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67. 두 악인(惡人)과의 만남

오늘의 쉼터 2013. 3. 31. 11:17

67. 두 악인(惡人)과의 만남

 

사람이란 누구나 나이를 먹게 마련이다.

세월을 역행(逆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가졌던 이상(理想)과 꿈이 나이가 들어 생각하면

한갖 부질없는 바람과 같이 느껴질 때쯤, 사람의 얼굴에서는 주름살이 진하게 나타나게 되고,

가치관의 변화가 오게 된다.

  그래서 진리(眞理)라고 믿었던 것들이 때로는 그 허구성에 놀라 혀를 차게도 된다.

  1972년 7월의 어느 날,

김구 시해사건이 난지도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됐을 때쯤 돼

조그만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사건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화제거리였다.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고 있는 석간신문에서는 김구 시해사건을 의례적으로 다루어

눈길을 끌게 했다. MBC 라디오의 장편 다큐멘터리 드라마 3.8선에서는 가끔씩

역사의 증언을 놓고서 잦은 의견의 충돌이 생기고 있었다.

그때 한 신문에서 당시의 행동 대원이었던 홍종만을 불러내어 인터뷰를 한 기사가

특종이란 이름으로 보도돼 독자의 눈길을 끌었다.

 


  먼저「38선」이란 드라마의 내용 중 백범 암살 사건을 다룬 부분이 말썽이 되었었다.

백범 암살 계획의 직접 하수인으로 지목받고 있는 홍종만이 북괴의 남자 간첩으로 복역 중

백범 암살의 조건으로 풀려나서 하수인인 안두희를 조종했다는 부분이었다.

  홍종만은 여기에 이런 반론을 제기했다.

  나는 간첩이 아니었소.

시청공무원이었소.

증거가 있소. 암살부분을 시정해주시오.

이건 분명히 명예훼손죄에 해당이 되오.

아무리 하수인이었다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어엿한 시민이 아니오.

이미 공소시효로 끝났는데 함부로 선량한 사람의 명예를 훼손시켜야 되겠소.」

  그러자 방송국측에서는 이렇게 답변했다.

「방송국의 기자가 직접 취재를 한 것이 아니고,

이미 취재가 돼 책으로 나온 내용을 각색해서 만든 것입니다.」

  하면서 그 책임을 르포 작가인 S씨에게 떠넘겼다.

  홍종만은 S씨가 근무하고 있는 K신문사로 찾아갔다.

그러나 S씨는 그 자리에 없어서 메모를 남겼다.

홍종만은 M방송국에서 S씨를 만나자고 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백범 시해 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金溶熹)선생과,

선우진 선생(당시 비서)는 뛸 듯이 기뻤다.

왜냐하면 많은 세월 동안 홍종만을 찾아 헤맸지만 소재조차 파악치 못하고 있었는데,

그 하수인이었던 자가 제 발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홍종만이 M방송국에 나타나는 시간에 맞춰 있다가 홍종만이 나타나자 이를 잡았다.

  홍종만을 잡은 김용희와 선우진은 몇 개월 동안 홍종만을 만나면서 집요하게 설득을 했다.

  선생은 이젠 늙었지 않소. 

모든 것을 백일하에 밝혀서 당신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저승의 염라대왕에게 가서도

그 죄를 상쇄 받을 것이 아니겠소. 

그동안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을 것이오. 

이젠 모든 것을 담담한 심정으로 말하시오.」

 


  물론 홍종만의 신변의 안전과 비밀 보장을 해주겠다는 단서를 붙였다.

그러자 마침내 홍종만은 입을 열었다.

김구 시해사건은 안두희의 단독범이 아니라 계획된 범행이었고,

거기에 집권당 수뇌부들이 배후 조종한 사실이 드러났다.

물론 그 이전에 행동대원의 반장이었던 오병순의 폭로로서 안두희의 단독범행이 아니란 것이

드러났지만 홍종만이 이를 재확인해 준 것이다.

그리고 2년 뒤인 1974년 5월,

김용희 선생에게 새로운 정보가 날아 들어왔다.

서울에 살던 안두희 가족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안두희는 국내의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1973년 말까지

서울 도봉구 수유동 50의 41호에 살고 있었는데 미국에 있는 아들의 초청 이민장이 도착,

극비밀리에 이민수속을 하고 있었다. 

  연고 이민 초청을 받은 안두희는 1973년 12월 27일 보건사회부가 이민 신청서를 낸 후

수유동 집을 팔고 서울 영등포에 있는 외기노조 아파트 A호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안두희 가족이 갑자기 증발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용희 선생은 평소 알고 지내던

가까운 신문기자에게 홍종만이 녹음해 둔 것이 있음을 슬그머니 알려주고 안두희의

낯빛을 살펴보았다.

  1974년 5월 25일, 백범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진지 25년째 1개월을 앞둔 이날,

동아일보 1면 전면과 실면 전면에도 홍종만의 폭로기사가 특종으로 실려 있었다.

