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안두희(安斗熙)의 거짓 수기(手記) (1)
사람이 죽어서 남기는 것은 이름이라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는 말이 이에 연유한다.
’생전부귀(生前富貴), 사후문장(死後文章),' 이란 말도 있다.
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어서 아름다운 문장을 남겨놓는다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한가.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생전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던 사람이 무슨 수로 시대에 회자(膾炙)되는 글을 남길 것인가.
그래서 잘못 세상을 살았으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움켜쥔 졸부들이나 불량 기업인 같은
사람들은 자서전(自敍傳)을 통해서 자신의 그릇된 인생을 미화시키려 한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생전 한 푼도 기탁한 적이 없는데도,
자서전에는 거금(巨金)을 희사한 어려운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는 사실을 후세에 남기려,
자서전을 전문으로 하는 글쟁이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 쓰게 한다.
이런 류의 자서전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탐탁치 못한 과거의 행적을 미화시키고 마치 큰 성인(聖人)이나 된 듯이 허위사실을
종이위에 기록해 후세에 전한들 그것을 믿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살아서 비행을 일삼고, 이웃을 괴롭혀 얻은 재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어서 자서전 형태로 남긴 글들,
그것들이 성행하는 사회는 이미 병들어 있는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진실한 기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가 있지만 정작 그 개인에게는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게 한다.
그래서 성인(聖人)이나 한 시대를 풍미한 위인의 자서전은 값이 나가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살아서도 철저히 위선의 삶을 살고 죽어서도 위선의 기록을 남긴 자가 있다.
바로 김구 시해범 안두희가 쓴 자서전「시역(弑逆)의 고민(苦悶)」이 그것이다.
안두희는 출감해서 5년 뒤 자신이 김구를 시해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한편의 그로 남겼다.
마치 자신이 우국지사나 된 듯 한 그 글들은 차마 읽어보기조차 구역질이 나지만 이런 인간도
이 세상에서 살다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문구의 수정 없이 게재하기로 한다.
이 안두희의 수기는 서문(序文)을 제외하고 대부분 민족반역자들이 그들의 범죄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제작됐다는 것을 밝혀둔다.
삼가 이북에 계신 아버님께 올립니다. 부친님을 마지막으로 뵈 온 지도 어언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만 변하였겠습니까.
지금 앉아 계시기나 하온지요. 아버님의 생존 여부조차 몰고 이 붓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생이었습니다.
불초자 두희 30평생을 살았으면서 그래도 따뜻한 효양(孝養)의 즐거움을 드릴 날이 있으리라고
믿어오다가, 오늘날 이 글월이 불효의 총결산 보고서가 될 줄이야 어찌 예측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님 5년 전 6월 26일 그날 두희가 꿈 아닌 생시의 두희가 제 총을 가지고 제 손으로
분명히 김구 선생님을 쏘았습니다.
아버님께서도 평소 숭배하시던 백범 선생님을 아버님의 자식인 두희가 제 정신으로
살해하였습니다.
이 시역의 굉보(轟報)! 마치 청천의 벽력같이 들렸사오리니,
두희 낳으신 한탄 얼마나 하였겠습니까. 땅을 치며 통곡하시며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셨겠지요.
이 글월이 활자화되기 전에 친필신서(親筆信書)로 아버님 앞에 놓여졌던들 읽으시기나
하셨겠습니까?
중략(中略)―
위의 글은 수기의 서문(序文)이다. 여기에는 안두희의 간교한 이중성이 극명하게 나타나있다.
안두희는 이 글속에서 자신이 마치 천하에 둘도 없는 효자처럼 묘사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숭배하는 김구를 쏘아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대목에서는 은근히
자신의 효자 됨을 밝혀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전혀 사심(私心)이 없고, 따라서 단독범이고, 배후는 절대 없으며,
자신의 행위는 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럼이 없다고 파렴치하게 적어놓고 있다.
다음을 다시 읽어보자.
종신형의 언도를 받은 썩은 몸이라서 6·25사변이 발발되어 후회의 길을 떠나게 되자,
옥문을 나서는 즉시 총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무엇이 못마땅했는지 국회석상에서 이것이 논란이 되어
여러 가지로 항간에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에 부득이 공상(公傷)으로 입원 중에
군적(軍籍)으로부터 물러났던 것입니다.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 이듬해 6·25가 발발되자 석방되어, 두 계급 진급해서
대위로 종군했다.
