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5장 정면돌파 (正面突破)

오늘의 쉼터 2013. 12. 6. 12:07

정협지(情俠誌) 제 1권

제 5장 정면돌파 (正面突破)

 

호랑이 굴에 들다

 

 금사보.
 향비의 도당 회양방의 소굴이요,

심장이요, 

아성인 넓은 진지(陣地)를 이렇게 불렀다.

 회안부 성에서 삼십리쯤  떨어져 있는 곳,

고우호(高郵湖)와 홍택호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회양방의  방주( 主) 금모사왕이란 자가, 

오래전부터 차지하고 앉아서 회양  넓은 땅을 호령하고 있는 견고한 진지로서, 

금모사왕의 왕국 같은 특수지역이었다.

 울던 아이도, 말을 들으면 울음을 뚝 그친다는 무서운 향비의 금모사왕.
 그가 자리잡고 있는 이  금사보라는 고장은 바깥 사람들에게는

마치 용(龍)이 버티고 앉아 있는 물속같이,

범이 잠자고 있는  굴속같이 무시무시하고 끔찍끔찍한 곳이었다.

 이 며칠 동안.
 금사보 안팎의 공기는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수 많은  졸도들이 무장을 갖추고,

경계가  삼엄하던 옛 모습이 씻은 듯이 없어졌다. 

음침하고 흉흉하고 무섭기  이를데 없던 얼마 전까지의  공기가 홱 뒤집혀진 듯, 

명랑하고 분주한 기색이 이 넒은 보루(堡壘)를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보루 정면 큰 문 앞에는 오색이 찬란한 깃발들이 의기양양하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으며

무수한  거마(車馬)들이 연락부절,

드나드는 사람들도  제가끔 무슨 일엔지  바빠서 눈코 뜰사이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활기를  띠울때가 왔기 때문이다.

신바람 나는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틀후면,

회양방은 그들의 전체 대회인 수륙제맹대회를  거행하기로 작정되어 있다.

 두령인 금모사왕  오빈기는 과거의 명성과  위신을 회복하고 회양방을 다시
발흥시키기 위해서 이 몇 해 동안 침식을 잊어버리다시피 여념이 없었다.

 한편 팔이 부러지고,

한편 눈이 멀어버린 이십년 전의 참패와 원한.
 그것을 설욕해 보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 편이 되어서  싸워준다는 사람이면 된 놈이건  안된 놈이건

가리지 않고 포섭해 들였다.

닥치는 대로 교제를  하고, 결탁을 하고,

강호 무예계에서 굵직굵직한 인물들을 모조리 수하에 넣었다.

 특히,

다년간 무예계 변두리에 존재도 없이 파묻혀서 칩거하고  있던 과거의
늙은 두목을 몇 사람까지 

그의 끈덕진 권유에 못이겨 이번 전체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금사보는 굉장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높이 솟은 고루거각이 하늘을 찌를 듯,

그것을  방어하는 보루 사면으로는 땅을 깊이 파서 호성하(護城河)라는

깊은 강까지 돌려져 있는 것이다.

 높고 견고한 성벽같이  돌담으로 튼튼하게 쌓아올린 보루에는,

또다시  열댓 발자국의 거리밖에 띄어 놓지 않고 주보(周堡)라는

석굴(石窟)이 총총히 박혀 있다.

 그 석굴 속에는 보초가  숨어 있어서 낮이나 밤이나 파수를 보고

외래의 침입자를 날카롭게 경계하고 있었다.

 보루 안은, 한길이  종횡으로 뚫렸으며,

마치 읍(邑)이나 마을같이  없는 것이 없고,

점포, 음식점, 술집, 주택, 가는 곳마다  넓고 시원스런 공지(空地).
그야말로 회양방이 건설한 왕국이었다.

 넓은 보루(堡壘)안  정중앙에는 또 한군데  특별히 쌓아올린 얕으막한

성보(城堡)가 있다.

 이곳에 바로 금모사왕과 회양방의 중진급 인물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그 성과 같이 쌓아올린 얕으막한 보루안에는 한 채의 고루거각이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 곳으로 드나드는 널찍한 대문 앞에  금자(金字)로 새긴 큼직한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편액에 금빛도 찬란하게 새겨진 글자는 회양빈관이라는 넉자.
 이 건물 내부의 장치는 호화찬란하기 이를데 없고,

벽이며, 기둥이며, 그 속에 배치된 도구들이며, 

눈부시는 색채가 사람의 머리를 어지럽게 할  지경이다.

 수 많은 장정들이 들락날락  하며 심부름과 시중 들기에 눈코 뜰 사이가 없

특히 가관인 것은 스물네명의 젊고 어여쁜 소녀들이 여기 와 있는 내빈들

접대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이 두겹의 보루로 둘러싸인 고루거각, 회양빈관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귀빈이란 그리 많지는 못했다.

 이미 도착된 귀빈이 불과 너더댓 사람.
 그 중에는 저 흉측스런 화상, 감욱형을 서주가로에서 납치해  버린

홍의라마 우람부루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초저녁때였다.
 회양빈관의 넓다란 대청에는 경사스런 잔치를 상징하는 붉은 촛불이 낮이나
다름없이 밝혀져 있었고, 

가지각색 등불들이 궁궐의 찬란한 밤처럼 대청  언저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대청 한복한에는 마악,  굉장한 잔칫상이 벌어진 판이었다.

 두령인 금모사왕  오빈기는 정중앙 제일 높직한  상좌에 자리 잡고  앉아서,
입이 찢어질 듯 만면에 웃음이 가득 차 가지고 귀빈 세사람을 대접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아! 선배 여러분! 일제히 잔을 드십시다!"
 경사스런 전체대회를 얼마 앞두지 않은 기쁨에, 터져나갈 것만  같은 흥분을
참지 못하는 금모사왕은 술잔을 높이 쳐들며 기고만장한 음성으로 술을 권했다.

 "와……하하하……핫! 실로 통쾌한 밤이로다!"
 "금모사왕의 재기를 위하여, 회양방의 부흥을 위하여……."
 "밤이 새도록 통음을 해도 좋을 역사적인 밤이로다!"

 금모사왕의 장단을 맞추어  제각기 통쾌하게 지껄여대는 세 명의  귀빈들도,
다 같이 높직한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일제히 술잔을 높이 들어 자못 호탕
한 기분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상좌, 바른편  수위(首位)에 앉아 있는 귀빈은  빼빼 마르고 길다란  얼굴의
늙은이.

 땅바닥을 쓸 것같은 긴  수염을 느렸고,

오만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어  뵈는
이 늙은이는 동정호(洞庭湖)에 살고 있다는 운몽노인(雲夢老人)이었다.

 왼편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중의 하나는 얼굴빛이 푸르뎅뎅한데
다가 거창한 체구를 가진 사나이.

