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58. 밀실의 음모 (1)

오늘의 쉼터 2013. 3. 31. 09:15

58. 밀실의 음모 (1)


 


  1949년 봄의 어느 날

  서울 종로구 팔판동 8번지의 어느 대관집의 응접실에는 당시 하늘에 날고는 새도 한마디에 떨어뜨린다는 실력자들이 모였다. 당시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실력자들 모임은 3개가 있었다. 그런데 이날 밤의 모임자리는 이 정권의 가장 중요한 실력자들의 모임이었다. 이 친목단체의 이름이 8·8구락부였다. 팔판동의 8번지에서 조직했다는 의미였다.

  이 모임에서는 그때그때의 국내 중요 정치문제가 토의 대상이 되었다. 구정권에서 있었던 「관계기관회의」같은 성격이었다고나 할까. 국무회의에서 결정하기에 앞서 이 모임에서 사전 중요문제를 상의했다.

  이 모임의 중요 멤버는 국방부 장관 신성모를 비롯해 정계의 거물들이거나 헌병총사령관, 방첩대 대장 등의 정회원과, 중요 직책에 있던 기관장들이었다. 이날 밤의 회의는 꽤 중요한 모이이었다. 선장 출신의 신성모 국방장관과 원용덕(元容德) 헌병총사령관 그리고 김창룡(金昌龍) 소령, 포병사령관 장은산(張銀山)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김지웅이 끼었다. 한 결 같이 친일파, 아니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이들은 과거에 민족반역 행위를 했었는데 이승만에게 아첨해서 애국자로 둔갑한 자들이었다.

 


  이때 한 가지 문건이 올랐다. 그것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김창룡 소령의 보고였다. 김창룡 역시 일본군 헌병 출신으로서, 만주에서 독립군들에게 갖은 악독한 짓을 자행한 자였다. 그가 반공(反共) 이란 허울을 쓰고 애국자로 둔갑한 것이다.

「김구가 공산당과 내통한다는 것이 정보로 입수됐습니다.」

「그렇소? 놀랐는데. 그럼 우리 우익진영이 가만있을 수가 없지 않소. 근거라도 있소?」

  민족반역자 한 명이 깜짝 놀란 듯이 말을 꺼냈다.

「이북에서 넘어오는 상인들을 체포해서 문초해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들은 대부분 금·은· 인삼 등을 갖고 왔는데, 그것을 판 자금을 한독당에게 준다고 합니다.」

  한독은 김구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 민족반역자들은 김구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들 민족 반역자들에게는 김구가 눈엣가시였다. 김구가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추앙을 받는 것이 여간 못마땅한 것이 아니었다. 김구가 국민에게 추앙을 받으면 자신들이 설 땅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던지 김구를 제거할 구실을 만들고 있었다. 이 얼마나 민족에 대한 배반인가? 거기다가 다음번 선거가 다가오고 있는데 자신들이 옹위한 이승만의 인기가 점점 시들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김구의 사상이 의심스럽지 않소?」

「글쎄 말입니다. 이 나라를 위해서도 심히 염려가 됩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 관리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동족들을 괴롭힌 이 자들은 애국자나 된 듯이 한마디씩 지껄였다.

 


  상해임시정부시절에도 공산주의자들과는 밥상도 함께 하지 않은 김구를 일컬어 이들은 공산당과 내통을 하고 있다느니 하면서 제멋대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원래 모략중상에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 김창룡을 비롯한 일제의 앞잡이 들이라 능히 그럴 만했다.

  이들은 만일 이승만이 실각하면 그동안 누리던 호사스런 생활이 남가일봉이 될까봐 지레 겁을 집어 먹은 것이다. 이승만이 실각하면 김구가 집권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들의 과거 민족반역의 죄가 백일하게 드러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김구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이심전심으로 흐르는 시해의 물결이 있었다. 눈빛을 봐도 직감할 수가 있었다.

  8·15해방 후 우리나라는 일대 혼란기를 맞이했다. 한국민주당(한민당)과 김구가 이끄는 한독독립당, 보수정당인 두 정당의 조직분포는 차이가 심했다. 당원수가 조직은 한독당이 월등하게 우세했다. 당원수도 1백만 명이 넘었다. 이외에 대동청년단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있었다. 이 두 개의 단체는 한독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핵심 멤버는 한독당원이었다. 시골 어디를 가나 한독당 간판이 걸려있는 곳에는 두 개의 단체 간판이 함께 걸려있을 정도였다.

