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1장 천애고아(天涯孤兒)

오늘의 쉼터 2013. 12. 6. 11:32

   정협지(情俠誌) 1권

 

제 1장 천애고아(天涯孤兒)

 

갈곳 없는소년

 

낙양(洛陽)
중원(中原)의 대읍(大邑)일 뿐더러

주(周)나라를 위시하여 역대의 제왕들이 도읍으로 삼았던 고성(古城).

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는 천험(天險)의 지세(地勢)를 자랑하던 고장이면서도,

저 유명한 안록산(安祿山)이 일거에 함락시켜 현종(玄宗)을 괴롭힌 고장이기도 하다.

성안에는 넓은 거리 좁은 한길들이 종횡으로 짜 놓은 것 같이 깔려 있었다.
오가는 길손과 장사아치들이 조수처럼 몰려들고 밀려나고 했으며,

일년 열 두달 아침부터 밤까지 시끄럽고 수선스럽고 떠들썩한 풍경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그러나 때는 밤이었다.
삼라만상이 고요속에 싸여서  조용히 잠들었고,

때때로 멀리서 딱딱이  소리단조롭게 한두번씩 들려 올 뿐.
황량한 폐허처럼,

낙양성에는 한없이 침묵과 정숙만이 대지 위에  감돌고 있었다.

성안에서 제일 큰  표국(표局)이 한 집 있었다.

숭양표국(崇陽표局)이라  했다.
백주에도 비적(匪賊)들이 횡행했다.
밤이면 강도들이 출몰했다. 

도보나, 마차나 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길손들은
언제나 이런 불안과 공포를 버리지 못했다.

표국이란 길손들의 호위병 같은 장사였다.

보험(保險)  보송(保送)을 목적으로 하는위객국(衛客局)이라 할 수 있다.

낙양성을 향해서 몰려드는 길손들이나 낙양성에서 딴 고장을 흐트러지는 나그네들이나

이런 불안과 공포에서 안전을 찾기 위해선 미리 표국으로 연락을 해야 했다.

표국에서는 무장을 갖춘 장정 몇 사람과 마차를 내놓아서 이들 길손과 나그네를,
무수한 이불 보따리와 짐짝과 함께 목적지까지 모셔 오고 또 목적지까
호송을 해주어야 거기 대한 사례로 돈을 받게 마련된 것이었다.

일종의 사람의 운송점(運送店) 같은 장사였다.
숭양표국의 큰 대문과 높은  담이 희미한 달빛 속에 한 개 무시무시하고

마어마한 암영(暗影)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국(局) 안의 모든 사람들이 단잠에 골아 떨어졌을 무렵이었다.
정면에서 얼마 들어가지 않은  곳에 여러 방들이 나란히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여러방 가운데  어떤 한 방에서 한줄기 불빛이 희미하게 창밖으로 나왔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흐릿하기는 하나 창호지 위에 비치어 있었다.

방안에는 소년이 혼자 앉아 있었다.
이름을 노영탄(路永坦)이라 하였다.

그는 어둠침침한 불빛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손에 쥔 옥패(玉佩) 하나를

다듬어 보고 어루만젔다. 

준수하게 생긴 얼굴이다.

    그러나 슬픔이 가득히 서리어 있는 얼굴이다.

손안에 든  옥패를 응시하면서 넋을 잃은 사람같이 어떤 회상(回想)에 잠기는 것이었다.

지난날의 일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소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로 석달전.

사천(四川) 안악현(安岳縣) 궁벽한 시골구석에서 바람이 사납게 불고,

비가 모질게 퍼붓던 밤,

소년과 서로 의지하고 단둘이서만 살아오던 노복(老僕) 노성(路成)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임종이 눈앞에 다가드는 처참한 순간에 노복은 한 오락지 마지막 정신을

지로 가다듬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몸에 지니고 있던 옥패 한개를 더듬어 냈다.

소년 노영탄의 눈앞에 내밀면서  띄엄띄엄 구슬픈 음성으로 남겨 놓은 말이 있었다.

 

"……도련님……저… 저는 인제 그만입니다.

제말을 잘 들어 두시기를……십 오년동안이나 숨겨 두었던 비밀입니다.

도련님이 겨우 한 살  나셨을 때 집안이 뜻하지 않은  기화(奇禍)를 입었습죠.

지금의 임금님…그때두  연왕(燕王)이시었습니다.

태조(太組)께서 붕어(崩御)하신 뒤 난국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구실로

어린 태자를 물리쳐 버리시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오르셨으나 그 당시 조정의

일반 대신들도  무릇 충량(忠良)한 선비라면 한 사람도 이에 따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어르신네께서는 태상사(太常寺)의 소경(小卿)으로 계시면서 방효유(方孝孺)

선생을 따라서 맹렬한 반항 운동을  일으키셨습니다.

마침내 연왕께서는 극도로 분노를 참지 못하시고 도련님댁 온 가족에게 모조리

죽음을 내리신 것입니다.  …

이… 이 위태로운 지경에서 저와, 또  다른 하인배 한 친구와 둘이서

도련님과 큰 도련님을 각각 한 분씩 모시고 간신히 도망질을 쳤습니다.

도련님을  모시고 동으로 서로, 떠돌아다니고  숨어 다니고……

    그럭저럭 십오년이란 세월이 흘러……그런데 저는… 저는 인제 마지막…
    이런 사실을 여쭈어 드리지 않고 그대로 갈 수야…."

일각, 또 일각, 노복의 음성에는 죽음이 다가드는 것이었다.

잘라질 듯 잘라질 듯 위태로운 음성을 졸아드는 촛불 같은

마지막 생명의 나머지 힘을 다해서 간신히 이어 나갔다.

 

 "…이 옥패는 그때  뿔뿔히 흐트러져서 몸을 피할 때

한가지 유물로 기념품으로 간직해 두었던 것입니다.

꼭같은 것이 두개가 있었는데  도련님 것은 안쪽으로서 봉(鳳)이 새겨져 있구요……

또  한 개는 형님 되시는 큰 도련님 수중에……

그것은 바깥쪽으로 용(龍)이  새겨져 있습죠. …

큰 도련님께서는 도련님보다 세살이 위시였으니까

지금은 벌써 열아홉살이나……
제가…

제가 죽은 뒤에는 낙양에  있는 숭양표국을 찾아가셔서

저의 몇촌뻘 되는 아우…척굉달(戚宏達)을 만나 보시구…

개가 거기 국사(局師)로 있으니 …
그러시구 유명한 스승을 찾으셔서 무술(武術)을 공부하시어……

부모님네들의 원수는 못 갚아 드린다 하시더라도 …

온 천하를 두루두루…

큰 도련님을 찾아 내셔야만…

저는… 저는… 인제 그… 그만…."

 

힘없는 음성이 목구멍 속으로 졸아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죽음의 베일이 무수한 주름살 위로 조용하고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노복(老僕) 노성은 간신히 여기까지 움직이고 나더니

온갖 기력이 다해버린 듯 눈빛이 몽롱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불과 몇 초 동안.

갑자기 몰아쉬는 가쁜 숨소리가 겨우 서너번.
마지막 숨소리를 삼켜 버렸다.

옥패(玉佩)를 내밀고 있던 손이  철썩하고 방바닥에 떨어진다.
등잔불이 꺼져 버리듯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이었다.

노영탄(路永坦)은 어린  소년의 몸으로  비통한 심정을 부둥켜안고, 

노성의 장사를 치렀으며 뒷일을 수습하였다.

소년의 마음은 쓸쓸하고 처량했다.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버린 파편(破片)과 같은 가슴속이었다.

돌봐 줄 이 없는 시골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하남(河南)땅을 향해서 지루하고 막막한 나그네길을 혼자서 떠나야 했다.
한 달이나 넘는  동안을 가고 또 가고 

마침내 그는 이 고성(古城) 낙양(洛陽)엘 찾아 들었다.

 

팔월
하늘이 새파랗게 드높고, 공기가 맑은 가을철은 낙양에도 장사가  한창 번창한 계절이었다.

숭양표국도 장사가 눈코 뜰새없이 바쁘고 대문 앞 넓은 마당은 출입하는

님들과 마차로 뒤덮여서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소년이 마악 대문 앞을 다다라서 어찌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을 때 주위에
별안간 큰 소동이 일어난 것 같이 요란스런 아우성 소리가 들려  왔다.

길에서 혼잡을 이루며  오가던 행인들이 삽시간에 이편으로 몰리고 저편으로 뭉치고 했다.
제각기 날쌔게 몸을 피하여 길 양편으로  갈라서며 그 중간으로 길을 틔워 놓은 것이다.

소년은 무슨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얼떨김에  어리둥절해서 한편에 서 있노라니 난데없이 급히  달려드는 말굽 소리가

어느 틈엔지 얼굴 가까이 대들고 있는 것 같았다.
훌쩍 몸을 돌이켜 바라보고 선뜻 몸을 피하려는  순간.

웅장하리만큼 큰 몸집을 가졌으며  미끈하기 이를 데 없는

검정 말 한 필이 이미 등덜미까지 달려들었으니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앞다리에 깔려버릴 지경 이었다.


위태로운 찰나.
말에 타고 있던 사람도 당황하여 선뜻 몸을 번쩍 쳐들고 손을 높이 들더니
줄을 왈칵 앞으로 당기고 나서 몸을 다시 굽히고 가벼우면서도 날카로운 음성을 명령했다.

 

"꼿꼿이 일어서!"


말은 뒷발을 주저앉히고 앞발을 구부려서 높이 쳐들었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으흐흐흐흥'하고 목청을 길게 내뽑았다.

앞다리를  쳐들고 마치 사람이 꼿꼿이 서듯이.

