운 광채.
 두 볼에 떠오르는 볼그스레하고 야들야들한 사과같은 홍조.

 그것은 보는 사람을 쏠 것만 같이 눈부시도록 맑고 아름다운 매력을 더해만 갔다.

 사흘을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노영탄과 감욱형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두 어린아이들의 동무가 되어 주었다.

때로는, 거울같이  맑고 파아란 호수 수면에 일엽편주를 띄워놓고  뱃놀이에

어린아이들을 한없이 즐겁게도 해주고 또 때로는 바닥도 두고 독서로 한가한 시간도 보내고.

검무(검무)를  즐기다가 싫증이 나면 탄금(탄금)도 하고.

하이얀  눈 위에 밝은 달. 그리고 파아랗게,
잔잔하게 그들을  싸 주고 있는 호수. 

 그윽한 향기에 노상 젖어  있는 매화.
마치 인간  세상을 떠나 도원경(桃源境)에서 놀고  있는

신선 같은 도련님과 아가씨였다.

 두 사람사이에는 오년이란 긴 세월이 가로막혀 있었다.

이제  그 가로막혔던 긴 세월이 터져버린 것이다.

 두 젊은이의 심정에는  이미 오년이라는 성장(成長)이 생겼다.

어리디  어리던 그 옛날,

저 숭양표국 대문 앞에서 서로 처음 발견하던 소년, 소녀 시절의 풋살구 같이

제 맛을 모르는 일종의 언어로써만 표현하기 어려운 얄궂은 감정이

그런 과거를 몰아내고 그것들을 대신해서 꽉 차도록 점령해 버린 것이다.

 "노공자!"
 "감소저!"

 그들 둘이서는 상대방을 아직도 이렇게 존칭을 써서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왜 그런지 한없이 쑥스럽고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
 피차간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존칭을 넘어설 수 있는 감정.
 존칭이 필요 없는 사이.

 이런 것을 혼자서만 생각해 보면서 피차간에 남몰래 자신에게 물어보는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란 바로 썩터나려 하고 있는 사랑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사흘동안의  두 젊은이들은,

사랑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크고,

 너무나 가슴 벅찬 놀라움과 희열속에서만 파묻혀서 날을 보냈다는 것이 솔직하

거짓없는 고백이리라.

 그들이 꼭 같이 피차간에 구명의 은인이 되었다는 사실.
 그것은 너무나 기묘한 운명이었고,

너무나 신비스러운  하늘의 조화(造化)같이만 생각되었다.

이런  놀라움과 희열에 싸인 속에서도 두 젊은이들은  사흘 동안을 두고 한 곳에서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대하고 지내는 사이에 그들의 감정이 꼭 같이

어떤  심각한 경지를 향해서 달음질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감정이 꼭 같이 어떤 심각한 경지로 달음질  치고 있으면서도,

욱형의 경우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묘한 점이 있었다.

 감욱형의 머리속, 어느  한군데 깊숙한 골짜기에는

언제나 쉽사리  씻어버릴 수 없는  한줄기 그림자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악중악이었다. 

물론 친오라버니도 아니다.

단지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났다는 사실  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오랜 옛날부터 감욱형의 머리속에는 

악중악의 그림자가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는 것은 지워버릴 수없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악중악에게 대한  무슨 감정인지,

그것을 꼬집어서 설명하라면 감욱형은 그것을 대답할 수는 없었다.

사랑이니, 이성간의 그리움이니,

그런것과는 거리가 먼 막연한 감정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감욱형은  이 사흘동안에 아침 저녁으로 노영탄을 대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중악의 그림자가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악중악 오빠는 지금쯤 어디 가서 뭘하구 있을까?'
 안타까운 심정이었지만 이런  말을 노영탄에게 꺼내서,

그들만의 놀라운  운명과 희열 속에서 금이 가도록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악중악을 생각할 때면, 

노영탄을 한번 더  유심히 바라다보고,

그리고  나선 또 악중악과 비교를 해보면서 사흘동안을 보냈을 뿐이었다.

