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73. 마지막 탁(卓)노인 이야기 [완결]

오늘의 쉼터 2013. 3. 31. 12:53

73. 마지막 탁(卓)노인 이야기 [완결]


-남아있는 민족반역자들의 어둠의 세력

 

 대한민국 독립선열 유족회 사무실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정기 이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때 특별 초대된 분은 놀랍게도 오래 전에 탑골 공원에서 만났던 탁 노인이었다.

탁 노인은 독립운동에 참가했고, 독립유공자 유족들에게는 누구보다 존경받는 분이였다.

  탁 노인은 오늘을 바르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하며 진정으로

이 땅에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독립선열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코자 한다면 신명을 바쳐

투쟁하겠다는 마음으로 힘차게 행동하는 유족들이 되어 달라고 말했다.

  탁 노인은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나 그 유족들이 모여서 조직 해하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냐며 오늘 우리 사회에는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어 자연보호운동, 정치개혁촉구,

선거감시 노동운동, 수많은 시민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민족을 반역한 자들을 청산하여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사회정의를 세워야 국가기강이 바로서고 모든 운동이 뿌리부터

되살아 날 수 있다는 것을 사실을 아는 단체는 없는 것 같다며 이 모든 잘못은 못난 독립유공자

유족회에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과연 이 땅에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지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

탁 노인은 계속 열변을 토했다.

 


  민족이 식민지 노예가 되어 식량은 물론 놋그릇, 조상 대대로 아끼던 금비녀까지 빼앗기며

전쟁터로 끌려가 이역만리 이름 모를 산하에서 갖은 노동과 학대를 받다가 학살되는 처참한

일들이 벌어지고, 한편에서는 독립투사들이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자 하나뿐인 생명마저

초개와 같이 버리고 폭탄을 던지며 순국하는 마당에 독립운동자의 반대편에 서서 일왕을 위하여

성스럽게 목숨을 바치라고 외치며 적국 일제에 붙어 아부하던 만고역적들이 돈과 권력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자기들이 애국자라며 동상을 세우고 기념 사업회를 만들고 추한 꼴을 보이는데

정부는 물론 독립유공자와 유족들 까지도 멍청히 있으니

과연 당신들이 독립유공자의 피를 받은 사람들이냐며 질타했다.

  훌륭한 독립유공자의 각 기념 사업회는 너무 미흡하다며 독립유공자 유족회 등

독립운동 단체들은 독립선열의 우롱하고 능멸하는 역사왜곡, 친일파 기념 사업회 창립,

동상 건립 등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행위가 자행될 때 독립운동을 하는 마음으로 단호히

대처해야만 민족혼을 살리고 우리 민족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독립선열 추모제전에는 200-300명의 쓸쓸한 노인들이 모이고,

친일 민족반역자의 추모제전에는 전 현직 고관들이 1000명 이상 모이는

오늘의 이 슬픈 현실은 국민들에게 민족반역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울분을 토했다.

 


  해방 후 정권마다 민족반역자들을 청산하지 않아 독립운동자들은 제대로 존경받지 못했고

대우받지 못하였으며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천한 계급으로 전락하였고, 민족반역자 세력들은

계속적으로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사회악을 양산하고 세상을 온통 쓰레기통을 만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민족반역자들의 동상을 세운다, 기념 사업회를 만든다,

김구 선생님을 공산당으로 몰아 시해 했어도 정확한 진상을 밝히지 못하는

기막힌 실정이라고 거듭거듭 애통하다고 말했다.

  이때 유족회의 한 임원이 물었다.

「해방 후 친일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했고

그래서 가치관의 혼돈이 빚어져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됐다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탁 노인은 생각할 여유를 갖지 않고 대답했다.

「맞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요점이 그것입니다.

나는 그런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사람 중의 하납니다.

일제 아래서 헌병과 고등경찰들이 저지른 범죄는 글자 그대로 민족 반역죄에 해당합니다.

그런 죄를 처벌하지 않았으니, 그 이후에 다른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지요.

바로 그런 점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된 원인을 친일파를 단죄하지 않은데서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탁 노인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면서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오.

