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68. 민족반역자들의 인과응보

오늘의 쉼터 2013. 3. 31. 11:39

68. 민족반역자들의 인과응보

 


1950년 5월 24일 밤 육군본부 강단에서는 댄스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댄스란 생소한 단어를 미군들이 저희들 나라의 춤을 갖고 와서 한국 상류사회에 전파해서,

신분이 높거나 돈푼께나 있는 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서양 춤을 배워 당시 사회의 유행이

되고 있었다.

고급 장교들의 댄스라는 것이 우스꽝스러워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은 채 상대 여자를 붙들고

무대를 돌아다니는, 한마디로 꼴불견인 모습들이었다.

  38선 부근의 군인들은 대부분 일요일이라 외출을 나갔다.

다음날인 일요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이북의 괴뢰집단은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을 거침없이

유린했다.

수많은 동료가 죽어갔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버렸다.

  6. 25 남침을 겪은 국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김구의 죽음에 대한 원한과 울분을

잠시 잊고 독재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6.25남침으로 안두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옅어진 것을 눈치 챈 김창룡은 6월 27일

제일 먼저 대전형무소로 달려가 안두희를 끄집어냈다.

 


「안 소위, 내 말이 틀림없지. 내가 안 소위를 빼내 준다고 했지. 나는 약속을 지키는 놈이야.」

  안두희는 김창룡의 말에 눈물이 글썽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 목숨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지금부터 안 소위가 할 일이 있네.」

  김창룡은 부산으로 피난해서 안두희를 육군 특무대 문관으로 채용했다. 부산으로 밀려온

정부가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인 7월 10일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부장관인 신성모는 국방부장관 명령 제 4호로 안두희를 육군 소위로 임명,

원대복귀 하도록 조치했다.

  안두희는 다시 육군소위가 됐다. 법이 살아있는 국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두희는 육군소위가 되어 포병부대에 배치가 되었다.

이미 그의 부대는 전쟁으로 거의 소멸되었으며 옛날의 동료들 상당수가 전사를 한 후였다.

포병사령관 장은산은 미국에 유학을 가고 없었다.

  김구를 시해하는데 앞장 선 사람들은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신성모는 국방부장관에서 국무총리 서리가 됐으니 김창룡은 소령에서 중령 진급이 되어 있었다.

장은산은 미국에 유학이란 명목으로 2명의 부관을 데리고 갔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그 행동이 괘씸해서인지 하늘의 노여움(?)을 받아,

안두희에게 종신형에서 15년으로 감형을 해주고 하동(河童)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런데 그의 전사(戰死)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총알을 뒤에서 쏘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전투 중에는 적의 총알이 전방(前房)에서 날아오는 것이 상례이다.

 


지뢰나 수류탄, 또는 파편이 아닌 이상 뒷머리에 총알을 맞았다는 것은

누군가가 뒤에서 총을 쏘았다는 이야기인데, 총은 쏜 사람이 누군가.

그것은 중공군인가 아니면 아군(我軍)가운데의 누구인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아무튼 악(惡)은 뿌린 대로 악(惡)으로 거둬들인다는 역설적인 말이 있듯,

누가 총을 쏘았건 간에 그는 죽었다. 악(惡)의 종말을 맞은 것이다.

아마도 그가 전사하지 않고 살아났다면 휴전이 되어 더 큰 감투를 썼을 것은

자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성모와 김창룡은 아무도 모르게 안두희를 석방시켜서 원대복귀 시킨 후

얼마 안 되어서 중위로 진급이 되었다.

그 후 북괴는 UN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패퇴 길을 걷고 있었다.

  대구를 사수하겠다는 조병옥 내무부 장관의 작전이 성공,

낙동강에 머물러있던 전날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바뀌어 국군은 승세를 굳히고 있었다.

  전의를 잃은 북괴군은 후퇴하기에 바빴을 때 국군은 북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다.

북괴는 패전이 완연해지자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인민군들은 애국지사들을 무조건 납치하거나 체포해서 북으로 압송해갔다.

그것도 모자랐던지 서울에 남아있던 애국시민들을 무조건 학살했다.