 풀어서 넘긴  장발이 어깨 위로 치렁치렁  하며,

전신을 상어가죽으로  만든 괴상망측한 의복으로 감고 있는 이 사나이는

바로 동해기경객(東海騎鯨客)이라고 일컫는 자다.

 또 다른 한  사나이인 바로 저 홍의라마  우람부루도 자못 통쾌한 기분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호탕하게 웃어 젖히고.
 의기양양하게 지껄여대고.
 두령 금모사왕과 세 명의 귀빈들은 통쾌하게 마시고 미칠 듯이 떠들어댔다.

 천하가 온통 그들의 것인 양,

도도한 취흥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는 판이었다.

 무예계의 정통파인 숭양파를  이미 굴복이라도 시켜버렸다는 듯한 고담준론
 그칠 줄 몰랐다.

 이때.
 금모사왕이 큼직한 술잔을 한 손에 든 채로 두령의 체통과 위신을 괴시하는
듯 자못 점잖고 정중한 체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 사람의 귀빈들에게 걸찍하게  갈아앉은 음성으로 진중하게 하는 말이 있었다.

 "에헤, 우리가 존경하여 마지 않는 무예계의 선배님 세분께서 불원천리 하시
 원로에 이처럼 왕림하사와  이번 대회를 빛내 주시게 되었으니

무상의 영광인가 하옵니다.

이제 후배로서 또 방주의 입장에서 세  분 선배님들을 다소나마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여흥 한가지를 보여드릴 것이오니 그저  심심풀이 오락으로 아시옵고 웃으시며

구경해 주시면 다행인가 하옵니다!"

 말을 마치더니 금모사왕은 손뼉을 한번 위엄 있게 쳤다.
 대령하고 있었다는 듯, 대청 뒤에서는 금시에 각가지 악기들이  연주하는

겨운 음악소리가  신바람나게 울려 나왔다. 

그리고는 음악소리의 바로  뒤를 이어서 열  두명의 천사같이 귀엽고 아름다운  소녀들이

몸에는 구름이 땅에 쓸 듯 운사(雲紗)로 지은 가벼운 의상을 휘감고,

긴  소맷자락을 서로 스쳐가며 차례 차례 노래에 맞추어서 춤을 추며,

부드러운  바람같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황홀하기 비길 데 없는 광경이다.
 세 사람의 귀빈들은 입이  찢어지도록 능글맞고 음침맞은 웃음을 금치 못하
 도원경을  소요하는 듯, ㄴ을 잃고  소녀들의 춤과 노래에 도취해서  앉아 있었다.

 두 눈을 두리번거리며 연방 열 두명의 아리따운 소녀들을 하나하나

핥아 먹기라도 하듯 차례 차례 쏘아보고 있는 것이다.

 천하에 유명한 호색한 우람부루.
 그 열두명 아리따운 소녀들  가운데서 어떤 것이고 하나 제일 맘에 드는

녀를 골라내서 마음껏 주물러 터뜨려 보고 싶은 듯, 

탐욕에 불붙는 무시무시한 눈초리가 유난히 번쩍거렸다.

 노래와 춤이 바야흐로 가경에 들어갔다.
 방의 두령도, 세 사람의 귀빈들도 술이 점점  거나하게 취해 올랐고,

몽롱해지는 시야  앞에 아른거리는 열 두명의  아리따운 소녀들의 얇다란 운사속에
파묻혀서 물결치는 육체는 극도로 선정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호색한 우람부루도 이  자리에서만은 귀빈의 체통을 차리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당장에 좌석에서 뛰어내려 어떤 소녀고 덥석  움켜 잡지 못하는 우람부루는,
 이 순간에 그 보다 더 묘한 생각이 퍼뜩 머리속에 떠오른 것이다.

 홍의라마 우람부루는 그 괴상하고 부리부리하게 생긴 두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이상야릇하게 굴리더니  무슨 신기한 묘안이라도 생각했다는 듯

음침 맞게 너털 웃음을 쳤다.

 "으흐흐……흐흐흣!"
 그리고는 두령 금모사왕의 옆구리를 넌지시 꾹 찌르는 것이다. 

음성을 구수하게 낮추어  가지고 금모사왕의 환심을 사자는  듯 징글징글한

아첨의 빛을 드러내며 조용조용히 하는 말이 있었다.

 "내 말 좀 들어보소! 방주님.

 왜 저어 며칠전에 내가 납치해 가지고 온 계집아이가 있지 않았소?"

 우람부루는 문뜩 감욱형이를 생각한 것이었다.
 열 두명 소녀들의 얇다란  운사속에 파묻혀서 선정적으로 춤추고 있는

육체의 파동이 우람부루로  하여금 며칠전에 서주가로에서 납치해다가

감금해 둔 감욱형이에 대한 야욕을 뭉클하고 치밀어 오르게 한 것이었다.

 열 두명의 춤추는 소녀들이 문제가 아니다.
 그 어린 소녀와 비교해 봐도 제일 뛰어날 만한 어여쁜  얼굴과,

 탐스러운 육체를 가진 처녀 감욱형.

 도도한 취흥속에서 아름다운 처녀의  풍만한 육체를 건드려 본다는 것은

마나 황홀한 일이냐.

 홍희화상 우람부루는 침을 한번 꿀꺽하고 삼키면서 이번에는

금모사왕의 한편 소매자락을  지긋이 잡아당긴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식욕을  참기 어렵다는 엉큼스런 표현이다.

 "왜, 저 있지  않소? 성이 감(甘)이라고…….

감금시켜 둔  어여쁜 계집아이 말이요. 헤헤……."

 "예! 예! 있지요……저 감 뭣이라든가 하는 계집아이 말씀이시오니까?"
 눈치빠른 금모사왕이 홍의화상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못 알아들었을 리 건만,

한번 시치미를 뚝 따고 이렇게 반문해 본다.

 "으흥! 바로 그 계집아이……,

고년이  아무리 앙탈을 해보지만 그동안 며칠을 푹 쉬었으니까

지금쯤은 몸두 좋아졌을 것이구……이히히히히!

내가 잠깐 건너가서 무슨 꼴을 하고 있나 들여다보고 싶단 말이요!

히히히……."

 홍의화상은 회양방에서 무시할 수 없는 두목급의 선배다.
 두령되는 금모사왕도 그의 뜻을 거역하지는 못한다.

 그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기분을 맞추어 줘야  하는 것이다.
재빠르게 눈치챈 금모사왕은  그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껄껄걸  호탕하게 웃어 젖히면서 선선히 응낙하는 것이었다.

 "어허허허헛……헛……,

그야 선생님 처분대로 알아차려 하옵실 일이지……,
제가 친히 모시구 가옵지는 못하오나 좋으실 대로……

헤헤헤……헤헤……."

 말을 마치더니 금모사왕은 한편  밖에 뜨지 못하는 외눈알을 몇번인지

끔쩍끔쩍, 당장에 벽력같이 호령을 한다.

