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여인의 향기

여인의 향기 - 2부 11장

오늘의 쉼터 2013. 6. 23. 19:13

여인의 향기 - 2부 11장

 

 

끈적끈적하고 습한 밤이 어두워가고 있다.

수진은 암내를 풍기는 사슴이고 나는 암내에 취해 질주하는 야생마일 뿐이다.

아니 태초의 아담과 이브처럼 선악과의 열매를 훔치고 본능에 충실한 생명체이다.

시간이 갈수록 수진의 보지는 나의 페니스의 질주에 단련되어가고

쾌감의 늪 속에 허덕인다.

수진은 몇 번인지 모를 오르가즘을 느끼고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를 흘린다.

“아 으! 그, 그만. 나, 죽을 것 같아. 어떡해......”
“하 음! 진이가 옆에 있으면 미치겠어.”

수진과 나는 짧은 시간이지만 현실을 망각한 시간 속에 희열의 밤을 보낸다.

지쳐서 잠이 들었기에 아침 해가 뜨는 것도 모르고 늦은 시간에 눈을 떴다.

창문 커튼사이로 밝은 햇살이 스며들고 태양은 중천에 떠 있었다.

수진은 발가벗은 알몸으로 어린아이처럼 가슴속에 잠들어 있다.

환희의 늪 속을 헤매며 매달리기도 벅차 피곤한 모양이다.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빠져 나오려는데 잠이 깬 그녀가 매달리며 앙탈을 한다.

“아 잉......! 더 자면 안 돼!? 나, 조금만 안고 있어.”
“벌써 시간이 얼마나 됐는데, 배 안고파!?”

“아! 내가 밥 차려줄게.”
“진이가 음식 할 줄 알아!?”

“피 잇~! 나, 김치찌개 잘 끓여.”
“그럼 해봐.”

그녀는 토끼처럼 발가벗은 알몸으로 침대에서 튀어나온다.

팬티와 브래지어를 걸치고 두리번거리더니

옷걸이에 걸려있는 아내의 잠옷을 걸친다.

투명한 잠옷이라 그녀의 아담한 둔부와 나긋한 허리가 들어나 보인다.

주방으로 깡충거리며 걸어가는 사랑스런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주방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세면을 끝내고 타월로 닦으려는데 현관 문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수진이가 밖으로 나가는 것 같다.

그런데 아내의 잠옷을 걸치고 무슨 일로 밖으로 나가는지 모르겠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것인가!

주방의 음식 쓰레기통이 있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런데 세면장 밖으로부터 별안간 악을 쓰는 소리가 들린다.

“너! 왜 여기 있어? 너, 옷차림이 이게 뭐야! 누구 옷을 입고 있어? 못된 계집애!”
“.........!?”

아뿔싸! 아내의 목소리다!

내일 온다던 아내가 돌아왔단 말이다.

벼락같이 터져 나오는 아내의 목소리에 온 몸의 피가 아래로 쏟아지는 것 같다.

어찌해야 하는가! 머릿속이 공백상태가 되고 갈팡질팡한다.

순간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 침착해야한다고 내 자신을 추스른다.

아내에 대한 변명도 그렇지만 수진이가 걱정된다.

세면장 손잡이를 잡는 손이 떨린다.

세면장 문을 열고 나간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너 언제부터 이 짓거리를 한 거야!

어린계집애가 못돼먹은 짓을 하고,”
“.......죄송해요.”

수진은 하얗게 질려 주방 앞에 서 있고,

아내는 시퍼렇게 살기등등하여 고함을 치고 있다.

수진에게 삿대질을 하는 아내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아내 스커트 꼬리를 붙들고 서 있던 연지가 울음을 터트리며 내게로 온다.

연지를 끌어안는데, 힐끔 쳐다보는 아내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나를 쳐다본 아내가 더욱 분을 삭이지 못하고,

수진의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머리채가 당겨진 수진이 거실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어린년이 어디서 배워먹은 수작이야. 너, 내손에 죽어봐라.”
“여보! 진정해, 당신답지 않게 왜이래.”