배우지 못하고 무식해서 아무 것도 몰라서 일본 놈들이 시키는 대로 살았다면 몰라도,

친일 민족반역자는 하나같이 지식인 중에 지식인들 입니다.

이놈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오.

 


독립투사들은 전 재산을 다 팔아 독립투쟁을 하며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하나뿐인

생명마저 초개와 같이 버리며 중국, 미국, 소련 등 이역만리에서 싸우고 있는데,

동포들이 일본국의 침략전쟁에 끌려가면 노예처럼 혹사당하다가 결국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일본 천황을 위하는 성스러운 전쟁에 나가 싸우라고 외치며 남아있는

동포에게는 금비녀를 바쳐라,

쌀을 바쳐라, 비행기를 헌납한다, 별별 짓을 다 하고 독립투사마저 체포하여 고문하고

죽이던 자들을 어떻게 용서 하겠소. 아니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애국자들이

총 맞아 죽고 짓밟히며 처절하게 구걸하며 살게 된다면 사회가 바로 되겠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탁 노인은 준비 해온 자료를 거의 보지도 않고 이야기했다.

  1948년 12월 7일 제헌국회에서 반민족 행위를 한 반민 매국노들을 처단하기 위해

반민특위법이 제정 공포되었는데 여기에는 이 자들이 자행한 범죄에 대한 형량과 죄의 종류가

적혀 있소.

  (1) 습작(襲爵)한자,

(2) 중추원 부위장 고문 참의원이었던 자,

(3) 칙임관 이상의 관리되었던 자,

(4)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자,

(5) 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한 자,

(6) 군, 경찰의 간부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끼친 자,

(7)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

(8) 도(道), 부(府)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 의원이 되었던 자,

(9)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악이 현저한 자,

(10) 관, 공리 되었던 자로서 그 지위를 이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인 죄적이 현저한 자. (11) 일본 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 본부의 수뇌간부로 이 악질적인 지도적 행위를 한 자, 

(12)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분야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해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 및 기타 방법으로서 지도한 자,

(13) 개인으로서 가장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게 해를 끼친 자 등등이오.

 


  유족회 임원이 다시 물었다.

「외국의 경우는 어땠습니까?」

  탁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국의 에를 들었다.

나이답지 않게 그의 기억력은 젊은 사람 뺨칠 정도였다.

「프랑스나 벨기에의 경우, 수만 명이 반역죄로 처벌을 받았지요.

1차 대전 때는 큰 공을 세워 프랑스 국민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던 페텡 원수도

비시정부 수반으로 나치에 협력했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드골이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시켜줬지만.....

외국의 침략을 받았다가 광복을 맞은 나라치고 부역자(附逆者)를 처벌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탁 노인은 또 다른 외국의 예를 들었다.

「서 유럽과 같이 국민국가가 확립된 민주사회일수록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습니다.」

  탁 노인은 수첩에 적인 각종 숫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에 의하면 이랬다.

  나치나 파시스트 군국주의에 협력한 자는 시한을 두지 않고 오늘날까지 언제고 체포,

엄격히 처리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벨기에에서는 5만 5천 건, 네덜란드에서는 5만 건 이상의 징역형

판결이 내렸다.

덴마크는 1만 4천명, 노르웨이는 2만 명을 각각 민족반역자로 규정,

무기 또는 유기징역형에 처했다.

 


  프랑스에서 나치협력자 숙청조치에 연관된 국민은 150만~200명에 달했고,

이중 99만 명이 체포된 후 1개월 만에 풀려났다.

사법기관에 의해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15만 8천명,

최고 재판소는 1960년까지 108건을 다루어 페텡 원수, 라발총리 등 18명에게 사형을,

25명에게 강제 노동형 또는 징역형을 내렸다.

일반 법원에서는 5만 7천 건을 재판하여 6,763명이 사형,

2,777명이 종신강제 노동형, 10,434명이 유기강제 노동형, 26,529명이 유기징역형,

3678명이 공인(公人)박탈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민족반역자중 779명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지방법원에서는 12만 건을 재판에 회부, 478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그중 3천명을 집행했다.