감욱형은 노영탄과 악중악을 비교해서 생각할 때마다 이런점을 발견하곤 했다.
첫째로 이상한 점은 노영탄의 얼굴 모습이나 사람된 품이 악중악을 꼭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 정신 쓰는 점이라든지 성격까지  흡사한 데가 많았다.

단지, 악중악은  언제나 까닭없이 덤비고 뽐내고  하는 일종의 오만한  티가 있었고,

노영탄에게는 그와는 반대로 겸손하고 남을 위해서 양보할 줄  아는 성격의 일면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감욱형은 악중악과 함께  있을 때엔 언제 어느 곳에서나 남을 누르려 드는

심술궂은 성격에 지배를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노영탄과 며칠 안되는 동안이지만 함께 지내다보니

그에게서는 점잖고 얌전하고 예모를 깍듯이 차리는

의젓한 청년의 좋은 성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찌됐든,

 감욱형이 악중악을 보지 못한지도 어언 오년이 되었다. 

막연한 심정이나마,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떠나질 않았고,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함은 또한 당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사흘이 지났다.
 노영탄과 감욱형은 오매천녀와  작별을 해야만 했다.

제일 섭섭하고  허전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대문, 대림 오누이였다.

 과부 할머니와 두 어린  손자들은 자그마한 배를 친히 저어서 두 사람을

수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세 식구를 태운 작은 매가 그들의 섬을 향해서 뱃머리를 돌리고

되돌아가려 했을 때 어린아이들은 두  손을 높이 쳐들어 요란스럽게 흔들며

안타깝게 부탁했다.

 "아저씨! 꼭……, 빨리 돌아와야 해요!"
 "아줌마두 속히 돌아와서 우리들을 데리구 가야 돼요!"

 기약 있는 작별인데도,

당장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는 섬 속의  외롭고 쓸슬하고 허전함을 못이겨,

두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했다.

 노영탄과 감욱형은, 오매천녀의 지시대로 우선 사양(泗陽)을 거쳐서 

숙천(宿遷)으로 나와서 다시 비현( 縣)을 지나 가지고 강물 줄기를 따라서

곧장 미산호(微山湖)로 향했다.

두 사람이 꼬박 이틀만 걸어가면 쉽사리 미산호에 다달을 수 있는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적화주를  떠나서 호수 밖으로 나온  그들은,

회양방 무리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을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관공(官公)의 대로를 마음놓고 걸어갈 수는 없었다.

 되도록 황량하고 궁벽하고 사람의 행적이 드문 좁은 길을 골라 가며 걸어가야 했다.

또 낮에는 걸어가고,

밤이 되면  적당한 곳에 몸을 숨겨가며 까닭없이 평지풍파를 일으켜서

세인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행동을 감가자는 까닭이었다.

잡초를 베려다가 그 속에 숨어 있는 뱀을 건드려서 놀라게 하는  것같
무모한 행동을  피하자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사실인즉, 

노영탄에게는 회양방의 향비  같은 것들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무리들을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까닭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두 사람의  걸음은 자연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날이 저문 뒤에야,

감욱형과 노영탄은 슈녕( 寧)이란 고장에 다달았다.
 만일 관공대로를  순조롭게 걸어서 강물줄기를 따라 왔다면,

벌써  숙천(숙천)지방을 지나서 이 슈녕이란  고장을 돌아 버렸을 터인데도,

숨은 길을  골라가며 좁은 길만 걸어왔기 때문에 이제서야

이 고장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바로 정월 초하루를 며칠 지나지 못한 때였다.
 점포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도 희소했다.

 노영탄과 감욱형은 여인숙 한 집을 찾아가서 쉬어 가기로 했다.
 방을 따로 따로 두 간을 잡았다.

겨울날 짧은 하루 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저물어 버렸다.

둘이서는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나서 곧 제 방으로 들어갔다.

 피곤한 몸을 푹 쉬고 나서 밤중에 다시 일어나 길을 걸아가자는 작정이었다.
자리에 누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노영탄은 갑작스레 어디선지  난데없이 들려오는 요란스런 말굽소리에

깜짝 놀라서 정신을 바싹 차렸다.

