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6장 심야구출 (深夜救出)

오늘의 쉼터 2013. 12. 7. 21:58

정협지(情俠誌) 1권

제 6장 심야구출 (深夜救出)

 

생사를 건 한밤의 구출

 

 

 복면(覆面)한 사나이는 물론 노영탄이었다.
 그는 한빙선자 연자심에게서 감욱형의 행방을 알기가 무섭게,

그  이튿날 밤이 되기를 기다려 쥐도 새도 모르게 금사보 진지로 잠입해 들어왔던 것이다.

 둥, 둥, 둥, 둥!
 뎅, 뎅, 뎅, 뎅!

 금사보 안에서 경비의 북소리, 징소리,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바깥 쪽  보루 서편으로 찌를 듯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고 금사보의
한편 귀퉁이가 온통 불바다를 이루고 있을 바로 그때.

 노영탄은 이미 몇번인지 몸을 가볍게 날려서 불이 난 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태연히 자리잡고 있었다.

 안쪽 보루(內堡)중의  한군데 고루(高樓) 꼭대기에  몸을 숨기고 보루 안이
온통 야단법석을 하고 있는 난장판 같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 꼴을 자못 통쾌
기분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하면 쓰디쓴 웃음을 금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붕 꼭대기에  배를 깔고 숨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너무나 통쾌한 김에,

혼자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흥! 놈들 잘 놀고  있구나! 내일 모레면 네놈들의 소위 수륙제맹대회라니?
우선 내가 네놈들에게 무엇보다도 근사한 선물을 보냈으니

어디 실컷 발광을 하도록 흥겹게  뛰놀아 보아라! 가소로운 놈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들……,

평소에 강호 넓은 땅에서 전해지는 말로는 네놈들의  아성인 금사보란

지는 경비가 삼엄하기 비길  데 없고,

용이 버티고 있는 물  속 같고,

호랑이가 으르렁대고 있는 술 속 같다더니……,

오날밤의 정세로  보면 대단치도 못한 것들이……,

뭘 허세만 부리구서……, 

내가 한번 불을 질러 버렸더니,

거기에만 정신이 빠져서 허둥지둥……,

놈들! 밖에서 잠입해 들어온  사람이 있다는 것두 모르구서……,

네놈들은 요즘 무예계의 고명하다는  인물들을 몰아다 놓았으니까

감히 이곳을  기웃거리거나 넘겨다볼 사람두 없는 줄 아는 모양인데……,

 미친 놈들! 바보 같은 놈들! 핫! 핫! 핫!"

 아무도 모르는 높직한 곳에서  이렇게 혼자서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노영탄은 다음 순간 시커먼 어둠  속에서 갑자기 두 눈을 꽉감고

긴 한숨을 땅이 꺼지도록 쉬기도 했다. 

극도의 불안과 초조에 가슴속이 조여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잘못 판단을 했다면?'
 '저 불붙은 일각 속에 만일 감욱형이 납치되어 있었다면?'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다시 떴다.

 눈 앞이 아찔했다.
 충천하고 있는 불길 속에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연기 속에 파뭍혀서  사람 살리라! 

아우성을 치고 허위적거리고  쓰러지면서 왈칵 내닫는 감욱형의
처참한 얼굴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한동안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노영탄은 용기를 냈다.

 '아니다! 역시 내 판단이 정확할 것이다.

놈들은 감욱형을 반드시 안쪽 보루(內堡) 깊숙한 곳에 가둬 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어차피 일은 저질러진 것이다.

이제는 이미 내친  걸음이니,

안쪽 보루로 더 깊이 뚫고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

노영탄이 마악 몸을 움직이려 하는 찰나에 난데없이 한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눈 앞을 날으듯이 스쳐 나가는 것이었다.

 그 시커먼 그림자도 역시 안쪽 보루(內堡) 건물의 지붕 꼭대기를 살살 기더니,

토끼가 뛰듯 새가  날으듯 몇 번인지 솟구쳤다 내려 앉았다 하다가 

어둠 속으로 형적을 감추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키! 이게 뭐냐?'
 '이 시각에 보루 안이 온통 야단법석을  하는 판에 지붕 꼭대기를

몰래 날아다니는 놈이 있다니?'

 '아무래도 수상쩍은 놈이다!'
 노영탄은 머리 끝이 삐쭉  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일변, 

그 시커먼 그림자가 날쌔게  몸을 날리는 재간을 놓치지  않고 살펴보자니,

그것은 무술이  오묘한 경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놀라운 솜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흐음! 대단한 재간인데…….'
 노영탄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것은 노영탄의 날카로운 안광을  가지고도 좀체로

어떻게 몸을 쓰는 술법인지 알아낼 수가 없을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 수상쩍은  그림자가 남의 눈에 띄기를 꺼려하고 숨어서 돌아다닌다는 것만은

확실히 인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놈이 만일에  이 보루 안에서 초청해온 소위 고명한 인물  가운데 한 놈이라면,

구태여 몸을 숨기고 돌아다닐 필요가 무엇일까?'

 노영탄은 이런 의혹을 풀  길이 없어서 한동안 망설이기는 했으나,

결국  어떤 놈이든 간에 수상쩍은 그림자를 놓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당장에 은신법을 쓰고 또 지붕꼭대기에서 한바탕 그의 독특하고 영묘한 재간을 부려서
그 시커먼 그림자의 뒤를  쫓아간 것이었다

몸을 서너너덧 번 솟구치고 날으로 했을  때,

노영탄은 이미  안쪽 보루(內堡)후원에까지 와 있었다. 

사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어둠속에서도 멀리 앞으로 휘황찬란한 등불을

바라다 볼 수 있었다.

 거기서는 웃음소리, 떠드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두령 금모사왕이 베푼 주연이 한창 가경으로 들어가는 판이었다.
 그런데도 이 후원 넓은  공간만이 암흑이 지배하고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노영탄에게는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흐음! 놈들 잘 마시구, 잘 놀구  있구나! 어디 얼마나 흥겨웁게 노나 좀 더
두구 보자!'

 노영탄은 어둠속에 숨어서 흥미진진하게 회양방 두목들의 노는 꼴을 바라다
보며 차차 훤해지는 시야속에서 사면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문득, 후원의 남쪽 모퉁이를  바라다보다가 그 근처 한군데 이층 건물이 

채 있고 그 아래로는 회양방의 졸도들이 좍 깔려서 서성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키! 이놈들은 또 뭐냐? 흐음! 결국 놈들이…….'
 노영탄은 일변 놀라면서도 일변으로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수 많은 졸도들은 제가끔 손에 칼과 몽둥이를 들고,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서 이 건물 한 채를 포위하고 지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노영탄이 금사보 안으로  뚫고 들어왔을 때,

제일 걱정한 것은  감욱형이 어느 지점에 감금당해  있느냐는 것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대담하게도 바깥 쪽 보루 한 귀퉁에에 불을 질러 버리고 놈들의 주의력을

분산 시켜서 이 틈을 타가지고 일을 치르는데 손쉽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 뜻밖에도 이 시커먼  그림자의 뒤를 쫓다가 얼떨김에 이곳까지

끌려들어오게 된 셈이다.

 '경계가 삼엄한 것으로 보아,

이  건물속의 어떤 인물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틀림없다!'

 '그것이 반드시 감욱형이라고는?'

 노영탄은 또 얼마동안인지 이렇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결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이밤, 이시각에 금사보  안에 감금당해 있을 인물은  감욱형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노영탄은 서쪽으로 돌아서  그 지점까지 잠입해 들어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건물 아래서  경비를 하고 있는 놈들에는  발견당할 우려가 없었다.

 단지 한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그 시커먼 그림자였다.

생각할수록  형적이 수상쩍은 놈이다. 

보루 안의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놈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 시각에 몸을 감추고

이 부근을 날아다닐 것인가?

 이 의문을 풀 도리가 없었다.
 '이 놈두 경비를 하는 놈 중의 한 놈인가?'
 '그렇지도 않다면 외부에서 잠입한 놈?'

 '감히 그럴 만한 놈이 누가 있을 것인가?'
 '어떻게 행동을 개시한다?'

 노영탄이 이 궁리  저 궁리 하며 망설이고  있었을 때,

훌쩍 머리를  쳐들고 보자니 그 시커먼  그림자가 여전히 한바퀴를 빙글  돌아서

또 다시 눈 앞을 스치고 지나쳐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시커먼 그림자는  노영탄에 당장에 잠입해 들어가려고 마음먹고 있는

꼭같은 방향을 찾아서 서쪽으로 돌더니 남쪽 모퉁이 가깝게 있는 이층 건물을 향해서

날아가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내심 웃음을 금치 못했다.
 '흐음! 까닭이 있는  놈이로구나! 소위 <영웅이 보는 점은  꼭같다> 는 격인가?

하아, 이 놈이 노리고 있는 것이 우연하게도 나하구 합치되는 모양이니….'

 이 시커먼 그림자의 날아다니는  수상쩍은 품을 더 자세히 관찰해 보니, 

놈 역시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건물 속에 반드시 무엇이 들어 있는 것만은 결정적인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회양방 놈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존재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무엇이든, 누가 들어 있든 하여간 한번 맞부딪쳐 보는 도리밖에…….'
 노영탄은 마지막 결심을 하고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고 정신을 바짝 차려

경각을 지체치 않고,  지붕 꼭대기 기왓장에 배를 착 깔다시피 하고  몸을 날쌔게 날려서

그 지점으로 돌진해 들어간 것이었다.

 노영탄이 그 건물 지붕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그 시커먼 그림자는  이미 노영탄보다 앞질러서 건물 안으로 침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건물 아래서 경비를 하고 있는 회양방 졸도들은 바깥쪽 보루에 불이 났는데도

정신을 팔고  그곳으로 눈이 뒤집힐 듯이 달려가며 일대 소동을 일으키고 있을 뿐,

이 지점의 경비마저 팽개치고 달아난  놈이 많으며 시커먼 그림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챈 놈은 하나도 없었다.

 노영탄은 처마 앞까지 기어나와서 배를 깔고 건물 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때가 바로 이 건물  안에서 두 청년이 사생결단을 하고 싸우고 있었을 때였다.

 '괴상한 일이다! 이안에서 싸움을 하구 있다니?'
 이런 기색을 알아챈 노영탄은  배를 깔고 살금살금 기어서,

처마 끝까지  나와서 실내를 엿봤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판국이냐?'
 노영탄은 깜짝 놀랐다.

 실내에서 두 청년이 자웅을 결하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으며,

그  중의 한 청년은 오년동안이나 보지 못한 바로 악중악(岳中嶽)이 아닌가.

 그가 장검을 휘두르며 어떤 몹시 교활하고 사납게 생긴 다른 청년과 생사를 결단낼 기세로

싸움을 하고 있다니?

 그나 그뿐이랴.
 더욱 놀라운 것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한빙선자 연자심이 급소를 습격당한 듯 정신을 잃고

한편 땅위에 졸도되어 나둥그러져 있는 사실이다.