 "야! 뒤에 아무도 없느냐!"
 대청 뒤에서 대령하고 있던 장정 한 놈이 선ㄸ 뛰어 나왔다.

 "너, 우리 선배님을 모시고 며칠전에 감금해 둔 계집아이의 처소까지

안내해 드리고 오너라!"

 "에, 분부하시는 대로……."
 홍의화상은 자못 도도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감욱형이를 한번 희롱해 보고자
앞장 서서 나가는  장정의 뒤를 따라,

거만스럽고 능글맞은 걸음걸이로  회색이 만면해서 대청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회양빈관의 대청에는 밤이 깊어가기 시작했다.
 홍의화상이 슬쩍 자리에서 빠져 나간 뒤에도 열 두명 아리따운 소녀들의

과 노래는 여전히 계속되었고,

나머지 세 사람 사이에  술잔이 흥겨웁게 오가고 했다.

 홍의화상이 밖으로 나간지 얼마 안되어서 이 황홀한 대청의 광경 속으로

 천천히 들어서는 청년이 한 사람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배신  잘하는 간신의 인상이요,

두 눈동자에는 탐욕과  호색의 음침한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는 청년.

 그는 바로 두령 금모사왕의 외아들인 팔조독경(八爪毒鯨) 오백평(伍百平)이다.

외아들 오백평이 불과 열살이 되었을  때,

금모사왕은 백방으로 주선해서 아들을 해남인마(海南人魔)라고 하는

무예계의 명인에게 문하생으로 들여보냈다.

 그리하여 오백평은 스승을 따라서 멀리 해남도(海南島) 경애산(瓊崖山)으로 들어가

십년동안이나 무술의  도를 닦고 다시 하산(下山)하여 부친의 곁으로 돌아온 후,

 부자가 서로 협력해 가며 못된 짓과 나쁜 짓은 도맡아  놓고 회양 일대를

주름을 잡고 있는 판이다.

 그 위인이 감때가 세고  거칠게 생긴데다가 심정 또한 아비에 못지 않게 활하고 악독해서,

금모사왕이 진심으로 애지중지 하는 외아들이었다.

 본래 오백평은 한빙선자 연자심(燕柴心)과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났다.
 그러나 연자심은 어렸을 때부터  심술 사납고 짓궂은 오백평을 싫어하고 워했다.

더군다나 십년이나 되는 오랜 동안을  서로 떨어져 있었으니,

연자심의 감정은 더욱 냉담해  졌고,

어렸을 적에 간직했던 한 오락지 관심조차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도 십년만에 산에서 내려와 아버지 곁으로 돌아온 팔조독경 오백평은
연자심의 감정과는  전혀 반대로 이 쳐녀에게  쏠리는 열렬한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어여쁘게 자라난 연자심의 모습과, 한창 피어나는 처녀의 풍만한  몸매를

년 후에 대해보는 오백평은,

하늘에 사는 선녀를  처음 대하는 듯,

가슴 속에 타오르는 충동과 욕망의 불길을 어찌해야 좋을 지 몰랐다.

 이제는 무술의 도도 남못지  않게 닦았고,

또 당당히 회양방 방주의  귀중한 외아들이다.

 올데 갈데 없이 아버지에게 위탁해서 자라난  계집아이 연자심이 쯤은 항상 무엇이냐.

 그까짓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를 마음대로 손에 넣지 못하다니.

이런  배짱으로 날을 보내고  있는 오백평이다.

그러나 연자심의 마음속을 누가  감히 흔들수 있을 것이랴.

 싸늘하기 서릿발과 같고 차갑기 어름장같은 연자심은

오백평을 한번 곁눈질 해서 거들떠보려  들지도 않았으며,

두령 금모사왕이 연자심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또한 이렇게 앙칼지고 매섭고 

영리한 점에 있고 보니, 

오백평도 연자심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이런 까닭으로,

오백평은 항시 비밀리에 사람을 따르게 해서 연자심의 일거 일동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버지 금모사왕을 쉴새없이 졸라대서 연자심을 한시 바
수중에 넣어 보고자 애쓰는 아들이었다.

 아들 오백평의 이런 심정을 잘 알고 있는 금모사왕도 연자심으로 하여금

루 바삐 짝을 지어 주고자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연자심을 타일러도 보고 달래도 보지만 끝끝내 부자의 뜻에 응하겠다는

의사표시가 없는 것이다.

 금모사왕도 외아들과 연자심의 이런  미묘한 관계 때문에 내심 여간 불쾌한 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한편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계집아이의 태도도  변해지겠거니

이렇게 혼자만의 기대를  걸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청 황홀한 잔치터로 들어산 팔조독경 오백평은 열 두 소녀의 춤이나 노래에도
 흥미가 없다는 듯,

쓸쓸한 표정을 하고 금모사왕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와서 우뚝 서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못 심각한 듯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
 "무슨 일인데?"

 도도한 취흥속에 나타난 아들의 모습이 자못 대견스럽다는 듯, 

그렇게 악독하고 횡포한 금모사왕도 아들  앞에는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대뜸

이렇게 까닭을 물었다.

 "제가 방금 정보를 입수했사온데 아  저, 자심이란 년이 두목 세사람과

성안을 지나가는 도중에 어떤 형적이 수상한 젊은 녀석을 하나 만났었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그게 어찌 됐다는 거냐?"
 "두목 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자심이란 년이 이 젊은 녀석을 어떤 주루에서 만났을 때,

그  표정이며 몸가짐이 수상쩍었다 하오며,  또 그뿐이 아니오라,
밤중에 두목들이 이 젊은 녀석을 처치해 버리려고 몰래 그 놈의 처소로 가서 엿보더니,

벌써 이 녀석은 어디론지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옵니다."

 "흐음? 그런 일이……, 그래서?"
 "이런 사실은 반드시  우리 편의 기맥을 알아치리고 사전에 미리 이 녀석과 내통한 자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사오며,

이 의심을 받을 만한 인물은  자심이란 년밖에 없사옵니다. 

또 자심이란 년은 금사보로 돌아온 다음에도  이런 일에 대하여는 

저에게도 일언반사 말하지도  않고 속이려 하고  있사오니…,

저의 생각으로는  여기엔 필시 괴상한  연유가 있을 것이오며……, 

그리하와 이미 장정들을 파견해서 자심이란 년이 거처하고 있는

방을 사면에서 감시하도록 수배하였사옵니다.

원컨데 아버님께서 친히 한번 문책해 보시옵기를…."

 "흐음? 그런 일이 있었다구? 그게 사실이란 말이냐?"
 "네."

 오백평은 자신있는 대답을  하면서 아버지의 처분만 바란다는 듯, 

금모사왕의 안색만 살피고 서 있다.

