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3장 강호입문(江湖入門)

오늘의 쉼터 2013. 12. 6. 11:57

정협지(情俠誌) 제 1권
제 3장 강호입문(江湖入門)

 

노영탄 강호에 나가다.


 파양호( 陽湖)
 중국 강서성(江西省)의  공강( 江), 파강( 江),  금강(錦江) 여러  강들이
동, 서,  남 세 방면의 산악지대로부터  북쪽을 향하고 흘러  내려서

예장(豫章)의 산과 들을 꿰뚫고  한데 합쳐지는 곳에,

삼각형을 이루고 깊이  가라앉아 있는 담수호(淡水湖).

 저 유명한 동정호(洞定湖)에 다음 가는 큰 호수로서,

주변  일대에는 반육반수(半陸半水)의 낮은 땅과 물들이 무수히 깔려서

물이 줄어들 때면 그것들이 떠올라 파아란 잔디밭  같은 아름다운 광경으로 변하고,

물이 찰때면  순식간에 대해로 변해서 호양무변(湖洋無邊).

 서편으로는 여산(廬山)의  수 많은 봉우리들이 깎아  세운 듯 솟아  있으며,
호수 안에는 큰 섬, 작은  섬들이 별을 뿌린 것 같이 떠 있어 강남의  절경을 이루는 것이었다.

 남해어부 상관학은 바로 이 파양호에 은거하고  있었다.

백로주(白鷺洲)라고 부르는 섬(浮洲)속에서 속세를 등지고 한적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때는 첫여름.
 호수는 가는 곳마다 연꽃이 풍기는 그윽한 향기에 파묻혀 있을 무렵이었다.
 남해어부가 금릉에서 볼 일을 마치고,

우연한 기회에 사제지관계를  맺게 된 노영탄을 데리고 이 호수로 돌아온지도 꽤 오래되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선경(仙境)도 있었구나!'
 시골뜨기 소년 노영탄은 백로주를  처음 보고 그 신비스러운 경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둥그스럼한 섬의 언저리는  불과 십여리밖에 되지 않았으며,

겨우  십여호의 어민(漁民)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섬 안에는 도처에  수양버들 나무가지가 늘어져서 그윽한  그늘을 이루고 있었으며, 

사방을 둘러싼 호수는  어느쪽을 바라다 보아도 삼사척의 고기잡이 배들이 펼친 돛대의

그림자가 수면위에 어른거려 그림같이 아름다웠고,

물고기들이 펄떡펄떡 춤추듯이 그  위에서 헤엄쳐 놀며,

넘나드는 갈매기 떼 또한 평화 그대로의 상징인 양.

 그 형언키 어려운 맑고 고요함이 한번 이곳에 몸을 둔  사람으로 하여금,

구나 속세의 시끄러움과 어지러움을  씻은 듯이 잊어버리게 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경지였다.

 남해어부의 거처라고는 대나무로 간단히 지은 집이 두채,

그밖에는  따로 갈대로 지붕을 이은 정자(亭 )가 한 좌(座)있을 뿐이었으나, 

이것들도 들여다뵈는 곳마다 햇볕이  맑게 비치는 곳에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거울같은
책상이 단정히 자리잡고  놓여서,

속세의 번거로움이나 어지러움은  냄새조차 맡을 수 없이,

그야말로 덕이 높은 선비가  은거하여 도를 닦는 별천지요,

원(桃源)같은 경지였다.

 "사부님! 오늘도 섬 밖에 다녀 오시나요?"
 처음 얼맛동안, 

이 시골뜨기 소년 노영탄은  이른 새벽마다 갈대지붕  정자 밑을 거닐고 

 있는 남해어부의 곁으로  달려가서, 이런 말을 물어보곤  했다.

너무나 조용하고 인적을 구경할  수 없는 곳인지라 혼자서 섬을 지키기

허전하고 쓸쓸했기 때문이다.

 "허허 허허…. 그렇게 마음이 약해  가지고 어떻게 무술의 길을 닦겠다는 거냐!"
 남해어부는 인자스런 웃음으로  그것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을  오래두고 할 필요는 없었다.

 남해어부는 한번 백로주 섬으로 들어온 다음부터는

좀체로 섬 밖 세상엘 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소년 노영탄은 쓸쓸하고 외로운 걱정을  오래두고 할 필요는 없었다.

 노인은 이 세상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혼자서만 사는 사람 같았다.
 몇달만큼 한번씩 일용 필수품을 몇가지 구해 들이고자

호수 바깥 세상엘 잠시 다녀  돌아오는 이외에는,

나이 어린  다만 하나의 제자 노영탄을  열심히 지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발 끝을 좀더 부구리구……."
 "손바닥을 좀 더 꼿꼿이 펴서……."
 "약하다! 아직두 약해! 그렇게 힘 없이 손바닥을  세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냐!"

 "거기엔, 정신이……,

남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무서운 정신의 힘이 솟구쳐야만 된단 말이다!"

 이른 새벽이 이 절경(絶境)에  찾아들어 거울같이 맑은 호수의 수면이

파아란 빛깔을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이면 언제나 수양버들나무 밑 널찍한 잔디밭에서는

남해어부의 그  인자스러우면서도 위엄에 가득 찬 찌렁찌렁하는 음성

호수에 파문을 일으킬 것처럼 울려퍼졌다. 

손하나 쓰는 법(掌法),

발하나 움직이는 법(足法),

일일이 설명을 하고 몸소 해보여 주고.