 노영탄은 퍼뜩! 번갯불같이 빠른 판단을 내렸다.
 '악중악도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감욱형을 구출해 내고자

이 곳에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십중팔구는  내가 처음에 그러했듯이 연자심을  감욱형이로 잘못 보았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자신있는 판단이었으나, 

같이 싸우고 있는 청년이 누구라는  것은 생각할 도리가 없었고,

더군다나 한빙선자 연자심이 땅  위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노영탄이 이렇게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실내의 동정만을 살피고 있을 때,

아랫층으로는 수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드는 모양이었고, 북소리, 징소리, 종소리가

한데 어울려서 경종이 더  한층 요란스럽게 들려왔고, 금사보안에 외인이 침입했다는 것을

놈들도 파악한 보양이었다.

 이 긴박한 순간에도 노영탄은 잊기 어려운 감구지회가 없을수 없었다.

 악중악.
 오년전 숭양표국 뒤뜰에서 안하무인으로 칼을 휘두르며 아리따운 소녀 앞에

망신과 창피를 주던  악중악의 얼굴에 이 순간에도 노영탄의 머릿속을

전과 꼭같이 스치고  지나쳐 갔다.

그러나 그와 꼭같은 찰나에, 

노영탄의 눈 앞에 왈칵 나타나는 또 하나 다른 환영.

 남해어부.
 스승은 노기가 가득 찬 얼굴로 노영탄을 쏘아보며 말하는 것만 같았다.

 '사나이 대장부는 과거의 사소한 감정으로 중대한 일을 그리치는 법이 아니니라!'

 노영탄은 또 다시  실내를 자세히 엿보았다.

바로 그때가, 

악중악이 연자심을 등에 떼메고 창을  넘어 밖으로 달아나려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상대편 청년이  그의 독특하고 잔인한 독기를  써서 악중악의 보검을 휘감아버려
맥을 못쓰게 해버리니, 

악중악은 어떻게 달리 손을 쓸수가 없게  되어,

초조와 분노를 참지 못하며 쩔쩔 매고 있는 판이었다. 

거기다가 금사보안은 온통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이 일대 소동이 일어나게 됐으니
정세가 극도로 위급할 때였다.

 노영탄은 비장한 결심을  했다.

과거의 사소한 감정은 깨끗이 잊자! 

지금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만이  문제다.

그러나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기는 싫었다.

그래서 선뜻 몸에 지니고  있는 검정 수건을 꺼내서

얼굴을 싸매고 비호같이 날아서 창을 넘어  들어간 것이었다.

이리하여 노영탄은 복면의 사나이가  되었던 것이다.

 노영탄이 바람처럼 싸움판으로 날아드니 놀란 것은

위기에 빠져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악중악뿐이 아니었다.

난데없이 뛰어든 정체불면의  청년을 제압하는 쾌감을 마악 맛보게 되는 찰나에

또 하나 복면한 사나이가 난데없이 연거푸 날아들고 보니 얼이 빠진 것은 팔조독경 오백평이었다.

 노영탄은 실내로 들어서자 마자

장검이 칭칭 감겨서 좀체로 끊기 어려운 팔조독경 독기를 손쉽게 풀어놓아 버렸다.

 일변 전신에 축적되어 있는 내공(內功)의 무서운 힘을 눈에 띄지도 않게 한편 손으로 모아가지고 

선뜻 팔을 휘둘러 상대방 청년을 가로막아  놓으면서,
그와 동시에 악중악에게 눈짓을 하고  악을 써서 이 호랑이 굴 속 같은 데서 탈출케 해준것이었다.

 악중악이 한빙선자 연자심을 등에 떼메고 창을 넘어서 달아나버린  뒤에,

양방의 졸도들이 이층으로 떼를 지어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노영탄은 이것쯤야 겁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섣불리 풀밭을 건드려 가지고 당치도 않게

뱀을 놀라게  해서 일을 잡쳐 버리는 결과나 되지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악중악을 구출해준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정말 목적하고 온 감욱형(甘郁馨)을 아직도

구해내지 못했으니 놈들과 더불어 싸움을 하는데만 흥미를 느끼고 있을 때는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오백평은 자신의 힘에 벅차는 상대방이라는 것을 즉각해 느꼈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티면서

또 한번 고함을 지르고 허세를 부렸다.

 "으흥! 네놈들 둘이서  애당초에 작당을 해서 자심이를 뽑아  내자는 계획이었구나!

어디, 이놈 견디어 보아라!"

 그러나 노영탄은 묵묵히 공격해 들어갈 뿐.
 노영탄이 손을  한번 써서 바람을 일으켜  오백평의 손바닥과 마주쳤을  때,
벌써 오백평은 몸을 비실비실 흔들며 대항하는 자세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오백평이 깜짝 놀라서 겁을 집어 먹는 기색이 보이는 찰나, 

노영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즉시 한걸음 더 앞으로 육박해 들어가며

이번에는 왼편 손을 높이 휘둘러서 오백평의 앞가슴을 향하고 습격해 들어갔다.

 이만하면 오백평은 노영탄의  톡톡이 맛본 셈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을 그는 아니었다.

그는  급히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는 척  하더니,

몸을 움츠러뜨려 가지고 일시 몸에 지닌 내공의 힘을 한데 모아서

노영탄과 접장(接掌)을 하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 긴장된 찰나에 노영탄은 오백평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듯,

별안간 팔을 다른  방향으로 거두어서 뒤를 따르는  바람을 마치 칼로 끊듯이 탁 쳐버리고는

훌쩍 들창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오백평은 노영탄이  몸을 뛰쳐 도주하는 것을  알자,

극도로 초조와  분노를 참을 길이 없는 모양이었다.

몸을 길게 뽑아 가지고  비호같이 노영탄의 뒤를 쫓아가려 했다.

그러나  노영탄이 들창을 뛰어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탁 친 바람을 

공연히 허세를 부리는데 지나지  않는 줄로만 생각했던 오백평은 갑자기

전신이 흔들흔들 중심을 잃었다.

 대단치 않을 줄만 알았던 노영탄의 마지막 손바람이 몸을 똑바로 스쳤을 때야,

오백평은 그 바람이 놀랍게 억세고 무서운 바람인 것을 깨달았다.

 당황해서 쫓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주춤하고 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버티어 볼 작정으로 오백평은 두 손을 동시에 써서 힘차게 휘둘러 가지

억지로 바람을 막아  보았으나 웬일인지 전신이 당장에 비칠비칠 맥이 빠

주춤주춤 하고 서  있는 동안에 어느틈엔지 노영탄의 그림자는 완전히 눈 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기막히게 된 것은 오백평이었다.
 본래 오백평은, 건너가서 연자심을 잘 감시나 하라는 아버지  금모사왕의

령을 거역한 것을  물론, 제멋대로 주제넘게 실내에까지 몰래 침범해  가지고
미혼향(迷魂香)이라는 일종의  마취제를 써서 연자심을  정신이 어지럽게 해 놓은 다음,

공갈을 때리고  위협을 하면 평소의 야욕을 쉽사리 이루어 볼  수 있으리라는

배짱을 가지고  뛰어 들었던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중에 아버지 금모사왕에게 꾸지람에게 욕쯤 먹는 것은 대단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것이 뜻밖에도 일을 망쳐 버렸고 결과에 있어서는 보루 안에 중대한 사고만

일으켜 놓은 셈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만 저만한 큰 일이 아닌데…….'
 '자심이란 년만 도망을 친 게 아니라 밖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온 놈들을

둘씩이나 놓쳐버렸으니…….'
 '아버님께 무엇이라 여쭙는다? 어떻게 변명을 한다?'

 생각할수록 전신에서 진땀이  흐르고 난처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다. 

혼이 다 빠진 사람같이 오백평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언제까지나

이층 건물 한 구석에 어리둥절해 서서 있을 뿐이었다.

 정말 놀랍고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독기(毒氣)를 가지고도 대항할 수 없는 놈이 있다니?'

 아무리 중얼대 봐도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별수 없다! 어차피 일을 저질러  놓은 담에야 아버님께 솔직히 고백하고 죽을 죄를 졌으니

용서를  빌더라도 한시 바삐 외부에서 침입한 놈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 드려야겠다.'

 오백평은 어쩔 수 없이 이런 각오를 하고 휘청거리는 다리로 실성한 사람같

건물 아랫층으로 줄달음질을 치는 것이었다.

 연자심의 처소에서 몸을 뛰쳐나온 노영탄은 사방을 새삼스럽게 조심조심 살펴보았다.

 보루안에는 온통 사람의  그림자가 갈팡질팡 쫙 깔렸고, 떠드는  소리,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서 하늘을 무찌를 지경이었다.

 서편 일각의  불도 이미 꺼져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보루 높직한  담장위에 군데군데 있는  요망대(瞭望臺)에는 횃불과 등롱불이 

눈이 부시도록 밝혀져 있으며 바깥쪽, 안쪽  할 것없이 구석구석이 회양방의 졸도들이

저마다  손에 불방망이를 들고 밤이  낮같이 밝은 속에서 경비가 극도로 삼엄하니, 

그대로 보루 밖으로 탈출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노영탄은 어쩔 수 없이  안 쪽 보루건물의 지붕 꼭대기로 다시 올라가서

청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금모사왕은 이런 소동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귀빈들과 태연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별안간 대청 지붕 꼭대기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중이 있었다.
 그 중은 전신에 붉은 옷을 걸뜨렸으며 얼굴이 흉칙스럽고 악독하게 생긴 자였다.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다짜고짜로 목청을 높여  떠들어 대는 말이
……

 "오방주(伍 主)! 대체 이게  어떻게 됐다는 일이요? 왜 덮어놓고 야단법석들이냔 말이요?

난, 도무지  까닭을 알수가 없는데……. 아, 그래 어떤  발칙한 놈이,

제가 목이 달아날  것도 생각지 않고 감히 이 굼사보 안엘 몰래  들어왔겠느냔 말이요?

내,  방금 지붕 꼭대기 위에  올라가서 아무리 살펴봐두 수상쩍은 놈이라군

귀신의 그림자 하나두 찾아낼 수 없는  걸 가지구……,
공연스레……,

불이 났다구  해서,

그게 반드시 밖에서 침범해 들어온 놈의 짓이랄 수는 없지 않소?

모두들,  도깨비에 홀려서 똑바루 보지도 못하고 공연히 분란을 일으켜서……

지레 겁을 집어먹구 수선들을 떠는 게 아니요?"

 말을 마치자,

화상은 별안간 미친 사람같이 껄껄대고 한바탕  수선스럽게 웃어 젖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령 금모사왕은 일부러 관록을 과시하려는 듯 의젓하게 앉아서 태연히 대꾸를 할 뿐.

 "핫! 핫! 핫! 선배님께서두……온, 그까진 일쯤을 가지시구……,

모른 체 하시구 내버려 두시면 될 일을…, 어서 이리 앉으셔서 술이나 한잔 더 드옵시구."

 홍의화상이 껄껄대고 웃은 것은  그 의미가 다른 데 있었다.