결과가 어찌되었던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다.

연지를 내려놓고, 수진의 머리채를 움켜쥔 아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아내와 수진 사이를 막아섰다.

아내는 시근덕거리며 포악한 하마처럼 나를 노려본다.

훌쩍거리던 수진이 그 틈을 타서 안방으로 들어간다.

아내는 수진의 뒷덜미라도 낚아챌 기세이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한 아내의 손이 금방이라도

나의 뺨을 후려칠 것만 같다.

세상의 시간이 모두 멈추어 버린 것 같은 순간이다.

갑작스런 상황에 연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내와 나를 번갈아 오려다본다.

격한 흥분으로 숨이 막히는지 아내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자기는 정말.......!? 뭐하는 짓이야!”
“그냥.......! 아침을 같이 먹으려고.......”

“지금 나한테 변명하는 거야! 나더러 이해하란 말이야?”
“수진이가 장난기가 많잖아! 정말 아침식사를 같이 하려고.......”

“차라리 아무 말 하지 마!”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내가 발악을 한다.

뚱뚱한 몸으로 버티고 서있는 아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안방으로 들어갔던 수진이 나온다.

잠옷을 벗고 자신의 미니스커트와 셔츠를 걸친 모습이다.

나를 힐끔 쳐다보는 수진의 얼굴에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다.

안방을 나온 수진은 말없이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빠져 나간다.

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동자에 이슬이 맺힌다.

발갛게 충혈 된 눈빛의 아내와 시선이 마주친 상태에서 침묵이 흐른다.

지금 상태에서는 어떤 변명도 아내의 분노를 가라앉게 할 수는 없다.

도리어 더욱 큰 의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나와 아내를 번갈아 올려다보던 연지가 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새파랗게 질린 아내가 연지를 들어 안으면서 한마디 내뱉는다.

“너무 추잡해! 당신 얼굴 안 봤으면 좋겠어.”
“당신이 오해하는 거야. 나는........”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아내는 연지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쾅!’하고 안방 문 닫히는 소리가 감옥의 철창 내리는 소리같이 들린다.

멍하니 서 있다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온 세상의 생명들이 사라지고 폐허가 된 것만 같다.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공허감을 주체할 수가 없다.

소파에 기대서 혼란한 상념에 잠기면서 시선이 진열장 밑으로 갔다.

바닥에 떨어져 진열장 밑에 반쯤 들어가 있는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무심코 사진을 집어 들고 보았다.

아내와 낯선 남자가 나란히 찍은 사진이다.

비만인 아내보다 체구가 당당한 남자가 아내의 어깨위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이다.

아내의 고향 친척 이었던가!

배경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전주역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아내의 친척 중에는 사진의 모습 같은 남자가 없다.

내가 모르는 친척이었던가!

역까지 배웅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역에서 만난 남자인가.

아내에게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닌지.

나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다른 남자를 사귄 것은 아닌지.

그럴 리 없다.

나와의 육체관계도 두려워하는 아내에게 내연의 남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왠지 마음만 더욱 혼란스럽다.

모든 것을 망각하고 싶다.

어제 전화 통화를 했던 친구, 인호라도 만나서 술에 취하고 싶다.

사진을 들고 망설이다가 서재로 가서 책상 서랍에 넣고 나온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내는 침대위에서 잠이 들었는지 꼼짝하지 않는다.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지를 껴안은 채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아내의 널찍한 등의 작은 흔들림을 느낀다.

옷장을 열어 바지를 갈아입고 점퍼를 걸친다.

안방 문을 열고 나오는데 아내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는다.

집을 나와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은영의 집 앞에서 멈칫 거린다.

아! 그녀는 아버지가 편치 않다고 친정에 간 것을 새삼스럽게 떠올린다.

대로변에 나와 제과점 안을 들여다본다.

혹시나 수진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미정에게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수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손님 시중을 드는 미정의 모습이 보인다.

유리창 사이로 시선이 마주친 미정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꾸부려 인사를 한다.

