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삼천만 민족이 오열한 김구의 국민장(國民葬)
김구가 안두희의 총탄에 맞고 비명에 간 지 10일 만에 전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김구의 유해는 정들었던 경교장 대문을 나서 충정로 고개를 넘었다, 소복(素服)을 입고 굴건(屈巾) 제복(祭服)을 한 사람들과 서대문 일대는 물론 전국의 주요도시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삼천만 민족 모두가 상주(喪主)였다. 김구의 유해가 경교장 정문을 나서려할 때 하늘도 무심치 않았는지 굵은 비를 뿌렸다. 청명하기만 한 날씨가 컴컴해지더니 그것은 소나기가 되어서 상복(喪服)입은 사람들의 옷을 적셨다.
주인을 입은 경교장은 침묵을 지켰다. 김구가 평생에 처음 자리를 잡은 경교장이었다. 다시 못 올 영원한 길을 떠나는 김구의 상여(喪輿) 양옆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수많은 동지들이 눈이 붓고 목이 쉰 채 상여를 따르고 있었다. 장안의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마지막 이승을 떠나는 김구의 상여를 향해 고개 숙여 명복을 빌기로 하고, 어떤 사람은 큰 절을 수없이 올리기도 했다.
상여 앞에 있는 근엄하지만 인자한 모습으로 커다란 김구 초상화가 들려 있었다. 그 얼굴에 칠십 평생의 고뇌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충정로 고개부터 서울 운동자 연결실장에 이르는 길목의 모든 상가는 철시한 채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이 슬픈 날, 장사를 해서 몇 푼 남겨본들 그 무엇이 기쁘겠는가 하고 생각에서였다. 중국 정부에서는 화교상인들에게 문을 닫고 김구의 덕을 추모하도록 공문을 보냈다.
영결식은 육군 군악대의 주악과 육군 의장대의 조포가 울리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장례위원장인 오세창(吳世昌)은 고인을 추모하는 구구절절 눈물을 뿌리는 조사를 낭독했다. 각계의 애끓는 조사와 조문이 낭독되고 김구의 영전에 바치는 헌시가 낭독되었다. 가슴 저리는 시를 곁들인 김성태 작곡의 추도가가 육군 군악대의 주악으로 울려 퍼지자 성동원두(지금의 서울운동장)는 흐느낌의 소리뿐, 온 세상은 눈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어허 여기 발 구르며 우는 소리
지금 저기 아우성치며 우는 소리
하늘도 땅도 울고 파도조차 우는 소리
끝없이 우는 소리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여 듣습니까.
이 겨레 나갈 길이 어지럽고 아득해도
임이 계시오매 든든한 양 믿었더니
두 조각 갈라진 땅 이대로 버리고서
천고에 한을 품고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떠도신 칠십년이 비바람도 세옵더니
돌아와 마지막에 광풍으로 가시다니
열매를 맺으려고 지는 꽃 어이리까.
품으신 피의 값이 헛되지 않으리다.
헛되지 않으리다.
삼천만 울음소리 임의몸 메고 가오
편안히 가옵소서 돌아가 쉬옵소서.
뼈저린 아픈 설움 가슴에 부드안고
끼치신 임의 뜻을 우리 손으로 이루리라
우리 손으로 이루리라
백범과 함께 평양을 다녀왔고 사해 임시 정부 때부터 친구요 동지였던 김규식도 피를 토하는 듯 한 조사를 읽어나갔다.
백범(白凡)을 애도함
1946년 6월 26일 고 김구 동지는 불의의 흉탄에 비참하게도 최후를 마치었다. 이 비보를 접한 김규식은 잔인무도한 폭력적 만행을 무한히 원망하며 우리 국가의 운명과 민족의 장래를 볼 때 전도가 암담한 것 같으며 한없는 통분을 느낀다.
이 참혹한 민족적 비애는 3천만 민족으로 하여금 하늘에 호소하고 땅에 발버둥 치며 민족적 애통으로 국토가 양단되고 분열된 민족이 너나 할 것 없이 스스로 일어난 통일적 공분을 억제치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직장까지도 포기케 하였다.
오호, 동지여! 동지의 최후를 보고 우리는 슬퍼서도 울고, 우리 자신의 앞날을 위하여서 울고, 또 여러 가지로 슬퍼하는 것을 아는가? 동지여! 일생을 바치어 애국 애족하였다는 위대한 공적은 역사 보고가 있기 때문에 나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동지가 걸어온 70평생은 일신의 명예와 사를 버리고, 오로지 조국 광복과 반일투쟁에 심혈을 경주한 동지가 이 땅에 왜적이 물러간 오늘, 동족의 손에 쓰러졌다는 것은 동족의 치욕일 뿐 아니라, 정녕코 우리 사회의 무질서를 증좌 하는 것이며, 왜적의 심장을 가진 조선인이 아니면 도저히 감행할 수 없는 만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영결에 임한 이 순간 우정을 논하고, 과거를 추궁할 정신적 여유조차 없겠지만 고사 간 동지에 대한 우리의 애정은 너무도 애달프다. 동지여! 1910년 나라가 없어지자, 우리는 생명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국권 회복의 제물이 되려고 하지 않았던가? 동지여! 그동안 민족 갱생을 위하여 기한과 형장(刑杖)의 고에 시달린 것이 몇 번이었으며 외의 멸시에 나라 없는 치욕과 인간적 비애는 그 얼마나 컸던가?