그것을 그는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해 총을 잡았노라고 자랑했지만, 법이 있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과연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일반죄수로 형기를 마치지 않으면 모든 일에 종사할 수 없거늘,
국사범이며 파렴치범인 안두희에게 다시 계급장을 붙여주고 총을 잡게 해준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이야말로 반공이데올로기를 무기삼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안두희는 자신의 행위가 영웅적이었다는 것을 수기의 여기저기에 적어놓아서
읽는 이로 하여금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안두희는 김구의 시해 뒷날인 6월 27일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어놓았다.
물론 이 일기는 안두희가 쓴 것이 아니라 민족 반역자들이 모여서 작성한 것이었으니,
그 들이 이런 날조된 일기를 썼는가 하는 것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
6월 27일(월요일) 청천(晴天)
명멸하는 의식의 갈피를 애써 더듬었으나 꿈인지 생시인지 좀처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전신은 천근 무게에 억눌리운 것 같고 뜨이지 않는 안두(眼頭)에는 몽롱한 안개 빛만이
어물거릴 뿐이다.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어 가면서 몸을 한번 움직여보았다. 아야! 머릿속에서 번개 같은
불꽃이 튀면서 격렬한 통세(痛勢)가 왼 몸뚱이를 쑤신다.
의식을 달랬다.
분명히 상한 몸이요, 잃었든 정신이다.
간신히 뜬눈에는 높다란 천장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들이나 길가가 아니요 방안인 것만은 확실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내 집도 아니고 부대 병사도 아니고 그러면 병원일까?
병원이면 간호원도 있을 텐데 왜 아무도 없을까? 처는 어디 갔을까?
술 취한 것처럼 휘이휘이 휘두르는 머리를 안정시키려고 눈을 감았다.
점차 회복되는 의식 속에 홀연히 클로즈업되는 경교장! 분노하신 김구 선생의 얼굴!
「나는 선생님을 쏘았다! 선생님을 죽였다!」
으악! 무언의 고함을 지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 여기가 감옥이로구나.」
반사적으로 들었던 머리를 도로 떨어뜨렸다.
「그러면 존경하는 선생님을, 그렇게 총애(寵愛)받든 이 두희가....」
꿈 아닌 현실을 인식하고 나니,
눈시울과 입술이 경련을 일으켜 떨리며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울음을 금할 수가 없다.
얼마나 울었는지 기력도 다하였다.
조용히 설움이 지친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추억을 더듬었다.
시간이 얼마나 경과되었는지, 날이 바뀌었다면 그것은 어제 일이다.
일요일, 제 기분으로 비서의 안내를 받았다.
태산 같이 장중한 풍모를 지니신 분이면서도 언제나 춘풍의 화기로써 맞아주시던
선생님이었지만 의외에도 쌀쌀하시었다.
여기에서 은연히 축적되었던 잠재의식이 발작되어, 인사가 끝나자마자
김약수 화제로 발단된 문답이 급각도로 선생님에게 대한 격렬한 추궁조로 변해지고
지금까지의 회의감이 노골화하여 사랑받던 제자로서 또 나 어린 자식으로서의
울부짖는 공격전이 전개되었다.
선생님께서 호남지방 유세시의 이야기, 표 소령 강 소령 월북한 이야기,
국회 소장파 이야기 등 마구 주절댔다.
선생님이 철화같은 언색! 사자 같은 노후(怒吼)! 외람된 나의 공박에 대하여
드디어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붓을 던지고 벼루를 던지고 책을 던지심에까지 이르렀다.
일은 이미 갈대로 갔다. 그래도 월여(月餘)를 두고 설마설마 하던 괴로운 은인의
철대(鐵帶)는 끊겼으니
오호! 나의 소에 뽑힌 권총은 드디어 역사적인 시역(弑逆)의 불을 뿜고야 말았구나.
선혈에 물들어 쓰러지시는 선생님을 정시할 수 없어 옆 마루방으로 튀어 나왔다.
공허의 순간이며 무아의 경지이다.
서쪽 창문에 막아서서 망연히 머언 하늘 뭉게구름을 바라보았다.
십초 또 이십초. 하늘도 말이 없고 땅도 소리가 없다.
아직도 손에 쥐어진 권총에서는 화약연기가 나고 있다.
