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4장 심야외인(深夜外人)

오늘의 쉼터 2013. 12. 6. 12:04

정협지(情俠誌) 제 1권
제 4장 심야외인(深夜外人)

 

한밤의 방문객

 

강소성(江蘇省) 서북녘으로  동산현(銅山縣)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현에서 으뜸가는 도읍이 서주(徐州)였다.

 춘추(春秋)시대에는 송(宋) 나라가 도읍으로 삼아 팽성(彭城)이라고도 하였으며,
 저 유명한 서초(西楚)의 왕, 항우(項羽)가 도읍했던 고장.

 또, 소동파(蘇東坡)가 친히 지어 올려 가지고 그 위에서  여러 묵객(墨客)들과 놀았다는

황루(黃樓).

 당(唐)나라 때에는  두 마리의 학(鶴)을 기르는  사람이 있어,

아침에  날려 보내면 저녁때 반드시 집을 찾아 들어왔다는 방학정(放鶴亭), 

그리고 운룡산(雲龍山), 자방산(子房山).

 허다한 명승고적을 가진 이 도읍은  산동(山東), 안휘(安徽), 하남(河南)

성(省)의 중간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군사상으로도 중요한 지점에 놓여져 있었다.

 시가지를 둘러싼  견고하고 높은  성벽이 멀리  바라다뵈는 널직한 관도(官道).


 때는 겨울.
 음산하고 추운 날씨였다.

사나운 바람이  모질게 불었다.

흙먼지를 몰아다가는 넓은 가도에 닥치는대로 뿌려놓은

 회오리바람에 눈을 뜰 수 없어 별로 길 가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는 온통 시커먼 구름이 뒤덮였다.
 눈발이 섰다.

 당장에 주먹같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질것만  같은 험악한 날씨였다.

별안간,
하남(河南)쪽으로부터 두  필의 준마(駿馬)가 달려들었다. 

쩔렁쩔렁, 요란스러운 말방울 소리가 이 황량한 벌판길의 정숙을 깨뜨리고

회오리바람 속으로 울려퍼졌다.

 한 필 말 위에는 반백의 수염이 길다랗게 늘어선 노인이 타고 있었다.
 다른 한 필에는 스므살을 넘을락 말락한 소녀가 타고 있었다.

 노인의 옷차림은 별로 눈에 띄우는 특색이 없이 평범한  편이었으나,

지극히 침울한 얼굴빛 속에는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소녀는 전신에 하얀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등에는 큰칼(長劍)을  둘러매고 있으며,

두 눈썹이 살아서 일어서 있는 듯 긴장한  정신에 가득차 있으면서도
아리따운 얼굴에는 극도의 비분을  참지 못하는 듯한 침통한 빛이 서리어 있었다.

 노인과 소녀는 머리를 푸욱 수그리고 그저 말을 급히 몰아 길을 빨리 달리기에 전심전력,

 입을 열어 무슨 말을 주고받고 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난데없이 갈림길 무성한 가시덤불 속으로부터 

필의 말이 말굽소리도 요란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그 세필의 말들은 순식간에  노인과 소녀가 타고 있는

두필의 말을 스칠 듯이 빨리 달려가더니 앞장을 서 버렸다.

 노인과 소녀로서는 정말 알 수  없는 뜻밖의 일이었다.

그 세필의 말  가운데 중간에 서서 달리던 말위의  사람이

노인과 소녀를 스칠 듯이 접근해서 지나쳐 갔을 때.


 "아앗!"


 하고 이상한 소리를 외마디  소리같이 얼떨김에 크게 지르더니

앞으로 달려나가자 마자 갑자기  달리던 말을 멈추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일각을 지체치 않고 세 필의 말은 꼭같이 말머리를 돌렸다.

넓은 길 한복판에  세 필의 말은 나란히 서서 노인과  소녀의 앞길을 가로막더니
그 중의 한 필 말위에서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말을 멈춰!"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한 노인과 소녀는 그들의 난폭한 태도와 거칠은 음성 앞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벽력같은 고함을 지른 것을  역시 둘째 말을 타고 중간에서 달리던 자였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는 길을 가로막는 괴한들이 하나도 아니요,
 셋이나 되고 보니 까닭도 모르고 항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노인과 소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다소곳이  말을 멈추는 도리밖에  없었다.
말을 멈추면서 노인은 세 명의 괴한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세 사람 가운데서도  앞장을 서서 유난히 서두르고  덤비고 하는 것은

둘째 말을 타고 중간에  달리던 자였으며,

소녀를 달리는 말위에서 재빠르게  알아낸 것도 이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자는 몸집이  거창하게 생긴  중(和尙)이었다.

전신에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어 법의(法衣)를 갖추었으며, 

특히 등덜미에서 걸쳐 입은 자줏빛  가사(袈裟)가 유난히 두드러지게 눈에 띠었다.

면목이 우락부락 거칠고  사나웁게 생긴데다가 시커멓고 부리부리하고 

괴상하게 생긴 두 눈을 쉴새없이 두리번거려서는

소녀의  얼굴만 뚫어져라 쏘아보는  것이다.

마치 눈앞에  어른거리는 짐승을 당장에 털도 뜯지  않고 통채로 집어 삼키고 싶어서

으르렁대고 있는 사자의 눈초리같이 끔찍끔찍하게 무서워 보였다.

 나머지 두 괴한 가운데서 한 자는 몸집이 호리호리 가늘고  키가 훌쩍 컸다.
까무잡잡한 얼굴에다가 두  볼에서 턱주가리까지 긴 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화상(和尙)의 왼편으로 서 있는 또 한자는 과히 흉치 않고 알맞은 몸집이긴 했으나
 이자 역시 간악하고 교활하게 생긴 앙큼스럽고 얄미운 얼굴로 노인과 소녀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그뿐이랴.
 이 두놈들은 날씬하고 가벼운  몸차림에 흉기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노인은 돌발한 광경 앞에 겁을 집어먹기는 했으나,

 언제까지나  그대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낼까 말까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이런 여유조차 줄 수 없다는 듯이 세놈중에서 키가 크고 몸집이 호리호리한 자가

간사스럽게 매서운 웃음을 만면에 띠우면서 서슴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해해해해…해해…뭐, 그럴 것 없지 않소!

아가씨! 여자동무! 어디서 분명히 본 일이 있던 것 같은데……,

몹시 낯이  익은 얼굴인데……,

동무는 어느 편 사람이냔 말야?

우람부루(烏蘭布魯 :  오란포로) 대사부(大師父)님께서 동무하고
 좀 친해 보구 싶으시다는데 어때? 히히히……히히히…."

 말을 마치자 소녀의 얼굴을  또 한번 유심히 훑어보고,

두 어깨를 으쓱!  하고 들먹거리더니 장남감이라도 다룬다는 듯이

간사스런 음성으로 해해거리는 것이었다.

옆에서  히죽이 웃어가면서 이  광경을 자못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보고만 있던,

또 하나 얄미웁고 빤질빤질하게 생긴 녀석도  한마디 하지 않고
 못배기겠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히히히……아가씨! 좋으면 좋다구 어디  한마디 해봐! 영광이지 뭐야,

우리 우람부루 사부님이 말까지 멈추시구…

아가씨가 눈에 드셔서 친해 보시겠다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터무니없는 야유요,

농락이었다.
 노인은 놀라운 가운데서도,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놈들의 태도가  기가 막혀
 한동안 말이 없이  얼빠진 사람같이 그들의 얼굴만 멀거니 바라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이미 중(和尙) 녀석의 태도와 얼굴을 한번 보았을 때 가슴이 뜨끔하고 내려앉았다.

이제  또다시 이 두 놈들의  하는 수작을 듣고 보니

더  한층 놀라웁고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이다.

 '만만치 않은 못된 놈들과 맞닥뜨리게 됐구나!'
 '이놈들을 어떻게 물리친다?'

 노인은 묵묵히 놈들의 얼굴을 훑어보면서 마음 속으로  이렇게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여전히 괴상한 두 눈을 두리번거리며 소녀의 얼굴만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고 있는 자줏빛 가사를 걸쳐 입은 중.

 홍의화상(紅衣和尙) 녀석의 불손하고 괘씸한 태도.

거기다가 또 다른  두 놈들의 발칙하고 무도한  수작을 생각하니,

노인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 고장이 어느 곳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회양방의 본거지로 통하는 이 서주가로의 한복판에서

경거망동을 해서는 된다는 것을  퍼뜩 느낀 것이다.

그래서  노인은 치미는 분노를 꾹  누르면서 냉정하고 위엄있는 말투로 점잖게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은 우리와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아니오?

어찌 이 노상에서 친하고 안 친하고를 말 할 수  있겠소.

우리는 또 긴급한 볼일이 있어 시각을  다루어서 말을 달리는 중이오.

심히 미안한 노릇이긴 하지만 당신네들과 노상에서 한담을 하고 있을 틈이 없는 사람이오!"


 노인은 이렇게  딱 잘라서 말하고,

말고삐를  당겨서 말머릴 높이  쳐들면서 소녀에게 음성을 높여 명령했다.


 "어서, 빨리 가자!"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홍의화상(紅衣和尙)은 몸을 꼼짝도 하지 않고,

마치 한 줄기  자줏빛 구름처럼 단숨에  위익!

하고 말위에서 땅위로  내려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달리려는 소녀의 앞에 우뚝  서더니

그 앞을 가로 막고 팔을 높이 쳐들었다.


 "으흐흐흐……흐흐흣!"


 홍의화상은 그 괴상망측하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무서운 얼굴의 근육이란 육을

모조리 움직여서  질그릇이 깨지는 것같이 징글징글하고 둔탁한 너털웃음을 쳤다.


 "으흐흐흐흣! 아가씨! 

뭐 그다지 비싸게 굴  것까지야 없지 않소! 

말을 좀 멈추라니까……,

중(和尙)이라구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추호도 없단  말이요……,

어디  우리 한번 친해 봅시다  그려…,

이 세상 사람치구  어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사귀어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있겠소!

자아,  말을 잠시 멈추고서 나와 같이…."


 소녀는 이 말을 듣고도 꽤 오랫동안 말 위에 앉은 채 꼼짝달싹도 하지 않으

 화상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홍의화상도 지지 않겠다는 듯 여전히 소녀의 얼굴을 핥듯이

그 괴상한 눈으로 두리번거려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소녀의 얼굴빛이  핼쑥하게 변하더니 하이얀 이빨을 야무지게 악물며


 "이거, 비키지 못해!"


 앙칼진 음성과  함께,

소녀는 손에 든  말채찍을 높이 쳐들더니 

홍희화상의 얼굴 옆을 향해서 번갯불처럼 내리치는 것이었다.

 소녀가 말채찍을 내리치는 것쯤은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홍의화상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거만스럽고 징글맞았다.

 그는 눈 한번  깜짝하지도 않고 그 괴상한  음성으로

여전히 너털웃음을 칠 뿐이었다.