 "흐음! 그게 사실이라면 괘씸한 계집아이로다!"
 금모사왕은 이렇게 큰소리를  치면서 아버지로서 두령으로서

위신을 과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심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금모사왕은 한동안 입을 꽉  다물고 그 무서운 눈초리로 앞만 바라다 보면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는 모양이었다.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연자심이란 년이 그런 앙큼스런 짓을?'
 '이년히 감히 방( )외의 인물들과 내통을 하다니?'

 '내 손을 친히 키워 놓은 계집아이가? 외부의 인물들과 일체  접촉이 없어야만 될 그년이,

이런 괘씸한 짓을 하다니?'

 금모사왕의 외눈동자가  점점 커다래지면서  이상한 광채를 발했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연자심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배반 행동이요, 

방규( 規)에도 어긋나는 소행이기 때문이다.

 '허지만 저 계집아이가 제  아비의 임종 때 남긴 유언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도리어 불리한 일인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방규( 規)를  어겼다는 단순한 사실보다, 

금모사왕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는 복잡한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 그년이……."
 금모사왕은 한번 코웃음을 치고 나더니

아들 팔조독경에게 점잖은 음성으로 분부하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선 귀하신  손님들이 자리를 같이 하시고 술들을 마시고  계신 터이니까,

내가 이 자리를 뜰 수는 없다. 우선  네가 먼저 건너가서 그 년을 잘 감시하거라!

이따가 밤중에라도 내 친히 건너가서 힐문해 볼 작정이니……."

 "네, 잘 알았사옵니다!"
 팔조독경은 아버지 금모사왕의 명령을 받고 두말없이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단숨에 한빙선자 연자심이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 가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니, 여간 의기양양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흥! 이번에야 말로  제년도 내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겠지!

제년이 꼼짝 달싹도 할 수 없게 된 이번 기회에, 내가 한번 톡톡이 조져대면

제년인들 또 무슨 앙탈을 할 수 있을 것이랴!'

 팔조독경을 위해선 이번 일이 절호의 기회만 같이 생각됐다.
 오랜동안 품고 있던 야망이, 이번 기회에는 꼭  이루어질 것만 같은 기쁨에,
팔조독경은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한빙선자 연자심은 울적하고 허전한 심정으로 혼자서 자기 방안에 있었다.
 난데없이 팔조독경이 방안으로 달려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불문곡직하고 불쑥 방안으로 들어서는 팔조독경이, 만면에  교활하고 간사스

웃음을 피우고 연자심의 앞으로 다가서며 다짜고짜로 꺼내는 말이 있었다.

 "자심아! 너 회안성 안에  갔다가 무슨 괴상한 일이 있었지?

어째서 그것을 나한테는 숨기고 말하지 않는 거냐?"

 말을 마친 팔조독경의 날카로운 눈초리는 사람을 잡아 삼키고 싶다는 듯

자심의 얼굴을 쏘아보면서, 입으로는 쉴새없이 냉소를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흐흐흐……흐흐……, 누가 모를 줄 알구서……흐흐흐……."
 한빙선자도 이런 말을 듣고 보니, 내심 깜짝  놀라지 않을 수없었다.

그러나 얼굴빛을 추호도 변함이  없이 평소와 다름없는 태연하고 쌀썰스런 음성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오빠가 말하는 괴상한 일이란  뭣을 말하는 것인지 난 잘 모르겠어! 

난 지금 고단하구 졸려서……, 내일 다시 이야기 해두 되잖아?"

 쑥스럽게 된 것은 팔조독경이다.
 모욕을 당한 것 같은 분함이 노기로 변해가지고 벌컥 언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너, 건방지게 굴지 말아!"
 "내가 뭣을 건방지게?"
 한빙선자의 음성도 얼음장 같이 싸늘했다.

 "주제넘게, 건방지게 굴지 말란 말야! 제 분수도 모르고서 난 벌써 방주님께 다 보고 했어.

그래서 모든 일을  방규에 따라서 처벌하기루, 이제라두……순순히 내 말을  잘 듣는다면

너를 위해서  좋도록 다시 말씀드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는 네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하는 셈이 될 뿐이야! 알았어?"

 협박적인 팔조독경의 말투였다. 

그러나 한빙선자는 눈 한번 깜짝하지도  않는다.

평소에도 그런 얼굴이, 더 한층 찬 서리가 감돌 듯 차가울 뿐이다.
 "……."

 매섭게 꼭 다문 입을  열 필요도 없다는 듯, 네 따위 협박쯤은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그렇게 한빙선자의 태도는 서슬이 시퍼런 칼날과 같았다.

 팔조독경은 몇 번인지 음침맞은 냉소를 터뜨리기는 했으나,

워낙  앙칼진 한빙선자의 태도 앞에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그대로 방문 밖으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밤이 점점 깊어갔다.
 창 밖에는 눈송이가 또 부실부실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도 일고 있었다.

그 바람소리는 갈수록 더 요란해지면서  쓸슬한 연자심의 방,

들창문을 매정스럽게 후려갈기곤 했다.

 팔조독경이 방에서 나가버린 뒤에 더 한층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문을 밖에서 잠가버린 것이다.
 그나 그뿐이랴.

이층, 아래층, 좌우사방으로 보초들을 배치시켜 놓고 연자심이 방안에서 밖으로는

한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도록 감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설사 이 방에서 도망을  칠수 있다 하더라도, 경비가 삼엄하기 철통같은 

금사보를 뚫고 달아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또  금사보에서 탈출을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연자심의 갈 수 있는 곳이 어디랴.

 평생을 외롭고 쓸슬하게 자라난 자신의 신세나 경력을 생각했을  때,

연자심은 가슴속에 용솟음쳐 오르는 고독하고 처령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는 것이었다.

이럴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 앞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잊기 어려운 사람의

그림자가 있다.

 그는 그렇게 깨끗하고, 점잖고, 총명하게  생겼고,

그는 그렇게 의협심이 강하고 또 그렇게 용감하고.

노영탄.
 그러나 그가 생명을 바쳐가며  구출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아니요,

전혀  다른 소녀.

 연자심은 감씨댁 아가씨라는 소녀의 입장도  생각해보았다.

비록, 이 소녀는 불행하게도 홍의화상에게 납치를  당하여 부자유한 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생명을 내걸고 구출해 내려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관심을 가지고 신변을 보호해 주려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 자신은?'
 '누가 나를 구해 줄  사람이 있단 말이냐?

누가 내게 관심을 가지고  보호해 줄 사람이 있단 말이냐?'

 '나는 감욱형이보다도 더 불행한 여자가 아니냐?'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동안에 겨울밤이 자꾸만 깊어갔다. 

바람소리도 더 한층 요란해졌다.

 촛불도 점점 점점 졸아들고, 방안이 어둠침침해 졌다.
 겨울밤이 점점  깊어가건만, 한빙선자 연자심은  잠이 올리 없었다. 

외롭고 쓸쓸한 신세가 감시까지  당하고 보니,

방안에는 일종 형언키 어려운  음산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는 것 같아서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히기조차 하는 연자심이었다.