  5·10정부 수립을 위한 초대 선거를 앞두고, 한독당과 김구는 남한만의 정부 수립이 국토와 민족의 영원한 분단과 결국 부모형제가 서로 마주 보고 총 뿌리를 겨누며 죽이는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선거를 거부했다. 김구의 정견은 한민족의 소원은 통일된 조국이라고 했다. 그래서 선거당시 한독당에서는 일체 공천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인사들은 대동청년단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공천을 얻어서 무소속으로 출마, 초대 제헌 국회의원으로 79여명이 당선되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서 집권당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이후에도 8·8모임은 계속되었다. 회의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자 신성모가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어른(이승만)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이승만이 직접 지시하지는 않지만 이승만의 뜻을 헤아려서 행동하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김창룡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마디 했다.

「조금 전 각하(신성모)의 말씀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사료됩니다.」

  좌중의 민족반역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매우 지당하신 말씀이요. 역시 김 소령은 선견지명이 있는 애국자가 아닐 수 없소.」

  이 날 밤의 결론은 이렇다. 김구가 공산당과 내통하고 공산당의 자금을 받아서 차기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대통령인 이승만에게 보고하자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 국방부 제4국(대이북정보과) 헌병사령부, 경찰, SIS등 4개 기관은 계속 비슷한 날조된 정보를 경무대의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이에 맞추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 이북에서 물건을 팔기위해 넘어온 상인을 검거, 이 물건이 모두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의 정치자금으로 사용된다는 식의 서류를 꾸몄다. 물론 거짓자백을 상인으로부터 받아놓았다. 이승만은 이런 보고를 듣고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김구가 설마? 그럴 수가 있는가?」

「글쎄올시다. 저희들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증거가 있는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승만은 설마 했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간신배이며 민족반역자들이 세치 혀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이들은 일제시대에도 무고한 양민을 붙잡아 허위자백을 시키고 친일의 공을 가로챈 전력이 있던 자들이었다.

  그 후 팔판동의 아지트에 다시 이들이 모였다. 그들은 지금까지 토의한 것들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으려했다. 국방부 장관 신성모와 김창룡은 경무대 이승만의「생각」을 알려주었다.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군내부에서의 대책을 보고했다. 이때 이제까지 참석치 않았던 서북청년단장 김성주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경찰계통의 간부들도 보였다. 이 당시의 경찰 간부들이란 일제시대의 고등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헌병사령부 관계자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사실에 입각해서 착착 대비책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포병사령관  장은산 중령도 한마디 거들었다.

「일이 많이 진척되었습니다.」

  장은상의 곁에 있던 김지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지웅이란 자는 악한 쪽으로 두뇌가 발달한 인간이었다. 나쁜 일을 도모하기위해서는 그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김지웅은 장은산쪽을 바라보면서 마치 자신이 이 일의 총책임자나 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모든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한독당 내부에 사람을 박아놓고 있습니다. 남은 문제는 자금입니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에 걸 맞는 자금이 필요합니다.」

 


  김구의 암살음모는 이렇게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자금과 언제쯤 김구를 제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김지웅은 무례하게도 김구 선생을 그저 김구라고 호칭했다. 김지웅은 암살 책임자였고 나머지는 협력자였다. 그러니까 계급도 직위도 없는 정치 브로커 김지웅은 국방부 장관위의 선상에 있었던 셈이다.

  김지웅의 성격은 잔인해서 자신의 부인을 말을 듣지 않는다고 인두로 입술을 지져 놓은 인간망종이었다. 이런 성격이기 때문에 그는 선(善)쪽 보다 악(惡)쪽에 가까웠던 것이다.

  김지웅은 한독당 내부에 홍종만이란 프락치를 밀파했다. 홍종만이란 자는 이북에서 넘어온 간첩이라고 소문난 자였다. 김지웅과 같은 고향인 홍종만은 월남하기 전 북한의 정치보위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한때는 해주지구 공작 책임자였다. 북한은 당시 서울에 있는 김성주와 문봉제(文鳳齊)가 서북 청년당을 조직하여, 반공노선을 집행해 나가는데 당황, 홍종만을 앞세워서 이들과 접촉하도록 했다. 따라서 홍종만은 이 계책에 따라서 3·8선을 넘어왔다. 1949년 초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지웅의 머리는 재빠르게 회전되었다. 체포된 홍종만을 석방해 그를 서울 시청 수위로 취직을 시켰다. 그러다가 김지웅은 홍종만을 한독당에 입당시켰다. 정치보위에서 굴러먹은 홍종만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독당에는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백운규(白雲圭)옹이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독립 운동가들이란 평생 동안 돈 벌 기회가 없어선지 병이 들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요즘처럼 독립유공자 유족회가 있어서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대우가 정해져 있지 않은 때였다.