 "으흐흐흐……흐흐흣…

철부지  아가씨! 공연히 섣부른 앙탈을  해봤댔자

용이 없단 말야! 여기가  어는 땅인지 알구?

또 내가 누군 줄 알구? 

고분고분히 말을 들어두는 게 좋을 걸!

헤헤헤……헤헤…."


 마치 너는 독안에 든 쥐니까,

꼼짝도 말라는 듯  홍의화상은 안하무인격으로
이렇게 배앝듯이 몇마디를 던지더니

왼편손을 가볍게 휘적휘적 흔드는 것이었다.


 이 순간.
 소녀는 이상한 무형적인 압력이 습격해 들어오는 것을 재빠르게 느꼈다.


 '이놈의 중 녀석이 손법을 쓰는구나!'


 퍼뜩,

 이것을 알아차린 소녀는  말채찍을 던지고 팔을 굽혀서 등에 매고  있

큰칼(長劍)을 선뜻 뽑아 들었다.

 그러나 홍의화상은 등덜미에서 칼이 뽑혀지는 날카로운 음향을

분명히 들으면서도 제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고 서 있을 뿐이다.

 이윽고, 그는 법의(法衣) 아랫자락을 바람을 일으키듯이  휘날리더니

길다란 두 소매자락을  걷어 젖히고 전광석화같이 몸을  날려

소녀의 등덜미에 우뚝 서는 것이었다.


 '흐음! 이 중 녀석이 제법 맹랑한 놈이구나!'


 노인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약하디 약한 계집아이에게 술법을 쓰려 덤비는 비겁하고 흉악한 놈!'


 노인은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훌쩍, 말 위에서 가볍게  몸을 날려 땅위에 우뚝 내려선 노인도, 

바른편 손을 꼿꼿이 쳐들어서  손바람(掌術)을 일으켜 가지고 홍의화상을

정면으로 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뭐? 이따위 늙은 것 감히 나에게 덤벼들겠다구!'


 홍의화상도 그제서야 이 노인이  만만히 않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는 머리를 한바탕 쩔레쩔레  흔들더니

별안간 두 어깨죽지를 아래로 비틀듯이 꿈틀거렸다.

 전신의 뼈 마디 마디에서 우드득 하는  무서운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노인도 경각을 지체치 않고 손바람(掌術)을 맹렬히 일으켜

화상의 앞가슴을 향해서 쳐들어갔다.

화상도  선뜻 바른 손을 뻗어서 그것을 막아내며  대결하자는 것이었다.


 "팽!"


 날카롭고 매서운  음향이 황량한 벌판길의  적막을 깨뜨리고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손바람과  손바람이 맞닥뜨려서  승부를 결하자는 순간이다. 

그러나 홍의화상은 이까짓  것쯤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버티고 서서

거만스럽고 괴상망측한 음성으로 연방 너털웃음을 칠 뿐이다.


 "에헤헤헤……헷! 헷!

늙은 것이 손바람이 제법 세군 그래!

어디, 또 한번…
정말 나와 더불어 승패를 결해 보겠다는 거냐?

늙은 놈이 몸조심이나 해 두는 게 상책일 꺼야.

헤헤헤…흐흐흐…."


 아닌게 아니라 노인의 손바람을 막아내는 화상의 손바람은 대단한 것이다.
 노인은 더 쳐들어 가질  못하고,

비틀비틀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서서야  다시
자기의 위치를 안전히 잡고 설 수 있었다.

 노인이 비록 서너걸음 뒤로 물러서기는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바로 홍의화상에게 대항할 만한 능력이나,

재간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손바닥을 한번 펼쳐들고 대드는 품, 다리를 옮겨 놓는 모습,

몸을 움직이는 자세…,

그 중에서 한가지만 보아도 이 노인이 호락호락하게 항복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세놈의 괴한들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노인으로 하여금 점점 더 불리한

곤경으로 몰아 넣는 결과밖에 되지 않았다.

 기고만장, 안하무인  태연스러운 체를 하고 거만스럽게  버티고 있으면서도,
이런 눈치를 챈 홍의화상은 한편 눈을 찡긋! 하더니

 아직도 말 위에 앉아 있는 다른 두 놈의 괴한에게 무언의 암시를 보내는 것이었다.

 두 놈의 괴한들도 선뜻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어디서, 이따위 늙은 것이……?"


 "늙은 놈이 우리 우람부루  대사부님의 소식도 모르구……,

함부로 덤벼들다니……,

이따위 늙은 것은 한번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 줘야만……."


 놈들은 제멋대로  중얼대면서 일제히 몸에 지니고  있던 흉기를 꺼냈다. 

놈은 아미자(峨嵋刺)라고 쇠갈퀴를 휘두르며,

또  한놈은 연자창(練子槍)이라는 창을 손에 들고 좌우 양편으로 갈라서서

노인을 향하고 쳐들어 가려고 했다.

 홍의화상은 힘에 부칠까 두려워서 두 놈들에게 암시를 주어  놓고도,

 여전히 뻔뻔스럽게 기세를 올리는 것이었다.


 "두분 타주(舵主)님들은 저편으로 멀찌가니  물러서 계시오.

내 혼자서 이놈의 늙은 것을 거뜬히 해치울 터이니….

두분은 저  계집아이나 놓쳐버리지 않도록 해주시오!

이게 어디서 굴러 먹던 늙은 것이 감히  뉘 앞이라구……,

분수도 모르구서……."


 모진 바람이 사납게 부는  겨울날 황량한 벌판길에는 저녁이 다가들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완전히  하늘과 땅을 뒤덮기 시작했으며, 

어두워가는 허공에서 주먹덩이 같은 큰 눈송이가

지척을 분간키 어렵게 펑펑 마구 쏟아졌다.

 이들 다섯  사람 외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구경할 수도 없으며, 

끝없이 뻗어 나간 망망한 벌판길 사방에서는 공포에 가득찬

암흑만이 각일각 다가들 뿐이었고,

죽음같은 정숙한 대지를 송두리째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이윽고, 노인은 비장한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뒤로 물러선 위치에서 잠시동안 무엇을 곰곰히 생각하는 듯

분노에 가득 찬 날카로운 눈초리로  홍희화상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더니,

별안간 다시  한번 한편 손을 번갯불처럼  날쌔게 쳐들어 손바람(掌力)을 일으켜서

화상편을 막아내며 훌쩍 몸을 날려서  소녀가 타고 있는 말 옆으로 다가섰다.

흉기를 손에 들고 덤벼들려는 다른 두 놈의 괴한을,

또 한편 손으로 물리치면서 흥분한 음성으로 소녀에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빨리 몸을 피해라! 말을 달려라! 

내 걱정은 말구……,

나 혼자서 이놈들을 너끈히 해치울 터이니…."


 노인의 말을 듣고도 소녀는 한동안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기만 하는 것이었다.


 "저, 혼자서……어떻게?"


 노인은 그 이상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소녀가 타고  있는 말 엉덩이를 한번 철썩 치니

말은 깜짝 놀라면서 알아차렸다는 듯 비호같이 달려버렸다.


 "으흐흐흥!"


 소녀를 태운  말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홍의화상은 이렇게 괴상한  소리로 으르렁 댔다.

 "그렇게 만만히 달아날 줄 알다니……,

될 법도 하지 않은 짓을…,

앙큼스럽게……,

 내 눈에 띠우지 않았다면 모르되,

어림도 없는 수작이다!"

 혼잣말로 몇 마디를 더  투덜투덜하더니

노인과 대결해서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듯,

선뜻 긴 소매자락을 걷어  올리더니,

마치 자줏빛 구름이 제멋대로 하늘을 날으듯, 

단숨에 번갯불같이 소녀의 말 뒤로 쫓아가는 것이었다.

 몸을 불과 서너번 날렸을 뿐인데,

벌써 화상은 소녀를 완전히 쫓아 섰다.
 화상은 몸이 공중에 떠 있는 채로 땅을 밟지도 않고,

벌컥 바른 팔을  뻗어서 말 위에 타고 있는 소녀를 그대로 움켜잡아 버리자는 기세였다.

 소녀는 물론 질풍같이 말을 몰고 있을 때였지만 그 이상 달아날 수 없게 되었다.

공중에 뜬 채로 손바람을 일으켜서 덤벼드는 화상의  힘이 너무나 거세기 때문이었다.


 위기일발.
 갈퀴처럼 벌려진 화상의 다섯 손가락이 공중에서

소녀의 머릿채를 움켜잡을 듯 잡을 듯 위태로운 찰나.

 소녀는 말 위에  앉은 채,

 몸을 뒤로 돌려서  등에 메고 있는 큰 칼을  선뜻 뽑아들었다.

 화상의 팔이나 손이 몸에  스치기만 하면 당장에 한 칼로 내리쳐 버릴 작정으로
 빙글빙글  말 위에서 몸을 재빠르게  돌리면서 다섯 손가락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노인도 그대로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비호같이 몸을 날려 단숨에  쫓아가서,
이번에는 손바람을 더 한층 힘있게 일으켜 가지고  화상의 등덜미를 향하고 쳐들어갔다.

그러나 대단한 중(和尙)이었다.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다.

화상은 소녀를 수중에 넣지 않고는 결코 그대로 놓아보낼 수 없다는 듯이

몸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채로  땅을 밟을 생각도 없이 이번에는 별안간 몸을

높이 솟구쳐서 슬쩍 피하는 체를 하더니 왼편 손으로 소녀의 큰 칼을 막아내
 바른편 손을 날쌔게 써가지고 무서운  바람을 일으켜서 소녀의 목덜미의
급소인 옥침혈(玉枕穴)을 곧장 습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옥침혈이라는 목덜미의 급소를  습격당한다는 것은 머리채를 움켜잡히는 것 보다
몇 배 더 무서운 일이다.

 이것을 재빠르게 알아차린 노인도 번갯불같이 몸을 공중으로 솟구쳐 가지고
화상의 곁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노인은 또 한번 손바람을 모질게 일으켜 가지고 화상에게  덤벼들었으나,

상은 그것쯤은  아랑곳이 아니라는 듯, 

 전심전력 소녀를 움켜잡는데만  눈이 뒤집힌 것이다.

노인은 초조하고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한편 손의  바람만을 가지고는 화상을  굴복시키기 어렵다는 단정을 내리게 되자,

이번에는 손의  바람을 일시에 합쳐가지고 화상의 등덜미를 향해서  맹렬히 쳐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마침내, 소녀는 홍의화상의 끈덕지게 덤벼다는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안간 정신이 휘청휘청 맥이 탁  풀리는 것 같더니

두 눈을 꽉 감아버리고 말위에서 땅으로 뒹굴어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 순간에.
 홍의화상도 어지간히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있었다.

 홍의화상은 처음부터 소녀를 붙잡겠다는 데만 전심전력을 기울였고,

노인의 힘이란 것을 너무나 소홀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소녀가 땅위에 굴러떨어지는 순간.
 홍의화상은 노인의 손바람이 두  손을 한데 합쳐서 무섭게 습격해 들어오는 것을 깨달았다.