갑작스레  노기를 띤 언성으로 심히 불쾌해서 못 참겠다는 듯 투덜투덜 하는 말이 또 있었다.

 "아, 고런 발칙한 년이……, 요망스럽기 짝이 없단 말이요!

왜, 저어 서주가로에서 납치해다 둔 어린 계집아이 있지 않소?

아, 그 배라먹을 년이 부처님 같은 내가 저를 좀 고와했다구……,

인정  사정없이……,

분수도 모르구 쌀쌀스럽게만 굴구……, 

앙탈이 여간만 아니거든…… 

고년이 얼마나 더  악찌를 쓰나,

버르장머리를 톡톡히  가르쳐 주려는 판인데……,

마침  난데없이 이편에서 경종이 울리는  바람에 글쎄……,

소녀에게만 좋은 일이되지  않았겠소!

허, 그것 참 세상에 별 아니꼬운 계집아이를 다 보겠거든!"

 이번에는 금모사왕이 또 한바탕 껄껄 껄껄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온, 선배님께서 그까짓 일개 어린 철부지 계집아이를 가지시구……

그다지……, 아하하! 하……핫! 핫!"

 "도무지 화가 치밀어서 못 참겠단  말이요!

온, 천하에 발칙한 계집아이가……, 나를 몰라 보고……앙탈을 하다니……."
 홍의화상은 좀체로 화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그 눈치를 알아치린 금모사왕은 한편밖에 없는 팔을 높이 쳐들어

술잔을 홍의화상에게 내밀어 주면서, 

또한 한편밖에 없는 외눈을 꿈벅꿈벅 하더니 

거푸 너털웃음을 치면서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이었다.

 "글쎄, 선배님께서 뭘 그다지 조급하게 구시나요?

그 계집아이가  어디로 달아났을 리두 없사옵고……서서히 하신들……,

자아 술이나 우선  한잔 드옵시구……,

살살 달래 보심이……핫! 핫! 핫!"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서 노영탄은 그들이 주고 받는 말을 낱낱이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내 판단이  역시……. 이 근처에 어디다 감금해 둔 것이 확실하구나!'

 감욱형이 감금은 당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무사히 있다는 것을 확인하제 되자,

노영탄은 적이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과연 어떤 지점에다 감욱형을 감금해 두었는지

그것을 알 길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이때 별안간.

 노영탄이 숨어  있는 건물 아랫층  복도로 계집종(碑女) 둘이서

걸어나오는 것이 내려다 보였다.

 두 계집종들은 등롱에 불을  밝혀서 들고,

또 쟁반에 무엇인지 받쳐  들고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아무도 들을 사람 없는  어두컴컴한 복도인지라

두 계집종들은 마음놓고 종알대며 주고받는 말이 그칠 줄 몰랐다.

 "예, 아깐 정말 죽는  줄만 알았어! 난 정말 무섭구 겁이 나서……,

혼자만, 방 안에서 눈물이 다 핑돌지 않겠니?"

 "미친년!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너  혼자 불에 타 죽을까  봐서……?
인제 불두 다 꺼진 셈인데 바보 같은 소리 작작 해라."

 "불은 그만하게 꺼졌으니깐 너두 그만 근 소릴  치지만 만일에

이 금사보 안이 온통 불바다가 됐어 봐,

너 나 할 것 없이 살아날 재간이 있었을 것 같으냐?"

 "방정맞은 소리 하지  마! 고따위 소리를 방주님께서 들으셨다간  넌 당장에 모가지야!"

 "얘, 그런데 말야……, 

오늘 불이 이상하다구 야단들이 아냐? 

지금두 그것땜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너, 무슨 소릴 들었니?"
 "글쎄, 오늘 불이  반드시 밖으로부터 몰래 들어온  사람이 있어서

질러버린 불이라구 야단들인데, 그게 정말일까? 넌 무슨 말 못 들었니?"

 "우리들은 그따위 소리는 못 들은 체 하는  게 제일이야. 너 정말 입을 조심해라!

고따위 방정맞은 소리가 방주님 귀에 새어 들어가면 넌 당장에 어떻게 된다는 것 잘 알지?"

 "그래두 궁금하잖아! 안에서 불을 질렀을 사람이 있다구 할 수두 없구,

그렇다고 밖에서 몰래 뛰어들 사람이 있을 것 같지두 않구……."

 "얘, 얘! 그만 둬! 그따위 소리는……, 우리하구 아랑곳 없는 소리,

어서 이 음식이나 갖다주구 돌아가자!"

 "음식을 갖다 줌 뭘 해? 통 먹어야 말이지!"
 "그대두 갖다 줘 보라니깐 갖다 주는 척이라두 해야지……."

 "얘, 그런데 그 감씨라는 아가씨 참 예쁘게 생겼지?"
 "정말, 이 금사보안에도 수십명이나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는 소녀들이 득시글거리지만,

내가  보기엔 어느 하나도 그 감씨라는 아가씨와  비길만한 예쁜 얼굴은 없을 것 같더라!

그야말루 경국(傾國),  경성(傾城)의 미인이라는 걸까! 참말 절세미인이더라."

 "흥! 너 아주 시큰둥한 문자두 쓸 줄  아는구나!

그쯤 되니깐 저 우람부루라는 능글맞게 생긴 중 녀석이 눈이  뒤집혀서 미친 듯이 날뛰지 뭐냐?

그런데 얘, 그  감씨라는 아가씨는 숭양파의  제자이구,

그 아가씨의 아버지를  우리 방주가 무술을 잘 하는  어떤 사람을 매수해서

어딘지 매복시켜 가지고 암살을 시켜 버렸다면서? 그게 정말이냐?"

 "쉬, 낸들 어떻게 아니? 얘 방정맞은 주둥아리  작작 놀려라,

정말 방주님이 들으셨다간 너하구 나하구 어떻게 될 걸 잘 알지?"

 "어쨌든 같은  여자끼리니까 말이지, 정말 딱하고  불쌍하더라.

벌써 며칠째 곡기를 끊고 물 한 모금 마시러 들지 않구 있으니……."

 두 계집종들은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여전히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계집종들의 말을 듣고  나니 기쁘다 해야 할지 놀랍다 해야  할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꾸욱 참으며 종들의 뒤를 바싹 쫓아 나섰다.

 복도를 다 나온 곳에는  과히 넓지 않은 화원이 있었으며,

계집종들은  여기서 다시 바른편으로 꼬부라져서 따로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건물 한 채를 향하고 걸어가는 것이었다.

 노영탄도 거기까지 뒤를 밟아갔다.
 그 건물 안의  방은 면적도 과히 넓지  못한데다가

방안에는 희미한 불빛이 어슴프레하게 비치고 있을  뿐,

드나드는 방문 앞에는 두 명의  우락부락하게 생긴 장정들이 파수를  보고 있었다.

순전히 돌을 쌓아올려 지은  건축물로서 문이며 창들이 견고하고 둔중한 품이

사람을 감금하는 데 전문으로 사용되는 처소인 모양이다.

 두 계집종들은 방문 가까이  가더니

쟁반에 받쳐들고 온 것을 그대로 한 놈의 파수보는 장정에게  넘겨 주었다.

쟁반을 받아든 장정은 그것을  조그맣게 뚫린 창구멍을 통해서 방안으로 디밀었다.

 한동안 방문 밖에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두 계집종들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묵묵히 서 있을 뿐

방안에 들여보낸 쟁반이 다시 나오기만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한참만에, 그 장정 녀석은 웬일인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다시 창구멍으로 손을 디밀어서 쟁반을 집어내는 것이었다.

 처음 디밀때와 꼭 같은 쟁반이 손 하나 대본 흔적이 없이 되돌아 나왔다.
 방안에서는 아무도 쟁반위 음식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두 계집종들이 나타났을 때부터 뒷짐을 짚고 방문 밖 복도를 오락가락 하고 있던

다른 장정 한 녀석이  보다 보다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면서 혼자 중얼대는 말이 있었다.

 "쯧! 쯧! 쯧!  벌써 사흘이 돼 오도록  곡기를 끊구 물 한모금  마시러 들질 않으니……,

허지만 소용이 없단 말야! 여기가 어딘  줄 알구서,

잡혀 들어온 것이 신수가 사나웠지! 굶어도 소용이 없구, 앙탈을 부렸댔자 소용이 없구…."

 이 말을 듣고도 묵묵히 서서 몇 번인지 한숨만 쉬고 있던 두 계집종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처음 쟁반을 그대로 받아들고 두 명의 장정과  무엇인지 쑥덕쑥덕 쑤군쑤군 하더니

들어오던 길을 되돌아서서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난  노영탄은 그 괴롭고 안타까운 심정을 형언하기도 어려웠다.

 '이 잔인무도한 악당들아! 무슨 연유로  죄없는 여자를 잡아다 가둬 놓구

틀 사흘씩 굶어 있게 하느냐!'

 당장에 고함이라도 지르고 방을 부숴버려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참으며 사방을 자세히 살펴 보자니

이 건물은 안쪽 보루의 중심지대가  되는 지점에 자리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겹겹이 들러싼 경계망을 돌파하고 탈출하기란 지극히 어려울 것만 같았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 그래도  이 방주변만은 비교적 소횰히 하고 있다는  것

아마 감욱형이 이미 그들의 탄압에 시달려 꼼짝달싹도  못하게 되었고,

저히 도망을 칠 만한 힘이  없다는 데서 이 정도로 파수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노영탄은 꽤 오랫동안 망설이고만 있었으나 드디어 비장한 결심을 했다.
 아무리 이 건물이 견고하고,  또 아무리 무서운 놈들을 매복시켜 놓았다 

더라도 만난을 물리치고 감욱형을 살려내야겠다는 것이다.

 노영탄은 손을 번쩍 쳐들어  등에 메고 있는 금서 보검을 한번 어루만져 보았다.
 몸차림을 가뜬히 하고  나서 온갖 힘을 한  곳에 모아,

그의 절묘한  재간을 부려가지고 그방 지붕 꼭대기로 날아 올라갔다.

 기왓장 한개를 집어서 손으로  으스러뜨려 가지고 다시 그것을 한움큼 잔뜩 움켜쥐고

아래서 파수 보는 두 놈의 장정을 향해서 힘껏 뿌려버리는 것이다.

 두 놈의 장정들은 깜짝 놀라 머리를 번쩍 쳐들고 바라다보았다.
 앞으로 기왓장의 파편이  날으 들어오는가 하는 순간,

등덜미에서도  무서운 손바람이 습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다시 그 편으로 머리를 돌려볼 겨를도 없이 두 놈의 장정들은

입도 채 벌리지 못하고 기절을 할 듯.

 이 번갯불같이  짧은 순간에,

놈들은 벌서  노영탄에게 그들의 급소인  수혈(睡穴)을 습격당한 것이다.

