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71. 목숨질긴 안두희 (安斗熙)

오늘의 쉼터 2013. 3. 31. 12:25

71. 목숨질긴 안두희 (安斗熙)

 

 

-곽태영 선생에서부터 박기서 의사까지

 

민족반역자 안두희는 군에서 제대를 한 후 그를 비호하는 세력들을 등에 업고 군납(軍納)업(業)을 했다. 군납업을 하면서 그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주로 그는 군부대가 있는 강원도 일대에서 사업을 벌였는데, 그의 수하에는 날랜 경호원들이 그를 호위했다. 그는 군 장성들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지역의 유지로 행세를 했고 돈을 물 쓰 듯 했다. 사람들은 그를 자수성가한 재벌로 알았다.

  그러던 그가 세인들의 관심을 끈 것은 곽태영 선생의 안두희 살해 미수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고부터였다. 그러니까 그는 김구를 시해한 49년부터 65년 12월, 곽태영 선생의 칼에 맞을 때까지 「떵떵거리고」사는 사업가였던 셈이다.

  곽태영 선생은 학생시절 백범이 시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엉엉 울면서 「이제 나라는 망했다.  우리의 지도자이신 백범 선생이 떠나버린 이 나라의 장래가 염려스럽다.」  하던 부친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곽 선생은 그때부터 마음속으로「지금부터 10년 후 반드시 백범 시해범 안두희를 응징하고 그로부터 그 배후를 밝히겠다.」고 다짐을 했다. 환일 고(당시 균명고 )3학년인 19세 때였다.

  곽 선생은 어린 시절 독립 운동가였던 숙부에게서 받아 읽고 또 읽었던 빛바랜 백범일지를 품에 안고 효창공원 백범 묘소를 찾아 영혼 앞에 엎드려「10년 안에 응징을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저를 보호해 주십시오.」하고 약속했고 백범 선생에게 간청을 드렸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자금 마련을 위해 시작한 사업에서 실패는 거듭돼왔고 시해범 안두희는 강원도 일대 군부대의 군납을 독점, 엄청난 부를 누리면서 수십 명의 경호원을 거느리고 다녀 접근조차 엄두를 낼 수 없게 되니 함께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도 그의 곁을 떠났다.

  자신과 약속했던 10년의 마지막 때인 1965년 말 곽 선생은 혼자서 실행계획을 세웠다. 장소는 안두희의 군납공장이 있는 강화도 양구(楊口), 12월 22일이었다.

  그날 하늘에는 가끔 눈발이 날렸다.

  강원도 산악지방의 바람은 매섭기로 유명하다. 연말이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분주하고 도회지의 상점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명동의 저녁거리에는 벌써부터 낡은 영화필름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어대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공장안 사무실에서 얄팍해진 달력을 쳐다보는 안두희의 마음은 그날따라 착잡했다. 요즘 들어 부쩍 흰 머리카락이 늘어났다. 얼굴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다만 입 다문 얄팍한 입술만이 여전할 뿐이었다.

  지난밤 춘천까지 가서 마신 술 때문에 몸에 상쾌하지가 못했다. 안두희는 춘천에 있는 미나도란 술집을 자주 갔다. 춘천시내에 몇 군데의 요정이 있지만 그 중에 제일 뛰어났다. 

 


  미나도의 주인인 김형주란 인물은 안두희와 같은 고향이었다. 군납업을 하던 안두희는 군 장성들과 가끔씩 어울려 사업상 술을 즐겨 마셨다. 그래서 안두희는 돈 잘 쓰는 고객의 한사람으로 미나도의 기생들 사이에는 인기가 높았다. 기생들도 그가 안 사장으로 알았지, 민족지도자 김구 선생 시해범이란 것은 꿈에도 몰랐다. 미나도의 일등 기생 화선이는 안두희를 좋아했다. 돈이 많다는데서 마음이 동한 것이 아니라 미나도의 주인 김형주와 동향이란 점과 가끔씩 던지는 농담이 화선이의 마음을 끌었다.

