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안두희(安斗熙)의 거짓 수기(手記) (2)
6월 28일(화요일) 청천(晴天)
똑딱똑딱 취사장으로부터 울려오는 도마소리를 귀멀리 들으며 아침잠을 깨었다.
28일 새날이 또 밝아온다. 감시병은 여전히 초상(肖像)처럼 정좌하고 있다.
문이 닫힌 실내의 공기는 아침이면서도 몹시 무덥고 독하다.
요란스럽게 벨소리가 난지 30분가량 뒤에 아침식사가 들어왔다.
거북살스러우리만치 친절을 다하여 권한다.
입맛도 당기는 바람에 달게 먹었다.
조반이 끝나자 얼마 안 되어 취조실로 불리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취조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감시병의 팔에 매달려 아픈 다리를 옮겼다.
취조실에는 이미 취조 준비가 되어있다.
책상과 의자가 정연히 배치되었으며 나의 앉을자리에는 상한 몸을 위하였음인지
특히 편한 쇼파가 놓여있다.
R중위가 들어왔다.
유화스러운 언색으로 인사를 건네며 정답게 담배를 권한다.
이곳은 도심지대인지 인마(人馬)소리며 자동차 소리가 번잡하게 들려온다.
뒤이어 R소위도 들어오고 서기사관, 입회사관도 각각 자리를 잡았다.
정좌한 다음 먼저 R소위로부터 지금 나의 기력과 정신력이 신문에 대응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다. 나의 「자신 있다」는 대답을 듣자,
「그러면 취조에 성의 있게 순응함이 군에 협력하는 길이니...」
하면서 노련 된 어조로서 나의 순종을 종용하는 것이다.
R소위의 그 말솜씨며 거동이 보통이 아니라는 선입감을 가져온다.
세련된 품위와 능숙한 어태(語態)가 풍부한 경력의 소유자인 듯,
어느 한편 믿음직한 안도감도 드는 동시에 은근히 경계하고 싶은 느낌을 준다.
「본사건 발생 직후 야전포병단(본인의 근무부대)을 방문하여 중요한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태평로 본인의 가택도 수사하였고 교우관계, 선배관계, 동지 관계 등이며
본인의 경력과 교양 등에도 유의하여 오늘 아침까지에 기본조사를 완료 하고
여기에 따르는 세밀한 증거도 입수하였으니 그리 알라」고 전제하면서
「R소위 자신의 직접적인 활동에 의하여 사건본인의 사상과 이념에 대한 충분한
검토 분석이 있었음은 물론, 이로 미루어 현재 본인의 심경과 심지어 번민상태까지
여실히 파악하였으며, 또 이 CIC본부 계장병도 동정적인 호의를 가졌을망정
절대로 증오하는 적의는 가진바 아니니 너그러운 기분으로 대하여 달라」고
나의 심정을 달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특별한 대우와 무마와 위로가 책략적인 제스처이든,
진심에서 나온 호의이든 간에 모두 내게는 구애될 바 아니다.
이런 심경의 전제하에 신문에 대한 진술의 말문을 열었다.
본 사건을 양성한 원인으로부터 풀기 시작하여 부닥치게 된 동기,
뼈저린 단말마적인 진상에 이르기까지에 경분, 침통, 질타,
비애의 노도(怒濤)속에 말하는 자아를 잊어버리고 두 주먹을 휘둘러가며
호후(呼吼)를 계속했다. 실내는 비인 듯, 태고의 적막 속에 나 혼자만이 지껄이는 것 같다.
긴장된 취조관들의 면면에는 내 울부짖음에 반영된 표정만이 물결치고 있을 뿐이다.
흥분에 도취되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두 시간남아 지껄였다.
전신은 땀에 떴다. 눈물에 충혈 된 눈을 감고 쇼파에 네 활개를 던졌다.
기간 2개월여를 두고 초려(焦慮) 고민하던 비밀, 어떤 친연(親緣)이나 어떤 위협이 닥쳐도
터뜨리지 못할 말, 그것을 이렇게 일조일석(一朝一夕)에 토로하고 만 것이다.
백야는 밝았다.
회고컨대 지난 몇 달 동안―. 인간본능 중에 발표욕도 그 하나이어늘,
사소한 세사(世事)에도 자랑삼아 남에게 말하고 싶고 토론하고 싶을진대
이 착종(錯綜)된 경위, 안타까운 모순 어마어마한 내막, 난처하여가던 내 입장....