말이 흡사 사람처럼  꼿꼿이 서는 틈을 타서  노영탄도

허리를 굽히고 몸을 피하여 길 한 옆으로 비켜설 수가 있었다.

몹시 숨이 찬 가운데서도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을 바라다보자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두 손으로 안장을 한번 슬쩍 짚는 동안 

바람처럼 가볍게 몸을 가로 뻗더니 말 위에서 단숨에 훌쩍 뛰어내려

바로 노영탄 앞에 우뚝 서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하고 서 있을 적에 또 한 필의 말이

난데 없이 말굽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면서 이편으로 달려들었다.

노영탄은 다시 머리를  쳐들고 바라다 보았다.

한  필의 백설 같은 흰  준마(駿馬)가 바로 두 사람 앞을 향하고 대드는 것이었다.

말굽 소리가 느릿느릿 해지면서 새파아란 빛이 주위에서 번쩍하고 퍼져 나가는가 하는 순간

말 위에서 또 하나 다른 사람이 비호같이 날쌔게 뛰어내렸다.

전신에 호수같이  파랗고 시원스런 빛깔의 옷을 입은 소녀. 

노영탄과 먼저 말에서 내린 사람 앞에 그 소녀도 우뚝 섰다.

소녀는 땅에 발을 붙이자 마자

먼저 내린 사람에게 애교가 가득 찬 간드러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 참! 오빠! 오빠는 왜 그렇게 말을 듣지 않아요?

아버지께서 우리들 보고 성(城) 안 거리에서는

절대로 말을 너무 빨리 달리지 말라구 그러시지 않았어요?

그것 봐요! 아차! 했으면 사람을 그대로 깔아 버릴 뻔했지 뭐야?"

 

소녀는 흰자와 새카만 동공이 또렷한 맑은 두 눈을 깜짝깜짝 하면서

노영탄얼굴을 번갯불처럼 단숨에 더듬었다.

 몸에는 수수한 의복을 걸쳤고  먼지 투성이가 된 한개 시골뜨기의 몸차림이었으나

준수하게 생긴 얼굴에는 속세(俗世)에 때묻지 않은 또랑또랑한 정기가 넘쳐흐르고 있는 소년.

무슨 힘에도 굴하지 않을  것같은 꼿꼿한 정신이 감돌고 있는 소년의 얼굴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 유난히 시선을 멈추게 할만한 것이 었으나,

더군다나 이상한 점은 노영탄의 얼굴 모습이 소녀의 오빠 얼굴 모습과

몹시 비슷하생겼다는 점이었다. 

대뜸, 이것을 발견한 소녀는 또다시 몇  번인지

노영탄의 얼굴을 핼금핼금 할듯이 바라다 봤다.

그리고는 조그마한 입을  뾰로통하게 빼물고 오빠에게 몇 마디를 종알거렸다.

소녀에게 꾸지람을 들은 오빠는 두 눈을 부릅뜨더니

손을 들어 노영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넌, 그저 종알대는 것밖에 모르더라!

느릿느릿 말을 타고 다닌다면 그건 나귀를 타는 것보다도 더 따분한 노릇이야. 

또 우리가 어디 노상에서 사람을 치었느냔 말이다.

문 앞에서 내리게 되자마자 이런 녀석과  맞닥뜨리게 될줄이야 누가 알았어?

글세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선뜻 길을 틔워졌는데

이 녀석만 우물쭈물 어리둥절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구…,

말에 치지  않았으니 다행이지만 말밑에 깔렸다 해두

그야 저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린 탓이지."

 

노영탄은 그들 둘이서 주고받는 말이 끝나자

그제서야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 사나이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나이는 불과 스므살이  넘을락 말락.

면목이 준수하게 생긴데다가 패기만만하게 보이는

날카로운 정신력이 두 눈동자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이  청년의 얼굴에는 혈기방장(血氣方壯), 

안하무인(眼下無人) 그런 거만스러운 태도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또 그 소녀는….
나이 겨우 십 육 칠세.
소녀가 말을 하면서 살짝  재빠른 눈초리로 노영탄의 얼굴을 훑었을 때, 

영탄도 그 속에서는 보기  드물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을

단 한번 곁눈질해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은방울이 짤랑짤랑 흔들거리는 것같은 간드러진 음성을 한번 듣고 나니

소년 노영탄의 가슴속에서는 무엇이라 이름지어 부를 수없는 고동(鼓動)이

파도처럼 거칠어지는 것이었다.

무슨  힘이 시키는 줄도 모르고 부지중에 어떤 충동을 참을 수 없어,

또 한번  소녀의 얼굴을 훔치기라도 할듯 힐끗 곁눈질해 본다.

어찌 알았으랴.


바로 이 찰나에.
가을날 맑게 개인 하늘  밑에 파아랗게 가라앉은 호수의 수면같이 깨끗하게
빛나는 소녀의 두 눈에 노영탄을 말끄러미 바라다보고 있을 줄이야.

노영탄은 화끈하게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를 홱 돌이켜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니 가슴속에서 점점 더 커다란 파도가 출렁댔다.
오빠라는 청년이 무슨 말을 또 했는지 그런 것이 귓속에 들어올리 없었다.

소녀도 소년을 바라다보자, 

두 볼이 활짝 불어지며 어리둥절했다. 

넋을 잃은 사람같이 오빠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는 어색하고 부끄러운 웃음을 입속에서만 웃는  듯,
입가에 가느다른 미소가 떠돌자 그대로 오빠에게 말을 던지듯이….

 

"오빠! 오빠는 그저 언제나 오빠 혼자서만 기분이 좋으면 그만이니까…….
남이 권하는 말은 통 듣질 않구서……

아버지께서 아셔  봐요.

꾸지람을 들을 것이 뻔한 노릇이지, 좋아요.

다행히 사람을 밟아 버리지 않았으니 빨리 집으로 들어가요."

 

소녀는 말을 마치자 말을 끌고 오빠와 함께 표국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가면서도 못 잊겠다는 듯, 

머리를 뒤로 돌이켜 또 한번 노영탄을 힐끗  바라다보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는 일찍이 본 일이  없는 시골뜨기 소년이었다.

무슨 뜻이 있는 것 같이 유심히 던져 주는 소녀의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시선,
물결치는  가슴 속의 파도를 누를  길 없이,

소년은 멍청이  대문 안으로 사라지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다보고서만 있었다.

소녀와 오빠가 대문 안으로 들어간 뒤.
이 아슬아슬하고 떠들썩하던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길가의 수많은 사람들도 제각기 흐트러져 버렸을 때,

숭양표국안에서는 손님을 호의하고  다니는 아랫도리 국원들끼리

짐작을 정리하기에 바쁘면서도 틈틈이 다음 같은 말들을 주고받고 했다.

 

"…우리집 이 도련님은 정말 시끄럽구,

까다롭구……성미가 여간이 아니어서
무슨  일이나 자기 고집대루만 해야  배기니…

여러 두령(頭領)님들두 이 도련님한테는 어쩔 도리가 없으신 모양이야!"

 

또 다른 국원 하나가 그 말을 받아 넘겼다.


"자넨, 거기에 대해서 투덜투덜 따타부타할 게 없단 말야!

그분이야 도련님이 아니신가? 그뿐인가? 

그분의 재간이란 우리 같은 위인들이 넘겨다볼 수도 없을만큼 대단하시거든.

지금두 보지 않았나? 그분이 말 위에서 비호같이 몸을 쓰시는

그 놀라운 재간이 바로 대력금강추(大力金剛墜)라는 묘술(妙術)이라네.

기술두  기술이구, 말두 말이구…

만일 그분의  저 흑풍구(黑風駒)가 아니구 다른 말을  바꿔 타셨더라면,

벌써 사람을 깔아 죽이구 야단이  났을 걸세."

 

이때까지도 노영탄은 활짝  열린 대문밖에 어리둥절하여 서 있었다. 

국원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서야  방금 안으로 들어간 도련님과 아가씨가

이 표국의 주인되는 사람의 슬하에 있는 남매 지간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노영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앞으로 썩 대들었다.
국원들에게 척굉달의 있는 곳을 물어 보았다.

척굉달은 바로 표국안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그를 찾아온 소년임을 알고

원들도 두말없이 안으로 인도해 주어서 힘 안들이고 그를 찾을 수 있었다.

노영탄은 척굉달을 만나자,

대뜸 삼촌이라고 불렀다.
노복(老僕) 노성(路成)의 아들 행세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부께서 임종하실 때 이곳에 가서 삼촌을 찾아보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자초지정을 그럴듯하게  고백했다.

척굉달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지라 측은하고 가엾게 생각하고

노영탄이 바로 이 표국에 머무르면서 잔심부름이나 하고 있도록 알선해 주었다.

사흘이 지난 뒤에 척굉달은 표국의 명령을 받고 간부급 두령(頭領) 한 사람
국사(局師) 한사람을 따라서 안휘(安徽)방면으로 길손들을 호위하고 떠나게 되었다.

길손과 짐짝을 잔뜩 싣고  무장을 갖춘 국사(局師)가 그것을 호위하면서

풍당당히 마차가  표국대문 밖 넓은 마당에서  떠나갈 때 척굉달은 조카로만
생각하고 있는 소년 노영탄에게 신신부탁하는 말이 있었다.

 

"인석아! 주인님, 두령님들 심부름 잘해 드리구…… 난 한 달이면 돌아올 테니까
그 동안에  정신 바짝 차리구 뚱딴지같은 짓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란 말이다!"

 

 세월이 흘렀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반달이 지났다.
 노영탄은 숭양표국에서 여러  국사(局師)들과 숙친해질수 있었고

그들의 입에서 숭양표국의 자세한 내막과 사정을 알게 되었다.