 

 <이 건곤혼원장(乾坤混元掌)이라고 하는  손법은 다른 것이 아니구

바로 이 천지지간의 음양양극(陰陽兩極)의  변화와 오행팔괘(五行八掛)의

무궁무진한 변화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근본적인 술법은 팔단(八段)에  불과하는 것이니

즉,  팔괘중의 건(乾) 감(坎) 곤(坤)  간(艮) 태(兌) 손(巽) 이(離)  진(震) 등

여러 가지의 괘상(卦象)이 우연중에 합치되여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초보적이고 기초적인 점에서부터 무술의 바탕을 단련시켜 나가는 것이다.
 호수 속 섬(浮洲)에 사는 사람들은 남과 달리 길고 짧은 것을 몰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거침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남해어부가 첫눈에 판단해냈던  노영탄의 무술에 대한 천부의 자질에는

틀림이 없었다.

남해어부가  고심참담해 가며 가르치고  엄격한 지도를 하루도  쉬지 않은 결과,

노영탄은 이미 내공(內功) 외공(外功)은 물론하고  무술의 기본바탕을 공고하게

몸에  지니게 되었고, 특히 남해어부 상관학의 독창적인  재간으로

그  위명을 천하에 떨치고 있는  건곤혼원장의 무서운 술법까지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경지로  연마해 들어간 것이다.

 본래, 남해어부는 일찍부터  몇 사람 무술계의 고명하다는 스승들을  모시고 다년간

그들의 전수(傳授)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각파의 장점을  섭취해 가지고 자신의 독창적인 고절(高絶)한 무술의

재간을 터득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그 뒤에도 오랜 세월을  두고 강호의 도처를 편력하면서 견식을 넓히고, 

침내 허다한 무술의 갖가지 오묘한 비결을 일신에 모아 가지고

다시 그 정화(精華)를 뽑아서 어느 누가  감히 따를 수 없는 이 건곤혼원장이라는 술법을

연구하고 단련해 낸 것이다.

 하루의 무술공부와 연습을 마치고 나면,

이 할아버지와 손자같은  스승과 제자는 언제나 흥겨운  나머지 둘이서

자그마한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두둥실 호수 위에 떠서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때로는 낚싯대를 담가도 보고, 세상의 적막이란 것을 모르며 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해어부 상관학의 이 무서운 무술 건곤혼원장이란 재간은,

일찍이  강남 지방에서 몇  번 써 본일이 있었으나, 

그는 파양호 백로주로 은퇴한  후부터는 이 손  쓰는 법으로부터 건곤혼원검(乾坤混元劍)

이라는  칼 쓰는 법(劍法)을 연구해 내서 그 단련을 쌓는데 또한 성공한 것이었다.

 건곤혼원검이라는 검술을 손쓰는 법에서 연화(演化)해 낸 것이라 하지만 단(段) 수는 더 많아서

십이단이나 되며 건곤혼원장의 술법을 완벽한 경지에까지 터득하고  연마한 사람이 아니면,

이  검법은 배울 수가 없을 만큼  어려운 무술에 드는 것이었다.

 또 남해어부는 이 검법의 위략이 지대한 줄도 알고,

그것을  쓸 줄도 알면서도,

그가  무술을 몸에 지닌 정의와  의협이라는 숭고한 정신을 끝내  지키기 위해서,

비록 자신만만한  실력을 가지고 무술계를 흘려보고 넘겨다 보고  있을지라도,

한번도 이 무서운 검법을 강남일대에서 써 본일이 없었다.

 건곤혼원장의 술법만  가지고도 높은 산을 허물어  뜨릴수 있고,

큰  강물을 기울어 뜨릴수 있다면, 

 여기 또다시 검법까지 아울러 썼을 때, 

강남의 무술계에 기인이사(奇人異士)가  제아무리 많다 한들, 

그를 대적해서 감이  싸울 사람이 있을 것이랴.

 어느날.
 한나절이 훨씬 기울었을 때였다.

 노영탄은 수양버들나무 밑 넓은  잔디밭 위에서 혼자 열심히 무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미 스승이 옆에 따라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혼자서

그 실력을 배양해 나가는 데만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예! 영탄아!"
 뜻밖에도 스승의 엄격한 음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한편으로 떨어져 있는 갈대지붕  정자에서 아침부터 독서에 여념이 없던 승이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제자를 부를 까닭이 없을 터인데.

 노영탄은 가슴이 뜨끔해서 연습을 중단하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때, 벌써 남해어부는 높직한  정자를 내려서서 그 희고 긴 수염을 

한손으 쓰다듬으며 노영탄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영탄아! 내 오늘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네에, 무슨 말씀이시온지?"

 노영탄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 공손히 서서 스승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다보았다.
 분명, 무슨  중대한 지도나 교훈이 금시에 있을 것만  같은 엄숙한 스승의 얼굴이었다.

 "너는 이미 나를 따라서 무술을  공부하고 연마한지 이년이 되었다.

내공 외공 모든 재간에 놀라웁게  빠른 성취가 있었고 따라서 건곤혼원장 술법도

의 완백에 가까운 경지까지 도달하게 된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이제부터는 내  너에게 건곤혼원검의 칼  쓰는 법을 전수해 줄것이니

그리 알구 부지런히……전심전력을 다해서……."

 이렇게 말하는 남해어부의 한 손에는 한 자루의 큼직한 옛날 보검이 들려져 있었다.

 칼. 칼 싸움.

 남해어부가 들고 있는  보검을 바라다보는 순간,

노영탄은 어리석은  옛날의 미련과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때 낙양에서 내가 칼을 쓸 줄  알았던들

악중악에게 그런 창피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을….'

 "무슨 생각을 하고 이렇게 얼빠진 놈 같이 서 있는 거냐?

정신을 똑똑히 차리지 못하느냐?"

 마음속을 꿰뚫고 들여다보는 듯한 스승의 엄격한 음성을 듣고서야

노영탄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남해어부의 안색을 살폈다.

남해어부는 그 보검을 노영탄의  손에 잡혀 주면서 인자한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이것은 내가 비장해 두었던 한 자루 귀중한 보검이다.

이름은 금서(金犀)라고 한다.