비밀이 되어서는 안 될 이 비밀, 그렇다고 발표치 못할 이 비밀....
그래서 주야로 나의 기름은 빨리고 뼈는 말랐다.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어떤 악몽에서 깨인 듯, 날아갈 것 같다.
창밖에 전개된 창공이 유난히도 드높아 보인다.
냉수 한 그릇을 시원스럽게 들여 마시고 담배 연기를 폐장(肺腸) 깊이 들여 빨았다.
정신의 질곡 속에서 해방된 순간이다.
클라이막스 한 연극의 칸막이 내린 때처럼 실내의 긴장은 아연 풀리고 문간의 출입이 빈번하다.
윤좌(輪座)한 관계관 칠십 명도 잊었던 듯이 담배를 일제히 피워 물었다. R중위는
위로의 인사인 듯 한 미소를 건넨다.
한 시간 남아 쉬었다. 관계관들이 각각 제자리에 다시 정좌하였다.
각도를 달리 구체적인 신문에 들어갈 참이다.
아무리 대국의 골자를 근본적으로 척결하는 마당이라 할지라도 앞날의 일을 위하여
아직도 시간적인 비밀이 남아있다.
나의 요청에 의하여 타인을 물리치고 주재관인 R중위, R소위, O소위 네 사람만이 대좌하였다.
‘전율할 대음모’의 전모를 갈피갈피 폭로하여 나간다.
실내는 다시금 경악과 흥분의 도가니로 변하였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백척간두에 선 국가의 운명을 일발의 기(機)에서 붙들었고 민족염원인 통일 성업에
적으나마 이바지 된 것이 아니 인가?
자아과장이라도 좋다.
오로지 생사를 초월한 이 의분에서 심혈을 경주하여 그늘진 형로(荊路)를 포복(匍匐)하면서
오늘 이 시간을 불렀든 것이다.
비밀이 되어서는 아니 될 비밀,
이 음모를 분쇄함이 나의 목적이었기 때문이 이 내막을 폭로시킬 시간을 찾기 위하여
이미 죽음을 각오한 일이면서도 범행즉석에서 자살을 아꼈던 것이다.
말을 다 하고 나니 공허한 흉강(胸腔)에는 희열만이 가득할 뿐이다.
나는 이로써 나의 임무를 다한 것이며 생의 가치를 거둔 것이다.
기쁘다. 그러나 또 무엇인지 모르게 슬프다. 나는 이제는 죽어도 좋다.
즉석에서 선생님을 찾으며 죽고 싶다.
「선생님! 백범 선생님! 용서 하옵소서 이같이 오늘을 기다리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선생님의 뒤를 따르지 못했나이다.」
나도 모르게 흐느꼈다.
취조관은 부드러운 태도로 내게 안정을 권하면서 부하로 하여금 식사 흡연의 후대를 명령한다.
그리고 야반(夜半)에 신문(訊問)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한다.
나는 통치 않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오늘의 신문재개를 거절하였다.
취조관도 나의 건강상태를 동정하였음인지 내일로 약속을 고치며「편히 안식하라」
고 위로의 말을 남기고 나갔다. 저녁밥도 맛있게 먹었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아침까지 십여 시간을 꿈도 없이 숙면하였다.
6월 29일(수요일) 청천(晴天)
심신이 매우 상쾌하다.
영어(囹圄)의 신세도 잊어버리고 평화의 보금자리인양 자리에 누운 채,
조그만 들창문 너머로 아침 먼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맛도 근사하거니와 움직이는 담배 연기도 시적이다.
어제로써 번민도 고통도 다 가버렸다.
생의 애착도 사라진 이 내 몸에 무엇이 구애됨이 있으랴.
오래간만에 얼굴도 닦고 손도 씻었다.
헌병사령부 군의관의 치료를 받았다.
머리의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아직도 건들이면 쑤시는 듯 아프다.
사지도 자유스럽지 못하나 마음의 통증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침 일찍이 취조실로 불렀다. 어제와 다름없는 대우로 신문을 받기 시작했다.
취조관은 김학규(金學奎), 홍종만(洪鍾萬) 등을 비롯하여 기타 연루자
여러 명이 구속되었다는 말을 전하여준다.