본래, 숭양표국의 주인으로 금면불수(金面佛手)라는 별명을 가진 감영장(甘永長)은
무술계(武術界)에서 유명한 숭양파(崇陽派)의 문하생으로서 제 삼대(代) 맨 끝의 제자였다.

나이는 오십이 넘었으며, 

그 얼굴이 흡사 금빛같이 누르스름하고  독특하게 생겼다.
몸에 지닌 탁월한 무술의 재간과 불수필(佛手筆)이라고  하는

남들이 따를 수 없는 특수한 병기(兵器)를  가지고,

강호(江湖)에 더군다나 장강(長江) 양안(兩岸)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슬하에 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밖에 부인 편으로 조카뻘 되는 아들을 어릴 적부터 딸과 함께 키우고 있었다.

이들 둘이 바로 노영탄이  이 집 대문 앞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날

공교롭게 맞닥뜨리게 된 청년과 소녀였다.

숭양파에는 한가지 이상한 규칙이 있었다.
이 파를 창립한 조사(祖師) 숭양장로(崇陽長老) 때부터 일기(一期)의 제자라는 것은

누구나 세 사람만을 수용할 수 있고 사람 수효가 더해도 안되고 덜해도 안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비록 어버이와 아들 같은 특수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먼저 사제의 관계를

엄격히 따지고 나서야 비로소 무예(武藝)를 전수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감영장도 장강(長江) 남북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낙양(洛陽)

유명한 인물이면서도 역시  무남독녀 외딸 하나와 조카뻘 되는 아이를 외하고는

단지 한 사람의 제자를 더 거느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고 간에 또 여하히 간곡하게 부탁을 하고 매달려 보아도

그는 자를 더  수용하지 않았으며, 한가지  반가지도 무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것보다도 더욱 괴상한  것은,

그 자신이 무술을 연마하거나 혹은  제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쳐줄 때에

절대로 딴 사람에게 구경을 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표국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 스승과 제자가 무술이 상당히 탁월하다는 것 알고 있을 뿐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런 재간을 연마하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노영탄도 본래는 이 표국에  머물러 있으면서 주인에게 접근할 기회를 만들
문하생 틈에 끼도록 떼를 써 보고, 무술에 대한 재간을 배워  가지고 평생 소원을

성취해 볼 생각을 마음속 깊이  몰래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형편을 알고서는 노영탄을 우울할 뿐이었다. 

안타까운 낙망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밤이었다.
달빛이 희미하고, 날씨가 싸늘했다.
풀벌레들이 울어대는 가을밤의 그윽한  음향 속에도

소년의 어리디 어린 한만이 가득차 있는 듯.

노영탄은 자리에 누워서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었다.

 

만뢰구적(萬뢰俱寂).
가을밤은 깊어만 갔고, 사방은 죽음같이 고요속에 파묻혀 있었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와 비참한 환경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니, 

닥쳐올 앞날은 망망한 대해와 같을 뿐, 
외롭고 쓸쓸한 심정이 소년의 가슴 속 깊이깊이  벌레처럼 파먹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잠이 올리 없었다.

벌떡 일어나서 등잔에 불을 켜고 혼자 앉았다.
한가지 또 한가지, 

과거지사가 쓸쓸하고 허전한 소년의 머릿속을  번갯불처럼 스치고 지나칠 때
땅이  꺼질 것 같은 긴 한숨만이 연거푸 터져나오는 것 이었다.

등잔의 기름도  졸아들기 시작했고 그대신 창에 비치는 달빛이  뚜렷하게 밝아졌다.

 

바로 이때였다.
노영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문을  살며시 열고 달빛을 따라 바깥을 거닐어 볼 생각을 했다.

한 걸음 문 밖으로 내디디었다.

무심중 눈을 쳐들었을 때.
맞은편 방 들보 위에 한 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매나 수리가 무엇을 채가듯
번쩍 스치고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었다.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그림자 였다.

노영탄이 깜짝 놀라 두 번째 자세히 그편을 바라다 봤을 때는

이미 그 시커먼 그림자는 간 곳이 없었다.

옆방에서 자고 있는 국사(局師)를 깨워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것을 잘못  보고 뚱딴지같은 짓을 했다가는

어른들한테 꾸지람이나 들을 것이고.

어찌해야 좋은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노라니,

별안간 또 다른  시커먼 그림자가 난데없이 나타난 독수리처럼 앞으로 바라다 뵈는

담에서 일곱여덟간쯤 떨어진 먼 곳에서 번갯불같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더니

그 뒤에 있는 화원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이게 대체 무슨 놈들의 도깨비 같은 그림자일까?'
노영탄은 가슴속에 뜨끔했다. 

뒤에 있는 화원으로 말하자면  금면불수(金面佛手) 감영장이 거처하고 있는 곳이다.

이 두 놈의 괴상한 그림자는 필시 우리 주인을 해치려고…….이런 생각이 들자,

노영탄은 손과 발을 담에다 찰싹 붙여서 몸을 감추고 살금살금 기어서

후원을 향하여 들어갔다.

후원 담 밑까지  와서 머리를 쳐들고 올려다보니,

마침 거기에는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몇 그루의 큼직한  고목들이 있었다. 

노영탄은 숨을 죽이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손과 발을  소리내지 않도록

가볍게 놀려 가지고 살금살금 나무 위로 기어올라갔다.

담보다도 더 높직한 곳까지 올라가서 든든한 나뭇가지 한 군데를 찾아 가지

그 틈에  몸을 감추고 머리만 쑤욱  내밀어서 후원 안의 광경을 살펴보았다.

눈 아래로 화원 안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속의 두근두근, 걷잡을 수 없이
마구 뛰는 것이었다.

극도의 긴장.
그러나 그것은 놀랍다고 해야 할지,

기쁘다고 해야 할지 분간키 어려운 광경이었다.

숨소리를 죽여야 하고 찍소리도 할 수 없는.

밤은 깊어 가고 싸늘한 달빛만 깔려 있는 화원에

그 맨 가운데로 과히 넓지 않은 빈터가 있었다.

거기에는 세 사림이 서 있었다.
바로 금면불수(金面佛手) 김영장과  그의 무남독녀 외딸 감욱형(甘郁馨)

리고 조카뻘이 된다는 청년 악중악(岳中嶽)이었다.

감영장의 표정이 심히 엄격하고  위엄이 가득찬 품이 달빛 아래서도

또렷이 내려다보였다.

그는 굵직하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머지 않아서  구월 구일 중양절(重陽節)이  닥쳐오는데

올해 이 날은  바로 우리 숭양파에서 전체 사제(師弟)들이

한 곳에 모여 대회를 열기로 결정되어 있는 날이다.

그리고 이번 대회 중에서 다음 대(代)의 문하를 장악하고

영도해 나갈 만한 후계자를 선출하기로 작정했다. 

중악! 너는 천품이나 자질에 있어서 확실히 출중한 인재다.

뿐만 아니라, 

우리 문하에서 절대적인 자랑으로 삼는 천강검(天강劍)의 무예(武藝)에 있어서

또 너는 희한하고 기묘한 재간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방금 너희들 둘이서  한차례 기초적인 재간을 가볍게  연습하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심히 만족한다.

단지  한가지 장(掌)을 쓰는 기술에 있어서는 아직도 더 연마를 해야겠단 말이다.

네가 이번 대회에 재능을 충분히 발휘해서 찬란한 영광을 독차지하고

우리 파(派) 문하의 면목을 더 한층 빛나게 해 주기를 나는 충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리고 욱형이 너는 진보가 상당히 있는 편이지만 중악한테 비하면 아직도 멀었거든.
너두 더 노력해야 하구, 연습 때두 전력을 기울여서 해야만 돼. 

문하의 영도자와 장로(長老) 앞에서 창피를 당해서야 쓰겠느냐?"

 

 감영장은 여기서 말을 중단하더니 다시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중악아! 어디 검법(劍法)을 한번 연습해봐!

  내 자세히 관찰할 테니……."


악중악은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앞으로 썩 나섰다.

손에 보검(寶劍) 한 자루를  쥐고 빈 터 맨 가운데 떡 서더니,

전신의  정신과 정기를 한곳에  뭉쳐 버리듯,

무술(武術)에 임하는 바탕과 모습을  갖추었다.

왼편 다리를 바깥 편으로 반걸음 내놓고,

바른편 손에 든  칼과 어깨와 나란히 수평의 위치까지 쳐들고

다시 왼편 손을 펴서 꼿꼿이 세우고 앞가슴을 딱 버티어 중심점을 든든히 잡으니 

마치 흐르던 물이 멈추고 서서 그곳을 내려다보는 산악(山岳)과 대결하고

싸움이라도 해보자는 듯한 깔끔하고도 매서운 자세다.

이것이 바로 숭양파 문하의 절대적인 묘기(妙技) 천강검의 무술을

시작하기 직전의 기초적인 자세다.

나뭇가지 틈에 숨어 있는  노영탄이 정신을 바짝 차렸으면서도

정신을 잃고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감영장 그리고 그의 딸 감욱형까지도  숨을 크게 쉬지 못하고 단정히 서서

감히 청년의 눈동자 하나도 흐트러지게 못하는 긴장된 찰나였다.

악중악은 선뜻 칼을 쓰기 시작했다.
한번 칼을 빼어  휘두르기 시작하니

그 빠른  품이 말로써 형용키도 어려울 지경이요,

한 단(段) 또 한 단 무술(武術)의 순서를 거침없이 풀어 나갔다.

놀라운 것은 전후좌우 사방으로  약 이십간이나 됨직한 면적과 공간이

완전히 번득이는 단지 한자루 칼빛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노영탄은 나무가지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안광을 대해서
뚫어져라 내려다봤으나 도리어  머릿속에 어질어질해지고 눈앞에 몽롱해져서
초점을 잡을 수 없고 그가 몸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분간해 낼 수가 없었다.