  안두희 역시 화선이를 무척 좋아했다. 화선이는 요즘 호스티스처럼 천박한 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법 시구절도 읊을 줄 아는 황진이 풍(風)의 기생이었다.

  안두희는 어제 밤에도 화선이와 더불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새벽녘 가까이 양구의 집에 돌아왔다. 이날 아침까지 잠자리에 누워있었다.

  안두희는 어제 밤의 꿈자리가 못내 걸려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데, 아내 박씨가 차를 끓여왔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집을 나선 안두희는 공장으로 향했다. 공장안에는 금방 돈이 되는 콩나물이 여기 저기 시루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모두가 3트럭분이었다. 이정도면 꽤 나가는 물건이었다.

  군납업이란 어음으로 결제하는 다른 업체와는 달리 현찰거래였다. 콩나물만이 아니라 그 옆에는 배추와 무가 넓은 밭에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 동안 안두희는 군납업을 통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그를 적극적으로 비호했던 자들이 하나 둘 씩 수갑을 차고 철장으로 들어갔다. 또 5.16 군사 쿠데타로 여러 가지 부조리들, 특히 특정업체 봐주기 식의 군납업체들의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민족 반역자 척결이란 구호가 들려왔다.

 


  「안두희를 죽여라!  백범 시해범이 아직도 살아있다!」

  누군가 자기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 것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예감이었다. 누구인가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어느 구석에 숨어 있다가 달려 나와 자기를 죽이려 들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왜 이럴까?  나이가 들어 마음이 약해진 탓일까?」

  안두희는 자신을 아직까지 비호하고 있는 세력들이 많다고 여겼고, 또 이들에게 백범시해

는 소신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했다.

  안두희는 조간(朝刊)신문을 훑어보았다. 연말(年末)이라 신문은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신문을 대강 흝어 보고 나서 다른 신문을 집어 들려고 했을 때 창밖에 어른거리는 어떤 그림자가 있었다. 그 그림자의 주인공은 청년이었다. 안두희와 문득 시선이 마주치자 그 청년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안두희는 그 청년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콩나물 공장의 직공이거나 공장에 드나드는 장사꾼으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안두희는 파자마 바람으로 세수를 하기위해 우물가로 갔다. 식모아이가 준비해 놓은 칫솔로 양치질을 하고 난 다음 세숫대야에 있는 물을 떠서 얼굴에 끼얹었다. 이때 문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잽싸게 대문까지 접근했다. 안두희는 이것도 모르고 세수하기에 바빴다. 물을 손바닥에 담아 얼굴로 끼얹을 때 대문 가까이 서있던 청년의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쏜살같이 안두희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벽력같이 고함을 질렀다.

 


「안두희 이놈! 내 눈은 속이지 못한다.」

  안두희는 엉겁결에 그 청년에게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네 놈이 안두희지?」

「나는 아니오. 사람을 잘못 보았소.」

  안두희는 일단 자신을 부인했으나 마음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러나 청년은 대답 대신에 한 손에 숨겨들고 있던 주먹보다 더 큰 돌을 안두희의 신상을 향해 던졌다. 느닷없이 돌을 맞은 안두희는「어이쿠!」하며 넘어졌다. 얼굴에서는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안두희는 본능적으로 이러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청년이 다시 달려들었다.

  백범 김구 선생을 시해한 삼천만의 원수야! 네가 도망 다닌다고 하지만 나는 네 뒤를 찾아 다녔다. 삼천만 민족이 주는 칼을 받아라!」

하면서 재빠르게 안두희의 얼굴을 난자했다.

  칼을 맞은 안두희는 한쪽으로 비틀거리면서,

「사람 살려! 이 놈이 사람 죽인다! 거기 누구 없소!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 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청년은 안두희의 얼굴에 칼을 여러 번 찍어댄 후

  「이 민족의 원수야!  네 죄는 네가 알 것이다. 양심을 속이지 말아라! 내 너를 죽일 수 있지만 추악한 인간을 죽이고 네가 희생당할 생각은 없다.」

하며 태연자약했다. 그때서야 고함을 듣고 가족들이 우루루 달려왔으나 이미 안두희는 쓰러져 의식을 잃고 죽음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가족들은 피투성이가 된 안두희를 집안으로 옮기는 한편 고함을 지르면서 아우성을 쳤다.