 퍼뜩!
 화상은 몸을  날쌔게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었다. 

몸 안에 간직되어 있는 온갖  기운(眞氣)를 잔등이로 치밀어 올려가지고 맹렬히 쳐들어오는

노인의 손바람을 간신히 막아내기는 했으나, 

전신이 휘청휘청, 발 밑이 어질어질.

 마침내 홍의화상은 노인의 손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이십여간이나 떨어진 벌판길 한옆으로

먼지나  검불이 바람에 날리듯 내동댕이 쳐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홍의화상은 여전히 굴복하는 기색은 없었다.

땅위에  나가 떨어지면서도 역시 그  시커멓고 괴상망측하게 생긴 커다란  두 눈을 부릅뜨고

살기등등한 얼굴로 노인을 멀찌가니 노려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노인은 한번 보기좋게  홍의화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화상이 여전히  굴복하는 빛이 없이 그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편을 노려보고 있는

 꼴을 보자,

새삼스럽게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인즉, 홍의화상은 억지로 버티는 것이었다.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노인이 두  손을 합쳐서 일으킨 바람이  워낙 거세었던지라,

화상은  전신의 힘(內功)이 그  절반은 이미 완전히  소모된데다

부아(腑肺 : 부(장부)폐(허파))에 바람기운이 스쳐서 은연중에  골탕을 먹고

전신의 기맥이 거의 다 빠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화상은 그대로 주저앉기는 싫은 모양이다.

그는 땅위에 나가 떨어져서 꼼짝도 하지 않고 상대방을 노려보는  짧은 동안에,

원기를 다소 회복시켜 가지고 다른 궁리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벌떡.
 홍의화상은 땅위에 또다시 일어섰다.

 쏜살같이 이편으로 다시 덤벼들며, 

이번에는 그 역시 두 손바람을 한데  합쳐서

한줄기 괴상한  비린내가 나는 흉악한 바람을 일으켜 가지고, 

노인에게로 화살이 날아들 듯 습격해오는 것이다.


 '이게 무슨 괴상한 냄새냐?'


 비린내 나는 이상야릇한 바람이 노인의 코에 끼쳤을때

노인은 까닭을 알 수 없어서 잠시 어리둥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순간.
 노인은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이키! 이건 잘못됐구나!


이 악독한  중 녀석이 괴상망측하고 비루한 술법을 쓰는 모양이구나!'

 노인은 몸을 굽혀서 옆으로  빼면서 화상의 손바람을 피해 보려고 했다. 

런데 웬일인지 두 다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고 휘청휘청 해지며

걸음을 자리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다.

 화상의 손바람이 완전히 노인을 압도하고 덤벼들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노인은 필사적이다.
 마음을 한층  더 단단히 먹고,

전신의  축적되어 있는 힘(眞力)을  두손으로 모아 가지고 한손 또 한손 번갈아

바람을 일으켜서 화상과 대항했다.

 그러나 노인의 손바람은 화상에게  다소 뒤떨어졌기 때문에

화상이 쓰는 손법(掌法), 용연선독장(龍涎仙毒掌)에서  터져나오는 용연선독이라는

독한  바람을 쏘여버리고 만 것이다.

 노인은 그래도 꽤 오랜 동안 꿋꿋이 싸웠다.
 두 사람의 네개의 손이  서로 지지 않겠다고 온갖 힘과 재간을 기울여서 일으키는 바람이 

서로 맞부딪쳐서 한동안은  일진일퇴. 그러나 마침내  노인이 지탱하지를 못하게 되었다.

 

갑자기,

 노인의 두 다리가 비칠비칠.
 두 눈을 멍하니 뜬채로


 "어이쿠!"


 하는 단지 한 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입으로 시뻘건 피를 왈칵 토하면서 실비실,

천천히 땅위에 쓰러지고 마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눈이 쌓이고 쌓여서  은백색을 이루고 있는 땅위에 벌컥 쏟아지는
노인의 선혈은 유난히 뚜렷한 흔적을 남기면서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홍의화상도 지칠대로 지쳤다.
 노인은 완전히 쓰러뜨리고  나서야,

그는 비틀비틀 서너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두 눈 앞이 아찔 하는 모양이었다.

 눈 쌓인 땅 위에 그도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씨근벌떡, 가쁜 숨소리를 간신히 진정시키더니

꾸욱 입을 다물고 몸 안의 혈기(內氣)를 세번이나 마디마디로 순환시키고 나서야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도 또다시 몸을 일으켰다.

비칠비칠 하는 걸음걸이였으나,

그래도 제법  성큼성큼 발자국을 크게 떼어놓으면서 한 옆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소녀에게로 달려들었다.

 눈을 꼬옥 감은 채  입을 꽉 다물고 마치 송장처럼 말없이 나둥그러진 소녀의 모습.

 칠흑같은 머리채는  각 일각 쌓이는  눈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며 아리땁기는 하나
 백짓장같이 창백해진  얼굴 위로도 주먹같은 눈송이가 사정없이 뿌려지고 있었다.

 소녀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홍의화상은 기분이 자못 상쾌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앙탈을 하지 않았으면 이 꼬락서니는 되지  않았을 게 아니냐!

이히히히……, 히히……."


 그는 입을 크게 벌려서  한바탕 징글맞게 웃어 젖히더니 두 팔을 선뜻 크게 벌려서

소녀를 안아 일으켜 가지고  자기 말 위에다 싣고 훌쩍 올라 타는 것이었다.


 "자아, 두분 타주님들! 인제  갑시다.!

대단치도 않은 계집아이가 철없이 내 비위를 거슬려  보겠다구……핫! 핫!  핫!

그러나 고것! 확실히 천하일색인 걸!"


 한 옆에서 소녀를 지키고 있던 다른 두 놈의 괴한들에게 이렇게 의기양양하

지껄여 대면서 홍의화상은  채찍을 높이 들어 통쾌하다는 듯 말의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괴한 일행을 태운 세필의  말은 소녀까지 함께 싣고, 휘날리는 눈보라  속을 비호같이 달려

어디론지  종적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황량한 벌판길에  밤이 다가들었다.

 어느덧 눈이 그치고,  구름이 걷히고. 은백색으로 끝없이 널브러진  대지 위에는

달빛이 매섭게 비치고  있었다.

그 위에 다만 혼자서 피를 토하고  죽은 듯이 나둥그러져 있는 노인.

 사방에서는 죽음같은 적막이 쌀쌀한 겨울바람 속에서 소리없이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만에.
 난데없이 요란한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쩔렁쩔렁, 말방울소리가  이 처참한 장면으로 점점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말위에는 명민하고 준수하게 생긴  어떤 청년이 타고 있었다.

 검미(劍眉).
 칼끝같이 치올라간 두 눈썹이 뚜렷하고 날카롭게 들어나는 청년.

 성목(星目).
 별같이 영롱하게 반작이는 맑은 두 눈이 사람의 심장을 궤뚫고 들여다볼 것만 같이

무섭게 생긴 청년.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이  웬만한 일에 좀체로 벌려질 것 같지도 않으며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의지와  기개가 하늘을 무찌르고도 남음이 있을 것만 같
믿음직해 보이는 청년.

 허리에는 한자루 긴 칼을 차고 있었다.
 한 손에는 말채찍을 놓칠세라 힘껏 움켜쥐었고.

 이 처참한 장면으로 말을 달려 급히 대들은 청년은 한동안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허둥지둥 하는 모양이었다.

 그 태도나  얼굴빛이, 이 황량한 벌판길에  싸늘한 겨울밤 달빛을  쏘이면서
은백색으로 널브러진 설경을  유유히 구경하고자 나타난 사람이랄 수는 없었다.

 초조한 빛이 그 준수한 얼굴에서도 감출 길이 없었다.
 말고삐를 사방으로 돌려가며 먼  곳을 바라다보고 가까운 곳을 샅샅이 두리번거려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인데……, 역시 이 부근일 터인데?"


 청년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떤 자신있는 예감이나 추측이  아니라면 확실한 정보를 접하고 무엇을 찾으러

달려든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한동안 말도 한 자리에  머물러 선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말위의 청년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기 주변을  쏘아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앗!"


 청년은 놀라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눈 쌓인 벌판길 한  옆에 시뻘건 피를 토한 채로 송장같이 나둥그러져 있는
노인을 발견한 것이었다.

놀라움보다도 분노가 앞을 섰다.


 "고약한 놈들! 내, 필시 도중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 것만 같은 예감이 불안해서

결딜수 없더라니……,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노인을  이렇게 처참한 지경에……."


 청년은 혼잣말을 중얼대며 말위에서 선뜻 뛰어내렸다.


 "어떤 놈들이냐? 나설테면 몇명이구 당장에 다 나서라!"


 청년은 실성한 사람같이 고함을 질렀다.
 노인을 이렇게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한 놈들이  아직도 이 언저리에 숨어 있지나

 않은가 하는 예감에서, 먼저 그놈들을 찾아내고 싶은  분노를 참을 길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없이 널브러진 이 벌판길 설경속에서  그에게 대답하고 나설 단 하나의 인간도

있을 리 없었다.

 왈칵,

송장같이 나둥그러져  있는 노인의 앞으로 대들었다.

눈  쌓인 땅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노인의 상반신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다시 한번 유심히 들여다본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극도의 흥분과 분노에 청년은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인 모양이다.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노인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흔들면서 입가에 아직도 마르지 않은

핏자국을 손으로 훔쳐준다.


 "이게, 이게 웬일이십니까? 이런 위태로운  봉변을 당하시다니…….

사숙(師叔)님! 아저씨! 아저씨!"


 그러나 청년의 무릎에 안기운 노인의 입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헝년은 안타까움을 참을 길  없이, 급히 몸에 지니고 있던 환약 몇 알을  꺼내서

노인의 입을 벌리고 틀어넣는 것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입 속으로 흘려넣은 환약 기운이 전신에 퍼진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노인은 차차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고,


 "끄응!"


 하고 목구멍 속에서 괴로운 소리를 내더니 숨을 돌리겠다는 듯

청년의 무릎 위에서 얼굴을 좌우 양편으로 약간 흔들어 뵈는 것이었다.

 청년은 기쁨에 어쩔 줄 모르며 다시 한번 노인의 두 어깨를 힘껏 흔들었다.


 "사숙님! 아저씨! 이제야 정신이 드시나요?

눈을 뜨시구 저를… 저를 좀 보세요! 이게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노인은 힘없는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나 초점을 잡히 못하는 흐리멍텅한 눈초리로 멍하니

청년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지 못한다.


 "저를 좀 똑똑히 보세요! 아저씨!"


 청년이 몇번인지 같은 말을 안타깝게 되툴이 하고 난 다음에야 노인은

간신히 입을 열어서 얼버무리며 말했다.


 "자네, 자네…… 자네는 누구란 말인가?"


 "저를 몰라  보시다니…… 저는 저  중악입니다!

중악이요! 아저씨!  정신을 차리시구."


 "뭐! 중악이라구?"