 이때.
 별안간.
 방문 문풍이 틈으로 한  줄기 가느다랗고 하이얀 연기가 물이 흘러들어오듯
새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한줄기 하이얀  연기는 천천히 사방으로 퍼지고 퍼트러지고 하더

방안을 괴상한 냄새 속으로 휩쓸어 버리는 것이었다. 

 연자심은 이 연기사 새어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벌써  재빠르게 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을 코로 맡고, 급히 손수건을 꺼내서

입과 코를  막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고 황망한 가운데서도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독기(毒氣).
 그들이 강호 넓은 땅에서 힘을 대항할 수 없을 때면 잔인무도하게도 함부로 터뜨려서

사람을 괴롭게 구는 이따위 너절하고 비루한 수단을, 마침내  자기에게까지 쓰고,

 덤벼들리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덜커덕!
 요란스런 쇳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밖에서 열렸다.

누군지 한 놈이 불쑥  들어서는 것이었다.

 바로 팔조독경이었다.

그렇게 만만히 단념하고 물러서버릴 그가 아니었다.
 연자심은 다황한 가운데 분노를 참을 길 없어, 선뜻 상위에  풀어 놓았던 장검을 손에 잡았다.

앞으로 썩 내달으며 팔조독경의 가슴팍을  정면으로  찌르며 덤벼들었다.

그러나 팔조독경 오백평은 냉소할 뿐.

 "흐흐흐……흐흐흣!"
 그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태연히 서 있더니,

 "으드득!"
 하는 소리를 두 서너번 냈다.

 축골법(縮骨法)을 써서 허리뼈를 두어자나 움츠러뜨리고, 다시  모가지와 머리를 자라 

 대가리 같이 뭉츠러뜨려서 땅을  살살 기듯이 한빙선자의 칼끝을 피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한번 크게  꿈틀거려서 한빙선자의 가슴팍으로 대드는  척 하더니

왼편 손을  훌쩍 쳐들어 바람을 일으켜 가지고 한빙선자의 바른편 팔을 향해서

쳐들어 가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바른편 손가락을 급히 눌렀다.

 바른편 손가락을 일으켜  세워 가지고 마치 칼로 무엇을  내리치듯이

한빙선자의 바른편 팔의 급소인 곡지혈(曲池穴)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한빙선자는 오백평이 이다지도 몸을  날쌔게 쓸 줄은 몰랐다.

거기다 또  축골법까지 쓸줄아니  칼을 도로 걷어들여서 다른  방향으로

다른 수법으로 써 보고자 해도 이미 그럴  만한 겨를리 없게 되었다.

바른편 팔이 시큰시큰  해지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장검은 뎅그렁! 하고 땅 위에 떨어져 버렸다.

 한빙선자는 당황해졌다.

재빠르게 두 발로 발끝을 가볍게 놀려서 몸을 옆으로 뽑아가지고 후퇴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백평이  이다지도 악착스러운 줄은 몰랐다.

조금도  뒤로 물러설 기색이 없이 점점 더 앞으로만  육박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한빙선자 연자심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면  오백평은 한걸음 앞으로 육박해 가면서

눈이 뒤집힌 사람같이 함부로 중얼대는 것이었다.

 "야! 자심아!  그다지도 화를 내고 일을  크게 벌릴 것까지는 없잖아! 

 자아 이리 와, 이리와서 나하고 한번 친해 보잔 말이다!"

 "친해 보자는 건 무슨 말야? 그대는 나를 어쩌겠다는 거야?"

 연자심은 이미 바른편 팔의 급소인 곡지혈을 습격당하여 장검까지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으니, 뒷걸음칠을  치면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호락호락  넘어가진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눈초리와 싸늘한 음성으로 항거하는 것이었다.                              

 "아니꼬운 년! 날더라 그대라구?"
 "그대가 귀에 거슬린다면  너라구 해도 좋아!

 이미 나한테 오빠라구  불리워 질 자격조차 없어졌으니깐……." 

 "너! 자격? 헤헤헤……헤헤……. 

이제는 아무리 앙탈을 부려봤댔자 소용이 없단 말야! 독안에 든  쥐가 됐으니까…….

어디 달아날 재간이 있으면  달아나 보란 말이다!"

 "이렇게까지 악독하게 나를 괴롭히는 까닭이 뭐냔 말야?"
 "내 말을 한번 듣겠다구만 하면……."

 "못 듣겠어! 죽어두 못듣겠어!"
 "흥! 못 들어?  너 이년 회양가로(淮揚街路)에서 좋은  녀석을 만났었다구?
얼굴이 새빨개 가지구 추파를 막 보냈다면서?

그가 어디서 굴러 들어온 자식이냔 말이다? 나하테 숨기는 까닭이 뭐냐?"

 "그런 건 난 몰라! 길거리에서 눈에 띈 사람들을 일일이 보고하란 말인가?"
 "요런 앙큼스런 년! 그 녀석에게 사전에 연락을 해주어서  밤중에

피신을 시킨 것도 네 년이었지? 바른 대루 말해!"

 "그런 것두 난 몰라!  사내 대장부라면 그따위 비루한 소리는 사지 말구 

리 내 방에서 나가 달란 말야!"
 "헤헤헤…헤헤… 그렇게 만만히…, 네 년의  명령대루 내가 나갈  줄 아니?"

 팔조독경 오백평은 이 이상  말이 필요없다는 듯,

서너덧 걸음을 또  육박해 들어갔다.

 넓은 면적이긴 했으나 연자심이 그 이상 뒷걸음질을  쳐서 피할 곳은 없었다.

 한편 구석 벽에다  몸을 찰싹 기대고 그 이상  후퇴할 만한 여지가 없게 된 연자심을 보자

오백평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내심  기쁨을 금치 못하며 바른편 손을

꼿꼿이 쳐들어서 손바람을 일으키더니,

연자심의 머리와 가슴 두 군데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왼편 손을 써서 연자심의 급소인 견정혈(肩井穴)을 습격하여 두 군데 급소를
동시에 눌러가지고 굴복시켜 보자는 것이다.

 과연.
 연자심은 오백평의 손바람이  습격해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그 이상  몸을 피할 곳이 없게 되었다.

 간신히 두 손을 동시에 내밀어서 오백평의 손힘에 항거해 보기는 하지만

자의 힘을 당해내기란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오백평이 왼편 손마저 허공으로  흔들며 공격해 들어왔을 때,

마침내 그  힘을 피할 길이 없어, 두 어깨가 시큰시큰 해지며 전신의 맥이 탁  풀리고

수족이 다같이 힘을 쓸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오백평은 노기와 흥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팔을 뻗어  연자심의 탐스럽고 야들야들한 뺨을 제멋대로 쓰다음는 것이었다.