그대로 비틀비틀 땅 위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노영탄은 바람처럼 몸을 날려, 방문 앞으로 대들었다.
 무시무시하게 크고 둔중한  자물쇠가 채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쯤은  노영탄이 한번 으윽! 하고  힘을 써서 비틀어 버리니,

당장에 끊어져서 철썩!  소리를 내며 땅위에 떨어져 버렸다.

 우지직! 노영탄은 담숨에 문짝을 밀어버리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둠침침한 촛불 밑에서 감욱형이 한편 나무 침상위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렇지!'
 노영탄은 환성이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이 순간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얼빠진  사람같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한참동안이나 인사불성이 되어

 두 눈을 꼭 감고 나무 침상에 누워 있는 감욱형을 바라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초조하고 창백해진 감욱형의 얼굴빛.

 발목에는 끔찍하게도 고랑쇠까지 채워져 있지 않은가.
 오년동안에나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아리따운 소녀 감욱형이

이 꼴이 돼 가지고, 호랑이 굴 속 같은 이 무시무시한 곳에 나동그라지다니.

 노영탄은 감욱형의 처참한 모습을  눈 앞에 똑바로 바라다보게 되자

슬픔과 기쁨이 교차되는 벅찬 가슴을 부등켜 안고 한동안 넋이 빠진 사람 모양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이러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일각이 생명을 좌우하는 위기일발의 순간이다.

 노영탄은 정신을 바싹 차리고 선뜻 나무침상 앞으로 다가섰다.
 가만가만히 감욱형의 한편 어깨를 흔들며 불러 보았다.

 "감소저(甘小姐)! 감소저!"
 그리고 얼굴을 싸맸던 검정 헝겊을 훌쩍 풀어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감욱형은 누가 방안에 나타난  것을 확인하자,

별안간 발딱 몸을 일으켜  나무 침상 위에 앉더니

실성한 사람같이 매서운 음성을 악을 쓰는 것이었다.

 "이 사람의 탈을 쓴 짐승같은 놈아! 여길, 왜 또 들어서느냐?

어떤  놈이 뭐란대도 이 감욱형은 네놈들에게 모욕을 당할 수는 없다구……

그렇게 일러라! 선뜻 물러가지 못……."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감욱형은 한참동안이나 앞만 바라다보더니

두 눈이 점점 더 커지고 입을 딱 벌리는 것이었다.

 "아하하핫!"
 방에 나타난 것이 홍의화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 감욱형은

절이라도 할 듯이 놀랐다.

 "감소저! 소생은 바로 노영탄이요!"
 노영탄의 음성은 나지막하게 떨렸다.

 "그……그대는……그대가 바로?"
 한번 헤어진 채 오년동안이나 못 본 노영탄이 바로 눈 앞에 서 있지 않은가.

 감욱형의 두 눈에는 금시에 구슬 같은 눈물 방울이 대롱대롱 맺혔다.
 "할 말은 무궁무진하오. 그러나  눈물을 흘릴때도 아니요.

몹시 신변이 위태롭소.

우리는 빨리 이 곳에서 빠져나가는 길밖에……."

 속삭이듯, 또 다시 나지막하게 떨려 나오는 노영탄의 음성.
 일각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급히 서두르는 노영탄의 말을  듣고 보니,

감욱형도 이 순간 이 생사를 좌우하는 중대한 시간이라는

절박감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감금다하던 그 때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했던  감욱형이었다.

 하늘이 주신 이 귀중한 순간이 없었다면 어찌 감히 호랑이 굴속 같은

이 마굴에서 몸을 뛰쳐 나갈  마음인들 먹을 수 있었을 것이랴.

핏기를 잃고  창백해진 얼굴에서도 감욱형의 새카많고 귀여운 눈동자에는

눈물이 이슬방울처럼 자꾸만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것은 감격이라고만 하기에도 너무나  벅찬 무엇이란 이름  붙여 형언키도
어려운  눈물방울이었다.

오열(嗚咽)할 수도  없는 이 긴장된 순간에 심장만이 소리없이 흐느끼는

파문(波紋)이 방울방울을 맺혀나는 것 같았다.

 노영탄이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럴수록 더 한층 조급해지는 것이었다.
 노영탄의 음성이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또 한번 급히 떨렸다.

 "감소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어서, 어서 몸을 일으킬 생각을……하……하시오!"

 감욱형이 두말없이  이를 악물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나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아래로 내려서려 했다.

그러나 두 발을 땅에 채  디디기도 전에 폭삭! 하고 침상에 도루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아차! 내가 정신이 빼졌었구나!'
 노영탄은 선뜻 보검  금서를 들어 감욱형의 두  발목에 채워 있는

고랑쇠를 단번에 가볍게 끊어버렸다.

그리고 급히 몸에 지니고 있던  환약 두알을 찾아내서 감욱형의 입에다 틀어 넣어 주었다.

 감욱형을 사흘째나  감금을 당해 있던 중이었다. 

곡기를 딱 끊고,  냉수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몸인지라  전신에 맥이 풀려서

손발을 움직일 힘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노영탄이 입 안에 틀어넣어준 환약은 

스승 남해어부의 비제(秘製)의 묘약인 설령환(雪 丸)으로 인명에 관계되는

위급한 경우이만 쓰도록 특별히 나누어준  진귀한 구급제였다.

이윽고 입 안이 환해지고  감미로운 향기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낀

감욱형은 정신이 새뜻해지며 삽시간에 원기를 회복하고, 몇 번  새로운 숨을 돌리더니
단숨에 훌쩍 나무 침상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었다.

 둘이서는 방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왔다.

문 밖에는 그때까지도  파수보던 두 놈의 장정들이 땅위에 쓰러진 채로 있었다.

사면을  살펴봐도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노영탄과 감욱형은 은신법을 써서 형체를  감추고 쏜살같이

보루 밖을 향해서 달음질쳤다.

 둘이서 마악 안쪽 보루를 넘어섰을 때,

또  다시 징소리, 북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왔다.

그리고 대청에서 꽤 많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날아 다니듯이 퍼뜩! 퍼뜩!

갈팡질팡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노영탄은 걸음을 멈추고 조심조심 살펴보았다.
 금모사왕, 홍의화상 그리고 운몽노인, 기경객의  두령과 두목급 인물들이

동을 개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영탄과 감욱형은 어둠 속으로 잠시 몸을 숨기는 도리밖에 없었다.
 대청을 중심을 한 보루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등불,  횃불이 낮과 같이 밝혀져 있지 않은가.

놈들의 정세가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팔조독경 오백평이 여러  사람의 맨 뒤에 끼어  있는 것을 보면,

필시  어떤 사람이 한빙선자 연자심을 뽑아가지고 달아났다는 급보가 금모사왕에게

전달된 것이 틀림없었다.

 회양방의 두령과 중견급  두목들이 총동원되어서 어떤 목적과, 어떤  지점을 향하고

행동을 개시하려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감욱형은 노영탄의 한 팔에 몸을 의지하고 초조하고 근심스런 음성으로

귓전에다 대고 속삭였다.

 "저놈들이 어찌하겠다는 걸까요?"
 "가만! 꼴을 봅시다!

설마 놈들두 귀신이 아닌  담에야 우리가 여기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 챌 수야……."

 둘이서는 이 위채로운 장면에서 숨을 죽이고 놈들의 일거일동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과연.
 노영탄의 판단이 들어 맞았다.

 두령 금모사왕을 선두로 한 수 많은 두목들은 역시 한빙선자 연자심이 거처하던

건물을 향하여 조수처럼 밀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네놈들이……. 이 틈을 놓쳐서는 안된다!'
 노영탄은 이 아슬아슬한 틈에  감욱형을 데리고 몸을 재빠르게 날려서 서편에 있는

보루의 높직한 담 밑으로 몸을 피했다.

 이 서쪽의  지점만이 방비하는 놈들이 비교적  적었고,

또 금모사왕  일당이 달려가는 지점에서도 멀찌가니  떨어져 있는 곳이며,

여기서 보루 밖으로  나가기만 한다면 거기에는 바로 강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영탄은 이 금사보 진지에  들어올 때부터 이곳에 지세(地勢)와 구조를 샅샅이 탐지해

두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을 탈출해서 강변까지만 나갈 수 있으면,

강에는 빈배  한척이 떠 있다는 사실까지 작전에 넣고 보루  안으로 뚫고 들어 갔었다.

 그때 생각으로는 여하히 해서든지 이 강변까지만 감욱형을 구출해 내가지고
그 다음은 마침 거기 떠 있는 빈배에다 손쉽게 싣고 홍택호 호수까지 직행해

형적을 감춰 버리자는 것이었다.

이런  작전대로, 노영탄은 마침내 감욱형을 데리고 보루의 서편으로 높이 솟아 있는

담을 뛰어 넘어서 금사보 밖까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 여기서부터  강변까지 가는 도중에는 별로 거치장스러운  존재들이 없었다.

 방비를 하고 있는  몇 놈의 졸병들이 가끔  발길에 채이듯이 덤벼드는 것을
힘 안들이고 걷어차 버렸을  뿐,

아주 순탄하게 지옥 같은 금사보를 점점  멀찌가니 뒤로 하고 있었다.

 노영탄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생각할 수록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흥! 여기까지 왔으니 인제야……,

놈들이 아무리 신출귀몰한 재간을 가졌기로 여기까지야…,

가소로운 놈들! 이 정도의 방비를 가지구서 나를 잡겠다구?"

 이렇게 혼자말을 하면서 감욱형과 더불어 경신법(輕身法)을 써가지고

눈 쌓인 벌판을 박차버리듯, 훌쩍 뛰어서 순식간에 강변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어찌 뜻했으나! 둘이서 막 강변에 다달았을 때.

 "야아! 이눔아!"
 "어떤 놈이냐?"
 "꼼짝 말구 게 있거라!'
 "달아나면 한 칼에 목을 날려버린다!"
 "야아 이눔! 어딘 줄 알구! 그렇게 호락호락히 달아나?"
 "이 눔아……아."

 난데없이 여러 놈들이 미친  듯이 질러대는 고함소리가 한데 뒤범벅이 되어

우뢰소리같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키! 이놈들이 끝끝내…….'
 노영탄은 가슴이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역시 냉정 침착했다.

 한 두번쯤 놈들과 정면으로  대결하게 될 아무런 각오도 없이

이 호랑이 굴 속 같은  금사보 안엘 무모하게 뛰어든 그는 아니었다.

마음을 든든히  먹고 걸음을 멈추며 한편으로  점잖게 비켜서서,

눈 앞에 닥쳐올 것을  기다린다는 듯 두 눈을 날카롭게 뜨고 있었다.

 '몇 놈이나 된다는 거냐?'
 '덤빌 테면 몇 놈이든 다 덤벼라!'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노영탄은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하고 꼼짝도 하지 않고

감욱형의 한편 팔을 힘있게 잡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두, 네 놈들에게 도루 이 아가씨를 빼앗길 까부냐!'
 "뭣하는 놈들이냐? 남의 가는 길을 막는 놈들이  누구냐! 몇 놈이냐? 썩 나서라!"