 그제서야 노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되는  긴장한 표정속에서 노인의 두 눈에는 

별안간 힘이 생기는 듯 새삼스럽게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펴다보는 것이었다.


 "중악이라구……, 기특하게도 여기까지……,  큰일났네!

도중에 회양방 놈들과 맞닥뜨려서……."


 "그래서요? 회양방의 어떤 놈인데요?"


 "자네도 아마  알 걸세! 왜, 저어  홍의화상이라구두 하고,

홍의라마(紅衣喇 )라구두 하는 우람부루란 중놈이……,

그리구 또 다른 두 놈하구……."


 "네에? 세놈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는 겁니까?"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우람부루란 놈이 기운으로서는 당할 수 없으니까 독…… 독기(독기)……를  써서……,

그 놈이 비겁하게 잘 쓰는  용연선독이란 게 있지  않은가……,

나는 그 독기를  마시구……이렇게……, 그런데 더 큰일 난 것은 욱형이……

욱형이를 놈들이 말에 싣구 달아나버렸으니……."


 "네에? 그게 무삼  말씀입니까? 욱형이를요? 까닭없이 사람을 납치해 가는 놈들이?"


 청년의 놀라움은 이를 데 없었다.
 세 괴한이 말위에 싣고 어디론지 납치해 가버린 소녀는

바로 숭양표국 감영장의 무남독녀 욱형이었다.

 그리고 악중악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이 노인은 바로 고봉상인 낙이산.
 노인은 간신히 몇 마디  말을 마치고는 또다시 혼수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놈들이 욱형이를? 어디루요?"


 그러나 노인은 다시 흔들어봐도 대답이 없다.

 숭양파의 영도자가 된 후, 오랜 동안을 용감히 지탱해 온 악중악.
 그도 이미 늠름한 대장부요,

강호에 이름을 떨친 유명한 무인(武人)이다.
 회양방의 본거지로 통하는 서주가로(徐州街路) 한 끝을 노려보고 묵묵히 서 있던
 악중악은 노인의 몸을 번쩍  쳐들어 말 위에 싣고 같이 올라탄 다음

쌓인 벌판길을 비호같이 달리는 것이었다.

 다시 얼마를 지난 뒤의 서주가로.
 섣달 대목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해를  맞이하려는 상서로운 징조라는  듯,
백설이 분분히 내렸다. 

그러나 끝없이 뻗어나간 황량한 벌판길은 인적이 희소해지고 쓸쓸하기 이를데 없었다.

 연락부절,

이 가도를  그렇게 빈번하게 내왕하던 상인의 떼들도, 

명절을 맞이하러 제각기 제  고장에 박혀버렸다는 듯,

평소의 번화하던 가로의  모습은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평온히 내리는 눈 속에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때는 중오(中午)를 얼마 앞두지 않은 시각.
 괴상한 날씨였다.

 탐스러운 눈송이가 분분히 내리고 있는 가운데 태양이 별안간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반짝이고 사람을 조롱이나 하듯 보기 어려운 얼굴을 내밀었다.
 한줄기 희미한 따스함과 아늑함을  이 황량하고 쓸슬한 벌판길에 잠시 뿌려 주겠다는 듯이.
 서주가로 한편으로 자리잡고 있는 회안부(淮安府).

 이곳은 저 잔인무도한  향비(鄕匪)들의 도당,

회양방의 본거지에서 과히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고장이었다.

 풍채가 준수하고, 미목이 명민하게 생긴 청년 한사람이 회안부  성안으로

하는 길을 얼굴을 점잖게 쳐들고 태연자약한 걸음걸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옷차림이나  몸가짐, 걸음걸이가 얼른 보면  시인묵객(詩人墨客)같이도 보였다.

휘적휘적 두  팔을 천연스럽게 휘저어가며 천하에 거리낄 것도 없이 근심걱정도 모른다는 듯 

유유히 걸어가고 있는 이 청년은 그야말로 입속으로 흥얼흥얼  시조라도 혼자서 읊고 있는 

한가하고 마음 편한 사람같이만 보였다.

그러나 그의 허리께를 자세히 보았을 때.

 그는 반드시 이렇게 유유자적하고 돌아다니는 시인묵객이라고만 볼 수도 없었다.
 청년은 허리에  큰 칼을 차고 있었다. 

고색창연하게 그윽한 빛깔의  무늬가 얼룩얼룩 박혀 있는 장검을 위엄있게 차고 있었다.

 청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큰길 한옆에 우뚝 서더니,

한편  손을 쳐들어 반짝하고 내달은 햇볕을  가리는 체하면서 멀리 앞을 바라다보았다.

과히  멀지 않은 곳으로  높이 쌓아 올린 회안부의  견고한 성벽이 그림처럼 바라다보였다.


 "흐음! 놈들이 아주 근사한 성안에다 자리를 잡구서……,

온갖 못된 짓을 해가며 선량한 사람들을 못살게 굴구 있다는 거로구나!

성(城)까지 몇릿길이나 아직도 남아 있을까?"


 청년은 혼자서 천천히 중얼거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누구를 찾기라도 하는 듯.
 오가는 행인이라도 있으면, 

몇릿길이나 남아 있는지 그것을 알아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대답해 줄 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또다시 묵묵히 휘적휘적  태연스럽게 걸음을 옮길 뿐이다.

 이 청년이야말로,

파양호 백로주에서 스승과 작별을 하고 호수  바깥 세상으로 나온 노영탄이었다.

노영탄은  이 몇달 동안 강남 일대의 여러 고장을  두루두루 보고 나서 

마침내 회양방의 심장이요,

 본거지가 되어 있는  회안부의 성안으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아볼 결심을 하고

이곳에 다다른 것이다.

노영탄은 몇달동안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고 강남 일대 여러고장을 두루두루
돌아다녀 보기는 했지만,

여태까지 회양방의 인물들과 한사람도  직접 맞닥뜨려 보지는 못했다.

 일부러 그것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스승  남해어부의 다년간의 교훈이 그로 하여금

경거망동을 삼가게 하는 정신의 기틀이 되곤 했다.

 그는 이 몇달동안에 각지를  편력하면서 회양방에 대한 민심의 소재를

살피고 정세를 명확히  판단하고 기회를 포착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온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민심의 호소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사람 꼭같았다.

 저 회양방이 무예계의 패권을 잡고 천하를 호령해 보고 싶다는 야망에서

덕(武德)을 망각하고, 잔인무도하게 인명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고

육을 감행하고 있는 소행은, 천인공노할 바요, 

 백성들의 저주와 분노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은 더 알아볼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뿐이랴.
 몇 해 동안을 두고 벼르기만 하던 회양방의 향비(鄕匪)들이, 

드디어 행동의 실천단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정확한 소식을 알 수도 있었다.

강남  일대에는 이것이 가는 곳마다  화제거리가 되어 있었으며,

선량한 백성들은 이  무서운 소식 앞에 부들부들 떨며, 

베개를 높이하고 밤잠을 편히 자볼 수 없는  불안한 지경에 빠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곧,  회양방은 행동의 실천으로써 그들의 재기와 부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무예계의 변두리에서 다년간 은거하고 칩거해 있던  오합지졸 같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을 

닥치는 대로 매수하고 포섭해 가지고 바로 올해  섣달 그믐께 그들이 이십년 동안이나

폐지 상태에 빠졌던 전체대회의 성전(盛典)을 마련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그 성전을 이름하여 수륙제맹대회(水陸祭盟大會).
 이 대회를 끝낸 다음에는 정식으로 무술계 각파에 대해서 도전을 선포할 것이며
 이로써 그들이 이십여년 전에 홍택호 호반에서 참패했던 원수를 갚아보고 다년간

뼈에 사무쳤던 설욕을 해보겠다는 소식이 어린아이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게 될 판국이었다.

 노영탄은 이 이상  더 망설이거나 참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범을 잡으려면 범의 굴 속으로 만난을 물리치고 깊숙이 들어가 보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를 깨달았다.

 대담해져도 좋을 때가 온 것이었다. 무술의 실력으로 말해도  강남 일대에서
필적할 만한 사람이 과히  많지 않으리라는 것은 스승 남해어부가 자신을

지고 인정한 바이요,

이미 이십세를 넘어선 늠름한 대장부.

 노영탄은 실로 자신만만한 걸음걸이였기 때문에 마치 시인묵객이 유유한 태도로

서주가로에 나타나  다시 회안부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를 멀리갔던지 멀리 바라다  보이던 회상부의 성이

어지간히 눈 앞으로 가까이 다가들고 있었다.

어느틈엔지 눈은 그치고 햇볕이 내려  쬐어 쌓였던 눈을 녹이니

길을 질척질척 발을 떼어 놓기가 매우 어려웠다. 

노영탄은 걸음을 더 한층 느릿느릿, 좌우  양편의 상패(商牌)를 두리번거리며

어디마땅한  음식점에 들어가서 시장기나 면하고 잠시 쉬어 갈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난데 없이 등덜미에서 들려오는 요란스런 말굽소리.

 요란스런 말굽소리는 순식간에 노영탄을 스치고 앞으로 비호같이 달려갔다.


 '이키! 이게 뭐냐?'


 노영탄은 머리끝이 삐쭉해지면서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바라봤다.

있는  힘을 다해서 급히 달려가는 것은 네필의 말이었다.

그중 세 필의 말위에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세명의 장정들이 타고 있으며,

그 세필의  말은 다른 소녀가 타고 있는 한 필의 말을 포위하다시피 둘러싸고

 네 필의 말이 무더기를 지어서 질풍같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네 필의 말들은 눈이 녹아서 질척질척한 길을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진흙과
흙탕물이 말굽 아래서 사방으로 퍼붓듯이 끼얹어졌다.

오가는  행인들이 많았다면 누구나 흙탕물을 홈빡 뒤집어써야만 될 지경으로 말들은

시궁창같은 길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달리는 판이었다.

 노영탄의 의복에는 진흙과 흙탕물이 꼴사납게 끼얹어졌다.
 그러나 노영탄은 그까짓 것이 아랑곳이 아니라는 듯 딴데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난데없이 네 필의 달리는  말 위의 인물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만을 알고 싶은 생각으로 옷에 진흙이 끼얹어지는 것도 모르고 눈을 똑바로

서 말 위의 네  사람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목해 보았다. 

물론, 세 사람의 장정들이 다같이 생면부지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네 필의 말이 노영탄의 몸을 스칠 듯 번갯불같이 지나쳐 나가는 짧은 순간에.

 다른 세 필의 말에게  포위를 당한 듯,

그렇지 않으면 호위병을  거느린 듯,
맨 가운데 말을 타고 달리는 소녀가 그 짧은 순간에도 무슨 까닭인지

머리를 한편으로 재빠르게 돌이키더니,

힐끗! 번갯불이 스쳐지나가듯  노영탄의 얼굴을 쏘아보고야 달아나는 것이었다.

 바늘 끝으로 꼭 찔리듯,

소녀의 시선을 두 눈에 받은  노영탄은 가슴 속까지 무엇이 따끔! 하고 찌르는 것만 같았다.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길 한 옆에 섰다.