전해 내려온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의 용장  왕전(王塞)이 쓰던 것으로,

그 뒤에는  원(元)나라 장수 파안(巴顔)의 손에 들어가게 됐으며 

우리나라 초대에 와서 어찌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이 강남땅에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고,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나의 수중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귀중한  보검을 별로 써 본 일이 없었다. 

이미 이십년전에 봉검(封劍)을 해둔채로 다시  다치지도 않고 간직해 두었던 것인데,

이제  이것을 너에게 물려줄 터이니  그리 알고 일후에 너의 무예가 완전히 성취되어서
도(道)를 행하게 될 때에는 이 보검을 써 보도록 해라. 

그러나 한가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명기(名器)란 덕을 갖춘 자만이 이것을  지녀야 하고,

이것을 써야 하는 것이다.

너는 언제나 이 귀중한 신물(神物)을 옳게 쓸  줄 알아야 한다.

정의와 의협을 위해서만 이 칼은 뽑아져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불의한 일에 이  보검을 뽑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길이길이 지켜 나가야만  된다!

내 말하는 뜻과 정신을 명확히 알아 듣겠느냐?"

 무술이 거의 완벽한 경지로 들어가고 있는 단지 하나 어린제자를

극진히 사랑하는 늙은 스승의 마음, 이에 더 큼이 있으랴.

 노영탄은 두 손을 공손히  쳐들어서 그 보검 '금서'를 받아들고 정중하게  허리 굽혀 절했다.

 양자강을 흘러 내려오는 일엽편주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처음으로 맺던 때.
 그때의 형언키 어려웠던  감격이,

소년 노영탄의 인생에 있어서  지고지대한 것이었다면,

보검을 받아드는 이  순간의 감격 또한 그만 못지 않게 어린 슴을 흥분에 파동치게 하는

것이다.

 천하에 둘도 없는 보검.
 몇해전,

낙양 숭양표국 뒤뜰에서 저 거만스러운 악중악이 멸시와  모욕에 가득찬 눈초리로

발 밑에 팽개쳐 주던 대단치도 않은 한 자루의 칼.

 어찌 이 보검을  그때 그 이름도 없는  한자루의 칼과 비길 바이랴만, 

소년 노영탄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아리따운 소녀 감욱형의 앞에서

당하던 그 수치의 장면을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명검(名劍)을 정의와 의협을 위해서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날이 된다면…….'
 '그때야말로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감(甘)씨댁 귀여운 아가씨를 찾아볼 수 있는 날이 아닌가!'

 설레는 가슴 속을 억지로 누르는 소년의 음성은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님의 말씀 길이길이 각골불망하옵고 거룩하신 교훈에 어긋남이 없도록
소행을 삼갈것이오며, 

물려주시옵시는 귀중한  보검, 정의와 의협과  포악한 무리를 누르고

약한 사람을 돕고 구하는 길 이외에는 함부로 뽑아 들지 않을 것을 감히 사부님 앞에서

맹세하옵니이다!"

 노영탄은 떨리는 손을 칼자루를 잡아 보았다.
 노영탄은 당돌하게도 칼을 쭉 뽑아 보았다.

 봉검(封劍) 해둔지  이십년,

오랫동안 칼집 속에만  박혀 있던 천하의  명검(名劍)이 기이한  인연으로

소년 노영탄에 의하여  비로소 칼집 밖의 눈부신 태양광선을 보게 된 것이다.

 노영탄은 칼을 뽑아들고 한참동안이나 머리를 수그리고 들여다볼 뿐이었다.
 너무나 놀라운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금서'라고 부르는 보검의  길이는 삼척이 넘었고,

칼집은 고색이  창연한 그윽한 빛깔에 군데군데  얼룩이가 져 있으며,

금도 아니요 옥(玉)도  아니면서도 한번 칼날을  뽑기 시작하자 마자 벌써  쨍!

하고 매서운 쇳소리를  냈다.

칼집에서 이십년만에 바깥 세상에 나오는 칼날인데도

그것은 서릿발 같이 싸늘한 한기(寒氣)가 시퍼런 서슬에 감돌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썹이 선뜻해지고 전신에 소름이  끼치게 할 지경이요,

파아란 광채가 줄기줄기  눈부시도록 사방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너무나  신기로워서 손으로 가만히 칼날을  건드려 봤다.

마치  용(龍)이 숨소리를 죽여가며  가만가만히 속삭이는 것 같은 기기묘묘한

음향이 회오리바람이 일 듯이 무섭게 울려 퍼졌다.

 "허허허…… 허헛!

그  녀석 신기하다구 언제까지나 들여다 보고만  있는 게 아냐! 어디 이리 다우!"

 남해어부 상관학은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인자스런 웃음으로

어린 제자의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듯 바라다보더니

칼자루를 노영탄에게 받아들고 일직선으로 팔을 쭉 뻗어 뵈는 것이었다.

 "이 보검을 쓰는데는 우선 칼자루를 잡는 자세부터……,

이렇게 네 손가락을……."

 이리하여 노영탄은 이날부터  늙은 스승의 엄격하고 정성어린 전수(傳授)와
지도를 받아 가며 고심참담, 건곤혼원검이라는 놀라운 검술까지  연마를 쌓게 되었다.

 밤이 되면 갈대지붕 정자 안에서는 등잔불이 깜박거렸다.
 자그마한 책상을  가운데 놓고 단정이 앉아  있는 스승과 제자. 

남해어부는 노영탄에게 손쓰는 법과  칼쓰는 법을 열심히 전수해서,

한개 소년을  훌륭한 무인으로 키워놓는데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술은 연마하는 틈틈이  경서(經書)를 가르치고 사서를 읽히고,

때로는  파양호 맑은 물위에 일엽편주를  띄워 놓고,

 금(琴), 기(棋), 서(書), 화(畵)에 이르기까지 배워주고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다시 삼년이란 세월이, 섬(浮洲) 속과 호반에서 속세를 등지고  한적하고 평화스럽게 흘러갔다.