 어치피 일은 치러야 할 판이다.
 대담무쌍하게 응수하는 노영탄이었다.

 과연.
 강변 숲속, 여기저기서 뛰어 내닫는 놈들은 십여명이나 되는 

회양방 향비의 무리들이었다.

놈들은 질풍처럼  몰려들어서 삽시간에 노영탄과 감욱형을  둘러싸버리고 말았다.

 제일 앞장을 서서 날치는 놈은 바로 저 홍의화상 우람부루였다.
 본래, 노영탄과 감욱형이  둘이서는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까운  지름길을 택해서

달아나고 있었으나, 감욱형의 체력이 너무나 쇠약했던  판인지라

갑작스레 완전히 회복되질 못했다.

그래서 걸음이 아무래도 느려지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워낙 빠른 노영탄의  걸음을 따르기는 힘들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노영탄은 몇번인지 걸음걸이를  늦추어서 감욱형이
따라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렇지만 않았다면,

불과 몇분  안되는 시간의 차이로 놈들에게 뒤를 밟히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금모사왕 일당들이  한빙선자 연자심의 처소로 달려갔을 때, 

방은 텅 빈 채 사람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놈들은  이 궁리 저 궁리 머리를 짜본 끝에 결국 동서남북 사방으로 패를 나누어 가지고

수색해 보기로 했다.

 홍의화상 우람부르는 십여명의 졸도들을 거느리고 서편 방향을 담당하고 달려간 것이었다.

그리고  강변 가까이와서는 이 지름길을 뚫고 숲속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에 금사보에 침입했다가 도망을  치는 놈이 있다면 반드시 이 지름길을 찾아서

지나갈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니, 

다른 삼면은 평원(平原)과  옥야(沃野)로 몸을 숨기기 어렵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놈들이 이 숲속에  다달았을 때 앞으로 멀지않은  곳에 시커먼 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발견하자,

 일제히 고함을  지르고 내달아서 앞을  가로막아 버린 것이다.

 강변에는 어느 틈엔지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연자심과 감욱형 두 여자를 구출해 내는 분란 속에서 금사보의 무서운 하룻밤도 지나가고

동이  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눈이 쌓여 망망하게  널브러진 강변의 은백색에  동이 터오는 훤한 광선까지 

비치기 시작하여 여러 놈들의 형체가 어느정도 뚜렷이 노영탄의 눈 앞에 드러나고 있었다.

 노영탄은 선두에 서서 덤비고  있는 홍의화상 우림부루 하나만을 주의해 볼 겨를도 없었지만,

 힐끗 한번 훑어 보자마자  단번에 이 놈의 무술의  재간이 특이하고 대단하리라는 것을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흐음! 이 놈이 제일 만만치 않은 놈이겠는데…….'
 깔볼 수 없는 존재라는  판단을 내리자,

노영탄은 벌써 이놈과 대적해서  싸워야 할 만반의 태세를  마음 속으로 갖추면서

묵묵히 놈들의 일거일동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감욱형도 선두에서  대드는 놈이 우람부루라는 것을 확인했다. 

꺼질 듯 말 듯 하던 저주와 원한과, 분노의 불길이 다시금 훨훨 타오르지 않을 수 없다.

 얼굴 빛이 당장에 핼쑥하게  질리며 하이얀 이빨을 야무지게 악물더니

목청이 터질 듯이 날카로운 음성을 폭발시키는 것이었다.

 "이 짐승같은 놈아! 네 놈두 사람의 탈을 썼다구?

무삼 연유로 그만큼 생사람을 괴롭히고도……또 남의 가는 길을 막느냐?

썩 물러나서 이 길을 티우지 못하겠다면……."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감욱형은 앞으로 선뜻 나서면서 사생결단을 해보자는 듯

왈칵 우람부루에거 덤벼 들려고 했다.

 "감소저! 이다지도 무모하고 조급히 굴 일이 아니오!"
 노영탄은 아무도 모르게 한편 손을 가볍게 휘둘러서 억센 바람을 일으켜

욱형을 제지하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우람부루였다.

 감욱형을 한번 바라다보고 그  음성을 듣자 대경실색 놈들은 한빙선자 연자심이

도망친 줄로만 알고 연자심을 잡으로 몰려 나온 것인데  연자심을 채 찾아내기도 전에

천만뜻밖에 감욱형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야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람부루는 이 순간까지도 감욱형이  분명히 금사보 안에 감금당해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감욱형  혼자만이 아니라 옆에는  몸차림도 가뜬하고 준수하게 생긴
알지 못할 청년까지 같이 서 있지 않은가.

 '흐음! 저 녀석이 아무도 모르게 뽑아낸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우람부루는 발근하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게 무슨 수치스런 일이냐!
 용담호혈(龍潭虎穴)같고,  동장철벽(銅牆鐵壁) 같다고 

그 경비를  자랑하는 금사보 진지가  일개 무명소졸,

새파랗게  젊은 녀석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하고,

제멋대로 분란을 일으키도록 내버려 두고도 모르고 있었다니.

 '더군다나 내가 납치해다 둔 계집아이를 뽑아가지고 도주를 하는데도

아무도 모르고 있다니!'

 '만일에 이 놈을 여기서 잡지  못했다면 감쪽같이 몰랐을 것이니……

이게 무슨 꼴이냐?'

 우람부루는 울화가 치밀어서 이를 부드득 가는 것이었다.
 홍의화상 우람부루 하면,  그래도 회양방 향비들의 세상에서는

굉장히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선배축의 무인이다.

생각할수록 위신을 땅에 떨어졌으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이럴 때마다 그는 마음이 포악해지고  잔인무도해지는 위인이었다.

대뜸, 평소에도 사나워 보이는 두 눈을 부릅뜨더니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으로 괴상하게 두리번거리니,

사람을 집어 삼키기라도 할 것만 같은  흉칙스런 광채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두 팔을 쭈욱 뻗으며 뼈마디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를  내더니,

껄껄껄껄 한바탕 징글맞게 웃어 젖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한 살기등등한 음성으로,
 "요런 앙금스런 년이……, 그래 부처님  같은 내가 네년을 좀 귀여워 했다구……,

어린 년이 제 분수도 모르구서……, 발칙하게 도망질을 치다니……, 아! 잘됐어!

오늘은 별  수 없이 네년의 버르장머리를 톡톡이 가르쳐 놓구야 말 테니까."

 이편은 둘이요, 저편은 십여명. 그뿐이 아니다.

 감욱형은  일찌기 서주가로에서 납치당해 오던 때의  쓰라린 경험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저 낙이산 노인도  감당해 낼 수 없는  무서운 독기(毒氣)의 무기를 지니고 있는 우람부루,

위기에 빠진 것을 모르는 감욱형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번 다시 놈에게 납치를 당해가는 한이 있더라도 가슴 속에 북받쳐 오르는

원한과 저주를 그대로 참을 수는 없었다.

 노영탄에게 제지를 당하면서도 또 한번 앙칼진 음성으로 악을 썼다.
 "네놈이 부처님 같아? 인면수님(人面獸心)! 더군다나 법의(法衣)를 떨쳐 입

온갖 흉악한 짓은 도맡아 하면서 선량한 백성을 괴롭히는 놈이……가소롭다.

썩 비키지 못할까!"

 "헤헤헤……, 조런 요망스런 계집아이가……, 아직도 앙탈이 또 남았단 말인고?

어디 얼마나 더 앙탈을 하나 두고 보자! 헤헤헤……."

 우람부루는 능청맞게 감욱형에게  대꾸를 해주는 척 하고 있더니, 

번갯불처럼 빠르게 바른편 팔을 쳐들어서 불쑥 노영탄의 어깨죽지를

움켜 잡으려고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우람부루의 안광이 괴상하게 번쩍였을 때,

벌써 이놈이  무슨 잔재주를 부리려는 것을 재빠르게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편을 보고  말대꾸를 하는 척 하면서 이편을 건드려  보자

엉큼스런 생각으로  우람부루의 손바닥이 날아들어 왔을 때,

노영탄은  가벼운 미소를 띠워 보일  뿐,

 딱 버티고 서서 꼼짝달싹도 하지 않으며  앞으로 덤벼들지도 않고

뒤로 물러설 기세도 보이지 않다가

한번 우람부루의 손가락 끝이 어깨를 스칠락 말락 했을 때,

휘익! 하고 왼편 손을 번쩍  들고 높이 휘둘러서 억센  바람을 일으켜

우람부루의 바른편 팔을 직통으로 습격해 버렸다.

 우람부루는 사실 이까진 젊은 녀석쯤이야 하고 노영탄을 깔보고 있었다.
 그러나 노영탄의 손을 쓰는  품이 전광석화 같을 뿐만 아니라

태연자약해서 서두는 기색이 없음을 보자 내심 겁을 집어 먹었고, 

또 어깨죽지를 움켜쥐어 보려던 손이  억센 바람의 습격을 받자 

찔끔해서 팔을 움츠러뜨리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이때, 우람부루의 곁에 있던 십여명의 졸도들도 제각금 무기를 뽑아들고 나섰다.
 두목인 홍의화상 우람부루가 노리는 것이 청년이 아니요,

소녀라는  것을 눈치챈 회양방의 졸도  십여명은 무기를 뽑아들기가 무섭게 다짜고짜로

감욱형을 포위해 버리고 말았다.

 감욱형은 손에 무기라고는 지니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놈들 십여명을 대적하고 싸운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제일 걱정스러운 것은 이 위태로운 판에 회양방의 다른 명수(名手)라는 놈들이

몰려들게 된다면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어 도저히 몸을 뛰쳐나기 어려워지리라는

것이었다.

이런 급박한 정세를 알아차린 노영탄은 

이제야말로 일각인들 지체할 때가 아니라는 결심을 했다.
 '네 따위 놈들 십여명쯤야!;

 노영탄은 그 이상 무엇을 망설일 것이 없었다.
 선뜻 손을 높이 들어, 등에 메고 있던 보검 금서를 단숨에 뽑아 들었다.

 오년전의 아리따운 소녀 감욱형이  향비의 무리들에게 포위를 당해서

눈 앞에 서 있지 않은가!

 그리고 노영탄은 이미 오년전의 어리디 어린 소년 노영탄은 아닌 것이다.
 스승 남해어부가 오로지 정의만을 위해서만 뽑아들라던 그 보검.

 의협(義俠)을 위해서만 약한 자를 도와주기 위해서만 뽑아들라던 그 보검.

 노영탄은 오년동안이나 무술을 연마한 이래, 처음으로 그 보검을 뽑아든 것이다.
 또한 처음으로 수많은 적을 상대로 자신의 실력을 시험해 보자는

비장한 장면이기도 했다.

 노영탄은 보검을  높이 들고, 비호같이 몸을  날려 감욱형의 앞을  가로막고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같이 우뚝 섰다.

 "몇 놈이냐! 한꺼번에 모조리 덤벼봐라!"
 또랑또랑한 음성이 노기를 띠고  서슬이 시퍼런 칼날같이 놈들의 귓전을 울렸다.