나는 천천히 포병 ‘뺏지’와 소위계급장을 떼 던지고 다시금 권총을 든 채
한 걸음 한 걸음 층층대로 발을 내려 디디며「지금 자살할까?」하고 자문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발작적인 고민의 넋두리가 아니었다.
「아니다. 자살- 그것만이 시역(弑逆)에 대한 속죄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다.」
간명한 자답이 뒤를 받쳤다.
아래층 응접실에서는 잡담에 취하여 세상을 몰고 있던 모양이다.
멀리 정문(大門)에서 파수(把手)보던 순경이 ‘칼빙총’을 내저으며
「지금 이층에선 무슨 총소리야!」하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나는 종용(從容)히 두 손을 들면서 「지금 내가 선생님을 쏘았소.」하고 나섰다.
「아니 뭐?! 이놈 죽여라...」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먹, 교자가 날아든다.
대번에 정신이 흐려지며 드디어 매의 감촉도 아득아득 사라졌다.....
나의 의식은 거기서 중단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내가 여기를 어떻게 왔을까.
아마 경교장 응접실에서 혼도(混倒)된 채 이곳으로 운반되어 왔나보다.
마주 보이는 높은 들창에 눈부신 햇살이 비치고 창밖에 참새 소리가 들리고
어렴풋이 군대의 인원점호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때는 아침인 듯싶다.
그리고 이 방 문간에 수직(守直)하고 섰는 사람이 헌병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헌병사령부의 영창임에 들림 없다.
요란스러운 문소리와 함께 아침 밥그릇을 든 헌병이 들어왔다.
무어라고 지껄이는데 귀가 멍해서 잘 들리지는 않으나 아마 밥을 먹으라는 말인 모양이다.
밥 냄새 국 냄새가 유난히 후각을 날카롭게 한다.
그러나 밥과 국 냄새 이외에 일찍이 맡아보지 못한 또 한 가지 냄새가 안타까이 내 숨을 가쁘게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물 냄새다. 몹시 몰이 먹고 싶다.
헌병의 부축을 받아 물 한 그릇을 미칠 듯이 마시고 나서 밥상을 그대로 물리었다.
참말로 생후 처음으로 물맛을 알았다.
시인들이 그리는 사막의 ‘오아시스’맛이란 이런 것일 게다.
생명수인양 정신이 든다.
의식이 정상상태로 회복될수록 전신의 통증은 더욱 더하여 사지가 무겁고
가슴이 결리고 머리가 쑤신다.
그러나 죽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라고 자인했다.
다만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생명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통증도 모르고
안온스럽기 짝이 없는 허심의 세계다.
늦은 아침 햇살이 금전(金箭)같이 뻗친 옥창 너머로 하늘 높이 무상운(無常雲)의
기멸상(起滅像)이 보인다. 다시는 마음대로 바라보지 못할 태양이요,
다시는 마음대로 써보지 못할 하늘이요,
다시는 마음대로 짚어보지 못할 대지라고 생각하면...
마음대로 이 대지를 디디고 마음대로 저 하늘을 쓰고 마음대로 저 햇빛을 바라보며
살아온 날의 추억이 저절로 뇌리에 감돎을 억제할 수 없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겁(怯)이냐? 아니다. 생에 대한 미련이냐?
아니다. 그렇게 조경하던 선생님에게 총을 겨눈 내게 무슨 겁이 있을 것이며
즉석에서 선생님의 뒤를 따라야 되었을 이 목숨에 무슨 미련이 남았으랴.
다만 이 국가를 위하여 겨레에게 전할 유언과 비밀이 되어서는 아니 될 무서운 사실을
폭로시킬 때까지에 지닐 생명, 그 공백 기간의 허겁한 영강(靈腔)을 메우려는
인간 본능적인 낭만 그것일 것이다.
평탄치 못한 연애교제로써 인연(因緣)맺은 나의 처,
무서운 형극을 헤치고 결혼한 지 11여 년간 단 10개월을 계속하여
부부생활을 해보지 못하고 수천 리를 원격하여 살아오다가,
겨우 최근 동서(同棲) 2년에 비로소 가정다운 행복의 잎이 필 무렵
청천벽력인 나의 범죄 사실을 듣게 된 그 심정, 어찌 다 형언할 수 있으랴,
미안한 일이다.
몸조차 연약한 까닭에 이제 아비 없는 삼남매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할 말이 없다.
