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60. 반역자들의 합숙소

오늘의 쉼터 2013. 3. 31. 09:46

60. 반역자들의 합숙소

 

 

  이 시간에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장은산의 입원실에는 민족반역자, 장은산, 김지웅, 안두희 등이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얼굴로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경교장에 행동대원을 투입하려던 명목은 당시 국회 프락치 사건의 김약수를 체포하라는

구실이었는데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웠던 김약수가 종로 3가에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이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김구를 시해 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래서 장시간 의논 끝에 안전도가 가장 높은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만약 단체행동, 즉 행동대원들을 투입시켜 시해한다면 군중심리 때문에 실패할 우려가 많았고,

모든 눈이 있어서 비밀이 새어나갈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 행동대의 반장인 오병순이었다.

오병순은 통솔력도 좋았고 기운도 장사였다.

거사당시 권총이 불발되어도 힘으로 능히 김구를 시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병순은 경교장을 한 번도 출입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설사 정문을 통과하더라도 측근자들이 김구가 있는 곳까지 못 가게 막으면

실패한다는 이유를 들어 실격되었다.


  그 다음 인물은 홍종만이었다.

홍종만은 경교장 출입을 가장 많이 한 자였다.

또 한독당에 위장 입당한 자였다.

그러나 이 자는 이북에서 남파된 간첩으로 소문남 자였다.

변절한 자이기 때문에 또 어떻게 변절할는지 안심되지 않았다.

한 번 변절한 자는 두 번, 세 번은 변절한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그래서 지목한 것이 안두희였다. 안두희는 두 번이나 경교장을 출입했다.

그리고 김구와 안면이 있을 뿐 아니라 김구를 만날 때마다 예의를 다했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고 나라를 걱정하는 체,

가증스러운 제스처까지 써서 김구의 마음을 잡았다.

또한 한독당의 비밀 당원증까지 소지하고 있었다.

안두희는 한독당의 간부들과도 안면이 있었고,

나이가 소위란 계급에 비해 어느 정도 들어서 믿음직했다.

그래서 안두희가 최종적으로 선발되었다.

  이 날 밤 다른 행동대원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모두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잠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6월 26일, 아침 7시경 김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상시와 같이 경교장 뜰을 한 바퀴 돌아보고 화초에 물을 주었다.

비서들로부터 아들 김신이 떠나면서 아버지가 잠을 자기 때문에 인사도 못하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상오 10시, 선우비서가 와서 김구에게 남대문 교회에 함께 가서 예배를 보자고 했다.

김구는 비서들을 따라서 뜰로 내려왔다. 그러나 차가 수리 때문에 공장에 가고 있자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김구는 지난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꿈자리가 몹시 어수선했고, 또 밤늦게 박동엽, 김정진 등이 찾아와 불길한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한편 김지웅과 안두희는 밤을 함께 새우며 모든 준비를 완료했다.

안두희는 태평로의 집에 들러 부인에게 생활비를 건넸다.

안두희의 부인은 그때 임신 중이었다. 안두희는 아내의 전송을 받으면서 허 하사가 운전하는

지프차에 올라타고 계동의 김지웅의 집으로 갔다.

김지웅과 같이 아침을 먹고 서대문 경교장을 향해 떠날 때의 시간은 아침 10시경이었다.

「각오가 돼있겠지?」

  김지웅이 다짐했다.

「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거사가 성공하면 너는 영웅이 되는 거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너의 임무는 막중하다.」

  김지웅은 안두희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안두희는 마치 영웅이 된 듯이 황홀한 꿈에 부풀었다.

  안두희와 김지웅이 경교장 근처에 도착한 시각은 바로 이때쯤이었다.

안두희와 김지웅은 자연장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교장 입구가 한눈 들여다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담배를 피워 문 안두희의 손이 조금 떨렸다.

김지웅이 이런 안두희에게 다시 안심을 시켰다.

「저길 봐라. 너를 지켜주기 위해 군인들이 소집됐다.

너는 그 일(시해)만 하면 끝나는 거야.

그 다음부터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조금도 염려하지 마. 너는 군인이잖아.」


  김지웅은 이렇게 말하며 일단의 군인들이 서성거리는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안두희도 잘 아는 Y대위를 비롯해 헌병특별수사대요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강홍모 대위도 보였다.