 노영탄은 이  동안에 무예계에서 감히  따를 사람이 없는 건곤혼원검이라는
신출귀몰한 검술만을 완전히 내것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한개의 포학(飽學)의 선비가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노영탄이 남해어부를 따라서  파양호 백로주에 온지도 어언간
오개성상을 지낸 셈이다.

 낙양을 떠났을 때 불과 십육칠세의 소년이던 노영탄도 이제는 그 풍채가 준수하고 의젓하며,

문무를 겸비한 귀공자가 된 것이다.

 또 어느날 이른 아침에.
 남해어부는 갈대지붕 정자에 앉아서 노영탄을 불렀다.

 스승의 얼굴에는 지극히 침통한 빛이 서리어 있었다.
 "사부님! 무삼 분부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온지?"

 머리를 수그리고 공손히 묻는 노영탄의 말을 듣고도,

남해어부  상관학은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말이 없었다.

 '무슨 꾸지람이라두?'
 노영탄은 조마조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쳐들어  스승의 얼굴빛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침통한 가운데,  어떤 비장한 각오와 결의가 들어 있는 심상치 않은 얼굴같이 느껴졌다.

 이럴 때마다 파양호 파아란 수면으로 눈동자를 옮기는 것이 남해어부의 다년간 몸에 밴

버릇이었다.

 속세를 등지고 섬(浮洲)에서 세월을  보내는,

남이 알 수 없는 어떤  감구지회를 참기 어려운 탓인지도 몰랐다.

갈대지붕 정자의  기중에 기대 선 채,

악 눈을 뜨기  시작한 이른 아침 호수의  수면과 그 위로 널브러진

무변대한 남국(南國)의 여름 하늘을 사방으로  말 없이 휘둘러 보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탄아! 세월이 여류하더니, 

네가 나를 따라와서 무술을  공부한지도 어언 오년이나 되었구나.

이제야말로 나는 나의 온갖 무술의  재간과 정화(精華)를 하나도 남김  없이

너에게 전수해 준  셈이다.

이 세상에 그래도  단지 하나,
나의 무술을  이어받고 물려 받은 제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외로운 섬 속에서 긴 세월을 보낸 것이 헛되지 않았으며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며칠전에 내가 필요한  물건을 몇가지 사고자 호수  밖에 나갔었을 때

이런  확실한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요즘 무예계에는  바야흐로 일장의 큰 풍파가 일어날  것이 눈 앞에 보이고 있는 것이다.

회양방과  숭양파가 부딪치기만 하면 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수단을 다해서 암투를 전개하고 있으며 그나  그뿐이랴,

무예계 주변에 은거하고 있던 무수한  색다른 인물들이 회양방에게  매수당해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오랜 옛날부터  제각기 중원의 웅(中原之雄)이  되고 싶은 야심을 품고 있던 무리들이다. 

이번에 좋은 기회를 만났다  생각하고 회양방의 부흥을 빙자하고 있으나,

기실은  한번 중원의 무예계를 지배해 보고 싶다는 야욕에 불타고  있는 것이다.

이러고 보면 일장의  처참한 싸움이 벌어질 것은  면키 어려운 형세다.

너는  이번에 이런 처참한 싸움과 큰 화를  누르고 수습하기 위해서

호수 밖 저 세상엘 번 나가야 된다.

비록 너의 힘이 부족하다손  치더라도,

너는 온갓 힘을 다해서 피비린내 나는 살륙을  덜게 하는 데 전력해야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필요하다면 나두 한번쯤은 바깥 세상에 나가볼 각오를 하고 있는

터이니까……, 내 뜻을 알겠느냐?"

 여기까기 말하고 난 남해어부는  한참 동안 머뭇거리는 듯 자상한 눈초리로
노영탄의 아래 위를 더듬어 보더니 다시 덧붙여 하는 말이 있었다.

 "너의 무술의 재간으로 말하자면, 

비록 천하무적이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그다지 손쉽게 패해 버릴 재목은  아니라고 믿는다.

단지, 강남땅은 험악하기 이를데 없는 고장이니

항상 몸을 조심하고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노영탄은 금시에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제가 어찌 감히 사부님 곁을 떠나서 혼자 몸으로……."

 노영탄은 비록 십육칠세의 소년의 몸으로 이제 문무겸비한 이십여세의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오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을 두고 자나깨나 그림자같이 떨어져 본 일이

없이 외로운 섬에서 기거를 같이 한 스승을 생각했을 때,

그 은혜가 태산같을 뿐만 아니라 그 정이 부자지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찌 눈물 없이 이 스승의 떠나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랴.
 때로 수치스럽던  낙양의 과거지사를 추억하는 나머지 또는 아리따운 소녀 감욱형이

그리워짐을  못이겨 한시 바삐 무술이  연마되지 못함을 한탄도 했고, 호수 바깥 세상엘

나가지 못함을 초조히 생각하기도  했으나 막상 정말로 스승과 이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노영탄은 발길이 선뜻 돌아서지 않는 것이었다.

 제자의 수그린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스승의 음성이 추상같이 싸늘하고 엄격해졌다.

 "너를 떠나 보내는 나의 마음인들 애처롭고 서운함이  비길 데 있겠느냐!

나 지금은 사제지간의 정의에 얽매어 있을 때가 아니다. 

무예계는 너무나 어지럽다! 너는 나를 대신해서  포악한 무리들의 불의의 살육을 막고

선량하고 약한 자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감연히 떠나가야 하는 것이다!"

 "제가 어찌 미약한 힘으로써, 감히  사부님을 대신하여 그런 벅찬 무거운 임무를

감당할 수 있사오리까!"