높이 들었던 보검이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두고 연마에 연마를 거듭했던 저 건곤혼원검의 검술을 전개하여 수 많은 놈들을

대적하자는 것이다.

 다년간 연마했던 술법에서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는 노영탄의 놀라운 검술이었다.
 우선 팔괘(八卦)의  방위에서 정북의  방위인 감궁(坎宮)으로 몸을  날리고,
또 다시 번갯불처럼  남쪽의 방위인 이위(離位)로 달리며,

보검에서 한번  번쩍하고 광채를 발사하기가 무섭게 제일단에 드는 성석강하(聲析江河)의

검법을 쓰니, 보검에서는 휘익!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날뿐,

싸늘하고 매서운 광채만이 회양방 졸도들의 몸을  휘감는 듯,

보검의 형제도 찾아낼 수 없는 순간에 벌써 너더댓놈이 거꾸러져서

땅위에 나뒹굴고 마는 것이었다.

 노영탄에게 소중한 것은 시간이었다.
 뒤에 쫓아올 놈들이 더 많이 있으리라는 시끄러운 사실이었다.
 무술의 재간을 보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재빨리 놈들을 처치해 버리고 몸을 뛰쳐 달아나야만 될 판이다.
 일각인들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노영탄은 놈들에게  숨을 쉴만한 여유도 주지  않고,

연거푸 제이단에  드는 세붕뢰전(勢崩雷電)의 검술을 써서 

또다시 눈으로 볼 수도 없게 휘둘러지는 칼끝에서 발사되는

싸늘하고  파아란 광채속에 나머지 향비들을 말아 버리는 것이었다.

 회양방의 향비들은 노영탄이 제일단의 검을 한번 썼을 때, 

 이미 혼비백산해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숨도 채 돌릴 새  없이 또다시 처음보다도 더 매섭고 싸늘한 보검의 광채가
머리를 말아 버렸을 때.

 그것은 마치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

땅덩어리가 조각조각  갈라지는 듯,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놀라운 기세에, 어떻게 몸을 피해야 할지를 모르고 

장에 입도 벌리지 못한 채 눈을 감고 거꾸러지는 도리밖에 없었다.

 노영탄은 불과 두번 보검을  휘두른데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십여명의 회양방 향비들이

찍 소리도 못하고 죽어 넘어진 것이다.

 건곤혼원검이라는 검술의 놀랍고 무서운  위력. 이 눈 깜짝 하는 동안의  무서운 검술을

목격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은 물론  감욱형과 우람부루.

들은 꼭같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을 뿐.

 자신들이 어느 위치에 서서 누구를 상대로 하고 싸우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놀란 것은 그들 두 사람뿐이 아니었다.

 그 검술을  쓰고 있는 노영탄 자신까지도, 

저 스승 남해어부가  전심전력을 기울여 연마시켜준  건곤혼원검이란 검술이

이다지도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영탄은 잠시  동안 칼을 멈추고 힐끗!  날카로운 안광으로 좌우를 휘둘러 보았다.

 땅위에는 일곱 여덟명의 회양방 졸도들이 죽어 넘어져 있고, 

홍의화상 우람부루 곁에는 단지 두 놈의  향비가 남아 있을 뿐,

그 두 놈도 여기저기  몸에는 상처투성이로, 어쩔줄 모르고 허둥지둥,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하고 서 있다.

 "또 몇 놈이나  남았다는 거냐? 자아, 네놈들까지 모조리 덤벼봐라! 

한칼에 시원스럽게 처치해버릴 터이니……,

자아, 어서!  뭣을 우물쭈물 비겁하게 망설이고 있느냐!"

 노영탄은 시급히 이 장면을 수습해 버리고 일각을 지체치 말고

몸을 피해야만 되리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대담무쌍하게 호령을 하며

칼끝과 놈들의 얼굴을 한데 노려 보고 있었다.

 한숨을 돌려가며,

어떤 놈이든 몸을 꿈틀하는 기색만 보이면  즉각에 거꾸러뜨리자는 매서운 자세였다.

 홍의화상 우람부루는 이 정체를 알 수도 없는 청년이 이다지도 몸과 손을 쓰는 품이

전광석화 같을 뿐만 아니라,

칼을 쓰는 검법 또한 비길데  없이 독특하고 기이한데 놀라 자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단지 팔괘(八卦)의 방위만을 밟아가며 몸을 쓰고 있는데,

손을 쓰는 품은  도대체 몇가지나 되는지 헤아릴 수도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똑바로 볼 수도  없다는데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굴복해 버릴 우람부루는  아니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바라다보는 것도  잠시동안,

우람부루는 이 청년이 만만치 않은  존재요,
덮어놓고 멸시하거나 섣불리 대적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나,
그와 동시에 가슴이 터질 듯이 후끈후끈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불길을

그대로 참을 수가 없었다.

 "에잇! 괘씸한 놈! 발칙한 놈! 새파란  애숭이 녀석이,

감히 내 앞에서 칼을 휘둘러 내 부하들을 넘어뜨리다니!"

 우람부루는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홍의화상 우람부루도 마침내 최후의 각오를 한 것이다.

 두 팔을 부들부들 떨더니,

두 어깨죽지를 별안간에 꿈틀꿈틀.
 우두둑!

 하는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선뜻 노영탄을 향하여 한 손바닥을 벌컥 내밀면

손바람(掌力)을 쓰려고 덤비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는 드디어  달리 노영탄을 대항해날 수 없는  이 막다른 골목에서,

그의  오직 한가지의 독특하고 잔인하고  비겁한 무기인 용연선독장(龍涎仙毒掌)의

술법을 쓰자는 것이었다.

 이 용연선독장이란  우람부루가 연해(延海)란 곳에  살고 있는 일종의 독기(毒氣)를

지니고 있는 모기의 침을 모아가지고 그것을 팔과 손속에 침투시켜서 단련해 낸

술법(掌法)이었다.

 평시에는 그 무서운 독기가  뼈와 근육 틈에 서리어 있다가 독수를 써서

부를 결해야만 될 경우에는 두 팔을 요란스럽게 떨지만 하면

그 독기가 온통 손바닥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것이다.

 이래가지고, 한번 손바람을 쓰기만 하면 일종의 피비린내 나는 

고약한 냄새가 사방으로 흐트러져서 상대방이 한번 이 냄새를 맡게 됐을 때에는

이미 그것을 방비해 낼 겨를도 없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번 이  냄새를 코로 맡기만 하면 당장 손과 발이  흐늘흐늘 해져서

맥을 못 쓰게 되고 여러번 맡게 되면 남이 손을 댈 겨를도 없이 그 자신이 독기를 못이겨

정신을 잃고 죽어버리게 되는 무서운 것이다.

 우람부루는 말할 것도 없이  노영탄의 칼을 쓰는 품(劍法)이 독특하고 신기해서

승부를 결해서 자신이  도저히 자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마침내 그가 유일한 무기로 삼고 있는 용연선독장의 손바람을 써서

잔인무도하고 비겁하게 노영탄을 굴복시켜  보자는 결심을 한 것이다.

극도로 긴장된  순간에 노영탄도 그런 눈치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었다.

 우람부루가 두  팔을 부들부들 떨어서 쭉  뻗었을 때 그리고  어깨죽지에서 우두둑하는

괴상한 소리를  냈을 때, 이미 이놈이 어떤 해괴망측하고  비겁한 수단을 쓰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이놈이 쓰려는 괴상한  술법이 용연선독이라는 독기라고까지는

미리 알아차릴 도리가 없었다.

 '흐음? 이놈이 괴상한  짓을 하는데……,

어디? 무슨 재간이  있다는 거냐? 해볼테면 해봐라!'

 노영탄은 그때까지도 자신만만한 생각으로 우람부루의 일거일동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이, 발칙한 놈! 네 녀석은 내가  누구라고 소문도 못 듣고 감히 금사보안엘 침범해서

앙큼스런 짓을 하고 그 계집아이를 뽑아낼 생각을 하다니 헤헤헤……,

이 철부지 녀석아!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어디 한번 혼이 톡톡이  나보겠다면……, 자아!"

 우람부루가 결코 굴복할 리  없다는 듯,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 손바닥을  불쑥 내밀며 

바람을 일으키니, 그  바람속에서는 한줄기 희미하고  거무티티한 연기가 쭉 뻗쳐 나왔다.

 그 거무티티한 한 줄기  연기는 빛이 몹시 엷어서 여간 정신을 차리고 주의해서

잘 보지 않고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것이다.

 무서운 연기.
 무서운 독기를 품고 있는 거무티티한 한 줄기 연기가 노영탄을 향해서

구렁이가 꿈틀거리고 들어가듯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눈 앞에서 정면으로 천천히 흘러들어오고 있는 거무티티한 한 줄기 연기.
 노영탄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용연선독이라는 무서운 독기임을 알리는 없었다.

 '이게 뭐라는 거냐? 이놈이 무슨 괴상망측한 짓을 하려구?'
 이렇게까지 생각한 노영탄은 선뜻  칼끝을 날쌔게 휘둘러서 다가드는

그 거무티티한 연기를 물을 베듯이 탁탁 쳐버렸다.

 팍! 팍!
 칼끝에서 몇번인지 이런 짤막한 음향이 들렸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 거무티티한 한  줄기 연기는 한 조각의 뽀얀 안개로 변해서

방으로 흐트러지고 말았다다.

 노영탄은 이 뜻하지 않은 괴상한 광경을 눈 앞에 보고, 

다소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으나 무엇인지 좀  이상야릇한 냄새가

코에 끼치는 것 같을 뿐,  다른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영탄이 힐끗! 머리를 돌려서 바라다봤을 때.
 '이게 웬일이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감욱형은 본래, 노영탄의 뒤에 서 있었는데 어느 틈엔지 

우람부루의 무서운 독기를 맡고 이미 손과  발이 하늘하늘 맥을 못 쓰고,

비실비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두 눈을 꽉 감아 버리고 있지를 않은가.

 '야아, 도대체 이 젊은 녀석이 무슨 놈이냐? 

나의 무서운 독기 앞에서도 끄떡도 하질 않으니……흐음? 만만치 않게 걸린 걸!'

 한편,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우람부루는 노영탄과는 다른  의미에서

노영탄 이상으로 대경실색을 하는 것이었다.

 홍의화상 우람부루는 제 손바람 한번만 쓰기만 하면,

노영탄이  당장에 형편 없는 꼬락서니를  하고 비칠비칠 그대로 땅위에 

고꾸라져 버리고 말 줄로만 자신만만하게 믿고 있었다.

 그랬더니, 노리고 있는 노영탄은  끄떡도 없고 뒤에 서 있던 감욱형만이 

늘흐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리다니.

 너무나 뜻밖이었다.
 용연선독장의 술법을 써서  별로 실패해본 기억이 없는 우람부루였다. 

그런데 노영탄은 태연자약할  뿐만 아니라, 처음이나 추호도 다름이 없이 

여전히 패기만만한 기세로 장검을 휘두르며 덤벼들고 있지 않은가.