5만 명에게 강제노동, 또는 징역형을 선고했다.

시민법정에서는 11만 5천 건을 다루어 9만 5천명에게 비국민 판정을 내렸다.

  특히 지방법원에서 강제 노동형, 유기징역형 또는 비국민 판정을 받은 자들 가운데는

군부장교 42,000천명, 행정관료 28,750명, 철도요원 7,039명, 전기공사요원 5000명,

경찰간부 170명, 헌법위원회위원 18명, 판사 334명이 포함돼 있었다.

  드골대통령은 언론인과 작가 등 지식인은 더욱 엄중히 처벌했다.

저명한 언론인 다수가 총살형을 받았고, 6명의 원로 언론인들이 사형선고에서

종신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프랑스나 그 외 국가에서 왜 반민족행위자를 엄격히 다뤘나하는 것은 자명하다.

이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은 지식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없어져야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지식과 직위란 민족을 위해 있는 것이지, 개인의 치부나 영달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가 않았다.

 

 대한민국 독립선열 유족회 사무실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정기 이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때 특별 초대된 분은 놀랍게도 오래 전에 탑골 공원에서 만났던 탁 노인이었다.

탁 노인은 독립운동에 참가했고, 독립유공자 유족들에게는 누구보다 존경받는 분이였다.

  탁 노인은 오늘을 바르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하며 진정으로

이 땅에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독립선열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코자 한다면 신명을 바쳐

투쟁하겠다는 마음으로 힘차게 행동하는 유족들이 되어 달라고 말했다.

  탁 노인은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나 그 유족들이 모여서 조직 해하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냐며 오늘 우리 사회에는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어 자연보호운동, 정치개혁촉구,

선거감시 노동운동, 수많은 시민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민족을 반역한 자들을 청산하여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사회정의를 세워야 국가기강이 바로서고 모든 운동이 뿌리부터

되살아 날 수 있다는 것을 사실을 아는 단체는 없는 것 같다며 이 모든 잘못은 못난

독립유공자 유족회에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과연 이 땅에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지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

탁 노인은 계속 열변을 토했다.

 


  민족이 식민지 노예가 되어 식량은 물론 놋그릇, 조상 대대로 아끼던 금비녀까지 빼앗기며

전쟁터로 끌려가 이역만리 이름 모를 산하에서 갖은 노동과 학대를 받다가 학살되는 처참한

일들이 벌어지고, 한편에서는 독립투사들이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자 하나뿐인 생명마저

초개와 같이 버리고 폭탄을 던지며 순국하는 마당에 독립운동자의 반대편에 서서 일왕을 위하여

성스럽게 목숨을 바치라고 외치며 적국 일제에 붙어 아부하던 만고역적들이 돈과 권력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자기들이 애국자라며 동상을 세우고 기념 사업회를 만들고 추한 꼴을 보이는데

정부는 물론 독립유공자와 유족들 까지도 멍청히 있으니 과연 당신들이 독립유공자의 피를 받은

사람들이냐며 질타했다.

  훌륭한 독립유공자의 각 기념 사업회는 너무 미흡하다며 독립유공자 유족회 등 독립운동 단체들은 독립선열의 우롱하고 능멸하는 역사왜곡, 친일파 기념 사업회 창립, 동상 건립 등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행위가 자행될 때 독립운동을 하는 마음으로 단호히 대처해야만 민족혼을 살리고

우리 민족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독립선열 추모제전에는 200-300명의 쓸쓸한 노인들이 모이고, 친일 민족반역자의 추모제전에는 전 현직 고관들이 1000명 이상 모이는 오늘의 이 슬픈 현실은 국민들에게 민족반역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울분을 토했다.

 


  해방 후 정권마다 민족반역자들을 청산하지 않아 독립운동자들은 제대로 존경받지 못했고

대우받지 못하였으며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천한 계급으로 전락하였고, 민족반역자 세력들은

계속적으로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사회악을 양산하고 세상을 온통 쓰레기통을 만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민족반역자들의 동상을 세운다, 기념 사업회를 만든다, 김구 선생님을

공산당으로 몰아 시해 했어도 정확한 진상을 밝히지 못하는 기막힌 실정이라고 거듭거듭

애통하다고 말했다.