  안두희의 동생이며 당시 모 신문사의 기자였던 안용희(安龍熙)와

그 아래 동생인 안봉희(安鳳熙)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효창공원에 끌려온 두 형제는 애국시민들 30여명의 틈에 끼었으며,

인민군들은 이들에게 무자비하게 다발총을 난사했다.

시민들은 아무런 죄 없이 그 자리에서 숨져갔다.

안두희의 막내 동생인 안봉희도 이때 죽었다.

 


  그러나 신문기자인 안용희는 팔과 다리에 총을 맞았을 뿐 죽지는 않았다.

  안용희는 시체 속에서 밤을 세웠다.

다음날 새벽, 수도 서울은 국군이 진격해 들어왔으며 중앙청 옥상에는 태극기가 휘날렸다.

안용희는 시체 틈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여기사람 있소. 사람 살려주시오!」

  안용희는 시체를 검색하는 군인에게 숨 넘어 가는 소리로 애걸을 했다.

안용희의 형 안두희가 시해한 김구 선생의 묘소가 얼마 되지 않는 장소에서

북괴군의 총을 맞은 두 형제, 그리하여 막내 동생은 죽고,

안용희는 간신히 목숨만 붙어서 살아난 것이다.

  우연치고는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안용희는 총 맞은 다리를 이끌고 친척집으로 억지로 기어서 갔다.

그리고 기절을 하고 말았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포병사령관 장은산 중령은 처음에는 미국생활이 무척 흡족했다.

그러나 몇 개월을 보내고 나니 미국 생활이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매일 먹는 양식(洋食)도 비위가 맞지 않았고,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고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있고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러나 고국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질 않았다.

귀국하면 승진도 시켜주겠다던 상관들의 말이 점차 믿어지지 않게 되었다.

  장은산은 누구보다도 김구를 시해하는데 공이 많은 수훈 갑(甲)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자신과 같이 음모를 꾸민 자들은 출세 길이 트이고 벌써 군대부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올라가 있었다.

김창룡은 자신보다 계급도 낮고, 음모에 끼어 공을 세웠다고 하나 자신에 비추면

한갖 엑스트라에 불과했는데 벌써 계급은 자신을 뛰어 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은산은 은근히 속으로 부아가 났다. 잠 못 이루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의 이런 마음을 충동질하는 것은 자신이 미국에 올 때 데리고 온 부관들이었다.

  그들은 장은산에게 노골적으로 말했다.

「사령관님, 우리는 이게 뭡니까?」

「그건 왜?」

  장은산은 그들과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짐짓 불만을 죽이고 있었다.

「왜긴요,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일은 사령관님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공을 제일 많이 세우신 사령관님을 귀양 보내다니 가슴속이 끓어오릅니다.」

「무슨 조치가 있겠지.」

「무슨 일이라니요. 틀렸습니다. 그놈들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태평양 넘어서 귀양을 보내놓고....」

  그럼 날더러 어떻게 하란 말인가?」

「당장 가셔야죠. 지금 조국은 전쟁 중이 아닙니까?

참전을 하여서 공을 세워야죠. 전쟁이 끝나면 우린 끝나는 것입니다.

군인은 전쟁에 나가야 군인 몫을 하는 것이지,

이따위 양코배기에 나라에 와서 시간만 보내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는걸.」

「그렇다고 여기 가만있으면 안 됩니다.

사령관님의 공을 모두 가로채려는 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놈들을 경계해야합니다.」

 


  장은산은 부하들의 말에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부하들이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했다.

「이놈들, 내가 가만 안 뇌둔다. 귀국만 해봐라. 여차하면 모두 불어버릴 테다.」

  장은산은 가끔 한국에서 유학 온 유학생들과 어울리던 유학생가운데 백선기라는 사람이 있었다.

백선기는 유학생회의 회장이었다.

  백선기의 아버지 백남훈(白南薰)은 김구와 같은 해주 출신이며 어린 시절 서당에서

글을 함께 배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성장해서는 학교선생 노릇도 함께 했었다.

이런 연유로 백선기는 김구의 아들인 김신(金信)과도 친한 나이였다.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장은산은 백선기와 술을 마시다가 자신의 불만을 털어 놓았다.

  내가 만일세, 김구 선생 시해 때 한 몫을 했네, 그래서 그 공으로 미국 유학까지 오게 되었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보니 그놈들한테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이 말을 들은 백선기는 술이 확 깨었다.