억지웃음을 흘려보내고 걸음을 옮긴다.

휴대폰을 꺼내 친구, 인호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음이 얼마가지 않아서 인호가 전화를 받는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렸다면서 무교동에서 만나자고 한다.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탔다.

수진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걱정이 된다.

택시 안에서 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가고 연결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울면서 뛰어나간 수진의 모습을 떠올리니 안심이 되지 않는다.

다시 수진에게 통화를 시도한다.

의외로 밝은 목소리가 튀어 나온다.

“응! 오빠!”
“미안해! 어디야?”
“음, 괜찮아, 지금 성희네 집에 와있는데, 베란다에 나와서 받는 거야!”
“정말, 미안해!”

“아니 괜찮다니까. 오빠만, 날 사랑해주면, 괜찮아. 어디 가는 거야?”
“응! 친구하고 술 한 잔 하려고.”
“나하고 마시면 안 돼?!”
“벌써 약속 했는걸. 다음에 같이 하고, 친구하고 있어.”

“알았어! 오빠하고 있고 싶은데, 속상하다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내일 기획사로 올 거지?”
“응! 갈게.”

휴대폰으로 수진이 입맞춤을 하는 ‘쪽!’ 소리가 난다.

약속장소인 카페에서 인호를 만났다.

인호의 밝은 모습에 비해 나 자신이 초라해 보인다.

캠퍼스 시절에 인호는 공부밖에 모르던 친구였다.

그런데 핸섬하게 변한 인호의 모습을 보니

내 인생은 뒷걸음하고 있는 기분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이기에 반갑기는 했다.

술잔이 오가면서 인호는 자기자랑을 늘어놓았다.

“요즘 의뢰인이 어떻게 많은지 바빠 죽겠어.”
“주로 민사.......?”

“그렇지 뭐. 형사사건은 돈도 안 돼.”
“주로 무슨 사건이 많지?”

“시대가 그러니까, 재산싸움도 많지.

내용을 들여다보면 여자가 관련되지 않은 게 없어.”
“그래! 행복하니?”

“행복!? 다 그렇지 뭐........”

카페 안에는 잔잔한 칸초네가 흐르고 있었다.

휴대폰 문자 도착 음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을 하니 수진에게서 온 것으로 ‘오빠! 술 많이 마시지 마!

사랑해♥’ 라는 문자였다.

수진의 문자를 보니 한결 마음이 즐거워진다.

그때 발밑까지 치렁치렁하는 플레어스커트를 걸친 여인이 인호에게 다가온다.

삼십대 가까운 여인이 인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한다.

“어머! 지 변호사님 오셨네요.”
“하하~! 미스 송! 지난번엔 미안하고 고마웠어.”

“고맙긴요. 잘 들어 가셨어요?”
“덕분에.......”

미스 송이라는 여자가 카페 주인인 모양이다,

서로 주고받는 눈빛으로 보아 평범한 사이는 아닌 것 같은 예감이다.

미스 송이 나에게 목례를 하면서 인호의 등 뒤를 지나친다.

인호의 어깨에 미스 송의 손이 스치고 지나간다.

인호가 어깨를 스치는 미스 송의 슬며시 잡는다.

자잘한 눈빛을 보낸 미스 정이 찰랑거리는 플레어스커트 자락을 끌고

카운터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스커트 위로 들어나 살랑거리는 둔부가 몹시 성적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성(SEX)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한 것인가!

지금까지 당당함과는 다르게 나와 시선이 마주친 인호가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사실은.......한동안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어.”
“왜.......!?”

“하하~! 세상 살다보면 여자 싫다는 남자가 어디 있어!

바람 좀 피웠다가 이혼 당할 뻔 했지.”
“하하......! 너 같은 샌님이........!?”

“그런 소리 마! 나도 남자야.”
“그래 지금은 아내하고 괜찮아?”

“두 손 싹싹 빌었더니, 다시 그러면 죽어 버린다나!”
“다행이군. 인호, 너의 아내도 꽤 미인이잖아!?”