노영탄은 그래도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시력을 다해서 땅위를 내려다보았다.

보면 볼 수록 더 한층 놀라운 것은

땅위에는 모두 합쳐서 열여섯개의 발자국이 찍히어  있을 뿐인데

그중 네개의  발자국이 하나하나 동서남북의 방위를
똑바로 가리키고 있으며 다시 이 네개의 정위(正位)를 가리키고 있는 발자국
이 각각 세갈래로 갈라져서 열여섯개의 방위(方位)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사람이 날뛰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그  솟구쳐 오르고 뛰고 몸을
옆으로 빼고 뒤로 피하고 하는  품이 흡사 호접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넘나
들며 제멋대로 춤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두개의 발이 디디고 돌아가는 발자국이란

이 열여섯개의 방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한발자국 한발자국마다  찍혀 있는 열여섯개의  발자국을

스칠 듯 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다치지 않고 그 언저리를 디디어 가며

마치 한 개의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노영탄은 어둠 속에 숨어서 혼자 탄복하고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과연 천강검이란  검술이 무술계를 진동시키는  위력을 떨치고 있다는 것이
결코 헛되이 전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다.

뜻밖에도 우연하고 공교로운 기회에 숭양파가 좀체로 전수(傳授)해

주지도 않는다는 비장의 검술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노영탄은 놀라웁다  할지 기쁘다 해야 할지 이루 말할 수도 없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담 아래 화원 안의 정세는

삽시간에 신출귀몰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악중악이 칼을 휘두르는 속도를 다소 늦추는가 하는 순간

그와 동시에 몸가짐도 훨씬 느려졌다.

그러나 그 표정이나 얼굴 모습이 전보다도 몇배 더 앙칼지고 매서워지며
힘도 훨씬 더 드는 모양이었다.

숨소리를 죽이고 자세히 들어보자니 

한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거기 따라서 휘익! 휘익! 하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일어나며

그 검끝으로 옆에 있는 화초 나무를 한번 가리키기만  했는데도

그것들은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수그리고 추욱 늘어져 버리는 것이 것이었다.

이 신출귀몰한 재간이야말로  천강검이라는 검술 가운데서

제 십이단(段)에 드는 가장 무서웁고 절묘한 기술로써

추운언월십이식(追雲偃月十二式)이라고하는 것이다.

무술에 있어서 제일 어려웁고  무서운 것은 단련되고 연마되어서

몸안에 축적된 신묘한 힘 즉 내공(內功)의 힘으로써 발휘되는 재간이다.

눈을 한번 부릅뜨고 앞가슴을 떡 버티고 부동의 자세로 노려보기만 해도

대방이 꼼짝 못하는 불가사의한 힘.

화초 나무가 단번에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수그리고 축 늘어져 버리게 되는 무서운 힘.

이런 따위 내공의 힘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는 재간이란 무술이란 것을 터득하고
연마해서 상당히 높고 깊은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재간이다.

이 추운언월십이식이란 어디까지나 이런  내공의 재간을 써 가지고

칼을 움직이고 휘둘러서 또한 내공의 재간으로 발휘되는 순바닥의 힘을 돌파해 버리는 데

전문적으로  쓰여지는 기술이다.

그리고 열여섯개의  발자국이란

내공과 반대되는 외부의 힘으로써 발휘되는 재간,

즉 외공(外功)의  재간을 이용해서 첩경(捷徑)의 방법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순식간에 악중악은  십이단(段)의 검술을 모조리 끝내고 최후의 한단(段)인

검평남두(劍平南斗)라는 기술을 써서 처음과 같이 역시  한 일자(字)로 쭈욱뻗고

손바닥을 꼿꼿이 일으켜 세우는 자세로 연습을 완전히 끝냈다.

감영장은 천강검을  익숙한 솜씨로 끝내는  악중악의 세련된 모습을 끝까지 보고 있더니,

자못 통쾌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치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핫핫핫! 너는 정말 천하의 독보(獨步)가 될  수 있다.

단지 아직도 다소 황당하게 구는 결점만  완전히 벗어버린다면

모든 제자들이나 선배들 가운데서도 출중한 재간이 될 거다."

 

옆에 섰던 감욱형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는 말.


"오빠! 아주, 너무 뻐길 것은  없어! 못마땅하면 한번 나하구 시합을 해보잔 말야."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나무가지 틈에 숨어서 처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노영탄은  제일 먼저 소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기쁘기도 하고 놀라웁기도 했었으나

악중악의 검술 연습에 정신을 파느라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그 말하는  품을 내려다보고 방울이 짤랑대는 것 같은 음성을 듣게 되니

새삼스럽게 가슴속이 두근거리고 긴장된 파도가 물결치는 것이다.

그날 처음으로 놀라운 가운데  얼떨김에 소녀를 힐끗 한번 보고 난 다음 십여일동안을 두고

노영탄의 가슴속에서 처량하고 비통한 정서 외에 또 한가지 무엇이라

이름지어 부를 수  없는 안타깝고 쓸쓸한 수심이 잔뜩 서리어 있었다.

소녀의 아리따운  모습을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맑게 빛나는 큼직한 두 눈동자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소년 노영탄은 세상에 태어난 이후 어떤 소녀도 유심히 바라다본 일이 한번도 없었다.

무슨  이상야릇한 마음이 움직인다던가 하는 경험을 가져본 일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만은 이다지도 얄궂은 심정의 충동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일까?

사실은 처음으로 소녀를 대하게  된 그날부터 노영탄은 안타깝게도 한번 더 만나 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나 신산스러운  처지와 환경을 돌이켜 생각했을 때

이런 이상야릇한 마음속의 충동을 스스로 억눌러 두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오래간만에  소녀의 간드러진  말소리를 귓전 가까이  듣게 되고 깊은 밤,
싸늘한  달빛 아래 여유작작하고 태연스럽게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그저 가슴속이 마구 두근거릴 뿐 어떻다고 형언키도 어려운 심정이었다.

악중악이 감욱형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어넘기더니 무슨  말을 할 듯 했을 때,
금면불수(金面佛手) 감영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욱형이! 너두 입으로만 까불지 말고 어디  한번 칼을 써 보란 말이다.

 구경 좀 하게……."

 

감욱형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

선뜻 칼을 들고 빈터 한복판으로 나섰다.
악중악이 하던 것과 똑같은  몸가짐과 발을 떼어놓는 순서를 따라서

천강검 검술을 한바탕 연출해 보았다.

노영탄은 비록 문외한이기는  했으나,

소녀의 재간이란 것은 아무래도 악중악에 비해서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소녀의 몸을 쓰는 폼이나 발을 떼어놓는 동작이 다소 산만했을 뿐만 아니라
최후의 십이단에 이르러 칼끝을 한번 앞으로 뻗쳤을 때

그 휘파람 소리 같은 가볍고도 매서운 음향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또 칼끝으로 화초 나무를  가리켰을 때

겨우 그 잎새들만이 흔들흔들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맑게 개인 가을날 밤하늘에는  어느덧 달이 기울고 별이 흘렀다.

풀  위에는 이슬이 내리고 서리 가 덮이고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딱딱이 소리가 들려 왔다.

그제서야  감영장은 청년과 소녀를  거느리고 그들의 방으로  돌아갔으며
노영탄도 들어왔던 길을 살며시  되돌아 나와서 제 방으로 돌아가서 잠을 잤다.

이튿날이었다.
점심때가 돼 올 무렵  숭양표국 문전에 긴수염이 반백이 된 노인이 한 사람 나타났다.

마침 노영탄이 문안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 노인은 노영탄을 보고 머리를 한번 끄떡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야! 수고스럽지만 너의 집  주인님께 고봉상인(孤峰上人) 낙이산(樂以山)이

사람이 찾아왔다고 전해다우."

 

노영탄은 노인의 말을 듣고 한번 아래위를 유심히 훑어보고 나서야

그가 보통 노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을 수 있었다.

옷자락이 가볍게  나부끼면서도 점잖은 품이라든지, 

신선 같은 풍태, 

도인(道人)같은 골격,

두 눈에서는 사람을 쏠 듯한  광채가 번쩍번쩍,

말을 할 때
그 음성이 또랑또랑하고 맑을 뿐만 아니라,

한마디  한마디가 듣는 사람의 귓전을 진동시킬 것 같은 품이,

필시 까닭이 있어서  찾아온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당장에서 선뜻 대답을 하고  몸을 돌이켜 안으로 들어가자니,

마침 주인  감영장이 화원으로부터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고봉상인이 찾아왔다는  노영탄의 말을 듣자 마자,

급한 걸음으로 당황해서 대문 밖으로 달려갔다.

노영탄이 뒤를 따라서 대문간까지 갔을 때는 벌써 감영장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공손히 한 옆에 서서 노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선배형님께서 이렇게 모처럼 찾아오신 것을 영접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셔서 우선 좀 몸이나 쉬시구……."

 

노인 낙이산은 손을 휘젓고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렇게 범절을 찾을 것까지는 없네. 

나는 우리 두령(頭領) 되는 분의 명령을 받고 한가지 사정을 통지해 주러 온 것 뿐이야."

 

말을 마치고 두어 걸음 앞으로 가까이 나서더니

감영장에게 무슨 말인지 주 나지막한 음성으로 몇 마디 하는 것이었다.

노인의 그  말을 듣고 나더니,

무슨  까닭인지 감영장은 얼굴빛이  핼쑥하게 변하여 힘없는 음성으로 단지 한마디.

 

"하아! 그것 큰일났군요."