더욱 8.15 이후 동지는 우리 민족의 본의 아닌 국토가 양단된 마의 38선과 제약된 국내 정세를 민족적 단결로써 분쇄하고 진정한 민주 발전과 남북통일을 위하여 흉변을 당한 순간까지 소신을 꺾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오오! 백범 김구 동지. 우리는 이제 이 자리에서 동지의 불행을 슬퍼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남아 있는 날까지 동지의 정신을 받들어 민족적 당면 과업인 완전통일 대업 완수에 성심 성력을 다할 것이며, 조선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 인류 평화를 협조하려는 모든 애국 애족자로부터 동지의 유업에 보답하려고 한다.
동지! 이 거룩한 영결식장에는 동지의 유가족을 비롯하여 수많은 친지와 내외인사들이 동지의 최후의 걸음을 애도하고 있소.
인간 백범을 우러러보는 것보다 애국자이며 지도자인 동지를 추모하는 것이며 개인적 감동의 충동이 아니라 이 강산의 보전과 국가 사회의 전도를 걱정하는 것이오. 동지여! 동지가 완성을 보지 못한 이 국가 건설 과업은 우리가 일층 더 용감히 추진하여 이미 간 동지와 무수한 선열의 영령을 위안하며 기한과 만난고초에 허덕이는, 신음하는 민족이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획득하도록 더욱 계속 노력할 것을 동지의 영전에서 삼가 선언하오니 동지여 고히 잠드시라.
- 민족자주연맹 김규식
추운 시베리아 벌판 황량한 중국 대륙 산야에서 김구와 같이 독립운동을 한 청산리 전투의 용장 이범석(李範奭)국무총리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영원히 첨앙(瞻仰)
오호! 선생님 이제 선생님의 영전에 인산을 이루어 영결식을 엄숙히 거행하고, 군중의 통곡성 천지에 진동하는 이 자리에 조사를 읽게 되니 이 어이한 운명의 장난이리까? 평생을 한 결 같이 민족과 국가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신 혁명의 선생 백범 선생이여!
이제 존영에 공척 하여 정집해 있으나 선생의 웅건한 생명 있는 기구를 대할 길 없고 영전에 고개 숙여 귀를 기울이나 선생의 장중하신 그 음성을 들을 길 없으니 만산초목은 향기를 잃은 듯 삼라만상은 생기가 사라진 듯 비참한 속에 오열할 뿐입니다.
선생님! 인간으로써 생사가 있음은 운명의 정규일 것이나 일생을 조국 광복과 민족의 행복만을 위하여 악전고투 형극의 험로와 험난한 생애 속에서 애태우시며 떠나시는 길이기에 이다지도 비통 애절함을 금치 못합니다.
이제 민족의 거목은 70년 풍상 끝에 쓰러졌고 혁명 거성은 조국의 광복으로 서천에 운명하니 우리 민족의 전체적 비극이 아닐 수 없고 국가 장래의 막대한 손실이니 왜 아니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 이제 선생이 이 겨레 이 땅을 떠나심에 선생이 끼치신 위대한 혁명 투쟁의 사실을 뉘 아니 숭앙치 않으오리까.
이제 이 민족의 스승이신 선생님은 깊이 잠드시었고 다시 오시지 못할 유명의 길을 떠나셨나이다. 그러나 선생의 위대한 정신과 천연한 업적은 우리 3천만의 시장에 맥박을 치며 힘차게 흐를 것입니다.
조국 통일을 시급히 성취할 것을 영전에 기약하며 맹서하오니 재천하옵신 선생의 영혼이여 고이 명복하사 국가와 민족에 복 빌어 주소서.
- 국무총리 이범석
종교계를 대표한 가톨릭의 노기남(盧基南) 주교도 울음 섞인 목소리로 목자를 잃은 양떼는 이제 어디로 가느냐고 애통해 했다.
유훈 빛나리.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잃은 것은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선생님께서는 자기 생애를 조국 광복을 위하여 바치신 애국자이심은 3천만이 공인하는 바로서, 선생이 당하신 흉변이야말로 선생 일개인의 흉사에 멈춤이 아니라 이는 국가적 일대 흉사인 것이다.