 남해어부는 금시에 봄바람이 스쳐가듯 안색이 풀어지며 그 인자한 음성으로
한바탕 너털웃음을 쳤다.

 "헛! 헛! 헛! 못생긴  녀석! 이제 너는 너의 힘에 자신을  가져도 좋은 때란 말이다.

남아 대장부, 그뜻은 스승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실로 천하를 휘두르는 데 있는 것이다. 

어찌 길이 스승의 곁에서만 헛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랴! 가거라!

무엇을 망설일 것이 있겠느냐? 단지 내가 당부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말을 마치자, 

남해어부는 준비해두었던 자그마한 보따리를  내밀어 주면서,
여장을 수습하여 곧 떠나도록 명령하는 것이었다.

 일각을 지체치 않고  스승과 제자는 파양호 맑은  물 위에 일엽편주를 띄웠다.
 그 옛날 처음으로 양자강 물줄기를 타고 흘러내려오던 때와 같이 제자를 뱃머리에 앉히고

스승은 친히 노를 저었다.

호반에 자리잡고  있는 성자현(星子縣)이라는 땅에 배가  닿았다.

제자가 육지로 올라가는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다보고 나서야 

스승은 뱃머리를 다시 돌렸다.

육지로 올라온  노영탄은 그곳이 어느 고장인지도 알지 못하고 우두커니

넋을 잃은 사람같이 한 곳에 서서 눈 앞에서 멀어져 나가는 일엽편주를 바라다 보고 있었다.

 "부디, 몸조심 하고 경솔한 행동을 삼갈 것이며, 내가 준 금서보검은

오로지 정의와 의협심만을 위해서, 약한 사람을 돕고 구출할 때만  뽑아 들어야 하느니라!"

 한간, 두간 육지에서 멀어져 가는 일엽편주 위에서 마지막으로  간곡히 부탁하는 스승의

말이었다.

 언제 다시 타볼지 기약할 수도 없는 일엽편주.
 스승과 제자가 항시 틈만 있으면 호수에 띄워 놓고 시를  읊고,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고 서화를 공부하던 일엽편주.

 "사부님! 제가 반드시 다시 돌아와서 찾아뵐 날이  있을 것이오니 길이 안강하옵소서!"

 노영탄이 있는 목청을 다 해서 두 손을 입에다 대고 악을 쓰며  서 있을 때,
일엽편주는 멀리멀리 백로주를 향해서 되돌아가고 있었다.

 파양호를 버리고 성자현 땅을 밟기는 했으나, 노영탄의 발길이  선뜻 돌아설 리 없었다.

 남해어부 상관학을 태운 일엽편주도 다시 시야 속에서 찾아볼 수없을만큼 완전히

호수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오년동안이나 정들었던 백로주.

 그 모습을 다시  한번 찾아보려고 애썼으나 그것도  먼 호수의 파아란 색채속에 수 많은 

섬(浮洲)틈에 끼어서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 분간해 낼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수 없다.

 '어디루 간다?'
 그제서야 노영탄은 육지편으로 머리를 돌이키고 이 궁리 저 궁리 해보는 것이다.

 비록 세월은 흘렀고 몸은 자라서 당당한 청년이 되기는 했으나

천애고아는 또다시 천애고아가 되어서 갈바를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오년동안에 노영탄은  점심전력 무술의 도를 닦고 기술을  연마하면서도,
자나깨나 일시 일각도 잊지 못한 것은 저 생명의 은인 감욱형이었다.

 가을날 호수같이 맑으면서도 무엇을  호소하듯이 촉촉히 젖어 있는 것 같은 두 눈동자.

 방울이 달랑달랑 제멋대로 한들거리는 것 같은 청아한 음성.
 속세에서는 좀체로  찾아보기 힘든 아리따운  소녀의 모습을 몽매에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술이 완벽한  경지에 이르고 학식까지 겸비하게  되고,
나이 스므살이 넘어서면서부터, 노영탄은 이미 소년시절과 같이  철부지 기분에만

죄우되어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어리석은 청년은 아니었다.

 감욱형에 대한 그리움이나 억누를  수 없는 애절한 심정은,

마치 일종의  숭고한 신앙심같이  머리속에서 승화(昇華)되어서 마음 속  더 깊고 깊은

곳을 파고 들어서 판단할 줄 아는 위치를 잡고 가라앉아  있는 것이었다.

고심참담 무술을 단련해 나가는 어려운 고비고비에서 용기를 잃고 풀이 죽을 때마다,
언제나 한개의 순진하고 다정스럽게 미소를 띠우고 있는 소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그를  격려해주고 위안해 주고, 그리하여 만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나갈 수 있는 적극적은

향상의 힘을 준 것이다.

 이제.
 또 다시 감히 그를 가로막을 아무 것도 없는 천애의  일각에 서서,

마음대로 날아 다닐 수 있고 마음대로 헤엄쳐 나갈 수 있게 되었으나,

우선  한시 바삐 저 그리운 고장, 낙양으로  발길을 돌려 놓고 싶은 것은

노영탄의 어쩔수  없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을 때.
 준엄한 스승 남해어부의 얼굴이 왈칵 길을 가로막는 것 같았다.

 '천신만고해서 무술을 연마한  것은 의협이 무엇인가를 강호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회양(淮揚) 일대에서 공전의 처참한 싸움판이  벌어질 것이 눈 앞에 보이지 않느냐?'

 '네, 이놈! 어찌 이것을 모른 척하고 돌보지 않고 지난날의 일개 소녀를 그리워하는

연연한 심정에만 사로잡혀서 진정을 그르칠쏘냐?'

 스승의 얼굴이 추상같이 호령하며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감정과  의지가 한동안 격렬하게 가슴속에서  맞부딪쳤다.

역시 먼저 강남으로 그 다음  회양으로. 최후의 목적지는 낙양이라 할지라도,

우선  이렇게 결심을 하고 노영탄은 또다시 나그네 길을 분연히 떠나가는 것이었다.