얼빠진  사람같이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는 네 필의 말의 뒷모습을

또 한번 바라다보았다.

 자신이 혼자서 중얼대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노영탄은

어떤 놀라움과 기쁨에 넋이 나간 사람만 같았다.


 "으흥? 그 아가씨가……? 

바로 그 아가씨가 감(甘)씨댁 따님이?

저럴수가 있을까?

그 감씨댁 아가씨가  어떻게 이 고장엘 돌아다닐 수 있을까?

또 저렇게 괴상한 놈들과 말을  같이 달리면서……. 아닐게다!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아무래도 그 감씨댁 따님은 아닐 게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비록 오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갔다고는  하지만 오매불망,

자나깨나 눈 앞에 그려보고 가슴속에 담아보던  저 아리따운 소

감욱형의 얼굴 모습을  잘못 보았을 리도 없을 것 같았다.

별같이  반짝이면서도 깊은 산속에 맑게  가라앉아 있는 파아란 호수같이

사람의 마음을 촉촉히 적시어 줄 것만 같은 서글서글하고  시원스럽게 생긴 두 눈동자. 
항시 봄바람이 한들한들 불고 있듯이, 보드랍고 다정스럽고 사랑스러운 얼굴,
그것이 감욱형이 아니라면 또 누구일 것이랴.

 이렇게 단정해 버린 노영탄은 또 다시 목을 길게 뽑아서, 

아직도 시야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네 필의 말의 뒷 모습을 안타깝게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저 편에서도 나를  알아봤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달려 나가는 짧은 순간에도

나를 힐끗 바라다보고 가버린 것이다!'


 노영탄은 또 한번 입속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점점 자기의 판단이 정확하리라는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다행한 일이랴.
 네 필의 말이 아직까지도 과히 멀지 않은 자기의 시야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한곳에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바보처럼 앞만 바라다보고 있던 노영탄은 그제서야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자기 모습을 자기가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헤헤헤…, 내가 정신 나갔었군! 

흙탕물을 홈빡 뒤집어쓴 것도 모르고 여태까지 이꼴을 하고  서 있었으니……,

 이 꼬락서니를 사부님께서 보셨다면  오죽이나 꾸중을 하셨을까! 헤헤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억누를  수 없는 기쁨으로 노영탄의 가슴 속은  설레이기만 하는 것이었다.

 사부님의 꾸지람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오년동안을 두고 안타깝게  그리워하던 아리따운 소녀 감욱형이 바라다뵈는

시야 속에서 말을 타고 머뭇거리며 서 있지 않은가.

 노영탄은 옷에 끼얹어진 흙탕물이  도리어 기분이라도 좋다는 듯

툭툭 털어 버리고 만면에 넘치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또 한번 앞으로 바라다보고

 멀리서 머뭇거리는  네 필의 말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꽤 먼거리기는  했으나,
그 네필의 말은 한길 한 옆으로 있는 어떤 음식점 문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 것이 분명했다.

 노영탄도 마침 아무데나 음식점을  찾아서

시장기나 면하고 다시 길을 걸어볼 생각을 하던 참인지라,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허둥지둥 걸음을 빨리해서
그 음식점을 향하고 단숨에 달려가는 것이었다.

 노영탄이 음식점을 향하고 달려가는  동안에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네 필의 말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말을 타고 있던 사람들은 그 음식점 안으로 들어간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 음식점은 과히 큰  집은 아니었으나 제법 조촐하고 깨끗해 뵈는 주루(酒樓)였다.

 노영탄은 조금도 서슴지 않고 안내해주는 심부름꾼 녀석을 따라서 이층으로 올라섰다.

다짜고짜로 크게 뜬 눈을 두리번거려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과연.
 멀찌가니 떨어진  한편 구석에, 식탁을 둘러싸고 

그 소녀는 다른  세사람의 괴한 같아 뵈는 장정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뿐이랴.
 그 소녀의 날카롭고 매서운 시선은 다시 한번 뚫어지라는 듯 노영탄을 쏘아 보고 있었다.

 노영탄은 가슴속이 두근두근.
 이 순간의 반가움과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가씨! 감씨댁 아가씨! 욱형 아가씨!'

있는 목청을  다해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왈칵 덤벼들어서

무작정 얼싸안아 보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그 소녀와 시선이 번갯불같이 마주치는 찰나.

 선뜩!
 난데없이 비수가 가슴팍을 찌르는  것 같은 싸늘하고 매서운 감각을

노영탄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싸늘하고 매서운 감각은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 부르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실망. 비관. 낙담.

 그렇게 만으로도 형언하기 어려웠다.
 쓰디쓴 맛인지,  달디단 맛인지

그렇지도  않다면 씁쓸하고 시큼한  맛인지,

그 어떤  것 한가지만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지극히 막연한 것  같으면서도,

이상야릇한 그 소녀의 쌀쌀스런 눈초리.

마치 내가 너를 언제 알았더냐?
하는 것 같이 생면부지의 사람을 냉정하게 쏘아보는 것  같은.

그렇게 박정하고 야멸찬  두 줄기 화살같은 시선으로, 

그 소녀는 노영탄을 바라다본  것이다.

 노영탄은 하는 수 없었다.

두 눈을 바보처럼 꿈적꿈적하면서  어색하고 쑥스럽기 짝이 없는 태도로

 한편에 빈 자리를 찾아서 앉아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저 아가씨가 나를 잊어비린 것일까?'


 '얼굴 모습이나, 눈이나 코나 입이나, 분명히 감욱형임에 틀림없는데…어째서?'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저편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오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흘렀으니….'


 '그럴 리가 없다. 필시  무슨 이상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어디 되어가는 꼴이나 보자!'


 노영탄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안타깝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오년동안이나 고심참담, 무술의 도를 닦은 것이냐?'


 '단지 하나, 감욱형이라는 아리따운 아가씨 앞에서 옛날의 창피했던 꼴을 설욕해 뵈고,

 남아대장부의 기백을 한번 자랑해 보자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렇게까지 생각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고,

당장에  달려들어가서 이다지도 사람을 모욕할 수가 있느냐?

고 따져보고 싶은 심정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영탄은 이런 얄궂은 심정을  또 한번 꾸욱 누르면서 

덤덤한 표정을 일부러 지어가지고  저편 식탁쪽을 다시 한번 바라다 보았다. 

이번에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때 소녀는 마침 머리를  돌려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왼편 볼만이 바라다보였다.

 아무리 바라다보아도 감욱형의 반쪽  얼굴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그  소녀의 왼편 볼만이 바라다보였다.

 그 소녀의 왼편 볼을 넋 잃은 사람같이 꽤 오랫동안 뚫어지라고 바라다보고
있던 노영탄은 별안간  자칫했으면 실성한 사람같이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뻔했다.

 자기가 바보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감씨댁 아가씨한테 이렇게 바보처럼 정신이 빠졌었다니? 헤헤헤…헤헤….'


 노영탄은 싱거운 웃음을 가슴속에서 혼자 웃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몰랐다.

 역시 노영탄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것이었다.
 자세히 더 자세히 그 소녀의 왼편 볼을 바라다보자니,

볼  우물 아래로 입가 가까운 곳에 새까맣고 귀여운 사마귀 한개가 또렷하게 박혀  있지 않은가.

리고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소녀 감욱형은 어떤 볼에도 그런 사마귀가 없었다는 것을

노영탄은 오년후인 오늘까지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큰일 날뻔 했구나! 생면부지의 알지 못하는 남의 집 아가씨를 보구

아는 체를 하고 덤벼들 뻔  했으니……,


경솔했구나!

역시 아직도 내 수양이  부족한 탓으로…….'

 노영탄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묵묵히 앉아서 이런 뉘우침  속에,

스승 남해어부를 또 한번 생각하는 것이었다.

 경솔히 칼을 빼들지 말라는 것이 오년동안의 엄격한 교훈이었다.
 세상만사,

사리판단을 신중히 하라는 것이 오년동안의 엄격한 교훈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한걸음만  더 잘못 나갔다면 노영탄은 대수롭지

 않은 일에 스승의 교훈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르고 남에게 창피와 망신을

당할 뻔한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히  그 소녀를 다시 한번 바라다보자니, 

아닌게 아니라 귀 밑이며, 

 목덜미며, 감욱형이와는 다른 점을 몇군데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에 저렇게까지 비슷하고 꼭같은 얼굴이 있을 수 있을까!'


 있을 수 없는  일이 눈 앞에 분명히  나타나 있으면서도,

그 얼굴을  확실히 그가 그리워하는 소녀 감욱형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번 확인하지 않을 수 없고 보니,

노영탄은 자신이 바보였다는 뉘우침속에서도  한편 기가 막혀서 덤덤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소녀의 왼편 볼에 박혀 있는 새까만 사마귀 한 점.


 '그것이 만일 없었다면?'


 필시 노영탄은 소녀 한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세명의 괴상한 장정들까지

자리에 앉아 있는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어떤 봉변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하자면 그 새까만 사마귀 한 점은 정말 고마운 물건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했을 때,

그 한점의 사마귀는 어떤  상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운명이란 것을 가지고

노영탄을 희롱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그  소녀의 얼굴 모습은  노영탄이 오년동안이나 자나깨나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감욱형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비록  몇군데 다른 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소녀의 얼굴에서 왼편볼의 사마귀 한 점만 뽑아 버린다면,

 처음  보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분간해 낼 수 없을 만큼 감욱형이와 꼭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한판에다 도장을 찍듯 한개의 모형으로 빚어낸 듯 너무나 비슷하고 닮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결국 감욱형은 아니다!'


 노영탄은 전신의  맥이 탁 풀렸다.

 털썩  땅위에라도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용기를 내자! 생면부지의 여자 때문에 내가 풀이 죽을 까닭은 없다!'


 꿈에서 깨난 사람같이 어리둥절하고  앉아 있던 노영탄은 아랫배에 힘을 단단히 주면서

정신을 바삭 차리고 일부러 점잖은 음성으로 악을 썼다.


 "야아! 이 집에는 아무도 없느냐?"


 아래층에서 심부름꾼 아이  녀석이 쿵쾅거리며 층층대를 올라오더니

노영탄의 식탁 앞에 공손히 섰다.


 "부르셨나요?"


 "그래, 밥이든 국수든  요기할 것 좀 가져오고, 

 술 안주 몇가지, 그리고 술 한병, 빨리 줘야 한다."


 "아니 젊으신 양반이 대낮부터 술을요?"


 "어린 녀석이 웬 잔소리냐? 가져오라면 가져오는 거지.

난  반주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러는 거다. 빨리!"


 노영탄은 허세를 부리고 있는 자신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일부러 호통을

보는 것이었다.

술과 안주가 날라져 올라 올때까지 노영탄은  턱을 높이 쳐들고 창 밖 먼

산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뭣하는 사람들일까?'


 '소녀는 또 뉘집 아가씨길래 저런 괴상하게 생긴 장정들과?'