 

 백옹은 김구와 친밀했고, 백옹의 부탁이라면 김구도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던 것은 안 김지웅은 홍종만에게 돈을 주어 백옹을 병원에 입원시키게 했다. 백운규는 몸이 완쾌되자 홍종만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백운규는 홍종만을 은인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나 같은 아무 쓸데도 없는 늙은이를 위해 가족처럼 돌봐주다니 고마운 일이오.」

  홍종만이 면구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선생님 같은 애국지사를 그냥 재버려 둔다면 하늘이 가만있겠습니까?」

「그럼 홍 선생의 소망은 무엇이오?」

「예, 저는 평소에 김구 선생님을 아버님처럼 숭배해왔습니다. 그런데 직접 면담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면담을 하게 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소.」

「그리고 한독당에 입당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어렵지 않소.」

  백운규는 한독당의 조직부장을 맡고 있는 김학규(金學奎)에게 전후사정을 말하고 소개장을 써주어 홍종만을 한독당에 입당하도록 배려해주었다. 홍종만은 이렇게 정식으로 한독당 당원이 되었다.

  한독당에 입당한 홍종만은 간부 당원들의 신임을 얻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 동안 공작비는 김지웅이 대주었다. 홍종만은 한독당의 실세인 김학규에게 친절했다. 김학규를 데리고 고급 음식점에 가서 한턱을 쓰기도 했다.

 


김학규가 잘 가는 음식점은 느티나무 집으로서 소장파 국회의원 김약수의 첩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김약수는 당시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검찰의 사찰대상이었다. 김학규는 이것도 모르고 홍종만의 꾀임에 빠져 구실을 제공하고 있었다. 홍종만은 이 사실을 김지웅에게 모두 보고하고 있었다. 홍종만은 술을 함께 마시면서 은근히 정부에 대해 불평불만을 했으며 김학규의 동정을 떠보기도 했다.

「어떻습니까? 이승만 정권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저는 반대입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런 식이었다. 홍종만은 한독당이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틈틈이 간부 당원들을 데리고 요릿집이나 술집에 가서 한턱을 쓰기도 해 신임을 받아 놓았다.

  어느 날, 홍종만은 안두희를 데리고 당사(堂舍)에 나타나 김학규 부장에게 소개했다.

「선생님, 이 안두희로 말하자면 저와 같은 동향이고 저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정의감이 강할 뿐 아니라 민족의식이 투철해 요즘 보기 드문 청년 장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김구 선생님을 흠모했습니다. 물론 군인은 정당 가입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나 그가 원하니 특별히 배려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학규가 보아하니 안두희의 용모가 야무지고 당돌하게 생겼다. 입술이 얄팍하고 눈이 살모사처럼 옆으로 째어져 있어서 그리 호감은 가지 않았다. 한마디로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러나 홍종만이 데리고 왔기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군인은 법에 의해서 정당에 가입할 수가 없는데....」

「앞으로 우리 한독당의 세력 확장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안소위로 하여금 포병 장교출신자들을 포섭하게 하는데 일역을 맡겨주십시오. 그러자면 당원이 되게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결국 김학규는 홍종만의 감언이설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이후 홍종만과 안두희는 매일같이 김학규와 만나 소위 열성청년당원 모집을 의논했다. 그리고 4얼 13일, 이미 태평로 1가 40의 1, 그들이 살고 있는 피난민 아파트에 신입당원 30여 명을 동원, 홍종만을 위원장으로 하고 안두희는 평당원으로 입당했다. 그러나 안두희의 당원증 발급 때문에 홍종만과 김학규는 의견대립을 벌였다. 김학규는 국방경비대 법에 의해 군인은 당원증을 발급해줄 수 없다고 했다.

「부장님, 군대 내에는 한독당을 지지하는 청년 장교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을 포섭하기위해서는 안 소위에게 당원증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사정은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법은 법이오.」

「안 소위는 신중한 사람입니다. 당원증을 갖고 싶다고 자랑하거나 떠벌리고 다닐 위인이 아닙니다.」

  김학규도 그 말에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원증을 발급해 주었다. 그러나 당원증에다가 비(秘)자를 찍어두었다. 모두가 김지웅의 치밀한 계획에 의거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것이 2개월 후, 김구의 시해사건에 한독당의 내부 갈등에서 빚어진 우발적인 것으로 사건이 합리화되는 동기가 되었다.