 노영탄이 떠난 뒤의 낙양에도 커다란 변동이 생겼다.
 예로부터 난공불락이라는 천험(天險)의 지세(地勢)를 자랑하는 낙양이었다.

 일부(一夫) 능히  만졸(萬卒)을 막아내고 지탱해  낼 수 있는 요새지대로서
유명한 까닭은 사면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져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상악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준령이 숭산(崇山)이었고,

이 숭산  꼭대기에서는 고루거각이랄 것까지는 못되지만 

과히 초라하지 않은 절간같은 건물이 울창한 숲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이름하여 벽송관(碧松觀)이라 했다.

 이 곳이 바로 숭양파의 역대의 영도자들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숭양장로라는 사람이 이 파를 창립한 이래,

이제 겨우 제  삼대째 계승해 내려왔으며,

삼대의  영도자는 철장단심(鐵掌丹心) 탁창가(卓蒼茄)라는 사람으

그 도호(道號)를 현극(玄極)이라 했다.

 한때는 그 용명을 강호에  떨치고 있던 명인으로 무예계에서

지극히 아끼고 존경하는 인재중의 한 사람이었다.

 숭양파는 본래가 자수성가로써 일가의 무공(武功)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문호를 지키는데 근엄했고, 무예계에서 일어나는 가지가지  은혜와 원수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싸움에 좀체로 휩쓸려 들어가질 않았다.

 그리고 숭양파에는  산 속에 깊이 간직해  내려오는 비장의 보물이  있었다.
숭양비급(嵩陽秘 )이라고 하는 무술에 관한 희귀하고 지보적인 서적이었다.

 향비(鄕匪)들의 집단체인  회양방의 방주( 主)인 개세천왕(蓋世天王) 연약파(燕躍波)라는

자가 호시탐탐히  숭양비급을 제것으로 만들어 보고자  노력해 오던중,

마침내 숭양파의 제이대 영도자  창랑거사(滄浪居士) 황보자우(皇甫子羽)와 풀기 어려운

원수를 맺게 되었다.

 이리하여 쌍방의 반목과 싸움은 날이 갈수록 거칠어져서 마침내는

무예계가 정통파와 사파(邪派)라는 두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가지고,

홍택호  호반에서 극렬하고 참혹한 일장의 싸움이 벌어졌었다.

 정통파인 숭양파의  영도자인 창랑거사는 허다한  무예계의

명인과 고수(고수)들을 거느리고  회양방을 격파시켰고,

사파(邪派)의 두령(頭領)  개세천왕과 그가 거느리는  수 많은 향비의 두목을

주살(誅殺)하기는 했으나,  마지막 판에 가서 회양방이 사전에  매복시켜 두었던

다른 세력의 불의의 습격을 피치 못하고 영도자인 창랑거사를 위시해서

허다한 정통파의 명인 고수들이 불치의 중상을 입고야 만것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이 남해어부 상관학이 정통파인 숭양파를 구원하고자 먼 길을 달려 왔던 것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었다.

 그의 무서운 무술의 재간과 실력을 가지고도 그것을 발휘해볼 수도 없는

타까운 지경에서 숭양파도 주저앉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사파인 회양방도 와해와 붕괴의 운명을 피할길이 없었다.

마치 그물  구멍으로 빠져 나온 물고기 같이, 일부  살아난 향비의 무리들도

뿔뿔이 흐트러져서 숨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리하여 강호에도 오랫동안  평온한 나날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뜻밖에도 이십년 후에 이르러서.

 회양방의 방주( 主) 개세천왕의 아우뻘쯤 되는 금모사왕(金毛獅王)이란 자가,

이미 잿더미 속에서 꺼져버린 불똥을  다시 쑤셔거리듯이,

옛날의 원한을 끝끝내 풀어버리지 못하고 

또다시 강남 일대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자는,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는지 회양방을 다시 한번  발흥시켜 보고 싶은 야망에서

무예계 주변에 흐트러져 얼굴도 떳떳이 내밀지 못하고 무위소일하고 있는 

허다한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을 닥치는  대로 매수하고 포섭해서
왕년의 홍택호 호반의 원수를 갚아보고자 맹렬한 활동을 개시한 것이었다.

 그 보복의 제일 가는 대상이 숭양파인 것은 물론이었다.


 구월 구일.
 중양절.

 이 날은 바로 숭양파가 숭산 꼭대기에서 전체 대회를 여는 날이었다.
 남녀노소, 문하의 수 많은 제자들이 벽송관(碧松觀)을 향해서 몰려들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벽송관  안에 있는 대청에는 벌써 등불이 두루두루 밝혀졌고,

좌석이 가득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  많은 좌석들은 삽시간에 사람의 머리로 입추의 여지도 없이 꽉차졌으나

어느 한 사람 숨소리조차 크게 내쉬는 사람이 없으며, 장내의 공기는 침통하고 엄숙한

긴장에  싸여 있는 것이었다.

 이때, 영도자 철장단심  탁창가가 엄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조용히  일어서서
찌렁찌렁 울리는 시원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 문중이 한  자리에 오래간만에 모여서

회를 여는 날일뿐더러  이렇게 삼대(三代)를 걸쳐서 내려오는 사제지간이

 한 자리에 모여 본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요.

나는 영도자라는  직책상, 우리 파를 대표해서 우선 우리가 앞으로 취해야 할

기본적인 방침과 결론을 명백히 해두려 하오!"

 이렇게 선언을 하고  나서, 탁창가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사방을  휘둘러보더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말했다.

 "며칠전에 나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소.