 궁금증을 풀어볼 길이 없어서 이 궁리 저궁리 하면서도 되도록이면

그 소녀가 앉아 있는 식탁편을 바라다보지 말고 시선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우선 술 한잔을 따라서 단숨에 쭉 들이켰다.


 "에헴! 이집 술맛이 과히 나쁜 편은 아니로군!"


 노영탄은 수염도 없는 아래턱을 자못 거만스럽게 쓰다듬으며

이렇게 혼잣말을 학 한번 거드름을  부려보는 것이다.

그러나 저편 식탁의 공기가 점점  이상야릇해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술잔을 내려놓고 아래턱을 쓰다듬는 체하면서도 노영탄은 저편 식탁을 흘끔 바라보다가,

당장에 무엇에  찔린 사람같이 머리를 푹 수그리고 안주만  집어 먹는 체 했다.

다시 얼마만에 노영탄에 고개를 쳐들자니.

 저편 식탁의 공기가 자못  험악해지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락부락하고 괴상하게 생긴  세명의 장정들은 유심히 노영탄을 쏘아보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젊은 녀석이냐?

감히 우리들 앞에서  건방지게 거드름을 부리고 까불구 있다니!'


 '괴씸한 놈! 뭣하는 놈이냐? 어디 좀 알아보자!'
 세 명의 장정들의 눈초리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노영탄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어디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듯이 두 눈을

바로 떠서 정면으로 소녀의 얼굴을 뚫어지라는 듯 바라다보았다.

 그랬더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소녀는,

노영탄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는 찰나,
두 볼이 싹 새빨개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머리를 다소곳이 수그려 버렸다.

그 소녀의  태도는,

마치 자기를 정신 잃고 뚫어지라는 듯 바라다보는 명민하고 준수하게 생긴  청년 앞에,

수줍음과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한 귀엽고 사랑스러운 처녀의 본능적인
아름다움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었다.

 노영탄은 도리어 민망한 생각이 들어서 시선을 피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또 이 순간.
 세 명의 괴상하게 생긴  장정 가운데서 한 놈이 두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고
당장에 잡아 먹겠다는 듯, 노영탄을 째려보는 것이었다.

 그 뿐이랴.
 식탁위에 한편 속을 불끈 움켜 쥐는 것이었다.


 '괘씸한 놈! 어째서 남의 처녀를 그렇게 흘금흘금 쳐다보느냐?'


 '어디서 굴러들어온 놈인지? 한대 맞아 볼테냐!'


 이런 것을 말로 할 필요도 없이,

 당장에 일어서서 한대  때려놓고 보자는 그런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이놈이 궁둥이를 들먹들먹 불끈 일어설 듯 일어설 듯 하는  판에,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한 놈이 주먹 쥔 팔을 덥석 움켜잡으로

가로막았다.

또 다른 한놈은 주먹  쥔 놈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그러지 말고 참아 

 두라는 권고를 무언중에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 세놈의 장정들이 얼마마한 힘이나 재간을 가지고 있는 놈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노영탄의 무술의  실력이나 재간을 가지고 넉넉히

세 놈쯤은 한꺼번에 대적하고 싸울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노영탄 자신도 이따위 장정 세놈쯤은 문제가 아니라는 만만한 자신을

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편에서 먼저 싸움을 걸고  덤벼들 수도 없는 판이었다.


 '스승 남해어부는 무엇보다도 경솔한 짓을 삼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노영탄은 고개를 약간 돌이켜서  놈들과 외면을 하는 체하고 음식을

먹어가면서 놈들에게 눈치 채이지 않을 정도로 곁눈질을 해가며

그들의 일거일동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세명의 장정들은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노영탄에게 외면을 하고 돌아앉더니
 머리를  맞대고서 수군수군 무슨 음모라도  하듯이 들리지 않는 말들을
 저희들끼리 열심히 주고 받는 것이었다.


 '흐음! 놈들은 나를  아무 여자나 보기만 하면  침을 흘리는 색광(色狂)으로 아는 모양이지?'


 '어쨌든 수상한 놈들이다!'


 이렇게 생각해  봤으나 잘못은 역시 이편에  있는 것이다.

생면부지의  남의 처녀의 얼굴을  몇 번이고 유심히  바라다봤다는 것은

호색한(好色漢)이라는 오해를 받아도 무엇이라 변명할 도리가 없는 일이다.

 또 저편에서는 노영탄의 이런  태도가 괘씸하다는 뜻을 무언중에 명백히 표시하고 있지 않은가.

 노영탄은 두번 다시 그  편을 바라다보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푸욱 수그리고

닥치는 대로 안주만 부지런히 집어먹고 있었다.

 한참만에.
 저편에서는 네 사람이 모두 식사를 끝낸 모양이었다.

 일시에 다같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다는 듯 총총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기색이었다.


 '뉘댁 아가씨이신지요?'


 이렇게 다만  한마디라도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노영탄은 꾸욱 누르고 참았다.

 그랬다가는 정말 싸움판이 벌어지고야 말 것이 뻔한 노릇이다. 

시치미를 딱 떼고 덤덤히 앉아 있는 노영탄의 곁을 그들이 지나쳐 갔을 때,

세  명의 장정들은 노영탄을 째려보는 눈초리는 잡아먹고 싶다는 것만 같이

서슬이 시퍼런 것이었다.

그중의 한 놈은.


 "흥!"


 하는 콧소리를 똑똑히 들어두라는 듯 노영탄의 귓전에다 던지면서 지나쳐갔다.

그러나 그 새카만  사마귀가 왼편 볼에 박혀 있는 소녀만은 여전히  수줍음을 못참겠다고

발그스레해진 두 볼로 한번 생끗! 웃어 보이며 노영탄을 다시 한번 똑바로 쳐다보면서

지나쳐 가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지 않고는  그대로 두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소녀의 매혹적인 미소.

 무엇을 호소라도 하는 듯  촉촉히 젖었으면서도 새카만 별같이 반짝이는 두 눈동자.


 '이것은 또 무슨 까닭이냐?'


 '무엇 때문에 생면부지의 나를 보고 생끗 웃어 보이는 거냐?'


 점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영탄은 어리둥절했다. 층층대를 내려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다
보면서 술을 한 모금 꿀꺽 삼킬 뿐이었다.

 하루 해가 저물었다.
 동녘 산 너머에서 차가운 겨울 달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노영탄은 주루에서 나온뒤, 서주가로 이곳저곳을  지향없이,

그러나 그 천하태평한 시인묵객같은 걸음걸이로 유유히 돌아다녔다.


 '어디서 또 하룻밤을 지낸다?'


 날이 저물면  나그네의 심정은 허전하고 쓸쓸했다. 

외롭고 쓸쓸할 때면 저 숭양표국의 아리따운  소녀 감욱형의 생각만이 

머릿속과 가슴속을 뻐근하게 할 뿐이었다.


 '언제쯤이나 그 아가씨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랴!'
 '허지만 포악무도한 회양방 놈들의  소굴을 찾아내고,

정체를 포착하고 놈들과 맞닥뜨려보기 전까지는…….'


 이렇게 생각하면 앞길은 막막한 것만 같았다.
 아직도 함산준령이 가로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하룻밤의 잠자리를 찾아야 했다. 

아무데나 눈에 띄는 상패만 보고 쑥  들어서 보기로  했다.

고승객잔(高陞客棧)이라고  하는 여인숙이었다.

두말  없이 조용한 방 한칸을 치워주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서  오락가락하던 눈은 깨끗이 그쳐  버렸으나,

섣달 그믐께  모진 겨울바람이 으르렁대듯이 문풍지를 흔들었다.

 노영탄은 자리에 누웠다.
 일찌감치 잠이나 자볼까 하고 두 눈을 꽉 감아 보였다.

 잠이 오질  않았다.

다시 두 눈을  떠서 시커먼 천정을  쳐다보며 꿈벅꿈벅.
하루 진종일 걸음도 어지간히 걸었건만 도무지 피곤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두 눈이 어둠속에서  말똥말똥, 엎치락뒤치락 자리에서 뒹굴면서

이 생각  저 생각 낮에 겪은 일을  다시 생각해 보자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기도 하고,  바보같은 자신이 뉘우쳐지기만 했다.


 '그것이 정말 감욱형이었다면?'


 몇번이고 어리석은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그 사마귀 한 점만 없었다면…….'


 '아니, 그 세놈의 괴상한 장정들만 없었어도,

누군이며 무엇하는 아가씨인지 그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을…….'


 그 미소.
 그 눈동자.

 정체조차 알 수 없는 

그 소녀의 아리따운 모습은 감욱형이를 만날 듯 만날 듯 하다가

놓쳐버린 것 만큼의 천추의 유감을 청년 노영탄의 가슴 깊숙이 못 박아 주고

어디론지 헤어져 버린 것이다.

 허잘 것 없는 생각.
 바보 같은 생각.

 노영탄은 몇번째인지 다시 두 눈을 꽉 감고 잡념을 물리치기에 힘쓰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상상도 할 수 없는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바람소리가  으르렁대듯이 요란하기는 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니,

난데없이 지붕꼭대기에서  오락가락하는 인기척이었다.

잘못 들었나 해서 숨을  죽이고 몇번인지 귀를 기울여봤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발자국소리였다.


 '이게 뭐냐?


이 깊은 밤중에 지붕 꼭대기에서 오락가락하는 놈이 있다니?'
 노영탄은 머리 끝이 삐쭉! 하고 일어서는 것만 같았다.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저리에서 몸을 일으켜 침상 아래로  내려섰다.

경각을 지체치 않고  침상 위에 풀어 놓았던  보검 금서를 등에 짊어졌다. 

 조심조심 들창 밑으로  걸어가서 그 아래 쭈구리고  앉았다.

어떤 놈이든 간에  창문을 열어 젖히는 기색만 보이면 불문곡직하고

당장에 꼼짝 못하게 낚아채 버리자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인데……. 나를 이 밤중에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


 '내가 이 여인숙에서 오늘밤을 지새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만한 사람이

없을 터인데…….'


 노영탄은 난데없이 지붕꼭대기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하나, 둘, 세다
시피 하면서 여전히 숨을 죽이고 들창문만 노려보고 앉아 있었다.

 과연.
 그 괴상한 발자국 소리는 들창문 밖에 와서 멈추어지는 것이었다.


 '어느 놈이? 무엇 때문에?'


 노영탄은 한 걸음 더  들창 밑으로 찰싹 다가 붙으며 바깥 동정을 살피는데
온갖 정신을 집중시켰다.

 이윽고.
 문풍지 틈으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삭바삭.
 생쥐라도 있어서 발가락으로 갈그적갈그적  문풍지를 긁고 있는 것 같은

 음향이었다.

 노영탄은 이런 이상한 소리가 나는 문풍지 틈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어떤 놈이, 이 아닌 밤중에 내 방 들창문을 살그머니 열고 넘어 들어 오려고?'


 분명히 이런 것이 틀림  없으리라고 단정한 노영탄은 몸을 살그머니 일으켜

들창 한편으로 숨어 버렸다.

