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70. 원흉 신성모 충격사망

오늘의 쉼터 2013. 3. 31. 12:15

70. 원흉 신성모 충격사망


김구 시해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독립유공자 장흥장군은 신성모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먼저 김구 선생 암살의 주모자들을 분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단체로서는 한민당과 새로 조직된 8.8 구락부, 서북청년회이고,

개인으로서는 국방장관 신성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범 선생님이 저격 당하신 후에 한민당 당무회의 에서도 백범 선생님을

국적(國敵)이라고 규정하여 신문에까지 발표했고, 흉수(兇首) 안두희 놈을

만국의 충신이라 하여 석방운동을 폈습니다.

한민당은 원래부터 친일파를 중심으로 구성된 집단으로서 백범선생님을 원수같이 여기고

기회 있는 대로 몰락시키려는 때에 이승만 박사를 업어 한민당 총재로 모시고

대외적으로 국부(國父)라는 호칭을 붙여 이 박사 정권안의 각 요직을 차지하려는

음모아래 안두희를 교사, 이런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신성모는 그 후 이대통령에게 아부하여 독립유공자 이범석 총리를 몰아내고 스스로

서리라는 명칭을 붙이고 국무총리를 박탈했다.

 

 


  신성모는 원래부터 악인(惡人)으로서의 재질(?)을 갖춘 자였다.

한국인은 천성이 대부분 순하고 어진 편인데, 신성모는 교활하고 음흉했다.

  속담에「악은 악으로 망한다」고 했듯이 이 대통령이 하야(下野)를 선포한지

얼마 안 되어서 정파들이 백범 선생 암살사건의 내막을 세상에 폭로하자

신성모는 충격으로 쓰러져 동대문 옆 이대부속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그 며칠 뒤 사망했다.

신성모는 정치적으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역죄를 저질렀다.

군사적으로는 6. 25 를 유발한 대 죄인이기도 하였다.

  당시 장흥 헌병사령관은 암살을 지켜 온 군수사기관의 최고 직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의 김구 암살 계획은 곧 군 상층부 인사들의 참여가 뒤따랐음을 증명했다.

  「극소수의 민족반역자들의 전신인 일본군 출신 군인들의 준동으로 결국 군의 위계질서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군은 국가 보위가 최우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성모와 같은 민족 반역자들의 무리가 국방권을 장악했으니

나라가 제대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김구 선생 시해범인 안두희란 놈은 자신이 피고인으로 서게 된

법정의 방청권을 친지들에게 우송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군기가 문란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장흥 씨는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 김구 선생 대목이 나올 때마다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당시의 방청권을 보여주었다.

  「1949년(단기4282년)에 발행된 방청권에는 (방청권 NO301),

본 소지자는 하기와 여히 중앙 고등법회의 방청을 허가함.

기(記) 4282년 8월3일 당일에 한하여 유효.

검찰관 육군 소령 홍영기라고 인쇄돼 있습니다.」

  안두희는 이 방청권을 자랑스럽게 D일보 H에게 보내면서

「한형 무음(無音)용서하십시오.

형과 아주머니 방청하실 수 있으면 왕림하십시오.

옥중 재 안두희」라고 발신인 란에 썼다.

이것은 자신의 뒤에는 엄청난 권력의 그림자가 보호를 하고 있으니

 염려 말라는 뜻이 된다.

죄를 지고 수감돼 있는 피고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방청권을 발송한다는 것은

법치국가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신성모는 이렇게 비명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