저 회양방 향비의 무리들은 꺼져버린 불집을  다시 쑤셔거려 가지고, 

바로 개세천왕(蓋世天王)의 아우뻘 되는 놈,
그 당년의 싸움판에서 한편 팔이 달아나고 한쪽  눈이 멀어가지고 도망질 쳐서

간신히 잔명을 보존했던 금모사왕(金毛獅王)이란 놈이 두령이 돼가지고
강남 일대에 다시 나타나서  된놈 안된놈 함부로 닥치는 대로 결탁하고 매수해 가지고

이십년 전  저 홍택호 호반에서의 원한을 우리들에게 보복해 보자는 것이요.

놈들이 제일 먼저 쳐부셔야 할 것은  우리 숭양파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우리들의 역대의  비장의 보물인 숭양비급을 탈취해서 제놈들의 수중에
넣지 못하는 날까지는 한사코  싸워보겠다고 날뛰고 있소!

바로 며칠전에 우리 문중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감영장이란 사람의 표국 마차를
습격하리라는 정보를 입수했소.

이것은 그들이 활동을 개시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시위행동에 틀림없는 것이요.

나는 이 기맥을 알아차리고 낙이산 아우님을 파견해서 사전에 연락을 해주려 했으나,
어제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바에 의하면, 낙이산 아우님이 할 걸음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끝끝내  놈들의 독수를 피치 못하고 숭양표국의 국사 몇 사람이 목불인견의
처참한 죽음으로 희생당하고 말았소!"

 의분을 참지 못하는 철장단심 탁창가의 음성은 분노와 흥분에 떨렸다.
 "저희들 일당의 야망을  만족시키고자 불의의 싸움을 걸어오며  날뛰는

이런 무리들을 어찌 우리가 눈을  뜨고서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있으리오!

동지 여러분! 그리고 선배 여러분!  또 정의와 의협심 불붙는 젊은 제자 여러분!

이 순간에도 우리들 눈  앞에 거창하고 무시무시하고 처참하고 잔인한 싸움판이
일각일각 다가들고 있는 것이오! 

여러분은 이 비상히 중대한 우리들의 시국을 똑바로 알아차리고 불철주야 무술(武術)을

연마함에 그 어느때보다도 심혈을 경주해서 우리 숭양파의 빛나는 영명(英名)과

오랜 전통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과 앞날의 발전을  완강히 타개해 나갈

백절불굴의 각오를 새롭게 해주셔야겠소!

이런 중대하고 비장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내일은 제 삼대의 여러 제자들 가운데서 
다음 대(代)의 문하를 계승해서 이끌고 나갈 영도자를 선발키로  하겠소.
여러 제자들은  분투노력, 각자가 지닌 온갖  무예의 재간을 남김없이 발휘함으로써 
우리 숭양파의 이 비상시국에 대처하는 대의명분에 추호라도  어긋나는 점이 없도록
힘써  주기를 간절히 부탁하는 바이오!"

 말을 마치고 탁창가는 큼직한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아, 여러분! 다  같이 술잔을 드십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정의와 의협의

술잔을 다 같이 높이 드십시다!"

 만장의 선배, 후배들이 일시에 좌석에서 일어서며 다같이 술잔을  높이 들었다.
 주욱 술잔을 담숨에  내고, 호탕한 너털웃음으로 영도자의 관록을  과시하는 탁창가.

 거기 따라서 맞부딪치는 무수한 술잔들. 수 많은 무인(武人)들의  천지가 진동할 것 같은

통쾌한 웃음 소리, 이야기 소리.

 이리하여 벽송관(碧松觀) 대청에는  이 비상시국의 역사적인 주연이 베풀어 졌고,

여러 무인들의 패기만만한 환성이 밤 깊도록 숭산  꼭대기 깊숙한 골짜기를 흔들었다.

 이튿날.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고산 준령의 밝은  새벽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흔들었지만,

밤사이  가지끝에 맺힌 이슬방울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벽송관 주변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청신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건물 정면으로 휜히 틔운 넓은 마당에는 숭양파의 수 많은 제자들이

일제히 검정 빛깔로 무장을 갖추고 입문(入門)했던 선후배의 차례대로 열을 지어 가지고

그것이 다시 활(弓)같은 원형을 이루고 질서 정연하게 집합되어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의와  사악(邪惡)에 항거하고 감연히 일어서 무예계의  정통(正統)을 사수하겠다는

무인들의 엄숙한 모습.

 대열에서 좀 떨어진 정면 앞자리에 높직하게 높여진 의자에는 

선배요, 영도자인 철장단심 탁창가가 근엄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다.

 "자아, 이제부터 우리는 행동을 개시하는  것 뿐이요!

여러분은 우리 숭양파의 숭고한 정신을 또 한번 명심하시기를……."

 우렁찬 음성이  떨어지자,

사회자인 장로(長老) 낭월대사(朗月大師)가  명단 책을 손에 들고 정중하게 앞으로 나섰다.

 위엄을 갖추고 정중하게 명단책을 펼쳐 든 사회자 낭월장로는 음성을 높여 차례차례로

불러 내려갔다.

 이름을 불리운 제자들은 제각기  순서를 따라 앞으로 나가서 무술의 재간을
표현해 보이는 것이었다. 

넓은 마당으로 나서는 여러 제자들은 하나  하나가 생룡(生龍) 활호(活虎)같이 

패기만만한 기세와 놀라운  무술의 재간을 지닌 믿음직하고 용감한 젊은이들 뿐이었다.

 그들이 몇해만에 한번 열리는 이 대회의 영광스러운 마당에서 남보다 뛰어나는 재간을

보이고자 그  동안에 얼마나 열심히 무술을 연마했다는 것을 가히 알수 있었다.

 철장단심 탁창가는 자못 만족한  듯이 빙그레 웃어가며 제자들의 무술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탁창가의 얼굴에는 침울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흐음? 이정도의 인재를 가지구는? 

우리 숭양파를 계승시켜서 영도자를 삼기에는 너무나 약한걸!'