 들창문이 열리는 기색만 있으면, 왈칵 어둠 속에서 내달아서  상대방의 정신을 빼놓고

그찰나에 그대로 움켜잡아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또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똑! 똑.

 들창 문틀 위를  누군지 사람이 있어 밖에서  손으로 두드리고 있는 소리가 분명했다.

 노영탄은 그 소리가 나는 문틀 위를 노려보았다.
 그랬더니 아래서 또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바삭바삭.
 문풍지 틈에서 처음과 같은  소리가 나더니 무엇인지 꼬기꼬기 갸름하게 접은 종이 쪽지

하나가 쏘옥 디밀어지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덥썩, 그  디밀어진 종이쪽지를 빼앗듯이 낚아채 가지고  들창으로
비치는 달빛속에 높이 쳐들고 단숨에 눈을 옮겼다

 

    [ 오늘 밤을 조심하시고 경계 하시기를
      뜻밖에 이상한 봉변을 당하시게 될 것이니.]

 

 이렇게 간단한 두 줄기의 글이 지극히 유창한 필치로 적혀  있을 뿐이다.

리고 이 종이쪽지를  들여 보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서명 한 자도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떤 놈의 장난일까?'


 "어떤 놈이냐? 게 섰거라!"


 노영탄은 왼편 손을 약간  쳐들어서 창문 틈을 탁 치면서 이렇게 고함을

르고 들창문을 드르륵 열어 젖혔다.

들창 밖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성큼!
 노영탄은 몸을 뛰쳐서 창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흐음? 괴상한 일인데……, 도깨비의 장난두  아닐 것이구……,


분명히 사람의 발자국 소리였는데….'

 까닭을 알수 없는  일에, 극도로 긴장해지는 찰나,

노영탄의  머릿속은 번갯불같이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필시 지붕꼭대기루…….'


 노영탄은 훌쩍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단숨에 지붕 꼭대기에  우뚝 섰다.

그러나 지붕꼭대기에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퍼뜩!
 한편을 노려보자니 십여간 앞으로  단지 한 줄기 가느다랗게 길다란 시커먼
그림자가 성(城) 북쪽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저것이었구나! 저것을 놓치다니 될 말이냐!'


 노영탄은 전신의 힘을 두 발로 모았다.

 몸을 날리는 절묘한 재간.  이런 때야말로 써야 할 재간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느끼기가 무섭게, 노영탄은 토끼가 뛰듯, 새가 날으듯, 전광석화같이 날쌘 동작으로

그 시커먼 그림자를 쫓아갔다.

 달아나는 놈 하나를  붙잡은 것쯤은,

노영탄으로서는 지극히 간단한  재간에 불과했다.

몸을 허공에 날려 꿈틀거리기 불과 너더댓번.

 노영탄은 벌써 그 시커먼 그림자의 뒤를 바짝 쫓아 대선 것이었다.
 그 시커먼 그림자는 뒤를 쫓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힐끗 머리를 한번 돌이켜 보더니 황급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 시커먼 그림자는 도저히  붙잡히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음인지,

달아나는 동작이 점점 느리어졌다.


 '흐음! 바로 이 놈이 나를 건드려 보려구?'


 '아니, 그렇지 않다면 나의 위급을 구해 주려구 종이 쪽지를 문풍지 틈으루?'


 그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었다.

몸에  지니고 있는 자신만만한  무예로서 사람 하나쯤을 두려워 할  노영탄이 아니었다.

또 한번 몸을 새가 날으듯  가볍게 날려서 휘익!  하고 그 시커먼 그림자의  앞장을 질러서

가로막으며 땅 위에 우뚝 서고 말았다.

 노영탄의 놀라운 재간에  시커먼 그림자도 이미 그  이상 달아나 볼 생각을 단념한 듯

역시 땅 위에 내려서는 것이었다.

 벌판 길.
 겨울날 깊은 밤중.

 맑고 싸늘한 달빛이 땅 위에 마주 대하고 우뚝 서 있는 두 그림자의 얼굴을 또렷이 밝혀 주었다.


 "앗!"


 "앗!"


 얼굴이 서로 마주치는 찰나,
 두 그림자는 꼭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찌 뜻했으랴.
 앞을 질러 잡아 세운  그 시커먼 그림자는 바로 낯에 주루에까지 뒤를 쫓아 갔던 그 소녀였다.

 왼편 볼에 박힌 새카만 사마귀 한 점.
 그것을 달빛  속에서도 또렷이 찾아낼 수  있는 노영탄은,

자기를  해치려는 뜻이 아니요,

위급을 구해 준 은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네개의 눈동자가 서로 바라다볼 뿐,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말을 달려 지나가는 소녀를  발견하고 주루에까지 뒤를 쫓아간 것부터가

상한 인연이었지만,

노영탄이  묵고 있는 여인숙을 알아내가지고 이 깊은  밤중에

그 소녀가 물래 나타났다가  몰래 달아나 버리려는 것은

더욱 알 수 없인연이랄 수 밖에 없었다.

 고맙다 해야 할지, 

놀라웁다 해야 할지,

반갑다 해야할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심정 속에서 노영탄의 가슴속은 마구 두근 거리는 것이었다.

한참 만에야 노영탄은 앞으로 한  걸음 점잖게 나서면서 소녀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유심히 훑어보았다.

위엄있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생은 노영탄이라 하오.

 아가씨께선 뉘시길래?

이 깊은 밤중에  위험을 무릅쓰시구? ……우선 고맙소!

감사를 드리오.

소생의 신변이 위태로움을 미리 알아차리시고 그처럼 경고를 해주셨으니……

하지만 아가씨께선 아까 그 낮의 괴상하게 생긴 세 사람들과 한편이 아니시던가요? 

 핫! 핫! 핫! 대단한 친구들이던데……

사람을 생으로 잡아 삼킬 듯한 무시무시한 눈초리를 하구……."


 달빛 아래 입을 꼭 다문 채 묵묵히 서 있는 그 소녀는, 

낮에 주루에서 하던 것과 꼭같이 두  볼이 활짝 붉어지면서

수줍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다소곳이 수그릴 뿐이었다.


 "말씀을 해 주시오! 뉘신지……?"


 노영탄이 또 한번 마치  명령이나 하듯이 이렇게 위엄있게 재촉을 하자, 

제서야 소녀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녀는 연자심(燕柴心 * 한자를 찾아보니 '柴'자의 음이 '자'가 아니라 '시'또는 '채'더군요.

하지만 책에는 '자'라고 되어 있으니 그냥 계속해서 '자'라고 쓰겠어요) 이라 하옵니다."


 "연…연소저(燕小姐)는 어찌하여 이 심야에 소생이 거처하는 여인숙에까지?"


 까닭을 캐서 추궁하지 않고는 보내지 못하겠다는 듯 노영탄의 음성은 무뚝뚝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소녀는 서슴지 않고 고개를 쳐들었다.

이번에는 아주  대담하게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노……노공자(路公子)께서는 오늘  낮에 우리  일행의 뒤를 밟아서 

주루에 나타나신 것이 분명하옵지요?

소녀는  노공자의 일거일동이 심히 수상하다고 생각했아옵니다.

무삼 까닭이라도 있으시온지? 어는 고장에서 오신 분이온지 알고 싶사와……."


 "하하하……핫! 핫! 핫!"


 노영탄은 자못 통쾌하다는 듯 한바탕 너털웃음을 쳤다.

 이 고장의 괴상하게 생긴 장정들에게 수상한 놈이라는 오해를 받은 것이 당연한 것도 같았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심히 우스꽝스러운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하하……소생을 타향에서 굴러 들어온 수상한 놈이라구?

그래서 그 세사람의 장정들이 소생의  거처까지 미행을 해두었다가 밤이 깊은 다음, 

 해치워 보자는 것이……, 하하하……어쨌든 연소저께 충심으로  감사들 드리오.

그런 기맥을 미리 알아채시구 사전에 연락을 해 주셨으니……."


 "소녀 일행의 뒤를 밟아서 주루에까지 올라 오신 것은 무삼 까닭이신온지?"


 이번에는 그 소녀가 도리어 강경하게 추궁하는 것이었다.


 "흐음! 솔직히 말씀 드리리다.

소생은 여자 친구 한 사람을 찾구 있는 것 뿐이요.

그것이 공교롭게도 소생이 찾고 있는 그 아가씨의  모습이 연소저와 꼭 같아서……,

연소저를 그 아가씨로  잘못 봤기 때문에……,

혹시나 하구……,

이 점은 심히 죄송스럽게 됐소.

용서하시오.

소생은 강남에서 온 사람이오."


 노영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자심이라는

그 소녀는 대뜸 괴상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어떤 자신 있는 질문이라는  듯,

또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배기겠다는 듯,

그 소녀의 눈동자는 싸늘한 겨울밤  달빛 속에서 유난히 또렷해졌으며,

또랑또랑한 음성이 앙칼지게 들리기조차 했다.


 "노공자께서는 숭양파의 문하(門下)시군요? 제자중의 한 분이심이 틀림없군요?"


 이 말을 듣자 노영탄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한 소녀다.
 어째서 이런 말을 묻는 것일까?

 하필 무예계의 파벌문제를 제일 먼저 따지자는 것일까?
 '흐음? 심상한 여자가  아니었구나!

대낮부터 그런 괴상한 장정들과  몰려다
니는 꼴이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반드시 까닭이 있는 아가씨일께다!'

 자기의 판단이 십중팔구까지는  들어맞아 가는데 노영탄은

일종의 흥미조차 느끼면서 한바탕 호탕하게 너털웃음을 쳤다.


 "아하하 핫! 핫! 핫! 무예계의 파벌을 따시지자면 소생두 매우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요.

그러나 소생은 숭양파의 문하생도  아니고 제자도 아니요.

그러고 보면 연소저야 말로 회양방의 사람이시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뚫고 들어가는 노영탄의 이런 말을 듣더니,

그  소녀는 아픈 데를 찔리운 듯 가슴속이 따끔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상하게도 그 소녀의 아리따운  얼굴에는 형언키 어려운

침통한 빛이 서리기 시작하여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이었다.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더니 양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표현이었다.

 남의 심중을 알지도 못하고  그런 말을 물어 주지 말아 달라는

그렇게 안타깝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이윽고  아래턱을 몇번인지 조용히 까닥까닥 해 보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노영탄의 말을 긍정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흐음! 이상한 인연이다! 회양방에도 이런 아가씨가 있다니? 

감욱형이와 한판 찍어낸 것 같이 비슷하게 생긴 아가씨가 회양방의 한 사람이라니…….'


 노영탄은 갈수록 점점 기이해지는 인연 앞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새삼스럽게 그 소녀의 얼굴  모습을 싸늘하고 밝은 달빛 속에서

똑바로 날카롭게 쏘아볼 뿐이었다.

 역시 또렷이 드러나는 소녀의 왼편 볼의 새카만 사마귀 한점.
 그것만을 정신없이 쏘아보고 있던 노영탄이


 "그러면 저어 연소저께선……."