 "야아, 자심아! 내말을 들으면 어떻단 말이냐! 너두 좋구……,

뭣 때문에 이다지 앙탈을 하구……,

네  신상에 해롭단 말야! 왜 고생을 사서 하려구! 

히히……요렇게 어여쁜 얼굴을  해가지구,

왜 마음씨가 그다지  쌀살스러워……으흐흐흐……."

 팔조독경 오백평의 음성은 야수와같은 충동을 감추지 못하고

음침맞고 징글징글하게 떨리기까지 하였다. 

두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이, 고깃덩어리를 집어 삼키기 직전의  굶주린

짐승의 그것처럼 유난히 무섭고 포악한 광채를 발했다.

 "이거, 저리 비키지 못해? 어디다 대구 이따위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연자심도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항거하는 발악이었다.

있는 목청을  다해서 이렇게 악을 쓰며 뺨을 쓰다듬고 있는

오백평의 손길을 간신히 뿌리쳐 버렸다.

 "흥! 요게 그래두 양탈이야!  그러지 말구 지금이라두 내 말을 순순히  들어두란 말이다!

내, 아버님께 잘 여쭈어서 무사하게 수습을  해주겠다는 데두…앙탈을 하면

네가 갈곳이 어드메냔 말야? 자아! 그렇게 매정스럽게 굴지 말구…."

 오백평은 한걸음을 뒤로 주춤하고 물러서는 척 하더니,

한숨을  돌려 가지고 여전히 앞으로 다가서서

그  흥분한 표정이 당장에 연자심을 부등켜 안고 주러 터뜨려 버리고 싶다는 듯,

포악한 광채를 발하는  눈동자를 미친 사람처럼 두리번 거리며 덤벼드는 것이었다.

 "맘대루 해봐! 나를  죽이든지, 잡아먹든지……, 비겁한 자식! 

힘을 가지구 사람을 억지루 굴복시키려구……."

 연자심은 말할 힘도 없는  듯, 전신의 맥이 풀려서 그 이상 항거해 볼  힘이 없이

땅 위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 여쁜 얼굴이 온통  불이 붙어 타오르는 듯, 새빨갛게 충혈이  돼 가지고,
두 눈을 크게 똑바로 뜨고 하이얀 이빨을 바드득 하고 갈면서 저주와 분노가 터져나는 말을

또 한번 던졌다.

 "이런 사람 같지 않은 것! 귀신……같은  자식이……, 갈아마셔두 시원치 않은 자식!"

 "흥! 무슨  소릴 해두 좋단 말야!  나는 이대루 물러갈  수는 없으니깐……,
네 멋대로 해봐!"

 "좋아! 맘대루 해봐! 맘대루……!"
 연자심은 마지막 각오를 했다는 듯,

 억센 사나이의 손바람을 여러군데 맞은 이 가엷은 소녀는 사실, 

그 이상 말 할 만한 힘도 없게 되었다.

 "야아, 자심아! 그러지 말구……자아, 내 말을 한번만 들어 두렴!

아아 어서 이렇게 나한테 한번 안기워서……."

 달래고 눙치는 척, 오백평은 왈칵 덤벼들더니

연자심의 한편  팔을 움켜잡고 앞으로 낚아채는 것이었다.

 소녀의 탐스러운 육체를 가슴에  품고 으스려뜨려 보고 싶다는 불덩어리 같

야욕이 용솟음쳐 오르는 모양이다.

 바로 이 아슬아슬한 찰나.
 별안간 어디선지 난데없이  '쉬익!'하는 음향과 함께 한줄기  시커먼 광선이
화살처럼 꼿꼿이 팔조독경 오백평의 인후(咽喉)를 찌르를 것이었다.

 오백평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을 움츠려뜨려 가지고 선뜻  뒤로 물러섰다.

 어떤 흉기가 날아 들어와서 자기의 인후를 습격하는 줄만  알았다. 재빠르게
왼편 손을 휘둘러서 인후를 찌르는 무엇인가를 탁! 쳐서 땅위에 뿌리쳐 버렸다.

그래놓고 자세히 내려다보니 그것은 단지 한장의 대나무 잎사위였다.

 한장의 대나무  잎사귀가 시커먼 광선을  화살처럼 끌고 날아들어서 인후를 습격한다.

그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팔조독경 오백평은 가슴이 선뜩했다. 당황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연자심의 처소 밖으로 누군지  알 수 없으나 어떤 인물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 분명했고,

또 이런 놀라운 재간이란 무술이 오묘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
이 몸 안에 축적된 내공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무서운 장난이란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제딴에는 무술의 연마가 남  못지 않다고 뽐내오던 오백평도,
한 장 대나무 잎사귀의 장난 앞에 사태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번갯불같은 궁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높직한 들창문을 박차고 훌쩍  뛰어 넘어서 밖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럴만한 겨를이 없었다.

 우지직!
 덜커덕!
 쾅!

 요란스런 음향이 한데 합쳐져서 들려오는 찰나, 들창 문짝이  밖에서 들이치는 힘에

부서지고 떨어져서 금시에 땅바닥에 나둥그러져 버리지 않는가.

 그와 같은 순간에.
 들창 밖으로부터 비호같이  날아드는 청년이 있었다.

몸차림이 가뜬하고  가벼운 품이 대단히  야무져 보이는 청년,

날카로운 칼끝같이 치올라간  시커먼 눈썹. 맑고 영롱하고 광태를 발하는 매서운 눈동자.

 그는 손에 금빛이 찬란하게 번쩍이는 한자루 장검을 들었으며, 

들창을 훌쩍 날아들면서 몸이 채 땅위에 내려서기도 전에 허공에 뜬 채로

이미 칼을 날쌔게 휘두르며 장유관일(長幼貫日)의  검법을 써서 오백평의 가슴을 향해서

면으로 찌르고 대드는 것이다.

 오백평은 눈이 부시고 어질어질해져서 어쩔줄을 몰랐다.
 그 청년의 수중에 잡고 있는 장검은 눈부신 광채를 발산하며 날카롭기 이를데 없으니

결코 평범한 칼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오백평도 선뜻 알아차렸다.

그것을 깨달은 오백평은 감히 가까이 대들지 못하고, 몸을  날쌔게 움직여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좌우  양편의 손바람을 동시에 써서 막아내 보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청년의 칼을 쓰는 품은 실로 변화무쌍.
 빠르기가 전광석화와  같고, 황홀하기 용이 나는  듯, 봉이 춤을  추고 있는 듯,

단숨에 돌파해 버리고, 곧장 앙가슴을 향해서 육박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청년의 칼끝에서 발산되는 광채를  한번 정면으로 쏘인 오백평은

그 싸늘하고 차가운 기운에 가슴  속에 부들부들 떨렸다.

경각을 지체치 않고 몸을  움츠러뜨리면서 옆으로 피한 다음 

이 처소의 출입구인 큰 문 앞까지 후퇴해서 허리께를 쭉 훑어서 확 뿌리는 것이었다.