이것은 취조에 대한 편의를 돕기 위하여 알려두는 것이라고 명분을 밝히는 것이나
그 언사는 매우 위협적이다.
‘연루자?’ 안온하던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내가 범한 살인행위에 대하여 연루자라곤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전연 독자적인 내 범행이 여파가 그들에게까지 누를 입힐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김학규는 한독당 조직부장이요,
홍종만은 그 뒤 공작원이다. 홍종만의 소개로 김학규를 알게 되었고
그 두 사람을 통하여 한독당에 가입케 되었고,
이로 인하여 김구 선생의 총애를 받게까지 된 것만은 사실이나,
내 주관적인 이론과 사고에서 이루어진 김구 선생살해 행위에 대하여
조금도 그들이 관여된 바가 없다. 죄라면 모르지만
나의 살인사건에 연루운운은 천만부당한 일이다. 의외의 일이요,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죄목이 따로 붙는다면 그들이야말로 중죄인일 것이다.
한독당의 활동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
그들의 획득 포섭하는 비밀당원의 집결은 어떤 형태로 자라고 있으며
거기서 양성(釀成)되는 무서운 독소는 장차 어떤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한독당의 그 비밀과 그 음모! 장중양호(墻中養虎)의 몸서리치는 그 실태!
일찍이 그들의 정치생명을 말살하고 그들의 정치관여를 거부하고
기여(其餘)의 활동도 전면적으로 봉쇄했어야 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신 있는 관찰이요, 실사의 염원이었다.
범행당석에서 자살을 단행치 못하고 비겁자의 낙인을 감수한
소이(所以)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김학규 일파의 피검이 한독당 암굴폭발(暗窟爆發)의 서곡이라면
나는 죽기 전에 한을 풀고 가게 된 셈이다.
사적예의로는 미안스러우나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백범이라는
큰 그늘 밑에 중첩하여 흉계를 일삼았기 때문에 선생님의 혜안이 흐려졌고,
급기야는 정견조차 본연의 궤도를 잃었던 것이 아닌가.
내 굳이 변명하고 싶은 때는 아니나 김구 선생 시역행위에 있어서 직접적인
하수범은 안두희라 할지라도 간접적인 방조범은 그들이라는 이론을 부정할 수 있으랴.
오늘 취조관의 태도는 어제와는 판이하다, 고압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산란하여 신문에 응하고 싶은 정성이 없어진 때라 짜증으로 응수했다.
「나는 이제 할 말은 다했소.
그리고 나는 중대한 정치범이며 살인범이요,
살인범 치고도 애국자요, 혁명가요,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이신 국부를 시역한 대 죄인이요,
나는 지금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몸이니 구차스러이 물을 말도 대답할 말도 없소.
당신이나 나나 이 이상 골머리를 앓을 것이 뭐 있소. 필요치 않으니
내게 대한 취조는 이로써 종결을 지읍시다.」
반 애원조로 취조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로써 취조를 단념할 그들은 아니었다.
능숙한 수단으로써 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때로는 억압도 하고 때로는
달래기도 하며 신문의 서두를 풀려고 애썼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아닌
나의 법률상식에까지 호소하는 것이었다.
피하고 피하다 못해 결국에는 하는 수없이 취조에 응하고 말았다.
조서는 삽시간에 오리나 부풀었다.
점심 후에도 꼭 같은 고역이 기다리고 있다.
꼭 같은 조건 밑에 꼭 같은 수확을 쥐고 나서야 데스크를 정리한다.
이 대상으로 담배 한 갑과 신문 한 장을 받았다.
신문! 천금에 비견 못할 큰 선물이다.
일찍이 어떤 희생을 하여서라도 입수하고 싶었던 보물이다.
1면은 보지도 않고 쥐어지는 대로 2면에 눈을 던졌다.
28일부의 것인데 지면 반 남짓이 내 사건으로 메워져 있다.
나라고 실린 사진을 자세히 보니 안경을 쓴 엉뚱한 사람인 데는 웃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신문인들의 망살(忙殺)된 자체로만 미루어서도 세론의 우란상(優亂相)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과대한 욕설이 없음은 저으기 뜻밖의 일이다.
앗! 일면을 뒤집기도 전에 그 제호(題號)조차 미처 보지 못 한 단 한 장의 신문은,
어느새 밀령(密令)을 받고 있는지 무자비한 감시병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반항하여 보았으나 감시병은 자못 기계적인 인간이었다.
