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57. 민족반역자 김지웅(金志雄)

오늘의 쉼터 2013. 3. 31. 09:10

57. 민족반역자 김지웅(金志雄)

 


  김구의 암살을 청부 맡은 김지웅이란 자는 친일파(親日派)라기 보다는 민족반역자였다.

이른바 친일파라는 어휘는 일본과 친하다는 뜻인데 친하다는 것을 떠나 간과 쓸개까지

모두 바쳐 그 대가를 받아 결국 나라를 팔아먹는데 한몫 한 자들은 친일파의 개념을 넘어서

민족 반역자라고 정의할 수가 있겠다.

이완용을 비롯한 송병준 등 을사오적을 친일파라고 하지 않고 민족 반역자,

또는 매국노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김지웅(金志雄), 그는 1988년 죽었다. 김구 암살사건을 청부 맡은 그는 성격이 매우 잔인하고

교활하며 괴팍한 인간이었다.

고향은 평북 의주,  백범을 시해한 안두희, 홍종만 등과 같은 연고지 출신이었다. 그

곳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만주의 안동(安東)에서 중학교를 마쳤다. 

마친 그는 중국 북양(北陽) 대학에 다니다가 스물 한 살 때 그만 두었다.

그 이듬해 서북(西北)군관학교에서 1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군관학교를 마친 그는 중국말을 잘 하는 것을 기화로 이름을 아예 중국식으로 바꿨다.

왕금산(汪金山)이 그것이다.

김지웅은 29세대 중국 293로군 군대에 들어가 특무대 소위로 근무, 1937년 대위로 제대했다.

 


  그는 중국군 정보부에 근무하면서  일본에 정보를 팔아먹은 이중첩자가 되었다.

그 뒤 친일 화북(華北)정권이 수립되자 중국군 장교 몇 명과 함께 친일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했으며 화북 치안군을 만드는 데 앞장서서 중국인들을 괴롭혔다.

그는 또 만주 사변이 터진 다음 중국 남경(南京)에 왕정위(汪精衛) 친일 정권이 들어서자

친일정권의 중요 직에 채용되었다.

  해방이 되자 김지웅은 제4방면 군이 국부정권의 제 5고군으로 편입되어 대령으로 강등되었다.

그는 중공군과 6개월 동안 싸우다가 장개석 정부를 따라서 대만으로 가던 중 배가 태풍을 만나

만주의 천진에 닿았다. 김지웅은 중국군 준장으로 천진에 상륙했는데

이때가 1946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는 과거의 이와 같은 행적을 감추고 고향인 의주에 갔으나 행색이 탄로나 만주로 도망했다. 

김지웅은 만주 심양 등을 방황하다가 다시 귀국, 월남했다.

서울에 온 그는 한동안 무역회사 간판을 달고 실업가로 행세했으나 사실은 아편 밀매였다.

중구에 있을 때 친해둔 아편 장수와 밀거래를 한 것이다.

  그 무렵 김창룡 소령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고향 친구인 서북청년단 단장 김성주를 만나게 되었다.

다시 김성주를 통해 신성모(申性模)국방장관을 사귀게 되었으며 그의 개인 고문으로 발탁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김준연을 비롯한 정계의 굵직한 인물들과 사귀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8·8구락부의 모임에도 얼굴을 내비치게 되었다.

그럼 8·8구락부란 무엇인가?

여기에 바로 김구 암살의 실마리가 있는 것이다.