 

감영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대문 밖에서

차마(車馬)의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오고, 

그 뒤를 따라서 웅성웅성 떠드는 많은 사람들의  음성이 한데 뒤범벅이 돼 가지고

숭양표국의 대문 앞까지 와서는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멈추어지는  것이었다.

감영장과 노인 낙이산도 이 소리를  듣더니 똑같이 깜짝 놀랐다.

노영탄도 옆에 섰다가 영문도  모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물쭈물할 틈도 없었다.

감영장과 노인 낙이산은 벌써 선후를 분간할 틈도 없이,

둘이  다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노영탄도 그 뒤를 쫓아가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대문 밖으로 나타나게 되자,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던  여러 사람들의
음성이 졸지에 딱 그쳐 버리고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수많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감영장의  얼굴만 바라보고

그중 어떤 한 사람도 말이 없는 것이다.

노영탄은 표국의 마차 한 채가 바로 대문 앞에 멈추어진 것을 발견했다.
사흘 전에 호남(湖南)지방을 향해서 떠나갔던 제 4호 마차였다.
마차는 전신이 흙투성이가 되어서 바라다 볼 수도 없는 어지러운 꼴이었다.

흙투성이가 된 마차에는 마부 조승(趙勝)이 차원(車轅)에 혼자 앉아 있으며
머리는 온통 헝겊으로 칭칭 감고 있었다.

세 사람의 국사(局師)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차문은 꽉 잠겨져  있었다.

조승은 감영장을 한번 보더니 

말 부리는 앞자리에서 엉금엉금 기다시피 간신히 내려왔다.

 

 "두… 두령님……."


한 마디를 채 다하지를 못하고,

극도의 아픔과 괴로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두어 걸음 비틀비틀 하더니

그대로 땅 위에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감영장은 차부 조승의 상처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님을 알자,

조금 전에 노인  낙이산의 말을 듣고 핼쑥해진 얼굴이

일종의 침통한 분노의 빛으로 변했다.

표국 안으로부터 여러 국사들과 하인배들이 달려나왔다.

일각을 지체치  않고 급히 조승을 떠메고 안으로 들어갔다.

노영탄은 한편 다른  하인배들과 같이 마차를 국(局)앞으로 끌어들였다. 

제서야 대문밖에 몰려들었던  구경꾼들도 흐트러졌다.

안으로 떼메어  들어온 조승은 잠시  후에 차차 정신이 도는  모양이었다.

표국 안의 여러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감영장은 무슨  말을 물어 보려 한즉,

조승은 한편 팔을  쳐들어서 머리에 칭칭 감긴 헝겊을 풀어 보이는 것이다.

 

 "앗!"


 여러 사람들은 자지러질 듯 놀라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나가자빠졌다.

 조승은 양편 귀를 송두리째  잘리었으며 핏덩어리만 커다랗게 엉겨 붙어 있
 품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끼치게 하는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승은 구슬픈 음성으로 죽어 넘어가는 사람같이 힘없이 말했다.


 "두령님, 마차 안을 들여다보십쇼."

 

 이 말을 듣고 여러 사람들은 뜰 한편 구석에 멈추어져 있는 마차 옆으로 달려갔다.

 하인배 한 사람이 황급히 손을 뻗어 마차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더니 단지 한마디.


 "에그머니!"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두어 발자국 뒷걸음질쳐서 물러서더니

한 손을 마차를 가리킬 뿐,

입을 크게 벌려 혓바닥을 깨물고  바보처럼 한참 동안이나
말을 못하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들도  그제야 머리를 길게 뽑아서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모든 사람들은 또한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고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마차 안은 텅비어 있었다.

짐짝 한개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개의 시체가 나동그라져 있을  뿐이었다.

시체라고는 하지만 보통 사람이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처참해서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것은 그 세개의 시체가 꼭같이

머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모가지 없는 송장.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극악하고 잔인 무도한 소행의 결과가

모든 사람들을 전율과 경련 속으로 몰아넣는 무시무시한 순간이었다.

눈을 떠서 바라다보기도 처참한 세개의 시체. 모가지가 없어진 상처를 큼직
대접같이 둥글게 온통 헝겊으로 틀어 막혀져 있으며 엉겨 붙은 선지피 이로

아직도  시커먼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괴상한  것은 시체의 앞가슴에 낙인이 하나씩 찍혀 있는 것이다.

그 낙인은 백골로 화한 사람의 얼굴, 즉 '해골바가지'의 형상이었다.
보면 볼수록 무서운 죽음.
분노와 저주에 부들부들 떨리게 하는 흉악무비한 소행.

이 세개의 시체는 아직도 겉뜨리고 있는 옷차림으로 보아서

분명히 세 사람의 국사들이었다.

노영탄은 형언키 어려운 공포 속에 싸여서 감영장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찬 서리가 깔려  있는 것 같이 싸늘한  감영장의 얼굴에서는

극도의 분노가 화산의 분화구처럼 터져날 것만  같았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쓰다 달다  말이 없이 무서운 눈초리로  마차를 노려볼 뿐,

이 처참하고 긴장된 순간에  고봉상인 낙이산이 혼자서 입을 열었다.

 

"아하! 누가 이 지경이  될 줄야?

내가 한 걸음만 일찍 왔던들……, 

허지만

회양방의  비도(匪徒)들의 소행은 너무나  악독하다! 잔인하다!

직접으로 원한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이다지 극악한 독수(毒手)로서 대하다니!

놈들은 옛날의 감정에 다시 불을 붙여 가지고 노상 하던 버릇을 또다시 되풀이하자는 것이다!"

 

감영장의 얼굴에는 비장한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이미 어떤 각오 앞에  마음을 든든히 먹은 모양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뒷일을 수습하도록 분부하고 한편 

노인 낙이산과 더불어 총총히 뒤에 있는 화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영탄은 이 한  장면의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고 

다시 낙이산의 하는 말을 듣고 보니 

여기에는 반드시 기기괴괴한 사정이  얽혀져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양방이라는 거시 무엇인지는,

지금까지는  한번도 들어 본 일이 없던 말이었다.

이 회양방이라는 것과 감영장과는 무슨 풀지 못할 원한이 있기에

이다지도 흉악무도한 짓을 하는 것일까?
세월은 쏜살같이 달아났다.

어느덧 구월 구일 중양절(重陽節) 도 앞으로 사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날 밤.

노영탄은 이경을 치는 딱딱이 소리가 들릴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기척이  끊어지고 사방이 조용해지자 매일 밤이면 그렇게 하듯이 살금살금 방문을 나와서 

아무도 모르게 화원 담 밑으로 갔다.

큰  고목나무 위로 조심조심  기어올라갔다.

여기서 무술 연습하는  광경도 구경하고,
이 짧은 틈을 타서나마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리운 소녀의 아리따운 모습을 훔쳐보자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며칠전 그날밤,  그들이 무술(武術)을 연습하는 광경을

한번  구경하고 난 다음부터 마음속으로 혼자서 작정한 바가 있었다.

남의 연습하는 것을 훔쳐  가며 구경하는 기회를 타서,

자신도 그것을  배워 가지고 남 못지 않게  탁월한 무예(武藝)를

몸에 지녀 보자는 야심만만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매일 밤, 잠잘것도  잊어버리고 그때만 되면 빼놓지 않고
남의 연습을 도둑질해서 구경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목적 이외에도 또 하나 다른 엉뚱한 속심도 있었지만.
오늘밤에도,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화원 안을 내려보자니

감영장과  그의 딸 감욱형, 그리고 악중악  세사람외에 고봉상인 낙이산이

그들과 같이 끼어  있었다.

악중악이 한바탕 천강검 검술을 연습하고 난 뒤에 감욱형도 매일 하듯이

을 들고 빈터 한복판으로 나섰다.

열 여섯개 방위(方位)를 완전히 돌고 나와서

저 추운언월십이식(追雲偃月十二式)의 재간 중에서

그  두 번째 방식인 홍소우제(虹銷雨霽) 무예를 연습하려고 했을 때였다.

전신을 별안간에  허공으로 솟구쳐서  수십척 높이까지 날으더니, 

공중에서 몸을 뒤흔들고 다리로 앞을  차면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 가며

마치 춤을 추는 듯, 또다시 서서히 빙글빙글 돌아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 한가지 방식의 재간은  완전히 내공(內功)의 힘이 얼마나 있다는,

그  강한 기세를 표현해 내는  것이며 오로지 몸 안에 축적된 진기(眞氣)로써

허공을 찌르고 주므르고 정복하는 것이다.

실로 한 오락지 외력(外力)이란 것의 힘도 빌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신묘(神妙)한 기술이다.

그런데 감욱형이 몸을 솟구려 올랐을  때,

그 위치가 공교롭게도 노영탄이 숨어 있는 고목나무에서 아주 가까운 지점이었다.

노영탄은 난데없이 소녀의 전신이 자기 얼굴 앞에서 불쑥 솟구쳐 오르는 것을 보자,

극도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소리가 가빠졌다.
부지중에 '후룩!'하고 나오는 콧소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감영장과 악중악, 낙이산  세사람이 서 있는 곳은 멀찍하니  떨어져 있었고,
또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하느라고 누가 담밖에 숨어서 화원 안을

넘겨다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감욱형과는 거리가 몹시 가까웠다.
정신이 어떤 한개 초점으로  송두리째 집중되었고 귀와 눈이 날카롭게

긴장 되어서 머리카락 한 가닥의 움직임이라도  듣고 보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찰나에 사람의 호흡 소리와 콧소리가 들려 오다니.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담가에 서 있는  고목나무 위에서 들리지 않는가?

감욱형은 땅으로 떨어지는 짧은  틈을 타서 힐끗 나뭇가지 틈으로

시선의 화살을 꽂아 봤다.