  이때 유족회의 한 임원이 물었다.

「해방 후 친일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했고

그래서 가치관의 혼돈이 빚어져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됐다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탁 노인은 생각할 여유를 갖지 않고 대답했다.

「맞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요점이 그것입니다.

나는 그런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사람 중의 하납니다.

일제 아래서 헌병과 고등경찰들이 저지른 범죄는 글자 그대로 민족 반역죄에 해당합니다.

그런 죄를 처벌하지 않았으니, 그 이후에 다른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지요. 바로 그런 점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된 원인을

친일파를 단죄하지 않은데서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탁 노인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면서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오.

배우지 못하고 무식해서 아무 것도 몰라서 일본 놈들이 시키는 대로 살았다면 몰라도,

친일 민족반역자는 하나같이 지식인 중에 지식인들 입니다.

이놈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오.

 


독립투사들은 전 재산을 다 팔아 독립투쟁을 하며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하나뿐인 생명마저 초개와 같이 버리며 중국, 미국, 소련 등 이역만리에서 싸우고 있는데,

동포들이 일본국의 침략전쟁에 끌려가면 노예처럼 혹사당하다가 결국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일본 천황을 위하는 성스러운 전쟁에 나가 싸우라고 외치며 남아있는

동포에게는 금비녀를 바쳐라, 쌀을 바쳐라,

비행기를 헌납한다, 별별 짓을 다 하고 독립투사마저 체포하여 고문하고 죽이던 자들을

어떻게 용서 하겠소.

아니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애국자들이 총 맞아 죽고 짓밟히며

처절하게 구걸하며 살게 된다면 사회가 바로 되겠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탁 노인은 준비 해온 자료를 거의 보지도 않고 이야기했다.

  1948년 12월 7일 제헌국회에서 반민족 행위를 한 반민 매국노들을 처단하기 위해

반민특위법이 제정 공포되었는데 여기에는 이 자들이 자행한 범죄에 대한 형량과

죄의 종류가 적혀 있소.

  (1) 습작(襲爵)한자,

(2) 중추원 부위장 고문 참의원이었던 자,

(3) 칙임관 이상의 관리되었던 자,

(4)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자,

(5) 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한 자,

(6) 군, 경찰의 간부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끼친 자,

(7)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

(8) 도(道), 부(府)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 의원이 되었던 자,

(9)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악이 현저한 자,

(10) 관, 공리 되었던 자로서 그 지위를 이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인 죄적이 현저한 자. (11) 일본 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 본부의 수뇌간부로 이 악질적인 지도적

행위를 한 자, 

(12)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분야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해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 및 기타

방법으로서 지도한 자,

(13) 개인으로서 가장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게 해를 끼친 자 등등이오.

 


  유족회 임원이 다시 물었다.

「외국의 경우는 어땠습니까?」

  탁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국의 에를 들었다.

나이답지 않게 그의 기억력은 젊은 사람 뺨칠 정도였다.

「프랑스나 벨기에의 경우, 수만 명이 반역죄로 처벌을 받았지요.

1차 대전 때는 큰 공을 세워 프랑스 국민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던 페텡 원수도 비시정부 수반으로 나치에 협력했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드골이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시켜줬지만.....

외국의 침략을 받았다가 광복을 맞은 나라치고 부역자(附逆者)를 처벌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탁 노인은 또 다른 외국의 예를 들었다.

「서 유럽과 같이 국민국가가 확립된 민주사회일수록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습니다.」

  탁 노인은 수첩에 적인 각종 숫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에 의하면 이랬다.

  나치나 파시스트 군국주의에 협력한 자는 시한을 두지 않고 오늘날까지 언제고 체포,

엄격히 처리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벨기에에서는 5만 5천 건, 네덜란드에서는 5만 건 이상의 징역형 판결이

내렸다. 덴마크는 1만 4천명, 노르웨이는 2만 명을 각각 민족반역자로 규정, 무기 또는

유기징역형에 처했다.