 우람부루는 이 상상할 수  없는 광경 앞에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할 뿐, 

 아무리 머리를 짜보아도  그 까닭을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사실인즉,  이 까닭은 비단 우람부루만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당자인 노영탄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본래, 노영탄이 뽑아 들고  있는 보검 금서는 둘도 없는 고대(古代)의  진기한 보물로서 

칼집은 천년이나 묵은 금빛  물소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칼자루는 이 물소의 뿔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물소의 가죽과  뿔은 어떤 종류의 기독(奇毒)이든

그것을 막아내는 데 불가사의한 위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독기  있는 모기를 막아내는 데는 이것들을 당할 만한

진귀한 물건이 또 없는 것이었다.

 금서보검은 어떤 독기와 맞닥뜨리든 간에, 스스로 먼저 일종의  특이한 향기를 발산해서

독기를 막아버리고 그것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여,  그 독기가 독하면 독할수록 

칼에서 발산되는 향기도 그것과  꼭 같이 진해지고 높아지는 것이다.

 보검 금서가 지니고 있는  이런 불가사의한 위력 때문에,

노영탄은 단지  특이한 향내를 코로  맡았을 뿐이었고,

피비린내 나는 용연선독의 고약한  독기를 맡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감욱형의 경우에는 그 고약한 독기를 막아낼 만한 아무런 힘도 없었다.

즉, 물소의  가죽이나 뿔이 지니고 있는 놀라운 향기(香氣)의  보호도 없었기 때문에

홍의화상  우람부루의 용연선독을 한번 코로 맡자 마자, 

 당장에 어지러뜨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비겁한 놈아! 약한  여자의 몸에다 잔인한 술법을 쓰다니?

네놈은 아직도 혼이 더 나야만 알겠느냐?"

 감욱형이 비틀비틀 전신의 중심을 잃고 땅위에 쓰러지는 광경을  보자,

노영탄은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렇게 추상같이

싸늘한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이 악독한 놈이 이단(二段)의 검법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면……?'
 노영탄은 칼자루를 더 한층 힘있게 잡았다.

 두 발로는 팔괘(八卦)의  방위를 여전히 정확하게 디디면서,

공중을  늘으는 새와 같이 날쌔게 중궁(中宮)의 위치를 번갯불처럼 치면서, 

 전신을 질풍같이 날려 제 삼단의  검법인 도설간운(度雪干雲)의 술법을 써서

화살같이 습격해 들어갔다.

 보검에서 발사되는 광채는 세겹을 이루고 눈부신 광선속에 매섭게 찬바람을
휘익! 휘익! 일으키며 우람부루에게 직통으로 쏘아 들어갔다.

 사실인즉, 끝까지 용연선독장의 손바람만 믿고 있던 우람부루는

이미  그 첫번 대결에서, 노영탄을 넘어뜨릴 수 없게 됨을  알자,

이만 저만 겁을 집어먹은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제 또다시 겹겹이 매섭고 눈부신 광채를 발사하는 

칼바람이 서슬이 시퍼렇게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정면으로 쏘아 들어오자

감히 손바람을 써서 그것과 맞닥뜨릴 생각은 깨끗이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도  창졸간에 이곳으로 달려든 길인지라, 

또 다른 무기를  준비할 겨를도 없었고 또  자기의 유일한 자랑이요,

생명같은 용연선독만 가지면  천하에 두려워할 것이 없을 줄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람부루는 당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키! 이놈은?'

 숨을 제대로 쉴 겨를도 없었다.
 하도 다급한 바람에 슬쩍 몸을 움츠러뜨려 가지고 뒤로 벌컥 나자빠지는 척하고

옆으로 뽑아버렸다.

 그러나 그런 섣부른 피신법을  가지고는 노영탄의 놀라운 재간을 막아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몸을 옆으로 뽑아 가지고,  채 중심을 든든히 잡기도 전에 노영탄의  보검이 발사하는

무서운 광채는 털끝만한  틈도 벌리지 않고 바싹바싹 점점 더 접근해 들어올 뿐이다.

 '이건, 안되겠구나!'
 우람부루는 절대로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가슴 속에 오싹 하고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서야 우람부루는 근본적인 원칙을 똑바로 깨달은 것이다.
 노영탄이 아무리 날으고  뛰고 해도, 시종 여일히 팔괘(八卦)의  방위(方位)

벗어나지 않는 이상, 이 테두리 않에서 뛰쳐나지  못하고 보면 언제까지나
그의 무서운 칼날의 광채를 피해볼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몸을 피하는 수밖에!'
 우람부루의 그 무섭게 생긴 눈동자도 촛점을 잃고 함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영탄의 독특하고 기이한 검법에는 대항해 볼 길이 없다는 것을 자인했다.
그와 더불어  더 싸우다가는 목숨조차  건지기 어려우리라는 두려움에, 

어떤 틈이든 묘하게 뚫고 도주해버리자는 것이다.

 "쉬…익!"
 우람부루는 입으로 이런 괴상한 소리를 재뿜듯이 길다랗게 뽑았다. 

아직 내게도 버틸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용기를 내자는

부르짖음 같기도 했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마지막 비명을 어물어물 감추어 보자는

 허세에  불과했다.

 이런 괴상한 음성을 토하면서  우람부루는 두 손을 맹렬히 휘둘러서

노영탄에게 손바람의 공세를 취하더니, 

마치 남쪽을 향하고 몸을 날릴 것 같은  자세를 보이는 찰나,

사실인즉  이 틈을 노려서 다시 힘을 한곳으로 모아  가지고,

퍼뜩 몸을 날쌔게 돌이켜서 북쪽으로 도주해 버릴 준비를 하는 것이다.

 마침내, 마지막 발악으로 우람부루가 두 손을 동시에 휘두르는 

손바람의 공세가 노영탄에게로 닥쳐왔을 때  노영탄은 서슴지 않고

보검을 높이 들고 쳐들어갔다.

 우람부루가 남쪽으로  훌쩍 날아버릴  태세를 취하는지라,

주춤하고  한걸음 뒤로 멈추었다가 왈칵 대들며 찔러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우람부루는 몸을  피하는데는 비범한 재간을 지니고 있었다. 

별안간 몸을 비틀 듯이 꿈틀 하더니, 홱! 하고 번갯불처럼 방향을  돌려

북쪽으로 뺑소니를 쳐버리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번쩍하고 보검을 또 한번 휘둘러서 단숨에 찔러  버리려고 했으나,
아슬아슬하게도 한걸음 뒤로 물러섰던 간격 때문에 마침내 땅에서 훌쩍 뛰는
우람부루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핫! 핫! 핫! 천하에 비겁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다!

도주를 해 버릴 위인이 뭣을 믿고 허세를 부렸는고? 핫!  핫! 핫!

이놈, 내 얼굴을 똑똑히 봐두었겠지? 두고두고 잊어버리지 말지어다."

 호령을 하는 노영탄의  추상같은 음성을 들으며,

꼴사나웁게 꽁무니를  빼면서도 포악무도한  우람부루는 훌쩍 땅위에서  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왼편 손을 뒤로 돌려 칼로 물을 베듯 손바람을

한번 더 쓰고야 마는 것이었다.

 눈깜짝하는 찰나.

노영탄은  보검을 더욱 재빠르게 놀려서 우람부루의  손바람을 막으며,

한 칼에 우람부루의 왼편 팔을 내리쳐 버렸다.

 날쌔게 칼을 피하려는 우람부루. 그러나 우람부루의 왼편 팔을 

마침내 노영탄의 칼 끝을 완전히 피할 재간은 없었다.

 칼끝이 스척! 지나쳐 간데 불과한데도 왼편 팔에 상처를 면치 못했다.
 주루루…….
 샘솟듯이 터져나는 혈광(血光).

 홍의화상 우람부루는 결국 한편  팔에 상처를 입은채,

어디다 호소할 곳  없는 아픔을 간신히 참으로  뒤를 돌아다볼 생각도 못하고

도주해 버리고 말았다.

 "앗! 핫! 핫! 쥐구멍을 찾으며 달아나는 놈의 꼬락서니란!"
 노영탄은 통쾌한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웃음만 터뜨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노영탄은 감욱형을 걱정하는 초조함 때문에 뒤를 더 쫓아가서 싸울 것을

념하고 급히 머리를 돌려 사방을 두리번 거리고 살펴보았다.

 눈 쌓인 강변에는 새벽이 다가들고 있었다.
 은백색을 이룬 벌판 저편으로는 파아란 강물 줄기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바라다 보였다.

 그러나 감욱형은 그 무서운 용연선독을 마셨기 때문에 날이 밝은 것도 모르

두 눈을 꽉 감은  채 백지장같이 창백해진 얼굴로 차가운 눈 위에 졸도한 채 꼼짝도 못하고

나둥그러져 있지 않은가.

 몇 번씩이나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되는 감욱형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다보는
노영탄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안타깝기 이를 데 없었으나, 

이미 당황하거나 초조한 감정은 적이 가라앉힐 수 있었다.

 단지 한가지 걱정은 또 다시 뒤를 밟아서 쫓아올 놈들이 있으리라는 것이었지만

이제 그것도 그다지 두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이미 혼자서 십여명의 향비들을 대적하고  싸워서 물리쳐 버린 노영탄이었다.
 그리고 바라다뵈는 강물위에는 빈 배 한 척이 그들을 기다리는 듯 밝아오는
동녘 하늘 찬란한 새벽 햇빛 아래 그 형체를 그림같이 뚜렷이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허지만 여기서 또 놈들에게 붙잡힌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감욱형의 처참한 모습을 내려다보느라면 회양방 도당들에게 대한 분노의 불길이

좀체로 꺼질 것 같지  않았지만 이 이상 옥신각신 싸움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 이놈들! 후일에 다시 보자!'
 노영탄은 멀리 금사보  쪽을 마지막으로 한참동안이나 노려보다가,

선뜻  땅 위에 쓰러져 있는 감욱형을 두 팔에 안았다.

발에 힘을 모아 가지고  땅을 걷어차듯, 몸을 가볍게 날려서  강물 위에 멈추어져 있는

 빈 배 속으로  단숨에 뛰어 들었다.

 두 젊은이를 태운  배는 이제야 아무런 거리낄  것도 모르고 두려움도 없이
그들만의 강물위를 흘러가는 것이었다.

 유유히 돛을 높이 올려서 넓게 펴고.
 강기슭으로 매어져 있던 닻줄을 한 칼에 끊어버리고 그들을 태운 배는

서서히 앞을 향해 떠나가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이 가슴 벅찬 승리의 새벽하늘 아래서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노영탄은 감욱형을  떼멘채로 뱃바닥 깊숙이  들어가 있는 좁디좁은 선실로
내려서서 시급히 스승 남해어부가 나누어준 설령환을 꺼내어 입안에 털어 넣어 주었다.