  백선기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국내 사정은 생소한 판이었다.

「나쁜 놈들이야. 사람을 이용이나 하고.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요. 모든 걸 폭로하겠소.」

  이 말을 들은 백선기는 어렴풋이 김구의 시해범은 안두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배후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가 장은산으로 부터 이런 실토를 들으니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백선기는 침착했다.

이 자로부터 더 자세한 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아버지와 김구 사이를 이 자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가 나셨군요?  저 역시 화가 납니다.  그놈들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맞소.」

「사령관님의 뒤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그거야 국방부장관 신성모란 놈이지. 그놈 말고 따로 누가 있겠소.

「그렇군요. 신성모란 사람은 의리가 없는 파렴치한 놈이군요.」

「그거야 여부가 있겠소. 그런데 김창룡이란 놈 말이요.

그 놈이 지금 내 공을 가로채 출세를 하고 있다던데. 내가 화가 나서 원....」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배후 세력들을 끌어대기 시작했다.

장은산은 백선기를 동지(?)로 믿고 할 소리 못할 소리를 모두 지껄여댔다.

  장은산은 9월 15일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때쯤 고국의 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장은산은 고국에서 돌아오라고 명령이 없었으나 군인으로서 참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막상 고국에 돌아와 보니 옛날에 자신이 소속해 있었던 부대는

다른 부대와 통합이 되어 재편성이 되어 있어서 자신이 보직을 맡을 수가 없게 되었다.

군인이 보직이 없다면 이미 군인의 자격을 상실하는 법,

그렇다고 누구하나 장은산을 편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유일한 후원자인 채병덕은 전사를 한 후 였다.

  김창룡은 중령으로 진급을 해서 군내부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은산은 김창룡보다 높은 대령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게 대령으로 행세했다.

 


  그러다가 부산의 모 술집에서 솔을 마시다가 손님들에게 자신이 백범 시해의 배후 인물이란 걸

실토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김창룡과, 채병덕, 신성모 들의 이름도 들먹거렸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김창룡의 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일본군 헌병 출신으로서 성격이 포악한 김창룡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김창룡은 신중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장은산이 무슨 말을 할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김창룡은 장은산에게 비밀 정보원을 붙여놓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게 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장은산은 술만 들어가면 김구 시해할 때의 이야기를 했으며 군내부의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정보원으로부터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김창룡은 이자를 가만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새끼 안 되겠는데, 조치를 취해야 되겠어.」

  그러던 어느 날 밤 장은산은 대구 모 술집에서 술이 취해 횡설 수설 하다가 군부대 요원에게

연행돼 갔다.

「누구야 나를 체포하게. 나는 사령관이야. 육군 대령이야!」

「예, 사령관님, 좀 가주셔야 되겠습니다.」

「놔, 이놈아!」

「아니 이 새끼가 어따 대고 행패야!」

김창룡의 졸개는 술 취한 장은산을 붙잡아 군 형무소로 데려갔고,

거기서 바로 수감이 되었다.

장은산을 유치 장안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아우성을 쳤다.

「사령관을 이렇게 대하는 군대가 어딨냐! 이놈들아!」

「당신은 군무 이탈이야」

「군무이탈?」

「군인은 부대에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대낮부터 부대를 이탈해 술이나 처먹고 하는 것이 군무이탈 말고 달리 있나.」

 


  장은산이 명령도 없이 귀국을 했으며, 전세가 불리하면 일본으로 도망하기 위해 부산에다

배를 대기 시켜놓았다는 죄목이었다.

그제서야 장은산은 자신이 음모에 걸린 것을 알았고,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장은산은 장문(長文)의 탄원서를 써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려고 간수 군인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간수군인은 김창룡에게 이 편지를 전했다.

장은산은 얼마 후 감옥에서 변사를 했다.

가족에게는 장은산이 감옥에서 자살했다는 통지서와 함께 유골을 전달했다.

  나중에 전해진 이야기는 이렇다.

장은산은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밤 끌려 나가 외진 산모퉁이에서 총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장은산은 김구 선생님을 시해한 반역자들에 의하여 증거인멸을 위해 살해된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그대로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