 '더군다나 회양방을 대적해서 싸워야 할 이 중대한 시국에 처해서…….'

 냉정하고 엄격하게 관찰했을  때,

뛰어나게 슬기로운 놈이나 특수한  천부의 자질(資質)을 나타내는 놈을

별로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탁창가의 마음속은  침울한 정도가 아니라  점점 점점 초조해지기조차 하는 것었다.

 '또 그 다음은 누구냐?'
 초조하면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눈초리로 하나 하나 출장(출장)하는
제자들을 노려보고 있는 탁창가.

 열 여섯번째로.
 비호같이 넓은 마당 한복판으로 내닫는 씩씩하고 날쌔뵈는 제자가 있었다.

 바로 악중악이었다.
 저, 숭양표국 뒤뜰에서  몸에 지닌 남다른 무술의 재간을  뽐내고,

도둑두경을 하던 노영탄에게 창피와 망신을 주던 악중악.

 탁창가의 안광이 여태까지와는 딴판으로 이상하게 빛났다.
 악중악 역시 다른 제자들과 다름없는 검정빛깔 무장을 하고 내닫는 데 불과 했으나,

하늘을 무찌를 듯한 영기(英氣), 바람같이 가볍고 빠른 동작.

 단번에 비범한 놈이란 것을 알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손에 긴 칼을  들고 넓은 마당으로 달려나온 악중악은,

먼저  사장(師長)들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고 나서 보조를 맞추면서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숭양파의 절예(絶藝)라고 하는 천강검 검술을

멋들어지게 해치우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검술이 최고조에 달하는 절묘한 기술, 추운언월십이식(追雲偃月十二式)까지

거침없이 해보였을 때야, 탁창가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면서 일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기색이었다.

 여러 제자들의  무술을 자세히 관찰해 보자니, 

그중에서 칼을 쓸줄  안다고 할만한 놈은 불과 셋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세놈들이  꼭같이 천강검 검법을 쓰기는 했으나,

그 칼쓰는 품이나, 몸가지는 품이 제각기 달랐다.

천강검이라는 숭양파 비전의  검술은 이 문중의 제자들만이 할줄아는 검술이지만, 

그것도 각자의 천품과 오성(悟性)에 따라서 가지가지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흐음! 이놈만 하다면……어지간히…….'
 탁창가는 또 한번 회심의 미소를 만면에 띠우는 것이었다.

 탁창가는 눈앞에 황홀해서 견디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악중악이 한번 칼잡은 손을  휘두르자,

그 비범한 천품은 감히 이  문하에서 따를 사람이 없을 것 같았고,

마지막 절기(絶技)인  십이식(十二式)을 거침없이 해치웠을 때에는

그가 지닌 탁월하고 슬기로운 오성(悟性)이 더할나위 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이놈, 칼쓰는  재간이 이만저만한 놈이 아니다……, 앗차! 이놈이  전
대(代)의 영도자이며 은사(恩師)이시던  창랑거사의 검법을

그대로 물려받은 점두 한두가지가 아닌데…….'

 악중악의 일거일동을 샅샅이 관찰하고 있던 탁창가는,

그들  문중의 절기(絶技)라는 천강검 검술의 오묘 불가사의한 경지를 어떤 제자보다도

멋들어지게 해치우는 악중악을 발견하자 이런 놀라운 생각조차 금치 못하는 것이었다.

 탁창가는 넓은 마당 한옆으로 여러 사람의 선배와 사형(師兄)격인 중진들을 불러서

꽤 오랫동안 구수회의를 했다.

 마침내 영광스러운 영도자의 지위를 차지할 인물이 선정되었다.

 악중악.
 수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악중악을 내놓고서도 그만한 천품이나 오성(悟性)

뛰어나게 지닌 인물이 없다는데, 탁창가는 물론 여러  중진들의 의견도 일치했다.

이리하여  숭양파의 제 四대  영도자라는 영광스러운 인물로  선발된 악중악은

이대로 눌러서 숭산 벽송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제 二대의  영도자인 철장단심 탁창가에게  친히 다른 무술의 전수(傳授)를 더 받고

아울러 그들의 비전의 보물인 숭양비급을 연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흘 후 대회가 끝나는 날.
 구월의 선들바람이  시원스럽게 부는 험산  준령의 꼬불꼬불한 골짜기 길에
서녘으로 넘어가는 햇볕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렵.

 여러 제자들은 각각 자기네들  마을로 돌아가려고 열을 지어서

차례차례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과 훨씬 뒤떨어져서 천천히  골짜기 좁은 길을 내려가는 세 사람이 있었다.

 이번 대회에 참가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숭양표국의 감영장과 그의 무남독녀 외딸 욱형,

그리고 그들을 배웅하고 벽송관으로 되돌아 가야 하는 악중악이었다.

 골짜기 길을 지나서 다시 언덕길 높은 곳으로 올라서면 산아래 마을들이

리 옹기종기 내려다뵌다.

 세 사람은 여기서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감개무량 한 것은 악중악보다도 감영장이었다.
 "악중악아! 여기서 너와 작별을 하게 됐지만, 내 마음은 정말 대견하구……,
기쁘구……, 무엇이라 형언키조차…… 너는 이제 우리 파의  영도자가 되었으

백 사람 천 사람을 대신해서 힘껏 싸워 줘야만……."

 악중악이 허리를 굽혀 절하며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옆에 서 있는 감욱형이 엄지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서 높이 쳐들면서

 "오빠, 앗주! 이게 됐다구 너무 뽐내면 안돼요! 호호호……."
 같이 자라났다고는 하지만 친누이동생도 아닌 소녀 감욱형의 방울같은 음성

언제까지고 잊지 못하면서 악중악은 산아래로 사라지는 아버지와 딸의 뒷모습을

넋 잃고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다음은 심야외인(深夜外人)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