영창에 돌아와서도 신문생각을 했다.
그 차가운 감시병의 인상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에 있을 때 그 누구가 옥중에서 간수의 환심을 사노라 애썼다는
이야기를 회상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식사 때의 감시병은 친절했다.
오늘저녁 식사와 담배 맛은 근일에 없던 꿀맛이다.
처음으로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초경(初更)에 어떤 장교 한명이 영창을 지나다가 들여다보면서
돈독한 위로의 말을 건네며 감시병에게 물 준비와 변기의 마련이 충분히 되었는가
검사하라고 명령하는 등 살인수에게는 황송스러운 온정을 베풀고 갔다.
그 온정이 몹시도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어린애 같이 눈물이 났다.
능란한 취조관, 신문 빼앗던 차가운 감시병, 지금 왔던 다정한 장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좀처럼 올 것 같지 않던 잠이 아침 늦게까지 냅다 계속되었다.
하루 평균 서너 시간밖에 이루지 못하던 잠이 입창 후(入倉後)에는 한없이 쏟아진다.
단 며칠 동안에 체중이 늘었을 것만 같다.
6월 30일 (목요일) 청천
일찍 잠이 깼다. 방구석에는 아직 어두움이 물러가지 않았다.
그렇게도 숨막힐 듯이 무덥던 공기가 가물의 전조인지 무척 가벼워졌다.
누운 채 머리맡을 더듬어서 담배를 빼 물었다.
서광을 머금은 연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유난히도 해맑았다.
슬픔에 잠긴 경교장의 넓다란 경내에도 밤이 밝았겠지.
선생이 유명을 달리하신지도 벌써 5일째―
시신은 어느 방에 모셨는지?
빈실(賓室)의 촉대에는 낙루(落淚)에 지친 백 촉이 수십 가락 갈렸으리.
나는 장차 1평방미터도 못되는 저 창폭의 하늘가에 몇 아침 몇 저녁이나
더 보내고 또 맞을 수 있으련가?
어제 얻은 양담배 온 한 갑이 하루도 지나기 전에 반이나 다 탔구나.
망연히 먼 하늘을 바라다보며 담배 두 대를 연달아 피웠으나 정사(情思)의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제 시간에 세 소음은 다시금 시작됐다.
분주하게 걷는 구두소리 수도소리 문 여닫는 소리 감시병이 수건까지 담가가지고
세수 물을 떠왔다.
나는 용기를 내어 팔 굽을 짚어가면서 혼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머리 상처에 오는 충동이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나 처음으로 부축 없이 일어나 앉으니
기분도 상쾌하다. 감시병을 쳐다보며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감시병도 마주 웃는다.
아마 기력이 많이 회복되었구나 하는 듯 한 웃음 같다.
수건을 적셔서 붕대로 얼굴을 닦고 비누를 빌어서 손도 씻었다.
감시병도 며칠 동안 낯이 익었음인지 화석 같은 표정이 풀렸다.
아침 식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말쑥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R중위와 R소위가 찾아와서「편히 잤소.」하고 인사 뒤에 흡족한 태도로,
「오늘은 취조가 없을 것 같으니 마음 놓고 유장(悠長)한 기분으로 정양(靜養)하시지.」
하고 나가버렸다.
―오늘은 취조가 없다? 이상하다
어제 그렇게도 강요하던 신문응답을 갑자기 중지시킨단 말인가?
그러면 왜 중지할까?
하기야 내 범행의 원인이며 직접적인 동기며 현장의 모양이며
지금 나의 심경까지 남김없이 설파하였으니 더 물어볼 말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그것으로서 곧 법의 재단이 내릴 것이요.
뒤이어 형이 집행 될 것이다.
예로부터 죽일 사람은 잘 먹이고 후대한다더니
아마 오늘 저녁이라도 사형집행을 하려는가?