 


  프랑스에서 나치협력자 숙청조치에 연관된 국민은 150만~200명에 달했고,

이중 99만 명이 체포된 후 1개월 만에 풀려났다. 사법기관에 의해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15만 8천명, 최고 재판소는 1960년까지 108건을 다루어 페텡 원수, 라발총리 등 18명에게

사형을, 25명에게 강제 노동형 또는 징역형을 내렸다.

일반 법원에서는 5만 7천 건을 재판하여 6,763명이 사형, 2,777명이 종신강제 노동형,

10,434명이 유기강제 노동형, 26,529명이 유기징역형, 3678명이 공인(公人)박탈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민족반역자중 779명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지방법원에서는 12만 건을 재판에 회부, 478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그중 3천명을 집행했다.

 5만 명에게 강제노동, 또는 징역형을 선고했다. 시민법정에서는 11만 5천 건을 다루어

9만 5천명에게 비국민 판정을 내렸다.

  특히 지방법원에서 강제 노동형, 유기징역형 또는 비국민 판정을 받은 자들 가운데는

군부장교 42,000천명, 행정관료 28,750명, 철도요원 7,039명, 전기공사요원 5000명,

경찰간부 170명, 헌법위원회위원 18명, 판사 334명이 포함돼 있었다.

  드골대통령은 언론인과 작가 등 지식인은 더욱 엄중히 처벌했다.

저명한 언론인 다수가 총살형을 받았고, 6명의 원로 언론인들이 사형선고에서 종신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프랑스나 그 외 국가에서 왜 반민족행위자를 엄격히 다뤘나하는 것은 자명하다.

이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은 지식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없어져야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지식과 직위란 민족을 위해 있는 것이지, 개인의 치부나 영달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가 않았다.

 

  탁 노인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탁 노인의 소매를 잡았다.

노인의 입에서 이제까지 한 이야기의 결론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였다.

  “왜? 할 말이 더 있소?”

  “예 어르신네.”

  그러자 탁 노인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탁 노인은 이제까지 자신이 한 이야기가 우리 민족의 화두(話頭)만 던진 것 같다고

여겼는지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크고 넓게 이야기하진 않겠소.

주제가 거창하면 그 방법이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오.

안 그렇소?”

  조금 어려운 이야기라서 그저 ‘옳으신 말씀입니다.’하고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탁 노인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대체로 사람의 한평생이란  세월로 따져서 70년에서 80년 정도가 된다고 하오.

우리 한국 사람은 이 세월 동안 한반도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늙어죽는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소.

그것은 사랑이오.

사랑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민족, 국가, 가족, 친구, 애인 등등 그 대상에 따라 사랑의 형태가

달라지겠지만 사랑의 본질은 결국 마찬가지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서양종교의 말처럼,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오.

바로 상대를 편하게 해주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소.

민족반역자. 친일매국노란 남을 사랑할 줄을 몰라서,

그 영악한 지식으로 빚어진 것들을  취해 혼자만 살려고 했던 것이오.

무식한 사람보다 배운 사람이 민족을 배만하거나 악한 마음을 갖게 되면 배운 만큼

더 악하게 되는 것이오.

지식인들의 반역을 용서하면 머리 좋은 지식인은 그것을 다시 이용하오. 지식인들이 민족을

배반하고 해방이 되니 그 좋은 머리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다시 교묘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오. 바로 이점이 문제요.

그러나 지금도 늦니 않소. 민족반역자들의 조상을 둔 후손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소.

내 조상이 민족 반역을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시인하고,

그래서 더욱더 나라를 위하여 노력하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오.

 


일본인들처럼 끝까지 역사를 왜곡하고 반성하지 않으면서 나리를 와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의

동상을 건립한다,

기념 사업회를 만든다 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소.

제 조상의 배덕의 산물인 재물과 배경을 선용하고,

우리와 함께 애국애족 운동에 나선다면 얼마나 좋겠소.

얼마 전 건국대학교 이사장으로 잇는 현승종 선생이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한다며,

일제 때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의 옷을 입고 싸운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 한다고

고백한 사실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았소. 친일 민족 반역자들이 이분과 같이 용기를 갖는다면

얼마나 좋겠소.