민주 열강의 우호적인 협조로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 한국은 남북이 통일되고 민생이 안정되어 선생의 평생소원이던 통일된 부강한 민주국가로써 발전할 것이로되, 선생께서 이를 못 본 채 서거하였음은 더욱 비통한 일이다.
선생은 가셨으나 선생께서 이 땅에 남기신 애국의 정성과 민족의 정기는 영원히 빛나며 우리들의 좋은 규범이 될 것이다.
- 주교 노기남 -
영결식이 끝나자 김구의 유해는 영원히 잠들 효창공원의 유택으로 떠났다.
효창공원으로 가는 영구 앞에는 6명의 기마경찰이 앞서고 12명의 경찰 간부가 4열 종대로 늘어섰다. 또한 그 뒤에는 16명의 진명여자중등학교 학생들이 큰 태극기를 받쳐 들고 따르며 그 뒤를 육해공군 군악대의 의장대가 뒤를 따랐다.
김구가 항상 타고 다니던 331호의 차체에 몸을 담은 상여는 천천히 서울운동장을 떠났다.
상여 뒤에는 유가족과 수많은 시민들이 따랐다. 이날 장례의 행렬은 서울 운동장에서 효창공원까지 줄을 이었으며, 만장과 만기는 바다를 이루었다. 여학생들의 애끓는 백범 추도가는 더 한층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녹음이 무성한 효창공원의 숲은 산새들도 슬픈 양 재잘거리며 울부짖었다. 황해도 산골에서 태어난 백범 김구는 평생을 조국 광복과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다가 영원한 영겁의 세계인 흙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도 발 한 번 편안히 뻗어 보지도 못하고, 나라와 겨레만을 걱정하다가 공산주의와 내통했다는 음모자들의 계략에 넘어가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일찍이 왜놈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윤 봉길, 이 봉창 등 옛 동지들이 잠들고 있는 옆으로 온 김구 유해가 든 관이 차에서 내려 다시 제단 앞에 놓여졌다.
이제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대하는 김구의 육신이다. 효창공원까지 따라온 수많은 조객들은 다시 제단 앞에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고 분향하며 헌화했다. .
군악대의 주악에 맞추어 마지막 장송곡이 효창공원에 메아리치며 은은히 울려 퍼졌다. 하늘은 구름이 끼었으며 산새들도 조용히 나래를 움츠렸다. 하오 7시 10분 눈물의 기도 속에 김구를 담은 관이 천천히 땅속으로 하관됐다.
한 삽 두 삽... 던지는 흙더미 속에 관을 덮은 태극기 무늬가 마지막 흙에 덮였다. 이제 김구의 파란만장한 피맺힌 일생은 모두 끝난 것이다.
어슴푸레한 석양 놀을 안고서 비통해 하는 민족과 겨레를 두고 김구는 영원히 잠들었다.
그러나 김구의 높은 업적은 이 조국이
있고 민족이 있는 한 영원히 빛날 것이다. 선생이여! 당신을 배반한 이 겨레와 민족을 용서 하소서
김구의 비문(卑文)을 이렇게 기록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1876년 병자년 음력 7월11일 자시 해주 백운방 텃골 안동 김순영 현풍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나 해주 최준례 맞아 仁, 信형제 두니라.
글을 즐겨 17세 때 과거보다. 아버님 임종에 살 베어 먹이더니 늙어도 어머님 가르침 받드니라. 의의에 굳음이 인격의 터러라. 갑오 동학란에 선봉장으로 해주성 치니 19세라 선비 고능선에게서 충의 배우다. 21세 치하포의 한칼로 국모 원수 갚고 사형 36세 안명근 일과 양 기탁 일에 걸려 17년 형 살다가 5년 만에 나오다.
기미 삼일운동에 상해에 나가 우리 정부 문지기 원하니 44세라. 52세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되어 끝내 태극기를 지키다. 55세 한국독립당 꾸며 이끌다. 주석과 알아 국빈 대접받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정부와 동지를 중경에 옮기니 63세라. 65세 한국광복군 꾸며 훈련하다.
67세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일본에 선전하다. 카이로 회담에 장 개석 주석이 우리 독립 말하더라. 을유 8.15 해방으로 갈린 만세 속에 서울오니 70세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반탁운동 일으키다. 국민의회 끌어 미. 소. 군정 말고 우리 정부 원하다.
73세 평양 남북 협상에 화평통일 외치다.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은 민족의 말이러라. 기축년 6월 26일 오시 서울 경교장 서실에서 총 맞으니 74세라. 항공소령 信이 이으니 한 간 집 한 뙈기 밭 물림도 없더라. 국민장으로 7월 5일 서울 효창공원에 모시니 태백의 정기가 서리더라.
백범 김 구 선생 국민장의위원회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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