  떠들썩한 소리에 공장 안에 있던 종업원들 10여명이 현장으로 달려와 칼을 휘두른 청년을 잡았다. 청년은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땅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종업원들에게 말했다. 

「나를 잡아가라. 나는 내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삼천만의 원수 안두희를 응징했다. 신문 기자에게 말려라.」

  이 말에 종업원들은 청년의 멱살 잡은 손을 놓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상전인 안두희가 민족반역자였던 것을 알았지만 월급을 받아먹는 죄로 청년을 밧줄로 묶었다.

  청년의 이름은 곽태영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안두희는 기적적으로 희생하고 경찰에 연행돼 구속된 곽태영 선생은 1심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곽 선생은 백범 선생 동상건립운동을 비롯, 백범 기념 사업회 이사로 백범의 뜻을 기리는 사업과 재야 민주화운동에 가담, 백범의 뜻을 이어오고 있다.

  당시 곽태영 선생에게 칼을 맞은 안두희는 그가 납품을 했던 제일 야전병원에서 긴급수송을 받았다.  그러나 시설이 미비해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말에 다시 춘천 독립병원으로 옮겼고, 그 덕분으로 사건이 난지 이틀 후 안두희는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이때부터 안두희는 사업보다도 생명을 보전하려는데 더 신경을 썼다.

 


권중희 선생의 추적

 

 1992년 9월 23일 새벽 6시경, 안 씨가 은둔해 있던 인천 동영아파트에 네 사람의 불청객이 찾아왔다. 안두희의 친척으로 알려진 권중희 선생과 의분에 찬 시민 김인수, 변수환, 신현식씨 등이었다.

  안두희를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 암살배후를 밝히겠다는 게 이들의 계획이었는데, 거사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안두희의 동거녀 김0희씨가 운동하러 문밖으로 나서는 사이 권 선생 일행은 쏜살같이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동거녀 김씨의 손발을 묶은 일행은 안 씨가 자고 있던 방문을 열었다.

「누구요?」

  늙은 안두희의 무표정한 얼굴이 무척 측은하게 보였으나 마음을 모질게 먹고 안두희를 묶었다.

「당신을 묶을 수밖에 없어」

  안두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며 순순히 응했다. 반항을 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이미 병들어 수족을 쓰지 못하는 그는 반항할 기력조차 없었다.

  다만 욕실에 있던 틀니를 가져와 달라고 했다. 권 선생들은 그들은 마대자루에 넣고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실었다. 일행은 안두희를 이렇게 다루는 것이 현행법에 어긋나는 줄 알고 있지만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안두희의 입에서 진실을 캐야한다는 다급함이 현행법을 앞섰던 것이다.

  일행이 달려간 곳은 청평호반이 건너다보이는 경기도 가평의 호젓한 마을, 동지인 박해규씨의 농장이 있는 곳이었다. 

  아침 10시쯤 목적지에 도착한 일행은 마대자루에서 안두희를 꺼내 결박을 풀어 주었다, 안두희의 눈은 여전히 검은 천으로 가려진 상태였다. 권 선생 일행은 안두희를 안방에 앉힌 뒤 물었다.

「자 이제 모든 것을 털어 놓으시오. 증언을 하고 돌아서면 번복하는데 그 이유가 뭐요?  암살의 배후를 털어 놓으시오」

  연이어 다그침에도 안두희는 묵묵부답이었다.

 


  화가 치민 일행 중 한사람이 가느다란 막대기로 안두희의 무릎 위를 내리쳤다. 그러나 안두희는 얼굴을 찡그린 채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려하지 않았다. 안두희의 뺨을 때렸다. 그대로 묵묵부답이었다. 권 선생은 자신이 늙은 안두희에게 너무 심하게 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40여 년 전의 김구 선생 암살 장면을 생각하면 오직 분노 그 것 뿐이었다. 이때 김인수씨가 낫을 들고 나왔다.