이분은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분이오.

참으로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이 병들어 있는 것 같소.

이런 분을 대학에서 물러가라,

퇴진하라 하면서 매도하고 있으니

정말로 친일을 한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려 하지 않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별 잘못도 없었던, 강제집행 된 일제 시대를 회고한 현승종 선생을 비웃을 것이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우리 민족은 한반도란 지역에서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깊은 뿌리의 영향을 받는

독특한 문화를 갖고 살아왔소.

오천년 동안 지속돼 온 힘의 원천은 민족을 사랑하는 선인(先人)들의 정신이었소.

그런데 일제시대,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이단아(異端兒) 무리가 생겨났던 것이오.

일종의 독버섯이오. 이른바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그들인데,

그들 역시 같은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지난 잘못을 엎드려 사좌하고,

민족에 동참할 때 우리 민족은 그들을 받아들일 것이오.

왜놈들은 복수를 미덕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민족은 용서를 최고의 가치로 알고 있기 때문이오.

선생.”

  탁 노인은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친일 민족 반역자들이 왜 나쁜 줄 아시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본인들이 저지른 악행을 알아야하오.

1937년 12월 중국수도 난징(南京)의 학살 극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한 후 불과 몇 달 사이에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20만 명에서

35만 명을 살해했소. 산사람을 나무에 묶어놓고 총검술에 연습용으로 죽이고,

10만여 명의 부녀자들을 강간 살해했소.

무카이 도카시란 놈과 노다 다케시는 민간인 1백여 명의 목을 누가 먼저 베나 시합을 했소.

또 한 731부대의 악마들은 민간인들을 의학 실험용으로 사용해 죽였소.

임진왜란 때 왜놈들은 우리나라 인구 삼분의 일을 죽였소.

이들은 우리 선조들의 코나 귀를 베어 묶어 귀국하여 표창을 받았소.

악마가 아니면 도저히 상상도 못할 잔인의 극치가 아닐 수 없소.

이자들의 후손들은 그 더러운 재물을 유산으로 받아서 이 나라의 중추 세력이 되어

또다시 민족정기 말살과 부정부패 등 사회악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오.

따라서 일본도 우리를 깔보며 아무런 사죄도 없이 기고만장해 잇는 것이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소.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남의 잘못을 용서 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갖고 있소.

그들이 회개하고 지난 잘못을 뉘우칠 때 우리는 그들의 과오를 용서하고

같은 이웃으로 평화스럽게 지낼 용의가 있소.

그러나 용서란 먼저 회개가 전제돼야 하는 것이오. ‘

  탁 노인은 말을 마치고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그것이 내겐 묻는 말처럼 들렸다.

 


  “사람의 행복이란 무엇 인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소?”

  “글쎄요.”

  “내가 보기엔 이렇소.

우리들의 생각에 만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가면서 그들의 희로애락에 동참할 때,

우리는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어떤 든든함 같은 것을 느낄 때,

그것이 행복이 아니겠소?

그것이 가족이건, 친구이건, 안 그렇소? 때문에 민족반역자에겐 철학이 없소.

평범하고 무식한 이 늙은이에게도 이런 철학이 있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소.”

  탁 노인은 이 말을 끝으로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옥양목 두루마기를 입고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탁 노인의 뒷모습에서

김구 선생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김구 선생은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아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현대화란 기치아래 마음마저도 교만하고 방정맞아

저 혼자만 잘살면 그만 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이기적인 생각의 한가운데,

선생의 준엄한 말소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말씀은 이랬다.

  “완전 독립된 나라를 세우고 인류가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인류가 서로 네요 내요 없이 사랑하며 살라.”

  이 말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불경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을 살다간 많은 성인들이 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커다란 화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구 선생은 결국 이 말에 따라 평생을 살다간 우리민족의 성인(聖人)이 아닐 수 없었다.

김구 선생은 전 세계인을 사랑한 위인이며 성인이었다는 것이 이글을 마침에 있어서의 결론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