 하고 무슨 말을 더 물어 보려고 했을 때,

 소녀는 당돌하게도 그것을 가로막아버리며  점점 더 놀라운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잠깐만……저어, 노공자께서  찾으신다는 그 아가씨,

소녀와 얼굴 모습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그 여자 친구란 아가씨는 숭양파의 제자로서, 

감씨……감씨댁 아가씨임에  틀림없습죠?

노공자께선 숭양파의  문하생도 제자도 아니시라면서

무삼 연유로 그 감씨댁 아가씨를 아시나요?"


 연자심이라는 소녀의 당돌하기 이를데 없는 질문을 받은 노영탄의

놀라움은 점점 더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만이 비슷한 것이 아니라 감욱형이를 이 소녀는 알기까지 하다니?'
 그러나 노영탄은 놀라움과 꼭같은 반가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뜸 전후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맞았소! 바로 그 감씨댁 아가씨, 감욱형이라고 하는……."


 뜻밖에도 그 소녀는 가벼운 코웃음을 치면서 그 맑은 눈동자를 유난히

또렷이 뜨고 노영탄을 쏘아보며 다음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기 곤란한 소녀의 표정이었다.

 노영탄은 상대방의 그런 태도도  아랑곳이 아니라는 듯 연거푸 초조한 듯이 물었다.


 "바로 그 감씨댁 아가씨요. 연소저께서도 그 아가씨를 잘 아시오?"


 "몰라요!"


 매정스럽게 잡아떼는 소녀의 음성은 쌀쌀하게 이를데 없었다.


 "모르신다니? 여태까지 하신 말씀은 무엇이요? 

연소저는 사람을 공연히 조롱하시는군!"


 "조롱을요? 천만에……호호호……."


 간드러지게 웃는 것 같으면서도 소녀의 웃음소리속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떤 시기나 질투에 가가운 처녀만이 드러낼 수 있는 짓궂은 감정이

숨어 있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노영탄은 그런 것도 모른 척 하고…….


 "솔직히 말씀해 주시오. 아시는 대로……."


 "그다지도 조급하시나오? 당장에 만나보구 싶으신가요? 호호호……."


 여태까지와는 다른 이상한 눈초리로 노영탄의 눈동자에서

무엇을 더듬어 내고 싶다는 듯 유심히 쳐다볼 뿐이었다.


 "너무 심하시오! 연소저는……, 어찌 된 인연이든 이 심야에서 서로 알게 된 이상,

 아시는 바를 숨김없이 이야기해 주신들 어떻겠소?"


 애원 비슷한 노영탄의 말이었다.
 이토록 간절한 노영탄의 말을  듣더니 연자심은 정색을 하고 노영탄을 쳐다보며

그 새카만 눈동자를 몇 번인지 깜짝깜짝 했다.

 그만하면 노영탄이라는 청년과  감욱형이라는 아가씨와의 관계가 보통이

니라는 것을 넉넉히 알아차렸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네, 소녀는 감씨댁 아가씨를 잘 아옵니다……, 감욱형이……."


 "어떻게 아시오?"


 "그야 소녀에게 물으실 바가 아닌가 하옵니다.

회양방의 한 사람으로서 어찌 대적(對敵)하는 위치에 있는

숭양파 제자 가운데 어떤 아가씨가 있다는 것쯤을 모르오리까?"


 "흐음? 그러면 지금 그 감씨댁 아가씨가 어디 있는지를 아시오?"


 "있는 곳을 알기는 하옵니다."


 "어디요?"


 노영탄은 반색을 하며 물었다.


 "……."


 그러나 연자심은 입을 꼭 다문 채로 다음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좀 알려 주시오! 소생의 위급을 미리 구해주신 이상, 한번 더 좋은 일을 하신들."


 "이미, 때는 늦었사옵니다!"


 소녀는 지극히 냉정하고 짤막하게 한마디로 대답할 뿐.


 "때가 늦었다니, 그건 무슨 뜻이요?"


 노영탄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의미에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서

이렇게 급히 반문했다.


 "……."


 연자심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차가운 겨울밤 달빛  아래 은백색으로 빛나는 눈쌓인  땅 위를 몇 걸음인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서,

노영탄의 앞에서 두어간이나 멀찌가니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눈 쌓인 벌판길 한 옆으로 고목나무 한 그루가 절구통 같은 체구를

우뚝 뻗치고 서 있었다.

 소녀는 뒷짐을 짚은채로 그 고목나무에 기대 서며 얼굴을 반듯이 쳐들었다.
 노영탄을 보자는 것이 아니었다.

 허공에 높이 걸린 달을 멀리 바라보며 한숨 짓는 것이었다.


 '달만이 소녀의 심정을 알아주리이다.'


 ……그렇게 무언의 호소를 하고 있는 것 같이도 보였다.

마음  속의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안타까움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괴로움, 그  안타까움이란 오늘 낮에 흙탕물을 뿌리면서 말을  달리던 때

힐끗 노영탄의 준수한 모습을 한번 유심히  바라다보던 때부터,

이미 가슴 속 깊이 못박힌 것인지도 몰랐다.

 노영탄은 조급해졌다.
 단숨에 소녀의 앞으로 달려가서 그 앞에 우뚝  섰다.

협박과도 같고, 명령과도 같은 강경한 어조였다.


 "무슨 까닭이요? 알려주오! 감욱형에게 무삼 변고라도 생겼다는 것이요?"


 "이제 사실을 알려드린다 해도 때는  이미 늦었사오며,

또 소녀는 그것을 알려드릴 수도 없사옵니다!"


 연자심은 달만 쳐다보면서 쌀쌀스럽게 대답했다.


 "어찌 하여? 알려줄 수 없다 함은 무삼 까닭이요?"


 연자심은 얼굴을 똑바로 돌리고 정색을 하더니

더 한층 앙칼진 음성으로 아 붙이듯이 말했다.


 "노공자께선 회양방에  한빙선자(寒氷仙子)라는 여자가 있다는 소문도 못들으셨나요?

 소녀가 바루 그 한빙선자라고 부르는 연자심……."


 "에에? 그대가 바루?"


 노영탄은 이렇게 깜짝 놀라며 소녀를 새삼스럽게 뚫어져라 들여다볼  뿐,

동안은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신의  정체를 밝혀버린 그 소녀도  입을 꼭 다물고 매서운 눈초리로 노영탄을

쏘아볼 뿐이었다.

 이윽고.
 노영탄은 긴장했던 얼굴빛을 능치면서 애원이나 하듯 성심성의껏 사정을

직히 고백했다.


 "연소저의 쟁쟁하신 명성은 소생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소.

어찌된 인연 이든간에 한번만 더 소생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해 주시오.

다름 아니라  감씨댁 아가씨는 나의  구명(求命)의 은인이요.

나는 어느때 어디서나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그  아가씨를 위해서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맹세하고 살아온 사람이요.

이제 그 아가씨가 있는 곳을 알려주신다면
연소저의  은혜 또한 명심불망하고 반드시 보답해드릴 날이 있을까 하오!"


 이런 말을 듣고도 연자심은  함참 동안이나 고개를 푸욱 수그리고

혼자만의 깊은 생각에 젖더니 이윽고 지극히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사정까지 있으시다 하오면……사실대로 알려드리오리다.

감씨댁 그 아가씨는 사흘전에 홍의라마 우람부루에게 납치당해 갔사옵니다."


 "뭐요? 감씨댁 아가씨가 납치를 당해갔다니, 그게 정말이요?

우람부루란 누구요?"


 "회양방의 유명한 중(和尙)도 모르나요?"


 "그래서 지금은 어디 가 있다는 거요? 연소저, 그것을 아르켜 주시오!"


 "서주(徐州) 가로상에서 납치를 당해가지고 지금은  회양방 방주( 州)인

모사왕 본거지 금사보(金獅堡)안에  감금당해 있사옵니다.

이 회안성에서  다시 성 밖으로 서남편 삼십리쯤 되는 곳에……,

그러나  그 홍의라마란 중녀석은 천하에 보기드문 호색한이니,

감씨댁 아가씨도 이미 그  녀석의 독수에 걸리지나 않았사올지…

그것이 같은  여자의 처지로서  가엾게 생각되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연자심은 새삼스럽게 노영탄의 얼굴빛을 살펴보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지금 금사보안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들과  무술계의 고명지사들이 운집해 있사옵니다.

노공자께서  단신으로 그곳에 가신다  하온들 어찌 그  아가씨를 구출해 내실 수가 있으시리까?"


 "아하하……핫! 핫!"


 노영탄은 한바탕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그런 걱정까지는……, 연소저! 하여튼 감사하오.

이 인정과 은혜, 후일에 반드시  보답할 것을 맹세하오.

금사보  안이 제아무리 위험한 곳이라  해도, 소생은 한번 들어가서 맞닥뜨려 봐야겠소!"


 말을 마치자 노영탄은 두 손을 한데 모으고서 공손하고 정중하게 허리 굽혀 절하더니

땅 위에서 펄쩍 뛰는가 하는 순간,

벌써 날으는 새 같이  성(城) 서쪽을 향해서 훨훨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깊은 겨울밤.
 눈쌓인 허허 벌판길에 혼자 남은 소녀.

 회양방에서 명성이 쟁쟁하다는 한빙선자 연자심.  넋을 잃은 사람같이,

멍청히 사라져 가는 노영탄의  뒷 그림자를 한참이나 바라다보고 서 있던 소녀는
이윽고 땅이 꺼지도록 긴  한숨을 쉴 뿐이다.

무엇을 잡을 듯 하다가  놓쳐버 허전하고 쓸쓸한 심정 속에서도

일찌기 구경해 본 일이 없는 노영탄의 놀라운 재간 앞에 감탄하여 마지 않는 것이었다.


 '저만치 놀라운 재간을 가진 젊은이라면,

반드시 고명한 무예계 인물의 문하생임에 틀림없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점점 자신의 심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젊은이의 준수하게 생긴 얼굴을 처음으로 대했을 때,

나는 왜 가슴을 두근거리며 얼굴을 붉힌 것이었을까?'

 기쁘다 해야할지, 후회가  난다 해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두렵다고 해야할지,

 그 어떤 것이라고 쉽사리 표현할 수 없는 연자심의 짓궂은 심정.


 '아차! 나는 이미 방( )의 규칙을 범한 년이다!'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회양방의 중대한 비밀을 누설해 버렸으니……."


 자신의 행동을 그제서야 뉘우쳐  보기도 하지만

그것쯤은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닐 것만 같았다.

 얼음같이 싸늘한 여자라고 해서 불리워진 한빙선자.
 일찌기 뜨거워본 기억이 없는 이 소녀의 가슴 속도

노영탄의 준수한 얼굴과 용감한 태도를 생각할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활활 타오르는 것이었다.

 소녀는 실성한 사람과 같이  밤이 깊도록 고목나무에

기대서서 차디찬  달만 바라다 보고 있었다.


 다음은 정면돌파 (正面突破)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