그 말굽소리는 곧장 이 여인숙 대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말굽소리가 멈춰지는가 하는 순간,

뒤를  이어서 여러 사람들이 떠들썩 하고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뚜벅. 쿵쾅, 쿵쾅.
 걸음걸이도 제법 점잖고 무거운  것 같았다.

여러 사람들이 벌써 여인숙  안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앉은 모양이었다.

과연 얼마 되지 않아서 여인숙의 심부름꾼 어린 녀석이 급히 뛰어나오며

선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숙을 찾아든 여러 손님을 위해서 술상을 차리는 모양이었다.
 '흐음? 이상한 일인데? 이렇게 추운 날씨에…….'
 '그것두 새해 명절 고비에 무엇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급히 낮 밤을 가리지 않고

길을 가는 것일까?'

 노영탄은 자기 방안에서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번 의심을 품고 생각을 하자니 생각할수록 수상한 놈들만 같았다.
 노영탄은 그대로 모른 척하고 잠만 잘수는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풍지 틈에 귀를 바싹 대고 밖에서 주고받고 떠드는 이야기 소리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엿듣는다.

 노영탄의 무술의 놀라운 재간  가운데서도 특히 절묘한 경지에 도달해 있는
내공의 신기한 힘을 가지면,

백보 밖에서 울고 있는  모기소리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여인숙으로 몰려든 여러 사람들이 주고 받고 떠들고 하는 소리가,

한마디인 노영탄의 귓속으로 똑똑히 들어오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어떤 사람의 거칠고 둔탁한 음성이 무슨 일인지 원망을 하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제기랄 것! 이놈의 날씨가 이렇게 춥다구야! 

우리들은 하필 이렇게 지독히 추운 날씨에 명령을 받구서 길을 가야 하다니?!

이건 정말 재수 없게 걸렸단 말일세!"

또 다른 한 사람의 음성이 대꾸를 했다.
 "자네, 그 따위 소리를 하다가 방주님한테 혼이 나보구 싶은가?"

 세번째로 또 다른 사나이의 음성이 그들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자넨 도무지 뭐가 뭔지  분간도 못한단 말야!

그만 눈치는 알아챌  수 있을 텐데.

이건 우리 방주님께서 그래두 우리들 몇 사람을  남달리 봐주셨기 때문

이번 길을 다녀오라고 명령하신 거란 말일세!

다른 놈들은 이런 심부름을 하라는 명령조차 받아보질 못하지 않나!

두구 보게,  내 말이 틀림없지.

우리들이 일을 마치고 보루로 돌아가는 날이면 반드시 두둑하게 상금을 내리실 걸세!"

 노영탄의 여기까지 그들의 주고  받는 말을 듣자,

무엇이 정신의 한  모퉁이를 콕 찌르는 것 같았다.

 짜릿! 하는 전기 같은 자극에 전신을 번갯불같이 떨었다.
 놈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금사보에서 파견해서 내보낸 회양방의 무리들인 것이 분명했다.

 또 놈들의 주고받는 말을  들어보면 무엇인지 중대하고 특별한 임무를 맡아 가지고

나온 모양이었다.

 '흐음! 네놈들이었구나!'
 이런 판단을 내리자 노영탄은 새삼스럽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주의해 봤다.

 몇 시간동안 푹 쉴작정으로  노영탄은 자리 옷바람(平裝)으로 누워 있던 판이었다.
 그러나 조급하게  굴 일은 하나도 없었다.

 마음을 든든히  먹고 손가락을 문풍지 틈에  넣어서 좀더 틈을 벌려 놓고

태연히 여인숙 대청 마루의 술상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과연 다섯 놈의 굵직굵직하고 험상궂게  생긴 장정 녀석들이 꼭같이

푸른 빛깔의 헝겊을 머리에  칭칭 감았으며,

일제히 검정빛 무장으로 매무새를 가뜬히 하고 있었다.

 제각기 무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다섯놈이 네모진 술상을 둘러싸고  한 자리에 앉아서 제멋대로 지껄여대면서

자못 도도한  기분으로 실컷 술을 마시고 있는 판이었다.