「네놈이 김구 선생을 시해할 때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을 내놔봐!」

  안두희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의 손가락에 날카로운 낫의 칼이 번쩍였다.

「이게 뭔지 아시오?」

「낫이오.」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안두희의 분별력은 또렷했다.

「자 이제 더럽고 추한 이 손가락을 잘라 내겠소. 후회 없겠지?」

  안두희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슬 퍼런 낫 앞에서 낯빛하나 바꾸지 않는 그의 배짱에 일행은 놀랐다.

  권선생과 김씨는 위협과 강요로는 결코 그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베개로 안두희의 등을 받쳐주고 편안한 자세로 앉게 했다.

「영감님 이제 얼마나 살겠다고 그러시오. 당신이 무슨 죄가 있소. 죽인 놈들은 뒤에서 시킨 놈들이지. 김구 선생을 시해하면 큰 감투를 씌어주겠다고 유혹하고 그놈들이 나쁜 놈이요.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털어놓고 속 시원하게 살아보시오. 그게 당신 스스로 속죄하는 길이고 민족과 백범 선생에게 속죄하는 길이요.」

 


  안두희는 이 말에 묵묵부답이었다. 그 동안 권중희 선생은 안두희를 끈질기게 뒤쫓으면서 1987년에는 안두희를 응징한 죄(?)로 구속까지 되었었다. 그래서인지 안두희는 권 선생을 두렵게 생각했다.

  권 선생이 다시 이야기했다.

「안 선생도 지쳤지만 나도 지쳤소. 이번에는 내가 죽던 당신이 죽던 마무리를 집시다.」

  안두희의 눈가에 가려졌던 검은 천을 풀어주었다. 안두희는 목이 타는지 물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무대에 갔었어요.」

「그래서요?」

  이렇게 해서 안두희로부터 얻은 답변은 안두희가 김구 시해 6일전인 1949년 6월 20일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는 과정과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격려금을 받은 일 등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결국 이승만 정부로부터 친일민족 반역의 면죄부를 획득한 반역자들의 자신들의 죄를 영원히 보장받기 위해 저질은 소행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안두희는 나중에 「배후는 없고 단독범」이라고 주장했다.

  안두희 납치 사건이 난 다음날 아침 권중희 선생과 일행은 폭행 및 남치 등의 혐의로 경찰에 구속이 되었다.

  비슷한 시각, 안두희는 서울 혜화동의 우당 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평의 한 농장에서 고백했던 내용의 일부분을 공개했다. 하지만 인천의 집으로 돌아간 뒤 무슨 일인지 안두희 태도가 돌변했다.

「암살의 배후는 없다 모든 것이 폭력으로 강요된 거짓 진술이었다.」

  진술을 번복한 안두희는 그로부터 2년 뒤 백범 진상규명위원회의 국회 증언대에 섰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애매모호한 진술을 되풀이했다. 생전에 안두희는 백범 시해의 대가로 모두 일곱 차례의「응징」을 당했다. 그때마다 그는 거처를 옮기고, 가명을 쓰며 추적자들을 따돌렸다. 그리고 마지막 박기서 선생에게 그는 응징을 당해 괴롭고 끈질긴 80평생을 마쳤다.

 

 

 

  박기서(朴琦緖) 의사의 정의봉(正義奉)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쯤, 인천시 중구 신흥동 3가 37의 9 동영아파트 502호 안두희의 집에 한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작달막한 키에 눈 밑이 유난히 빛났다. 그의 손에는 스스로 쓴 정의봉이란 짤막한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바로 이 중년 사내는 부천 소신여객버스 운전기사 박기서씨, 박씨는 안두희의 동거녀 김모씨가 슈퍼마켓에 가기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 침입했던 것이다.