 그가 독특한 무기로 삼고  있는 팔조독경이라는 독기를 써서 상대방을 넘어뜨리자는 것이다.

 난데없이 뛰어든 청년에게, 

팔조독경 오백평이 무서운 독기를 뿌려서  마지막 대항을 꾀하는 순간.

 금사보 안에는 별안간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연자심의 거처 사방으로 아래  윗층으로 사람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웅성 웅성, 와글와글.

 뗑! 뗑! 뗑! 뗑!
 요란스럽게 종이 울렸다.

 둥! 둥! 둥! 둥!
 북이 울렸다.

 징소리도 한데 섞여서 귀를  찌를 듯이 겨울밤 얼어붙은 것 같은 하늘로 퍼져 올라갔다.

 보루 안에서 경보(警報)를 알리는 것이다.

외래의 침입자가 있어  보루 안에 몰래 잠입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북소리와 종소리였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요란스런 음향에 그 청년은 다소 당황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담부쌍하게도 몸을 꼿꼿이  날리더니

이미 땅위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연자심의 머리 맡으로 뛰어가서

왼편 팔로 끼어 안아 일으켜 가지고 등 위에 떼메고 몸을 돌려 들창을 넘어서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어떤 놈이냐? 감히 남의 집 아가씨를 떼메고  달아나려는 놈이?

꼼짝 말고 거기 서 있지 못할까?"

 팔조독경 오백평은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한편  팔을 맹렬히 흔들고 휘젓고 하더니

그 무서운 팔조독경이란 독기를 마치 시커먼 구름장을 퍼뜨리는 듯

청년의 머리로부터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다.

 청년의 목적하는  바는, 단지 사람을 구출해  내자는데 있고

즐겨서  싸움을 하자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오백평이 팔조독경의 독기를 퍼뜨리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자,

바른편 팔을 날쌔게 놀려서 장검을 다시 휘두르며 걸음을 일각도 멈추지 않고

장 들창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 청년은 팔조독경이란 독기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본래, 이  팔조독경이란 것은  오백평의 스승인 해남인마(海南人魔)란  자가
해남도 경애(瓊崖) 바다 밑에서 캐낸 것으로서, 천년이나  묵은 독경(毒鯨)을
절여서 만든 것이었다.

 억세고 질기기가  비길 데 없는 독기로서, 

제 아무리 예리한  보도(寶刀)나 보검(寶劍)도 이 독기의 줄을 끊기 어려우며,

또 어떤  종류의 무기든지 한번 이 무서운 독기를 쏘이기만  하면,

독기 속에 파묻힌 눈에 보이지 않는  여덟 갈구리가 자동적으로 칭칭 

감아버리고 마는 까닭에 좀체로 이것을 끊어버리고 헤어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청년은 그제서야 대경실색 했다.

몸을 다시 돌이켜 끝까지  싸워보려 했으나 이미 장검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가 왼편 팔로는 한빙선자  연자심을 떼메고 있으니

꼼짝달싹도 할 수없게 되는 판이었다.

 청년은 일변 초조해지고, 일변 분함을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요란스런 음향은  시시각각으로 청년의  귓전을 어지럽게 했다. 

보루전체가 온통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이 아우성을 치는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이층에서 이렇게 오랜동안 싸움판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와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이 긴장된 찰나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눈독을 들여온 연자심을 이대로 빼앗기느냐?  등에 떼메고 이곳에서 탈출할 수가 있느냐?

 긴장된 순간에 처하고 서로 노려보고 있는 오백평과 그 청년.
 

별안간.

 그들 두 사람은  동시에 꼭같이 눈앞에 번쩍해지는 바람에  어질어질해졌고,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해졌다.

 어느틈에 어디로 나타났는지  그들 두사람은 똑똑히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한 사나이가 하늘에서 떨어진 듯 땅에서 솟아난 듯

그들의 앞으로 날아 들어온 것이 아닌가.

 그것은 복면(覆面)을 하고 있는 괴상한 사나이였다.

복면의 사나이는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우뚝 서기가 무섭기 바른편 손을 쳐들어

오백평을 향해서 지극히 가볍게  손바람을 휘두르고, 왼편손으로는  먼저 들어온

청년의  장검을 슬쩍슬쩍 만져서  거기 서리어 있는 팔조독경  독기를 문질러 버리는 것이었다.

 먼저 나타난 청년이 보검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게 된 것을 보고, 

내심 기뻐하던 오백평은 난데없이 날아든 이 복면의 사나이가 가볍게 손바람을

두르는 것을 발견하고 애당초부터 경멸해버렸다.

 '이깐 놈이 뭣이길래 감히 내게다 손바람을 써 보겠다구!'
 그러나 복면의 사나이가 왼손을  가볍게 몇번인지 문질러서

먼저 나타난 청년의 장검을 휘감고 있는 팔조독경 독기를 손쉽게 씻어버리는 것을 보자,

제서야 오백평은 간담이 써늘해지는 것이었다.

 '괴상한 놈인데?'
 '이놈의 정체가 뭣이길래?'
 '독기를 끊어버리는 무서운 재간을 지니고 있다니?'

 오백평이 퍼뜩!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에 그 복면의 사나이가 일으키
는 억센 손바람은 또다시 회오리바람 같은 기세를 올리더니, 

빠르고 또 모질게 오백평의 앞가슴을 겨누고 정면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형세가 이쯤 되고 보니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던 오백평도

가슴 속에 찬바람이 이는 듯 오싹하고  몸을 떨었다.

독기를 쓰던 왼편손을 재빠르게 일단  앞으로 꾸부렸다가,

다시 홱하고 급히 뻗어서 휘저으며 독한  손바람을 곧장 복면한 사나이에게로

집중 습격을 해 보는 것이다.

하도 창졸간에 당하는 일이라,
오백평은 먼저 나타난  청년에게 정신을 쓸 만한 겨를조차 없게 된  판이다.

 "너는 뭣 하는 놈이냐? 어째서 감이 이곳엘 뛰어들어서?"
 오백평은 있는 힘을 다해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복면한  사나이는 그따위 말은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듯,

좀체로 입을 벌리지 않는 것이었다.

 "비겁한 놈! 누구냐? 정체를 밝히고 덤벼 들어라!"
 오백평은 또 한번 벽력같이 악을 썼다.

 복면한 사나이는 여전히 묵묵무답.
 시커먼 헝겁으로 온통 가린  얼굴에는 두 눈동자만이 날카롭고 무서운 광채를 발하면서,

오백평을 노려보고 육박해 들어갈 뿐이다.

 먼저 나타난 청년은 연자심을  등에 떼멘 채로 너무나 뜻밖인

이 광경 앞에 넋을 잃은 사마 같이  어리둥절 해서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복면의 사나이를 바라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복면의 사나이는 청년 편으로 힐끗 곁눈빌을 하며 벌컥 악을 썼다.
 "빨리 달아나지 못하구 뭘  우물쭈물 하오?