 뿐만아니라,

다섯 놈들은 꼭같이 옷매무새를 조금도 흐트렸거나 풀어 놓고 있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고  난 다음에는 시급히 밤길을 떠나야만 된다는 양이었다.

 노영탄은 다시 옆방으로 귀를 기울였다.
 감욱형의 방에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고단해서 잠에  골아 떨어졌겠지.

 노영탄은 구태여 이만 일에 감욱형을 건드려서 깨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뜸, 몸매무새를 대강 바로 잡고 나서 여전히 문풍지 틈에  엎드려서

그 벌어진 틈으로 바깥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밥 한 상을 치울락 말락한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다섯 장정 녀석들은 마치  모질고 사나운 바람이 한 점 구름을 휘감아 버리 듯,
 빨리몰아쳐서  마시고 먹고 하더니 일제히  벌떡 몸을 일으켜 여인숙  문밖으로 나갔다.

 노영탄은 여인숙 대문 밖에서 떠나가려는 말굽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놓쳐서는 안될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방문을 왈칵 열어젖히고서  밖으로 뛰어나왔다.

여인숙 대문 밖으로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나온 노영탄은  잠시 동안
 망설이면서 놈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회양방의 장정들을 채운 다섯필의 말은 서쪽을 향하고 비호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놈들이 내 앞에서 이렇게 호락호락히?'

 일각인들 지체할수 없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노영탄은 전신에 축적되어 있는 온갖 힘(眞氣)을 일시에 불러냈다.

 이런 때야말로 그의 절묘한 재간인  몸을 날리는 경신법(輕身法)을 써야만 된다.

 즉각에, 눈 쌓인 땅 위에 달려 들어서 발쓰는 법(步法)을 전개했다.

당장에 몸을 날려서 놈들의  뒤를 쫓아섰다.

실로, 그것은 하늘을 날으는  새와도 같이 날쌔게 질주해 달아나는

말들과 속도를 다투는 기묘하기 비길 데 없는 재간이다.

 몇 분도 되지 않는 동안에 노영탄은 벌써 그 다섯 필 말들의 뒤를 어지간히
가까이 쫓아대섰다. 비록  어둠속이긴 했으나,

노영탄의 예리한 안광은 털끝만한 틀림도 없이 다섯놈 장정들의 정체를 포착했다.

 놈들은 한일자로 차례차례 죽  늘어서서 한 놈이 또 한놈의 꼬리를 물고

풍같이 번갯불같이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말굽이 걷어차는  땅위에 눈송이가 바치 바람에 흐트러지는 꽃잎처럼 사방으로

어지럽게 춤을 추며 퍼졌다.

노영탄은 마음을 더  한층 단단히 먹고 훌쩍!  몸을 더 높이 솟구쳐 가지고
두어번 물결치듯 날아서 맨  끝으로 달리고 있는 말의 꽁무니를 바싹 따라섰다.
 거리가 불과 너더댓자밖에 되지 않았다.

 칠흑같이 어둔 밤중에 바람소리 또한 사나운지라 노영탄이 아무리 몸을

볍고 빠르게 날려도 앞서서 달리고 있는 다섯 놈의 장정들은 뒤에서

누가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훌쩍! 노영탄은 별안간 몸을 꼿꼿이 일으켜 가지고 마치 억센 매가 토끼 한마리를 습격하듯,
왼편 손 집게손가락(食指)으로 맨 꽁무니에서 달려  가고 있는 장정 녀석의  급소인

옥침혈(玉枕穴)을 찔러 버렸다.

그리고는 바른  손 다섯 손가락을 날쌔게 뻗어서  그 놈의 목덜미를 담숨에 움켜잡고

꽥 소리도 못하게 만들어 가지고 말 위에서 낚아채 버렸다.

 그와 동시에 두 발로  말의 궁둥이를 힘껏 내질렀다.

말은 등 위에 타고  있던 주인이 떨어졌는지 어쩐지 거들떠 볼 겨를도 없이, 

궁둥이를 걷어채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그대로 네 필의 말의 뒤를 따라 미친 듯이 달려갈 뿐이었다.