  「나는 박기서란 사람이오. 민족반역자 오천만 민족의 원수 안두희를 죽이러 왔소.」

하며 권총을 들이댔다. 그러나 그 권총은 실물과 나무로 흡사한 장난감 권총이었다.

  박씨는 집안으로 들어와 동거녀 김씨를 흰색 나일론 끈으로 손발을 묶고 안방에 감금한 뒤 안두희가 누워있던 옆방으로 들어가「정의봉」이라고 쓰인 길이 40 센티, 지름 4센티 정도의 나무 방망이로 안두희를 때려 살해하고 나갔다.


  경찰은 이날 안두희의 옆집 501호 주인 남 모씨로부터 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안두희가 숨진 것을 발견했다. 안두희는 손이 모두 뒤로 묶인 채 뒷머리를 둔기에 맞아 피를 흘린 채 누워있었다.

  안두희의 동거녀인 김씨는 손발이 묶인 상태로 안방에 쓰러져 있었고, 안두희의 사체 옆에는 정의봉이라고 쓰여진 나무 몽둥이가 놓여져 있었으며 범인 박씨는「見利思義 見危授命박기서」라고 쓰여진 가로 3센티 세로 33센티의 화선지를 남겼다.

  경찰은 박기서씨가 자수의사를 밝혀옴에 따라 박씨가 있는 부천시 소사구 천주고 심곡 본동 성당에 형사대를 보내 이날 오후 7시쯤 박씨는 인천 중부경찰서로 연행했다.

  박씨는 경찰에 연행된 뒤 침착하게,

「정의는 살아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정의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로써 안두희의 오욕된 삶을 마감했다.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시해범은 김구선생을 시해하고 50년을 더 살아 우리 민족에게 더러운 역사를 만들어 주었다. 위대한 민족지도자를 시해하고도 제명을 다 살 수 있는 정의가 땅에 떨어진 추한 국가라는 역사가 인류의 역사 속에 기록될 뻔 했던 절대 절명의 시점에 안두희를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여 우리민족의 역사를 그나마 바르게 기록하게 되였다.

  안두희는 백범을 시해하면서 모든 것, 돈과 권력을 움켜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세상에는 양심과 정의라는 것이 있어서, 그들의 인생을 파멸시키는데 앞장 선 것이다. 안두희는 모든 것을 잃었다. 마지막 그는 자신보다 훨씬 늦게 태어난, 김구 선생 시해 이전에 태어나 생전에 시해사건을 접하지 못한 사람에게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곽태영, 권중희, 박기서씨에게 사람들이 씨(氏)자 호칭을 벗기고 선생(先生) 또는 의사(義士)라고 대우해 주는 것은 범법자가 될 것을 각오하고 안두희를 살해한데 대한 다수의 의견과 공감(共感)했기 때문이다.

  박기서씨가 살인죄로 구속이 되자 많은 애국단체들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내고「박기서 의사 석방 촉구결의대회」를 열기로 했다. 1997년 3월 8일 탑골공원에서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유족회 회원 5백여 명을 비롯한 많은 애국단체들이 모여 박기서 의사의 석방을 촉구하는 대규모의 집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신홍우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유족회 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박기서씨가 어느 날 갑자기, 영웅심에 사로잡혀 남의 생명을 뺏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그의 고향 친구들이나 부천 소신 여객운소의 직장에서나 이웃들에게나 원칙을 지키고 더불어 사는 사람이라고 것은 이미 신문에 보도된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상이 바르게 정립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일상에 여념이 없을 때 그는 반역자가 자연생명을 마치게 되는 결과를 후대에 남겨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과 생명을 뺏아야 한다는 스스로의 두려움 사이에서 많은 날을 고민하다가 10월 23일 역사의 줄기를 바로 잡자는 일을 결행 한 것입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남의 생명을 뺏는다는 것이 얼마나 개인을 위해 불행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신홍우 선생은 이 말을 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아무튼 안두희는 죽었다. 안두희를 비호하는 세력은 모두 죽었지만 아직도 권력을 등에 업고 인간의 양심을 버리면서 대아(大我)보다는 소아(小我)에 집착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