장남 국영아(國榮兒), 지금 열두 살, 아버지와 같이 포 열 달을 살아보지 못했고
아버지의 웃는 낯조차 기억치 못할 국영아. 장녀 경숙(瓊淑)아 너는 지금
아버지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너를 38이북 외조모 슬하에 남겨 둔 채 다시 보지 못하고 나는 이런 죄인이 되고 말았구나.
생후 2개월의 핏덩이로 38선을 넘은 차녀 미라(美羅)야,
아버지 없는 앞날을 어이 살아 가려느나....
참으로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어찌할 수 없다.
하염없는 이 명상을 깨트리기 위하여 아픈 팔을 꾸부려 무거운 주먹으로
간신히 눈물을 닦으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애족정신의 화신으로서 만민추앙의 국부이시며 수많은 청년 중에서도 택하여서
특별하신 총애를 베풀어주시던 나의 선생님을 시역한 대 죄인에게 어찌 가족의 세계가
잔존할 것이며 대의에 순(殉)한다는 결의에 섰음이어늘 무슨 후고의 눈물이 있을 소냐,
나 이제 가족을 생각함은 선생님의 영령(英靈)을 모독함이요,
눈물을 거두지 못함은 사심을 버리지 못함에 틀림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범렬(凡劣)하고 생동이 비겁하여질 바에야 차라리 이 사고의 주체인
내 자신을 없애 버림이 낫지 않을까?
「선생님은 정말 가셨을까.」그 생사가 매우 궁금하다.
「선생님이야 가셨건 아니 가셨던 떠나버릴 두희오니....」
어떤 신화에 나오는 무지개도 환상하여 보며 장차 벌어질 나의 사형장도 그려보았다.
그러한 착상은 어떤 공포에 깃들인 것은 아니나 일말의 감상은 어느덧 이북에 계신
아버지의 무릎 앞에 엎드려진다.
「아버지! 불효자식 두희는 끝끝내 불효로 이 세상을 마칩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도 경모(敬慕)하시는 백범선생을 제가 살해하였습니다.
이런 자식을 낳으신 생각만 하셔도 얼마나 절치통분(切齒痛憤)하시겠습니까.」
주위를 잊어버리고 흐느껴 울었다. 가정생각을 지워버리는 것이 선생님께 대한
속죄의 길이라고 믿고 숙연히 옷깃을 바로 잡곤 하였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눈을 돌렸다. 눈이 아프다.
아까 밥을 가지고 왔던 헌병이다.
「왜 밥을 먹지 않았느냐」고 위문비슷한 말을 던지며 식기를 거두어 가지고 사라졌다.
잠시 동안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의무사병을 데리고 의무장교가 들어왔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으려고 애를 썼다. 군의관은 누워있으라고 하면서 단념(丹念)히
붕대를 풀고 처치를 시작했다.
나는 상처의 처치보다도 내 사건에 대한 세론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3.4개소의 상처처치에 삼십 여분이나 걸리는 동안 단편적인 말을 주고받다가
내 사건에 대한 뉴스를 불었다.
그러나 군의관은 사건에 대한 물음에는 입을 꽉 다물고 동문서답 격으로
슬쩍 상처에 대한 것과 통증에 관한 것 위생에 관한 것을 말로 넘겨 버린다.
처치가 다 끝난 다음에도 얼마동안 대화가 계속되었으나 종시일관 사건에 관한 것은
일언반구도 언급치 않았었다.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군의관 자신도 내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 하는
흥미를 느끼는 것 같으면서도 그리 쉽사리 말머리가 풀릴 것 같지 않다.
이렇듯이 연마된 군규(軍規)를 나는 내심으로 찬양하면서도 참다못하여 끝으로
김구 선생의 생사여부를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하여 군의관은 몹시도 무감동한 표정이다.
「당신도 궁금하시오? 어제 그 현장에서 생사를 확인 못하였던가요?
선생은 그 즉석에서 돌아가셨소. 지금 세상은 물 끓듯 하고 있소.」
예측한 일이었지만 이 말에 놀란 표정을 감출수가 없었다.
군의관은 머리를 좌우로 설레설레 저으며 눈으로 의무병을 재촉하여가지고 나가버렸다.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간신히 호주머니를 뒤적여 보았으나 없다.