 순식간에 네 필의 말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제서야 노영탄은 장정 녀석을  옆구리에 낀 채로 몸을 날려 한 군데

과히 높지 안은 언덕위로 내려섰다.

 장정 녀석을  땅위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그리고는 보검 금서를 뽑아서 칼 끝을 그 놈의 턱 밑에다 들이댔다.

 아직도 이 놈이  정신이 살아남아서 꿈틀거리거나 반항하는 기세가  있으면,
당장에 처치해 버리겠다는 무서운 자세였다.

그러나 땅 위에 나뒹굴어진  장정 녀석은 송장처럼  꼼짝달싹도 못하고 뻗어버렸다.

 노영탄은 급히 수건을 꺼내서 얼굴을 싸매고 복명의 사나이가  되었다.

그리고는 한편 손을 뻗어서 그 놈의 혈도(穴道)를 풀어 놓아 주었다.

 말을 타고 앞으로만 질주해서  달아나던 그 장정 녀석은 별안간에 목덜미가
시큰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마지막.

 입을 벌려서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이,

무슨  힘이 어떤게 하는 것인지 

분간도 못하고 완전히 정신을 잃게 되어 그대로 까무러치고 만 것이다.

 노영탄이 혈도를  풀어주자,

그제서야 부시시 눈을  뜨고 정신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을 떠서 사방을  두리번거려 살펴보니,

자신은 눈  쌓인 땅위에 나둥그러져 있으며 허허벌판 길에 단지 한 사람, 

 복면한 사나이가 옆에 서서 한  자루의 보검을 손에 들고 

자기의 목구멍을 찌를 듯이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장정 녀석은 혼비백산.
 놀라움과 두려움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이때 노영탄은  침중한 음성으로 추상같이 호령했다.

 "네 이놈! 네놈은 회양방에서  뭘하고 있는 놈이냐?

무슨 임무를 맡아 가지구 어디루 가는 길이냐?

추호라도 숨기거나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놈의 목숨은 이 한칼에 당장 날아버리고 말 것이다!"

 장정 녀석이 노영탄의 말을  듣고 정세를 살펴 보자니,

복면한 사나이는  대적해서 싸울 수없을 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반항해  봤댔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제야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을 입을 열었다.

 "소인은 금사보 본진에서……."
 "하하하 핫! 아니꼬운 놈들! 본진이란 뭣 말라 죽은 것이냐? 그래서 …."

 "부……부두령으로 있사옵고  이름은 조중(趙中)이라  하옵니다.

이삼일전에 우리 방주께서 숭양파를 계승할 유명한 제자 한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성이 악이요 이름은 중악이라 하는……."

 "뭐라구? 흐음! 그래서?"
 "또 우리 방의 옛날 방주시던 분의 따님인 한빙선자 연자심이라는  여자도
이 사나이와 같이 도망질을 치다가 붙잡혔습니다."

 "흐음? 그런데?"
 "이것을 계기로 하고 숭양파를  쳐부수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월 초 이튿날.
홍택호 호반, 이십년전에 싸웠던 그 옛자리에서

숭양파의 보물인 숭양비급과 포로가 된 이 사나이와 교환하자는 겁니다.

 만일 이런  조건에 응하지 않는다면 이 사나이는 죽여버릴 작정으루……,

또 그날은 숭양파와 일대 결투를 해서 이십년전의 일대  결투를 해서

이십년전의 보복을 하기루……,

소인들 다섯이서 이 뜻을 벽송관에 연락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고

이 고장을 경과해 가는 도중에……."

 노영탄의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악중악과 한빙선장 연자심이 다시 놈들에게 붙잡혀서 금사보로

끌려 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다.

 "네 이놈! 그들 두 남녀가 붙잡히게 되기깨지의  자세한 경과를

하나도 빼지 말고 빨리 말해라!'

 조중이란 놈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네! 소인이 목격한 바는 아니오나, 자세한 경과를 똑똑히 알고 있사옵니다!"
 이리하여 노영탄에게 그동안의 경과를 상세히 고백했다.

 

 ◆ 다음은 추운언월 (追雲偃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