「안 소위 염려할 것 없어.」

「저 사람들은 누굽니까?」

「안 소위를 도와 줄 사람들이야.」

  이 말에 다시 안심된 안두희는 김지웅의 지시대로 경교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낮 12시 36분,

  안두희는 끝내 대역(大逆)의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때의 이야기를 당시 경교장 김구의 비서로 있던 김우전씨(76)가

「김 구선생의 삶을 따라서」라는 자서전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당시 김우전 비서는 일요일이라서 다소 늦게 경교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김 씨는 김구가 주도하던 중경임시정부시절,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했던 사람이다.

그 후 그는 김구를 곁에서 보필하며 김구가 서거할 때까지 모든 일을 보살펴왔다.

 김 씨가 자서전에 기록한 김구 선생 시해 직후의 상황을 소개한다.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마침 맏딸 인숙이가 마마를 시작하여 10개월밖에 안된 어린애의

마마를 잘 치르려면 경험이 있는 어머니를 모셔와야겠다고 생각되어 돈암동에서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다 놓고 경교장으로 향했다.

항상 다니는 길을 걷다 마침 일요일이라 경교장엔 별 일이 없을 것 같아 자주 들르던

다동 김영기 사장 댁에 들렀다.

무슨 날인지 아는 분들이 많이 모여 빈대떡 파티가 벌어져 있었다.

김 사장 부인 문 여사의 친절한 권고에 따라 나도 파티에 동참하게 되었다.

잔치가 거의 끝날 무렵인 1시반경에 나도 잘 아는 분이 갑자기 밖에서 뛰어 들어와 하는 말이,


「경교장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데 모르십니까?」

하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예감이 심상치 않아 즉각 경교장에 전화를 걸었다.

「난데, 무슨 일이 있소?」

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통곡소리가 먼저 들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선생님이 돌아가셨어요.」

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전화통을 던지고 황급히 경교장으로 달려갔다.

경교장 대문 앞에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벌써 수위 대신 헌병들이 경비를 담당하면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제지당하였다가 뒤로 밀려났던 수위경찰이 비서라고 확인을 해준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뛰다시피 2층의 거실로 올라가 보니 선생은 이미 시신이 되어 누워 있었고,

의사가 선생의 안면 총상에 사후처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서서 선생의 눈감은 얼굴을 바라본 후에 통곡이 터져 나오고

온몸이 떨리는 통분에 휩싸였다.

「아니, 이럴 수가.......」

  김구 선생을 시해한 범인이 국군장교였다는 것을 듣고 나서 나는 더욱 놀랍고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현장을 경비하는 헌병 장교들 중에 나의 죽마고우(竹馬故友) 박명엽 형이 있어 나를 위로해

주느라고 진력하였으나 나는 경황이 없어 그의 말이 귀에 들어 올 리 없고 당황하고 허둥대어

생각에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세 시간 가량 지난 후 경교장 상공에 저공으로 비행하는 전투기 폭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나가보니 기체를 좌우로 흔들며 신호를 보내어 신(信)이 돌아온 것을 짐작하였다.

신은 이날 아침 옹진 38선에 출동하였다가 비보를 듣고 서울로 급히 돌아와,

착륙하기 전에 경교장 상공에서 경교장 주변에 전과달리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의 서거를 확인한 것이다.

  얼마 후에 공군 소령인 신이 군복차림으로 경교장에 뛰어 들어와 곧바로 2층 아버님의

거실로 올라가 오열을 터뜨려 우리들은 또 한 번 통곡을 하였다.

김구 선생께서 시해를 당할 때 내가 경교장에 없었던 사실이 후회스러웠고,

경교장이 보안체제가 너무도 미비하고 엉망이었던 것을 경교장의 한 식구로서 책임감을

두고두고 통감하게 되었다.

  선생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정보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선생께서는 태연자약하셨고,

모시는 측근들도 설마하고 경계를 허술하게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제도적으로도 허점이 많아 경교장 출입을 아무런 제제 없이 누구나 아무 때나 할 수가 있었다.

특히 선생은 지위의 고하나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동포면 누구에게나 문을 개방하고

허심탄회하게 면담을 하였다.

  경교장의 경찰 경비체제도 소홀하여 선생이 출타할 때 시내 외를 막론하고 호위경찰이

수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행비서도 호위용 무기하나 휴대하지 못했다.

그때는 요즘 흔히 쓰이는 가스총도 없었고, 단도 하나도 갖지 못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경교장의 김구 주석경호태세는 형편없는 전공 상태였음을 지금도 비서의 한 사람으로

자성과 자책을 금할 수가 없다.