“그렇지! 그러나, 어디 생전 예쁜 꽃 하나만 바라보나!?

아내한테 들키지 않게 다른 꽃송이를 따는 거지. 스릴 있잖아. 하하하......!”
“어떤 여자였는데?”

“의뢰인이었어. 결혼한 남편이 이 년 만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시댁과 재산 다툼하는.”
“정말 좋아했던 모양이지?”

“지난 얘기지만, 세상에 이렇게 열정적인 여자도 있구나 하는.”
“지금도 그 여자와 연락 해?”
“간간이.......! 얼마 있다가 독일에 있는 오빠한테 간다는군.”
“........!”

인호의 얼굴에 씁쓸한 그늘이 스쳐간다.

문득 인호와 내가 비교된다.

아내도 어느 시기가 되면 인호의 부인처럼, 나를 이해할는지!

아내는 원래 성격이 밝고 깊이 생각하며 지혜로웠다.

말씨는 많지 않지만 상대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인상이었다.

연지를 낳고 바로 임신이 되었는데,

자궁외 임신으로 자궁 한쪽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고부터 아내가 변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생활주변을 정리해야 하겠지만,

아내도 나를 이해하고 다시 출발했으면 좋겠다.

물론 내 잘못이 큰 것은 알지만, 욕망과 감정은 가깝고,

이성과 규율은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오래간만에 만났기에 인호와 두서없는 속마음을 털어 놓으며

술잔으로 우정을 승화시킨다.

늦은 시간에 거나하게 취해서 인호와 헤어졌다.

술이 취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불이 꺼져 어둠에 쌓인 집안은 적막하기만 하다,

어두운 주방으로 가서 냉수를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주방 안을 비춘다.

식탁에는 식탁보가 덮인 저녁식사가 준비 되어 있었다.

술도 마셨지만, 혼자서 식사할 생각이 없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아내는 연지를 껴안고 잠들어 있다.

정말 잠든 것일까? 그런데 침대 위에는 모포가 두개였다.

하나는 아내와 연지가 덮고 있고, 하나는 나 혼자 덮으라는 뜨인 모양이다.

아내가 드디어 냉전을 선포한 것인가 보다.

옷을 벗고 세면장으로 들어가 대충 씻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침대로 올라가 눕는다.

침대가 흔들려도 아내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들어온 것을 모르는 체 하는 것은 아닌지!

어느 시간이 되면 서로의 생각을 정리하겠지만,

숨이 막힐 것 같다.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렇지만 술기운에 잠이 든다.

아침에 눈을 뜨니 마치 낯선 집에서 잠을 잔 것만 같다.

거실로 나가니 주방에서 아침식사준비를 하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인다.

세면을 하고 나와 출근 준비를 한다.

주방으로 가니 아내가 준비한 아침식사가 식탁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아내에게서 찬바람이 싸늘하게 일어난다.

아내는 시선을 마주치기도 싫은지,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수저를 들려고 하는데 현관 밖에서 아내의 언성을 높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와 언쟁을 하는지 궁금해서 거실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정원에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서 있는 수진 엄마와 마주선 아내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아내가 수진 엄마를 향해 악을 쓴다.

“이사비용 줄 테니, 집 비워 달라는데, 웬 말이 많아!”
“도대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재계약 한지 며칠 됐다고. 못 나가! 누구 마음대로.”

“못 나간다고!? 내 집 갖고, 내 마음대로 못해~!”
“세상에 법도 눈물도 없어? 갑자기 어디 가서 집을 구해!?

이유도 없이, 뭐 잘못했다고.”

“이유 없어! 내가 쓰려고 하니까, 집 비워줘.”
“그렇게는 못해! 수진 엄마 그런 사람 아니잖아!?

법대로 하자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래! 나 미쳤다고 생각하고 나가!”
“못 나가!”

정말 아내는 독이 오른 것 같다.

더 이상 그녀들의 언쟁을 보고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여자들의 다툼에 끼어들 수도 없는 입장이다.