  그 다음날, 이에 질세라 다른 신문들 역시 김구 시해사건의 진상을 게재했다.

그러나 안두희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

다만 경향신문에서만 안두희의 이민 신청건이 간단히 보도가 됐다.

 


그런데 이 조그만 기사의 여파는 전 국민의 마음을 들끓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부도덕한 사람들, 거액 사기 사건의 범죄자들과,

살인범들이 해외로 도주하는 판에 안두희의 이민사건은 큰 여파를 타고 전해졌던 것이다.

  여론은 안두희의 이민에 대해서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냈다.

「이민을 보내야한다」는 것과「절대 이민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편 홍종만은 신문기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안두희가 살고 있는 외기노조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안두희를 만나러 갔다.

25년이 지난 후 처음 만나는 악인(惡人)들이었다.

여기서 악인(惡人)들이란 범죄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났어도 너무 엄청난 범죄를 저질러서

당시의 국민들 모두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결코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임을 뜻한다.

이들에게는 공소시효란 법적인 혜택이 필요 없다 보는 것이다.

  백범 김구 살해의 중요한 증인이 만나는 순간, 그들은 서로 말이 없었다.

이른 아침 느닷없는 홍종만의 방문을 받은 안두희의 표정은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홍종만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홍종만은 그 동안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한때 젊은 객기에 휩싸여서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배후세력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

자신을 뉘우치고 신문에「고백성사」까지 한 뒤 었다.

때문에 그의 마음은 한층 홀가분해 졌을 것이다.

「오랜만이요. 안두희 선생」

  그러나 홍종만의 얼굴은 물론 손까지 피했다.

  홍종만이 느긋하게 다시 말했다.

「안 선생 왜 이러시오.

우리 나이도 이제 오십을 지난 저승길이 촉박하오.

서로 악수나 나눕시다.」

 


  그러자 안두희가 벌떡 일어나 홍종만의 멱살을 잡았다.

「아니 왜 이래?」

  홍종만이 안두희의 손을 끌어내렸으나 안두희의 악력에는 당하지 못했다. 

곁에 있던 기자가 억지로 떼어 말렸다.

  「안 선생, 이렇게 좋은 날 왜들 이러시오.

예로부터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이 있잖습니까.

엉킨 것은 풀고 화합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러지 말고 친해집시다.

원 이래서야 어디 다시 만날 수 있겠소.」

  홍종만이 기자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안 선생, 이것도 전생의 인연이 아니오.

자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악수 합시다.」

  하며 손을 내밀자 안두희는 그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리고 악을 썼다. 무슨 힘이 그렇게 났는지 고래고래 악을 쓰는 모습이

마치 지옥의 나찰들에게서나 들어봄직한 단말마적인 소리였다.

  「나가 이 개새끼야!  너는 인간이하의 개만도 못한 놈이야!

돈을 얼마나 받고 이따위 짓을 했어!」

  하며 다시 일어나려 했다.

  홍종만이 안두희를 진정시키기 위해 침착하게 말했다.

  「그냥 그대로 앉아 있게. 자네나 나난 불행한 역사의 희생자야.

이젠 모든 사실을 밝혀야 하세.

우리들을 비호하는 세력은 이제 이 세상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네.

그놈들에게 우리는 이용당한 거나 마찬가지네.

의리란 의리를 외칠 줄 아는 놈들에게 필요한 것이네.

그놈들은 의리를 저버린 놈들이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국가의발전인가? 김구 선생을 시해 했다는 역사의 죄인 말고 어디 또 다른 것이 있나.

자네나 나나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도 지나지 않았나.

자네는 천주교라도 믿으니까 하느님이 보호해 주신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실로 속죄를 하지 않으면 너그러운 하느님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네.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기자가 끼어들었다. 

안두희로부터 어떤 단서가 될만한 사실이 나오지 않나 해서였다.

  홍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야기 해보세요.」

  그러자 안두희의 마음은 더욱 얼어붙었다. 

「듣기 싫어 이 개새끼야!  너는 인간도 아니다.

안 나가면 이거 집어 던지겠다.」

  하면서 곁에 놓인 가위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되어서 두 증인과의 만남은 끝나 버렸다.

  안두희는 홍종만이 나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자 이번에는 재떨이를 집어 던져 박살을 냈다. 

  홍종만이 밖으로 나가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안 선생, 이야기 하십시오.」

「아니오. 나는 단독 범행이오.

우국충정에 사로잡힌 영웅적 행동이었소. 역사가 나를 심판할 것이오.」

  한편 홍종만은 당시의 모든 사실을 폭로하고 백범 암살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모 신문에 4회에 걸쳐 자신의 수기를 연재했다.

그러나 홍종만의 수기는 안두희가 증인이 되어서 이를 뒷받침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빠져 힘이 없었다.

  안두희는 결국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다가 청년 박기서에 의해 살해를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