바지 뒷 호주머니에 들었던 용돈도 없다.
벼르고 별러서 받은 처의 선물(만년필)도 없다. 손목에서 시계도 찼던 자리뿐이다.
왼팔에 시퍼런 멍이 커다랗게 들었다.
군복에는 검붉은 피와 까만 묵(墨)이 이곳저곳 묻었다.
선생님은 분명히 가셨다지,
선생님을 친근히 대하여 온 지 삼개월여, 인자하오 시면서도 감히 범접키 어려워 보이던
엄격하신 모습, 추억 키우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마지막 가실 때
그 모습이 눈앞에 더 뚜렷하게 되풀이된다.
그 표정, 그 손짓, 그 노후(怒吼), 그 신음....
또 한 갈피의 새로운 체념에서 오는 피곤은 저으기 호흡을 곤란케 하는 것 같다.
장흥사령관이 헌병 수명을 거느리고 순찰차 지나갔다.
보초병, 감시병들의 교체하는 인사(人事) 말소리, 벽에 못 박는 소리,
오늘의 활발한 군무가 시작된 모양이다.
이 소음 들으면서 어느덧 잠이 들었다가 문소리에 잠이 깨었다.
헌병 두 명이 잠옷과 이부자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헌병의 부축을 받아가며 옷을 갈아입고 자리위에 누웠다.
벗은 군복을 보니 온통 피투성이다. 이 군복의 모양으로 미루어
내가 얼마만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헌병들이 용무를 마치고 나가면서 주고 간 담배를 피웠다.
담배 맛은 여전히 좋다.
얼마 후에 전봉덕 부사령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울헌병대 문 중령과 같이
장교 2~3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전부사령관은 담당취조관이라고 하면서 H중위를 내게 소개하고 난 뒤에
군의관에게 취조의 가능성여부를 묻더니
취조불능이라는 군의관이 대답에, H중위더러
나의 본적, 주소, 소속, 계급, 군번, 성명, 생년월일만을 물을 것을 명령하고
심각한 표정 그대로 나가버린다.
H중위만이 남아서 약 삼십 분간의 신문(訊問)을 하였다.
적멸(寂滅)과 공허감에 싸여서 다시 잠이 들었다.
가져온 점심밥을 몇 술 떠먹고 나서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 속에 공상의 실마리를 더듬었으나 또다시 피곤이 기습한다.
이제는 사색에도 지쳤다.
헌병에게 물어둔 시간으로 보아 오후 두시경일 것이다.
요란스러운 발자국이 소리와 함께 사복 신사 3,4명이 들어왔다.
그 중에서 사관학교 1기 선배인 R장교를 알아볼 수가 있었고
그 외도 그들의 태도로 보아 모두가 사복장교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따라 들어왔던 헌병장교들은 H중위만 남고 다 나가버렸다.
나는 자리에 누운 채로 H중위로부터 인사소개를 받았다.
R대위, R중위, R소위, O소위 모두 CIC장교들이다.
H중위의 말에 의하여 본 사건을 맡은 CIC로 이관되는 것을 알았다.
4명장교중 R대위와 R소위가 취조담당관이라는 소개도 받았다.
그들은 오늘은 약식으로 응급 예비취조를 마치고 돌아갔다.
꿈뻑꿈벅 옅은 잠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저녁밥도 반쯤 남아 먹었다.
수면을 취하는 탓인지 점점 흥분도 가라앉는 것 같다.
헌병에게 물심부름도 시키며 용변도 치렀다.
아까 R중위에게서 얻은 다섯 대 담배를 아낄 양으로 저녁 식사 후에야 첫 대를 피웠다.
그것도 반만 피우고 반은 남겨놓았다.
모색(暮色)이 짙어진 뒤에 들것이 들어왔다.
들것에서 다시금 사람의 등에 엎여서 자동차를 탔다.
자동차는 밤거리를 힘차게 달렸다.
CIC본부의 독방영창이다. ‘매트리스’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다.
압송한 R중위는 감시병 두 명에게 엄격한 지시를 내리고 돌아갔다.
감시병은 물그릇과 변기를 미리 마련해 들여다 놓고 집총(執銃)한 채 영창 안에 자리를 잡는다.
「이곳이 도대체 어떤 범인일까?」하는 의아스러운 눈초린 양 싶다.
희미한 전등 밑에 적요(寂寥)의 밤은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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