입맛이 없어서 식사를 할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한 동안 목소리를 높이던 아내가 거실로 들어온다.

그리고 뿌르르 안방으로 들어간다.

양복을 걸쳐 입고 집을 나선다.

출근을 하면서 모든 사물이 정지된 느낌이다.

기분은 무척 우울하지만 월요일이라서 챙길 업무가 많았다.

지난주 업무 실적도 평가하고, 주일 계획도 검토하느라 분주해진다.

직원회의에 참석하고 팀장의 브리핑을 받는다.

팀장의 브리핑하는 목소리가 동굴 속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왕왕 거린다.

그래도 회사에서는 업무를 하느라 시간을 잊을 수가 있다.

결재 서류를 들여다보는데, 하이힐 소리를 내며 다가온 한지영이

책상위에 커피 잔을 올려놓는다.

“어제 뭐하셨어요? 전화 기다렸는데.”
“음, 친구 만났어.”

“피곤해 보여요.”
“친구하고 술 한 잔 했더니.......”

억지로 어설픈 미소를 띠며 한지영을 올려다본다.

오늘따라 말쑥한 정장차림을 한 한지영이 정숙하게 보인다.

예전과는 달리 직원들의 이목이 두려운지 한지영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지 머뭇거리던 한지영이 눈가에 자잘한 미소를 띠워 보이고 사무실을 나간다.

점심시간에 팀장과 직원 몇이서 어울린다.

한지영도 같이 합석하였다.

직원들은 담소를 나누면서 식사를 하지만,

그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나만의 생각에 잠긴다.

나의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것일 가!

한지영이 곁눈질로 나의 표정을 살핀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수진과의 약속시간이 다가온다.

출장 계획이 있지만 팀장에게 부탁하고 택시를 탄다.

을지로의 연예기획사들이 있는 거리에서 내려 걸음을 옮긴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을 행해 줄달음치는데,

나는 알 수 없는 길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수지의 연예기획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건물 프런트에는 공연 복장 차림으로 뛰어가는 텔레비전에서

낯익은 여성그룹을 알아볼 수 있었다.

휴대폰 벨이 울리기에 받아보니 수진의 톡톡 튀는 목소리다.

“어디야? 오빠!”
“아! 지금 프런트에 와 있어! 몇 층이지?”

“5층으로 올라와.”
“알았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려서는데 수진이 토끼처럼 뛰면서 반가워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스킨십을 한다거나, 매달리지는 않았다.

수진의 옆에는 험상궂은 젊은 남자가 서있었다.

수진이 이제부터 담당할 매니저라고 소개한다.

남자가 ‘차종환입니다!’ 라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안내를 받아 넓은 회의장으로 들어간다.

토론장처럼 원형으로 탁자와 의자가 배열되어 있었다.

실내에는 수진 또래의 젊은 여자와 화려하게 치장한 부인이

나란히 앉은 모습이 눈에 띠었다.

새로 들어온 멤버 성희 모녀인 것 같다.

그리고 회사 담당직원들과 미정의 모습이 보인다.

미정이 아는 체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한다.

미정의 옆에는 시장을 보다가 들린 것 같은 복장을 한 여인이 보인다.

미정의 큰언니라고 짐작한다.

서류를 든 직원들이 부주하게 움직이고 머리를 빗어 올린 중년신사가

들어와 허리를 굽혀 보이고 중앙에 앉는다.

직원 한명이 일어서서 인사를 한다.

“저는 기획실장 이성구입니다.

지금부터 와일더 가족을 모시고 오리엔테이션을 하겠습니다.

먼저 본 기획사의 민덕형 사장님을 소개 올리겠습니다.”
“민덕형입니다. 만나 뵌 분들도 있지만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우선 자세한 내용은 이 실장의 설명이 있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협조 바랍니다.”

기획사 사장이 일어나서 굽실거리며 인사를 했다.

오리엔테이선이라고 하지만 일방적인 계약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어딘지 억압적이고 형식적인 분위기를 느낀다.

