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69. 김성주(金聖柱)의 최후

오늘의 쉼터 2013. 3. 31. 11:52

69. 김성주(金聖柱)의 최후

 

 


 민족반역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불리해지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파렴치한 자들이었다.

이 자들에게 의리(義理)를 바란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왜놈들에게 아양을 떨며 온갖 추태를 부리며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며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취하다가, 왜놈들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반공(反共)을 앞세워 자신들의 민족반역

행위를 숨기고 진정한 애국자를 제거하며 애국자인 듯 행세를 하였다.

김창룡, 채병덕, 노덕술(경찰) 같은 사람이 그들이었다.

  아무튼 골치 아픈 장은산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해 버린 일당들은 한시름 놓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말썽이 생겼다.

  김구 시해에 간접적인 지원을 했고, 안두희의 석방운동을 하며 김지웅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던

김성주가 김구 시해사건의 배후조종자들을 비난하고 다닌다는 정보가 김창룡의 귀에 들어왔다.

  김창룡은 이 같은 소문에 대해 심기가 무척 불편했다.

 


「이 새끼를 그냥 놔둬서는 안 되겠군. 이 새끼를 없애버려야지 우리가 안심하고 다닐 수 있지.」

  그 당시 이승만은 김상주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김성주를 경외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었다. 김성주가 김구 시해에 대한 자초지종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입이 가벼워 여기에 이승만까지 넣고 욕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김창룡은 이런 이승만의 생각을 읽고, 김성주를 죽여 없애는 것만이 이승만과 자신들의 인권을

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기회에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고 다니는 자를 모두 없애야겠다.」

  그래서 김창룡은 김성주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내무부 치안국장 문봉제에게 김성주에 대해

여러 가지 비행사실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일개 중령이 치안국장에게 지시를 내리는 일이란 당시 대한민국에서 밖에 없었다.

그만큼 김창룡은 빨갱이를 잡는데 일등공신이었고,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문봉제는 김성주의 뒤를 부하들로 하여금 미행시켰다.

이때부터 김창룡의 수중에는 김성주를 잡아넣기 위한 수사 자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자료는 조금 더 보태서 헌병사령관 원용덕의 손을 거쳐 이승만 대통령의 손에 들어갔다.

그 보고서에는 김성주가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인 진보당의 조봉암에게 김구 시해의 배후를 공개,

다음번 대통령 선거에 이용하려고 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 보고서를 받아든 이승만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 문봉제를 데려와!」

 


  불려온 문봉제는 이승만에게 자신도 그와 같은 정보를 갖고 있다고 했다.

「틀림없나?」

「예 틀림없습니다. 김성주는 저를 죽인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김성주가 자네를 죽여?」

「그렇습니다.」

「무엇 때문이야?」

「그래야만 자신이 치안국장을 할 수가 있고 그래야만 경찰권을 장악해서 각하를

다음번 선거에 출마하시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얀 놈 이것 봐!  자네 내 말 명심해!」

「예, 각하!」

「김성주 그 자가 지난번에 진보당에도 관련됐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각하!」

「그 자가 나와는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러나?」

  문봉제는 자신이 멋대로 만들어 이야기를 했다.

「김성주는 각하의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유엔군과 짜고 더 큰 자리를 노리고 있는 듯하다.」

「맞았어. 자네 말이 틀림없어.」

「각하! 이 나라는 오직 각하의 것입니다.」

「그렇지」

「그런데도 김성주는 유엔군이 임명하는 평남 지사가 되는 등 오만방자 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 자는 그냥 놔둘 수가 없다.」

 


  아첨을 하는 자의 아첨을 받아주는 통치자가 있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이다.

자유당 말기에는 이런 일이 흔했다. 김성주를 이승만이 미워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김성주가 유엔군 밑에 붙어 있으면서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데 있었다.

1953년 6월 26일 하오2시,

이날 김성주는 서울 을지로 2가 노상에서 몇 명의 헌병에게 연행이 되었다.

김성주는 영문도 모른 채 헌병사령부에 도착했고, 죄목도 모른 채 조사를 받았다. 

  김성주는 연행된 지 4시간 만에 헌병사령관인 원용덕 중장의 명령으로 긴급 구속이 되었다.

죄목은 국가보안법과 제3조 위반이었다. 계엄 중이었기 때문에 구속영장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김성주가 제 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한 조봉암의 선거 사무장을 지냈다고 트집을 잡았다. 취조관들은 김성주에게 밤낮없이 고문을 했다.

그리고 북괴에서 제공한 선거자금으로 조봉암과 함께 국가변란을 모의했다고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

김성주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김성주의 지문까지 찍은 이들은 국가 변란, 대통령 암살음모 등의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했다.

  그런데 고등군법회의에서 증거가 없다고 기각했다.

  이에 당황한 원용덕은 새로운 죄목을 찾게 했다.

여기에 다시 김지웅이 등장한다.

김지웅은 백범시해에 공로를 세워 서울 중구 필동에 대궐 같은 집을 사들이고

돈을 물 쓰듯 쓰고 있었다.

김지웅을 증언대에 세운 그들은 김지웅에게 허위 증언을 하도록 했다.

1952년 10월 하순경 미국으로 떠나는 와빈슨이라는 미군장성이 부산부두에서

「김성주가 당신(김지웅) 과 신성모, 이승만대통령을 암살 하려교 하니 조심하라」고

하더란 이야기였다.

 


  김지웅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성주의 변호인들은 와빈슨이라는 미군 장성을 찾으려했으나

그런 장성은 없다는 미군 측의 조회였다.

  한두 차례의 공판이 진행되면서 김성주는 계속 죄를 뒤집어썼고 결국 김성주는 형무소 안에서

비명에 죽어갔다.

  언도공판 때 김성주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4.19혁명 후 김성주 의문의 죽음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김성주의 가족들은

헌병총사령부의 정보원이었던 김지웅 등 12명을 살인죄로 고발했다. 고발장을 접수한 검찰은

수사에 착수, 김성주 살해가 불법적으로 자행된 것을 확인했다.

  1961년 9월 30일 원용덕과 김지웅 등은 육군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의 판결을

받았고 나머지는 가벼운 형을 받았다.

  한편 권력의 비호 밑에 갖은 악랄한 짓을 모두 감행한 김창룡의 최후 역시 그리 아름답지가 못했다.

  1920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난 김창룡은 관동군헌병대 시절의 친일전력이 문제가 되어

북한진주 소련군 당국에 체포, 사형장으로 이송 중 탈출해 월남했다.

김은 국방경비대 제 5연대 입대한 뒤, 1947년 육사 3기생으로 입대했다.

1949년 소령으로 진급한 그는 군부대의 좌익운동을 척결, 특무대의 전신인 방첩대 (SIS)대장으로

승진한 뒤, 특무대장을 맡아 온갖 횡포를 부렸다.

그러다가 56년 1월 그의 전횡에 견디지 못한 강문봉 당시 육군중장의 지시로 허태영 대령 등이

고용한 저격수 3인조에 의해 총탄을 맡고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