과연, 거기에는 시커먼 그림자가 숨어 있지 않은가?
감욱형은 땅위에 내려서자 갑자기 몸을 담쪽으로 홱 돌리더니

또 한번 껑충 뛰어 솟구쳐 오르면서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매섭게 호령을 했다.

 

"이 친구! 이리 내려와 봐!"


손뼉을 한번 치는가 했더니

몸은 벌써 공중에 떠가지고 담안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빠르게 휘어잡았다.

 

"우지끈! 우수수!"


수선스런 음향과 함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한줄기 시커먼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하고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이런 광경을 보고 있던 감영장, 낙이산 그리고 악중악  세 사람은

일제히 오싹하고 날랐다.

불과 이삼일 전에 손님을 호송하러 나갔던 국사 몇 사람을 처참하게 잃어버렸고,
또 낙이산 노인의 정보로써 다년간 종적을  감추었던 회양방(淮揚邦)의
비도(匪徒)들이 옛날에 먹었던 앙심을 끝내 풀어 버리지 못하고 숭양퍄(崇陽派)의
문하를 찾아서 생사를 결단하는 보복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판이다.

이렇게 긴장되고 위태로운  처지에서 날을 보내고 있던 감영장인지라, 

딸의 이상한 말소리를 듣자 

짐작으로 이미 비도(匪徒)들이 주변에 가까이 침범해 온 것으로만 알았다.

 

"예! 욱형아! 그게 뭐란 말이냐! 그 시커먼 그림자가……."


감영장의 음성은 떨려 나오기조차 했다.

그는 사랑하는 무남독녀 외딸이 어떤 불의의 봉변을 당하지나 않나 하는 것
제일 겁내는 것이다.

꼼짝 않고 서 있던 몸이 어느틈엔지 비호같이 감욱형의 등뒤로 날아갔다.
한편 팔을 한번 훌쭉 쳐드는가 하는 순간 그는 벌써  딸의 앞을 가로막았고,
허리를 한번  꿈뜩했을 때는 이미 담위로  올라가 있었다.

과연  고목나무가지 위에는 한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바라다 보였으며

그 그림자는 아래로 뛰어내려서 도망질을 치려는 판이었다.

감영장은 바른편 팔을 쭈욱  뻗었다.

윽하고 힘을 손바닥 안으로 모아서  한번 쥘락펼락 하는가 했더니 

어느틈엔지 날쌔게도 그 시커먼 그림자를 꽉 움켜쥐고

공중을 번쩍 쳐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이크, 들켰구나!'


하고 그것을 깨달은 찰나  몸을 피해서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던 판에 난데없이
어떤 무시무시한 힘에  집어삼켜져 버리듯이 몸이 공중으로 붕 뜨게 된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질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달아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어찌해야 좋을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나

그냥 꼼짝 못하고 담 위로 붙잡혀 가는 데로 몸을 내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노영탄이 담 위로 잡혀 나오는 것을 보자 감욱형과 악중악은


"뭐? 저게?"


하고 동시에 꼭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때의 노영탄은 부끄럽고  창피스러운 꼴이란.

당장에 머리를 푸욱  수그려 버렸다.

감영장은 딸 욱형이와 악중악이  놀라는 것을 보자

이상하게 생각하고 대뜸 그들에게 추궁했다.

 

"어찌된 일이냐? 인석은 얼마 전에 우리 표국에 와서

잔심부름을 하고 있는  녀석인데 너희들, 어떻게 인석을 아는 것이냐?"

 

악중악은 서슴치 않고 며칠전 대문 앞에서 말을 내리려고 했을 때

일어났던 사건을 자세히 고해 바쳤다.

감영장은 이런 사실이 있었음을 알게 되자 우선 낙이산(樂以山)노인에게 물었다.


 "사형(師兄)님, 요즘  며칠 동안 시끄러운 일들이  잇달아 발생되고 있는데,
 인석은 혹 저 비도(匪徒)놈들과, 무슨 관계라두 있는 녀석이 아닐까요?"

 

 낙이산은 한참 동안 묵묵히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나서야 대답을 했다.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이  고장 녀석 같지는 않은 걸……

  확실히  수상한 녀석이군! 어디 한번 심문을 해 보지."

 

이 말을 듣고 감영장은  서슬이 시퍼렇게 무서운 음성으로 노영탄에게 호령하는 것이다.


"네 이놈! 괘씸한  녀석 같으니라구…… 여기가 어딘 줄  알구,

야삼경 깊은 밤에 나무 틈에 숨어서 엿을 본단 말이냐?

도대체 무슨 까닭이 있어 이런 당돌한 짓을 하는 거냐?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네놈은 당장에……."

 

 노영탄은 부들부들 떨면서 솔직히 사실대로 고백했다.


"저는… 저는 본래 이곳으로…

여기서 국사로  계신 척굉달선생을 찾아온 놈입니다.

두령님께서 무예가 탁월하시고 고명하심을 알게 되옵고  조석으로 우러러 뵈옵던 중, 

어린 마음에 저도 그런  재간을 좀 배워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듣자 하오니 두령님께서는 제자를 더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시지도 않으신다 하오니…

저는 비관과 낙망을 참을 길 없고 안타까운 심정을 누를 길 없사와

규칙에 어긋나는 당돌한 짓인 줄은 알았사오나…… 

이렇게…

그밖에는 추호도  다른 뜻은 없었사오니……
너그러이 생각하시옵고……."

 

말을 마쳤을 때 노영탄의 쑥스럽고 창피하고 부끄러운 꼬락서니란.
감영장과 노인 낙이산은 이 말을 듣더니 한동안 서로 쳐다보기만 하면서

중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그대신, 한 옆에  서 있던 악중악이 한바탕 껄껄대고 냉소를 참지 못했다.

그리고는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런, 발칙한 놈! 정말 앙큼스런  놈이로구나.

나는 처음부터 네 녀석이 상쩍고 괴상한 놈으루 알고  있었다!

너는 올바른 자식은 아냐!

그렇지 않다면……

네놈의 말대루 무술을 배워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우리들의 연습하는 광경을 엿보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네 녀석두  몸에 지닌 소양이 재간이 얼마쯤은 있을 것이 아니냐? 

좋아! 잘 됐어! 일어나서 같이 한번 해보잔 말이다.
팔단(八段)이나  십단쯤만 감당해 낸다면……

그때는 네  녀석의 말을 믿어 주마!"

 

악중악의 얼굴에는 당장에 사람을  집어삼킬 듯한 분노와 흥분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정말 건방진 태도였다.

조롱이 가득찬 악중악의 태도였다.


'사람을 깔봐도 분수가 있지, 이건 뭣으로 아는 것일까?'

 

그러나 이 순간에 노영탄(路永坦)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야삼경  깊은 밤에 남의 집 후원에를 살그머니 몰래 들어온 것부터  잘못이었고,

더군다나 숭양파에서 남에게 전수(傳授)하지도 않는다는 비장의 무술을 도둑질하듯

훔쳐서 봤으니 저지른 죄, 이에 더 큼이 있으랴?

그러나 그뿐이냐?

오매불망하던 아리따운 소녀 욱형  앞에서 마치 심판을 기다리는

죄수의 락서니가 돼 버렸으니, 

그 창피하고 부끄러운 심정을 무엇이랴 형언해야 좋을 것이냐?

노영탄은 그저 죽여줍쇼!

처분만 기다립니다 하는 듯이 고개를 푸욱 수그리고 잠자코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악중악의 너무나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보니,

천성에 남에게 굴하거나 지기를 싫어하는 노영탄인지라

전신에 뜨거운 피가 펄떡펄떡 뛰는 것을 참을 길이 없었다.

더군다나, 감욱형의 그 가을날  호수같이 맑고 시원스런 두 눈이

자기를 어져라 바라다보고 있지 않은가?

동정을 하는 듯.
또 멸시를 하는 듯.

이렇게 되고 보니 소년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만 것이다.

이도 저도 망설이거나 거리낄 것 없이 악중악과 한번 자웅을 결하여

설욕을 해 볼까 이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것은 달걀을 가지고 바윗돌을 깨뜨려 보겠다는 것 같이

어림없고 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철부지의 자존심이란 것이

그런  것을 헤아릴 겨를 없게 하는 것이다.

거기다 또 감영장의 엄중한 선고를 내렸다.
 

"네 녀석의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라손 치더라도,

네놈이 우리 숭양파의 전비장(不傳秘藏)의 무술을 몰래 훔쳐  본 놈이다!

중대한 규칙을 어긴 놈이니 중벌에 처하게 될 줄로 미리 알구 있거라!"

 

이렇게 말하면서 감영장은 두  눈을 추상같이 싸늘하게 크게 떠서

노영탄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이런 무서운 호령을 듣고도 추호도 당황하거나 굴하지는 않았다.
몸을 떠억 버티고 고개를  반 듯이 쳐들었다.

    그리고 쨍쨍한 음성으로  명백히 말했다.

 

"소생은 이미 중대한 규칙을 범했습니다.

그 죄 마땅히 중한 벌을 받아 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오나 '선비를 죽일 수는  있으나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이제 이 도련님께서 소생과 무예를 겨루어  보자고 하옵시니

소생 비록 더불어 대적  하올 주제가 못됨을 잘 알고 있사오나,

구차스럽게  일신의 모욕을 그대로 참지는 않을까 하옵니다."

 

당돌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년의 말을 듣자  감영장도, 낙이산도 깜짝 놀랐다.
두 눈이 휘둥그래진 것은 소녀 욱형이었다.

노영탄을  바라다보면서 놀랍다는 듯, 호기심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리고 한편으로는 찬성한다는 듯, 칭찬할 만 하다는 듯……

심히 묘한 표정이었다.