김학규 일당까지 잡혔다니 나의 임무는 완료되고 남은 한도 풀릴 듯 하지,
만 내가 일찍 각 부문의 수사기관 당로자(當路者)로부터 수차에 걸쳐 들은바,
「이것은 중대사건이라고 캐치하여 가지고 파고 들어가면 내종에는 거개(擧皆)가
경교장으로 꼬리를 감추어 버리곤 하는 데는 질색이다」라는 이야기를 회상컨대
백범의 서거로써 그 복마전(伏魔殿)도 무너졌으니
굳이 지나간 일에 속한 사건을 세론 앞에 확대시킬 것이 없으며,
고인의 위신이나 체면을 위하여 내게 대한 것도 이 이상 추궁할 것 없다하여
범인을 처치하여 버리고 이 진상은 적당한 발표로써 호도(糊塗)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내 모습’과 범행이 참된 뜻을 널리 세상에 알리긴커녕
신뢰하는 벗들과 선배는 물론 불쌍한 가족에게까지도 말을 남기지 못하고
역적에 낙인만을 찍힌 채 그대로 사라지게 될 것이 아닌가.
정령 그렇다면 이 일기도 곧 중단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단언하랴.
어제 신문을 빼앗은 뜻도 이제서야 알 것 같고 취조관의 태도 변화도 이제서야 짐작된다.
시각을 예측할 수 없는 이 여명(餘命)이 쓰다가 중단될망정 김학규를 알게 된 시초부터
선생님을 시해할 때까지의 경위를 대략이나마 적어 보기로 하자.
설령 다 썼다 해도 죽은 뒤에 이 종이마저 성냥불의 세례를 받게 될는지 그 또한 누가 알랴.
그러나 이것도 운명으로 치고 하여간 쓰기로 하자.
이 사건의 전모를 광범위하게 해부한다면 작년 남북협상문제에서부터 논거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다시 나아가서는 멀리 8·15해방되는 해 섣달 반탁운동봉화(反託運動烽火) 와중에서 피살된
송진우씨 사건에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며, 백범 선생과 나와의 심적 녹고(綠古)를
더듬는다면 더 한 발자국 멀리 8·15 해방 전후 선생님의 존명을 알게 된 아버지의
귓속 말씀에까지 미치게 될 것이나 이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이야기일 것이니
사건의 핵심을 파고든다면 지난 정월 한국독립당 조직공작원 홍종만의 소개로
동중앙당 조직부장 김학규와 지면(知面)케 된 것이 근인(近因)의 감상일 것이다.
홍종만은 태평로 집(월북동포 이십여 세대가 동거하는 적산(敵産)집 피난민아파트)에 같이
사는 청년으로서 아침저녁 기회 있는 대로 한독당을 선전하여 오다가 정월 하순
김학규와의 인사소개까지 하고나서 부터는 열심히 입당공작을 전개하여 와다.
미소(美蘇) 양 영웅의 각축에 끼인 우리로서 주권통일운동의 정략적인 명분을
세우기 위하여서라도 협상에 응하는 금도(襟度)를 보여주는 것까지는 이미 나 자신으로서도
찬성한 것이지만 세계의 이목을 한 몸에 지니고 나섰던 백범선생은 어찌되었던가,
사전에 맹세하신바 그대로 38선상의 철로는 베고 눕지는 못하실망정 귀경하신 후 겨레 앞에
일장(一場)의 역 해명이라도 계셨어야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협상에서 돌아오신 선생님은 도리어 몽매한 저희들로 하여금 회의의 심연 속으로
잠기게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지금 제일 당으로 자처하는 한독당 팽창일로에 있는
그 당세(黨勢)에는 어떤 암류( 暗流)가 있는지
5·10선거 보이콧 설은 어떤 당략에서 나온 것인지.....
일찍이 신(神)과도 같이 앙모해온 세기의 거성(巨星),
역사적인 위인 백범 선생님을 지척 지간에 대면하옵고 단 한마디 담화라도
교환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 은근한 나의 염원이었거늘 인제 수시로
앙좌 할 유기적인 녹고가 맺어지고 슬하에서 훈도(薰陶)받을 기회를 얻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하여도 마음의 작약(雀躍)을 금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만나서 훈도를 양청하오면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선생님께 대한 항간의 훤전(喧傳)은 모두 낭설이요,
부질없는 기우(杞憂)에 불과할 것이다.
설사 간신배들의 협잡 때문에 간혹 왜곡된 판단을 내리시는 일이 계실지라도
비록 문외한이요
몽동(蒙童)의 말일망정 솔선대담하게 진상하면 못 알아들을 리 없으실 것이다.
한독당만 하더라도 그 자체가 선생님의 직접적인 영도 하에 있으니
그 이데아에 무슨 불순함이 있으랴.
우리들의 천박한 상식을 가지고 경솔히 피상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 바는 못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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