 


  비밀당원이 된 안두희는 홍종만과 같이 김학규의 안내로 경교장을 방문, 김구와 직접 면담을 했다. 이때 비서진인 선우진과 이국태와도 친해두었다. 안두희는 김구를 만날 때 군인이 예의상 하는 거수경례를 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안두희는 이렇게 함으로써 예의범절을 아는 보기 드문 청년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가증스런 행위였다. 유달리 사람을 믿는 김구는 이런 안두희에게 호감이 갔던 것이다.

  김구는 육군 소위 안두희의 손을 잡고 그의 한독당 입당을 축해해 주었다.

「자네 같은 사람이 바로 이 나라를 떠맡은 사람이네. 조국의 앞날을 위해 더욱 분투해 주게.」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부대에 들어가서 할 수 있도록 휘호를 하나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김구는 안두희의 계산된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다. 안두희의 계략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달리 붓글씨를 쓰기 좋아한 김구는 즉석에서 두 장의 휘호를 써주었다.

  한편 안두희의 입당이 성공한 것을 안 장은산과 김지웅은 뛸 듯이 기뻐했다. 김지웅은 이 사실을 높은 선에 보고했다. 높은 선이란 신성모 국방장관과 그 외 김창룡, 원용덕 등이었다.

  김지웅의 공식직함은 헌병사령부 특수부대 문관이라는 것과, 지프차 한 대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신성모를 뒤에서 조종하는 막후 실력자였다.

  포병사령관 장은산은 안두희를 포병사령관실 근무 연락장교로 발령했고, 권총 한 자루와 지프차, 그리고 허 씨 성을 가진 운전사를 붙여 주었다.

 


  육군 말단 소위에게 지프차 한 대와 운전사를 배치시켜 준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 민족 반역자들에게는 그것이 가능했다.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나라의 법도 마음대로 뜯어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조치는 안두희를 편안하게 해주기위한 상부의 배려였다.

  한편 김지웅은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했다. 홍종만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비롯해 김성주 밑에 있는 서북청년당 당원 가운데 힘깨나 쓰는 한국용, 이춘익, 독고록성, 정칙태, 한국상, 한봉수 등 6명을 관리했다.

  장은산 역시 안두희와 함께 행동을 할 수 있는 부하들을 물색했다. 오병순, 한경일, 강창걸, 박윤근 등 11명이 관리 대상이었다. 장은산은 이들에게 술도 사주고 용돈도 푸짐하게 주었다.

  이들은 모두 합쳐 12명이고 총 책임자는 김지웅이었다. 이들은 한가한 시간에 정릉 뒷산에서 사격 연습을 하는 등 군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이탈행위를 서슴지 않고 했다.

  김지웅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음모를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다만 김구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하기위해 김구를 음해하는 말을 넌지시 했다.

「김구 선생이 중국에 있는 자기 양아들인 김모 육군소장을 시켜 중국의 모택동과 손을 잡고 남한을 적화하려는 편지를 중공에  보냈는데 큰일이야.」

「정말입니까?」

「확실한 소식통이야.」

「큰일 났네요.」

「앞날이 심히 걱정되는군.」

 


  김지웅은 마치 자신이 큰 애국자나 된 듯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젊은이들은 김구에게 치를 떨었다.

「김구 선생을 평소에 존경했는데, 실망이 크군.」

  반공(反共)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청년들은 급기야 김구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젊은이들이란 이성(理性)보다도 일시적인 감정에 치우치게 마련이다. 김지웅이 김구에 대해 나쁜 이야기만 하니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홍종만의 친구 가운데 문학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가 좌익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 시경에 구속되었다. 홍종만은 친구의 석방을 김지웅에게 부탁했다. 김지웅은 홍종만에게

「그런 일은 염려 말게. 나를 따라오게.」

하며 홍종만을 데리고 서울시경 국장 김태선(金泰善)을 찾아갔다. 김태선 역시 친일파였고 김지웅과 색이 같은 사람이었다. 김태선은 김지웅의 청을 받아들여 홍종만의 친구를 다음날 석방시켰다.

  홍종만은 김지웅이 정계의 거물인 것을 눈치 채고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때부터 김지웅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게 되었다. 김지웅을 알게 된 것이 큰 축복이나 된 듯이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4월 29일,

이날은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백천(白川) 대장을 비롯한 왜놈 장교등을 폭살시킨 기념이기도 했다.

김구는 경교장에서 20여 년 전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참으로 윤 의사는 훌륭한 사람이다. 아까운 젊은이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