 

"흥, 어디서 천하에 발칙한 녀석이 뛰어들어서……."


악중악은 안하무인격으로 오만한 태도를 종시 버리지 않았다.
콧소리를 흥흥거리며 냉소하는가 했더니  당장에 보검 한 자루를 잡아서

것을 노영탄의 발 앞으로 땅 위에 팽개쳐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따로 감욱형에게 칼  한 자루를 가져오게 해서 그것을 손에 들고

을 훌쩍 날려 빈터 한복판으로 뛰어나와서 노영탄을 정면으로 대하고

자세를 차리며 우뚝 섰다.

노영탄은 하는 수 없이 허리를 굽혀서 어슬렁어슬렁 그 칼을 집어들고

악중악을 향해서 비실비실 일어섰다.

악중악은 가볍게 웃어 젖혔다. 

가히 더불어 상대할 만한 것이  못되니,

시해 버려도 좋다는 듯이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를 내뱉듯이 던졌다.

 

"핫핫핫! 내가  주인의 입장에 있으니  네깐 녀석을 너무 괴롭히기는 싫다!
어디 너 혼자서 삼단쯤 그냥 해보란 말이다."

 

노영탄은 이런 말을 듣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악중악과 더불어 말다툼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연습하는 것을 훔쳐 가며 구경하는 동안에 머릿속에 기억해 둔

얼마 되지도 않는 천강검(天강劍)검술을 흉내내서, 선뜻 칼을 수평선을 쳐들고

조금도  칼날이 흔들림 없이 태양이라도 꿰뚫을  것 같은 번갯불처럼 직통으로

악중악의 인후(咽喉)를 찌르려고 육박해 들어갔다.

악중악은 노영탄의 칼쓰는 법을 보자 깜짝 놀랐다.
이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 녀석이 감히 천강검의 검술법을 쓸 줄 알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끝이 인후 앞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선뜻 머리를 쳐들고 몸을 흔들더니

정동(正東)의 방위(方位)에 발을 디디고서 다시 불쑥 북쪽을  향해 몸을 떨치고 훌쩍 뛰면서

번쩍! 하고 제일단의 술법으로써 노영탄에게 다시 덤벼드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칼을 비스듬히 눕혀  가지고 힘있게 휘둘러 악중악의

왼편 겨드랑 밑으로 쳐들어갔다.

악중악은 깔깔 웃어 젖혔다.
웃어 가면서  노영탄의 쳐들어오는 칼을 막아내고, 

별안간 몸을 땅에  붙일  같이 나즈막하게 쭈그리더니

그 찰나에 앞으로 비호같이 달려들어 어느틈엔지 노영탄의 앞가슴 가까이 돌진해 들어갔다.

번갯불같이 날쌘 속도로  왼편 팔을 조금 뻗어서 노영탄의 바른편 겨드랑이를 위협하더니, 

옷에 달린 단추 한  개만 떨어뜨려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몸을 다시  나르듯이 미끌어뜨리는가 하는 순간,

훌쩍 노영탄의 등뒤로 가서 우뚝  서면서 칼을 번득이는 것이다.

노영탄은 악중악이 앞가슴을  향하고 대들었을 때,

싸움을 집어치우고  꽁무니를 빼 버릴까 했었으나 그럴 겨를도 없었다.

또 악중악이 삼단을 양보한다고  했으니

웬만큼 해볼 줄 알고 견디어 볼 각을 했었으나,

단추를 떨어뜨려 주는 것을 보니

이것은  처음부터 자기를 희롱하려 덤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일 악중악이 나를 희롱하는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실력을 발휘해서

 대결하고 싸운 것이라면, 나는 벌써 급소를 찔리어서 뻗어 버렸을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했을 때  노영탄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못 이겨

두 귀가 확확 달아오르고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러나 또 한번 이를 악물었다.

전신의 힘을 칼에 집중해서 이번에는 몸을 굽히는 체 하고

악중악의 복부를 스치면서 육박해 들어갔다.

악중악은 여전히 서두는 바도 없고 당황해 하는 기색도 없다.
복부를 안으로 꾸부리고 가슴을  움츠러뜨려서 선뜻 한 걸음 물러서더니

대로 땅 위에 꼿꼿이  버티어 서서 노영탄의 칼날이 다시 스치고 지나갈  때,
별안간 펄쩍 뛰어서 내달으며 왼손으로는 노영탄의 팔뚝을 덥석 움켜잡고

른손으로 칼날을 번개같이 나꿔채서 공중으로 훌쩍 던져 버리는 것이다.

노영탄은 팔과 손이 쩌릿쩌릿하다고 느낀 순간,

칼을 벌써  어떤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힘에 끌려서 빼앗겨지고 말았다.

공중으로 던져진 칼이 다시 악중악의 손에 와서 잡히기까지는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노영탄은 그저 놀랍고 무서울 뿐.
악중악은 태연자약하게 버티고 서서 지극히 가벼운 음성으로 호령을 했다.

 

"어디? 다시 한칼 더 받아 보겠느냐?"


호령이 끝나나 보다  하는 순간,

노영탄은 번쩍하는 칼날의 시퍼런  섬광(閃光)을 느꼈을 뿐이다. 

눈앞에 어찔어찔하고 천지가 빙글빙글 몽롱한  속으로 맴도는 것 같았다. 

가슴 앞에 선뜻! 하고  무엇인지 싸늘한 것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이와 꼭 같은 순간에 이 광경을 구경하고 서 있던 감욱형이.


"에그머니나!"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비틀 고꾸라질 것 이 구는 것이었다. 

노영탄은 악중악의 칼날에 한번 다치기만 한다면  죽지는 않는다 해도

상처를  입게 되리라는 행각이 퍼뜩 일어났다.

그런데  웬일인지 선뜻하는 찬바람같이 싸늘한 감촉을 느꼈을 뿐 별로 이상하달 것이 없었다.

머리를 쳐 들어보자니 앞가슴  옷자락이 악중악이 칼끝으로 그어져서

한 개의 커다란 을(乙)자 형상으로 찢어진 채 아가리를 벌리고 있지 않은가?

자칫했으면 피부나 살이 그 글자 모양으로 그어졌을 아슬아슬한 판이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핫!"


악중악은 칼을 거두어 한 손에 든 채로 옆으로 비켜서서 껄껄대며 앙천대소 하는 것이다.

감영장과 노인 낙이산은 입을 봉하고 무거운 침묵을 지킬 뿐이다.
감욱형의 두 눈에 별안간에 쌜쭉해졌다.
악중악을 쏘아보면서 한참 동안이나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악중악은 비록 자기의 재간을 발휘하지도 않았고,

또 어떠한  특별한 검술을 써서 노영탄을 찔러 죽이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여태까지  사람을 긴장시키고 괴롭히는 짓이 너무나  도에 지나치는 것이라고

감욱형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부지중  두 볼이 새빨개지며, 

그 조그마하고 귀여운 입술을  뾰로통하게 빼물고

오빠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하는 것이다.

 

"오빠는 상대방이 무예를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남을 혼이 나게 하구…

옆에  있는 나까지두 검이 나서 죽을 뻔했으니 말야! 오빠는 정말 나뻐요! 너무 짓궂어요."


이 말은 물론 악중악을 나무라는 말이다.

그러나 노영탄의 입장에서 듣고 있노라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  괴롭기 이를 데 없고,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 없는 말이었다.

 

'확실히 상대방은 나를 희롱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놀림감으로 알고, 웃음거리로 알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참기 여려운 것은 자나깨나 한시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서

가슴 태우던 아리따운  아가씨 앞에서 마치 고양이에게  잡힌 생쥐가

희롱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것같은  기막힌 꼬락서니가 되어 버렸으니,

일후에 무슨  낯을 들고 소녀를 다시  바라다볼 수 있을 것이랴?

접근해  볼 수도 없고, 가깝게 사귀어 보기도 힘들게 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 아닌가?

노영탄은 본래 사람된 품이 정열적이고 성격이 강직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극도로  부끄러움과 분함을 생각했을 때는, 

그저 당장이 한  주먹에 악중악을 때려눕히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돌이켜  생각했을 때…….

갑자기 얼토당토 않는 딴 생각이 머릿속에 소용돌이쳤다.
퍼뜩!

실성한 사람같이 달려가서 또 다른 한 자루의 칼을 집어들었다.
목을 선뜻 쳐들고 칼날을 옆으로 댔다. 자결해 버리자는 것이다.

노영탄이 마악 칼로 목을 그어 버리려고 하는 찰나에,

저편에  있던 노인 낙이산이 눈치 빠르게 알아채고 손을 훌쩍 높이 들더니, 

바람같이 다리를 날려 덤벼들었다.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을 벌써  손바람(장풍(掌風) 앞으로도 계속 손바람이라는
말로 나온다)을 못 이겨 땅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감영장도  단숨에 달려들며 다소 누그러진 얼굴빛으로 점잖게 말하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너는 사람된 품이 지극히  정열적인 것 같다.

우리 숭양파의 철칙을 범했으니  응당 규칙대로 중벌에 처할  것이로되,

네 나이 어려서  무지한 탓으로 돌릴 것이니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가거라!"

 

노영탄은 이 말을 듣고 보니,

분노와 수치심이 새삼스럽게  북받쳐 오르는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서 하늘이나 칠 듯이 높이 쳐들어 보이고, 

태연자약하게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뚜벅뚜벅 점잖게 걸음을 옮기어

후원 문 으로 나와 버렸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날이 훤히 밝아 오고 있었다.

뽀얗고 하얀 색채가 이미 동녘 하늘에 차츰차츰 퍼져 나고  있을 때였다.