 꽤 오랜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말없이 오랜 세월을 두고  가슴속에 서리었던 감구지회를 아직도 풀어볼 수 없이,

창백한 얼굴에 두  눈을 감은 채로 정신을 잃고 나둥그러져 있는  감욱형의 모습만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 보고 있는 노영탄에게는 일각이 삼추같이 초조하고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했다.

 한참만에야.
 감욱형은 차츰차츰 맑은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두 눈을 힘없이 조용히 떴다.
 그제서야 감욱형은 선실 한편  구석에 몸을 기댄 듯, 드러누운 듯, 

꼴 사납게 돼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바로 옆에는 노영탄이 분명히 앉아 있지 않은가.
 꿈속에서 깨어난 것도 같고,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도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미소가 빙그레 떠올랐다.

 빵긋!
 가볍게 웃어 보이는  감욱형의 미소는 부끄러움의 표현인지,

기쁨의  표현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부끄럽다고만도 할 수 없고, 기쁘다고만도 할  수 없는
그 모든 감정이 한데 엉크러진 이상야릇한 심정의 표현이라라.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사라지려는 순간,

감욱형의  두 볼에는 활짝  꽃이 피듯 발그스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기쁨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는  처녀의 심정인지도 몰랐다.

 오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그들 사이에 흘러간 다음,

이제야  마음 놓고 들여다볼 수 있는 아리따운 소녀 감욱형의 얼굴.

 그러나 감욱형은 이미 부끄러움밖에 모르는 소녀는 아니었다.
 오년 동안의 보지 못한  성장(成長)이 역력히 눈에 띄었다.

변한 것이  없으면서도 변한 감욱형의 모습.

 노영탄은 이 긴세월을 두고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그리움을 무엇이라

선뜻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눈, 코, 입…….
 그리고 봉만(峰滿)하게  발육된 감욱형의  몸매,

한참동안이나 묵묵히  입을 다문채로 감욱형의  오년동안의 성장을

샅샅이  훑어보면서 한편으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 생각해볼 때

새삼스럽게 벅찬 감구지회에 사로잡히는 노영탄이었다.

 강물에 흘러가는 배 위에서는 한참동안이나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제각기 상대방의 눈동자속에 자리잡고  앉아서

다시 이 편을 바라다보고만 있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감욱형은 감욱형대로 자기를 넋 잃은 듯 바라다만 보고 있는

노영탄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오년이나 보지 못한 동안에도 어디 한군데 달라진 점을 찾기 어려운

노영탄의 깨끗하면서도 소박한 모습.

 옛날 소년시절보다 몇 배 더 늠름해졌고 미목이 청수해진 대장부의 모습 속에는

한없이 겸허하고 공손하고 의젓한 기상까지 넘쳐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는 이미  저 숭양표국 후원에서 악중악에게  망신과 창피한 꼴을  당하고,
비실비실 쫓겨나서 자살을 꾀하던 때의 일개 실의(失意)의 소년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의 용감성. 의협심. 놀라운 무술의 재간.

 감욱형도 마치 꿈속에 도취해 있는 사람같이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고 말끄러미

노영탄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바라다볼뿐이었다.

무엇을  생각했음인지 고개를 살짝 돌려서  강물만을 유심히 바라다보던 감욱형이,

새벽 바람에  나부끼는 앞머리를 가다듬어 올리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훌륭하셨어요!"
 단지 한 마디. 완전히  원기를 회복한 듯,

오년전 그 옛날과  같이 파아랗게 가라앉은 심산(深山) 속 호수의  수면에서

반짝이는 두 개의 별과 같이 새카맣고 영롱하게  빛나는 귀여운 눈동자가

또  다시 노영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
 노영탄은 선뜻 대답하여야 할  말을 알지 못했다.

훌륭하다는 말이 뭣을  의미하는 말인지를 언뜻 알아차리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감욱형으로는 다른 여러 말이 필요치 않은 순간인지도 몰랐다.
 또 단지 한마디  '훌륭하다!'는 말로써

다른 백마디 천마디의 말을  대신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세상을 비관하고 자살하려던 실의를 과감히 번복하고 살아나온

노영탄의 정신과 의지도 훌륭했고,  미목이 청수하고 늠름하기 이를데 없는

대장부가  된 그 모습도 훌륭했고,  용감성과 의협심, 수 많은 놈들을 대적하고 

 싸우는 무술의 재간도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짧은 침묵이 지나간 다음

노영탄도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쾌활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하하핫! 감소저! 무슨 뜻인지 말씀하시는 뜻을 나는 잘 모르겠소!"
 "모든 것이 훌륭하셨어요!

더군다나 소녀의  목숨을 사지에서 건져내주신 놀라우신 무술의 재능……."

 "그게 뭐, 그다지 훌륭한 것까지야 있겠소!"
 "참으로 이 구명(救命)의 태산  같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올지……그저 감격하올 뿐."

 "무삼 말씀을 그리  하시오? 오년전 감소저의 은혜에 비한다면……, 

몇놈과 더불어 싸움했다는 것이,  하등 무슨 훌륭한 일이겠소!

그날,  그때 감소저가 없었던들,

내 어찌 오늘 감소저와 더불어 배를 타고 이 강을 흐르고  있는 몸이 될 수 있었겠소!"

 "그러하오나, 어찌 아시옵고 이곳까지 오시게 되셨나요?

또 뵙지  못한 오년 동안에 그다지도 놀라옵고 

고묘(高妙)하신 무술을 연마하시게 되셨사오니…

도무지 소녀는 꿈을 꾸고있는 것만 같사와……."

 "핫! 핫! 핫! 꿈과 같으시다구? 그러나 꿈은 아니요.

거기에는  감소저의 지고지대한 구명의 은혜가 제일 큰 힘이 되었지만,

또  우연히 남해어부 상관학이라는 천하에 드문 명사(名師)를 만날수 있었기 때문이었소!"

 이렇게 말을 꺼낸 노영탄은  계속해서 어떻게 낙양을 떠나게 됐다는 일, 

승을 한 사람 기적과 같이 만나게 되어서 그 제자가 된 일, 

무술을 연마하고 다시 파양호 밖으로  나오게 된일,

한빙선자 연자심이란 여자를 만나서  봉변을 당할  뻔한 일,

다시 그  여자의 힘으로 금사보의 소식을  탐지하게 되고,
얼마전에 홍의화상의 무리들과 싸우게 되기까지의 과거지사를 상세히 설명해서 들려주었다.

 감개무량한 노영탄의 긴 이야기를  듣고 난 감욱형은 웬일인지

별안간 기쁨과 놀라움이 한데 엉크러진 이상한 얼굴을 쳐들며,

탄식과  초조와 그런 빛을 감출 수 없는 애절한 음성으로 급히 묻는 것이었다.

 "악중악을요? 그는  소녀와 오라비처럼 같이  나라난 청년이온데……, 

그가 한빙선자 연자심이란 여자를  구출해 냈다 하셨사온데,

지금 그들은 어느  곳에 가 있사온지?"

 "나도 그들이 어디 가서 있다는 것은 자세히 알  수 없소!

하여튼 무사히 금사보에서 탈출했다는 것만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소!

그런데 멀리 낙양에 계셨어야 할 감소저께선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셨소?

뵙지 못한 오년동안에 댁내에 별고나 없으셨으며 춘부장(椿府丈)께서두……."

 노영탄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감욱형은

별안간 왈칵 치미는 슬픔을 참을 수 없는 듯 두 눈에 구슬방울 같은 눈물이 맺혀나며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당황했다. 무

슨  까닭인지 알 수 없으나,

공연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서 울게 했구나  하는 무안한 생각에 어쩔줄을 모르며

감욱형의 한편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달래듯이,

 "미안하게 됐소! 알지 않아도 좋을 일을 내가 물은 것 같소. 너무 언짢아 하지 마오!"

 감욱형은 솟구쳐 오르는 오열속에서 두 어깨를 들먹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천만에요. 아버님은 돌아가셨어요!

처참하게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 생각을 하오면 분하구 원통하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감욱형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노영탄은  그동안의 경과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난 가을에, 감욱형의 아버지  금면불수 감영장은 표국의  일로,

여행하는 손님들을  호위하고 친히 난주(蘭州)까지  먼 길을 떠나야 했다.

 뜻밖에도, 도중의 어느 험준한 협곡(峽谷)에  이르렀을 때,

금모사왕이 미리 매수해서 매복시켜 두었던 무예계의 명수(名手)라는

수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하여, 몸에 지닌  것은 모조리 강탈을 당하고 부상을 입은 채 

낙양으로 되돌아가기는 했으나,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숭양파의 영도자는 즉시로 이  억울한 정세를 알고 포고문을 발표해서

문하의 제자들을 소집해 가지고 회양방 향비들과 더불어 오래쌓인 원한을

청산하고 승패를 결해 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한편 숭양표국은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이 없어, 폐업 폐문을 해  버렸고,

때까지도 악중악은 벽송관에서 무술에 전념하고 있었는지라

하산(下山)할 몸이 못 되었고, 감욱형은 하는 수 없이 고봉산인 낙이산  노인을 따라

산동(山東)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런 것이 뜻밖에도 도중에서 홍의화상의  습격을 받아 금사보에까지

납치를 당해 가게 되었으며, 낙이산  노인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알 길이 없는 형편이었다.

 감욱형은 눈물을 씻어가며 노영탄에게 간곡히 애원하는 말이 있었다.
 "노공자께선 어찌된 인연이든 간에  소녀를 아시게 되었삽고,

이제 무예계의 제일인자이신 명사(名師) 남해어부의 문하에서,

당대에 감히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을 만큼 훌륭한 무공(武功)을 닦으신 몸이 되셨사오니, 

서로 알게 된 기연(奇緣)을 생각하시고 소녀를  위하시와 한번만 힘을 빌리시어

아버님 원수를 갚아 드리도록 해주신다면 그 은혜 소녀의 평생을 두옵고도……."

 "예! 예! 알겠소!"
 감욱형이 채 말을 마치기 전에 노영탄은 이렇게 중단시켜  버리며,

얼굴에는 비장하고 침통한 기운이 심각하게 감돌았다.

 향비들의 무리들에게 무참히도 생명을 빼앗긴 감영장을  생각하면,

불길같이 치미는 의분을 참을 수 없었다.

 "아하! 슬픈 일이요! 그렇게 처참히  세상을 떠나셨다니……

천인공노할 포악무도한 회양방 도배들!

내 힘이 자라는 데까지 기어코 감소저의 원한을 풀어 드리리다!"

 눈물어린 감욱형의 눈동자가 미소로 변하더니,

별안간에 폭삭!  하고 얼굴을 노영탄의 무릎위에 파묻었다.

 마치 오라버니에게 응석을 하는 어린 누이동생 같이.
 오년 전.
 오년 후.

 기연(奇緣)과 기연을 싣고 배는 말없이 흘러갔다.
 아침 해가 눈부시게 떠올랐다.

 눈을 녹이기 시작했다.
 강폭이 차차 넓어졌다.
 배는 벌써 목적지인 홍택호 가까이 와 있었다.



  다음은 매림노파 (梅林老婆)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