멤버들은 긴장한 모습이지만, 참석한 사람들에게서 진지함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기획실장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저희 제트라인은 국내 굴지의 기획사로서 해외진출해서 활동하고 있는

연예인만도 아시다시피 인기를 달리고 있는 스클피, 초코렛, 캣츠락, 등 활동 중이고.......

방송국들도 저희 제트라인을 무시하면 드라마나, 연예프로그램을 진행 하지 못할 정도이며..........”

기획실장의 장황한 설명은 기획사의 자랑이고, 어찌 보면 엄포였다.

중요한 것은 기획사는 돈을 벌자는 목적이었기에 얼마나 연예지망생들을

이용하려는지 모르는 것이다.

기획실장의 계약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미 멤버들에게 각서를 받았지만, 연습생 시절에 회사에서 들어간 경비로

손해를 받고 있고 앞으로도 얼마의 비용을 충당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도리어 수혜자가 비용부담을 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문화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회사가 부담한다고 한다.

대신 향후 일 년간은 무보수로 활동을 하고,

일 년 후부터 기획사에서 제시하는 일정 비율을 보수로 지급받는다고 한다.

또한 계약기간은 5년마다 재계약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40여항이나 되는 계약조건 속에 중요한 것은 기획사가 제시하는

스케줄에 불참하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인들이 언제 빛을 볼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노예화하는 조건이었다.

꿈을 키운다고 하지만, 세월이 흘러 수진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장황한 설명에 이어 사장과 기획실장이 계약은 당사자에게 맡긴다는

배짱과 오만의 너스레를 떤다.

계약서 싸인을 하기 전 틈을 내서 옆에 앉은 수진에게 물었다.

“진아! 조건이 힘든데, 꼭 하고 싶어?”
“할거야! 다른데서 경험 있는 성희도 하는걸. 난 꼭 하고 말거야.”

“후회 할 텐데, 난 진이가 실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난, 후회 안 해.......그리고 성공 못해도, 오빠 사랑만 있으면 돼.”

주위 시선을 살피면서 수진이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수진이 눈을 찡긋 감아 윙크를 하고 시치미를 뗀다.

수진이 그토록 원하는 것이라면 이제 와서 별 도리가 없다.

직원이 내미는 계약서에는 이미 수진의 확인 싸인이 있었다.

가족 란의 빈칸에 내 이름을 적고 싸인을 했다.

가족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계약을 체결하는 기획사의 업무에 쓴웃음이 난다.

계약서 확인이 끝나고 간단한 다과를 차려놓고 대화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다과를 차려놓은 기획사측이 자리를 떠나고,

멤버의 가족들도 자리에서 일어서 나가기 시작한다.

멤버들과 기획사측과 별도의 오리엔테이션이 있다고 하기에 수진과 긴 이야기도 못하고

기획사 건물을 빠져 나왔다.

냉전중인 아내와의 거리감을 느끼는데,

왠지 수진마저 빼앗기는 기분이 든다.

허전함에 젖어 회사로 돌아왔다.

어떤 정신으로 하루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친정에 간 은영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틀 후에 올라온다고 한다.

심신이 지쳐 퇴근을 하려고 사무실을 나선다.

복도를 지나다가 마주친 오 팀장과 직원 두 명이 간단히 술 한 잔 하러 가는 길이라면서 잡아끈다.

평상시 같으면 회식장소 외에는 직원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한다.

직원들이 불편해 하기도 하지만, 대화를 해도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오늘의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고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다.

회사 입구를 나서는데 출장을 다녀오는 직원들과 마주쳤다.

그들 중에는 최부장과 고객지원실의 미스 정의 모습도 보인다.

최부장이 술자리를 같이 하려던 직원을 불러 세운다.

“김석진씨! 내일 보험금 지급할 서류 어떻게 했지?”
“아! 제 책상 서랍에 있는데요.”

“내일 아침 일찍, 계약자가 온다는데 주고가지.”
“네! 지금 들릴게요.”

김석진이 다녀오겠다면서 다시 들어간다.