고 깨끗한 새벽녘 쌀쌀스런 바람이 휙휙 매몰차게 얼굴에  끼쳤으며,

오싹 오싹 싸늘한 한기(한기)가 옷깃으로 스며들었다.

아직도 이른 시각이었다.

낙양성(洛陽城)은 침묵과 정밀(靜謐)속에서  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넓고 시원스럽게 뻗어  나간 한길에는 몇 마리  개들이 컹컹 짖고 있을 뿐,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노영탄은 두 어깨가 추욱 쳐져서 머리를 푸욱 수그리고 아무런 목적도

방향도 없이 낙양성 밖을 향하고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이 또다시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악중악의 저 오만하기 짝이 없던 태도.
그러나 이편을 희롱하고 덤볐을  때의 그 신기하고 오묘한 무술(武術)의 재간.

그것을 생각하면 이번에 난생 처음으로 당한 모욕은 평생을 두고도 씻어 볼

날이 없을 것만 같았다.

소녀 감욱형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잊어버리려 애써도 잊을 수  없는 소녀의 모습은 얼마나 아리땁고 사랑스러운 것이냐?

수정같이 맑고 가을날 하늘같이 시원스러운 큼직한 두 눈. 순진하고 활달한 태도.

노영탄은 부지중 긴 한숨을  참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또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자신이 비참한 신세야말로 이제 망망한  대해(大海)에 알몸뚱아리로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의지할 곳도, 찾아볼 사람도 없다.
싸늘한 바람이  얼굴에 정면을 끼치며  찢어진 앞가슴 옷자락이 너펄거리는
틈으로 찬 기운이 파고들어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얼마를 걸었는지 다시 머리를 쳐들었을 때야

    그는 자신의 성밖에까지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앞에는 한없이 널브러진 가을날 새벽의 허허벌판.
인적이 끊어진 광막한 황야에는 날짐승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노영탄은 이미 잎새가  떨어져 가지만 남아 있는  큼직한 나무 밑에 다다랐다.

하룻밤 동안 잠도 자지  못했으며, 음식이라곤 먹은 것이 없다.

거기다가 쌀쌀한 벌판 바람까지 쉴새없이 몸에 끼치니

이야말로 기한(饑寒)이 교박(交迫)하여 견딜 수 없으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누를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두 줄기 눈물이 볼을 적시는 것이었다.

절망과 비관에  싸여서 울고만 있느니
보다는 살아서 욕되고 구차스러운 꼴을 참고 견디느니 보다는

깨끗하게 죽어서 그럼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비장한 결심을 한 끝에 이를 악물고 허리띠를 풀어서 굵직한 나뭇가지를 찾아

그라미를 만들어서 걸어 놓고  다시 큼직한 돌을 집어다 놓고 발돋움을 해서
머리를 그 동그라미 속으로 디밀어 버렸다.

돌을 발로 툭 차  버리니 몸은 허공에 떠서 매달렸고 목구멍이 졸아들며

이 막히는 것이었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죽음이 일각일각 닥쳐오는 순간 

디선지 난데없이 요란스러운 말굽 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말굽 소리는 바람같이 빨랐으며 미구에 다리 아래로 달려들 것만 같았다.
노영탄은 목구멍이 꽉  막혀 버리고 머리가 뻐개질  것 같은 괴로움을

참기 어려웠다.

악을 쓰거나 발버둥질을  쳐 볼 생각을 했으나 이미 그럴 만한  힘도 없었다.

괴로움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눈앞으로 시커먼  암흑만이 닥쳐왔

점점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별안간 인적이 끊어지고  죽음같이 조용하기만 한 허허벌판에서 

푸드득! 하고 새들이 숲속에서  놀라 튀어 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필의 백설같이 하얀 준마(駿馬)가 말굽 소리  공중을 날으듯,

살같이 노영탄의 목을 매고 있는 나무 밑으로 달려들었다.

말을 타고 있는 소녀는 푸른빛 의복에 푸른빛 신발. 엷은 남빛 배자를 곁들였으며,

역시 보랏빛  보자기를 머리에 썼고, 몇 가닥의 앞머리가  벌판을 치는

새벽바람에  멋들어지게 휘날리고 있었다. 

등에 긴칼을 둘러메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고 귀여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용맹한 기개까지  드러났다.

말이 채 나무 밑에  다다르기도 전에 한 마리 새가 날으듯이

소녀가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올라 두 손을 한번 높이 쳐드니

노영탄이 목을 매어 있는 나뭇가지는 통째로 찢어져서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매달린 채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소녀는 몸을  한번 꿈틀하더니 바람처럼  가볍게 노영탄의 곁으로 내려앉았다.
손을 뻗어 머리를  짚어 보고, 또 앞가슴을 만져 보더니 

급히 허리에 차고 있는 피대(皮袋)속에서 환약 두알을 더듬어 내서

입안에 틀어넣어 넘어가게 해주고  두 손을 가슴을 문지르고  주무르고

한바탕 안마(按摩)를 해주는 것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노영탄은  차츰차츰 정신이 돌기 시작했고

    두눈을 멀거 떠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홀연, 안색이 변하여 입을  크게 딱 벌리고도 입술만 간신히 놀려서  얼버무릴 뿐,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얼마만에야 겨우 입밖으로 나오는 말이


"그… 그… 그대는? 나… 나… 나는? 이게… 이게 꿈이요? 생시요?"

 

소녀는 방그레 웃으면서 방울 같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건 꿈이 아녜요. 또 그대도  죽은 것이 아니구……이건 분명히 생시의 일이죠."

 

노영탄은 보드랍고 귀여운  소녀의 음성을 듣자,

도리어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몸을 급히 일으키고 그제서야

제대로 말을 했다.

 

"가… 감(甘)씨댁 아가씨! 이 노영탄은 본래가 미천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기는 하나,

이렇게  아가씨께 구명(救命)의 은혜를 입었으니 일후에 어찌  경솔하게 생(生)을 마치리까? 

기필코 발분 노력하여 이 하잘  것 없는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와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보람있게 살아 보리이다.!"

 

노영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진실로 폐부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닥쳐올 그의 인생이란 거칠고 사나웁고  망망한 세파(世波)뿐이었다.
그 무서운 세파를 헤치고 흘러갈 곳도 없는 외로운 소년이었다.

천하가 넓다 해도 발붙일  곳이 없는 외롭고 쓸쓸한 신세를 생각하고, 

절망과 비관 끝에 자결해 버리려던 순간.

그것도 숨이 마지막으로  끊어지려고 경각을 다투던 위기일발의 아슬아슬한 찰나에,

어찌 꿈엔들 생각했으랴?

천만뜻밖에도, 자나깨나 안타깝게  가슴 졸이며 그리워하던 바로

그  소녀에게 구원을 받게 될 줄이야.

이 한가지 공교로운 운명만  생각한다 해도,

노영탄은 삶에 대한 무한한  의지와 용기가 북받쳐 오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리따운 소녀를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살아야겠다!

이를 악물고라도 살아보자!'

 

허허벌판 가을날 새벽 쓸쓸하고  싸늘하던 색채가 별안간 훤하고

맑고 싱싱한 색채로 변해서 소년의 시야 앞에 광명과 희망으로 뒤덮는 것만 같았다.

힘이 생긴 것이다.
살고 싶고, 살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감욱형도 소년의 말을 듣더니 두 볼이 새빨개지고 고개를 포옥 수그리고 줍은 듯 말했다.

 

"그대가 우리 집  후원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자니,

옷은 찢겨졌고, 몸에 지닌 것은 없고… 또 그 비분을 참지 못하는 가엾은 표정.

소녀는  그때 퍼뜩 그대가 이런 성급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은 생각을 했어요.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자니,

나뭇가지  틈에 숨어 있던 그대를 소녀가 찾아내지만  않았던들
이런 풍파는  없었을 것이니……,

소녀로  인연하여 일어난 불상사이고  보면 어찌 모른 체하고 내버려두리까?

또 그대  연세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나 면목에 넘쳐흐르는 정기(正氣)……,

과히 악한 일을  할 위인 같지도 않은지라,
소녀는 부친과 오라버니를 속이고 몰래 이곳까지 달려왔더니……, 

과연 그대는 나뭇가지에 목을 매고 소녀가 한 걸음만 늦었던들

어찌 그대의 귀중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리오!"

 

이렇게 말하고 몸을 다시 일으킨 소녀는

말안장 위에서 보따리 하나를 집어 내더니

노영탄에게 주면서 덧붙여 말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이르지 않고 소녀 집을 나온 지도  오랬으니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이 몇 가지 안되는 의복과 몇 닢 안되는 은전을  받아 두셨다가
노자에 보태 쓰시기를…… 될 수 있으면 이 고장을 떠나

타향으로 가시고 심을 무술(武術)을 배우고 싶은 결심이 있으시다면

두루 두루 훌륭한 선배를 찾아보실 것이요….

강호(江湖)에는 가는 곳마다  기인(奇人)과 이사(異士)가 허다하니

단지  끝내 몸조심하고 실수나  잘못이 없으시도록 명심하시기를……."

 

노영탄도 몸을 일으켜 소녀와 마주 대하고 섰다.


"아가씨의 극진한 정성과 호의, 길이길이 명심불망하리이다.

일후에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하늘이  도와주시는 기회가 있다 하면

분신쇄골(粉身碎骨) 은혜에 보답할 것을 맹세하오!"

 

보따리를 받아 들고 말 위에 올라앉은 소녀를 쳐다볼 뿐 더 할 말이 없었다.
네 개의 눈동자가 맏부딪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순간,

말은  비호같이 돌아서서 달아나 버렸다.

그것은 점점 새카만 그림자로  변해서 연기 같은 먼지 속을 사라져 갈 뿐이었다.

 

 

 다음은 일편단심(一片丹心)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