  당시 김구 선생 서거의 원인과 실상을 간추려 여기에 적어본다.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 연합 통일정책의 상징인 ‘건국강령(建國綱領)’과 해방 직후

9월 3일 공포한 ‘임시정부의 14개항 당면정책(當面政策)’을 배격하였다.

또한 27년간 항일 독립투쟁을 하며 한미 항일공동작전가지 전개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 대하여 맹군의 의리를 배반하고 모든 독립 운동가는 개인자격으로,

광복군은 무장을 해제한 채 조국에 발을 들여놓게 하였다.

  주한 미군정은 민족주의적인 애국 독립 운동가를 배격하고, 임시정부가 처단키로 천명한

친일 민족반역자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독립 운동가를 박해하고 조국 광복을 저해했던

일제의 고등경찰과 헌병출신자들을 중용했다.

  미군정 3년 동안 그들의 세력은 한없이 신장되어,

급기야는 임시정부와 그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말살제거하려는 음모까지 꾸며,

미군정 경찰이 1947년 12월 2일 장덕수 살해사건에 조소앙 서생과 엄항섭 선생을 문초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김구 선생을 미군정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시켰을 뿐만 아니라,

피의자처럼 대우를 해서 이 분들을 국외로 추방할 계획까지 꾸몄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국회에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과 ‘임시정부의  14항에

당면정책’에 명시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노에 대하여는 공개적으로 엄중하게

처분할 것’에 준거하여 1948년 8월에 반민족 행위자 처벌법을 제정하였으며, 반민족 행위가

처벌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국가와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 경찰 일당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권력과 결탁하여 1949년 6월 6일 위헌적 무력 난동으로 이를 해체하고,

닷새 후인 11일 이승만 대통령은 오히려 이들을 고무하고 국회를 협박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로부터 열흘 후인 22일에는 김구 선생을 따르는 소장파 의원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소위 ‘공산당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하여 국회 김약수 부의장을 비롯하여

소장파 반민특위 위원을 7명 체포 구금하였다.

  그로부터 4일후인 6월 26일, 이 악당들은 이승만 정권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면밀한

모의 끝에 군부 내 친일 집단의 명령계통을 통해서 흉악무도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를

시켜 김구 선생을 시해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역으로 추정해 보면,

  첫째, 민족주의자 김구 선생은 해방직후부터 미군정에 반기를 들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거족적으로 전개하여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결정적인 단선 단정 수립을 강력히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강행하였으므로 미 당국자들 눈에는 손톱 밑의 가시 같고,

뱃속의 암과 같이 보였을 것이다.

  둘째, 친일 민족 반역자들 눈에도 김구 주석과 한독당은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로 비쳤고, 어떤 방법이든 간에 제거해야만 자기들이 살아서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셋째, 이승만 정권은 김구 선생 지지자가 국회의석을 다수 차지하고 또한 원외에서 많은

민족주의 애국 세력이 통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김구란 존재는

항상 위협적일 뿐만 아니라 정권보존의 방해자이므로 하루속히 없애 버리려는 발상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면밀하게 계획된 음모에 걸려든 김학규 장군도 그들의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 백범 선생이 시해된 다음날 살인범 안두희의 진술에 따라 서대문 경찰서에

체포 구금되었으니,

이로부터 한국독립당이 말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구 선생의 장례식을 10일장인 국민장으로 치르는 동안, 나는 꼬박 열흘간을

상복을 입은 채 빈소를 지키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깊이 잠기게 되었다.

「앞으로 다가올 박해가 더욱 극심해질 것이 아닌가?」

「선생이 유지를 받들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나?」

「당장 뛰어나가 원수를 복수해야겠다.」

「당장 죽어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산다면 어떻게 유지를 받들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치면서 열흘 내내 번민 속에 파묻혀 지냈다.

내가 비겁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면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방법이 있고, 내 신분을 감추고

숨어서 살거나, 숨을 수도 없어서 이 세상에 산다면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하였고, 이것으로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소극적인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하고, 선생에게 욕되는 일은 하지 말자.

이것이 선생님의 유지를 받드는 최선의 길이다.」

라고 굳게 각오를 다지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편 김구를 시해한 안두희는 김병삼 대위에게 체포돼 필동의 헌병사령부로 끌려갔다.

이날 헌병 사령관 장흥 대령은 서울에 있지 않았다.

장 대령은 한독당 계열의 사람으로 김구와 같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었다.

장흥 대령은 이 날 개성에 있는 조상의 무덤에 참배하러 갔다.

헌병 사령부에는 전 봉덕 부사령관이 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