오 팀장과 다른 직원 박상우, 그리고 나는 다시 입구로 나선다.

출장 다녀온 직원들 중에 묻혀있던 미스 정이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린다,

미스 정의 시선이 박상우에게 향하고 있다.

미스 정의 시선을 받은 박상우가 오 팀장과 나를 의식하며 난처한 표정을 한다.

오 팀장은 그들이 주고받는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미스 정이 오 팀장에게 말을 건네다.

“팀장님! 술 마시러가세요?”
“아! 미스 한도 생각 있어?”

“네! 어디로 가세요?”
“간단하게, 옆에 호프집으로.”

“알았어요! 서류 두고 갈게요.”
“........!?”

스커트 자락을 팔랑거리며 엘리베이터로 다가서는 미스 정의 둔부가 경쾌하게 흔들린다.

오 팀장과 우리일행은 회사 건물을 나섰다.

직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호프집으로 들어간다.

실내에는 다른 부서의 직원들도 보인다.

오 팀장이 술값을 내려는지 맥주는 배부르다면서 소주와 안주를 시킨다.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오고 서로의 술잔을 채운다.

술잔을 부딪고 한잔을 비운 오 팀장이 한마디 한다.

“웬일이지! 미스 정이 술을 한다고, 그러지!?”
“글쎄요.......!?”
“사석에서 술 마시는 건 못 봤는데.”
“어울리고 싶은 모양이지요.”

슬그머니 너스레를 떠는 박상우의 눈치를 살핀다.

아무래도 박상우와 미스 정이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오 팀장과 박상우의 대화를 듣고 있는데,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속담대로 미스 정이 호프집으로 들어온다.

홀 안을 둘러보던 미스 정이 박상우 옆으로 가서 앉으며 손으로 부채질을 한다.

아마도 급히 오느라고 더웠던 모양이다.

뒤이어 김석진도 부리나케 들어온다.

김석진이 빈자리에 앉으며 미스 정을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아니, 미스 정이 웬일이야?”
“호호~! 왜 저는 술 마시면 안 되나요?”

“그게 아니라, 사석에서는 처음이라서.”
“저, 남자직원들 보다 술 잘 마셔요.”

“하기야! 한창 쌩쌩한 나이니까?”
“하하하.........!”

직원들은 즐거운 웃음을 터트린다.

박상우는 미스 정의 옆자리에 앉았으나 눈치만 살핀다.

그러나 미스 정은 보기와는 달리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서로의 빈 잔에 술을 따른다.

여럿이 모이다보면 서로 술을 권하느라고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빨라지기 마련이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면서 보험사고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는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남자가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다.

결혼을 빙자로 장모가 사위의 재산을 가로챘기에 발단된 것이다.

술기운이 돌아 얼굴이 붉어진 에 미스 정이 한마디 한다.

“남자들은 왜 약속을 안 지켜요!?

그러니 결혼서약도 무시하고 아내를 살해하지요.”
“결혼도 안 해보고 미스 정이 그 심정을 알아?”

“안 했어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요?

재산보다 아내가 더 중요하잖아요.”
“감정이 폭발하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거지.

남자나 여자 똑같은 거야! 왜!? 미스 정은 남자한테 배반이라도 당했나?”

오 팀장의 농담 같은 질문에 미스 정이 옆에 있는 박성우를 곁눈질 한다.

박성우가 왠지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오 팀장은 미스 정이 말하기 곤란해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알고

다른 화제로 바꾸어 말문을 연다.

미스 정과 박상우가 직원들 모르는 연인 사이인 것을 추측한다.

무슨 약속인가를 했는데 박상우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미스 정이 화가 난 모양이다.

 

 

----------------------[2부 12장으로]

'소설방 > 여인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인의 향기 - 2부 13장  (0) 2013.06.23
여인의 향기 - 2부 12장  (0) 2013.06.23
여인의 향기 - 2부 10장  (0) 2013.06.23
여인의 향기 - 2부 9장  (0) 2013.06.23
여인의 향기 - 2부 8장  (0) 2013.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