 서편을 향하고 달아나야 한다는 것을 잊어 버리지 말구……빨리, 빨리 달아나시오!"

 한빙선자 연자심을 등에 떼메고 서 있는 그 청년은 점점 더 어리둥절 해지는 모양이었다.

 '데체 이 괴상한 사나이는 누구길래?'
 위태로운 장면이긴 하지만 누구라는 것만이라도 알고서 달아나고 싶다는
그런 눈치로 멍하니 서서 복면한 사나이의 아래 위를 훑어 보고 있었다.

 복면한 사나이는  청년의 마음속을 꿰뚫고 들여다  보기라도 한다는 듯, 

다시 벌컥 언성을 높이었다.

 "어서, 일각을 지체치 말구  몸을 피하라니까 뭣을 망설이구 있는 거요?

 내가 누구냐구? 그런 것을 지금 따질 때가 아니요! 빨리, 빨리……,

부디 서쪽으로 달아나야 한다는 내 부탁을 명심하시구……."

 이렇게 두번씩이나 다져가며 청년에게 주의를 시키는 복면의 사나이는 말을 마치자,

어느 틈엔지  한편 손으로 오백평의 손바람을 막아가며 대결하고  서 있더니,

별안간 호탕한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리는 것이었다.

 "아하하하……핫! 핫! 발칙한 놈!  덤벼들면 나를 어쩌겠다는 거냐?

비겁하게 그 따위 독기(毒氣)를 쓰려구! 하하하……하하……."

 

다음 순간.
 복면한 사나이는 선뜻 뒤로 한걸음 물러서더니 우뚝 그 자리에 섰다.

 오백평을 쏘아보며 불쑥 쳐들어서 내미는 손바닥이 맞닥뜨리는 순간.
 벌써 그것만으로도 오백평은  전신이 흐늘흐늘 해지고 얼굴빛이 핼쑥해지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청년은 그제야 자못  안심할 수 있다는 듯, 

뒤를 다시 돌아다 볼 생각도 없이  연자심을 등에 떼멘 채 훌쩍 들창을

단숨에 뛰어넘어 밖으로 나가 버리고 말았다.

 무사히 몸을 뛰쳐나온 청년이 사방을 살펴보자니

아래층으로 무수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와글와글 이리저리 갈팡질팡 몰리고

흐트러지곤  하는 판이었다.
보루 안의  동쪽으로 가깝게 자리잡고  있는 건물들을 바라다보자니, 

후두둑 후두둑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화광이 충천해 있는 판이다.

 불이 난 것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복면한 사나이가 서쪽으로 몸을  피하라고 신신당부한 방향은

불이 난 지점과는 정반대편이었다.

 '흐음? 그러고 보면 저 불은 그 괴상한 복면의 사나이가 지른 불이로구나!'
 '대체 이 괴상한 사람은 누구일가?'

 '무술의 재간도 그만하면 이만저만한 인물이 아닌데…….'
 청년은 내심 궁금한 생각을 금치 못하면서 그의 절묘한 재간을 부려서

서쪽을 향하여 바람처럼 날아버렸다.

 도중에서는 별로 가로 막히는  난관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호랑이 굴속같은 금사보를 널찍이 떨어져서,

괴히 깊어 뵈지 않는 강가에 이르렀다.

강가에는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청년은 메고 온 한빙선자 연자심을 내려놓고 견정혈(肩井穴)의

급소를 습격당하여 아직도 혼수상태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자

손으로 그 급소를 몇번인지 두들겨서 혈도(穴道)를  뚫어주고 나서

가만가만히 불러 보는 것이었다.

 "얘! 얘! 욱형아! 욱형아! 정신을 차려서 나를 좀 봐라!"
 한빙선자 연자심은 간신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차차 차차 맑아지는 정신 속에서 한빙선자 연자심은 누군지,

 "얘! 얘!"
 하고 간절하게 불러주는 음성을 분명히 귓전에 들었다.

 깜짝 놀라서 두눈을 번적 뜨고 자세히 앞을 보았다.
겨울밤 하늘은 별 하나도  없이 캄캄할 뿐이요,

단지  눈이 쌓인 대지  위에서 반사되는 희미한 광선이 

눈 앞을 훤하게 비춰 주고 있을 뿐이었다.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 앞에는 분명히  누군지 한 사람의
청년이 마주 대하고 있다는 것만은 인식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청년이  눈 앞에 있다니 이 청년은 바로 노영탄이 아닌가?

 '노영탄이란 청년이 어떻게 나를 이곳에까지 구출해 낼 수 있었을까?'
 연자심은 몽롱한 정신속에서도 두 눈을 더 한층 크게 뜨고

앞에 어른거리는 청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다보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노영탄의  얼굴이라고 생각되었다.

한빙선자 연자심은 일변  놀라움과 일변 기쁨과……, 형언키 어려운  감격이 
교차되는 심정속에서 긴장과 부끄러움에 싸여서 부지중 나지막한 음성이 떨려 나왔다.

"노(路)……노공자께선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셔서

소녀를  구출해  주시게  되었나요? 태산 같은 이 은혜……."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청년은 이 말을  듣더니 희미한 광선 속에서  입을 꼭 다문채로 새삼스럽게
연자심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볼 뿐이었다.

 한참만에야 청년은 펄쩍 뛰듯이  뒤로 물러서면서 당황한 음성으로 묻는 것이었다.

 "무슨……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소생을 누구로  아시구? 사람을 잘못 보신 것이……."

 이 말을 듣자,

한빙선자도 깜짝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다음 순간,
 청년과 소녀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앗!"
 "앗!"

 놀라움을 참지 못하는 꼭같은  외마디 소리가 청년과 소녀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왔다.

 연자심은 그제야 이 청년이  노영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의 한판에 찍어낸 듯이 생김생김이 꼭같은 얼굴이기는 했으나, 

그는 역시 노영탄은 아니었다.

 연자심은 부끄러움과 놀라움에 두 볼이 새빨개 가지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자못 난처한 모양이었다.

 청년도 연자심이 자기가 구출해  내고자 하는 소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너무나 분간해  낼 수 없을만큼 비슷하게 생긴 연자심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한동안 묵묵히 서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소생은 악중악이라 하오. 아가씨께선 뉘신데? 소생을 누군줄 아시구서?"
 "소녀는 연자심이라  하옵니다.

소녀의 친구인 노영탄이란  청년으로만 생각하옵고……."

 이 말을 들은 악중악의 놀라움은 더 한층 컸다.
 "뭣이라구? 그가……그가 바루 노영탄?"

 

 캄캄한 겨울밤 하늘.
 은백(銀白)색으로 널브러진 대지.

 눈 쌓인 적막한 광야 위에 얄궂은 운명에 얽매어 서로 쳐다보고 서 있게 된
악중악과 연자심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다음은 심야구출 (深夜救出)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